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합법 비밀정당의 한계 극복

1) 정당의 필요성과 공산주의자동맹의 출현
공산당 선언에 따르면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적으로 증가할 뿐 아니라, 점점 더 큰 규모로 집중되어 그 힘이 커지고, 또 스스로도 그 힘을 더욱더 느끼게 된다. 19세기 초반부터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계급이 성장하고 그로인해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 결과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자연적으로 발전하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다른 계급에 반대하는 노동자의 공동투쟁에 참여함으로써만 하나의 계급을 형성한다. 이러한 계급의식의 발전과 노자간의 대립은 노동자에게 단결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고 경제적으로 노동조합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정당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공산주의자동맹뿐만 아니라 그 전신인 추방자동맹과 의인동맹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탄생하였다.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주의자동맹의 선언문인 공산당 선언1849공산당 선언의 독일판의 성격을 지니는독일에서 공산당의 요구를 통해 노동계급과 공산주의자들의 의식적인 정치투쟁을 강조하였다. 공산당 선언에서 보듯이 마르크스는 노동자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1864년 마르크스가 기초한 국제노동자협회총칙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유산계급들이 조직한 낡은 모든 정당과 대립되는 특별한 정당으로 조직되는 것은 사회혁명의 승리와 계급의 폐지를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즉 사회주의운동이 지배이데올로기와 지배체제를 깨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자들의 적극적인 개입과 의식적인 조직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노동자 정당의 출현은 온갖 분산적 경향과 싸우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성을 확립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또한 거꾸로 정당결성이 계급의식 형성의 도구가 될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은 평상시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정치교육에 주력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마르크스 등 선진적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기존의 추방자동맹과 의인동맹의 편협성과 폐쇄성을 극복하고자 의식적으로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자동맹은 음모적인 비밀결사조직인 의인동맹이 탈바꿈되어 가장 초보적인 정당형태로 발전해나갔다. 마르크스가 음모적인 의인동맹을 정당적 성격을 지니는 공산주의자동맹으로 전환했다는 점 자체는 마르크스가 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은 노동자운동의 초창기에 과학적 공산주의 원리를 공산당 선언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기치로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그것들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확산시키는 것을 시작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초의 혁명적 정치조직이었다. 따라서 동맹은 그 이후 설립된 각종 혁명적인 노동자조직과 공산주의자 조직의 선구자였다.
한편 19세기 중엽 프랑스와 독일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가 확보되지 못한 조건에서 합법적인 대중정당이 불가능하였다. 1831년의 리옹 봉기 이후 파리를 중심으로 공화파 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가 강화되자 프랑스 정부는 1834년 탄압정책을 취하여 20명 이상의 모든 결사를 금지하는 결사금지법을 제정하였다. 비밀결사 '계절협회'로 상징되듯이 공화파 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는 지하활동으로서 유지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정세와 정부의 대응에 따라 합법과 비합법을 넘나들었다. 이들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면 새로운 이름을 내걸고 늘 복구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추방자동맹과 의인동맹 역시 생사까지 같이 하는 음모적인 비밀결사조직의 형태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의인동맹을 계승한 공산주의자동맹은 과거에 비해 음모단체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합법적인 정치단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비밀결사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근대적 의회가 나타나기 전에 대중투쟁과 봉기에 의해 노동자혁명을 시도한 비밀결사이며, 모든 계급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지향하는 공산주의자의 행동위원회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그 자체가 공개적으로 등장하는 일은 없었고 동맹원은 각지의 노동자협회에 참가하거나 부르주아민주주의자와 공동으로 투쟁하며 활동하였다. 동맹의 주장은 각종 소책자와 전단지 그리고 그 밖의 인쇄물을 통해 동맹의 이름은 숨긴 채 전해졌다.
공산주의자동맹이 여전히 비밀조직이었다는 점만을 주목하여, 마르크스가 노동자정당의 전형을 비합법적인 전위정당으로 설정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전신인 의인동맹의 음모적 성격과 편협성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산주의자동맹의 출범은 의인동맹의 제한성을 극복하려는 마르크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은 그 외곽에 대중조직을 두고 평상시에는 선전과 선동에 주력하면서 과도한 봉기노선을 경계하였으며 혁명 시기에는 대중적 혁명조직으로 전환하였다. 혁명시기에 있어 공산주의자동맹은 신라인신문을 선전수단으로 삼는 한편 공개적인 대중단체를 내세워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하였다. 그 결과 공산주의자동맹의 회원들은 흩어져 자기가 처한 혁명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공산주의자동맹이라는 조직 자체는 혁명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자동맹이 대규모 대중조직이 아니라 소규모 비밀조직으로서 또한 완전한 당의 모습을 완성하지 못한 채 혁명적인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사례에서 보듯이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보장되거나 혁명적 기운이 높아질 때는 비합법적 비밀정당의 한계가 명확해진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므로 비합법적 전위정당을 합법적 대중정당으로 신속하게 전환할 수 없는 것이 역사적 현실이다. 반대로 갑자기 반혁명의 상황이 도래할 경우 합법적 대중정당을 정세에 맞게 비합법적 전위정당으로 신속하게 전환하는 것 역시 어렵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동맹으로서는 자신의 바깥에 정세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대중조직을 두고 이것과 자신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혁명의 패배가 확실해진 1849년 가을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중앙위원회를 재구성하고 유럽 전역에 걸쳐 공산주의자동맹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것이 18503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이다. 이 즈음에 비밀스런 중앙집권적인 당을 재건하려는 마르크스의 태도는 레닌의 전위당 개념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마르크스가 적극적으로 원한 것이 아니라 폭압적인 정세로 인해 불가피한 것이었다.
비밀전위조직의 한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적 인식은 공산주의자동맹을 사실상 계승한 국제노동자협회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국제노동자협회는 변화된 정세를 반영하여 공산주의자동맹의 비밀성과 편협성을 극복했으며, 따라서 대중적이고 합법적인 국제적인 노동자혁명조직이었다. 또한 독일 노동자정당의 태동시기에 설립된 공개적인 대중조직인 전독일노동자협회나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에 대한 마르크스의 태도를 보더라도 마르크스가 상정한 노동자혁명조직의 전형이 비합법적인 전위정당이었다고 볼 수 없다.
 
 
2) 노동자대중조직의 건설과 선전활동 및 대중투쟁
 
18482월 프랑스 혁명과 3월 독일혁명이 일어나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일부 쟁취되고 혁명적 열기가 대중화되었지만 공산주의자동맹은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공개적인 대중 활동에 나설 수 없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말하는 '공산당'은 공산주의자동맹 자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을 의미하였다. 이에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이 비밀조직으로서 갖는 한계를 절감하고 대중적인 혁명운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였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지도부들은 비합법조직으로서 공산주의자동맹의 한계를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극복하고자 했다.
첫째, 공산주의자동맹은 다양한 대중적인 노동자조직을 설립하거나 기존의 노동자조직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조직을 주도하였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지도부는 평상시에도 자신들의 혁명 활동을 공산주의자동맹의 비밀활동에 국한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동맹은 공개적인 대중조직을 별도로 만들어 동맹의 결정을 실천하고 합법적이며, 대중적인 혁명 활동에 나섰다. 이러한 공개조직을 통해 노동자대중과 일상적으로 소통하고 교육선전을 전개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이러한 모습은 대중을 당 중앙에 예속시키는 권위주의 당관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공산주의 교리를 단지 대중에게 설교한다는 선전주의적 당관과도 차이가 있었다.
18451월 프로이센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된 마르크스는 벨기에의 브뤼셀로 이주하여 엥겔스와 함께 18462'브뤼셀 공산주의 통신위원회'를 결성하고 독자적인 실천 활동에 착수하였다. 마르크스는 이 위원회를 통해 벨기에의 민주주의자와 함께 투쟁하면서 공산주의자의 조직화를 시도하였고, 이는 일정한 진척을 보았다. 또한 독일 국내에서도 작게나마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당초 런던에서 밀려난 바이틀링도 브뤼셀 공산주의 통신위원회에 참가했으나 곧바로 마르크스와 논쟁을 일으킨 후 조직을 떠났다. 마르크스는 18478월 공산주의자동맹의 브뤼셀 지부의 대표로 선출된 직후 엥겔스와 함께 독일인노동자협회를 창립하고 브뤼셀 독일신문을 기관지로 삼았다. 이 협회는 같은 해 9월 브뤼셀의 민주주의협회를 창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마르크스는 이 협회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 조직을 확충하는 한편 기존의 민주주의협회를 통해 대중들을 조직해 나갔다.
18483월 혁명 직후부터 4월에 걸쳐서 전 독일에서 시민, 노동자의 협회조직이 설립되었다. 18484월 첫째 주 파리에서 쾰른으로 돌아 온 마르크스 역시 4월 말 쾰른의 공산주의자동맹의 지도부들과 함께 민주주의협회, 노동자협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적극 참여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들 3개 조직의 공동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이 공동위원회는 그 당시 임시적으로 쾰른 민주주의지역위원회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동료들은 8월에 열린 제1차 라인 주 베스트팔렌 민주주의지역위원회 회의에 쾰른을 대표하여 참여했고, 이들은 이 회의에서 결성된 쾰른 상임지역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84811월 노동자협회를 장악하고 있었던 고트샬크가 체포된 후 마르크스가 그 뒤를 이어 노동자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둘째, 공산주의자동맹은 추방자동맹시절부터 기관지추방자를 발간하는 등 기관지를 통한 대중적 선전활동을 지속적으로 강화하였다. 마르크스는 쾰른에서 184861일에 신라인 신문을 발간하고 스스로 편집장이 되었으며 이 신문은 이후 공산주의자동맹의 실질적인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이 신문의 편집위원은 뷔르거스, 드롱케, 엥겔스, 베르트, 페르디난트 볼프, 빌헬름 볼프 등이었으며, 인쇄는 디츠가 담당했으며, 발행인은 코르프였다. 신라인 신문라인 신문이상으로 성공적이었으며, 6,000부까지 발행부수를 늘렸다.
마르크스는 184874, 5일의 안네케와 고트샬크의 체포에 관한 비판 기사로 인해 최초로 판사의 소환명령을 받았다. 1114일에 마르크스는 예심법원 검사 헤커를 다룬 기사 때문에 다시 소환명령을 받았다. 184811월 프로이센의 베를린에서 의회를 해산시켜 무력화하려는 친위정변이 발생하자, 신라인 신문1117일 기사에서 납세의 거부와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항하도록 인민에게 호소하였다. 이 기사로 인해 편집위원들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마르크스 역시 소환명령을 추가적으로 받았다. 결국 1849518일 무국적자로서 외국인이었던 마르크스는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는다. 엥겔스와 드롱케 역시 벨기에로 망명함으로써 518신라인 신문은 발행을 정지하게 되고 다음 날인 519일 마지막 호는 붉은색으로 인쇄되었다.
사실 마르크스는 항상 정치조직 활동과 이를 대변하는 선전활동을 병행하였다. 마르크스는 184211일에 창간된 쾰른의 자유파의 신문이자 헤겔 좌파의 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하다가 18433월 이 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실질적인 편집장의 역할을 맡았다. 184310월 부인과 함께 파리로 간 마르크스는 그곳에서 격주로 발행되는 독일어 신문 전진에 지속적으로 기고하였다. 마르크스가 이 신문을 통해 프러시아 반동제도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하자, 프러시아의 기조내각은 프랑스정부에 요청하여 18451월에 마르크스를 프랑스에서 추방하고 전진을 정간시켰다. 신라인 신문 정치경제평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런던에서 18502월에 창간하여 185011월까지 발간한 월간지로서 런던과 함부르크, 뉴욕을 발행지로 했으며 공산주의자동맹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맹의 주장은 익명으로 된 각종 소책자와 전단지 그리고 그 밖의 인쇄물을 통해 노동자 대중들에게 배포되었다. 18483월 독일혁명 직후 공산주의자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를 집필하도록 하였다. 샤퍼, H. 바우어, , W. 볼프로 등 공산주의자동맹의 간부들이 이 문건에 서명했으며, 전단지로 파리에서 인쇄되어 독일 곳곳에 배포되었다. 이 내용은 베를린, 만하임, 트리어, 라이프치히 등의 민주주의적 신문에 전재되었다.
셋째 공산주의자동맹은 혁명적 정세가 높아지면, 노동자조직뿐만 아니라 중간층 조직과 연대하여 다양한 대중투쟁을 주도하였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자, 브뤼셀에 있던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 산하 지방조직들과 독일노동자협회, 브뤼셀민주주의협회를 동원하여 대중봉기를 준비하였다.
쾰른의 공산주의자동맹 회원들이 18482월 혁명 직후인 33일 시청 광장에서 발생한 노동계급의 집단시위를 조직하고, ‘민중의 요구라는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쾰른의 공산주의자동맹은 이 문건을 통해 언론신문결사의 자유뿐만 아니라 입법과 행정이 민중에 의해 담당되어야 함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이를 위해 보통선거, 상비군의 폐지 및 민중의 무장화를 제시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노동의 보호, 생존권의 보장, 국가재정에 의한 의무교육제의 도입 등 노동계급의 사회적인 요구를 주장하였다.
쾰른으로 돌아 온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지도부들은 주로 대규모 집회를 열어 집단적인 청원을 요구하거나 행진하였다. 이들은 노동자조직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 등 중간층까지 포함된 민주주의협회를 이끌면서 여러 개의 결의문과 집단청원서를 직접 제안했다. 이들 집단청원서는 수천 명의 서명을 받아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의 국민의회에 전달되었다.
913, 신라인 신문과 쾰른의 공산주의자동맹의 지도부들이 민주협회와 노동자협회에 집회를 호소한 결과 6,000명이 모였다. 집회는 계속 확대되어 17일에 만 명이 넘는 규모에 달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916일 쉴레쉬비히의 독일인들을 덴마크인들의 손에 넘겨주는 덴마크와 휴전협정을 받아들였다. 이에 분개한 민중들이 18일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궐기하였으나, 국민의회의 지시에 따른 구연방군에 의해 6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독일 각지에서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 쾰른에서도 대중적인 저항이 시도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참석한 20일 집회에서는 성명서가 채택되었다.
이에 당국은 925일 인민집회에 참가한 편집자 빌헬름 볼프, 뷔르거스, 엥겔스, 드롱케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다음날 쾰른의 민주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위해 계엄령을 발포하였다. 계엄 직전 쾰른의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시장에 운집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민방위군을 조직하였으나 계엄당국에 의해 해산되었다. 신라인 신문928일부터 1011일까지 휴간을 당했고, 복간할 때까지 호외를 배포함으로써 당국의 조치에 저항하였다. 마르크스는 1845년에 국적을 상실했고 프로이센 정부는 1848822일 마르크스의 국적 재취득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국적이 없는 마르크스에게 체포영장은 발부되지 않았다.
102일 계엄령이 해제되자,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동료들과 함께 다시 선전선동활동과 대중집회를 이어갔다. 비엔나의 10월 봉기가 실패하고 11월 베를린에서 친위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마르크스는 반혁명정부에 대한 납세거부를 공개적으로 선동하였다. 11월 마르크스는 민주주의협회와 노동자동맹을 움직여 쾰른에서 수차례 대중집회를 주도하였다. 1111일에는 마르크스의 주도로 베를린 국민의회에 보내는 청원서가 채택되었다. 이어 13일에는 25인의 인민위원회가 발족하여 쾰른의 대중투쟁을 지도하였다. 쾰른의 노동자동맹은 해산된 시민방위군을 재건하는 방법으로서 특수기동대를 조직하기로 했으며, 마르크스와 신라인신문은 기금모금운동에 결합하였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동료들은 1848년 말에서 1849년 초까지 쾰른당국에 의해 여러 개의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대중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1849115일에 개최된 쾰른노동자동맹의 집회에서 선거에 있어 민주주의자들의 행동통일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였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구성원들은 1849311일 쾰른에서 열린 대규모 선거인단 집회에서 ‘9인위원회에 선출되었고, 9인위원회는 선거인단의 집회를 소집하고 프로이센 국민회의에 보내는 청원서를 직접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샤퍼, 드론케, 엥겔스가 연설한 319일의 집회에는 노동자동맹과 민주주의협회를 비롯하여 6천여 명이 참가하였다.
184953일 드레스덴에서 봉기가 발생하자, 6일 각종 민주주의협회들과 노동자협회들이 회합하였고 이에 쾰른당국은 계엄령을 경고하면서 마르크스와 신라인신문 그리고 공산주의자동맹이 주도하고 있는 혁명적 민주주의단체와 노동자단체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518일 마르크스가 추방당할 때까지 이러한 대중투쟁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동맹 등 대중조직에 대한 쾰른의 공산주의자동맹의 헌신적인 결합, 특히 마르크스의 대중적인 지도력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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