진보적 민주주의 어떻게 볼 것인가

1. 왜 진보적 민주주의를 재조명해야 하나?
2. 해방정국의 건국이념으로서 진보적 민주주의
1) 인민전선과 인민민주주의
2) 해방정국의 건국이념으로서 진보적 민주주의
(1) 진보적 민주주의가 논의되는 국제정세와 한반도
(2) 여운형
(3) 박헌영
(4) 김일성 주석
(5)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백남운의 신민주주의
3. 분단국가와 진보적 민주주의
1) 조봉암과 진보당의 사회적 민주주의
2)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3) 민중당의 민중민주주의
4. 어떤 진보적 민주주의를 계승할 것인가?
1) 진보적 민주주의의 개념과 가치
(1) 진보적 민주주의의 개념적 요소
(2) 자주와 평등, 민중정권, 연대연합
5. 결론 : 민중 주체의 진보적 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참고자료>
건국동맹,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언과 강령
인민공화국의 선언과 강령
소련군과 미군의 포고령 1
여운형의 인민당 신념(194512)
여운형의 민주정당활동의 노선(1946)
박헌영의 8월테제(19459)
박헌영의 진보적 민주주의 기빨 밑에서
박헌영의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194712)
조봉암의 진보당 강령
 
 

 1. 왜 진보적 민주주의를 재조명해야 하나?
 
민주노동당이 자신의 강령에서 사회주의와 관련된 부분을 전면적으로 삭제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의 기조로 삼았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으며, 이러한 민주노동당의 행보를 둘러싸고 내부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진보적(進步的, progressive)이라는 말을 보통명사로서 보면 점진적으로 개선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선이란 특정한 목표를 향해 단계적으로 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도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를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또한 현재의 특정한 상태와 비교하여 막연하나마 다소 양호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특정한 목표를 제시하지 않은 채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 봉건제도, 파쇼제도, 보수적 민주주의 제도보다 더 좋은 제도라는 뜻이 가능하다. 이와 달리 급진적(急進的)은 보통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radical(up root, 뿌리를 뽑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반면 진보적 민주주의를 고유명사로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과거 고유명사로 사용된 진보적 민주주의의 개념을 빌려오거나 그와 별개로 새로운 개념적 표지를 지니는 것으로서 제시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새로운 강령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그 기조로 삼고 그에 따라 각론이 도출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특정한 이념이나 체제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이 일제로부터 해방 전후 또한 군사독재 시절의 다양한 진보적 민주주의의 가치를 계승하고자 함은 높이 평가할만하나 다음과 같은 논쟁지점을 유발했다.
 
첫째는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는 특정한 이념과 체제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보여지나, 그 내용에 있어 역사적 배경과 개념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둘째 진보적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이념과 체제로서 규정하고 그 대신 사회주의를 삭제하면서 양자가 대립되는 지형을 만들었다.
 
셋째는 진보대통합을 앞두고 시한부 강령을 굳이 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 강령의 기조를 바꾸려면 좀 더 광범위한 토론이 필요했던 점,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상당수 당원들이 반대하는 강령개정을 밀어붙여 사상적 단결과 통일전선의 가치를 훼손한 점을 간과하고, 당대회에서 반대견해를 성실하게 설득하는 진정성을 보이지 않은 채 다수결로 처리했다.
 
따라서 우리 역사상 존재했던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과 그 배경을 밝히고, 특히 사회주의와 관계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강령개정 방식의 오류를 이후 진보대통합 과정에서 되풀이 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
 
 
 
 
 
 
 
 
 
 
 
 
 
 
 
 
 
 
 
 
 
 
 
2. 해방정국의 건국이념으로서 진보적 민주주의
 
1) 인민전선과 인민민주주의
 
코리아반도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2차 대전부터 남북이 각각 정부를 구성했던 시기까지 주로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 주석이 공식적으로 채택했던 정당의 강령 혹은 건국이념이다. 이러한 진보적 민주주의의 국제적 기원은 소련 사회주의, 서구의 제국주의, 파쇼제국주의가 각축을 벌렸던 1차 대전부터 2차대전까지의 제3인터내셔날 즉 코민테른 7차 대회의 인민전선노선이다. 사회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의 연대연합을 강조하는 인민전선노선의 기원은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구분하여 전자의 경우 사회주의자와 부르조아가 협력할 수 있다는 러시아혁명의 경험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차원에서 채택했던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 주석이 해방 전후에 코민테른이라는 국제공산당,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자유민주주의, 파쇼전체주의의 국제적인 3자 구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는 중도세력(부르조아)과 연합하여 1905년 제정 러시아의 폭압정치를 입헌군주제로 전환시켰다. 19172월에는 제정러시아가 중도 성향의 공화정으로 전환됐으며, 11월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 이처럼 사회주의자들은 봉건제와 같은 반민주 정치체제에서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정권을 잡을 수 없을 때는 민주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중도세력과 일시적으로 연합한다.
 
특히 봉건제와 파쇼체제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준비역량을 강화하는 시기를 사회주의 혁명과 구분하여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이라고 한다. 즉 중도세력과의 연대연합의 문제는 민주주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일시적 전술연합과 2단계 사회주의혁명론에 근거한 중장기적인 전략연대로 구분된다.
 
20세기 들어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은 반민주적인 파쇼체제로 나아간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시민혁명을 겪지 않은 이들 나라에서 봉건지배세력들이 민족통일전쟁 과정에서 정치경제적 지배권을 강화하며 자본주의 세력으로 전환된다. 이들은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취약한 국내 자본주의 기반을 단기간에 성장시켰다.
 
나아가 영국, 프랑스, 미국과 같은 선발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획득경쟁에 나선다. 이들은 군부에 의한 일상적인 계엄상태로 볼 수 있는 반민주적인 전시자본주의 동원체제를 구축했다.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일본의 천황군국주의 등이 이러한 파쇼체제에 해당한다.
 
1930년대 이러한 파쇼체제를 지향하는 정치세력들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등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1930년대의 국제정세가 제1차 대전과 다른 점은 역사상 최초로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라 성립하고, 각 나라에서 사회주의 세력들이 성장하여 중요한 국내외적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스페인의 파쇼 세력들이 민주주의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듯이, 각국의 파쇼 세력들은 민주적 기본권을 부정하면서 선거를 통해, 혹은 무력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에 각국의 사회주의 세력은 급부상하고 있는 파쇼세력을 견제하고자 일시적으로 중도세력과 연합할 필요가 높아졌다.
 
또한 이미 1차 대전에서 독일의 침공을 받은 바 있는 소련의 입장에서도 파쇼의 종주국인 독일의 국제적 진출을 봉쇄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국제적인 반파쇼연대는 중요한 사항이었다.
 
이에 국제사회주의 조직인 제3 인터내셔날, 즉 코민테른 7차 대회(1935)에서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중도세력과 일시적으로 연합하여 파쇼세력의 정치적 진출을 봉쇄하는 연대연합 전술을 채택했는데, 이것이 인민전선이다. 인민전선은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사회주의 세력과 중도세력의 선거연합, 혹은 연립정부로 나타났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파쇼체제가 무너지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코민테른의 반파쇼 인민전선이 전제했던 국제정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사회주의 소련과 서구의 제국주의의 협력관계는 코민테른의 종식과 함께 끝났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각국 내에서 사회주의 정당과 자유민주주의 정당의 관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냉전구도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국내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사회주의 정당은 사회주의 소련과의 입장을 분명히 할 것에 대한 국내의 압력에 직면했다. 대부분의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사회주의 정당은 사회주의 소련에 대한 입장으로 분열했으며, 서구 제국주의 의회 내의 영향력을 중시했던 일부 사회주의 정당들은 소련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 무력혁명, 일국일당과 같은 사회주의 원칙을 폐기하거나 수정했다.
 
반면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에서는 인민전선의 문제가 식민지 해방과 사회주의 2단계 혁명과 연관하여 보다 중장기적인 전략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회주의자들은 식민지 정권의 파쇼적 폭압정치로부터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식민지가 해방될 때까지 상당기간 식민지 해방을 지향하는 다양한 세력들과 연대연합을 해야 했다.
 
특히 독일과 일본의 식민지에 있어 파쇼적 제국주의에 대한 연대투쟁이 국제적으로 요구됐다. 사회주의자들은 중도세력과 함께 일단 식민지해방을 달성하고, 식민지해방투쟁의 과정에서 사회주의 준비역량을 축적하여 식민지 해방 이후에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고자했다. 다양한 세력과 함께 식민지 해방투쟁을 전개하면서 사회주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내세운 민주주의가 바로 인민민주주의이다.
 
독일의 식민지였던 동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인민민주주의로 수용했으며, 제국주의의 반식민지였던 중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신민주주의로 수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식민지에서의 단계적 사회주의혁명론으로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로 정립된다. 인민민주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전략으로서 1단계 혁명은 인민정부의 수립이며, 2단계는 사회주의정부 수립이다. 1단계인 인민민주주의 단계에서는 다당제와 일부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허용된다.
 
 
2) 해방정국의 건국이념으로서 진보적 민주주의
 
(1) 진보적 민주주의가 논의되는 국제정세와 한반도
 
파쇼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려는 코민테른의 시도는 각 국가 내에서 사회주의자와 중도세력의 연립정부인 인민전선을 출범시키는 등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스페인 내전 결과 프랑코와 같은 군부파쇼가 집권하는 것을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방치했으며, 나아가 독일, 일본 같은 파쇼국가의 성장과 침공을 저지하지 못했다.
 
특히 독일이 강력하게 무장하자 1차 대전 당시 독일에 침공당한 바 있는 소련은 독일의 재침공을 우려하여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맺는다. 소련이 독일과 단독으로 불가침조약을 맺음으로써 서구 제국주의와 소련이 시도했던 국제적인 반파쇼 연대는 균열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 소련의 입장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이나 독일, 일본이나 모두 제국주의 세력이었으므로 자신들이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들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피하고자했다.
 
독소불가침조약 직후 독일은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고 바로 서부 유럽으로 진격하여 프랑스를 점령했다. 영국을 제외한 서부유럽을 장악한 독일은 결국 1941년에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에게 침략당한 소련은 2차 대전에 참전할 수밖에 없었고, 당장 소련의 영토 보전을 위해 이미 독일과 전쟁을 수행 중인 영국, 미국과 연합군을 형성한다.
 
소련은 2차 대전을 반파쇼 전쟁으로 규정하고, 민주적인 제국주의 국가와 연대하여 반민주적인 파쇼제국주의 국가를 타도한다는 식으로 자본주의 제국주의 군대와의 연합작전을 합리화했다. 나아가 소련은 서구 제국주의의 자유민주주의는 파쇼정치에 비해 진보적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반파쇼투쟁을 위해 모든 진보적 세력이 협력해야 한다는 국제협력노선을 채택한다.
 
이 시기에 국내외 사회주의자들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사회주의 소련과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을 파쇼제국주의에 대조하여 민주적 권리가 보장된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언급했다.
 
2차 대전 종전 당시 사회주의 소련과 서구 제국주의의 국제협조는 조선반도에서 미소협조노선으로 구체화됐다. 일제가 패망할 19458월 당시 독일이 이미 연합군에 항복했으며,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반도의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고, 이북은 소련이 점령할 것이 분명한 상태에서 조선의 해방은 미소의 의중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선반도의 분단을 막고 통일을 이루려면 남북을 점령한 미소와의 협조가 매우 중요했다. 조선의 정치인들은 조선민중의 독자적인 역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러한 국제정세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2차 대전을 바라보는 관점은 기본적으로 1935년 인민전선의 시각이다. 2차대전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전쟁이지만,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세력이 수행한 반파시즘적 민주주의 전쟁의 성격이 있다. 따라서 중도에서 사회주의에 이르는 조선의 정치인들은 중립적인 건국관을 제시하여 미국과 소련 양측으로부터 독립과 통일의 동의를 얻으려고 했다.
 
해방 직후 박헌영은 공산당을 통합했으며, 여운형은 좌우익을 규합하여 민족연합정권의 성격을 지니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건설했다. 국내 우익세력들은 한국 민주당으로 통합됐으며, 이들은 중경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또한 임정계열의 한국독립당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승만이 귀국했으며, 북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 부대가 귀국했다.
 
 
(2) 여운형
 
1943년 출소한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직감하고 조선민족해방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든 후 이를 1944년 조선건국동맹으로 발전시킨다. 또한 건국동맹의 대중조직으로서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된 농민동맹을 만든다. 해방 전 건국동맹의 숫자는 7만여명에 이르는 등 국내 최대 정치조직으로 성장한다.
 
건국동맹은 비합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할 뿐 아니라 무장조직을 설치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19458월 들어 조선총독부는 재조선 일본인의 신변보호를 위해 유력한 조선정치인들과 협상을 전개했는데, 우익인사 송진우 등이 이를 거절했다. 다급해진 일제는 15일 아침 엔도 정무총감을 보내 여운형에게 치안유지에 관한 협력을 요청했다.
 
이미 건국동맹을 구성하여 해방을 준비하던 여운형은 5가지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를 수락했다. 이에 여운형은 건국동맹, 농민동맹, 안재홍 중심의 중도우익, 조만식, 박헌영, 허헌 등 좌우의 다양한 세력을 모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건준은 민족연합정권을 수립하려는 모태로서의 지위를 지닌다. 다만 송진우 세력은 상해 임시정부를 명분으로 이에 대한 참가를 거부했다. 건준의 선언문에서 진보적 민주주의가 등장한다.
 
건준은 스스로를 우리 민족의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을 조직하기 위한 국가건설기관으로 규정하고 건준은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세력이 집결하여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할 것을 밝히고 있다. 즉 진보적 민주주의는 건준의 건국이념이다. 조선의 완전한 독립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과도적 정권임을 선언한다. 이에 따라 건준은 인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독립국가를 선포하는 준비절차에 들어간다.
 
8월 말 미군의 주둔이 확실시되자 건준은 96일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주석에 지명된 이승만이 주석 취임을 거부하는 등 우익인사들이 인민공화국에 대한 반대를 표명한다. 96일 여운형은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임시의장을 맡아 조선인민공화국 조직법안을 선출하는 등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박헌영, 허헌 등과 함께 주도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선언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외래세력과 반민주주의적인 반동적인 모든 세력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할 것을 건국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여기서 해방 전후에 중도진영부터 좌파진영까지 폭넓게 인용한 진정한 민주주의 혹은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해방 전후 모든 정치세력들은 민주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주장하며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 혹은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표방했다.
 
이들은 다른 정치세력들이 주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와 구별하여 자신들이 진정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해방공간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혹은 진정한 민주주의는 어떤 특정세력의 민주주의가 아니었으며, 공통적인 개념은 반봉건, 반파쇼, 정치적 기본권보장, 자본주의 모순 비판 등이었다.
 
다만 자본주의 모순 비판에 있어서는 박헌영의 자본주의 부정과 사회주의 지향에서부터 자본주의를 인정하되 그 폐해를 극복하자는 주장까지 다양하게 분포했다. 여운형은 과거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해방직후에는 공산당과 일정부분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자본주의 극복을 목표로 삼았지만 조선공산당에 비해 사회주의적 지향이 뚜렷하지 않았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194510월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화했다. 좌우대결의 해방정국에서 온건한 사회주의자로서 민족의 통합을 주장했던 여운형의 입장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은 점차 조선공산당에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이에 여운형은 451112일 건국동맹, 인민동지회 등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다.
 
조선인민당은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전 인민의 완전한 해방을 기본이념으로 하면서 조선의 완전독립과 민주주의 실현을 현실적인 과제로 제시했다. 여운형은 인민당의 신념이라는 연설을 통해 인민당을 진보적 민주주의 대중정당으로 규정하는 등 진보적 민주주의를 당의 강령 차원에서 수용했다. 인민당의 강령을 보면 진정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등 진정한과 진보적인 표현은 서로 대체할 수 있는 의미로 사용됐다.
 
45년 말과 46년에 걸쳐 미소의 긴장이 격화되고, 미군이 사회주의를 탄압했으며, 북에서는 북조선노동당이 창당됐다. 이후 인민당은 미군정의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공산당과 신민당과의 합당논의에 들어가나, 미군의 탄압과 박헌영의 월북으로 일대 혼란에 휩싸이며, 사회노동당 창당, 근로인민당의 창당 등으로 이어진다.
 
19468월 조선인민당과 공산당, 신민당의 합당에 즈음하여 여운형이 작성한 민주정당활동노선에는 여운형의 변화된 정세관과 정치노선이 담겨져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 대신 인민적 민주주의 혹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사용하고 있으며,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본다는 호감의 표현은 찾을 수 없고, 오히려 반동영수들이 연합국의 권위를 빌려 일제적 의식과 기술을 동원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 대한 항쟁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 문건은 연합군에 대해 조선의 자주적인 독립을 인정하고 원조한다는 원래의 3상회의의 목적을 이행하라고 주장하면서 정치 경제 군사적 지배의 움직임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 계열의 극단적인 주장이 좌우대립을 격화하고 반동을 심화시킨다는 점을 지적하고 자제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477월 여운형이 암살을 당하자 근로인민당은 점차 와해됐으며, 그와 함께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현실 정치에서 실현되지 못했다.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비록 역사적으로 좌절됐지만, 오늘날의 이남 진보정당의 입장에서 보면 박헌영이나 김일성 주석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비해 더 많은 실천적인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박헌영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비해 민족자주의 입장을 강조했다. 박헌영은 해방직후 조선의 완전독립에 있어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과도하게 평가했다. 이에 비해 여운형은 해방 전에 건국동맹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민족구성원들을 규합하여 자주적인 건국을 준비했다.
 
여운형은 미소의 일방에 치우치지 않고 이들을 조선으로부터 하루빨리 철수하도록 하는 것을 당면의 목표로 삼았다. 여운형은 미소의 조선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인정하는 현실에서 신탁통치를 사실상 찬성했지만 신탁통치라는 용어에 반대하면서 국제정치의 현실을 수용한 단계적 국가건설을 주장했다.
 
둘째,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경제적 평등을 강조하는 한편,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되 점진적인 방안을 채택하여 민생안정과 민족의 단결을 유지하고자 했다. 여운형의 사회주의적 단계적 지향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여운형은 일본제국주의자와 친일세력의 토지를 무상몰수하고 중요기관의 국유화에 찬성했지만, 박헌영과 같이 대지주에 대한 무상몰수와 농민에 대한 무상분배와 같은 급진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셋째,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박헌영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비해 좀 더 폭넓은 연대연합을 강조한다. 그는 친일세력과 반민족세력, 반민주파쇼세력을 제외한 전 민족의 단결을 강조했다. 반면 박헌영은 노동자 농민의 지도 중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혁명의 주체에 도시소시민과 인텔리겐차를 포함시켰지만 일체의 부르조아계급을 배척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노동자와 농민의 지도중심성을 인정하되 양심적인 자본가와 지주까지 포함하는 대중정당을 강조하는 등 박헌영보다 좀 더 넓은 계층의 단결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여운형은 건국동맹과 건준을 발족시키면서 송진우와 같은 중간세력까지 포괄하고자 노력했다. 다양한 형태의 근로대중을 포괄하고자 했던 여운형의 노력은 근로인민당이라는 당명에서도 확인된다.
 
넷째, 여운형은 오늘날의 진보적 대중정당에도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주의에 대한 유연한 입장을 견지했다. 여운형은 사회주의 자체를 절대화하기보다는 민족해방과 독립국가 건설의 관점에서 받아들였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를 교조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사회주의 실현경로에 있어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했다. 여운형은 서구유럽의 사례를 지적하며 의회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 실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3) 박헌영
 
지하활동을 하던 박헌영은 해방이 되자 818일 상경하여 경성콤그룹 간부회의를 주재하고, 소련영사관과 접촉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문제를 협의하였다. 8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자신이 작성한 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의 명의로 채택하였다.
 
이 문서가 바로 8월 테제로 불리는 최초의 문서이다. 911일 박헌영은 장안파 다수를 자신의 조직과 통합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박헌영은 총비서로서 920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채택하였다. 이것이 8월 테제라 불리는 두번째 문건이다.
 
조선공산당은 이들 문건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건국노선으로 천명했는데, 이에 따르면 현단계 조선혁명의 성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며, 혁명적 민주주의 인민정부, 즉 인민공화국이 이러한 혁명과제를 달성한다. 인민정부는 노동자·농민이 중심이 되고, 도시소시민·인텔리겐치아가 참여하는 민족통일전선정부였다.
 
조선공산당은 이미 1928년 제3차 당대회 결의문을 통해 소비에트 공화국과 부르조아 공화국을 모두 배척하고 인민공화국을 건국상으로 확인한 바 있다. 따라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체제 사이의 과도기 정부형태였다.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이 프로레타리아혁명으로 전환된다는 내용이 다른 중도진영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와 구별되는 점이다.
 
또한 진보적 민주주의의는 중도세력과 연대연합할 수 있는 민족통일전선의 성격을 지녔다. 조선공산당과 박헌영은 진보란 인민의 기본권이 보장되고 생활이 급진적으로 개선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핵심은 조선의 완전독립과 토지혁명이었으며, 그외 다음과 같은 10가지 사항을 제시했다.
 
이러한 점에서8월 테제가 제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은 자본주의국가 수립이 아니라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하는 데 목표를 두었지만, 그 구체적인 과제는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도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다.
 
언론·출판·결사·가두행진·파업의 자유의 권리를 완전히 얻어야 한다. 8시간노동제의 실시를 실행하여야 하며 일반근로대중생활의 급진적 개선을 위한 모든 시설과 수단을 실시하게 하기 위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일본제국주의자 소유의 모든 토지·사원·산림·광산·공장·항만·운수기관·전신·은행 등 일체 재산을 보상을 주지 않고 몰수하여 국유화할 것이다. 국가부담에 의한 의무교육을 실시할 것, 여자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지위를 향상할 것 단일누진세금제실시,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여 국민의용병제를 실시할 것, 18세 이상의 남녀평등 선거·피선거권을 부여할 것, 조선의 완전독립을 위협하는 것과 같은 외국세력의 일체행위를 절대배격할 것.
진보적 민주주의가 대두된 배경은 조선혁명의 성격을 결정짓는 객관적 조건으로서 미소의 협조노선이다. 따라서8월 테제는 미국과 소련의 정치이념이 공유하는 부분, 달리 말하면 미국도 동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현 단계 조선혁명의 국가건설 이념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노선을 추구하였다.
 
8월 테제, 미국을진보적 민주주의국가로 규정한 것은 남북 공산주의자들의 대미관과 일치한다. 한국 내의 다른 사회주의 세력들도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하였다.
 
소련의 영향권에 있었던 이북의 조선공산당 역시 미국 등 서구 제국주의 국가를 민주적인 제국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했다. 1945915일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확대위원회가 현준혁에 의해 주재됐다. 이 회의에서 정치진로에 관하여라는 문건이 채택됐다.
 
첫 번째 사항에 따르면 국제 문제에 관해서는 강령에서 미국과 영국의 진보성을 분명히 인정하고, 미국, 영국, 중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취지를 명기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조선혁명의 현 단계는 자본혁명단계이므로 친일세력을 철저하게 배제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본조건을 준비할 것을 결의했다. 이는 소련의 인민전선노선과 국제협조노선을 반영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이러한 입장은 1946726일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에 시달한 신전술이라는 문건에 의해 폐기된다. 신전술에서 박헌영은 트루먼의 정책을 제국주의 반동노선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인 반민운동을 주장하고 있으며, 북조선 식 개혁을 남조선에서도 무조건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12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 민전이 발표한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문건을 보면 급변한 국내외 정세를 반영하여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은 1945년과 완전히 정반대로 나타난다. 미국과 소련은 독일과 조선반도를 분할 점령하면서 대립전선을 형성했으며, 양국의 긴장은 급격히 높아져 미소냉전시대로 돌입한다.
 
1947년 미국이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은 미소국제협조노선을 폐기하고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를 봉쇄하는 한편, 3세계에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세를 반영하여 47년 문건에서는 미국을 반민주적인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국내의 친일세력과 반민주세력을 지원하여 반민주적, 반민족적 정권을 분단정권을 세워 조선반도의 남쪽을 군사기지로 영원히 점령하려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외국의 세력을 지칭하는 의미로서 단 한 차례 등장할 뿐이다. 이 문건에서는 여전히 인민정권의 수립을 강조하지만, 여기서의 인민정권은 진보적 민주주의보다는 사회주의적 지향을 분명히 하는 친소련적인 인민민주주의로 해석된다.
 
이 문건은 미 군정청을 반민주적인 제국주의 군대로 인식하고 이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반민주적인 우익권력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대중투쟁을 요구하고 있다. 즉 조선공산당과 박헌영은 미국과 소련 모두의 동의를 받는 독립국가와 통일국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을 사실상 폐기하고 사회주의 일반원칙에 따라 인민민주주의를 주창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헌영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2차 대전 직후의 국제정세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판단했다. 미국과 소련의 협조노선이 세계지배권과 체제경쟁으로 파탄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그 연장선에서 남조선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미군청의 탄압을 대비하지 못했다. 따라서 애초부터 미국과 소련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절충적인 정부형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한계는 박헌영뿐만 아니라 해방 전후의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대부분의 인사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낙관적인 정세관이 그 당시 정세에 의해 강요된 측면이 있으나 미군청의 언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소련의 조선반도 이북에 대한 점령이 확실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당면한 대조선반도 정책은 소련에 의한 한국 단독지배의 저지였다. 이러한 전략이 현실적으로 분단정책으로 귀결된다는 점은 38도선의 설정에서도 확인된다.
 
194597일 하지 중장을 인천에 상륙시킨 극동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포고 1호를 공표했다. 이에 따르면 조선반도의 점유는 전승국으로서 점령이며, 국내의 모든 공권력은 군정청에 속한다면 건준이나 인공, 임시정부 등을 부정했다.
 
4510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남조선에서는 미군청이 유일한 정부라고 밝히고 정부를 참칭하는 다른 모든 기관을 불법화하며 해산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계열은 미군청이 노골적인 탄압을 하기 전까지는 미군청에 대한 협력을 주장했는데, 소련의 협력노선과 당시 남조선 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해도 올바른 정세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
 
둘째, 조선의 독립과 통일국가의 건설에서 민족과 민중의 자주적 역량을 주목하지 못한 채 미국과 소련의 협상에 의존했다.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전선을 조직했던 여운형이나, 독자적인 무장역량을 성장시켰던 김일성 주석에 비해 박헌영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외세의존적인 성향이 강했다.
 
셋째, 민족해방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 있어 지도원칙을 분명히 세우고 대중들을 조직해내는 연대연합의 통일전선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박헌영의 정파적 활동은 조선공산당의 분열에 일정한 책임이 있으며, 그 결과 조선공산당을 통일전선의 지도중심으로 세우지 못했다. 또한 여운형이나 김일성 주석이 평화적 방법이나 무력적 방법 양자를 고려하면서 광범위한 민족통일전선체을 형성하는데 일정한 성과를 냈지만, 박헌영의 활동은 써클적 수준을 크게 넘지 못했다.
 
넷째, 이러한 비과학적 정세관, 외세의존적 행태, 고립적 사업방식은 미군청의 탄압에 직면하여 조급한 봉기주의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 사회주의인사와 진보적 대중들이 희생당했다. 47년 문건에서 보듯이 박헌영은 미소 대립의 시기에 남조선에서 친소련적인 태도를 분명히 하면서 김구와 김규식 등 중간파의 타도를 주장하고 대중들의 봉기를 주장했지만, 자신과 핵심인사들이 월북함에 따라 산발적인 봉기는 분쇄된 채 남조선의 사회주의는 사실상 붕괴된다.
 
 
(4) 김일성 주석
 
김일성 주석은 1932년 조선인민혁명군의 전신인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운동을 전개해왔다. 김일성 주석은 중일전쟁과 2차대전의 발발로 민주와 백두산지역에서의 유격대활동이 어려워지자 1940년대 소련으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들어갔다.
 
소련에서 김일성부대는 형식상 소련군 밑에 있었지만 독립부대로서 조선의 해방에 대비하여 국내공작과 군사훈련, 정부수립을 위한 소련측과 협상에 주력했다. 김일성 부대의 조선공작단 일부는 194588일 소련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석했으며, 김일성 주석을 포함하여 나머지 부대는 918일 원산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
 
김일성 주석과 그 부대는 오랜 무장투쟁과 소련에 의한 체계적인 정치훈련으로 인해 다른 독립운동가와 달리 인적 물적 역량을 보유했으며, 소련의 지원아래 북조선의 정권을 장악해나갔다. 김일성 주석 역시 다른 사회주의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건국노선으로 수용했으며, 194510월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라는 강연문건을 발표한다.
 
김일성 주석의 정세관과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은 남조선의 사회주의세력들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일성 주석은 이 문건에서 자주를 진보적 민주주의의 핵심기조로 제시하고 있다. 김 주석은 일본이 미소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결과 조선이 해방됐지만, 조선의 완전한 해방은 조선민중의 힘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외세에 나라의 독립을 의존하는 정치세력을 사대주의노선으로 비판하고 있다. 즉 미소의 협력노선을 현실로 인정하나 조선의 독립에 있어 미소의 협력보다는 민중의 자주적인 노력을 더 강조했다. 이는 김일성 주석이 독자적인 무력역량을 보유하고, 이미 소련과 일정한 사전협상이 진행된 조건에서 나름대로의 건국주도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사회를 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당면 과제로 삼고 있으나, 박헌영과 달리 사회주의 혁명의 지향점을 명시하지 않았다. 다만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혁명을 지향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다른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족통일전선으로서 인민정부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인민정부의 민주주의 원칙으로서 민주주의 중앙집권을 매우 강조하는데, 이는 사회주의 민주주의 원칙인 민주집중제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할 때 김일성 주석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그 단어만 같을 뿐 박헌영이나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다른 정세와 특징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제국주의 식민지의 사회주의 전략인 식민지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면서 독립과 통일을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여 자주성을 본질적 요소로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 이후의 김일성 주석이 수립한 정부는 미국도 동의하고, 소련도 동의하는 중립적인 의미의 진보적 민주주의 정부라기보다는 친소적이며 사회주의 2단계 혁명에 입각한 인민민주주의 정부였다.
 
김일성 주석은 특권폐지, 보통선거권, 공무담임권,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 거주의 자유를 강조하는 등 인민대중에게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인민들의 물질문화생활을 높이고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행복한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자립경제와 부강한 국가의 건설을 건국 목표로 내세웠다.
 
이밖에도 고용보장과 노동기본권의 보장, 높은 소작료와 고리대의 근절, 중소상공인의 보호, 공정한 세금제도, 학업과 과학의 보장, 인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국내평화와 국제평화, 민족문화 발달을 주장했다.
 
김일성 주석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국제정세를 냉정하게 진단하고 민족의 자주적 역량을 강조한 점이 매우 시사적이다. 그러나 분단, 이념대립, 이남의 냉전이데올로기 등을 종합하여 고려할 때, 이남의 합법적인 진보적 대중정당은 오늘날 이남의 정세가 다르고 정당의 지위와 역할, 역량이 그 당시의 사회주의정당과 다르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차원에서 계승할 수 없다.
 
 
(5)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백남운의 신민주주의
 
삼균주의는 차별을 극복하고 균등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립을 지양하는 한편, 분열된 민족해방운동진영을 통합하고 새로운 국가상을 창출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배경으로 성립하였다.
 
삼균주의는 혁명 수단으로써 일본제국주의 침탈세력군벌·재벌을 박멸하고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한 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전민균등의 신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나라 안으로는 국민 각 개인의 균등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균등을 실현하려는 민족국가건설론이었다.
 
조소앙은 대한민국이 분단정부였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대한민국 건국강령은 아직도 완전독립과 균등사회를 실현하는 실천 강령임을 강조하였다. 이 점에서 5·10선거를 인정하지 않고 대한민국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중경임시정부의 김구 계열과 다르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민족해방운동의 기본정신으로 임시헌법과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반영하였던, ‘인류의 공통적인 최대염원’·‘인류의 최고이상인 균등주의의 이상이 제헌헌법에도 반영되었다고 인식하였다.
 
조소앙은 사회당을 창당하면서 우리 민중은 무산계급 독재도 자본주의의 특권계급의 사이비적 민주주의 정치도 원하는 바가 아니요, 오직 대한민국의 헌법에 제정된 균등사회의 완전실현만을 갈구할 뿐이다고 선언했다.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법통성을, 계급을 소멸시키는 철저한 균등주의, 즉 삼균주의를 실현하는 일치성에서 찾았다.
 
19464월 백남운이 자신의 국가건설론을 처음 피력한 조선민족의 진로에서 신민주주의를 주창했다. 백남운의 신민주주의는 무산계급농민·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양심 있는 일부 유산계급지주·부르주아지을 포함한 좌우연합정권을 구성하여, 민주정치, 민주경제, 민주문화, 민주도덕, 민주적인 인간을 내용으로 하는 신민주주의를 완수함으로써, 모든 사회 구성원 사이에 계급대립이 없는 연합성 신민주주의 단일민족국가를 수립하자는 내용이었다. 백남운이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공산주의와 다른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백남운이 사용하는 민주적은 인민민중이 나라의 모든 영역정치에서 주체중심이 되는, 즉 인민을 주체로 세운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신민주주의는 넓게 보면 진보적 민주주의에 해당한다.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인민본위의 사회해방이란 목표를 분명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백남운의 유물사관과 민족주체의 관점은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에 반영돼 있다. 그의 계급관은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대전제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극단적인 계급주의를 반대하였다. 백남운이 밝힌 유물론의 민족론·국가론에 따르면, 공산주의사회에서도 민족과 국가는 소멸되지 않는다.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은, 부르주아지를 통일전선의 상대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사실상의 민족연합을 부정한 조선공산당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을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비판했다. 백남운은 조선의 무산대중은 아직 자기본위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정도로는 발전되지 못한 형편임을 지적하고 아직 완전독립이 실현되지 못한 정치적 단계에 있어서는 일부 자산가가 아직도 그 혁명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무산층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고 사회주의 계열에 충고하였다
 
백남운은 처음에는 신중하게 반탁론을 표명하였으나, 신탁의 핵심이 민주임시정부수립에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수용하고 신탁논의에서 조선민족의 주도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좌우익의 정치협의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백남운이 의도한 좌우연합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중심으로 한국민주당까지 포함한다.
 
연합성은 사회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요소의 일부를 도입한 체제를 의미하였다.그는 자본주의 체제는 민주경제·민주정권·민주정치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백남운은 민주정치의 여론정치, 대의정치, 민생책임정치를 강조했다. 신민주주의가 평화혁명을 지향하는 바는 박헌영의8월 테제의 노선과도 일치한다. 어느 한 계급만이 주도하여서는 민주경제와 민주정치를 실현시킬 수 없다고 봤다.
 
백남운이 주장하는 민주경제를 한마디로 말하면, 민중이 주체가 되어 자기의 경제권을 가지는 경제체제를 뜻하였다. 민주경제는 자립적인 민족경제를 의미한다. 그는 변혁기의 특수성을 들어 정치가 경제에 영향을 미침을 중시하였다. 민주정치와 민주경제는 표리관계를 가진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정치가들이 정치독립이 된 후에 경제를 건설한다고 말함은 사실상 민주경제를 회피하는 말이라고 비판하였다.
 
신민주주의에 의하면 지금까지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됐던 생산 농민과 노동자가 정당한 사유재산을 보유하게 한다. 이러한 사유재산은 생산력 담당자에게 생산의욕을 고취시키므로, 한 사회의 생산력를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생산수단의 재분배로서 갱생의 민족경제를 수립하라는 것이다.
 
그는 현 단계의 계획경제는 국가직영과 국가관리제의 공공조합 형태와 개인적 사기업 형태 등을 내포한 것이라 지적하면서, ‘개인적 사기업도 계획경제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경제를 전체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안이고 자본주의적 요소를 이용하는 동시에 계획경제의 원칙 하에서 민주경제를 발전시키는 의미에서 산업에 따라서 여러 형태의 기업가를 보호 육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한된 의미의 자산계급성이 어느 일정한 기간을 통하여 생산부문에 부여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공업기술의 비약적 발전의 물적 기초를 풍부하게 구축하여 주는 것이다. 즉 계획경제 원칙 아래, 일정한 한도 내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수용하여 발전성을 보장한다는 뜻이었다.
 
 
 
 
 
 
 
 
 
 
 
 
 
 
 
 
 
 
 
 
 
 
 
 
 
 
3. 분단국가와 진보적 민주주의
 
1) 조봉암과 진보당의 사회적 민주주의
 
조봉암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강화군청 면서기로 일하다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룬 후 항일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YMCA중학부를 거쳐 일본에 유학하던 중 사회주의를 수용한다.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수료한 후 화요회에서 활동하는 등 조선공산당의 간부가 된다. 1932년에 상해에서 체포돼 39년에 출소하여 인천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다시 451월 체포돼 815일 석방된다. 이후 인천에서 건준활동에 주력했으나 465월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비판를 신문에 발표하고 6월 이후 조선공산당과 결별한다.
 
1948년 단독선거에 참가하여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어 헌법기초위원을 거쳐 이승만에 의해 농림부장관에 임명돼 토지개혁을 주도한다. 1950년 국회의원에 재선돼 국회부의장으로 활동했으며, 1952년에는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여 11.4%2위를 차지했다. 이후 52년 국회의원 후보등록에 실패하는 등 이승만정권의 견제를 받았으며, 55년에는 민주당 창당 참여가 무산된다. 563월에 진보당 창당준비 대표자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되고 5월 선거에서 23.8%를 얻으며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으로 부상한다. 그해 11월 진보당을 창당했으나 581월 간첩혐의로 체포돼 사형을 당한다.
 
조봉암의 진보당 창당은 19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등 국제사민주의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조봉암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보다는 해방 전후의 중도좌파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더 가깝다.
 
첫째, 조봉암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내용적으로 해방 정국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사실상 일치한다. 진보당이 지향한 '사회적 민주주의'는 한반도분단과 이승만독재라는 한국적 현실을 고려한 사회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다. 정치사회영역에서의 평등적 민주주의, 경제영역에서의 계획적 민주주의’, 집권방법으로서 '의회주의', 반공적 현실을 고려한 '평화통일론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진보당은사회적 민주주의는 평등적 민주주의이며 동시에 계획적 민주주의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민주적 사회주의는 낡은 자유민주주의 또는 개인적 민주주의를 폐기하는 것이며, 가장 민주적인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러한 사회적 민주주의는 시장경제에 기반을 두고 계획경제를 부정하면서 다만 생산수단의 공공적 소유를 부분적으로만 허용하는 사민주의강령과 명백히 다르다. 또한 진보당의 강령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규정했는데, 이는 해방 정국에서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의미했다.
 
둘째, 비자본주의적 경제구조, 자립경제, 토지개혁의 중시, 근로대중의 생활보장 등 경제분야에서 강령의 내용은 진보적 민주주의와 사실상 일치한다.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의 기반은 매판자본계급과 특권적 관료이며 그 경제적 기반은 일제로부터 인수한 국가적 독점기업과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라고 진단하고 있다. 진보당 강령 전문은 자본주의의 성과와 한계 및 그 위기를 지적하고 근로대중이 그 폐해에 희생당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으나 소련의 방식은 자본주의의 대안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19564월 한국일보에 발표한 문건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에서는 계획성 있는 경제체제 하에 생산분배와 합리적 통제로써 민족자본의 육성과 농민 노동자 모든 문화인 봉급생활자의 생활권을 확보할 것을 주장했다. 진보당 창당선언문은 분단과 이념대립, 혼란과 궁핍, 정경유착과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날로 심각해지는 실업자, 중소상공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자립경제를 강조하고 있다.
 
조봉암은 그밖에 국유화의 확대강화, 협동에 의한 생산조합의 장려, 무역의 국가관리, 종합적인 경제계획수립, 민관이 참여하는 경제계획위원회 구성, 국방비 감축, 통화와 인플레 관리, 고율누진세, 금융기관의 국가관리, 중소기업육성과 서민금융의 활성화, 외국자본의 국가관리 등을 주장했다.
 
셋째, 진보적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봉건제도의 철폐, 반민주적인 악법의 폐지 등 정치적 기본권을 강조하고 있다. 조봉암은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정부는 말로는 반공을 하면서 실제로는 반민주적 파괴행동을 자행하고 있다면서 진정한 민주제도를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재로 기울어지는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전환할 것과 국가보안법과 표현의 자유를 막는 악법의 폐지를 요구했다.
 
넷째, 진보적 민주주의에서는 농업보호와 농업개혁을 중요시하는데, 이점이 조봉암과 같다. 그는 농림부 장관으로서 토지개혁안을 마련했으며, 대통령후보자로서 농촌고리채 통제와 현물세 폐지, 부재지주의 토지소유 금지와 소작 금지, 영농자재 및 영농기구를 공급하고 축산과 부업을 장려하기 위한 농촌협동조합 조직, 자연재해로 농경지가 피해를 입었을 때 정부가 농민생활을 보장해주는 농업보험제 도입, 문화오락시설과 보건위생시설과 탁아시설을 확충하는 농촌근대화사업 추진, 농촌협동조합의 임야 공유제 도입 등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다섯째, 진보당의 강령은 진보당이 노동자, 농민, 근로인테리, 중소상공인 등 근로대중과 양심세력의 민주적 혁신적 정당임을 선언하고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호소하고 있다. 연대연합과 통일전선을 강조하던 해방 전후의 진보적 민주주의의와 그 내용이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해방정국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달리 반공노선을 채택했으나, 과거 조선공산당에 몸담았던 조봉암으로서 우익냉전의 시기에 진보정치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적인 측면이 강하다. 공산당과의 결별은 공산당 운영방식에 대한 반감과 미군정 하의 남조선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조봉암은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문건에서 박헌영의 민족통일전선과 대중투쟁의 운영방식, 당인사의 무원칙과 종파성 및 봉건성 등을 지적했다.
 
조봉암은 466월 노동계급독재, 자본독재 반대, 공산정부 반대 등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공산주의 모순발견을 저술하는 등 반공노선을 천명했으나, 이는 자본주의외 사회주의 양자를 모두 경계하는 해방 전후의 중도좌파의 시각과 큰 차이가 없다. 미국과 소련 어느 일방을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입장 역시 큰 차이가 없다.
 
48612일 제헌의회는 총선거가 소련의 보이코트로 인해 이북에서 무산된 것을 비판하고 이북도 총선거를 통해 민중대표를 국회로 보내기 바란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조봉암은 이 결의안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면서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미국과 소련을 합조시키는 것이며, 미국과 소련을 적대시하면 안된다고 밝혔다.
 
조봉암의 반공노선은 역설적이게도 그 내용에 있어 평화통일과 미소와의 협력을 인정하고 있다. 진보당은 2단계 통일론을 제시했는데, 첫 단계는 남한 내의 민주주의적 진보세력이 정치적 주도권 즉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고, 다음 단계는 유엔과 미국, 민주우방과 긴밀하게 협조하여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통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또한 진보당은 창당선언문에서 민주세력이 결정적으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의 실현이라고 표현하였다. 남북평화통일을 성취하여 인플레에 의한 대중적 수탈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령 전문은 코리아전쟁을 미소냉전의 결과물로 보면서 한반도에서 미소의 군사적 교착상태가 장기화됐다고 판단한다.
 
 
2)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로마 가톨릭 선교사 탄압을 구실로 삼아 침공하여 1884년에는 베트남의 전 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되었다. 2차 대전 중 일본이 프랑스를 몰아내고 베트남을 점령했으나 일본이 패망하자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남 노동당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창설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베트남을 다시 점령하려고 군대를 파견하여 1946년 말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4년 제네바 휴전협정이 성립된 결과, 북위 17°선을 경계로 하여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양분되었다. 북베트남은 사회주의국가로 전환됐고, 남베트남은 프랑스와 미국의 괴뢰국가로 이어졌다. 남부 베트남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196012월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 월맹에게 조종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65통킹만()사건을 명분으로 삼아 미국은 베트콩의 활동은 곧 월맹의 침략행위라는 견해를 표명하고 북폭(北爆)을 개시하고 지상군을 대규모로 파견한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으며, 결국 1973년 파리에서 미국·베트남·베트콩(남베트남의 공산당월맹 간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외세의 불개입과 베트남의 자주적인 통일을 보장하는 평화협정이 조인됐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외세는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베트남은 내전 끝에 북베트남과 베트콩에 의해 통일된다.
 
북베트남의 노동당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창설을 주도했으며, 그 이후 남베트남 출신의 당 간부를 남베트남에 파견하여 민족해방전선을지도했다. 북베트남의 노동당은 이외에도 남베트남에서 인민해방군을 조직하고 임시혁명정부를 출범시켜 이들을 정치적으로 지도했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를 당 강령으로 채택한 인민혁명당이 남베트남에서 창당돼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정치적 지도의 역할을 북베트남의 노동당으로부터 넘겨받는다.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이 미국의 지배하에 있는 조건에서 민족해방과 민주주의변혁을 수행하기 위해 꾸려진 남베트남의 통일전선이었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강령은 모든 애국적 민주세력을 하나로 결집하는 기치로 되었으며 그대로 임시정부의 강령으로 되었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베트남해방전선으로 합쳐지며, 베트남이 통일 된 후 남베트남의 인민혁명당과 북베트남의 노동당이 통합돼 공산당으로 전환된다.
 
민족해방전선의 강령이 진보적 민주주의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정당에 의해 지도되는 통일전선의 강령으로서 그 내용은 1935년 코민테른의 인민전선, 즉 인민민주주의 민족해방전략이다. 다만 식민지 분단의 상태를 고려할 때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인민민주주의민족해방전략에 비해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좀 더 포괄적인 통일전선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3) 민중당의 민중민주주의
 
19876월 항쟁의 결과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지만, 김대중과 김영삼의 후보분립으로 인해 군부인사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김대중씨를 지지하였던 그룹은 그가 만든 평민당에 합류하였으며, 후보단일화를 주장하였던 그룹은 온건한 개혁정당인 8846일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였고, 백기완 대통령 후보가 중간에 사퇴했던 민중후보그룹은 민중의 당을 88311일 창당하였다. 민중의 당은 총선에서 50여일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지만 출마한 15개 지역구에서 평균 4.3%를 득표함으로써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열었다.
 
13대 총선 직후 민중의 당은 민중정당 재건추진위원회로 전환하였으며 889월 한겨레민주당과 통합하여 진보정당 결성을 위한 정치연합을 결성하였다. 19903월 백기완 등 전민련 고문단은 민중의 정당 건설을 촉구하였고, 이 제안을 받아 이부영 등 각계 인사 16인은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 추진위원회 (민연추) 결성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89년 말 이래 몇 갈래로 등장한 창당 세력들이 결집하여 904월 민연추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민연추는 보수야당과의 관계문제를 놓고 분열했다. , 보수야당과 통합을 추진하자는 파와 먼저 진보정당을 창당하고 보수야당과 연대해 나가자는 파가 대립하여 결국 야권 통합파가 탈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906월 민중당 창당발기인대회가 개최되었으며 11103천여명의 당원으로 민중당이 창당되었다.
 
91년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진영의 붕괴가 있었다. 19911215전통적인 당 건설 노선의 폐기를 의미하는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노정추)가 결성되었다. 이는 노동자계급에 기초한 진보정당의 창당작업이 출발했음을 의미하였다. 당시 민중당이라는 진보정당이 있었음에도 노동자 정당 건설이 추진된 것은 민중당이 갖고 있는 약점, 지도부의 의사결정 독점과 동요로 인해 근로대중에 기초한 정당으로 자기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합법적인 노동자정당 추진 선언은 곧바로 민중당과의 관계라는 복잡한 문제를 발생시켰다.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와 민중당의 통합이라는 문제와 아울러 한노당 창준위에 대한 민중당내 지도부와 주요 지구당 위원장들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한 민중당 내부 갈등이라는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목전에 임박한 총선은 이러한 문제들을 매우 긴박하게 만들었다. 92119일 한국노동당(가칭)발기인 대회 이후부터 통합과 관련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수차례 협상 끝에 27일 양측은 총선 후 2개월 이내에 임시전당대회에서 한국노동당으로의 당명 개칭을 토의, 결정한다는 등의 합의를 하고 통합을 선언하였다.
 
선거결과 민중당의 총 득표수는 유효투표의 1.5%를 기록하였다. 출마지역 평균 득표율은 6.45%로 광역의회 선거 때의 14%에 비해 하락하였다. 20% 이상 득표 3개 선거구, 10% 이상 5개 선거구, 7% 이상 6개 선거구, 나머지 37개 선거구는 7% 미만의 득표 분포를 보였다. 14대 총선 결과 법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게 된 민중당 내에선 이후 진로 문제를 첨예한 의견대립이 일어났다.
 
이우재, 장기표 등 상층 간부들은 당의 형식적 해산에서 나아가 조직대오를 해체하자는 주장을 하였던 반면에 지구당 위원장의 다수는 조직을 유지하자는 주장을 폈다. 9245일 민중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조직 해체안을 다수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49일 민중당 제 15차 중앙위원회는 민중당의 향후 진로에 관한 중앙집행위원회의 안을 부결시키고 조직의 유지를 주 내용으로 하는 안을 가결하였다.
 
그러나 재창당 결의안의 통과가 분명해지자 이우재, 장기표 등 당 지도부의 다수는 퇴장하였고 남은 세력들은 92415일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민중당 재창당 결의에도 불구하고 이 결의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민중정치연합으로 활동하던 사노맹 계열과 합류하여 95년 진보정치연합을 구성하여 활동했다. 진보정치연합은 97년 대통령선거시 국민승리 21이라는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의 출마를 계기로 진보정당운동의 한 축으로 참가, 발전적으로 해산하게 되었다.
 
민중의 당이나 민중당은 민중주체의 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를 당의 강령으로 삼았다. 민중당은 창당원칙으로서 민중주체, 민주쟁취, 민권수호, 민주세력연합 주도, 민중재정 확립, 진취적 당풍 확립으로 설정하였다. 민중민주주의는 해방 전후의 진보적 민주주의 혹은 인민민주주의와 큰 차이가 없다.
 
첫째, 민중민주주의는 식민지, 반식민지, 식민지 예속국가(식민국가)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전 민중적 통일전선이 봉건성, 반민주성, 국내외 독점자본의 착취를 타파하여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을 지향하는 민중주체의 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으로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가 이남의 현실에 맞게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NLPDR)로 변용된 것이다. 다만 그 내부에 이남의 식민지 종속성에 대한 차이, 반미통일투쟁과 반제반독점투쟁에 대한 차이가 존재했다.
 
둘째, 민중의 당이나, 민중당이나 사회주의를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비자본주의를 분명히 하고 민중주도의 자립경제를 주장했다. 민중당의 경제노선인 민중주도의 계획적 시장경제체제에 따르면 시장경제의 무정부성 반민중성을 최대한 극복하고,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을 최대한 제거한다. 또한 민중당은 재벌해체, 긴간산업 및 일정규모 이상의 토지에 대한 국유화 등을 주장했다.
 
셋째, 노동자와 농민 등 노동대중이 중심이 되는 전 민중적 통일전선체가 집권하는 인민정권 혹은 민중정권을 제기했다. 양당 모두 정권의 주체를 민중으로 설정했는데, 민중에는 노동자, 농민, 영세상공인, 학생, 양심세력 등이 포함돼 있어 해방정국의 인민과 일치한다. 민중의 당은 민중이 주인 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최상위의 강령으로 내세웠고 민중당은 민중당은 독재와 독점, 외세로 고통 받는 지식인, 중소상공인 등 중간계층이 포함된 민중이 주인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민중주체민주주의)를 이념적 목표로 삼았다. 민중당 역시 외세와 군사독재의 통치를 종식시키는 민중주체의 민주정부와 민중주체의 의회제도를 강조했다.
 
넷째, 완전독립, 특정 체제를 주장하지 않는 자주적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했다. 민중당은 민중의 수탈과 억압의 굴레를 박차고 일어나 분단과 예속체제를 타파하겠다며 민족자주를 선언하고 “1단계로 남북한 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2단계로 남북 지역정부의 자치권이 동등한 권한을 갖는 연방제 방식의 통일국가를 창출하겠다며 연방제 통일을 주장했다.
 
민중의 당은 당 강령에서 반세기에 걸친 민중의 반외세,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계승하여 민중의 민주주의와 조국의 자주화, 통일을 보장할 민주정부의 수립 및 통일된 민주조국의 건설을 위해 전체 민중의 선두에 서서 민중과 함께 이의 실현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밖에도 양당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민주주의 수호와 가부장적 관습의 철폐, 민중문화의 창달, 국제평화와 국방비 감축 등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주장들은 기존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큰 차이가 없는 내용이다.
 
 
 
 
4. 어떤 진보적 민주주의를 계승할 것인가?
 
1) 진보적 민주주의의 개념과 가치
 
(1) 진보적 민주주의의 개념적 요소
 
해방 전후의 진보적 민주주의, 조봉암과 진보당의 사회적 민주주의, 민중당의 민중민주주의는 넓은 의미의 진보적 민주주의로 규정된다. 8·15해방 이후 다양한 국가건설론이 식민지해방운동의 연장선에서 제기됐다. 중요한 국가건설론을 살피면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조소앙의 삼균주의, 백범의 자주통일, 조봉암의 민주사회주의, 백남운의 신민주주의,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 박헌영의 진보적 민주주의,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 등이다.
 
해방정국의 민주주의론은진보적 민주주의론', 신민주주의론으로 귀결된다. 조소앙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계급 독재파들이 무산계급 독재를 실시하려 한다고 지적한 것에서 보듯이, 해방정국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계열이 가장 즐겨 쓰는 구호였다. 그러나 진보적 민주주의는 이들만의 전용어가 아니라 정치세력들에 따라 편차가 있었지만,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과제를 뜻하는 시대정신이었다.
 
첫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서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근대적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둘째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군부의 독재와 같은 폭압정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셋째는 민중의 생존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자들은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체제를 당장 특고집하지 않고 민중의 선택을 존중했다.
 
해방정국의 국가건설론들은 국가건설의 목표에 이르는 경로로 비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선택하였는데, 자본주의 요소를 일부분 인정하면서도 계획경제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점차 생산과 분배의 사회주의화를 달성하려 하였다. 인민 생활을 급진시켜 개선하는 경제균등을 제일의第一義로 강조했다. 이는 당시 일반 민중들의 지향성과도 일치하였다.
 
19468월 미군정청 여론국에서는 조선국민이 어떠한 종류의 정부를 요망하는지 30항목의 설문을 열거하고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가운데 중요한 바를 들면, 찬성하는 일반적 정치형태를 묻는 질문에 85%7,221인이 대중정치대의정치를 선택하였으며,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는 자본주의가 1,18914%, 사회주의 6,03770%, 공산주의 5747%의 비율을 보였다.
 
중간파가 말하는 진보적, 경제불균등이 일반화된 서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더 나아가, 근로대중=기층민중=인민의 이익을 대변하여 경제평등까지 실현하여야 한다는, 시대적 함의가 담겨 있었다. 안재홍은 자신이 제창한 신민족주의·신민주주의가 진보적 민주주의임을 자부하면서 공산주의가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함을 경계하였다.
 
이와 같은 해방정국의 시대 분위기에 밀려, 극우 계열인 한국민주당조차 당을 결성하면서, 8개의 정책 가운데 ‘6.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7. 토지 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을 내걸어, 대기업의 국유화를 표방하였고, 또 막연하지만 토지개혁을 암시하는 구호를 내걸었다.
 
넷째는 외세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확보하고, 민족단결과 조국통일을 달성하는 것이다. 외세의 힘보다는 민중의 힘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독립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헌영의 미소 의존적인 건국관은 적절하지 않다. 정치적 주권, 군사주권, 경제주권, 문화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다섯째는 민생을 보장하는 경제자립을 이루는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주체로서 인민정권, 혹은 민중정권을 내세우며, 이러한 과제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민중을 중심으로 한 연대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세력뿐만 아니라 백남운과 조소앙을 비롯한 중도세력까지 사회계급이 철폐된 통일민족국가를 지향하였다.
 
친일세력과 파쇼적인 반민주세력의 배제, 악던 지주와 악덕자본가를 제외한 전 민족의 단결을 주장했다. 국가건설의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는, 민족 안에서 폭력을 동반하는 사회혁명을 배격하고, 합법·평화의 방법으로 사회혁명을을 추진·달성하려 하였다.
 
자유민주주의의 한계점을 극복하려는 동시에, 부르주아독재는 물론,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무산계급독재노농민주독재와 같은 사회주의 유형의 계급독재도 배격하고 대중정치=대의정치를 추구하였다. 삼균주의도 일제를 타도하는 복국의 과정, 즉 민족혁명은 폭력혁명으로 달성하지만, 건국의 과정은 합법성을 띤 평화 수단, 즉 민의를 입법화하는 절차를 거치는 의회주의를 통해서 실현하려 하였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국가건설안도 계급투쟁을 피하고 합법의 방식으로 균등사회를 실현하는 수단·방안이었다. 백남운도 무계급성 단일민족국가를 이상으로 설정하였다.
 
 
(2) 자주와 평등, 민중정권, 연대연합
 
인간이란 특정 나라와 공동체에 속해 있어 그 제도적 관습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개별적인 인간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해방이란 인간의 기본적 권리, 인권을 보장하여 제도적 관습적 억압을 철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해방에 있어 또한 인간이란 사회적 역사적 자연적 존재로서 인류, 즉 유적 존재이며 이때의 인간해방이란 기술의 발달, 경제의 발달, 의식과 실천의 고양으로 인해 인간 본연의 한계를 극복하는 인류해방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주는 그 인간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피지배층 혹은 민중, 오늘날 노동대중의 자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자주는 계급의 자주를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해방은 계급해방을 포함한다. 계급해방은 사회 다수 민중의 생존권과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것이며, 이것은 정치 경제 사회적 발전의 성과를 골고루 향유할 수 있을 때 가능하므로 평등 차원의 문제이다.
 
평등을 실현하는 방식은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다수의 합의에 따라야 하므로 경제적 민주화를 요구한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인간의 다수결이 아닌 자본의 다수결을 강제하는 제도로서 소수의 자본가들이 다수 민중의 정치 경제 사회적 기본권을 억압하고 있다. 따라서 계급의 자주와 해방, 경제적 민주화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극복을 목적으로 한다. 다만 자본주의 극복의 양상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주의를 포함하여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또한 인간과 계급의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 즉 인간해방과 계급해방은 세계적 조건아래서 자신이 속해있는 민족과 국가 차원의 정권의 성격을 바꿔야 가능하다. 즉 인간해방과 계급해방은 인간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피지배층,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자주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다.
 
이는 외부적으로는 자신이 속해 있는 가장 중요한 포괄적 공동체인 민족의 자주와 국가의 자주를 실현하는 것으로서 민족자결과 민족통일, 국가 주권의 문제로 나타난다. 또한 내부적으로 민족과 국가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중의 자주권이 보장되려면 사회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돼야 한다.
 
민중의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노력은 민중 주체의 진보적 민주정부, 즉 민중정부의 수립으로 나타난다. 사회 다수의 민중이 소수의 지배층으로부터 기본권을 보장받고, 민중정부의 수립에 도달하려면 다양한 노동의 형태로 분열돼 있는 노동대중 즉 민중이 단결하고 양심세력과 연대연합에 힘써야 한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가치를 정리하면 자주를 기본으로 하면서, 이로부터 민주주의와 평등의 가치가 도출된다.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정권은 민중정부이며, 부당한 소수의 지배를 끝내려면 민중의 단결과 양심세력과의 연대연합이 필수적이다. 즉 진보적 민주주의는 그 가치와 주체, 가치실현의 방식을 제기하고 있다.
 
 
 
 
 
 
 
 
 
 
 
 
 
 
 
 
 
 
 
 
 
5. 결론 : 민중 주체의 진보적 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오늘날 이남의 진보적 대중정당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해방 전후의 건국노선으로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그대로 계승하기 보다는 그 긍정점을 이어받되,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 조봉암의 사회적 민주주의이나, 그 이후의 민중당의 민중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해방 전후의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는 미국과 소련의 연합이라는 2차 대전의 일시적 상황에 직면하여 인민민주주의가 서구의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과정에서 대두됐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인민전선노선을 내세웠던 코민테른과 함께 대두된 후 코민테른의 해체와 함께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선반도에서 미소가 냉전에 돌입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무력화되는 한편, 남북 각각에서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단독정부의 움직임이 가시화되면서 미군정청이 사회주의를 탄압하자,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보는 사회주의의 견해는 모두 퇴장했다.
 
미국과 소련이 동의하는 반봉건적이며, 비자본주의적이며 민주적인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사회주의의 건국이념은 폐기됐다. 박헌영은 467월 신노선 문건, 여운형은 468월 민주정당활동의 노선 문건을 고려할 때 이즈음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사실상 폐기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정당활동의 노선은 진보적 민주주의 대신 인민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데, 이 문건이 조선공산당과 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통합에 즈음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사회주의 계열의 인민민주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후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선 이북은 인민민주주의라는 사회주의노선을 명확히 했고 이남에서는 미군청의 탄압과 코리아전쟁,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사회주의계열이 애용했던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실상 사라졌다. 1956년 조봉암의 진보당이나, 1980년대 민중당의 민중민주주의는 내용적으로 해방 전후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근접했지만 공식적으로 계승한 바가 없으며, 관련 문건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추측건대, 진보적 민주주의가 특수한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의 건국노선이었다는 점에서 이후 이남의 대한민국을 인정하고 합법적인 의회주의 정당의 길을 선택한 진보적 대중정당이 공식적으로 채택하기에는 다소 무리였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늘날 이남의 진보적 대중정당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한다면 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적 전통성이 해방 전후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있기 때문에 그 당시 진보적 민주주의와 현재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규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결국 해방 전후의 진보적 민주주의 긍정점을 계승하되 그 근간은 박헌영이나 김일성 주석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여운형과 조봉암 및 민중민주주의에 둘 수밖에 없다.
 
둘째, 김일성 주석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제외한다면, 다른 진보적 민주주의는 해방 전후의 객관적인 국제정세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독립과 통일에 대한 우리민족의 자주역량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남북을 점령한 미국과 소련의 협상에 의존하면서 이들 강대국에 의한 독립과 통일을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셋째, 진보적 민주주의가 해방 전후로 중도부터 사회주의까지 널리 주장된 것이지만, 특히 조선공산당과 북조선노동당 등 사회주의 계열의 공식적인 건국이념이었다. 물론 이념을 떠나 이남의 진보적 대중정당이 이들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주체조건을 고려하면 건준과 근로인민당이라는 좀 더 광범위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했던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계승하는 것이 적절하다.
 
조봉암의 사회적 민주주의와 민중당의 민중민주주의가 그 내용상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사실상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남의 진보적 대중정당은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 조봉암의 사회적 민주주의, 민중당의 민중민주주의를 계승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운형과 조봉암 모두 자신의 민주주의를 미완의 상태로 남겼지만 바로 그 점이 이남 사회의 질곡에 갇혀 있는 진보적 대중정당이 계승해야 할 과제이다.
 
이 과제는 민중 주체의 진보적 민주주의, 혹은 민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선거와 대중운동을 통해 민중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 혹은 진보적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이다.
 
서두에서 제기된 쟁점을 결론적으로 마무리하면, 민주노동당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차원에서 채택한 이상 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적 경험의 성과와 한계를 검토하고 그 위상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여운형, 조봉암, 민중민주주의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본인의 주장을 밝혔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진보적 민주주의는 국제공산당인 코민테른의 영향아래 있었던 사회주의인사들이 주로 채택했던 건국이념이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으므로 민주노동당이 채택한 진보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일단 진보적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무관하거나 상반지점에 있다는 의견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지향성을 명백히 한 사회주의 계열의 강령이라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 국제공산당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었던 해방 전후의 사회주의와 오늘날의 사회주의가 다를 수밖에 없고, 나아가 진보적 대중정당이 바라보는 사회주의가 사회주의정당과 같을 수 없다.
 
특히 과거의 사회주의원칙인 생산수단의 국공유화, 프롤레타리아독재, 무력혁명론, 일국일당 등은 오늘날 다양한 논란이 있고, 진보적 대중정당이 이러한 원칙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진보적 대중정당의 강령으로서 진보적 민주주의가 전제하는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자유민주주의, 파쇼가 경쟁했던 코민테른 시기의 것도 아니고, 체제경쟁으로 치달았던 미소냉전기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변화된 정치경제사회적 조건과 국제정세에 따라 사회주의 경로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개방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이상과 가치 정도를 궁극적으로 지향한다는 수준이 타당하다.
 
다만 진보적 민주주의가 그 내용상 사회주의를 궁극적으로 지향한다는 점에 합의하면 강령에 사회주의를 별도로 명시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를 도출할 수 없고, 이남의 오늘날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 정도가 사회주의의 추상적 명시를 요구한다면 사회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궁극적으로 지향한다는 것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같은 강령에 놓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위원회가 사회주의 이상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새로운 강령에 삽입하는 수정안을 당대회에 제출한 것은 적절한 대처이다. 물론 강령개정위원회에서 사전에 이에 대한 문제점을 공유하고 이를 원안에 포함시키지 못한 점이 아쉬운 지점이다. 사회주의 부분이 전면 삭제된 것에 대한 비판여론이 상당부분 존재하는 한 이후 진보대통합 정당의 강령을 만들 때는 민주노동당 당대회의 고민을 담아 진보적 민주주의와 함께 사회주의 이상과 가치를 병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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