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소결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경제적인 하부토대가 인간의 의식과 정치제도를 포함한 상부구조를 일차적으로 규정한다고 보지만, 일정한 조건에서 반대의 작용을 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을 초래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거꾸로 일정한 조건에서 정치투쟁이 경제투쟁을 조직할 수도 있다. 나아가 경제투쟁의 정치투쟁으로의 전환이 부르주아 지배이데올로기와 지배기구에 의해 방해받을 때 선진적인 사회주의세력에 의해 정치투쟁이 경제투쟁에 비해 앞서거나 혹은 더 강조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상호작용을 강조했으며, 선진적인 사회주의세력에 의한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마르크스의 정당에 대한 필요성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의 공식인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이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로 표현된다. 이 원리가 의미하는 바가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사상, 혹은 사회주의 혁명가와 결합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오히려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계급과 결합할 때 관념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실천적인 혁명사상이 되며, 또한 노동계급의 무기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한 공산주의자동맹의 초보적인 정당으로의 발전, 국제노동자협회의 창설, 독일 사회민주당 건설기 동안의 마르크스의 사상적 지도 등을 보건대,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적극적 건설은 물론,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 사회주의 혁명가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하였음은 분명하다.
러시아 혁명의 초반기에 짜르의 폭압체제 아래서 노동계급이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닌은 소수의 선진적인 혁명가에 의한 비합법적인 전위정당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레닌은 1905년 혁명 당시에는 보다 많은 혁명적인 노동자당원을 입당시키고자 전위정당의 성격을 완화하였다. 1905년 혁명이 실패한 후 레닌은 다시 전위정당의 성격을 복원하였다. 그 이후 짜르의 폭압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노동계급과 러시아사회민주당이 성장하고 1917년 혁명이 무르익자, 당의 노동자대중적 성격을 강화하고자 노력하였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노동계급 자기해방의 원리를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건설원리로 더욱 구체화하였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건설방식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 선진적인 사회주의 지식인과 노동계급의 결합으로 정식화하였다. 레닌의 전위정당론은 러시아 짜르 체제를 고려할 때 전술적인 선택이었지만, 이러한 특수성을 주목하지 않고 일반화할 때는 스탈린주의정당에서 보듯이 관료주의정당, 엘리트정당, 과두정당으로 흐를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이 전개되던 그 당시 유럽은 이미 보통선거와 평등선거가 정착되어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선거권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대중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하였다. 따라서 유럽의 사회주의정당은 점차 선거에서 득표율 제고를 목표로 삼는 의회주의적 대중정당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은 당이 대중투쟁보다 제도적 기반을 확대하는 데 더 집중하도록 하였다. 또한 의회와 언론을 통한 소수의 정치엘리트의 활동이 주목받았다. 제도정당화된 사회주의노동자당 내에서 의회 정치인뿐만 아니라 당에 의해 재정적, 정치적 보장을 받는 직업적인 당 관료층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당의 관료화, 과두화를 비판하면서 대중의 자발적인 투쟁을 강조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연장선에서 레닌의 중앙집권적이며, 엘리트적인 정당관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당의 주도적 역할을 소홀히 함으로써 대중의 자발성이 혁명적 정세에 비해 늦게 형성되는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지 못하였다. 또한 레닌의 전위정당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중앙집권적인 정당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오독될 여지가 다분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실제로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정당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혁명적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지향해왔던 민주적인 중앙집권적인 당이라는 전통이 모호해지는 데 일조하였다.
같은 유럽 출신이었지만 그람시는 의회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 여론과 담론 등 지배계급의 메커니즘에 주목하고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구심점으로서 정당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람시의 경우에는 자본주의 체제가 경제적 토대와 폭력적 지배기구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을 통해 자기통치 방식을 사회에 내재화하는 것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그는 부르주아의 통치를 동의하도록 하는 설득구조를 균열케 하는 진지적 의식화라는 상부구조 투쟁을 강조하였다. 그람시는 이러한 대중에 대한 의식화 투쟁에 있어 당의 적극적인 역할을 인정하고, 지도부와 대중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였다.
스탈린은 당을 노동계급의 일부분으로 보는 레닌과 달리 당과 계급을 일치시킴으로써 일당체제를 설정하였다. 또한 스탈린은 당의 권력과 국가의 권력을 일치시킴으로써 일당독재를 정당화하였다. 스탈린은 당 조직 특히 중앙위원회가 당을 대신하고, 최고지도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신하는 대리주의를 심화시켜 당 내 민주주의를 훼손하였다. 결국 당의 관료, 당의 엘리트, 당의 과두, 당의 최고지도자 등의 일방적인 피라미드형 권력구조를 고착화하여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민주주의적 전통을 고사시켰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엘리트적인 당의 관료제를 비판하고 대리주의를 극복하여 당 내 민주주의를 복원하고자하였다. 나아가 트로츠키는 당을 계급과 일치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당은 계급의 일부이므로 계급의 다른 부분을 대표할 수 있는 다른 정당이 가능하다는 논지로 프롤레타리아독재에 있어 일당체제에 반대하였다. 트로츠키의 노력은 소련에서 실패하였으나, 스탈린주의정당이 지배하는 조건에서도 이를 비판하는 흐름을 보존하여, 스탈린체제가 붕괴된 후 유럽을 중심으로 새로운 혁명적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건설하는 데 있어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스탈린주의정당이론에 영향 받았던 기존의 유럽 공산당들이 스탈린체제 붕괴 후 침체의 길로 들어섰다. 반면 일부에서는 스탈린주의정당에 대한 반발로 인해 레닌의 민주적인 중앙집권적 정당까지 거부하고,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룩셈부르크의 입장을 과도하게 해석하는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크리스 하먼 등은 스탈린의 오명에서 레닌의 전통적인 민주적인 중앙집권적 정당을 분리하고, 룩셈부르크의 입장이 중앙집권적 정당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오독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들은 민주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전통을 복원하여 새로운 혁명적 정당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각 나라에서 다양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정당이론도 변화되어왔다. 이를테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 대한 강조점이 달라지고, 대중정당과 전위정당의 선택도 지배계급의 대응과 노동자주체의 조건에 따라 변화되어왔다. 특히 노동계급의 미성숙과 지배계급의 탄압이라는 조건에서 비합법정당 내 정치엘리트의 역할을 어느 정도로 인정할 것인가가 논의되었다. 반면에 보통선거가 정착된 이후에는 대중정당에 있어 직업적인 정치인, 엘리트, 당 관료들과 노동자 대중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논의되었다. 정당 논의 과정에서 당의 필요성, 대중의 자발성과 지도의 조화, 당 내 민주주의 보장, 제도투쟁에 의한 대중투쟁의 보완 등이 공통적으로 제기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볼 때 모든 시기에 모든 정당, 특히 모든 정세에 일관적으로 적용되는 마르크스 정당이론은 불가능하고, 또한 타당하지도 않다. 기존의 정당이론들이 제기하는 공통점과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구체적 조건에 맞는 정당이론이 필요하다. 각 조건에 맞는 마르크스 정당이론을 정립해 나갈 때 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발전 정도, 지배계급의 성격과 탄압 정도, 노동계급 이외의 타 계급의 민주주의와 혁명에 대한 수용성과 그에 따른 노동계급과의 관계, 사회주의이론과 사회주의세력의 성장 정도 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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