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당의 역할

정당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하면서도 정당의 역할을 어디까지 봐야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다. 러시아에 있어 혁명초창기에는 경제결정론이 싹틀 여지가 유럽에 비해 많았다.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할 때 러시아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테러리즘에 비해 정부의 탄압을 덜 받았다. 따라서 극렬한 정치투쟁으로 나아갈 당면한 요구가 상대적으로 덜 형성되었다. 또한 파업과 같은 대중투쟁이 그 당시 유럽에 비해 활발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굳이 정치투쟁을 의식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상황이 점차 돌변하여 성장하는 사회주의세력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으며, 경제투쟁조차도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정부와 지배계급에 대한 정치투쟁이 점차 불가피해졌다. 레닌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정당이 대중의 혁명운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레닌은 부르주아혁명기 이전인 1902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정당의 성격, 노동자계급의식 형성, 부르주아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경제결정론을 비판하였다.
레닌은 계급의식이 경제투쟁의 축적이라는 기초 위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였다. 레닌에 따르면 경제투쟁은 자생성으로부터 의식성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이를테면 1890년대 러시아의 파업은 그 시기에 노동자계급운동이 이룩한 진전을 고려한다면 의식적인 일련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주장하듯이 이러한 경제투쟁은 본질적으로 자발적 요소가 맹아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레닌에 따르면 경제주의는 정치활동을 부르주아에게만 맡기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투쟁만을 하라는 일종의 분업을 만들어 냄으로써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포기하게 만든다. 경제결정론자들이 말하는 자발적 노동계급운동은 곧 노동조합주의요, 노동조합주의는 부르주아에 의한 노동자의 이데올로기적 노예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노예적인 자발성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인 요소를 독려하는 것이 혁명가들의 의무이다.
다만 레닌이 정치투쟁의 토대로서 경제적 관계나 자연스런 경제투쟁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1907년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는 경제주의자들의 왜곡된 견해를 논쟁으로 바로 잡은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 팜플렛을 지나치게 절대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레닌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 다시 말하면 사회주의적 선진분자와 노동계급의 결합을 러시아사회민주당의 기본원리로 파악했으며, 이에 노동운동에 대한 당의 적극적인 관여, 사회주의 선진분자에 의한 노동계급의 지도를 강조하였다. 레닌에 따르면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노동자들이 잘 훈련된 조직에 의해 통일되고, 과학적인 사회주의 지식에 의해 인도되도록 하는 것이다. 과학적인 사회주의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의 사명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 사명을 자각하도록 선전 선동하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에게 그들 과거의 역사적 상태, 현재의 억압, 미래의 해방에 대해 말해주어야 한다.
레닌에 의하면 계급적 정치의식은 외부로부터만 즉 경제투쟁의 외부로부터만, 다시 말해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관계 영역 밖으로부터만 노동자에게 도입될 수 있다. 러시아에서도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론적 교리는 노동자계급운동의 자생적 성장과 독립되어 나타났다. 이를테면 사회주의 이론은 지식인들에 의해 다듬어진 철학, 역사, 그리고 경제이론으로부터 나왔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부르주아식인에 속하였다.
레닌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의식의 교육과 지도의 담당자 즉 운동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매개자가 바로 정당이다. 즉 정당은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자계급을 연결시켜준다. 레닌은 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우리는 한 계급의 당이다. 따라서 계급의 거의 전부가 우리 당의 지도 아래 행동해야만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에 반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정당 자체의 필요성은 인정하였지만 정당의 역할을 제한하였다. 룩셈부르크는 당 특히 지도부와 대중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했다. 룩셈부르크는 당의 보수화를 경계하면서 대중이 당의 바깥에서 당을 넘어서 나아갈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당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공식입장, 즉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의 결합을 수긍하고 있다. 그녀가 반대한 것은 당의 지도 자체가 아니라 당에 의한 계급대중의 일방적 지도이다. 지도하는 당이 어떤 종류의 당인가라는 점이 레닌과 달랐다.
룩셈부르크는 정당이 의식적으로 혁명을 조직하기 보다는 파업과 같은 자발적인 대중투쟁을 통하여 혁명이 밑으로부터 발생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녀에 따르면 대중파업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현상이며, 다만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서로를 조건지우면서 확산을 가속화한다. 룩셈부르크의 1899사회개혁 혹은 혁명에 따르면 계급은 외부의 지도에 의해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과 투쟁을 통해 각성되고 의식화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가 되며 하나의 계급으로서 조직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당의 영향력이 당 조직의 힘이나 당 자체의 선도적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의 사상, 강령 및 슬로건을 통해 행사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녀는 노동자들의 투쟁능력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이 행동지령을 내리거나 실제로 투쟁을 조직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녀에 따르면 당의 주요 과제는 선전업무를 주로 하는 정치적 지도이다.(존 몰리뉴, 1986)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자계급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믿었기 때문에 레닌주의적 철칙인 엄격한 규율과 통제는 불필요하다고 봤다. 룩셈부르크는 1906대중파업, 정당 및 노동조합이라는 팜플렛에서 레닌의 전체적인 조직계획은 미성숙한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그것의 당면한 엄청난 과제들이 결합하여 생겨난, 유물사관으로부터의 주관주의적 혹은 자유의지론적 일탈이었다고 비판하였다.
룩셈부르크는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정당의 지시기관들은 보수적 역할을 하게 되는 경향을 지적하였다. 룩셈부르크는 이러한 관료제적 구속만큼 젊은 노동운동을 권력에 굶주린 지식엘리트의 노예로 만드는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룩셈부르크는 1904러시아사회민주주의의 조직문제에서 혁명적인 노동운동에 의해 저질러지는 과오들이야말로 가능한 최선의 중앙위원회의 무오류성보다 역사적으로 더욱 가치 있고 유익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룩셈부르크가 마르크스의 낙관주의와 경제결정론을 일정부분 공유하였던 반면, 레닌은 경제결정론을 기본적으로 비판하면서도 1905년 혁명의 경험을 통해 엘리트주의적 부분을 일부 수정하여 최종적으로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당의 역할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당의 지도적 역할이 너무 커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일관적으로 보였다. 지역주의와 연방주의에 반대하고 기본적으로 중앙집중주의를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 동의하면서도 당의 중앙조직은 내재적으로 보수적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는 룩셈부르크가 활동하던 시기의 독일사회민주당의 현실을 비판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양자가 활동하였던 러시아와 독일의 역사적 차이에서 기인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가입한 독일사회민주당은 이미 수십만명의 당원을 가진 대중정당이었으며, 레닌이 고민한 조직, 효율성, 전문성은 이미 어느 정도 구비돼 있었다. 오히려 정당 내 관료제에 대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독일은 러시아와 달리 자발적인 대중투쟁이 미약하였다. 그래서 레닌은 우리에게 혁명가의 조직을 달라, 그러면 우리는 러시아를 뒤엎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반대로 그녀는 우리에게 대중의 자발성을 달라, 그러면 우리는 혁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존 몰리뉴, 1986: 123)
하지만 문제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오직 당의 응집성과 효율성을 제한해야만 당의 관료화를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즉 다수의 이익을 위한 다수의 자기의식적인 운동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것은 조직과 의식적 지도의 특정 형태가 아니라 조직과 의식적 지도 자체라는 것이다. 그녀는 대중운동의 특유한 자발성에 주목했지만 그 같은 자생적 발전을 동력화시킬 수 있는 정치조직에 관한 명확한 인식을 확립해 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무의식적인 것이 의식적인 것을 정정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녀의 희망에는 강한 숙명론이 내재해 있었다.(크리스 하먼, 1980)
또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반동적 위력을 과소평가했다. 만약 노동자계급이 자발적일뿐만 아니라 균일하게 급진화한다고 하면 폭발하는 대중은 머뭇거리는 지도자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또한 대중파업을 혁명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대중파업은 봉기가 아닌 한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계급투쟁의 한 계기일뿐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존 몰리뉴, 1986)
당의 조직화와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로자 룩셈브르크의 입장은 짜르 치하에서 혁명의 요구에 직면한 레닌의 관료적 정당에 의해 통제되는 러시아 노동자정치운동에 대한 반성이었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영향을 미쳤던 역사적 조건이 어떠하든 당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1918- 1919년 독일혁명에 있어 약점을 드러내었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립적이며, 적극적인 혁명적 당의 형성과 활동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당이 변화된 환경에 반응하는데 있어 신속할 수 없었다. 이는 독일에서 혁명적 당의 건설이 지연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한편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전략이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서구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도 레닌주의의 틀 속에서 지식인과 당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람시는 러시아에서 성공한 혁명이 왜 서구 특히 이탈리아에서 실패했는가를 규명하고 서구에 적합한 혁명 전략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람시에 따르면 서구사회의 경우, 국가의 주변에서는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는 시민사회라는 참호가 둘러싸고 있다. 러시아에서 했듯이 혁명세력이 기동전으로 국가를 전복한다고 해도 시민사회가 변혁되지 않는 한 부르주아 지배질서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기동전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진지전으로 이 참호를 점령해나가야 한다. 즉 오늘날 서구의 혁명정당은 장기적인 진지전을 수행해야 한다. 이 진지전에서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담당하는 지식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느 사회라도 자신의 하부토대를 형성할 때 자신의 논리를 옹호하고 전파하는 지식인들을 형성한다. 이런 면에서 모든 지식인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집단의지를 결집하고 확산시키는 유기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대중투쟁도 중요하지만, 이와 동시에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저항하는 이데올로기의 형성 역시 중요하고, 이러한 역할을 유기적 지식인이 담당한다. 오늘날 서구의 혁명정당이 계급동맹을 통해 보완되는 대중정당이기 때문에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면서도 노동계급이 종국적인 승리를 하려면 노동계급 이외의 다른 계급의 이해관계도 포함하는 이데올로기를 창출해야 한다.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이 이러한 저항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유기적 지식인의 총체가 당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람시는 진지적 의식화라는 상부투쟁을 강조하면서 당의 지도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계급의 힘은 정당에 의해 대표된다. 정당은 계급이 승리로 나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형식과 방법을 만드는 정교한 장치이다. 정당은 대중들로 이루어져 있다. 당과 대중이 별개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대중들의 참여가 없이는 정당의 정치적 투쟁이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노동계급이 집권한 이후에만 노동자 대중에 대한 거대하고 심도 있는 정치적 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또한 그람시는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룰 이상적인 군주의 조건을 제기했듯이, 노동자국가를 성립시키기 위한 이상적인 정당을 현대의 군주로 표현하고, 그러한 이상적인 정당의 조건들을 제시하였다. 그람시에 따르면 집단의지의 발전과 연결되지 않는 혁명은 수동적이다. 따라서 대중이 가지고 있는 맹목적이고 모순적이고 단편적인 요소들은 변혁되어 대중의 집단의지를 행동화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 대중들이 비판적이고 체계적으로 자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집단의지는 사회의 복합적인 유기체적 조직체이다. 이러한 집단의지가 형성되려면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그 출발점과 확산계기가 있어야 한다. 그람시에 따르면 그러한 계기가 정당이며, 정당은 또한 집단의지의 맹아이다.
또한 그람시는 당과 대중성, 즉 노동자계급의 자생성과 의식적 지도 사이의 균형을 주장하였다. 특히 정당 내 힘과 동의, 권위와 헤게모니, 지도와 피지도, 규율과 창의성, 연속성과 변화의 변증법적 통일을 강조하였다. 그람시에 따르면 혁명은 전쟁과 같으므로, 전쟁이 군대의 지휘관에 의해 준비되듯이, 혁명 역시 노동계급의 지휘관에 의해 엄밀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혁명적 운동은 혁명적 전위 즉 자각하고 있는 엘리트들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 다만 노동계급운동의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대중에 기반해야 하고, 행동에 돌입하기 전에는 대중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적극적인 대중에 기반한 혁명적인 정당에 의해 조직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란 관점에서 대중들의 전반적인 저항은 성공적으로 대중을 조직하고 움직이게 하는 철저한 정치적 작업에 의해 형성된다. 오로지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만 기존 사회의 범주를 초월할 수 있는 의식의 전환이 이론분야에서뿐만 아니라 혁명적인 실천분야에서도 가능하다. 또한 이럴 때만 혁명적인 조직의 적극적인 교육과 정치적 활동을 통해 노동자나 지식인 모두를 새로운 종류의 지식인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람시가 당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당의 관료화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람시는옥중수고에서 당의 주된 적이 관료제라는 점을 지적했지만 어떤 조직이건 연속성이 깨지면 당의 노선과 본질이 변질될 위험이 더 크기 때문에 연속성을 유지하는데 있어 그와 같은 위험은 반드시 따르기 마련이다고 지적하였다. 그람시는 동질성을 지닌 집단 내에서도 분화가 일어날 수 있다, 미헬스의 과두제를 인정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당의 조직형태를 모색하였다.
그람시는 당원이 대중적, 응집적, 그리고 이 양자를 중재하는 매개적이라는 성격을 구비해야만 당의 관료화, 경직화, 공허화, 개량화를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람시는 사실상 장군을 만들기보다 병력을 모으기가 더 쉽다면서 응집적 요소를 지도력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했다. 그런 배경에서 그람시는옥중수고에서 당 내부에서 할 일은 운동의 집중화인데, 실제운동을 수행하는데, 적합하도록 당의 조직을 부단히 다듬고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여망과 위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람시는이탈리아의 소비에트에서 노동자평의회운동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여 러시아의 소비에트를 이탈리아에 적용했다. 그람시에 따르면 공산당이 중앙집행위원회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행동전체를 응집하고 결합할 수 있는 조직과 규율을 갖추는 것은 소비에트에서 어떤 실제행동을 할 때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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