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산주의자동맹의 탄생

1) 공산주의자동맹의 역사적 배경
 
(1) 프랑스
 
첫째, 18307월 혁명에 의하여 국가기구의 경영은 대지주에서 대자본가로 넘어갔다. 다시 말하면 국가권력이 노동자들의 멀리 떨어진 적인 지주에서 가까운 적인 자본에게로 옮겨갔다.
1815년 빈체제에 의해 루이 18세의 봉건적인 부르봉왕조가 복원되었다. 6월의 '헌장'에 따르면 상원은 국왕이 임명하는 세습 귀족이었으며, 하원은 직접세 300프랑 이상을 납입하는 30세 이상의 남자 약 9만 명에 의해 선출되었다. 의회 내에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개인이나 소집단에 의해서 비공개적으로 대변되었다. 지배세력인 과격왕당파(Ultras)는 토지귀족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면서 귀족특권에 기반하는 군주제 국가를 지향하였다.

1824년에 과격왕당파의 수령인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서 즉위하였다. 그 당시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빈체제로 인해 해외팽창을 제한받고 있었다. 따라서 원료획득과 상품시장의 확대를 위한 대외적 팽창정책을 요구하는 산업부르주아들의 불만이 높았다. 이런 배경에서 반과격왕당파 세력은 1827년의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폴리냐크 내각은 1830516일에 국왕과 내각에 반대하는 세력을 의회에서 일소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지만, 이어진 총선거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폴리냐크 내각은 725, 출판자유의 정지, 하원의 해산, 선거법의 개악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반동적인 긴급칙령을 발동하였다. 봉건적 귀족들은 이 칙령을 통해 선거권을 상층 부르주아로부터도 빼앗아 대토지 소유자에게만 한정함으로써 정권의 유지를 획책했다.
이에 저항하여 파리의 중심부에서 수공업자, 직인, 소상인, 학생 등이 봉기하고,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때마침 정부군 일부가 혁명 측에 합류하면서 29일 오전 중에 혁명 측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당시 자유주의자로서 알려져 있던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립이 왕위에 올라 7월 왕정이 성립하였다.
7월 왕정에서 상원의원의 세습제는 폐지되고 하원 선거권의 재산자격은 직접세 200프랑으로 낮아졌지만, 유권자 수는 약 20여만 명으로 총인구 3,500만의 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루이 필립 치하에서 프랑스를 지배했던 자들은 금융귀족, 철도왕들, 대토지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은 법률을 만들고, 국가 고위층을 장악하고, 모든 조직화된 공권력을 행사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을 지배하였다.
7월 왕정은 재정난으로 인해 처음부터 대부르주아에 의존하였고, 이러한 의존은 다시 재정난을 더욱 부채질 하였다. 파리의 대은행가들은 국채 및 철도공채 그리고 금융투기에서 큰 이윤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부르주아의 요구인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원하지 않았다. 이는 대외적인 평화 속에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화하려는 국왕의 의도와 부합되었다. 따라서 왕과 은행가, 주식투자자와 같은 금융세력 간에 동맹이 형성되었다. 무역 면에서는 복고왕정의 고관세 정책이 유지되고, 국내산업의 보호정책이 관철되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 반농반공의 농민적 노동자와 중소산업자본이 폭넓게 존재하였다. 산업부르주아는 대자본이 아닌 한 야당의 일부를 이루었다. 소극적인 대외정책은 대외시장을 요구하던 산업부르주아의 불만을 샀고 나아가 나폴레옹제국을 그리워하는 프랑스 국민감정을 훼손시켰다.
또한 영국과 같이 의회의 일원적 지배를 원하는 의회 측과 루이 필립이 대립하였다. 부르주아 야당세력인 기조, 티에르, 오딜롱 바로 등은 의회주권을 위해 동맹을 맺고 38년 말부터 반격을 시작해 392월의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40년에 국왕과 기조의 타협의 산물로서 기조 체제가 성립하였다. 야당은 선거법 개혁안을 몇 차례에 걸쳐 의회에 제출하지만 기조는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이에 의회 내외의 비판세력은 나시오날지를 중심으로 하는 마라스트 등의 온건공화파와 레포름지를 중심으로 하는 르드뤼 롤랭 등의 급진공화파로 결집되었다.
둘째, 1848224일 혁명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54일 제헌국민의회 구성 때까지 노동계급의 주도성이 유지되었다.
1847년부터 민주주의세력은 선거개혁이라는 공동목적 아래 단결하였다. 선거권을 확대하기 위한 정치집회가 프랑스 전역에서 발생하였다. 1848222일에 파리에서 열린 공개토론회가 보수내각의 사임을 요구하면서 정치적 시위로 번졌다.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집회는 진압에 반발해 봉기로 발전하였다. 이때 진압을 담당한 국민방위대원들은 파업을 통해 진압을 거부했으며, 정규군 역시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에 루이 필립은 도주하고 기조정부는 사라졌으며, 군대는 파리에서 철수하였다.
그 결과 파리에서 임시공화국이 선포됐다. 18482월 혁명을 촉발시킨 파리 봉기의 주인공은 파리의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2월 혁명은 사회공화국의 색채를 표방하였다. 이들 노동자들은 계급지배의 구체제를 단순히 정치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급지배 자체를 폐지하는 혁명적 수단으로서 공화국을 원하였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는 2월 혁명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게 공히 이익을 보장하는 사회공화국을 수립하였다는 환상에 사로 잡혔다.,
셋째, 18486월 노동자봉기의 실패로 지배권은 부르주아에게 넘어갔다. 이후 제헌국민의회의 역사는 부르주아공화파들의 지배와 분열의 역사이다.
혁명임시정부 내에서 온건 공화주의파와 루이 블랑 등의 급진 사회주의파가 대립하였다. 4월에 제헌국민의회선거가 남성 보통선거로 치러졌다. 선거결과 900여명의 대표자들 중에서 군주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1/3 정도 차지했으며, 대부분은 온건 공화파가 의회를 독점하였다. 반면 급진 사회주의파는 거의 낙선하였다. 선거 직후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혁명정부에서 쫓겨나거나 실질적인 권력을 상실하였다. 혁명 초기의 친노동자적인 정책도 점차 후퇴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1848515일 제헌국민의회로 밀고 들어갔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제헌국민의회가 해체되었음을 선언하고 혁명적 정부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국민방위군과 군대에 의해 바로 해산되었고 블랑키 등 노동자들의 지도자들은 체포되었다.
1848년에 621, 정부가 국립작업장을 폐쇄하고 국립작업장에 속해 있었던 실업자들을 파리에서 내쫒는 정책을 감행하였다. 실업자들 중 상당수는 민병조직인 국민방위군 내의 노동자병사로서 국가로부터 임금을 받고 있었다. 22일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바스티유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 주거 지구에서 국민방위군의 노동자병사들은 바리케이드를 쌓고 부르주아파의 국민군과 대치하였다. 하지만 노동자부대는 지도자도 없이 통일된 계획도 없이 수단도 없이 그리고 대부분은 무기도 부족한 상태에서 23일부터 닷새 동안 기동방위군, 파리와 지방의 국민방위군과 싸웠다. 그 결과 노동자 병사 3천명이 학살당하고 봉기는 완전히 진압당하였다.
넷째, 1849613일 소부르주아정당인 산악당의 봉기가 진압당한 후 프랑스의 소부르주아민주주의는 파산하여 질서파가 권력을 잡았고, 그 결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민주주의 혁명이 타격을 받았다. 이후 의회주의적 질서파와 보나파르트의 투쟁이 전개되나, 최종적으로 보나파르트가 승리하였다.
프랑스대혁명은 농민들을 반농노로부터 자유보유농으로 전환시켰다. 이후 나폴레옹은 농민들의 소유권을 확인하고 이를 법률에 규정하였다. 소토지 보유는 봉건농민을 소규모 자영농으로 그리고 나폴레옹을 황제로 만들었던 물질적 조건이었다. 하지만 농민의 소토지보유는 이제 토지경작자 자신에게는 토지에서 임금만을 뽑아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반면, 자본가에게는 토지로부터 지대, 이윤, 이자를 거두어들일 수 있도록 허용하는 핑계거리에 불과하였다.
18481210일 남성 보통선거가 치러졌고, 이에 따라 소토지 소유자인 농민들은 프랑스 인구의 대다수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였다.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루이 보나파르트가 농민의 절대적 지지를 기반으로 유효투표의 72.4%를 획득하여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849년 보나파르트는 혁명이 일어난 이탈리아 로마공화국에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작전을 감행함으로써 헌법을 위반하였다. 프랑스군의 파견에 반대하는 소부르주아정당인 산악당은 이에 항의하면서 1849613일 비무장시위를 일으켰다. 하지만 보나파르트의 군대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산악당의 지도자와 소부르주아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이후 의회에서 질서파, 공화주의자, 산악파 등이 동맹을 맺어 보나파르트에게 대항하나 보나파르트는 184910월에 질서파 내각을 사임시키고 의회 바깥에서 각료를 등용하였다. 보나파르트는 1850531일 보통선거 폐지로 중요한 지지기반을 잃게 된다. 하지만 보나파르트는 1851122일 쿠데타를 일으켜 질서파 지도부를 체포하고 의회를 해산시킨 후 보통선거를 부활시켰다. 1852114일 새 헌법이 채택되어 모든 권력이 대통령의 수중에 집중되었다. 보나파르트는 5211,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나폴레옹 3세 황제로서 제2제정을 열었다.
 
(2) 독일
 
첫째, 18483월 독일 혁명의 성격은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발전한 가운데 발생한 반봉건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며, 혁명의 목적은 시민계급이 중심이 돼 민중들과 함께 분열적인 봉건제도를 극복하고 민주적인 중앙집권적인 근대민족통일국가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종래 300개 이상의 연방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독일은 나폴레옹 몰락 후 1815년 빈회의를 거쳐 39개의 주권국가로 구성된 독일연방으로 전환되었다. 1834년 프로이센의 주도하에 독일관세동맹이 성립되어, 독일경제의 통합이 이루어졌고 독일의 산업혁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농민해방과 관세동맹의 성립을 계기로 자본주의화는 진전되고 그 결과 1840년대에는 라인 주를 중심으로 하는 산업 부르주아와 정권을 독점하는 동부 융커 귀족층 간의 대립과, 노동자 및 영락 수공업자와 부르주아 간의 대립이 각각 생겨났다.
독일연방의 국가들은 절대주의적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진전은 도시와 농촌의 대중적 빈곤을 초래하여 사회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18446월 슐레지엔의 곳곳에서 직조공과 그 가족 5천여 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공장의 기계를 파괴하고 직조공의 채무장부를 불태우고 심지어 공장주를 공격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은 군대에 의해 진압당했다. 이 폭동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노동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마르크스가 184487일과 10일자 포어베르츠에서 이 폭동에 있어 노동자봉기의 대상은 프로이센 국왕이 아니라 부르주아라고 지적하였다.
그 당시 독일의 토지영주들은 정치적 특권과 연방군주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들 영지의 농민층에 대한 중세적 지배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독일 부르주아는 프랑스와 영국의 부르주아만큼 집중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에서는 중간계급의 독자적인 혁명이나 입헌왕정의 형태를 지닌 부르주아 단독의 지배체제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봉건절대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계급들의 연대에 의한 혁명이나 노동자들 자신에 의한 사회공화주의혁명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연방 각 지방의 소상인계급은 비록 봉건적 군주 밑에 지배당하고 있었지만, 관세동맹의 강화, 증기동력기관의 도입, 교역의 경쟁 등을 통해 점차 공동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게 되었고 자신들의 힘을 집중시켰다. 그 결과 이들 소상인계급은 봉건적인 정부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세력으로 편입되었으며, 중간계급으로서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획득하려는 민주주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반면 독일의 노동계급은 그 사회적 정치적 발전에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계급에 비해 크게 낙후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한계로 인해 반정부 진영에는 이렇다 할 부르주아 공화파가 없었고, 상당수 사람들은 입헌군주주의자이었다.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소수에 불과하였다. 고급귀족과 문무관들이 기존 체제의 안정된 지지자였고, 그 반대에 하급귀족, 상업에 종사하는 중간계급, 대학교수, 교사, 심지어 하급공무원 및 군 장교들까지 연합하여 정부에 반대하였다. 이들의 배후에는 농민층과 대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불만대중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은 1845년부터 46년에 걸쳐 작황이 좋지 않았으며, 그 결과 1846년에는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였다. 게다가 1847년에 이르면 영국에서 시작한 경제공황이 독일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여기에 흉작, 곡물투기, 물가폭등, 빈곤, 티푸스 등이 더해졌다. 1847년에 베를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감자혁명이라 불리는 식량폭동이 있었다. 이러한 폭동들은 노동대중 사이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이에 자극받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선전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848년의 혁명전야에 이르러 이른바 '3월 요구'가 독일의 각지에서 표출되었다. 이는 잔존하는 봉건적 제도들의 폐지, 독일통일, 출판과 집회의 자유, 신분의회 개혁과 민주적 대의제도, 헌법 제정과 독일연방의 개혁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요구들은 부르주아 청원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부르주아가 정부타도의 태세를 갖추고,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차례가 돌아올 경우 부르주아를 타도할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독일 각지의 정부들은 충돌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길로 가고 있었다.
둘째, 독일은 여전히 분산적인 봉건국가였으므로, 정치적 중심지가 없어 독일혁명은 지역적인 봉기로 나타났다. 그 결과 혁명의 성패는 겉으로는 개별국가에서 따로 성취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봉기는 분산적이었던 반면, 이를 진압하려는 봉건적인 반동세력들은 각각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대응하였다.
서남독일은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의 소식에 대해 가장 빨리 반응을 보였다. 1848227일에는 만하임에서 2,500명 규모의 집회가 열리고 바덴에서는 319일 오펜부르크 집회에서 민주주의자들에 의한 조국협회가 설립되었다. 3월 혁명 발발 후 만하임의 변호사 프리드리히 헤커는 구스타프 폰 슈트루페 등과 함께 공화제의 임시정부 수립을 시도하였다. 412일 남 바덴에서 4,000-5,000명이 무장봉기하였으나 두 차례 전투 끝에 패배하였다. 921일 슈트루페가 다시 한번 시청사의 시민군 앞에서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지방에서 올라 온 의용군과 시민군이 합세하나 24일 슈타우펜에서 정부군에 패배하였다.
1848313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급진파 자유주의자 로베르트 블룸이 주도하여 혁명이 발생하였다. 은행가와 증권투자가를 제외한 부르주아, 소상인, 노동대중이 한꺼번에 저항에 나섰다. 군중들은 란트하우스의 의회로 쇄도하였고 궁전을 포위하였다. 황제는 시민들의 요구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테르니히는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노동계급과 대학생들은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부르주아와 중간계급은 국민방위대로 무장했으며, ‘공안위원회를 주도함으로써 혁명의 지도적 계급이 되었다. 515일과 526일에 두 번째 봉기가 발생하였다. 황제는 516일 인스부르크로 도주하였다. 빈 혁명은 823일 노동자들의 봉기가 중간계급의 국민방위대에 의해 진압당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105일 황제는 칙령을 통해 헝가리에 대한 전쟁을 선언했으며, 이는 인민들에게 있어 입헌정부의 원리에 대한 도발로 간주되었다. 국민방위대가 6일 대중봉기를 일으켜 군대의 출발을 지연시켰다. 민중과 정부군 사이에 투쟁이 발생했고, 황제는 올뮈츠로 도주하였다. 황제를 지지하는 슬라브주의자들은 6만 군대를 모아 빈을 포위하였다. 국민방위대는 극소수만 싸울 준비를 했고,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은 수적으로 강력했지만 지도자도 없고 정치적 훈련도 받지 못했고 무장도 갖추지 못하였다. 혁명이 성공했던 3월과 5월은 반혁명 진영이 혼란에 빠졌으나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프랑크푸르트, 바덴, 쾰른 등의 혁명세력은 혁명에 패배하여 빈을 도와줄 수 없었다. 18481028일부터 31일까지 시민군과 황제군이 충돌했으며, 111일 황제군이 빈을 점령하였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군주정으로 선포돼 절대주의가 부활하였다.
프로이센의 베를린에서는 184835일 시민의 집회가 발생했고, 7일에는 국회소집과 헌법발포를 내용으로 하는 청원이 결의되었다. 18일 왕궁 앞으로 모인 군중에 대한 군대의 발포는 시가전을 유발시켰다. 이에 국왕이 양보하여 군대를 철수하고 검열을 폐지하고 통일헌법을 제정할 것을 약속하였다. 자유주의적인 캄프하우젠 내각은 제헌의회의 준비와 언론과 출판 및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1848522일 개회된 프로이센 국민의회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와 달리 농민과 수공업자의 대표도 선출하였다. 프로이센 의회 전체 400여명 중 좌파가 100-130, 중도좌파가 90-100명이었으며, 중도우파는 40-50, 우파는 약 150명이었다. 따라서 프로이센 의회에서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보다 혁명과 반혁명의 대립이 뚜렷이 드러났다.
615, 프로이센 정부는 의회주의, 입헌군주제, 간접선거권, 양원제, 국민무장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이 초안은 10월부터 의회에서 심의되었다. 헌법심의와 함께 자유주의적 정부는 의회를 배경으로 전근대적인 제도들의 폐지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프로이센 국왕에 의해 수상으로 지명된 폰 브란덴부르크는 119일에 의회에 대해 1127일까지 브란덴부르크 시로 의회를 이전할 것을 명령하였다. 좌파 의원들은 이에 반발해 베를린 시내의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회의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은 이를 방해하였다. 1127일에 브란덴부르크 시의 교회에서 의회가 재개되었으나 125일 국왕에 의해 해산되었다.
3월혁명의 결과 독일 각국에서 일시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내각이 태어났다. 프로이센에서는 부르주아 야당 정부가 출범하였다. 빈과 베를린에서 민중의 승리 이후에 구 독일의 연방의회가 아니라 혁명 독일 전체를 위한 연방의회가 필요하였다. 184835일에는 남부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이 하이델베르크에 모여 전독일 통일의회를 준비할 것을 결정하였다.
18484, 일부 연방들과 자유도시는 직접선거로, 그 밖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간접선거로 의원을 선출하였다. 1848518일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 최초의 국민의회가 열렸다. 의원들 대부분은 대학교교육을 받은 자들이거나 공무원으로서 중도우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였다. 국민의회는 독일 국민의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등 기본권을 근간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 헌법 초안을 제정하였다. 국가 형태는 세습 황제에 바탕을 둔 독일제국으로 하고 의회는 양원제를 규정하였다.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각국 정부에게 18481221일의 '독일 국민의 기본권' 결의와, 1849327일의 '독일국 헌법(Deutsche Reichsverfassung)' 결의를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1849328일 국민의회는 이미 군주정을 선포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에 의한 독일 통일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국민의회는 프로이센 왕 빌헬름 4세를 독일 황제로 선출했으나 그에게 거부당하였다.
빌헬름 4세의 거부 이후 국민의회는 목표를 잃고 점차적으로 기능을 상실해 갔다. 1849428일 프로이센 내각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제국헌법을 공식적으로 반대했으며, 국민의회로 진격할 수 있는 군대를 배치하였다. 이에 팔츠, 바덴 등에서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와 제국헌법을 지지하는 대중집회가 열려 봉기의 조짐이 보였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와 독일의 제정부 사이의 대립은 5월 초에 이르러 전쟁상태로 폭발하였다.
국민의회는 이미 시작된 모든 봉기를 승인하고, 국민의 대의기구를 수호하도록 인민들에게 무기를 들 것을 요구하고, 봉기군을 프랑크푸르트로 소환하고 강력하고 단호한 행정부를 만들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하였다. 국민의회는 자신의 대표자를 뽑아 새로운 연방정부를 구성했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또한 독자적인 무장세력도 없었다.
독일 각지에서 혁명이 수그러들자, 반동화된 각지의 정부는 자국의 의원들을 국민의회로부터 소환했으며, 보수파 의원들도 철수하였다. 800명 내지 900명에 달하던 의원 숫자는 100여명으로 축소되었다. 비록 민주파가 남아 있었지만, 그들 자체도 소집되기 어려웠다. 시민들의 봉기가 진압당한 후 국민의회는 1849530일 슈투트가르트로 이전하였으나 뷔르템베르크 정부가 618일 의회가 개최될 장소를 봉쇄하고 슈투트가르트를 떠나도록 명령함으로써 국민의회는 사실상 해산되었다.
3월 혁명의 에너지는 18489월 이후 각지로 분산되었으며, 반혁명 측이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게 된다. 혁명에 대한 진압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연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194953일부터 9일에 걸쳐 작센왕국 수도 드레스덴에서 인민궐기가 발생했으며, 바덴에서 512일 라슈타트 요새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날 13일 오펜부르크에서 대규모 집회가 일어났다. 18495월부터 7월까지 바덴에서 대규모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그러나 712일 혁명군의 스위스 패주와 723일 라슈타트 요새의 함락으로 독일 혁명은 종료되었다. 혁명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혁명운동의 지역적 분산, 혁명을 영도해야 할 시민계급의 온건파와 급진파로의 분열, 프롤레타리아트의 미성숙 등을 들 수 있다.
 
 
2) 마르크스에 의한 공산주의자동맹으로의 전환
 
(1) 추방자동맹
 
1815년 빈체제 이후 독일연방 각국의 봉건 지배체제는 봉건체제에 반대하는 사상을 억압하고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유지하였다. 이에 독일의 혁명적 지식인들은 모국에서의 탄압을 피해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있던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스위스 제네바 등으로 망명하였다. 또한 독일 연방의 직공들 중 주로 숙련공들은 일자리를 찾아 산업이 발달한 이들 유럽의 도시로 이주하였다. 직공들은 언어 등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도시 내 특정지역에 모여 살았다. 지식인 망명객들은 독일인 거주지역에서 독일혁명을 위해 다양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독일인 직공들은 그곳에서 정치적 망명객들이 조직한 사교 행사, 교육, 강의, 논쟁에 결합하였다.
그리하여 유럽의 망명지에서 혁명적 지식인들과 직공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도시에서는 당국의 눈을 피해 혁명적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이 다양한 노동자 교육, 친목단체를 결성했으며, 그 중 일부가 혁명적인 민주주의적 성격을 지니는 비밀단체로 발전하였다. 독일의 망명객들과 노동자들 역시 다양한 성격의 독일인 망명자 조직들을 만들었다. 이들 중 일부는 현지 경찰의 눈을 피해 비밀정치조직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1834년 파리의 독일인 망명객들이 만든 추방자동맹’(무법자 동맹, Der Bund der Geächteten)이다. 공화주의적 비밀단체인 추방자동맹은 파리 거주 독일인 망명객과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로서, 동맹의 지도자는 야콥 페네다이, 테오도르 슈스터 등이었다. 엥겔스의 공산주의자동맹의 역사에 따르면 추방자동맹의 구성원들은 거의 장인들이었다.
19세기초 이탈리아에서 등장한 애국적인 자유주의자들의 비밀결사조직인 카르보나리당은 조직의 보안을 위해 다양한 비밀제도를 운영했는데, 추방자동맹은 이러한 제도를 빌려왔다. 추방자동맹은 프랑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상급조직과 하급조직을 분리하고 이들 간에는 엄격한 비밀을 유지하였다. 추방자동맹의 규약에 따르면 구성원들은 조직에 가입할 때 반드시 비밀 준수의무를 위반할 경우 명예박탈과 죽음을 달게 받아 들인다"라는 선서를 해야만 했다. 또한 추방자 동맹은 말단 조직으로서 첼트를 두었으며, 여기서 두드러진 인물을 중급조직인 라거의 구성원으로 발탁하였다. 추방자동맹은 루소와 프랑스혁명 사상인 자유와 평등, 공화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삼았으며, 기관지 추방자(Der Geächtete)를 두어 자신들의 사상과 활동을 선전하였다.
 
 
(2) 의인동맹
 
스위스 취리히에서 독일의 통일을 목적으로 활동하던 정치적 결사인 청년독일파1836년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압력으로 취리히 주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 청년독일파는 파리로 망명하여 독일인 망명객들을 상대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파리의 청년독일파는 추방자동맹보다 더 민주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존의 추방자동맹이 소수엘리트의 혁명독재를 주장했던 이탈리아의 부오나로티 노선을 따랐던 반면, 청년독일파는 이에 대립했던 마치니 노선을 추구했다. 청년독일파가 추방자동맹에 영향을 미치자, 추방자동맹이 분열하였다. 1837년 추방자동맹 내에서 공산주의적 이념을 강조하는 일부 프롤레타리아트들이 갈라져 나와 의인동맹’(정의자동맹, Der Bund der Gerechten)을 조직하였다.
의인동맹의 핵심은 여전히 스위스, 런던, 파리에 흩어져 있는 독일인 재봉사들이었다. 의인동맹원들은 주로 숙련노동자였지만 거의 과거에 소경영주에 의해 착취당했던 수공업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소부르주아로부터 근대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로 이행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은 대자본과 직접 대립하지 않았다. 엥겔스의 공산주의자동맹의 역사에 따르면 의인동맹은 추방자동맹의 가장 선진적인 그리고 주로 프롤레타리아트적인 인자들의 이탈이었다. 당시 의인동맹은 프랑스 노동자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았는데, 프랑스 노동자공산주의는 재산의 공유를 평등의 근본조건으로 요구하는 바뵈프의 공상적 평등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의인동맹은 절반은 선전적이고 절반은 음모적인 단체였다. 의인동맹은 선거에 의한 지도부 선출 등 민주화된 측면도 있으나, 1834년의 프랑스 결사금지법 때문에 추방자동맹과 마찬가지로 비밀 지하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명예박탈과 사형 등을 포함한 추방자동맹의 규약이 그대로 전해 내려왔다. 의인동맹 규약은 굴욕적 억압의 굴레로부터 독일의 해방, 노예상태로부터 인류의 해방에 대한 협력, 인간 및 시민의 권리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또한 과거 추방자동맹의 공화주의적 전통을 유지하였다.
1837년 의인동맹 내에서 재산의 공유에 대한 토론이 활발해졌으며, 그 결과 공산주의적 지향을 명확히 하는 강령이 논의되었다. 칼 샤퍼(Karl Schapper)가 의인동맹의 결의에 의해 재산공동체라는 제목의 강령 초안을 작성했으며, 바이틀링(Christian Wilhelm Weitling)이 재산공유의 실천가능성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바이틀링이 1839년 초에 완성한 현실의 인류와 당위의 인류는 의인동맹의 공식강령으로 채택되었다. 바이틀링은 공산주의를 원시기독교와 연결시켰으며, 사회에서의 노동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화폐체제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바이틀링이 주장하는 재산의 공유는 단순히 민주공화국에서 평등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다른 사회질서의 기초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보편적인 노동의무에 기초하는 중앙집권화된 경제조직으로서, 각각 천 명 정도로 이루어지는 가족적 결사체와 이 가족적 결사체에서 선출되는 상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파리의 의인동맹은 당시 블랑키, 바르베스, 마르탱 베르나르 등이 지도하고 있던 프랑스 비밀단체인 '계절협회'의 독일인지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계절협회가 1839512일에 무장봉기를 일으켰을 때 의인동맹의 지도자들도 이에 가담하였다. 봉기가 일어난 날 밤에 의인동맹의 지도자인 식자공 칼 샤퍼와 하인리히 바우에르가 체포되었다. 이들은 징역을 살고 런던으로 망명하였고, 바이틀링은 스위스로 활동 거점을 옮겼다. 이후 프랑스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의인동맹의 주요 간부는 파리를 떠났으나 중앙본부는 계속해서 파리에 있었다.
런던에 망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의인동맹의 연계가 다시 맺어졌기 때문에 이제 런던이 의인동맹의 새로운 중심지로 되었다. 1840년 런던에서 칼 샤퍼, 시계 제조공인 요세프 몰 등이 의인동맹의 대중조직으로서 독일노동자교육협회를 설립하였다. 독일노동자교육협회 내부 구성원들에게는 공산주의노동자협회로 알려진 이 협회는 사실상 의인동맹의 런던 지부로 활동하였다. 이 협회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활동적이었기 때문에 의인동맹이 이 협회의 지도권을 전적으로 장악하였다.
의인동맹의 유럽지부들은 스위스나 다른 도시에서도 다양한 노동자교육협회를 만들어 의인동맹의 공개조직으로 활용하였다. 의인동맹 회원들은 법률로 정치적인 협회가 금지된 곳에서 합창모임과 같은 음악단체, 체육단체, 농업단체 등을 결성하여 대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협회들은 비밀결사인 의인동맹에게 완벽한 보호막을 제공하였다. 또한 이러한 다양한 노동자협회는 의인동맹이 신입회원을 얻는 원천이었다.
재건한 의인동맹은 번창했으며,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지부가 결성되고 지지자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특히 런던에서 독일어를 하는 여러 나라의 망명자들이 노동자협회로 모여들었고 그 결과 의인동맹은 점차 국제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의인동맹의 지도자들은 런던을 자주 다녔던 엥겔스를 통해 차티스트들과 연락을 맺게 되었으나, 영국의 차티스트들은 의인동맹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의인동맹은 계절협회의 무모한 무장봉기의 실패가 주는 교훈에 따라 노동자의 장기적 교육과 계몽을 새로운 기조로 삼았다. 이에 따라 대중에 대한 선전이 강조되고 대신 규약의 엄격한 운용은 점차 완화되었다. 하지만 바이틀링은 계몽적 선전을 인정하면서도 무장봉기 노선을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18435월 봉기를 계획하다가 스위스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다수의 문건이 압수되어 의인동맹은 또다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위스와 파리에 근거한 소수파인 바이틀링파와 다수파인 반()바이틀링파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8452월부터 461월까지 런던에서 열린 연속 토론에서는 바이틀링과 샤퍼가 직접 논쟁을 벌여 대립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바이틀링은 여전히 재산공동체의 폭력적 노선을 고집하고 바뵈프적인 절대적 평등주의 논조를 강조하였다.
한편 파리는 조직의 혼란과 침체로 더 이상 의인동맹의 중앙본부로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84611월 중앙본부가 런던으로 이전하였다. 샤퍼파는 런던의 새로운 중앙본부를 장악하고 반바이틀링파의 결집을 통해 동맹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샤퍼파는 11월에 동맹원을 향한 호소를 내놓고 동맹대회의 개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바이틀링파의 끈질긴 저항, 그륀파와 그 밖의 중간파의 무관심으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나아가 12월에는 베를린 지구 의인동맹 회원들이 일제히 체포되었고, 체포된 일부 간부가 공안당국에 자백함으로써 조직이 다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3)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개입
 
첫째, 마르크스는 독일혁명과 나아가 유럽혁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혁명조직이 필요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노동계급들에게 선전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였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활동을 통해 독일혁명에 적극 참여하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혁명에 일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런던의 의인동맹 지도부는 조직내분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그때까지 의인동맹으로부터 물러서 있었던 공산주의 운동의 활동가들을 동맹에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엥겔스는 1843년 런던에서 칼 샤퍼 등 의인동맹의 지도자들을 알게 되었다. 샤퍼는 이때부터 엥겔스에게 의인동맹으로의 가입을 권유했으나, 엥겔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엥겔스는 1845년부터 1848년 혁명까지 여러 신문에 기고하면서 연구목적을 내세워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브뤼셀과 파리, 런던에서 독일인 장인,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였다. 파리에서 추방당했던 마르크스와 달리 엥겔스는 이들 도시들을 자유롭게 다니며 브뤼셀의 마르크스와 런던의 의인동맹에 대한 대변자로서 행동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6년에 만든 브뤼셀의 공산주의통신위원회는 차티스트 잡지 북극성의 편집인 하니에게 영국 연락원의 소개를 부탁했고, 하니는 의인동맹 런던지부의 칼 샤퍼를 추천했다. 이들은 차티즘과 폴란드 봉기를 공동으로 지지하며 서로 협력을 약속했다. 샤퍼와 의인동맹의 런던 본부는 마르크스에게 "우리의 과제는 인민을 계몽하고 재화의 공유를 위해 선전하는 것이고, 당신도 같은 것을 원하니 함께 손을 잡고 공동의 힘으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합시다"라고 제안하였다.
샤퍼는 18466월 런던에도 공산주의통신위원회를 만들어 브뤼셀과 연결을 갖겠다는 뜻을 마르크스에게 전달하고, 실제로 7월 샤퍼 등이 '런던공산주의통신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847년에 들어서 마르크스 진영과 의인동맹 상호간의 협력이 더 강화되었으며, 마침내 의인동맹의 런던 중앙본부는 471, 마르크스 진영에게 의인동맹의 가입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둘째, 마르크스는 은밀하고 음모가적인 의인동맹을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혁명조직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미 1846년 의인동맹의 지도자인 샤퍼를 직접 만나 서로가 바이틀링의 종교적 음모적 입장에 반대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의인동맹 역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지적한 결함 즉 음모주의와 폐쇄성을 제거하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의인동맹의 런던 중앙본부는 “184762일에서 9일까지 회의를 열어 새로운 정관을 발표하며, 공산주의 교리문답을 논의할 것이며, 동맹의 이름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바꿀 것을 마르크스 진영에게 약속하였다. 특히 동맹의 지도부는 향후 동맹의 대회에서 공산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신앙고백초안을 선언의 형식으로 발표하고 새로운 강령으로 채택할 것을 제안하였다.
마르크스 진영이 의인동맹에 가입하기 직전 요제프 몰은 의인동맹을 대표하여 브뤼셀에 와서 몇 가지 중요한 제안을 하였다. 마르크스와 몰은 의인동맹이 더 이상 음모가적 비밀결사여서는 안 되고, 새로운 강령을 작성해야 한다는데 동의하였다. 이처럼 마르크스의 제안이 수용되자, 18472월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브뤼셀 공산주의 통신위원회는 의인동맹의 개조를 조건으로 의인동맹에 가입하였다.
존몰리뉴(John Molyneux)에 따르면 마르크스 입장에서 첫째로, 가능한 모든 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조직의 필요했으며, 둘째로,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해방, 그리고 그 목표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내부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조직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의인동맹에 결합하였다.
의인동맹에 가입한 마르크스는 의인동맹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전환하는 것을 주도하였다. 마르크스의 가맹 직후에 나온 중앙본부의 동맹원을 향한 호소는 공산주의를 사회주의와 명확히 구별하여 전자야말로 동맹의 입장임을 역설하고 새로운 강령의 작성, 공적 기관지의 발행 등을 향후 과제로 제기하였다.
1회 의인동맹대회는 18476월에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의인동맹은 명칭을 '공산주의자동맹(Bund der Kommunisten, The Communist League)'으로 변경하였다. 따라서 이 대회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제1회 대회를 겸하였다. 이 대회에서 민주적인 규약이 채택되었으며, 그에 따라 의사결정구조와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다만 의인동맹의 지부나 개별 반, 개개의 동맹원이 모두 공산주의자동맹으로 전환한 것은 아니며, 활동을 정지한다든지 바이틀링파처럼 의인동맹의 정통을 자임하며 독자적으로 활동을 계속한 경우도 있었다.
파리 지부를 대표하여 공산주의자동맹 제1회 대회에 출석한 엥겔스는 브뤼셀공산주의통신위원회의 특사 자격으로 공산주의자 신앙고백초안을 의인동맹 신조의 초안으로서 제출하였다. 이와 별도로 중앙위원회는 새로운 규약과 강령 초안인 샤퍼의 공산주의의 신조 표명을 대회에 제출하였다. 하지만 규약만이 결정되고 양자가 제출한 강령 초안 모두는 대회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되지 않았으며, 최종적인 결정은 향후 런던에서 개최될 제2회 대회로 넘겨졌다.
184711월 마르크스는 벨기에 브뤼셀의 우애로운 민주주의자연합의 부위원장 자격으로 런던의 우애로운 민주주의자연합이 개최하는 폴란드혁명 기념집회에 참가하고자 런던에 왔다. 마르크스는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 1112일에 열린 공산주의자동맹의 제2회 대회에 브뤼셀지부의 대표로서 참석하여 토론하였다. 이 대회에서 공산주의자동맹 규약이 대폭 개정되었다.
엥겔스는 제2회 대회 직전 18471022일 공산주의자동맹 파리지부의 회합에서 공산주의자 신앙고백초안을 수정하여 공산주의 원리를 제안했고 이것이 모제스 헤스가 제출한 대안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아 제2회 대회에 제출되었다. 하지만 제2회 대회에서도 강령은 최종적으로 결정되지 못하였다. 다만 제2회 대회에서 채택한 규약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동맹은 당의 이름 아래 선언을 발표하도록 돼 있었다. 이에 샤퍼 등의 동맹 지도부는 새로운 조직에 어울리는 강령의 기초를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의뢰하였다.
엥겔스가 작성한 공산주의 원리는 과거 비밀결사조직의 강령이 취했던 문답 형식이었다. 또한 그 내용 역시 의인동맹의 색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엥겔스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엥겔스는 18471123일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자신의 공산주의 원리를 짧게 요약해 주고 "일정량의 역사가 거기에서 이야기 되어야 하기 때문에 교리문답 형태를 버리고 이것을 공산주의 선언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 작업은 엥겔스의 제안으로 마르크스에게 맡겨졌다.
1848125일 공산주의자동맹의 런던 중앙위원회가 브뤼셀지부의 마르크스에게 보낸 통신 ‘124일의 중앙위원회 결의는 마르크스에 대해 새로운 강령인 공산주의 당 선언21일까지 런던으로 보내도록 재촉하였다. 이에 마르크스는 조속히 공산당 선언을 탈고하여 런던으로 발송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비밀결사조직이기 때문에 공산당 선언은 동맹원이 지도하고 있던 계몽적 합법단체인 '노동자교육협회'의 출판물로서 48224일에 익명으로 발행되었다. 공산당 선언은 엥겔스가 1847년에 작성한 공산주의 원리을 초안으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마르크스의 독창적인 저작이다. 공산당 선언의 상당부분은 바이틀링의 장인 공산주의가 대표하는 의인동맹의 원시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셋째, 마르크스는 그 당시 혁명조직이 비합법적인 비밀조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비밀조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혁명조직의 대중적 접촉면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의인동맹은 1843년 이래 바이틀링과 카베, 프루동을 지지하는 세 집단으로 분열하였으며, 급기야 1846년에 이르러 동맹은 거의 붕괴될 지경이었다. 이에 마르크스 진영은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노력 대신, 음모가들 중심으로 분파투쟁에 빠져 있던 의인동맹에 대한 개입을 시도하였다. 마르크스는 의인동맹의 지도자들에게 음모적 방식을 버리고 노동자 대중 내에서 공산주의적 이념을 공개적으로 선전하는 기관으로 전환하자고 설득하였다. 이미 엥겔스는 18468월부터 파리의 의인동맹지부에서 활동하며 에버베크의 협력으로 의인동맹 내 그륀파의 재조직화를 시도하였다.
마르크스 진영은 184711월 제2회 공산주의자동맹 대회에서 동맹의 대중적 영향력 획득을 위해 동맹원이 다른 정치적 단체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할 것, 혁명 정세가 도래한 경우에 동맹의 신속한 행동이 가능하도록 민주적 절차에 일정한 제한을 둘 것을 제안하고, 이는 새로운 규약에 반영되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을 비밀조직으로 유지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노동자대중조직을 앞세워 노동자 대중을 상대로 공산주의 조직활동과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출범한 후 두 달 뒤 브뤼셀의 공산주의통신위원회는 동맹의 지부로 전환하였다. 18478월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 브뤼셀 지부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마르크스는 브뤼셀에서 동맹의 공개조직으로서 성격을 지니는 좀 더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노동자협회를 만들었다. 이 노동자협회는 의회를 흉내 낸 토론의 무대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노래, 낭송, 연극 같은 것도 주최하였다.
 
 
3) 음모조직에서 정당으로 발전
 
공산주의자동맹은 공산당 선언을 강령으로 삼아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고양했으며, 신라인신문을 기관지로 삼아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또한 노동자대중의 공개조직을 배후에서 조직하여 이를 통해 노동자대중을 의식적으로 조직해나갔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조직의 목적, 대의기구, 민주주의적 절차 등을 규약에 명시하여 초보적이나마 정당적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2회대회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의 규약 제1조에 규정된 공산주의자동맹의 목적은 "재산공동체 이론의 보급 및 가급적 신속한 실천적 도입에 의해 인간을 노예상태에서 해방하는 것"으로부터 "부르주아 지배의 타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 계급대립에 기초한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폐기, 그리고 계급과 사적 소유가 없는 새로운 사회의 창설"이라고 전면적으로 변경되었다. 의인동맹 규약에 있었던 동맹원의 '독일인' 조항이 철폐되고 동맹의 목적에서도 '독일의 해방'이라는 문구가 삭제되어 국적과 민족을 넘어선 단결이 추구되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조직이 민주적 규칙에 따라 운영되도록 각종 절차를 명확히 하여 소수엘리트의 음모적 독재를 차단하였다. 동맹은 철저한 민주주의 구조를 수립하고 음모를 동경하는 모든 경향과 투쟁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민주적 대의기구를 두고 있었다. 2회 대회에서 조직운영 규약은 좀 더 자세하게 명문화되어 이전보다 더욱 민주적인 것이 되었다. 집행 권력으로서의 중앙위원회와는 별도로 입법기관으로서 '대회'를 신설하였다. 대회는 선거를 통해 구성되며 언제든지 구성원을 경질할 수 있는 평의회의 성격을 지녔다. 낡은 신비적인 명칭들을 모두 폐기하고 반, , 지도조, 중앙위원회 및 대회를 갖추었다. 동맹은 반과 조, 중앙위원회, 대회를 민주적 선출에 의해 구성하고 그 대표자를 선거권자들이 소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최소조직인 반은 3명 내지 20명으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규약과 강령 초안은 "대회의 모든 입법결정은 승인 또는 기각을 위해 각 반에 제기된다"는 규약 제21조에 입각하여 하부 토론에 맡겨졌다.
운영규칙은 민주화되었으나 동맹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비밀결사로서 동맹원은 비밀 준수 의무를 짊어졌다. 공산주의자동맹은 400여명 미만의 맹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맹원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다른 급진적인 민주주의 운동 속에서 활동하였다. 맹원은 맹비를 납부하고, 선전사업을 하며, 동맹의 결정에 복종하고 비밀을 엄수하여야 했다. 맹원의 가입은 반위원장에게 하며 가입 당시 규약을 숙지한 후 당원의 의무준수를 서약해야 했다. 맹원은 별명을 사용하며, 각자의 반들은 서로 알리지 않으며, 어떤 연계도 갖지 않는 것으로 하여 비밀활동을 기본으로 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주로 독일 내외의 독일인들로 구성돼 일정부분 독일공산당의 역할을 하면서도 각 나라에 지부를 두는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공산주의자동맹이 여러 나라에 걸쳐 지부를 두고 독일이외의 다른 나라의 혁명에도 일부 참여하였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동맹은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인 친목단체나 연대단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초보적인 형태의 정당이었다. 이점이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인 교류단체로 설정된 국제노동자협회와 다르다. 즉 국제노동자협회 규약 제1조에 따르면 협회는 각국에 존재하고 있으면서 동일한 목적 즉 노동계급의 옹호, 발전 및 완전한 해방을 추구하는 노동단체들 간의 교류와 계획적 협력의 중심으로 되기 위하여 창립되었다.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를 국제공산당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여러 나라 노동자조직의 연합체 혹은 당의 연합체로 봤다. 따라서 각 지부는 각기 자신들의 이론적 강령들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다. 다만 본부인 총평의회의 통솔력을 강화시킬 것인가 지부의 자치권을 지킬 것인가, 요컨대 조직 원리로서 중앙집권 모델을 취할 것인가 연합주의적인 모델을 취할 것인가의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전신은 주로 프랑스 등에 망명한 독일인들이 주축이었고, 공산주의자동맹의 주축 역시 독일인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동맹이 주력한 것은 당연히 독일혁명이었다. 마르크스 역시 공산주의자동맹의 활동 시기 대부분에 있어 독일혁명을 완수하려고 노력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운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미숙하고, 조직상 취약했던 시기에 운동의 주요 구성원이 공장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로 되어가던 직인 날품살이였던 운동의 초기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당을 건설하려는 노력을 반영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의 국제적 성격은 그 전신인 추방자동맹과 의인동맹 시절부터 시작된다. 이 두 조직은 프랑스에 있는 독일인 망명조직이었기 때문에 독일의 혁명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혁명에도 관여하게 된다. 또한 의인동맹이 영국으로 그 본거지를 옮긴 후 영국의 차티스트들과의 교류를 통해 영국의 노동자운동에 일정부분 관여한다. 공산주의자동맹 시절에 있어 동맹원들은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 흩어져 있었다. 나아가 유럽 각지의 독일인 망명조직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의 국제당적인 성격은 더욱 발전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동맹은 기본적으로 유럽 각국에 흩어진 독일인망명자를 중심으로 꾸려진 조직이었지만 공산주의자동맹의 발족과정에서 프랑스, 영국인, 벨기에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등이 결합하였다. 런던의 공산주의자동맹은 파리의 독일인 망명자들의 비밀결사에서 다양한 국적의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이 모인 국제조직으로 발전하였다.
브뤼셀에서 활동하던 마르크스의 조직이 공산주의자동맹과 통합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동맹은 독일의 혁명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의 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일정부분 결합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을 통해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적 노동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으며, 실제로 그러한 효과를 얻었다.
당시 유럽은 이미 국제적 성격이 짙었다. 무엇보다 1847년의 경제공황이 각국에 비슷한 영향을 미쳤다. 교통 · 통신의 발달로 뉴스가 그날 안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망명자들이 수일 내에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 있었다. 망명자들은 이웃 나라들로부터 급진적 사상을 본국으로 보내 본국 사람들과 밀접한 연락을 서로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동맹은 오늘날의 일국 내 정당의 성격과 여러 나라 정당의 국제조직으로서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공산주의자동맹은 공산주의 운동단체에서 정당으로 전환해가는 과도기 조직이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은 그 노선에 있어서도 국제주의 관점을 지녔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전체 노동운동의 국제적 성격을 강조했고,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국제주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각국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직후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독일노동자들로 무장단을 구성하여 독일로 진격하여 혁명공화국을 수립하려는 운동이 일어나자, 마르크스는 이 계획을 반대하고 나섰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독일혁명은 독일 스스로 수행해야만 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선언문인 공산당 선언이 유럽 각지의 혁명과 그 혁명주체와 공산주의자동맹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한 것도 이런 배경이다. 당시 유럽은 혁명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지만, 프랑스, 독일, 영국, 폴란드 등 각 나라의 혁명의 구체적인 상황과 요구는 같지 않았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지도부들은 이러한 다양한 혁명에 대해 평가하고 그 혁명의 방향을 가늠하면서 유럽 각지에 있는 공산주의자동맹의 회원들에게 활동지침을 주고자하였다. 이러한 언급들을 통해서 다양한 혁명의 성격과 전망에 대한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입장을 추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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