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혁명시기의 공산주의자동맹

18482월 공산주의자동맹이공산당 선언을 인쇄하던 중에 프랑스 2월 혁명이 발발하였다. 2월 혁명은 마르크스가 머물던 벨기에에 영향을 미쳐 벨기에 공화국 수립을 위한 운동이 개시되었다. 마르크스는 봉기를 준비하는 여러 단체들을 규합했으며, 부친의 유산 중 상당액을 이 단체들에 무기구입비로 헌납하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을 감시해 오던 벨기에 정부는 33일 마르크스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31일 프랑스 임시정부가 플로콩을 통해 마르크스가 파리로 돌아 올 것을 요청하자, 마르크스는 이에 응했다.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는 마르크스가 파리로 떠나기 전에 파리로 동맹의 본부를 옮길 것을 결정하고 파리에서 중앙위원회를 조직하는 모든 권한을 마르크스에게 부여하였다. 마르크스는 동맹의 결정대로 파리로 가서 중앙위원회를 구성했으며 파리에서의 지도는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의장으로서 마르크스에게 전적으로 위임되었다. 184835일 마르크스가 파리에 도착한 후 다음날 공산주의자동맹의 런던 집행본부는 마르크스에 의해 파리로 옮겨졌다.
파리에 모인 공산주의자동맹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각국의 망명자들은 거기서 유럽 각 지역에 혁명을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독일의 지역조직을 동원하여 독일혁명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독일에 있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주요 중심지는 콸른프량크푸르트 암마인하나우마인쯔, 비스바덴, 함부르크, 슈베린, 베를린보레슬라우나그니쯔, 글로가우라이프찌히뉘른베르크, 뮌헨밤베르크 비르쯔부르크, 슈루트가르트바덴 등이었다.
18483월 프로이센의 베를린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혁명이 발발하였다. 이에 공산주의자동맹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내용들을 당시 혁명을 통해 새로이 창출된 요인들에 근거해서 구체적으로 정식화할 필요가 있었다. 18483월 하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족강령인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를 집필하였다. 이 문서는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파리에서 전단지로 인쇄되었다. 330일 이 전단지는 독일 국내로 돌아가는 동맹원들의 손으로 독일 내에서 삐라로 배포되었다.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4월 초에 베를린, 만하임, 트리어, 라이프치히 등의 민주주의적 신문에도 전재되었다. 184810월 제2차 베를린 민주주의자 대회에 이 내용이 제안되었으며, 같은 해 11월에 쾰른 노동자 동맹회의에서 이 요구의 개별적 조항들이 심의되었다. 그밖에도 라이프찌히 등에서 소책자로 발표되었다.
독일 공산주의자동맹의 정강으로서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17개조는 공화제, 남성보통선거의 실시, 국회의원들에 대한 봉급제도, 국민의 보편적 무장, 정치와 종교의 분리, 무상교육, 은행과 운수기관의 국유화, 상속권의 박탈, 누진세도입과 소비세의 폐지, 국민작업장의 설립과 고용보장 등이다. 나아가 강제노역과 지대노역 그리고 봉건적 부역을 보상 없이 폐지하고 왕실과 봉건영주의 토지를 국유화하여 국가에 양도해야 한다는 토지강령도 정식화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취해야 할 구체적인 강령이었다. 또한 이것은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서도 가능한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준비하게 되는 기초가 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동맹은 이 요구를 통해 이러한 강령이 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와 소농민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선언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민주주의 투쟁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창출한다고 보았다. 그밖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정치경제적으로 분할된 독일의 통일이야말로 혁명의 주요과제라고 믿었다.
18483월 아직 파리에 있던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지도자로서 독일공산주의구락부를 설립하고 독일노동자들에게 독일로 진격하는 무장군단에 합류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프랑스 2월 혁명 직후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 망명인들 일부는 독일의 해방과 공화국수립을 위해 직접 무장봉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파리에서 독일인 망명인들을 중심으로 무장군단을 조직하여 국경을 넘어 독일로 진격하고자 했다. 파리의 임시정부 역시 독일인 망명인들을 모집하여 이들에게 일정한 여비를 지급하는 등 독일로의 진격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동맹과 마르크스는 이 같은 모험주의와 혁명의 수출에 반대하였다. 혁명을 외부로부터 강제로 수입하는 것에 불과한 이러한 침입은 독일혁명 그 자체를 심각히 침해하는 것이었다. 또한 무기나 훈련이 충분하지 못한 독일인 망명인 부대가 국경을 넘는 순간 잘 조직된 독일군에게 체포되거나 살해될 가능성이 높았다. 마르크스는 독일인 망명인들에게 뿔뿔이 흩어져 개별적으로 고향에 돌아가 그곳에서 혁명을 위해 일할 것을 촉구하였다.
파리의 독일인들은 헤커의 무장군단에 합류해 무장투쟁을 하려고 하는 독일인 민주협회 그룹과 합법적인 조직과 선거에 대한 참가를 추진하는 노동자 그룹으로 분리되었다. 마르크스는 후자 그룹에 참여해 18484월 첫째 주에 파리를 떠나 독일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쾰른에 갔다. 다른 중앙위원회 멤버들도 각각 국경을 넘어 독일 국내의 조직화에 가담하였다. 그밖에도 공산주의자동맹의 주도 아래 3-4백명의 노동자들이 독일로 잠입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는 마르크스가 쾰른에 도착한 후 많은 밀사들을 독일의 각 도시에 파견하여 공산주의자동맹원들이 독일혁명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밀사에 따르면 그 당시 노동자들은 아직 계급의식에 눈뜨지 못하고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의 영향 아래 있었다. 반면 공산주의자동맹은 회원 수가 소규모에 불과해 조직이 빈약했고, 그나마 구성원 대다수의 이데올로기적 발전이 불충분하였다. 또한 혁명 이후 반공주의 선전이 강화돼 공산주의자동맹의 지방 활동이 극도로 방해받고 있었다.
그 당시 프로이센의 베를린, 오스트리아의 빈 등 독일의 각 지역은 이미 혁명의 절정에 있었다. 동맹의 지방조직들은 점차 혁명의 파도에 휩쓸려 대중적인 혁명활동에 치중함으로써 비밀결사조직으로서 엄격한 조직규율을 점차 상실해갔다. 더구나 공산주의자동맹 회원의 3/4이 해외에 망명해 있다가 독일혁명 직후 모국으로 돌아가 주소와 연락처가 변경되어 각각의 동맹원과 중앙위원회의 연락망이 단절되어 있었다. 그 결과 비밀결사 당시의 중앙위원회와의 연계가 끊어져버렸고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반동의 탄압에 조직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이 종래 가입하고 있던 반도 대부분 해산되었고, 동맹의 지방조직이 와해되었다.
또한 각국, 각 지방의 사정이 너무나 달라 동맹의 중앙은 그야말로 일반적인 지시밖에 줄 수 없게 되었고, 이런 일반적인 지시는 신문을 통해서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비밀동맹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 원인들이 없어진 그 순간부터 비밀동맹 자체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마르크스와 중앙위원 다수는 동맹을 더 이상 비밀조직으로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 당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내에서 합법적 공산주의 활동을 위한 조건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동맹을 엄격한 비공개 비밀단체로 고수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은 대중적 합법정치조직을 설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창립당시부터 비밀조직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각종 민주주의 단체를 공개적으로 조직하거나 적극 참여해 노동자대중에 접근해갔다. 또한 소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의 민주주의 단체로의 참여를 유도하고,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소부르주아와 공동전선을 형성하였다. 물론 공산당 선언에서 밝혔듯이 소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의 우유부단한 비일관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조건아래 이들 민주주의 단체에 참여하였다.
특히 마르크스는 184861일 쾰른에서 일간지 신라인 신문을 발행하여 각지의 동맹원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배포하였다. 이 신문은 동맹의 지도적 멤버에 의해 편집되어 실질적으로 동맹 기관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라인 신문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던 라인, 나싸우, 라인 유역의 혜쎈 등에서는 동맹원이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의 선두에 있었다. 신라인 신문18486월의 프라하 봉기, 파리 봉기를 지지하고 그 혁명적 의미를 독일의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에게 전파하였다.
그러나 6월 봉기가 철저하게 진압되자, 유럽 각지에서 반혁명세력이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프로이센의 자유주의적인 캄프하우젠 정부가 해체된 후 들어선 자유주의 귀족의 반동적인 신정부는 독일 각지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을 탄압하였다. 마르크스와 신라인 신문의 발행인인 코르프는 76일 쾰른 경찰에 소환되었으며, 신문사는 수색을 당하였다. 마르크스에 대한 시민권 부여가 거부되었다. 경찰이 공동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던 노동자동맹의 지도자 고트샬크를 체포한 후 공산주의자동맹의 구성원들이 노동자동맹의 지도부에 선출되었다. 이로서 쾰른 공동위원회에 공산주의자동맹의 마르크스, , 샤퍼 등이 참여하여 쾰른의 혁명운동을 공산주의자동맹이 실질적으로 주도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의장의 자격으로 8월에 베를린과 빈을 방문하여 프로이센 국민의회 의원인 공산주의자동맹 회원인 데스터를 면담하고 공산주의자동맹의 회원들뿐만 아니라 바쿠닌을 비롯한 여러 민주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구성원들이 9월 쾰른의 대규모 집회에서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를 배포하였고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보내는 청원서 채택을 주도하였다. 1022일 마르크스는 쾰른 노동자동맹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111일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 장군의 반동정부가 국민회의 회의장을 봉쇄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자 이에 맞서 전국적으로 혁명세력이 봉기를 준비하였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은 역시 쾰른에서 봉기를 선동하였고, 이에 쾰른당국은 마르크스를 기소하고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마르크스와 샤퍼, 슈나이더 등 공산주의자동맹의 구성원과 신라인신문의 반란죄에 대한 재판은 18492월에 시작되었다. 재판 이후에도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은 쾰른에서 대규모 집회를 주도하는 등 혁명운동을 이끌었다.
1849417일 프로이센 주 의회가 해산되었고, 53일 드레스덴에서 봉기가 발생하였다. 쾰른 당국이 계엄령을 준비하자, 쾰른에서도 긴장이 높아졌다. 516일 마크르스는 봉기를 우려한 쾰른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고, 신라인신문은 519일 최종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마르크스는 쾰른을 떠나 엥겔스와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국민의회의 좌파의원들을 만나 봉기의 지지, 혁명정부의 수립, 봉건적 부역의 폐지 등을 추진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어 바덴과 팔츠 등 반란의 중심지를 방문하여 혁명세력을 만나 국민의회가 있는 프랑크푸르트로 진격할 것을 호소했으나 거부당하였다. 이후 마르크스는 카이저스라우테른과 빙엔을 거쳐 6월 초 위조여권을 지닌 채 민주주의자협회 중앙위원회 위임을 받고 파리에 도착하였다. 반면 엥겔스는 아우구스트 윌리히(Willich, August)의 혁명군에 결합하여 712일까지 4번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의 구성원,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과 만났다. 마르크스는 이들과 함께 613일 산악당의 비무장 봉기에 동참하였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823일 마르크스에게 파리를 떠나 브레타뉴로 옮기거나 프랑스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마르크스는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1848년과 1849년 혁명과정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의 성원들은 도처에서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각종 언론을 통해, 바리케이드 위에서, 그리고 전장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봉에 섰다. 1848년과 1849년 혁명시기에 공산주의자동맹은 비밀리에 선전활동에 치중하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공개적으로 투쟁해왔다. 혁명 과정에서 동맹원들은 각지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자와 제휴하면서 노동자 단체에 지도적 영향을 끼치고, 전투의 선두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
마르크스는 쾰른에서 혁명활동에 전념하면서도 동맹의 지도부로서 독일 각지의 혁명을 지도하였다. 아우구스트 윌리히, 요제프 몰,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 공산주의자동맹원들은 바덴의 무장봉기에 의용병으로 나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요제프 몰은 바덴 - 팔쯔 군대에 참여해 1849629일 무르그강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역시 스테판 보른은 1849년 노동자와 수공업자들이 주도한 드레스덴 폭동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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