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의 관료화

트로츠키에 따르면, 마르크스나 레닌은 무계급, 무정부, 풍부한 물자에 바탕을 둔 자치적인 공동체로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곧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회를 사회주의로 봤다. 반면 스탈린은 국유화, 국가통제, 경제성장, 군사력을 강조했으며, 이의 달성을 위해 관료제를 적극적으로 강화하였다. 스탈린 시대에 당과 국가가 일체화된 상태에서 국가가 먼저 관료화되자 당 역시 관료화되었다. 심지어 선진적인 노동자가 당과 국가로 편입되어 관료로 전환되었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소련을 타락한 모습의 노동자국가라고 규정했으며, 관료제를 기생적인 카스트에 불과하다고 봤다.(존 몰리뉴, 1986)

레닌은 민주집중제를 토론과 비판의 자유, 그러나 결정 이후에는 행동의 통일로 해석하였고, 물론 트로츠키가 이러한 민주집중제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다. 민주집중제는 독일사회민주주의운동에서 유래됐으며, 멘세비키나 다른 사회민주주의정당도 이를 이론적으로는 수용하였다. 트로츠키는 잘못을 발견할 때 신속하게 방향전환을 할 수 있는 볼세비키의 장점을 강조하며 당내 관료화의 극복을 주장하였다. 1923년 트로츠키는 당 내 민주주의를 위해 공개적인 투쟁을 전개하기로 하고 프라우다지에 신노선을 발표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민주주의는 당이 발전하고, 새로운 단계로 돌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당의 관료화를 방지하는 세력으로서 학생 및 청년들을 이용해야 한다. 당 자체가 민주적이지 못하면 분파가 생겨날 수 있다. 당의 공식적 견해는 의견의 대립과 차이 속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견형성 과정이 슬로건이라든가 지령 등의 형태로 당을 위해 봉사하는 기구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당은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황폐해질 것이다. 당 지도부는 당원 대중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비판이라면 모조리 파벌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간주해선 안 된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스탈린의 지배 하에서 당 내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의 일체성이 붕괴되면서 분파와 분당의 조건들이 형성되었다. 트로츠키는 1936배반당한 혁명에서 계급독재와 당 독재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일당독재를 폐기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당은 처음에 소비에트의 테두리 내에서 정치투쟁의 자유를 계속 유지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런데 내전 때문에 반대정당이 모두 금지되었던 것이다. 이는 소비에트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조치였으나, 방위를 위한 일시적인 고육지책이었다. 하나의 계급에도 여러 부분이 있으므로 같은 계급에서도 여러 정당이 생겨날 수 있다.
 
트로츠키는 나아가 1938년 제4인터내셔날 강령에서 다양한 소비에트 정당들의 합법화를 통한 소비에트의 민주화를 강조하면서 노동자 농민이 자유 투표를 하여 어떤 정당들을 소비에트 정당으로 인정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트로츠키의 이러한 개혁은 당에 의해 거부당하였다. 오히려 소련공산당은 부하린과 트로츠키, 그리고 이들의 동료들을 반당분자의 혐의, 국가전복 혐의,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체포 암살 기도의 혐의로 숙청하였다. 부하린은 처형당하고 트로츠키는 망명지에서 암살당하였다.
 
1937년 반당분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부하린과 트로츠키 일당의 극악한 범죄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에 인민의 적들에 가담하여, 당내에서 우파블럭을 형성하였다. 10월 혁명 초기 이후로 지난 20년 동안 부르주아국가 정보기관의 요청에 의해 트로츠키와 부하린은 레닌, , 그리고 소비에트 국가에 대항하는 음모를 지휘하거나 직접 가담해왔다. 이들은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좌절시키기 위해 레닌과 스탈린을 체포하여 암살하고자 했으며, 1921년 레닌의 와병을 기회로 당 지도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당 내 균열을 의도적으로 심화시켰으며, 외국정보기관에 국가의 비밀을 제공하였다. 이들은 붉은 군대의 패배와 외국군의 개입을 통해 국방력을 훼손시키고, 소련을 해체하여 소련에서 자본주의 노예제도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스탈린주의정당은 마르크스주의정당의 한계를 벗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몬티 존스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함에 있어서 독재적인 소집단이 노동계급 자체를 대신하고 있는 스탈린체제와 같은 일당 시스템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다만 레닌에 의하면 러시아에서 혁명 초기의 타 정당들이 반혁명에 가담함으로써 일당제로 귀결됐다. 반면 폴란드 체코 등은 여러 정당들이 함께 파시즘에 대항하고 민주주의 개조에 참여했기 때문에 일당제로 귀결된 러시아와 다르다. 또한 착취자들에게서 선거권을 빼앗는 문제는 순수한 러시아의 문제이지, 프롤레타리아 독재 일반의 문제는 아니다.
러시아의 사회민주당은 레닌이 지적하듯이 자본주의 제도 밖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 대한 외부성으로 존재하였다. 당은 혁명 전에는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의식을 조성하고 혁명 후에는 자율적인 대중적인 자치 권력인 코뮌을 생산하는 형식으로 기능하였다. 당은 혁명 전이나 후에도 국가의 제도 권력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제도 밖에서 대중권력을 창안하는 정치조직이자 대중을 정치화하는 형식으로 남아야 했다.
당의 형식을 채우는 대중의 자생성, 조직의 민주적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당은 대중의 무의식적 혁명성을 담는 그롯이며 대중의 자발성은 당의 형식을 채우는 내용이다. 직접민주주의 체계는 이 내용을 소통시키며 당을 대중의 혁명성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혈관이다. 내용은 노동운동의 자생성에서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는 레닌이 말하는 외부로부터의 도입을 내용으로 동일시하고 중앙집권적인 엘리트정당의 지도성으로 오인했다.
스탈린체제가 붕괴된 후 유럽을 중심으로 스탈린의 관료화된 정당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었다. 스탈린주의정당의 잔재를 극복하고 새로운 혁명적 사회주의정당을 건설하고자하는 흐름들이 생겨났다. 먼저 스탈린주의정당에 있어 관료제의 본질로서 대리주의가 비판되었다. 토니 클리프(Tony Cliff)에 따르면 레닌의 전위정당 개념에는 대리주의가 싹틀 여지가 있었지만 1917년 혁명 전 볼세비키는 획일적인 전체주의적 정당이 아니었다. 하지만 1917년 혁명 이후 당의 고립 때문에 혁명적 엘리트가 노동계급을 대신하는 대리주의가 심화되었다.
 
혁명 전에는 당 내 민주주의가 당의 일상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혁명 이후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가 실종되고 당 내에 관료주의가 고착되었다. 대신 중앙위원회의 권한은 극대화되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당을 떠났다. 소자본가인 농민출신들이 당 내 빈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소자본가계급으로의 대체가 노동계급에 대한 당의 대리를 초래했다. 이는 다시 당 관료로의 대체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총비서의 개인적인 독재로 나타났다. 대리주의를 극복하려면 당은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당은 노동계급의 행동에 대해 신뢰해야 하며, 노동계급의 조건에 대해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당은 전체 계급에 종속되어야 하며, 당 내 통치체제는 당과 계급의 관계에 종속되어야 한다. 당의 중요한 정책 이슈에 대한 토론이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대중들이 토론에 참여하여 당과 당의 기구, 또한 지도부를 압박해야 한다. 노동계급은 사상투쟁과 대중파업과 같은 투쟁을 통하여 자신들의 자각과 당 조직을 결합시켜야 한다.
 
한편에서는 중앙집권적인 당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편향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은 레닌의 중앙집권적 정당을 스탈린의 정당과 일치시키면서 일체의 중앙집권적 정당을 부정하는 흐름과 이와 반대로 당의 무조건성을 강조하는 스탈린주의 모두를 비판하였다. 특히 크리스 하먼은 중앙집권적 조직은 관료주의를 낳고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진정한 레닌주의 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크리스 하먼에 따르면 볼셰비키가 혁명 전에는 폭압정권 아래서 비합법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혁명 후에는 원래의 이론과 실천이 스탈린주의로 인해 타락되었기 때문에 레닌의 조직관은 그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다.(크리스 하먼, 1968)
크리스 하먼은 오늘날 당이 양적 팽창에만 관심을 가지면 조직적 지도력이 약화되고 정치적 자각이 부족한 당원이 양산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하먼은 이러한 측면에서 조직의 견고함을 훼손시킬 수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입장을 비판하고 레닌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 2차 대전 이후 줄곧 노동계급의 직면한 문제에 일부 해결방안을 제시해왔던 자본주의 내 개혁주의 정책이 한계에 직면하였다. 또한 스탈린주의가 쇠퇴하였다. 이러한 객관적 주관적 사정이 혁명적인 사회주의자 정당의 건설 논의를 가능케 하였다. 던컨 핼러스(Duncan Hallas)는 지금까지 공산당의 영향권에 있었던 산업전사들, 혁명적인 그룹들 속에 있는 급진적인 젊은 노동자와 학생들이 이러한 혁명적인 사회주의자정당을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라고 보았다. 그는 혁명적인 정당은 레닌식의 민주적이면서도 중앙집권적인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스탈린의 당과 레닌의 당을 구별하였다.
 
스탈린주의는 중앙집권화된 정당에 대한 레닌의 편향에 의해 불가피하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중앙집권적 조직을 바로 관료제와 그에 따르는 타락과 등치시키는 것은 근거 없는 통념일 뿐이다. 볼세비즘이 스탈린주의의 아버지라는 논리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신념일 뿐이다. 조직은 허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조직을 집단적으로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주장은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므로 사회주의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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