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노동자 독자정당의 확립

1) 노동자통일조직으로 독자적인 노동자정당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 독자정당을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혁명적인 수공업 숙련노동자나 공산주의 활동가들의 독자조직이었다. 따라서 그 구성원에서 농민이나 부르주아는 기본적으로 배제되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초창기에는 일부 소부르주아들이 조직 내에 있었으나 1849년 이후 혁명이 부르주아들의 배신으로 실패한 후 소부르주아들은 공산주의자동맹에서 배제되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중앙위원회는 조직의 재건과정에서 각 지부들에게 소부르주아들과의 연계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마르크스는 노동자정당은 노동자통일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노동자조직들은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통일된 하나의 조직을 지향해야 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와 별개의, 분리된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으며, 다른 노동자당들에 대립되는 특수한 당을 이루지 않는다. 이런 원칙 아래 공산주의자동맹은 노동자통일조직으로서 다양한 공산주의적 노동자조직들과 통합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이 해체된 후 1864년 국제노동자연합을 주도하면서 노동자의 단합을 촉구하였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위원들은 각기 자기나라에서 분산적인 노동자단체들을 전국적인 중앙기관에 의하여 대표되는 전국적 조직에로 통합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공산당이 다른 계급의 정당과 일체의 협력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지 않았다. 즉 특정 단계에서 연대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입장은 두 세력이 공동의 적에 맞서는 싸움에서 통합된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서로 별개의 조직을 유지하면서 연대한다는 전술에 따른 것이다. 즉 노동자정당은 다른 계급과 연대할 수 있지만 항상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이들과 구별되는 혁명정책을 추구해야 한다. 노동자 당은 일정한 조건에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정당이나 당파를 능히 이용할 수 있으나 그 어떤 다른 정당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한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소부르주아 정당과 교섭할 수 있을 것이며, 일정한 조건 하에서는 블록을 결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당 내에서는 소부르주아는 이색분자입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자신의 일로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기에는 너무나 교양이 없으며, 위로부터 즉 박애주의적인 대소 부르주아들의 손에 의하여 해방되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언명하는 사람들과는 함께 나갈 수 없습니다
 
2) 다른 계급과의 관계
 
(1) 농민과의 관계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계급에로의 상승과 민주주의의 쟁취는 사회변혁의 과정을 다수층의 운동으로 만들어 나가는 한 과정에 있어 두개의 계기를 이룬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대체로 혁명이 하나의 정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국민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견해를 대변한다. 이점에서 혁명은 다수자혁명 내지 인민혁명’(Volksrevolution)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타계급 - 농민과 소시민층 - 과의 동맹정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김세균, 1989)
공산주의자동맹과 마르크스는 이런 측면에서 농민과의 동맹을 강조하였다. 농민은 토지와 그에 근거한 생활조건들을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면과 그로부터 해방되려는 혁명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농민의 보수적 측면은 때때로 반혁명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루이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에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직후에 농민이 반혁명으로 돌아서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농민과의 동맹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승리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 2월 혁명정부는 세금을 부과하여 적자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농민이 주요한 과세대상이었기 때문에 농민은 자신에게 과세하고 있는 혁명정부에 환멸을 느꼈다. 이때부터 프랑스 농민에게 공화정은 45상팀의 세금을 의미하였고,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의 희생으로 안락하게 지내는 방탕자로 보였다. 농민들 다수는 이러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가장 혁명적인 현에서조차 농민들은 공공연히 보나파르트를 선출하였다. 농민에게 보나파르트는 부자들의 적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는 부르주아 공화주의의 전복을 상징하였다. 상층 부르주아에게 그는 왕정복고의 희망을 주었다. 군대에게 그는 전쟁을 약속하였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에서 가장 단순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가장 복잡한 의미를 획득하는 일이 벌어졌다.
독일의 소경영농민은 비슷한 조건에서 살지만 이해의 동일성이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1848년과 1849년 독일 봉기에 가담한 농촌인구는 그들 자체의 주도권이 없었기 때문에 봉기에 관여하고 있는 다른 계급의 후미를 형성하였다. 농민은 노동계급과 소상인계급사이를 방황하고 있어서 농민 스스로를 대표하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대변해주어야만 했다. 따라서 독일의 농민들에게는 좀 더 집중되어 있으며 좀 더 계명되어 있고 보다 쉽사리 동요되는 소시민의 선도적 자극이 필요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혁명세력은 농민이 반혁명의 편에 서지 않도록 견인해야 했고, 노동자는 농민과 연대했어야 하였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농민들과 함께 합창을 부르게 될 것이나, 이런 합창이 없는 혁명의 독창곡은 모든 농업국에서 죽어가는 백조의 노래로 전락할 것이다고 지적하였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동맹 활동과 그 이후 과정에서 농민을 단순한 노동자계급의 연대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유일한 동맹의 대상으로 격상하였다. 마르크스는 신라인신문을 통해 무토지 농민과 소토지 농민들을 위하여 봉건대토지를 해체할 것을 주장하는 등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과정에서 노동계급 주도 아래 전체 농민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관계를 강조하였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에서 농민에게 봉건귀족의 토지를 분배하는 것에 반대하고, 이 토지를 국유화하여 농민들을 농업노동자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농촌 내에서 여러 거점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봉건토지들은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집단에 의해 공동 경작되는 대규모 농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농민과 소규모 임차농을 혁명의 편으로 이끌기 위해 혁명정부가 그들에게 융자금을 주고 무료 법적자문을 해주고 봉건적 부담금과 의무를 모두 폐지할 것을 제안하였다.
 
 
(2) 소부르주아와의 관계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자계급과 부르주아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는 소부르주아를 견인하여 연대하는 것은 혁명승리의 조건이다. 18503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에 따르면 혁명적 노동자당은 소부르주아 민주당파가 혁명적 노동자당이 전복하려고 하는 당파를 반대할 때에는 소부르주아 민주당파와 공동보조를 취하고, 소부르주아 민주당파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지위를 공고화하려는 경우에는 이들에 대해 반대해야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이 관여했던 1848년 프랑스 혁명뿐만 아니라 1870년 파리코뮌에서도 이들 중간층과의 연대를 중시하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중간층은 그들이 멀지 않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로 넘어 가게 될 것을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 혁명적으로 된다. 즉 소부르주아는 그들 뒤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서있는 한에서만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혁명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독일혁명에 있어서도 소시민층은 부르주아와 민중들이 함께 시민혁명을 전개할 때는 큰 역할을 했지만, 부르주아가 혁명을 배반했을 때는 독자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아직 독일혁명의 현실에 있어서는 사회의 주요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들 소시민층을 견인하여 대부르주아와 봉건잔재의 반동적 결합을 깨트리는 투쟁에 나서지 못하였다. 문제는 노동자가 소부르주아를 견제, 견인하지 못한다면 소부르주아가 부르주아의 반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18482월 프랑스 혁명 직후에 소상인 및 소상점주 등 소부르주아는 자기 밑의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독자적인 혁명을 기도하자마자, 곧 두려움이라는 의기소침 속으로 뒷걸음쳤다.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에서 상점의 소유주 등 다수의 소부르주아는 혁명 편에 섰다. 하지만 혁명 이후 부르주아의 투자 철수로 인해 경기가 하강하자 상점 소유주들의 혁명에 대한 반발이 커졌다. 실업노동자에 대한 혁명정부의 지원 역시 이들의 반감을 샀다. 그 결과 18486월 노동자들이 봉기했을 때 상점소유주와 같은 소부르주아들은 이번에는 혁명을 진압하는 편에 섰다.
18486월 노동자봉기의 진압과정에서 파리의 소부르주아 즉 카페와 식당의 주인, 포도주상인, 소매상인, 상점주인, 수공업자들보다 더 열심히 싸운 반혁명세력은 없었다. 하지만 소부르주아들이 노동자들을 타도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아무 저항도 없이 채권자의 손아귀에 내맡겨졌다. 결국 2월 이후 만성적으로 질질 끌어왔고, 분명히 묵살되어왔던 소부르주아의 파산이 6월 이후 공공연히 선언되었다.
독일 혁명에 있어서도 노동자가 소부르주아를 반혁명 측에 빼앗길 때는 여지없이 혁명에 실패하였다. 18485월 빈 혁명 이후 실직한 노동자들은 국가와 빈시의 부담으로 토목공사에 고용되었다. 이것이 상인들의 불만을 샀으며, 매뉴팩처들도 전면적인 조업중단에 들어갔고, 교역은 중단되어 혼란에 빠졌다. 중간계급과 노동자들 사이에 냉기류가 형성되었다. 내각은 노동자에게 지급하던 정부보조금을 취소한다는 법령을 발표했고 이에 노동계급이 시위를 일으켰다. 823일 중간계급의 국민방위대는 노동자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이처럼 혁명의 과정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사이에 위치한 농민과 소부르주아들을 부르주아적 질서에 대항하고 자본의 지배에 대항하도록 일깨우고, 프롤레타리아트를 그들의 주역으로 삼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스스로 접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도록 할 때까지,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었고, 부르주아적 질서의 머리카락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반면 1848년 혁명과 달리 1871년 파리코뮌은 노동자계급의 이익뿐만 아니라 농민 및 도시의 소부르주아들의 이익을 위한 조치도 취하였다. 코뮌은 모든 종류의 약속어음에 대하여 3년간의 지불유예기간을 허락하는 동시에 그 기간에 대한 이자를 받지 말 것을 강제함으로써 중간계급들 사이에서 영원한 분쟁의 씨앗이 되었던 채권자와 채무자간의 결산을 슬기롭게 해결함으로써 그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3) 부르주아와의 관계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은 1848년 독일혁명이 부르주아의 배신과 프롤레타리아의 한계로 인해 실패할 때까지는 부르주아와의 연대를 강조하였다.공산당 선언에서는 대공업의 담당자인 부르주아를 이미 낡아버린 생산방식의 산물인 모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 하는 봉건영주들과 중간층에 비해서는 혁명적 계급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봉건영주들과 중간층은 결코 부르주아와 함께 하나의 반동적 대중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적 대립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지만 부르주아가 혁명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려 할 때마다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마르크스는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나라의 민주주의정당 사이의 단결과 합의를 위하여 어디서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848년 혁명 당시 독일의 계급현실은 강력한 봉건귀족의 잔존, 공업 부르주아와 노동자계급의 유약함, 다수의 소상공업자와 방대한 소농업자의 존재로 설명된다. 마르크스는 독일에 이렇다 할 프롤레타리아트가 없기 때문에 그의 운동의 첫 단계가 부르주아혁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를 공격하는 것이 독일 인민의 당면한 임무라고 보았던 진정한 사회주의공산당 선언에서 비판하였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운동에다 사회주의적 요구를 대립시키면서 자유주의, 대의제 국가, 부르주아적 경쟁, 부르주아적 출판의 자유, 부르주아적 법률, 부르주아적 자유와 평등에 대하여 전통적인 저주를 던지며 인민대중을 향하여 이러한 부르주아 운동에서는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반대로 모든 것을 잃을 위험성이 있다고 설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진정한 사회주의의 이론적 모태가 되었던 프랑스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문헌은 독일과 달리 부르주아의 지배 밑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독일에 들어 온 것은 독일에서 부르주아가 봉건적 절대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한 때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은 아직 충분히 발전된 자본주의 계급모순에 들어서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독일의 공산주의가 소규모의 독일 수공업적 관계들에 의해 제한된다는 입장에서 프랑스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념들을 재가공했어야 하였다. 하지만 진정한 사회주의는 이제 막 태동한 독일 부르주아를 반대하는 정부의 무기가 된 동시에 반동적인 독일 소시민의 이익을 대변하였다.
공산당 선언은 제4장에서 "독일이 부르주아 혁명의 전야에 있다"고 지적한 후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직접적인 서막이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마르크스 입장에서 보면 공산주의자는 독일에 대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먼저 부르주아혁명을 전망해야 했다. 마르크스는 1846년 브뤼셀통신위원회 회의에서 당장은 공산주의 실현이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 우선 부르주아들이 지배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는 부르주아가 가능한 한 빨리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원조하고, 그런 다음 프롤레타리아가 다시 부르주아를 타도해야 한다며 일종의 연속혁명론을 주장하였다.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있어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을 견인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 공동전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독일의 공산당은 부르주아가 혁명적으로 행동하는 한 그들과 손을 잡고 절대군주제, 봉건적 토지소유 및 반동적 소시민층과 싸워야 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혁명의 분명한 지지자로서, 그리고 독자적인 노동자계급 정당의 대변자로 나서는 대신 급진적 민주주의 극좌파로서 부르주아혁명을 그 모순이 훤히 드러나는 데까지 밀어 붙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의 구성원들 역시 급진적인 부르주아와 함께 급진적인 민주주의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공산당 선언부르주아와의 싸움은 부르주아가 승리한 날에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도권이 보장되는 혁명적인 민주주의 투쟁전선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여 1888공산당 선언영어판에는 민족적 계급의 지위에까지 올라서며라는 말 대신에 민족의 지도계급의 지위에까지 올라서며라고 수정되어 있다.
이런 배경에서 독일혁명이 발발하자마자 발표된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17개조는 공화제, 보통선거, 봉건적 부담들의 폐지, 정교분리, 상속권의 제한, 고도 누진세, 보통교육의 무료화 등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소부르주아, 소농민의 공통괸 이익과 직결되는 사항을 내걸었다. 또한 이 문건은 봉건적 영지나 사적 은행, 운수기관의 국유화 등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서도 가능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준비하게 되는 여러 방안들을 요구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는 독일에서 부르주아와의 공동전선을 고려하여 공산당 선언10개 항 중 4개항만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에 따르면 공산당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적대적 대립에 관하여 가능한 한 명확한 인식을 노동자에게 주는 일을 한시라도 중지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독일노동자들이 부르주아의 지배가 반드시 도입하게 될 사회적 정치적 제 조건을 부르주아 자체를 반대하는 무기로서 즉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독일의 반동계급들이 전복된 후에 즉시 부르주아 자체를 반대하는 투쟁이 개시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즉 시민혁명을 향후의 노동자혁명의 조건으로 이용할 수 있다. 같은 연장선에서 마르크스는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이 보수적 및 급진적 부르주아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사회민주당과 손을 잡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적 전통에서 오는 공상과 환상에 비판적으로 대할 권리를 포기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의 지배는 출판과 결사의 자유와 같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에게 대항하는 신무기를 주기 때문이며, 당도 그러한 무기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1847년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지배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투쟁기구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당의 창립과 동시에 훌륭한 투쟁무기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는 관료주의 지배보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의 지배를 더욱 선호하였다.
마르크스의 로드맵은 의회에서의 민주파의 승리와 보통선거의 실시, 그리고 그 후의 노동자에 의한 민주파의 정화 등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쾰른에서 전개된 것처럼 독일 전역에서 민주파는 잇따른 프로이센 정부의 공격으로 위축하게 되었고 국왕에게 접근해 갔다. 그 결과 독일혁명은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귀족지배의 잔재는 완전히 척결되지 못하였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은 1848년 독일혁명이 패배한 후 부르주아의 배신을 비판하면서 부르주아와의 연대를 단절하였다. 독일 혁명이 일정한 성과를 낸 것은 부르주아와 민중들의 연계 때문이었고, 반면 이 혁명이 1849년 이후 실패로 끝난 것은 대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들의 배반 때문이었다. 부르주아는 노동자를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봉건세력과 타협하여 농민을 배신하였다. 마르크스 입장에서 보면 그 당시 독일 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주아와의 연대는 옳았으나, 현실에 있어서는 노동계급의 주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혁명이 실패하였다.
1848년과 1849년 독일에서 발생한 혁명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즉 민주주의운동은 노동자, 농민 그리고 소시민의 연합이었다. 이 연합 내에서 주도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어져야 하였다. 왜냐하면 오직 노동자만이 자신의 특별한 계급적 상황에 의해서 소시민계급이 겪고 있는 모든 동요와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 독일의 노동자계급은 아직 그러한 역량을 지닐 만큼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독일 혁명의 주요세력은 중간계층이었다. 실제로 18493월 봉기에 의해 수립된 독일 각지의 임시정부 대부분은 소상인계급을 대변하였다.
프랑스 혁명에서도 부르주아는 곧잘 반동의 길을 선택하였다. 18482월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가 반혁명세력과 함께 노동자운동을 진압한 것과 1871년 프랑스 군대가 적군이었던 독일군대의 도움을 받아 파리코뮌을 진압한 것은 부르주아가 노동자에 대한 공포에서 반동의 뒤에 가서 숨으며, 노동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에게 적대적인 요소들의 세력에 구원을 청했던 경우이다.
1849년 독일 혁명이 종국적으로 실패한 후 부르주아 급진주의가 혁명을 진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와의 연대를 끊고,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최근의 운동 당시에 정부에 들어 가 그 지위를 이용하고 운동을 배반하였고 노동자 당이 독자적으로 진출하려고 하였을 때 이 당을 탄압한 자들, 이자들과는 항상 멀리해야 한다며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와도 결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마르크스가 독일혁명이 실패한 이유를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의 배신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공산주의자동맹 총회는 1849414일 소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과의 조직상의 분리를 위해 민주주의자협회연맹으로부터 탈퇴하여 독일노동자협회연합에 가입할 것을 결의하였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18503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에서 혁명시기에 노동자들은 부르주아들과 별도로 자체무장을 해야 하고 혁명이 성공할 경우 설립될 소부르주아정부와 나란히 자체의 혁명정부를 지방자치 기구나 노동자클럽 및 위원회들의 형태로 구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르크스는 이 호소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소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과 이데올로기적, 조직적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적 입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민주주의 소부르주아가 압박당하고 있을 때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단결과 협조를 선전하며 각종 민주당파를 죄다 포섭하게 될 하나의 대 반정부 정당을 창립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당은 민주주의 소부르주아의 특수한 이익이 감춰지고 있는, 일반적인 사회민주주의적 공상이 지배하는 당이다. 민주주의 소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수한 요구는 제기하지 말아야 할 그러한 당 조직에 노동자를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러한 연합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무조건 해로운 것이다. 이러한 당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들어갈 경우 프롤레타리아트는 간고하게 전취한 자기의 독립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할 것이며, 또 다시 어용 부르주아 민주파의 부속물로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연합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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