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제국주의의 관계 변화(봉쇄정책의 형성)

 1차 대전 중 서로 전쟁 중이던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군대를 파견하여 러시아 적군과 싸웠다. 1917년 윌슨 대통령은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러시아공화국의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가 윌슨 대통령에게 러시아공화국을 전복시키기 위한 파병을 요청하자, 윌슨 대통령은 1918년 6월 전쟁장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5천여 명으로 구성된 북러시아원정대(American North Russia Expeditionary Force)를 러시아 북부 아르칸젤스크(Arkhangelsk)에 보냈다. 미국의 개입 명분은 1차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에게 제공한 전쟁물자의 회수와 러시아공화국 군대에 포위된 체코군의 구출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사회주의혁명은 시간이 지나면 쇠약해져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이라고 봤다, 윌슨은 러시아 적군과의 전쟁은 러시아공화국 내부를 더 단결시킬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적군과의 전투를 회피하였다. 

윌슨 대통령은 북러시아원정대와 별도로 미군 8천여 명으로 구성된 시베리아원정대(American Expeditionary Force Siberia)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시켰다. 윌슨은 겉으로는 “적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의 민족자결과 독립을 위해 개입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시베리아의 자원과 철도를 일본이 독차지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두 지역의 미군은 적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하지 않은 채 연합군과 함께 1920년 철수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1922년까지 시베리아 일부와 사할린 북부를 지배하였으며 1925년 사할린 북부를 소련에게 돌려주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러시아혁명 개입으로 미국과 소련은 당분간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후버 대통령은 국내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대기근에 대한 인도적 목적으로 1921년 소련에게 대규모 식량 지원을 하였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소련에게 소련에서 국유화된 미국 자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1933년 미국의 자본가들과 언론인들이 소련 진출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소련과의 관계회복을 주장하였다. 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과 협상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교역 확대와 과거 러시아 제국의 채무 변제, 미국 자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미국과 수교하였지만 미국이 원하는 교역이나 보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윌리암 불리트(William Bullitt)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주소련 미국대사로 파견되었다. 불리트는 소련의 반자본주의정책을 목격하고 반소인사가 되었다. 이후 미소관계는 다시 냉랭해졌다. 

하지만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은 미국의 주요 우방이 되었다. 소련은 미국의 무기지원 프로그램(Lend-Lease program)에 따라 비행기, 함정 등의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2차 대전에서 최대 2,700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일을 항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독일의 주력군인 소련 주둔군 총사령관 빌헬름 카이텔 원수가 항복한 이후, 독일은 동유럽에서 베를린까지 소련군에 의해 밀려났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동유럽에서 독일에게 치명타를 안기고 있는 소련에게 경제적 지원은 물론 전쟁 물자까지 지원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과 협력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자신의 구상인 유엔을 성시시키고자 하였다.

2차 대전의 결과 연합군이 승리하였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종래의 식민지를 상실하였다. 반면 소련은 동유럽과 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중국을 포함하여 사회주의 국가가 급속하게 팽창하자, 루스벨트 사후의 미국은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 잡혔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에 외교관으로 파견 나간 조지 프로스트 케넌(George Frost Kennan)은 본국에 미국의 대소련정책에 관한 비밀보고서를 보냈다. 그는 소련이 미국의 적국으로 부상한 점을 지적하고 “전쟁보다는 봉쇄를 통해 소련이 붕괴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케넌은 1947년 7월 미국 외교협회 기관지인 ≪포린어페어≫ 기고문을 통해 “공산주의는 틈만 있으면 새어 나오는 물”이라면서 이에 대한 ‘봉쇄전략’을 강조하였다. 영국의 처칠 역시 “소련이 동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철의 장막을 쳤다”면서 소련에 대한 공세적 정책을 주장하였다(케넌, 2013: 247 - 280). 

이러한 봉쇄정책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수용되었다. 1948년 미국은 국가안전보장회의 결의문(NSC 48/48-2)을 계기로 미소협력을 통해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에서 봉쇄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 내용은 유럽을 재건시켜 소련과 맞서도록 하는 한편 소련을 국제질서에 편입시켜 외교적 수단으로서 안보 위협을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 내용은 장기적으로 소련을 해체시키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조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Lor, 2001). 마침 중국 본토가 공산화된 직후 1950년 매카시 상원의원이 공산주의자 색출운동을 선동하면서 미국 내에서 반공여론이 불붙었다. 이러한 국내 정세로 인해 소련과 제3세계에 대한 봉쇄정책은 더욱 강경해졌다.

그런데 케넌(2013)이 주장한 소련에 대한 봉쇄는 이데올로기의 대립보다는 현실주의에 토대한 정치적 봉쇄를 기본으로 하였다. 하지만 트루먼독트린은 미국식 도덕주의와 이상주의에 입각하여 군사적 봉쇄를 기본으로 하였다. 케넌은 “소련이 서유럽을 정복할 의사가 없다”고 보고 군사적 대결을 격화시키는 나토와 같은 군사동맹에 반대하였다. 또한 케넌은 중요한 지역에서만의 제한적인 봉쇄를 의도하였으나 트루먼 독트린은 봉쇄의 범위를 전 세계로 확대하였다. 봉쇄정책을 입안한 케넌조차 트루먼의 군사적 봉쇄를 피하지 못하였다.

윌리엄스(1995)는 이미 1970년대 초에 미국의 이런 군사대결 정책을 제국주의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소련과 공산주의의 위협을 과장하면서 군비증강과 군사개입을 강조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수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소련의 핵무기는 단지 방어용에 불과하며 소련 역시 공존의 의사가 있으므로 군축협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베트남전쟁의 실패를 교훈 삼아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와의 공존의 길을 선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잉여생산물을 수출하고 원자재를 수입하기 위해 제3세계를 희생양으로 삼는 무역정책을 중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외교정책의 혁명을 통해 미국이 민주주의, 시민들의 삶과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에 집중할 수 있다고 보았다.

파쇼제국주의와 부르주아제국주의의 대결

1차 대전 직전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는 영국의 해군에 도전하고자 거대한 전함을 지속적으로 건조하고 있었다. 영국과 독일이 거함 건조 경쟁을 하는 가운데, 영국의 동맹인 일본은 프랑스와 미국의 양해아래 전함구축에 주력하였다. 미국 역시 독일뿐만 아니라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영일동맹에 대응하고자 전함 건조에 나섰다. 그리하여 1차 대전에 즈음하여 영국, 독일, 미국, 일본은 모두 엄청난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 혼란한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의 경쟁자는 영국과 일본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 영국, 일본이 다시 전함구축 경쟁에 돌입하였다. 이들 나라의 전함 구축 규모는 단순한 1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2위와 3위가 동맹할 것을 고려하여 상대방 두 나라의 해군력을 합한 규모 이상을 목표로 하였다. 

미국의 주력함 건조 계획은 1916년 8척이었다. 1918년에는 해군이 28척으로 계획하였으나 최종적으로 16척으로 결정되었다. 미국의 목표는 대서양에서 영국과, 태평양에서 일본과 동시에 전쟁을 하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전함의 규모를 가지는 것이었다. 영국 역시 상대방들을 압도할 수 있도록 4척의 전함과 4척의 순양함을 추가로 건조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역시 1920년까지 전함 8척과 순양함 8척을 보유할 건조계획을 세웠다. 일본은 “세계 대양을 재패해야 한다”는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사토 데츠타로의 주장에 따라 노후화된 전함을 포함하여 각각 8척의 전함과 순양함을 추가적인 예비전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이를 위해 재정의 30%를 전함 구축비용으로 책정하였다. 

특히 태평양에서 경쟁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은 서로를 잠재적인 적대국가로 상정하고 군비경쟁을 가속화하였다. 당시 군비전문가들은 일본이 미국의 군사력에 접근하는 1921년 이후에 양국이 태평양에서 전쟁을 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영국은 미국과 일본의 군비 증강을 중단시켜 자신의 군사력 우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미국 역시 일본의 추격을 경계하였다. 이상주의자였던 미국의 윌슨대통령은 국제기구와 국제조약을 통한 국제평화를 주장하며 영국과 일본에 대해 군축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워싱턴 조약에 의해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력함 톤수는 5: 5: 3: 1.75: 1.75의 비율로 제한되었다. 

워싱턴 조약은 세계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영국과 미국이 힘을 합쳐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일본의 군비증강을 견제한 것이었다. 워싱턴 조약에 불만을 품었던 일본은 계속해서 군비증강을 하였다. 결국 일본은 1934년 워싱턴 조약을 파기하고 본격적으로 미국과 영국에 대항하였다. 독일과 일본은 군비를 증강하면서 영불과 미국을 각각 유럽과 태평양에서 견제하기 위해 전략적인 협력관계에 돌입하였다. 

일본은 이미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움으로써 최혜국 동등대우라는 문호개방정책을 위반하여 미국과 태평양전쟁의 불씨를 만들었다. 나아가 독일과 일본의 전쟁분담 계획에 따라 1939년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였고, 독일은 체코를 병합하고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양국은 1940년 공식적인 동맹을 맺고 유럽과 태평양에서 각각 전쟁에 돌입하였다.

미국이 영국과 전쟁을 하지 않고 패권을 승계한 이유는 독일과 일본이 양차 대전을 일으키면서 미국과 영국이 동맹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공동의 적과 싸우면서 영국은 자연스럽게 미국에 굴복하였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 난 직후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 물자를 지원하는 등 이미 경제적으로는 전쟁에 참여한 상태였다. 그런데 독일에 밀리던 연합군이 파병을 요청하자 윌슨 대통령은 내심 참전을 원하였지만 도덕적 명분을 필요로 하였다. 독일은 이미 연합군에 전쟁 물자를 수출하는 미국의 상선에 대해 “잠수함 U보트를 통해 무제한 공격을 하겠다”고 경고한 상태였다. 1915년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 U보트에 의해 격침되어 124명의 미국인 승객이 죽자, 윌슨 대통령은 참전할 것을 대비하여 군비를 증강하였다. 하지만 노동조합 등 민주당의 지지세력들이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윌슨 대통령은 1916년 대선에서 사실상 전쟁 불참을 약속하는 평화강령을 선언하였다.

1917년 독일은 멕시코의 카란사 대통령에게 “멕시코가 독일 편에 서면 전쟁에서 이긴 후 1848년 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에 빼앗긴 영토를 다시 멕시코에 돌려주겠다”는 ‘짐머만 비밀전보‘를 보냈다. 그런데 미국이 암호를 해독하여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 해 3월 3척의 미국 선박이 독일 해군에 의해 격침되었다. 같은 해 4월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가 연합국에서 탈퇴하였다. 독일이 승리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되자 여론은 전쟁 참여로 기울어졌다. 윌슨은 1917년 4월에 상하 양원 합동 회의에서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였고 그 해부터 50만 명의 미군이 유럽에 파견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1923년 체결된 영국-미국 채무협정으로 확정된 영국의 전쟁 부채는 46억 달러, 1926년 4월 26일 체결된 미국-프랑스 채무협정에 의해 확정된 전쟁 채무는 40억 달러였다. 영국은 독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 그 돈으로 미국에게서 빌린 전쟁차관을 갚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독일의 경제가 붕괴되면서 영국은 미국에게 전쟁차관을 제때에 갚을 수 없었다. 영국은 이러한 전쟁차관을 미국이 감면시켜 주길 원하였으므로 미국의 외교정책에 협력하였다.

히틀러는 1928년 『신질서(Neuordnung)』라는 저술을 통해 독일이 세계를 지배하는 미래의 세계질서를 제시하였다(Hitler, 1941). 히틀러는 일본이 장래 게르만의 세계지배를 위협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히틀러는 먼저 일본과 협력하여 미국까지 굴복시킨 후 일본과 최후의 대결전을 통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전략을 구상하였다. 

신질서에 따르면 먼저 독일이 게르만계 국가들을 통합하여 게르만제국을 건설한 후 유럽과 아프리카를 점령한다. 히틀러의 신질서의 일부인 ‘동방대계획(The Generalplan Ost)에 따르면 독일은 중앙유럽과 동유럽을 정복하여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을 노예로 삼는다. 독일은 나머지 서부유럽과 남부 유럽에 독일인을 이주시켜 식민통지를 한다(Norman, 1974).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세계지배를 위하여 일본과 협력하여 소련, 중국, 서방국가들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소련에 대해 우랄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독일이 동쪽은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구상하였다. 독일과 일본은 1942년 비밀회담을 통해 중국의 영토를 양자강을 기준으로 양국이 분할하기로 하였다. 히틀러는 중동과 인도 역시 일본과 분할하여 점령하고자 하였다. 다만 히틀러는 아프리카 전부를 독일의 식민지로 삼는 대신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태평양과 호주, 뉴질랜드 등 동아시아는 일본의 지배로 남겨주기로 하였으며, 그에 따라 일본은 아시아를 지배하는 대동아경영계획(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을 수립하였다.

히틀러는 유럽과 러시아 및 중국을 먼저 점령하는 유라시아 우선 정책을 구사하였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은 패전국이라서 해군력을 증강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2차 대전에서 주로 지상전에 의존하였다. 독일이 대서양에서의 전면전을 피하고 유라시아에서 지상전에 주력함으로써 미국과 독일의 전면전은 그만큼 늦추어졌다. 히틀러는 해양세력인 일본과 동맹을 맺어 일본이 태평양에서 미국과 대립하도록 하였다. 또한 히틀러는 남미를 직접 정복하지 않고 당분간 독일의 경제적 식민지로 남겨두되 장기적으로 남미의 나치세력을 키워 나치 정권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히틀러는 유럽을 전부 정복할 때까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먼저 영국을 굴복시킨 후 영국의 해군과 일본의 해군을 이용하여 미국과 해상 전쟁을 벌이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영국이 독일에 패배하면 미국이 캐나다를 병합할 것이고 이에 반발한 영국이 자신에게 협조할 것이라고 믿었다. 히틀러는 유럽 정복 이후 일본과 함께 미국에 대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1941년 비밀회담을 하였다.  

히틀러의 신질서는 실제로 독일의 전쟁계획에 반영되었다. 히틀러는 유럽을 정복 중이던 1941년 1월 31일 연설에서 “올해는 유럽의 신질서가 도래할 것이며, 이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서막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은 히틀러의 신질서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히틀러가 애초부터 미국과 전쟁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기 9개월 전인 1941년 3월 15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히틀러의 신질서는 유럽정복뿐만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모든 선거체제를 전복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또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해 10월 27일 “독일은 대서양 건너편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하지만 그들의 잠수함과 레이더를 보면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고 “미국이 획득한 히틀러의 전쟁 계획 지도에 따르면 히틀러는 파나마를 포함한 중미를 점령하고 재분할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독일과 일본이 전쟁 준비에 전념하자 미국은 1939년 독일과 일본 등 여러 나라와 동시에 전쟁을 하는 무지개 전쟁계획을 수립하였다. 무지개 전쟁계획은 미국이 영국이나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경우와, 맺지 않는 경우에 독일, 일본과 동시에 전쟁을 하는 계획이었다(Steven, 2002).

1차 대전 종전 이후 국제연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분할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게르만민족의 자결과 게르만인의 '생활공간' 확보를 명분으로 게르만계 국가를 병합하여 게르만 대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에 1935년 프랑스와 소련은 히틀러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체코를 보호한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히틀러는 1938년 3월 게르만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으며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인 거주자 지역인 주데텐란트 할양을 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 및 이탈리아는 유럽전쟁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1938년 뮌헨 협정을 통해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합병하도록 승인했다. 체코는 국토의 30%를 잃고, 500만 명의 인구를 잃었다. 뮌헨 협정 직후 체임벌린 영국수상은 히틀러와의 협정으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 지켜냈다고 선언했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두 나라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하여 폴란드와 발트3국을 각각 점령하기로 하였다. 독일은 그 다음달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7년 「격리연설」에서 “미국이 국제정치의 무법성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윌슨주의가 추구하는 평화추구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임을 밝혔다. 1938년 미국은 중국에 무기판매를 결정했고,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를 권고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은 미국에게 참전을 요구하였고, 프랑스가 1940년 6월 독일에 항복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를 설득할 수 있는 전쟁 참여 명분을 찾았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에 대해 원유 등 금수조치를 함으로써 일본의 공격을 유발하였다. 미국은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과 일본의 동맹인 독일에 대해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양차 대전 사이의 제국주의 경쟁(국제연맹의 실패와 국제연합의 출범)

미국은 먼로주의 정책을 통해 중남미를 독점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문호개방정책을 통해 태평양과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 열강들과 동등한 지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은 1차 대전에 즈음하여 영국을 포함하여 어떤 유럽의 강대국 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전 세계에 걸쳐 개입정책과 고립정책을 구사할 수 있는 외교적 자유를 획득하였다. 

또한 이 시기 미국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미국은 자신의 생산물을 팔 시장과 원자재를 공급받을 지역을 찾아야 할 입장이었다. 하지만 인도, 중동, 극동,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는 이미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미국이 진출하기 어려웠다. 결국 미국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에 진출하려면 유럽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균열시켜야만 하였다.  

1차 대전에 참전한 윌슨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문호개방주의를 민족자결주의로 더 구체화시켰다. 민족자결주의는 중남미 대륙에 대한 유럽의 개입을 차단한 먼로주의나 중국의 식민화에 반대하고 영토 보존과 자유무역을 주장한 문호개방정책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해당 지역에서 유럽의 지배권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유럽 열강들이 새로운 식민지를 획득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기존의 식민지도 식민지의 요구에 따라 독립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민족자결주의에 따르면 신생국이 바로 공화국을 세울 문명적 능력이 없다면 열강의 후견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미국은 이러한 신탁통치 기간에 신생국에게 미국식 공화주의와 자유무역 제도를 이식시키고자 하였다.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윌슨 대통령은 ‘평화에 관한 14개항’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민족자결, 민주주의, 중립국의 권리, 항해의 자유, 자유무역 등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에 토대하여 세계의 패권질서를 재편하고자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장하였다. 윌슨 대통령의 제안을 수용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정작 미국의 상원은 임기 말의 병약한 윌슨 대통령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의 가입을 거부하였다. 

미국은 1차 대전에 패배한 독일제국에게 민족자결과 내정불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14개조를 항복조건으로 내세웠다. 독일제국의 황제가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독일 사민당에게 정권을 내 준 후 사민당 정부는 이러한 항복조건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항복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이 14개조를 독일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가혹한 배상을 요구하여 독일이 분개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1차 대전 직후 민족자결주의라는 명분에 의해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집트 등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하고 현재의 터키로 축소되었다. 당시 중동은 페르시아, 즉 이란을 제외하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 오스만 제국을 해제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전후 문제를 다룬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해 실현되었다. 먼저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모든 이권을 박탈당하였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는 비밀리에 ‘삼자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한 독일의 이권을 넘겼다. 

상원에 의해 거부된 윌슨의 구상은 2차 대전 직후 루스벨트의 신생독립국에 대한 신탁과 유엔구상에 의해 실현되었다. 1차 대전 직후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사실상 독일과 오스만 제국과 같은 패전국에 국한되어 적용되었다면, 2차 대전 직후의 루스벨트의 신탁은 일본과 독일의 식민지에는 물론,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 등 연합국이 점령한 식민지에서도 적용되었다. 루스벨트는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후 세계체제의 구상에 있어 식민지 시장에 대한 미국의 접근을 보장받고자 하였다. 이에 미국은 식민지의 독립을 영국과 프랑스에 요구하였다. 

2차 대전의 승전국인 영국 역시 민족자결주의라는 명분으로 인도를 상실하였다. 인도인들은 20세기 초부터 대거 미국으로 건너가 공장노동자와 철도노동자로 일하였다. 1차 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인도계 미국인들을 자극하여 인도의 독립을 주장하는 인도계 미국인들의 단체가 생겼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인도계 미국인들이 ‘가다르 당(Ghadar Party)’을 조직하였다. 인도의 독립에 동조하는 미국인들이 ‘인도의 해방을 위한 친구들(Friends for the Freedom of India)’을 결성하였다. 2차 대전 중에 버마와 가까운 인도 국경에 수천 명의 미군들이 주둔하면서 미국은 인도의 독립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인도를 독립시킬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간디는 루스벨트에게 인도의 독립을 위해 미국이 개입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영국이 ‘인도해방운동(Quit India movement)’ 관련자 수천 명을 체포하자 루스벨트는 다시 처칠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루스벨트는 인도의 독립을 지원하던 장제스의 주장에 동조하여 1942년 3월 10일 처칠에게 “우선 인도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허용하고 향후 1년 안에 인도를 독립시키자.”고 제안하였지만 영국은 거부하였다. 

인도가 하나의 나라로 형성되면서 독립을 요구하자, 영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을 이용하여 분리 지배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파키스탄이 1947년 인도에서 분리되어 독립하였다. 하지만 벵골어를 사용하는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 중앙정부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인도가 동파키스탄을 지원하면서 1947년과 1965년에 이어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생하였다. 인도의 승리 후 1971년에 방글라데시의 독립이 확정되었다. 한편 70%가 불교계 주민인 실론은 인도와 함께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1948년 스리랑카로 독립하였다.

8월 18일 캠프 데이비드 정신(한미일 정상회의 공동성명) 해설

김장민 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연구위원(정치학 박사)


미국의 새로운 지배전략에 한일을 종속시키는 노예 선언

중국의 지위는 세계분업 체제에서 미국의 협력자였으나 현재 협력자 및 경쟁자로 전환됐으며 미래의 잠재적인 적국이다. 러시아 역시 미국의 협력자였지만 현재 협력자, 경쟁자, 적국의 지위를 겸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의 세계전략은 군사적으로 중러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것이며, 경제적으로 협력하면서도 중러의 추격을 따돌리는 것이며, 정치적으로 중러를 고립시키는 한편 미국식 체제를 수용하도록 유도 및 강요하는 양면책이다. 

미국이 중러를 고립시키려면 중러가 인접국가와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대립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에 따르면 미중러 관계는 협력 및 경쟁관계이지만 중러와 제3국 관계는 적대적이어야 한다. 즉 미중러 사이는 냉전이 아니지만 중러는 주변 국가와 냉전상태가 되야 한다. 나아가 미국이 직접 개입하는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중러가 인접국가와 지역전쟁을 하는 것도 미국 입장에선 용인할 수 있다. 유럽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아시아에서 한반도와 대만전쟁이 그런 경우이다. 이번 한미일정상회담은 이런 미국의 새로운 세계지배전략에 한일을 종속시킨 결과물이다. 


한반도 내에서 한미일 군사훈련을 정례화하여 한일동맹 추진으로 한미일동맹 완성

첫째 바이든 시대에 와서 한일군사동맹을 성사시키려는 미국 역대 대통령의 염원이 결실을 맺게 됐다. 재선을 앞둔 바이든에게 최대 외교성과인 셈이다. 한일군사동맹은 겨우 군사정보 공유체계에서 첫발을 디딘 수준이었다. 비록 한반도 밖에서 한미일 군사훈련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한반도 영역에서 한미, 미일 군사훈련이 통상적이었다. 이제는 한반도 내에서 한미일 군사훈련이 일상화되는 셈이다. 처음에는 북의 미사일에 대응하는 해상훈련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육상 방어훈련 종국에는 북에 상륙하는 육상훈련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성명서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한일 관계를 변화시킨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용기 있는 리더십을 평가하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군대위안부, 후쿠시마 핵 폐수 방출 등 한일 간의 과거사와 현안에 있어 한국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강요해왔고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로 그런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미국을 아버지로 일본을 형님으로 모셨다. 


한일은 전 분야에서 미국의 가치와 기준, 체계를 수용해 식민지적 지위로 전락

둘째 한일은 최고수준에서 모든 분야에서 미국과 포괄적인 동맹을 추진함으로써 한일이 미국체제에 전반적으로 종속되는 식민지적 지위로 전락했다. 성명서에 따르면 한미일은 최소한 연례적으로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수시로 외교, 국방, 정보감시, 국가안보보좌관, 재무, 산업, 상무 분야의 최고회담을 정레화하기로 했다. 한일은 민주주의동맹, 인권, 외환금융(수출입은행), 사이버 전쟁, 기후환경, 전염병 및 보건 관리, 청년 및 차세대 지도자 개발, 자원, 과학기술 표준 시스템, 우주 개발과 관리 등 전 분야에 걸쳐 미국식 가치와 기준, 체계를 수용하기로 했다. 


한일은 중러와 군사, 정치, 경제, 정보 등 전 분야에서 적대관계로 전환

셋째 한일은 한반도와 동북아, 아세안, 인도태평양은 물론 유럽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에 복무할 것을 맹세함으로서 중국 및 러시아와 군사, 정치, 사이버전쟁, 무역, 에너지와 자원 공급망, 첨단기술 등 전 분야에서 적대적 관계로 진입했다. 미국의 의도는 한미일 동맹이 오커스와 쿼드와 연합하면서 인도태평양에서 중러를 봉쇄하는 아시아 나토가 탄생하고 다시 이 아시아 나토와 유럽 나토와 연합하여 세계사령부를 완성하려는 것이다. 성명이 아세안과 메콩강을 언급하는 것에서 보듯이 미국은 한일을 내세워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배권을 확장 강화하려는 의도이다. 

성명은 한미일이 남중국해와 대만에서 중국과 맞설 것을 최초로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특히 한국은 한반도에서 북과의 전쟁 위험이 상존하고 있는 조건에서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대결하고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함에 따라 러시아와도 대결하게 됐다. 윤석열은 자신의 조국에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는 전쟁을 끌어들이는 한미일 정상회담을 최대 외교성과로 자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