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좌파정당의 성숙기 : 양자의 긴장

1) 독일
 
사민당은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1966년까지 야당이었다. 이 기간 동안 집권한 기독민주연합(Christlich-Demokratische Union, CDU)’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NATO와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였고 사민당은 이에 반대해왔다. 동구에서 공산정권의 등장을 경험한 유권자들은 경제계획과 주요산업의 사회화를 주장하는 사민당을 선택하지 않았다. 1949년 사민당은 29%를 얻었으며, 1953년 사민당은 28.8%, 공산당은 2.2%를 얻는 등 좌파정당들이 연거푸 패배하자 사민당은 노선전환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4년 당대회의 슬로건은 가능한 곳에서 경쟁을, 필요한 곳에서 계획을로 바뀌게 되었다. 사민당은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서독의 재무장과 국제기구 참여를 반대하고 무장해제와 집단안보체제를 통해 독일의 즉각적 통일을 선호하였으며 공산당이 모스크바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유로 공산당과 합당하지 않기로 하였다.

사민당은 1957년 선거에서 31.8%를 획득한 후 더욱 적극적인 노선전환에 착수하였다. 사민당은 1959년 고데스부르그 당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을 통해 기존의 무장해제와 핵무기 금지 입장을 유지하였지만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유럽통합에 동의하면서 1960년에는 NATO 가입에 찬성하였다. 사민당 내 좌파와 보수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혁세력과 현실지향적인 시장들이 추진한 고데스베르그 강령은 혼합경제와 의회민주주의를 과도기가 아닌 최종 목적으로 선언한 것으로서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 노선과 일맥상통하였다. 사민당은 전통적인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민주사회주의를 선언하였으며, 민주사회주의의 기본가치는 자유, 연대, 정의로 설정되었다. 사민당은 복지국가 건설 등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정책지향적 대중정당임을 천명하면서 의회주의를 옹호하고 국가권력에 참여할 것을 선언하였다.
또한 사민당은 이 대회에서 경제적으로 생산수단 소유의 사회화를 비롯한 전통적인 사회주의 경제 강령을 폐기하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였으며, '사회주의적 시장경제(Sozialistische Marktwirtschaft)'라는 이름 아래 기민연이 정립시킨 사회적 시장경제를 국민경제의 기본질서로 승인하였다. 사민당은 케인즈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시장경제가 사민당이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실현에 유리하다고 봤다.
사민당은 1961년 서베를린의 젊은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를 수상 후보로 내세워 이미지의 변화를 꾀하였고,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여 사민당 지지는 196136%, 196539%로 높아졌다. 1966년 사민당은 전당적인 토론과 지도부, 의원단, 중앙위원회 등의 표결을 거쳐 기독민주연합과의 대연정을 결정했다. 비판적인 지식인과 당내 좌파들은 이러한 대연정을 강경하게 반대했으나 지도부들은 이들의 탈당을 감수할 태세였다(Freyberg, 1989; 447-449). 결국 사민당은 기민연과의 대연정을 통해 집권하였고 사민당의 집권은 1982년까지 이어진다.
사민당의 칼 쉴러가 대연정의 재무장관이 되면서 실업과 예산적자가 급속히 주는데 여기에는 노조의 임금인상 자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노사정 합의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외무장관이 된 브란트는 서유럽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동구권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동방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결과 소련과는 불가침 조약을, 유고와는 외교관계 복원을, 그리고 동독과는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대연정 내에서 경제와 대외정책의 성공으로 1969년 선거에서 사민당은 43%의 지지를 획득하여 브란트를 수상으로 자민당과 함께 사회-자유주의’(social-liberal)연정을 성립시켰고 1972년 사민당은 46%의 지지로 기민연의 45%를 넘어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케인즈주의적 거시경제 관리는 어려움에 처하였다. 노조는 임금요구에 있어 더욱 전투적이 되었고 1974년 공공부문의 파업은 11%의 임금인상으로 끝났지만 그 여파로 브란트 수상이 물러났다. 1974-5년간 인플레의 와중에서 독일중앙은행은 완전고용보다 물가안정을 추구하였고 사민당 정부 역시 1980년을 전후로 하여 오일쇼크와 무역적자에 직면하자 완전고용을 포기하고 사회보장을 축소해왔다.
1982년 사민당의 연정파트너이자 친자본가 정당인 자유민주당이 그들의 연정파트너를 기민연/기사연의 연합으로 바꾸면서 사민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러한 보수-자유주의 연정이 유연한 정책을 유지하자 사민당은 야당으로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영국의 대처 수상과 달리 독일의 콜수상은 신자유주의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복지국가의 해체와 같은 급격한 방식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한편 통일과 관련하여 사민당은 동독의 급속한 붕괴를 예상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통일과정에서 사민당은 통일의 속도와 잠재적 비용을 비판하는 데 그쳤으며 이에 따라 통일 분위기에 휩싸인 1990년 선거는 통일을 추진한 기민연에 크게 유리하였다.
한편 독일의 노동조합들은 승전국인 미국의 주도로 한 공장에 한 개의 노동조합이라는 원칙 아래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통합되었고 같은 해 이들 산업별 노동조합의 연합체인 독일노동조합연맹(DGB)이 출범하였다. 전후 20년 동안의 당과 노조의 관계를 보면 DGB는 처음부터 국가와 정당 및 종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과거의 당과 노조의 관계와 달리 사회민주당과의 공식적인 관계는 성립할 수 없었다. 특히 1952년에 개정된 경영조직법(Betriebsverfassungsgesetz)’에 의해 노조는 정치적 종교적 중립의 의무가 있어 DGB는 이후 선거에서 사민당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DGB가 사민당과 비록 비공식적 관계이지만 실질적인 협력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DGB에 속한 노조의 대다수는 사민당을 지지했던 자유노조 출신이었기 때문에 선거 때마다 실질적으로 사민당을 지지하였다. 무엇보다 DGB의 집행부 다수가 사회민주당의 당적을 지니고 있었다. 노조가 직접 특정 정당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할 수 없지만 선거기간 동안 노조는 인적 지원, 노조 사무실의 선거사무실화, 사무행정 지원, 교통편의 제공 등을 통해 사민당을 지원하였다. 평상시에도 노조와 사민당은 서로 대표를 교환하여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사민당은 1950년부터 DGB와의 협조를 위해 사회적 노동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이를 통해 DGB 내 사회민주당 당원들을 가동하여 사회민주당의 이해관계를 DGB에 관철시켰다. 사민당과 DGB의 이러한 협력관계는 복지국가와 사회국가라는 독일모델의 유용성을 중시하는 양자의 강령에서도 나타나는데, 사민당의 1959년 고데스부르그 강령, 1989년 베를린 강령, 2007년 함부르그 강령은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사민당은 노동조합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노동조합과의 갈등을 사전에 관리하기 위해 노동조합의 집행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사민당 집권 동안 1968년부터 DGB 의장과 당수가 공동의장을 맡고, 사민당 당원인 산별노조 위원장급으로 구성되는 노조대표위원회(Gewerkschaftsrat)’가 설치되었는데, 이 기구는 상호 관심사를 논의하면서 양 조직의 동조화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사민당 내 공식적이고 전당적인 노동자 당원 조직의 결성은 당 지도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 결과 사민당과 DGB의 관계에 있어 전국적 단위와 산업적 단위에서 연계는 유지되었지만 지역적 연계는 부족하였다. 양자는 노동현안을 전국적으로 공유하기 위하여 1970년대부터 사민당과 DGB가 각각 대표와 부대표를 맡는 노동자문제를 위한 활동그룹’(Arbeitsgemeinschaft fur Arbeitnehmerfragen: AfA)을 운영하였다.
이 시기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는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첫째, DGB1950년대에 노동조합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기민/기사연 연립정부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타협하게 되는데, 이러한 태도는 야당인 사민당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DGB는 자신들의 숙원인 공동결정제도를 실현하기 위해 서유럽통합에 찬성한 반면, 사민당은 고데스베르그 강령 채택까지 서유럽통합에 반대하였다.
그런데 1952년에는 기민/기사연-자민당 연립정부에 의해 경영조직법이 제정됨으로써 의회결정사항에 대해 반대하는 정치적 파업이 불법화되었다. 이에 DGB1953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경영조직법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DGB 내 기독교 그룹이 이에 반발하여 기민연을 지지하는 독자적인 노조를 추진하는 등 DGB는 내분에 빠졌다. 결국 DGB는 점차 경영조직법에 순응하게 되어 제도개선 투쟁보다 단체협약 투쟁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1955년 노동총동맹의 행동강령에서 공식화되었고, 1963년 뒤셀도르프 기본강령에서 확고해졌다. 사회주의적 요구들은 케인즈주의적인인 뒤셀도르프 강령에서 삭제되고 단지 일부 산별노조의 강령에서만 잔존하였다.
둘째, 사민당이 집권함에 따라 사민당은 더 이상 노동계급만의 정당으로 남아있을 수 없게 되었고, 노동조합 또한 사민당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 1966년 사민당이 집권하자, DGB는 정부의 협력자로서 비로소 정부정책에 관여할 수 있었다. 노조는 정부의 완전고용정책과 총수요조정정책을 노동자들의 권익에 유리하게 이끌어 내기 위해 대화에 응하였다. 그 결과 1960년대 중반까지 사민당의 케인즈주의적인 정책기조는 협주활동(Konzertierte Aktion)’이라는 노사정 협력으로 나타났다. 협주활동은 1967경제성장안정촉진법에 따라 연방은행과 지역단체, 노사정 대표가 모여 경제 전반과 임금에 관해 협의하는 수요조절 코포라티즘(corporatism)의 작동기구였다. DGB 지도부는 협주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일부 관철시킬 수 있었지만 사민당이 DGB를 협주활동에 국한시키려고 할수록 노조 내 에서 협주활동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해졌다. 결국 노조와 당은 공동결정권의 확대와 비상조치법의 발동 문제에서 충돌하였다(송태수, 2006: 43). 특히 1973년 이후 사민당의 케인즈주의 정책이 작동하지 않자 DGB 내에서 젊은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사민당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고 DGB 지도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자발적인 불법파업이 속출하였다. 결국 1974년 이후에는 협주활동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지면서 정보전달기구로 전락하였다. 오일쇼크 이후 경제침체가 심화되자 사민당 정부는 긴축재정과 물가억제 정책을 추진하고 이를 위해 임금인상을 통제하였고 이에 노동조합들이 총수요 억제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로 대응하면서 사민당과 DGB의 협조는 위기로 치달았다. 노동조합을 통제함으로써 거시경제를 안정화시키려는 집권 사민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인금인상 등 적극적인 단체교섭에 나섰다.
 
 
2) 영국
 
노동당은 2차 대전 이후 1979년 대처 행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총선에서 6차례 승리하면서 19년간 집권하였으며 반면 보수당은 4차례 총선 승리와 15년의 집권에 머물렀다. 19457월 선거에서 노동당은 선거강령으로 완전고용과 재정정책을 제출하였고 하원에서 48% 393석을 확보하여 9% 12석을 얻은 자유당, 40% 213석을 얻은 보수당을 압도하였다. 이후 노동당 정부는 잉글랜드은행, 병원, 석탄광산, 철도, 전력, 가스, 항만과 도로, 철강산업을 국유화하였다. 노동당 정부는 국유화된 기업에서 노동자나 노조의 직접적인 경영참가를 차단하고 전문경영진이 의회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는데 일부 노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TUC와 석탄노조 등은 이에 찬성하였다. 또한 중등교육의 무상화(1944), 자녀보조금 확대(1945), 전국보험법안(1946), 통합의료서비스, 극빈자에 대한 공공부조 등이 시행되어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국가의 틀이 마련되었다. 다만 완전고용을 위한 1944년의 고용백서는 법안으로 구체화되지는 못하였다.
노동당정부는 1950년에 2차 국유화계획을 실시하여 자본과 전면적인 대립양상을 낳았다. 이 시기 노동당 지지는 195046% 315, 195149% 295석으로 보수당의 195044% 298, 195148% 321석을 간신히 넘기고 있었다. 1951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국유화에 대한 반발로 자본과 연합을 형성한 보수당에게 근소한 차로 패배하였다. 이후 선거에서 노동당은 연달아 3번의 패배를 경험하게 되었고 노동당은 1964년까지 14년간 보수당에게 정권을 내줘야 했다.
TUC1951-64년의 보수당정부의 소득정책에 저항하였다. 1951년 보수당 정부가 긴축재정과 구조조정 및 실질임금 인하정책을 추진하고 야당인 노동당도 우경화되자 TUC 내 좌파가 세력을 강화하였다. 한편 보수당이 민간소비를 촉진하고 노동당이 추진하였던 완전고용을 위한 케인즈주의 거시정책과 복지국가 정책을 수용하여 노동당과의 차별성을 줄였다. 1955년과 1959년의 총선에서 보수당의 지지가 크게 증가하였다.
1959년 총선 이후 노동당은 기존의 노선을 재평가하고 새로운 노선정립을 모색하지만 정체성 논란에 휩싸였다. 1964년에 집권한 노동당의 헤롤드 윌슨은 국력이 쇠퇴하는 늙은 영국을 되살리려는 계급연합과 경제발전, 기술 근대화라는 의제를 제기하였으나 별 효과를 내지 못하였고 노동당은 1970년 선거에서 다시 보수당에 패하였다.
1970-74년의 보수당 정부는 임금을 제한하고 노사간섭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보수당 정부가 1971년 노조의 자발주의를 법적으로 규제하기 위하여 산업관계법을 통과시키자, 노동당과 노조는 다시 협력을 강화하였다. 1973년 노동당은 노조와 사회협약을 체결하고 향후 노동당이 정권을 잡을 경우 추진할 경제정책을 제시하였다(고세훈. 1999, pp. 342 343). 노동당과 노조의 연대가 다시 강화됨에 따라 1974년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노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다시 높아져 노동당은 보수당을 누르고 집권하였다.
1974-1979년의 집권 동안 노동당정부는 노동조합과 임금인상의 억제와 노동악법의 폐지를 상호조건으로 하는 사회계약을 1974년 체결하였고 1977년 노사공동결정제도를 도입하였다. 애초에 노동당은 노사공동관리를 내용으로 하는 산업민주주의법을 선거공약으로 채택하였지만 TUC 내 좌파는 산업민주주의는 단체교섭을 통해 진전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이 공약에 반대하였다. 현장에서 당에 대한 노조의 불만이 높아지자, 노동당과 TUC의 지도부는 1978년 지역 차원에서 연대를 강화하여 당내 분쟁을 수습하고 조합원들 사이 반노동당 정서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동당 승리를 위한 노동조합 (Trade Unions for Labour Victory, TULV)’을 설립하였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또한 노동당 정부는 노동조합에게 사회협약을 제안했지만 1978년에 TUC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협약은 1978년 중반까지 노조에게 3차례 임금억제 협상을 강요하였고 특히 임금인상을 5%로 제안하여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7810월 열린 노동당 전당대회에서도 자유로운 단체협상으로의 복귀라는 노조의 동의안이 전격 통과되고 정부의 지침은 거부되었고 이러한 노동당과 노조의 균열은 보수당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1979년 대처의 보수당은 44%의 득표 339석으로 37% 268석을 얻은 노동당을 누르고 1983, 1987, 1992년의 선거에서도 보수당이 승리하였다. 반면 노동당의 득표는 198329%까지 감소하였으며 1992년에 35%대로 복귀한다. 노동당 우파는 1981년 독자적으로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을 구성하여 1983년과 1987년의 선거에서 자유당과 제휴하였으며 양당은 결국 합당하여 자유민주당이 되었다. 1992년 선거에서 인플레와 자산가격의 정체, 실업증가로 다시 노동당에 대한 지지가 증가하였으나 보수당의 승리를 막지 못하였다.
노동당의 선거 패배의 원인을 보면 노동당은 실업을 개선하려는 재정지출의 확대를 주장하였지만 보수당은 이런 정책은 유권자의 조세부담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감세로 인한 기업의 투자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노동당은 집권기간 미국 차관으로 전후 경제부흥을 꾀하면서 점차 사회주의적정책을 후퇴시켰다. 특히 물가가 오르자, 노동당 정부로부터 임금인상 제한의 불이익을 받는 노동자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마침내 공공부문 노조를 중심으로 불만의 겨울로 상징되는 1979년 초 파업은 최고조에 이르고 그해 선거에서 보수당이 집권하였다. 결국 노동당과 노동조합대표자회의라는 노동정치 동맹 내에 내분이 가시화되면서 노동당의 지지율이 떨어져 197920년의 보수당 집권 시대가 도래한 셈이었다.
1979-1997년의 보수당 정부는 시장의 자유화, 기업보호, 임금과 인플레이션 억제 등을 추진하면서 노동조합을 내부의 적으로 인식하였다. 대처 수상은 클로즈드샵 금지와 파업 제한, 노조의 정치자금 모금 규제 등을 강행하였다. 1984노동조합법은 정치자금만을 통해 정당을 지원하도록 제한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조합들은 조합원 투표를 통해 정치자금을 마련하였다. 대처 정부는 1984년의 공공부문노조와 광부노조의 파업, 1986년 인쇄공의 파업에 대해 치밀하게 대처하면서 분쇄하였고, 그 이후 TUC의 투쟁력은 크게 훼손되었다.
2차 대전 이후 노동당과 노조의 관계를 보면 첫째 집권 노동당은 초기에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나 점차 노동조합의 양보를 요구하게 되어 양자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1945-1951년의 집권 노동당은 반동적 노동조합법의 폐지, 종합적 사회보장제도의 확립, 탄광을 위시한 일련의 산업국유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기간 동안 노동조합은 임금의 상승을 생산성 향상에 연계하면서 파업을 사실상 포기하였다. 하지만 노동당이 1947년 파운드화의 위기에 직면하여 임금인하정책을 실시하자 이에 반발하여 자발적 불법파업이 일어났으며, 결국 TUC1950년에 임금인상을 요구하였고 이듬해 노동당 정부가 붕괴되었다.
1964-70년의 노동당 정부도 TUC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보수당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노동당은 재정적자와 파운드화 위기에 직면하자 사회계약을 파기하고 비합법파업(wildcat strikes)의 면책조항을 폐기하고 특히 단체협상을 노사자율에 맡기던 관행을 법으로 통제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당과 노조의 갈등이 폭발하였다. 1969년 노동당 정부는 노동관련 백서인 투쟁을 대신해서(In Place of Strife)’를 발표하고 자발적 파업의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파업규제법을 의회에 제출했으나, TUC는 임시대회를 열어 강력한 저항을 통해 법안을 취하시켰다. 노동당의 이러한 태도는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노동조합의 파업을 제도적으로 억제해 결국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노동당의 노골적인 의도를 보여주고 있었다(채준호, 2008: 74).
이 시기 양자는 긴장관계에 진입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70년 기준으로 노동당의 예산 중 88%는 노동조합의 지원으로 충당하였다. 노동조합은 노동당 내의 각종 의사결정기구에서 노동당의 원내 활동을 여전히 견제할 수 있었다. NEC에서의 노동조합의 영향력은 원칙적으로 NEC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노동조합과 관련된 문제에서 종종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1960년대 말 집권 노동당이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안을 상정했을 때나 1970년대 말 지나친 임금억제 정책을 강행하려 했을 때 노동조합들은 분명한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각종 의사결정기구의 구체적인 구성과 운영에 있어 노동조합보다는 의원단의 영향력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전통적으로 원내노동당(PLP)NEC2-3명 위원의 몫을 가지고 있는데 불과하였지만 당 대표와 부대표가 참여하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원내노동당 지도부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의원들은 공식적인 할당 이외에도 NEC의 노동조합 이외의 나머지 구성원 중 7명의 지구당 몫과 정당대회에서 선출하는 5명의 여성위원 몫을 실질적으로 차지하였다. 또한 노동조합이 지명할 수 있는 12명의 NEC의 위원도 대부분 노조후원의원들로 충당되었다. 반면 노동당 당규에 따라 TUC의 중앙위원회(General Council) 당연직 위원인 노동조합위원장들은 NEC에 참여할 수 없었다(채준호, 2008: 32).
둘째 노동당은 대처정부 시기 오랜 야당으로 남아 있으면서 노동당과 노동조합과의 밀접한 관계 자체를 선거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인식함에 따라 노동조합과 멀어지는 선거 전략을 선택하였다. 1987년 선거패배 이후에는 내부적으로는 노동조합의 지지를 유지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노동자들만의 당이라는 인식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당의 현대화 프로그램을 통해 당과 노동조합이 일정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노동당은 과거에는 유권자에 의해 자신들이 노동조합대표자회의만을 대변하는 노동계급의 당이라고 인식되는 것이 선거에는 불리하지만 당의 정체성 측면에서 감수해야만 하는 부담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노동당은 점차 노동조합의 요구와 전체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더 이상 동일시하지 않았고 나아가 노선에 있어서도 계급정치보다는 일반 국민을 향한 정치로의 변화를 선택하였다.
노동당은 1987년과 1992년 총선 패배 이후 새로운 정치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동당을 혁신하려는 신노동당노선을 제기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흐름에 부응하여 노동조합대표자회의 내에서도 과거의 노동조합운동을 변화시켜 새로운 노동조합대표자회의로 거듭나야 한다는 반성이 제기되었으며 이는 신조합주의(New Unionism)로 나타났다(Brown, 2011).
 
 
3) 프랑스
 
사회당은 2차 대전 중에 공화국의 방어에 최우선순위를 두었으며 중도-우파 정당들과 함께 연립정부에 참여하였다. 19461월에서 19475월까지 프랑스는 나치 저항을 주도한 3개 정당에 의해 통치되었다. 194611월의 첫 의회선거에서 공산당은 30%의 득표와 183석의 의석을 차지하여 제1당으로 등장하였다. 인민공화운동이 29%의 지지와 167석으로 제2당이 되었으며 사회당은 17%의 지지와 105석에 머물렀다. 사회당과 인민공화운동은 드골 및 공산당에 대응하기 위해 3세력을 구성하였다. 1당인 공산당은 생산 드라이브를 주도하고, 노사불안을 억제하며, 노동자의 요구를 의회에서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냉전이 강화되자 공산당은 사회당과 인민공화운동의 연합을 비판하고 정치적 파업을 추진하고 법안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였다.
1951년의 선거법 개정으로 공산당은 26%의 득표를 얻고도 의석은 18%밖에 차지하지 못하여 15%의 득표를 한 사회당과 비슷한 의석을 갖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새로운 선거법은 보수적 연립정부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정당 지지기반의 파편화와 연립정부 참여 정당의 잦은 지지 철회로 말미암아 전후 성립된 제4공화국에서 연립정부는 불안하였으며 그 평균수명은 6개월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 및 우파정당의 지지기반 분열로 1956년에는 공산당이 26% 득표와 27%의 의석으로 다시 제1당으로 등장하였고 사회당도 제2당으로 부상하여 1947년 이후 처음으로 내각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1956년 선거 결과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2차 대전 직후 사회당을 압도했던 공산당의 지지율은 갈수록 떨어졌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반소여론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국내외 문제에서 소련의 입장을 추종하자 상당수 지지기반이 당의 방침을 비판하면서 이탈하였다.
공산당은 1968년 혁명에 있어 학생운동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다. 프랑스공산당은 유럽경제공동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를 반대하는 반면 소련의 체코 침공을 지지하였는데 이러한 친소정책이 유권자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프랑스공산당은 내부적으로 이념정당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소련과 거리를 두려는 유연한 전술을 채택하였는데, 이 전술이 구체화된 것이 유로코뮤니즘(Eurocommunism)’이며 유로코뮤니즘은 정강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State of advanced democracy)'로 표현되었다.
프랑스공산당은 이러한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에 따라 즉각적인 사회주의 실현이 아니라 국가재정의 개혁, 금융산업과 보험산업의 국유화, 독점기업의 사회화, 경작자에 대한 농지분배, 행정과 공공산업에 대한 민주적 통제 등 독점자본주의 국가를 약화시켜 사회주의 실현을 용이하게 하는 구조적 개혁을 주장하였다(Boggs & Plotke, 1980: 85).
한편 제5공화국에서 대통령선거와 하원선거에서 절대다수제를 채택함에 따라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2차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3후보의 경우 2차 투표를 포기하는 대신 다른 후보 혹은 다른 정당과의 정책연대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1차 선거에 과반수 득표에 실패한 유력 후보의 입장에서도 2차 투표에서 제휴세력을 찾지 못하면 불리하기 때문에 군소 후보와 정책연대를 시도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공산당과 사회당, 기타 좌파 세력 간에 제휴가 강화되었다. 특히 정부 구성에서 배제된 사회당 입장에선 공산당의 협력이 필요해진 반면 공산당은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에 의해 사회당에 대해 좀 더 유연한 전술을 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협력 분위기에 따라 사회당의 프랑수와 미테랑이 1965년 대통령선거에서 좌파의 공동후보로 나서게 되는데 그는 여기에서 선전하여 2차 투표까지 나아가 46%의 지지를 얻는다. 1969-71년 동안 사회당은 1959년에 떨어져 나간 통합사회당을 다시 흡수하고 미테랑이 이끄는 독립공화파 인사들을 통합하면서 새로이 재조직되었다. 1971년 프랑스 구사회당과 중도좌파들이 프랑스사회당’(PS)를 창당하였다. 사회당은 공산당과 선거연합을 추진하였고 1972년 양당은 좌익연립정부 공동강령을 합의하였다. 1974년 사회당 미테랑은 다시 좌파의 통합 대통령 후보로 나서나 1%의 미소한 차이로 패배한다. 1977년에는 공산당은 사회당과의 연합으로 지방 선거에서 52%로 압승하였다.
하지만 선거연합이 반복되자 지지율이 높아 당선 가능한 사회당으로의 표 쏠림현상이 심화되었고 공산당은 이 때문에 1977년 공동강령의 재협상을 파기시켜 선거연합을 중단하였고 그 결과 1978년 총선에서 양당은 패배하였다. 이처럼 공산당은 사회당과의 대결이라는 입장으로 회귀하였지만 양당의 선거 패배 후 좌파의 단결을 지향하는 유권자와 당원들이 당을 떠나는 대가를 치렀다.
19814월 대통령선거 1차 투표에서 사회당의 미테랑은 26.1%, 공산당의 조르주 마르셰(Georges Marchais) 15.5%를 얻었으며, 5월 결선투표에서 미테랑이 최초의 사회당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6월 총선에서 사회당은 37.7%, 269석을 얻었고 공산당은 16.1%, 44석을 얻었으며 양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양당은 대통령과 의회를 장악하였다. 사회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공산당은 4개의 장관직을 얻었다(Courtois, & Lazar, 1995: 410-412).
초기의 사회당과 공산당의 연립정부에 있어 미테랑 정부는 급진적 사회개혁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여기에는 광범위한 국유화, 노동시간 단축, 휴가연장, 조기퇴직, 최저임금 인상, 공공부문의 산업민주주의 확대와 민간부문의 노동기본권 강화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 개혁은 국내의 구매력 확대로 경제를 회생시키려는 일국적인 케인즈주의에 기초한 것이었으나 다른 산업국가들이 긴축정책을 시행하자 수출 감소와 국제수지 악화, 프랑화에 대한 투기에 직면하였다. 그리하여 1981년 연립정부는 사회개혁의 일시적 중단을 발표하고 19826월에는 임금동결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긴축정책을 시행하였다. 1982년 이후 이러한 긴축이 유지되어 프랑스의 실업률은 19816%에서 198510%로 증가하였다.
결국 사회당 미테랑 정부는 국내외 경제상황을 고려하여 긴축재정과 세금인상을 추진하며 보다 더 오른쪽으로 가게 되고, 이에 반발한 공산당은 1984년 연립정부로터 탈퇴하였다. 1984년 유럽 선거에서, 사회당은 21%, 공산당은 11%를 얻었으며 장 마리 르 펜의 국민전선(Front National)이 공산당에게 근소한 차이로 졌다.
2차 대전 이후 당과 노조의 관계를 보면 공산당의 득표율이 떨어지고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공산당을 추종하는 CGT 내부에서 공산당에 비판적인 세력들이 떨어져 나와 별도의 총연맹을 구성하였다. 나아가 CGT마저 자신의 조직단결과 영향력을 보전하기 위해 공산당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1909년에서 1947년까지 CGT의 위원장을 지낸 레옹 주오는 2차 대전 직후 냉전과 반소 분위기에 1948CGT로부터 분리하여 프랑스 노동운동의 전통적인 생디칼리스트 세력들과 노동총동맹-노동자의 힘’(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Force Ouvrière:CGT-FO)을 창설하였고 이에 CGT가 공산당에 종속되어 지나치게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고 여긴 조합원들이 결합하였다. 사회당이 공산당의 CGT에 대항하기 위해 현장사회주의 그룹’(Groupes socialiste d'entreprise)을 만들었는데, 이 단체가 최상급노조를 추진하자 CGT 내 소수파인 비공산주의 계열의 노동자의 힘(Force Ouvrière) 소속 조합원들이 이에 가담함으로써 CGT-FO의 출범이 가능해졌다(Portelli, 1998: 22). 노동자의 힘(CGT-FO) 노조 지도부와 조합원들 중에 사회당 당원이 상당수 있지만 사회당과의 관계를 보면 공산당과 CGT의 관계처럼 밀접하지 않았다.
1981년 좌파연합정권에 참여한 공산당은 사회당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대하여 여당이기 때문에 뚜렷한 반대를 할 수 없었고 그 결과 공산당 등 좌파정당들은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잃었다. 노조들 역시 좌파 연립정부의 탈노동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할 수 없는 곤란한 지형에 처했다. 이를테면 철도 노조원 출신으로 노동총동맹(CGT) 노조원이었던 장-끌로드 게소가 사회당 정부에서 운수장관을 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노동총동맹(CGT)이 사회당 정부의 정책을 제대로 비판할 수 없었다(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2006).
1988년 미테랑 사회당 정권에 의한 민영화 반대투쟁을 시작으로 노동총동맹의 입장을 비판하는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또 다른 최상급노조인 쉬드’(SUD)가 태동하였다. 1995년에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반신자유주의 투쟁으로 인해 노동총동맹(CGT)에 비판적인 새로운 노동조합운동들은 더욱 확고해졌다. 노동총동맹(CGT)은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자신도 동반 몰락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위기의식을 지니게 되었고 결국 공산당과의 공식적인 관계를 부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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