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결

공산주의자동맹의 전신인 추방자동맹이 1834년 프랑스 파리에서 탄생하였으며, 공산주의자동맹은 1848년을 전후로 하여 프랑스 혁명과 독일혁명을 경험하였다. 또한 그 중앙위원회는 1850년까지 영국의 런던에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18307월 혁명 이후 대부르주아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18482월 혁명은 대부르주아에 반대하는 노동자혁명의 성격을 지녔다. 반면 그 당시 독일은 봉건제도가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18483월 혁명은 반봉건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선거와 의회 등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있었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선거권확대운동에 기울어져 있었다.

독일의 혁명적인 지식인들은 자국의 탄압을 피해 유럽의 각국으로 망명하였고, 거기서 일자리를 찾아 유럽으로 왔던 독일 숙련노동자들과 함께 공화주의적 비밀단체인 추방자동맹을 결성하였다. 추방자동맹의 공산주의적 일파가 떨어져 나와 의인동맹을 만들었다. 의인동맹은 수차례 음모적인 봉기로 인해 조직원들이 체포되는 등 조직이 위기에 처하였고, 봉기를 우선시하는 바이틀링 진영과 노동자 대중에 대한 혁명적 선전활동을 우선시하는 샤퍼 진영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다. 샤퍼 진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진영을 의인동맹에 끌어들여 조직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진영은 혁명적인 대중 활동을 전개할 조직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의인동맹이 음모적 방법을 버릴 것을 전제로 하여 의인동맹에 결합하였다. 이후 의인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도로 강령과 규약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공산주의자동맹으로 탈바꿈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자본가 지배의 종식과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창출을 목표로 하고, 당비납부와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는 당원들을 기반으로 민주적인 대의기구와 집행기구 및 지역지부를 갖춘 초보적인 정당이었다.
마르크스는 18482월 혁명이 일어난 직후 공산주의자동맹의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어 1852년 동맹이 해산될 때까지 프랑스 파리와 독일 쾰른, 영국의 런던 등을 옮겨 다니며 동맹을 지도하였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지도부는 18482월 프랑스 혁명 직후 파리로 망명하여 프랑스 혁명을 직접 목격했으며, 그 이후에는 독일로 들어가 독일혁명에 결합하였다. 독일 혁명이 패배한 후에는 18496월 프랑스 소부르주아의 파리봉기에 참여한 후 런던으로 추방당하였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혁명 활동은 독일 전역에서 전개되었으나, 특히 쾰른을 중심지로 하였다. 1848년부터 1849년까지 독일혁명 과정에서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지도부들은 쾰른에서 기관지 신라인신문을 발행하거나,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와 같은 유인물을 통해 혁명적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이들은 다양한 노동자단체를 만들거나, 기존의 노동자단체에 적극 결합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노동자단체들을 내세워 다양한 민주주의 단체들과 공동위원회를 결성하여 집회, 행진, 청원 등 대중투쟁에 나섰으며, 혁명적 상황에서 무장봉기를 준비하였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
1849년 혁명이 실패한 후 마르크스는 1850년까지 또 다른 혁명이 즉시 가능하다고 보고 혁명 당시 비밀조직으로서 느슨해진 공산주의자동맹을 다시 혁명적이며, 중앙집권적인 비밀조직으로 재건하고자 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중앙위원회는 3월 호소문을 통해 독일혁명의 실패는 부르주아의 배신으로 인한 것이므로, 각 지부는 중간계급이 포괄되어 있는 민주주의협회로부터 탈퇴하여 부르주아와 단절하고, 노동자 독자적인 혁명을 준비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6월 호소문은 각 지역의 조직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고, 조직 내의 소부르주아를 완전히 축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르크스는 1850년 이후 공황의 소멸과 자본주의의 호황으로 대중의 혁명적인 정서가 수그러들고, 반동적인 지배계급의 탄압이 거세다는 점을 인식하고, 혁명적인 봉기노선에서 노동자를 상대로 한 대중적인 혁명 선전활동으로 전환하였다. 이로 인해 기존의 봉기노선을 고수하던 중앙위원회 소수파인 윌리히파와 대립하였다. 마침 공산주의자동맹의 지도부가 잇달아 검거되고, 공산주의자동맹의 전모가 당국에 의해 드러나자, 마르크스는 스스로 공산주의자동맹을 중앙위원회 결정을 통해 해산하였고, 반대파 조직도 사실상 해체되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을 통하여 자신의 혁명이론을 노동자대중들에게 선전하고, 실천을 통하여 검증할 수 있었다. 또한 공산주의자동맹을 지도하면서 프랑스혁명에 일부 관여하고 독일혁명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였다. 이를 통해 마르크스는 유럽의 주요 혁명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국제노동자협회를 주도적으로 발전시키는데 기반이 되었으며, 독일 사회민주당의 탄생에도 기여하였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 시기에 독일에서의 반봉건부르주아혁명과 부르주아의 배신, 프랑스에서의 노동자봉기에 대한 잔혹한 진압과 농민의 반동화 및 선거를 통한 루이 나폴레옹 황제의 등장, 영국에서의 선거권 확대투쟁과 의회정치의 발전 등을 경험하였다. 마르크스는 이 시기에 혁명적인 공산주의적 노동자당을 건설하려고 하였으며, 노동자의 독자성을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혁명의 성공을 위해 농민과 소부르주아 등 대중과의 연대도 시도하였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은 평상시에 노동자단체를 조직하고, 노동자 대중을 상대로 혁명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혁명적 시기에는 대중투쟁과 봉기를 준비하였다. 또한 독일혁명기간 중에는 민주주의적 의회를 구성하고, 이 의회에 노동자후보를 진출시키려고 하였으며, 청원운동과 의원들과의 연대를 통해 의회공간을 활용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마르크스의 실천적인 정당이론과 혁명이론이 발전하는 데에 있어 구체적인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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