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보적 민주주의의 민주적 기본질서 위반 여부

(1) 폭력혁명론
정부는 애초에 심판청구서 171쪽 등에서 진보적 민주주의가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추구한다고 하다가 그 이후에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이다거나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식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는 과도기라고 주장하였다이처럼 정부는 해방 직후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으로 보기도 하고 인민민주주의로 보기도 하는 등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법무부, 2014a: 68, 69, 192, 210).
하지만 공산계열이 주장하였던 진보적 민주주의조차 폭력혁명과는 무관한 것이었다정부는 정당해산 심판과정에서 1930년대부터 국제공산주의가 주장했던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NLPDR)과 2차 대전 직후 독일과 일본의 점령국에서 출현했던 인민민주주의그리고 이에 영향 받아 1980년대 대한민국의 진보진영 일부가 주장했던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 북한이 대남혁명론으로 주장하는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NLDR), 그리고 주체사상 등을 혼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들 개념들을 진보적 민주주의와 등치시키고 있다.
또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이 북한의 혁명론이나 주체사상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대한민국에서 1980년대까지 북한과 무관하게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을 제기한 인사들이 존재하였다이런 배경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NL 중에는 주체사상파와 무관한 NL이 많다0식 등 정부 측 증인 역시 주체사상파는 NL보다 더 좁은 개념이라고 밝혔다또한 김0식 등은 주체사상파라면 모두 수령관을 신봉한다고 밝혔으나 정부는 NL은 모두 주체사상파이나 그중에는 수령관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이런 점을 볼 때 “NL = 주체사상파라는 도식그리고 통합진보당의 당원들 대부분을 NL 혹은 주체사상파로 규정하는 것은 정부의 자의적이며혼란스런 주장에 불과하다.

(i) 사회주의 폭력혁명론
사회주의 폭력혁명론은 폭력에 의한 체제전복을 지향하지만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한 국가개조이기 때문에 폭력혁명론과 무관하다또한 진보적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점진적인 수정을 지향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자체를 전격적으로 전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폭력혁명론은 정치적으로 노동자 계급독재와 공산당 일당독재를 주장하는 한편 경제적으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시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계획경제를 주장한다하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는 강령과 당헌이 명시하는바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를 보장하고다양한 정치세력들 간의 정권교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일당독재가 아니다통합진보당이 민중주권을 선언하지만 그 의미는 민중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이지민중이 아닌 국민에게 주권을 박탈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정치참여의 주체에 국민을 명시한 당헌이 그러한 취지를 밝히고 있다.
과거 민주노동당 강령이 사회주의를 언급하였지만 그 내용을 보면 헌법에 위반될 것이 없었다유럽의 민주적 사회주의를 보더라도 모든 사회주의가 폭력혁명과 일당독재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우리헌법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다더구나 통합진보당은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도입하면서 그러한 사회주의 언급을 삭제하였다.
정부가 진보적 민주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제출한 사회주의 관련 문건과 발언들은 민주노동당에 사회주의 조항이 있었던 시기의 것이다따라서 민주노동당이 사회주의를 완전히 삭제한 이후 진보적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증거로 활용할 수 없다정부는 2011년 6월 정책당대회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채택한 이후 진보적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당 공식의 문건이나 당의 입장으로 평가될 수 있는 지도부들의 공식적인 문건 혹은 공개적인 발언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였다.
(ii)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
첫째정부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선동한다고 하였는데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추진하려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 2단계론에 의할 경우 러시아혁명처럼 먼저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와 연합하여 봉건제파쇼체제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준비역량을 강화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그 다음 단계로서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주의혁명으로 구분되는데해방 직후의 조선공산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단계를 의미한다(법무부, 2014a: 68, 69).
마르크스에 의하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프랑스혁명처럼 봉건제를 타도하고 부르주아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창출하였던 시민혁명을 말한다(이완범,2008: 10). 레닌에 의하더라도 러시아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짜르체제를 타도하고 부르주아정부가 들어선 과정을 의미한다결국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혁명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혁명을 의미한다.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그 주도세력이 사회주의세력이 아니라 다양한 중간계급이라는 점처음부터 혁명의 목표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봉건제의 타도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점진적인 사회주의정책을 추진하는 인민민주주의혁명과 다르다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달성된 후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체제로 남을 것인지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인지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추진한 주체의 성격계급대립의 역학에 따라 유동적이다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프랑스영국독일처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이후 계급 간 경쟁과 타협을 통해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소련처럼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는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이다.
둘째공산계열이 주장하였던 진보적 민주주의는 의회주의에 따라 장기간에 걸친 평화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완성을 의미하므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내용상 폭력혁명과 무관하다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폭력적으로 단기간에 완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평화적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좌익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으로 지칭되었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봉건제 청산과 일제 잔재의 일소였기 때문에 혁명이 빠진 부르주아민주주의실현이다왜냐하면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일제가 패망한 해방 직후 진보적 민주주의는 폭력에 의한 정권타도라는 혁명적 성격이 없었고오히려 지배세력인 미소의 지원을 받는 정부를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해방직후 박헌영이 1945년 8월테제를 통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와 김일성이 1945년 10월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이었다실제로 박헌영과 여운형은 물론 김일성까지 해방직후 단계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단계라고 주장하였다이때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은 자본민주주의정권을 의미한다(이완범,2008: 12-13, 17). 여운형박헌영김일성 모두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진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인민정부라고 규정하였는바다만 인민정부의 구성에 있어서는 친일파를 제외하되 자본가까지 포함시킨 여운형부터자본가를 제외한 공산당 계열까지 다양하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및 스페인 공산당 등 유로코뮤니즘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 역시 혁명이 빠진 부르주아민주주의 완성을 의미하였다유로코뮤니즘은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의 미소화해와 평화공존노선에 근거하여 자본주의국가 내의 사회주의정당이 합법적으로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완성하고자 하였다.
최규진 역시 조선공산당이 1946년 신전술을 채택하기 전의 노선 즉 8월테제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평화혁명론이라고 주장하였다(최규진, 2000: 437). 다시 말하면 진보적 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이었으나 실제로는 혁명론이 아니라 미소의 지원을 통한 통일국가 수립으로서 부르주아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그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봉건제나 전체주의보다는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사회주의자를 포함하여 국민 모두에게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에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적극 추진하고 지지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 1987년 민주화 이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일정단계에 도달하였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국가보안법교사와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제한집시법 등에서 보듯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따라서 민주노동당을 포함하여 진보진영에서 1960년 4.19혁명이나 87년 민주화운동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르며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완성을 주장하기도 하는데이는 폭력혁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므로 헌법에 위반되는 주장이 아니다.
(iii) 인민민주주의혁명론
정부는 해방 직후부터 회자되어왔던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민주정부 등은 󰡔주체의 한국사회 변혁운동론󰡕에서 제기하고 있는 자주민주통일 이념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이후 북한에 의해 사회주의를 최종 목적으로 하는 대남혁명전략으로 재구성되었고 이것이 자주계열에 전파되어 마침내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강령에 포함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부의 주장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2단계 혁명론(북한식 인민민주주의 -> 북한식 사회주의)에서 북한식 인민민주주의와 같다는 것이므로 청구인의 주장 자체에서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식 사회주의의 전 단계이므로 북한식 사회주의 그 자체와 다르다는 것이 성립한다결국 이 사건에 있어 쟁점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와 같은 것인가이다.
첫째인민민주주의는 북한과 중국베트남과 동유럽 국가의 수립에서 보듯이 사회주의를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공산당이 입법부와 행정부 및 사법부를 지배하는 유일한 집권당으로서 단지 과도적으로 다른 계급을 정권에 제한적으로 참여시키고 다당제와 자유선거 및 권력분립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이 주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와 전혀 다른 정치노선이다북한정권의 수립과정과 그 후에 도입된 인민민주주의가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다르다는 점도 북한의 제헌헌법과 통합진보당의 강령을 비교하면 명백하다.
북한 등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아니라 인민민주주의혁명에 의해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갔다인민민주주의는 인민주권에 근거하여 노동자 농민 등의 주권을 보장하지만대자본가와 반민족적인 자본가의 재산권과 주권을 일시적으로 박탈하는 경우가 있다또한 권력분립보다는 소비에트나 최고인민회의를 정점으로 한 3권 통합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단독으로 지배하던 동유럽에서 인민민주주의에 따라 점진적으로 사회주의가 도입되었다.
중국의 신민주주의 역시 인민민주주의의 일종이다모택동은 당시 중국은 노동계급보다는 농민계급이 더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모택동은 중국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하려면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조직하여 노동자농민 뿐 아니라 지식인소부르주아민족 부르주아애국적 민주인사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연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신민주주의라고 명명하였다모택동은 이와 같은 신민주주의 혁명론에 기초하여 신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하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해 나갔다.
둘째정부는 해방 직후 여운형박헌영김일성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가 인민민주주의가 체계화되기 전의 용어로서 인민민주주의와 같은 의미로서 사용되었다고 하나(법무부, 2014a: 69), 이는 그 당시 사실과 다르다해방직후 박헌영과 김일성은 스스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인민민주주의와 구별되는 부르주아민주주의로 보고 미소의 동의를 받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인민민주주의와 다른 개념이다또한 소련과 조선공산당은 당시 미국영국프랑스를 소련과 같이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봤는데이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가 인민민주주의가 아닌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거친 국가라는 점을 의미한다(법무부, 2014a: 72).
김일성박헌영여운형은 미소화해가 파탄나고 미군정이 좌익을 탄압하자 종래의 진보적 민주주의 대신 일제히 인민민주주의를 주장하였는데이는 양자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946년 4월 박헌영은 종래의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을 폐기하면서 민주주의 형태를 부르주아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로 나누면서 조선은 인민민주주의로 가야한다고 주장하였는바 이는 박헌영 스스로 진보적 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를 구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이완범,2008: 21). 오문환 역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는 1946년까지 조선공산당의 국가건설방향은 진보적 민주주의이었다고 밝히고 있다(오문환, 2006:218).
북한 스스로 진보적 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를 명확히 구별하였다북은 1945년 해방 직후 진보적 민주주의를 통일국가의 건국노선으로 주장한 적이 있으나미소냉전이 시작되고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로 나아가자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을 폐기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인민민주주의를 정치노선으로 채택하였다경향신문 1990년 10월 1일 기사에 따르면 북한은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자는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을 거부하고 인민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국호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하였다.
셋째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거론되었던 진보적 민주주의나 자주적 민주정부 및 민중주권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인민민주주의와 무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다진보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의 건국노선이었다.
넷째정부는 유럽의 수정자본주의를 의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사회국가 수준이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바 통합진보당이 주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 혹은 자주적 민주정부는 소련북한과 수교하고 공산당까지 합법화하고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했던 영국의 노동당독일의 사민당프랑스의 사회당의 강령보다 더 온건하다.
(iv) 북한의 진보적 민주주의
북한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북한정권 수립 직후 진보적 민주주의 폐기 그리고 1990년 이후 정권에 의해 미화된 진보적 민주주의 등 3시기로 나눠 볼 필요가 있다.
첫째해방직후 김일성이 사용한 진보적 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었고그 실질적인 내용은 미소의 지원을 받는 정권을 통해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으므로 폭력혁명론과 무관하다.
김일성 부대는 중일전쟁으로 유격대활동이 어려워지자 1940년대 소련으로 들어갔다김일성부대는 소련군 밑의 독립부대로서 군사훈련국내로 연락원 파견정부수립을 위한 소련 측과 협상에 주력하였다김일성 부대의 조선공작단 일부는 1945년 8월 8일 소련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했으며나머지 부대는 9월 18일 원산항을 거쳐 귀국하였다이후 김일성과 그 부대는 소련의 물적 인적 지원 아래 북한정권 수립에 나섰다.
김일성은 해방직후 다른 독립운동인사와 마찬가지로 미소의 협력 아래 통일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오문환, 2006:297,302). 그리하여 김일성은 소련과 조선공산당의 방침에 조응하여 1945년 10월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통해 진보적 민주주의를 통일국가의 건국노선으로 수용하였다.
이 연설을 기준으로 다른 진보적 민주주의와 공통점을 보면 김일성은 특권폐지보통선거권공무담임권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거주의 자유를 강조하는 등 인민대중에게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다또한 인민들의 물질문화생활을 높이고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행복한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자립경제와 부강한 국가의 건설을 건국 목표로 내세웠다이밖에도 고용보장과 노동기본권의 보장높은 소작료와 고리대의 근절중소상공인의 보호공정한 세금제도학업과 과학의 보장인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국내평화와 국제평화민족문화 발달을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 그 당시 한반도를 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반()제국주의 반()봉건 민주주의혁명을 당면 과제로 제시하였다하지만 소련이 조선공산당에게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추진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세울 것을 지시하였고 박헌영과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이를 적극 수용하였다는 점에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 부분은 이완범의 논문이 주장하듯이 사후에 가필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즉 북한에서 단계규정은 해방직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1947년 이후 인민민주주의혁명, 1950년 이후 반제반봉건민주혁명으로 수정되어왔다(이완범,2008: 20).
김일성은 인민정부를 주장하는데인민정부의 민주주의 원칙으로서 민주주의 중앙집권을 매우 강조하는데이는 사회주의 민주주의 원칙인 민주집중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연설에서 김일성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는 김일성이 공산당북부조선 도련합회에서 한 당조직문제보고에서 현 단계는 자본민주주의 정권 수립 단계라고 밝혔듯이 부르주아민주주의이다특히 1952년 일본에서 발행된 김일성선집에 따르면 김일성은 1946년 9월 9일 북조선노동당창립대회의 종결에 관한 보고에서 현 단계는 국내외정세와 조선사회의 성격을 비추어 볼 때 공산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완성할 단계라고 밝혔다(이완범, 2008:17-18).
북은 박헌영을 처형한 후 박헌영이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한 것은 우경기회주의인 반면미군정의 탄압 이후 남에서 갑자기 진보적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반미인민봉기를 선동한 것은 극좌모험주의라고 비판하였는데(이완범,2008: 22), 이를 보더라도 북 역시 공식적으로 진보적 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를 구별하였다.
이처럼 김일성 등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정권을 장악한 1950년대 중반 이후 해방직후 시기를 반제반봉건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시기로 포장하여 박헌영 계열이 주장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의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노력하였다(이완범,2008: 25). 정부청구서 154쪽의 북한의 백과전서가 부르주아민주주의를 비난하고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그러므로 해방직후 민주주의개혁을 하면서 사회주의혁명을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포장해 부르기도 하였다는 정부의 주장은 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부르주아민주주의(진보적 민주주의)를 구분하였던 해방직후의 역사인식에 부합하지 않으며특히 김일성이 주장한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인민민주주의 혹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로 가필한 북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둘째정부는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민주정부가 이념에 상관없이 널리 사용되어왔다는 것이 밝혀지자 이제 와서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민주정부는 역사적으로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민주정부는 북한에 의해 1990년대에 사회주의 대남혁명전략으로 재구성되어 남한의 자주계열 운동권에게 전파 계승된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민주정부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민주정부 등 그와 관련된 핵심 내용이 남한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전해 내려오다가 1980년대부터 남한의 진보정당과 진보진영에 의해 본격적으로 주장되어왔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맞지 않는다.
김일성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에 따라 진보적 민주주의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을 포기하고 인민민주주의에 의한 북한 단독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이에 김일성은 1947년 이후 부르주아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인민민주주의를 사용하였다(이완범,2008: 20). 같은 이유로 김일성은 미소화해가 파탄난 후 더 이상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그 이후의 김일성이 수립한 정부는 미국도 동의하고소련도 동의하는 중립적인 의미의 진보적 민주주의 정부라기보다는 친소적이며 사회주의 2단계 혁명에 입각한 인민민주주의 정부였다.
그런데 박헌영이 주도적으로 주장했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해 폄하하던 북한이 199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도로 김일성이 부르주아민주주의’ 의미로 사용한 1945년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인민민주주의즉 단계적인 북한식 사회주의혁명론으로 정립하였다이러한 진보적 민주주의의 재정립은 1945년 김일성의 연설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로부터 북한정권의 정통성을 합리화하려는 사후 작업으로서 우리사회에서 해방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왔던 진보적 민주주의와 무관한 것이다.
셋째정부는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자유와 평등민주와 자주를 내용으로 하면서도 실천의 방식으로 연대연합을 강조하고 있다면서 이는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 내용 중 자주평등반전평화민주적 변혁연대연합부강통일국가건설 등과 같다고 하나(법무부, 2013a:160), 이러한 주장은 해방 직후나 지금도 진보진영에서는 대부분 주장하는 일반적인 내용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이를테면 여운형은 각계각층의 대동단결만이 새로운 국가건설을 성공시키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였으며연대와 연합을 의미하는 민족통일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오문환, 2006: 106) 김구도 민족자주와 통합의 정치를 주장하며 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해 민주영수회의남북요인회담국민의회남북합작 등을 제안하였다(오문환, 2006: 130, 144).
(2) 민주주의집중제
(i) RO 혹은 경기동부 등 소수의 지배와 이0기 1인 영도체계
첫째정부는 통합진보당이 사회주의 의사결정 방식인 민주주의집중제를 수용하여 다수결을 부정하는 소수의 지배를 용인해왔다고 주장하였으나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북한이나 소련의 민주주의집중제를 비판해왔고 통합진보당에 이르기까지 당원민주주의에 기반한 다수의 지배즉 다수결제도를 운영하였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독일공산당 사건에서 공산당이 당내 1인 지배나 소수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은 공산당이 집권하였을 때 국가 차원에서도 1인 지배나 소수 지배를 인정할 수 있다는 중요한 징표라고 보았다이러한 소수 지배를 인정한다면 프롤레타리아독재에 있어 공산당이 구성하는 정부는 해임될 수 없는데(법무부, 2013c: 253) 이는 정당해산 사유에 해당한다고 결정하였다.
민주주의집중제는 레닌에 의해 그 개념이 정립되었는데, 1906년 제4차 러시아 사회민주당 전당대회 당시 레닌의 민주집중제는 상향식 선거에 의한 대의기구구성상부기관에 대한 복종과 보고다수결투표의무지방자치중앙기관 정책에 대한 비판과 수정요구 등을 내용으로 한다통상 민주주의집중제는 의사결정과정에서 토론에 의한 다수결 결과에 대한 수용결정의 집행과정에서 중앙기관과 상부기관의 정당한 지시에 대한 지방기관과 하부기관의 복종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레닌은 러시아 정부의 탄압정도에 따라 민주적 선출방식소수파의 인정당론에 대한 공개적 반대 등의 분야에서 시기적으로 다른 견해를 밝혔다.
현재 사회주의 나라에서도 1인 영도체제의 북한과 집단지도체제의 중국을 보듯이 민주주의집중제를 일의적으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민주집중제는 당 규약 제10조에 명시되어 있으며 개인의 당조직에 대한소수의 다수에 대한하부조직의 상부조직에 대한 복종보고의무 등을 기본으로 하되 상향식 선거개인숭배금지와 지도자에 대한 당과 인민의 감독집단토의의견제출권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집중제와 민주주의제를 배합하고 있다.
북한의 민주집중제는 당 규약상 민주주의중앙집권제로 표현되어 있으며개인의 당조직에 대한소수의 다수에 대한하부조직의 상부조직에 대한모든 당조직의 당 중앙위원회에 대한 절대적 복종당노선과 정책 및 상급조직결정에 대한 이행보고의무과 상향식 선거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의견제출권선거권청원권 등은 민주주의중앙집권제의 내용이 아니라 당원의 권리로 규정되어 있어 민주주의제보다 집중제가 더 강조되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예가 비판과 수정의 기회를 사실상 차단한 스탈린의 민주집중제이다이는 하부기관과 지방기관 등 모든 국가기관의 당에 대한 무조건 복종다수결에 대한 무조건 복종과 소수정파의 부정 등을 내용으로 하여 사실상 민주를 가장한 권위주의였다.
과거 민주노동당 강령은 경직적인 북한식 사회주의와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보듯이 스탈린식 민주집중제를 일관적으로 비판해왔다또한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이 진성당원의 다수결에 의해 운영되어왔다는 점은 분명하다특히 변론과정에서 정부의 주장과 달리 통합진보당의 정당민주주의는 오히려 민주주의 과잉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작동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민혁당 출신이나경기동부, RO와 같은 비공식 음모그룹이 민주노동당의 의사결정을 지배하였다는 정부의 주장은 최종숙의 논문 민주노동당 당내 민주주의 분석에 의하면 설득력이 없다이 논문은 민주노동당의 실질적인 의사결정이 대의원대회 – 중앙위원회 – 최고위원회라는 의결단위에서 이루어졌고기관지당원게시판에서의 토론이 이러한 의사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였다특히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기까지 전당적인 전국적인 토론을 거쳤다고 밝혔다
이 논문은 또한 민주노동당의 의사구조는 여러 한계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합의형참여형이었다고 밝히고 있으며패권이라는 것도 진성당원제도에 기초한 대의기구에서 다수결의 형태로 나타나 다수결의 부작용의 측면에서 분석하였다이 논문은 또한 다수를 차지한 자주계열이 항상 다수결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상당수 안건에서 양보를 하였으며특히 최고위원회는 대부분 합의를 도출하고자 노력했고 상당부분 합의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이 다수결제도를 성실히 운영해왔다고 해서 소수의 비판을 봉쇄하고 탄압하는 다수의 독재를 용인한 것도 아니다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독일공산당이 당의 방침을 비판하는 당원들을 제명하는 것은 정당 민주주의의 본질을 침해하여 독일헌법상 허용할 수 없는 민주주의집중제라고 보았는데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은 독일공산당과 반대로 소수 정파의 공개적인 활동을 보장해왔고심지어 일부 정파들이 다수결에 따른 결정을 비판하더라도 이를 징계하지 않았다.
또한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이 중앙지도부의 권력을 절대화하고 이에 대한 비판을 금지한 것도 아니다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시도당과 지역위원회는 독자적인 규약과 민주적 대의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전국적인 사항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왔다기관지나 연구소 같은 집행부서조차 최고위원회와 독립된 기구로서 독자적인 재정과 활동을 보장받아왔다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정당 내 징계와 별론으로 정당의 결정에 직접 구속되지 않으며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의 국회의원 역시 국회활동에 있어 당으로부터 직접 자유표결의 권한을 침해받은 적이 없다.
심지어 김장민 진보정책연구원과 일부 당직자들이 국민참여당과의 통합과 같은 당의 결정을 공개서명을 통해 반대하거나 당직자 축소와 같은 당의 결정을 저지하고자 노동조합을 만들었지만 지도부는 이를 제지하거나 징계한 적이 없다.
둘째민주주의집중제는 원래 그 자체가 모호한 의미이고 오늘날 원래의 불분명한 의미조차 퇴색하여 통상적으로 합리적인 다수결을 강조하는 보통명사가 되었기 때문에 헌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없다.
먼저 민주주의집중제는 집중제와 민주주의제 모두를 내용으로 하고 있어 이를 사용하는 조직과 사람에 따라서 방점이 달라 일의적이지 않고심지어 자신들의 패권이나 분열을 합리화하는 이론적 도구로 남용되기도 한다그러므로 명칭만 같다는 이유로 민주집중제를 자유민주주의질서에 반하는 징표로 삼을 수 없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야 할 것이다.
또한 오늘날 민주주의집중제는 사회주의와 무관하게 다수가 소수의 복종을 요구하거나소수가 다수의 패권을 비판할 때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다서구의 진보정당들도 다양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집중제를 수용하고 있다우리 정당들도 민주주의집중제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정부가 제출한 증거 제98호 87쪽에서 열린우리당 신기남 당의장이나또한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까지 당내 민주주의의 모델로서 민주집중제를 언급할 정도이다.
셋째정부는 이0기 의원이 자신의 비밀조직인 RO를 자신의 1인 영도체계에 두었으며나아가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 통합진보당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이러한 영도체계를 통합진보당 내에 비밀리에 구축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통합진보당은 분당 이후에도 당원민주주의에 기반한 다수결제도를 성실히 운영해왔으며0기 의원의 영향력이 당을 지배할 정도에 이른 적이 없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독일사회주의제국당 사건에서 당 내에 히틀러식 1인 영도체계를 구축한 것을 정당해산 사유의 하나로 인정하였다정부 역시 독일 사례를 염두하고 내란음모사건에서 이0기 의원의 1인 영도체계를 주장하면서 북한식 수령론으로 몰고 갔다(법무부, 2013a:317),
정부는 “RO와 경기동부는 민주집중제에 따라 마치 이0기가 수령인 것처럼 이0기 개인에 의해 지배되었고통합진보당 역시 RO와 경기동부를 배후 조종하는 이0기 개인에 의해 사실상 지배되어왔다는 식으로 주장해왔다.
이러한 정부의 주장은 북한의 영도체계 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서 정부 주장대로 RO나 통합진보당에 이0기 의원의 1인 영도체계가 구축되어 있다면 RO나 통합진보당은 종북조직이 될 수 없다소위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는 당과 국가기구가 수령 1인의 지도하에 움직이는 체제라는 뜻으로 수령의 지도가 말단조직과 개인에게 절대적으로 미친다는 것이다장택상의 처형에서 보듯이 북을 추종하는 집단에서 수령 이외의 영도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북을 추종하는 집단이라면 북과 연계하여 북의 영도체계에 따를 것이고 북에 대한 충성서약을 할 것이다하지만 정부는 내란음모사건에서 북과의 연계성을 밝히지 못하였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당내 민주주의를 제도화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영도체계를 구축할 수 없다통합진보당은 모두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에 의해 선출되고 구성된 대의원대회 중앙위원회 최고위원회 순으로 공개토론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고 있으며 당대표도 이러한 대의기구 구성원에 불과하다또한 당헌에는 당 지도부를 해임할 수 있는 당원소환제를 두는 등 권력독재를 차단할 수 있는 당 내외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넷째, RO와 경기동부 내에서 이0기가 어떤 지위에 있는지와 무관하게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이 이0기 등 어떠한 개인에 의해 지배되지 않았음이 밝혀지자정부는 나중에 패권의 의미를 수령관과 민주집중제에 기초한 1인 지배 혹은 소수의 지배에서 다수결의 악용으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주장처럼 패권과 장악이 다수결의 남용을 통한 당 결정권의 장악이고 그것이 설사 이0기의 주장 - RO와 경기동부로의 파급 – 통합진보당 다수 당원에게 파급 – 투표와 선거에서 다수표 형성의 순으로 나타났다고 해도 그러한 과정은 민주주의 조직 내에서 지도자와 대중 사이에 발견되는 민주적인 의사형성과 결정의 방식에 불과하므로 정당해산사유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ii) 0기가 비례대표 경선에서 1위를 한 이유
첫째정부는 처음에는 이0기 의원이 비례대표 선거에서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통해 1위를 하였다고 주장하였다가 이를 스스로 철회하였다정부는 정당해산심판청구서 287쪽에서 대리투표로 기소된 자료를 근거로 0기 의원에 대한 부정경선 관련자들이 매우 광범위하다고 주장하였다또한 정부는 2014년 1월 7일 쟁점별 준비서면 287쪽에서 신규입당자가 선택한 후보 중 이0기 의원이 1위라는 점을 지적하고 이0기 의원과 관련한 위장전입 사례를 나열하여 이0기 의원의 조직적 부정선거 의혹을 부각하고 급기야 2014년 5월 1일 준비서면(비례대표 부정경선관악을 등 야권단일화 여론조작 사건 관련) 8쪽에서 통진당 당권파가 신규입당과 대리투표라는 선거부정을 계획하고 결과적으로 압도적인 표차로 이0기를 일반 명부 1(비례대표 순번 2)으로 만들게 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런데 검찰의 수사와 재판결과를 보면 이0기 후보는 스스로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한 바 없다오히려 오0(국민참여당 출신), 0(현대자동차노조등 이0기 후보의 부정선거를 거론한 후보들이 부정선거에 직접 연루되어 처벌받았다부정선거로 처벌받은 당원들 중에서 이0기 후보를 지지한 당원 수가 많다고 하나 이0기 후보의 득표수 대비 이0기 후보지지 당원 유죄 건수를 비교하면 다른 후보에 비해 특별히 높지 않다또한 유죄 내용면에서도 일부 지지당원들이 측근 몇 명에 대한 선거편의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후보 자신이 직접 연루된 다른 사건과 다르다이러한 사정으로 정부는 심판의 후반부에 가서는 0기 후보가 부정한 방법으로 1위를 하였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통합진보당은 당원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정당 실험을 멈추지 않았고부정선거 시비는 그러한 실험과정에서 발생한 선거관리 부실과 일부의 일탈이다실력자가 당직과 공직후보자 결정을 좌우하는 기존 정당과 달리 민주노동당은 초기부터 한국정당사 최초로 모든 당직선거와 공직후보자를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이 뽑는 당원민주주의 제도와 인터넷투표제도를 도입하였다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이 중앙당 선거와 지역 선거를 모든 진성당원들이 참여하여 동시에 실시하면서 전국적인 선거운동까지 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선거가 과열된 결과 정파 간의 경쟁이 일반 당원들까지 확산되어 편 가르기로 비화된 측면도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진성당원에 기반한 정당민주주의를 선도해왔지만관련 제도의 미비와 기술적 인적 한계로 인해 선거관리 부실과 일부 당원의 부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지 못하였다일부 하급십에서 부정선거로 기소되었던 당원들이 무더기로 무죄를 선고받았는바이는 사안이 경미한 탓도 있지만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이 정당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한계에도 불구하고다른 정당의 사례와 비교할 때 통합진보당이 지금까지 민주적인 당운영을 해왔다는 점을 고려한 고뇌어린 판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둘째정부는 나중에 이0기 의원이 1위를 한 이유를 이0기 의원이 민주노동당 출신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지배체제를 구축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민주노동당 출신들이 조직적으로 이0기를 지지한 것이 선거 생리상 문제될 것이 없다.
정부는 2014년 8월 6일 준비서면(갑 제2802-2호증 온라인투표 후보자 득표현황 관련)에 이르러 0기를 정점으로 한 경기동부가 당원 다수를 조직하여 당원투표를 통해 압도적 표차로 승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정부가 이처럼 주장을 바꾼 것은 노회찬00식 등 다수의 증언과 증거자료에 의해 이0기가 전국적으로 골고루 득표했고 이는 부정선거가 아니라 조직력에 기반한 선거운동의 결과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정부는 RO를 기점으로 경기 동부가 조직적으로 선거운동을 하여 다수표를 획득하였다고 지적하였으나 선거라는 것이 선거운동본부를 만들어 최대한 표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볼 때 이러한 행위는 정당해산사유와 무관하다.
민주노동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를 성공적으로 실현한 후, ‘선 진보대통합 후 야권연대를 2012년 총선전략으로 설정하였다또한 야권 전체는 이미 2011년부터 후보단일화 논의를 시작하였다이에 따라 전현직 대표전현직 총장전현직 시도당위원장 등 모든 민주노동당의 주요 간부들은 20011년부터 야권후보 단일화 경선에 대비하여 지역구를 정하고 지역활동에 주력하였다민주노동당 출신 간부들은 전통적으로 비례대표 출마보다 지역구 출마를 당에 대한 헌신과 명예로운 일로 여겼다또한 민주노동당은 2008년부터 비례대표의원들을 당 외부인사로 영입해왔고또한 당 득표율의 저하 등의 이유로 비례대표로 당선되기 힘든 상황에서 당의 명망가들이 비례대표 의석을 놓고 경쟁하는 것은 심리적으로도 부담되었다.
2012년 총선의 경우 야권단일후보가 되면 지역구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주요 명망가 중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비례대표 후보 중 유명인은 유시민 대표가 유일했으나 유시민 후보는 전략명부로 12번을 받아 다른 후보들과 별개로 찬반투표를 하였기 때문에 이0기 후보의 득표율과 무관하다.
2004년 득표율 13.1% 기준으로 비례대표 당선권은 최대 8명 정도였다경선을 하지 않는 전략명부(3~7, 12, 14, 17, 18)를 제외하면 남녀 1위자만이 당선 안정권이었다각 정파와 세력은 1인 1표제의 조건 때문에 당선 가능한 1-2인을 출마시켜 몰표를 획득하는 전략을 선택하였다국민참여당은 오옥만노항래김수진 등 3명을 출마시켰으나 조직적으로 오옥만 노항래를 지지하였다.
당권자 수가 적은 통합연대는 윤난실 1명을 출마시켰다노동계에선 보건의료에서 나순자자동차에선 이0건설은 윤갑인재를 출마시켰다농민의 경우 전여농은 윤금순전농은 문경식을 출마시켰다.
구 민주노동당은 당권자가 가장 많았지만 이0기와 황등 2명만 출마하였다0은 실천연대에서 활동하였던 중앙당의 여성 당직자 출신으로 뚜렷한 지지기반이 없었다0기 후보는 민주노동당 출신이지만 일반 당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하지만 비례대표 경선에서 경기동부 출신 광주전남출신울산 출신 등 구 민주노동당 인사들이 주로 이0기를 지지하였다.
0기 후보의 득표결과는 구 민주노동당 당세와 비례한다0기 의원은 경기광주전남울산 등 민주노동당의 당세가 강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고르게 득표하였다. 2010년에 전국적으로 치러진 최고위원회선거 개표결과와 2012년 통합 직전 민주노동당 당권자 현황을 2012년 비례대표선거 개표결과와 비교해 보면 구 민주노동당 소속의 당권자들 다수가 이0기 의원을 지지한 것을 알 수 있다이러한 결과는 국민참여당과 통합연대 계열의 당원들이 상당수 탈당한 후 치러진 2013년 당직선거 결과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2010년 최고위원회 선거 투표자 수는 3만 천명이었고 2013년 최고위원회 선거 투표자 수는 2만 9천명이므로 2012년 비례대표선거에서 민주노동당 계열의 당권자 중 투표자는 3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2012년 비례대표 선거의 투표자는 총 4만 명이었고이중 국민참여당 계열은 8천명(오옥만노항래김수진의 득표수 합), 통합연대(윤난실박영희의 득표수 합) 2천명에 불과하다민주노동당 계열의 투표자 3만 명 중 농민후보와 노동자후보0후보 등을 찍은 투표자 19,000표를 제외하면 11,000표가 남고 이0기 후보가 이표를 받은 것이다.
비례대표 선거는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통합연대 출신 후보자들이 자신들이 속했던 과거 당 조직과 당권자들의 지지를 얻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통합진보당에서도 이미 2012년 비례대표 선거 직전에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자 선출과정을 통해 이미 당권자를 과거 정당출신별로 조직하는 선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의 선거는 각 세력별로 시도당위원회시군구위원회분회활동가 등 조직망을 통해 당권자들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하는 방식이다민주노동당의 경우 이미 수차례 이러한 조직선거를 통해 당권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지지를 호소하는 방식이 정착되어 있었다.
선거운동의 방식과 기간은 구 민주노동당 측 조직선거에 유리하였다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선거는 3만 명 내외의 당권자가 참여하는 선거이기 때문에 특별한 유명인이 없다면 기본적으로 조직이 우세한 후보가 이기는 선거이다또한 통합진보당 제19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자 선출선거 공고에서 보듯이 선거운동기간과 투표기간 등 선거기간이 25일로 상당히 길기 때문에 후보의 조직이 강한 경우 선거운동원들을 동원하여 한 명 한 명씩 당권자들을 설득하여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인터넷 후보자생방송토론회를 진행하여 선거기간 동안 이를 통합진보당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전체 당원들에게 후보자별로 선거홍보물을 보낸다후보자들은 모든 당권자 연락처를 제공받고합법적으로 전화문자메일, SNS,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개별 유권자를 상대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자신이 유권자를 만날 수도 있고선거운동원을 통해 유권자를 만날 수도 있다투표는 직접투표인터넷투표우편투표가 가능하나 대부분 인터넷투표로 진행되고 있다투표기간이 최소한 5일을 보장하기 때문에 선거운동원이 많은 후보는 이 기간 동안 투표독려를 통해 확실한 지지자를 확보할 수 있다.
결국 경향신문』 2012년 5월 15일 기사가 말하듯이 이0기 의원이 1위를 한 이유로서 구 민주노동당 계파의 단결과 타 계파의 분열조직선거 관행, CNP그룹을 통한 선거역량 축적 등이라고 볼 수 있다.
(iii)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내부 민주주의
의사결정과정의 민주성
첫째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진성당원 민주주의를 채택하였다진성당원제라는 용어가 우리나라 정치에 출현한 것은 지난 2000년 민주노동당이 출범하면서부터이다강원택 교수는 통합진보당이 추구하는 정당의 상은 유럽의 노동당이나 사회당처럼 특정 계급의 당원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한국 기성 정당의 간부정당·포괄정당(catch-all party)적인 속성과 구분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통합진보당의 당비규정 제13조에 따르면 당비를 내는 당원에게만 투표권 등 당원의 권리를 보장하는 진성당원 민주주의를 철저히 관철하고 있다다른 당과 달리 통합진보당은 지도부와 대의기관 구성원들을 당원 선출이나 대의원대회 인준을 통해 구성하고 있다통합진보당의 당헌 제10조와 제5조에 따르면 당원은 총투표를 통해 최고결정권한을 지니며지도부에 대한 소환권을 지니고 있다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은 이러한 당원총투표 제도를 당헌에 명시하지 않고 있다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지역조직은 중앙당과 마찬가지로 당원 총투표와 총선거를 정점으로 하여 대의원대회와 운영위원회대표단의 순으로 선출된 대의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가 2006년 펴낸 연구용역보고서 정당의 공직후보자 선출방식에서 보듯이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모든 공직후보를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들이 선출함으로써 한국정당사에서 공천을 가장 민주적으로 실천해왔다.
민주노동당의 후보경선제도는 정당지도자나 지도부에 의해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3개월 이상 당비를 납부한 당원들이 참여하는 상향식 후보선출이다민주노동당의 후보경선은 전체 당원들이 참여하는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였으며 비교적 열띤 분위기 속에서 정책 대결을 통한 후보경선이 진행되었다(이동윤. 2008).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의 경우 지도부가 제기한 안건이나지도부 선출이라도 투표율이 50%를 넘지 않으면 투표가 무효가 된다대의원대회나 중앙위원회도 회의 도중에 참석율이 50% 이하이면 회의가 즉시 중단되어 산회된다모든 회의는 사전에 안건을 공지하여 토론하도록 하고회의 당일 날에는 긴급안건을 발의하도록 한다민주노동당은 합의에 기반을 둔 표결 중심의 의사결정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의 중앙위원회는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대체로 만장일치로 안건들을 가결시켰다또한 소수그룹이 제기한 안건이라도 토론과 합의를 통해 다수 그룹의 일부가 양보하여 가결된 경우도 상당하다(최종숙, 2009).
이러한 당원민주주의가 구현된 결과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 당원들은 당에 대한 귀속의식이 다른 당의 경우보다 높았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정당 활동은 공동체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라는 의견에 대한 동의정도의 평균값은 민주노동당이 4.10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당의 선거공약에 당원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당은 민주노동당이었다(정정식. 2011).
둘째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지도부에 대한 소환제를 인정하는 등 민주적 통제를 제도화하고 운영해왔다민주노동당은 2003년 지도부로부터 독립적인 당발전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원내 진입을 앞두고 전반적인 제도개편을 하였는데당발전특위는 지도부와 국회의원의 권한집중을 방지하기 위해 국회의원과 지도부의 겸직을 금지하는 방안을 제출하였고 2003년 11월 임시당대회에서 국회의원출마를 예정하고 있는 지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방침이 통과되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지도부가 낸 안건이라도 당원이나 대의기관이 부결시킨 경우가 있는데이는 민주노동당이 소수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는 민주적 정당이라는 것을 보여준다예를 들어 2011년 9월 25일 이정희 대표0섭 총장 등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제출한 진보대통합 추진방안이 임시당대회에서 재석 대의원 787명 중 510명이 찬성하였지만 의결정족수 2/3에 못 미쳐 부결되었다지도부가 제출한 안건 중 국민참여당이 통합대상임을 확인하고” 부분에 당 내 이견이 있었기 때문에 대의원대회는 지도부의 뜻과 달리 이 안건을 부결시켰다.
권력분립의 민주성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당내 권력분립을 위해 중요한 기관을 독립적으로 운영하였다집행부에 해당하는 최고위원회원내활동을 담당하는 의원단(당헌 제29), 선거관리위원회(당헌 제26), 징계를 담당하는 당기위원회(당헌 제25), 예결산위원회(당헌 제27등은 모두 중앙위원회 직속기구로서 동등한 관계에 있었다이들 구성원들은 최고위원회가 임명하거나 해임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위원회에 의해 임면된다따라서 최고위원회라도 이 기구에 대해 지시간섭할 수 없다언론을 담당하는 기관지위원회는 민주노동당 시절에 2011년 말까지 중앙위원회 직속기관으로 최고위원회와 독립된 기구였다.
민주노동당 내 권력분립이 엄격하여 최고지도부라도 선거관리위원회당기위원회예결산위원회의 통재나 제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7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성남시 수정구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한 김0희 최고위원이 보수야당과 관련 있는 인사들을 선거운동에 활용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 중앙당기위는 2005년 5월 1일에 김0희 최고위원을 징계하여 3개월 동안 최고위원의 직무를 정지했을 뿐만 아니라 당원으로서 모든 권리를 정지시켰다민주노동당은 후보들에게 선거비용을 지원해주고이들이 선거비용을 보전 받았을 때 이를 반환하도록 하고 있었는데0윤 광주시당위원장은 그 반환을 3개월 동안 지체하여 당기위원회에서 자격정지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는 편집위원장이 중앙위원회에서 2년 임기로 선출되는 등 조직상의 독립과 유료독자에 의한 재정상의 독립을 보장받았다진보정치는 당 지도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가끔 실었으며특히 2003년에는 당 지도부가 진보정치 기사에 반발하여 상무집행위원회를 통해 유감을 표명하였다하지만 진보정치는 그 이후에도 독립성을 보장받았으며당 내 비판적 언론으로서 역할을 유지하였다통합진보당 당헌은 기관지를 독립적인 기구로 명시하지 않고 있지만 민주노동당 시절의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통합진보당의 기관지는 정당 간부들의 영향력과는 독립된, ‘독립 채산제로 운영되면서 기관지를 구독하는 소액 다수의 당원독자에 의해 편집 방향과 내용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정당 내부 민주주의의 주요한 징표가 된다기관지 발행수입을 살펴보면 통합진보당은 2008년 약 4, 2011년 298백만원의 수입을 올리는 데 반해 다른 정당은 기관지 수입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11년도 정당의 활동개황 및 회계 보고. 558).
최종숙의 논문 민주노동당 당내 민주주의 분석은 민주노동당 기관지에는 의결단위에서 중요결정을 하기 전에 다양한 입장의 글들이 실렸고다만 누가 편집위원회와 편집국을 책임졌냐에 따라 논조의 편향이 달랐다고 분석하였다이처럼 기관지가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기관지가 지도부나 특정인사에 종속된 채 대남혁명노선을 선전하는 수단이었다는 정부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민주노동당의 새세상연구소통합진보당의 진보정책연구원은 별도의 재단법인으로서 중앙당의 의사결정과 집행구조에 편입되어 있지 않으며 운영비는 국가보조금으로 충당하였다이들 정책연구소는 정당법에 따라 독립적인 재단법인으로서 단기 정책과 공약을 마련하는 정책위원회와 분리되어 당의 전략을 마련하고 장기적인 정책을 개발해왔다한국경제매거진 2010년 12월 22일 기사에 의하면 2009년 민주노동당의 새세상연구소는 정치사회분야 연구소 부문에서 18위에 올라 24위에 그친 민주당의 정책연구원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13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한국정당학회가 공동주최한 토론회 발제문에 따르면 진보정책연구원은 2012년도에 각 정당 정책연구소 평가에 있어 연구결과물의 양적 평가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정당학회가 중앙선관위의 의뢰를 받아 실시하여 발간한 ‘2012년도 정책연구소 연간활동 실적 분석집에서 인력과 재정의 차이를 고려할 때 가장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여의도 연구소가 민주정책연구원이나 진보정책연구원과 비교하여 전체적인 성과가 적었다는 점그리고 군소정당의 정책연구소인 진보정책연구원의 성과가 가장 많게 나타났다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통합진보당은 국고보조금을 정책연구개발 항목에 충실히 사용하였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정책연구소는 운영과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받았다이사장과 소장이 최고위원회와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임명되며 이사회에 최고위원이 포함되었다개괄적인 연구사업과 운영은 소장이 책임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연구내용은 연구위원들의 자율과 토론에 맡겨져 있으며 중앙당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았다따라서 정부와 헌법재판소가 연구소의 연구결과물을 당의 입장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았다.
책임정치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지도부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당원들에게 책임지는 정치를 해왔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조승수 후보가 울산북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다이에 민주노동당은 2005년 10월 북구 국회의원 재선거에 현대자동차노동조합위원장을 지낸 정갑득 후보를 내세웠으나 패배하였다울산북구는 대표적인 노동자선거구로서 여기에서 민주노동당의 패배는 진보정치 자체의 패배를 의미하였다이에 김혜경 대표 등 당 지도부 전원은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민주노동당은 2007년 대통령후보경선을 통해 심상정노회찬 의원을 꺽은 권영길 의원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그러나 권영길 후보는 대선에서 3.1%를 득표했으며 이는 2002년 권영길 후보가 얻은 3.9%보다 낮은 것이었다이에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 등 지도부는 선거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였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독일공산당의 지도부는 잘못을 해도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공산당이 집권하면 독재를 할 것이라고 하였다하지만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민주적인 정당운영과 책임정치 구현으로 지도부가 독재를 할 수 없었고 따라서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이 집권을 한다고 해도 책임정치를 무시하고 독재를 할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재정상의 민주성
진성당원제는 당원이 내는 소액 당비로 당을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통합진보당은 높은 수준의 자발적인 당비납부소액 다수에 의한 당비납부제의 정착그리고 이와 연동된 진성당원제를 정착시켜 한국 정당사에 있어 내부 민주주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 발전시켰다(송우헌, 2005). 2012년 현재 새누리당은 당원의 92%인 227만명이 당비를 내지 않았음에도 229억원 당비 수입이 있고민주당도 당원의 95%인 210만명이 당비를 내지 않았음에도 170억원의 당비 수입이 있다.
반면에 통합진보당은 당원의 40%인 41,444명이 당비 85억원을 납부해 1인당 206,881원의 당비를 납부하였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12년도 정당의 활동개황 및 회계 보고). 또한 김영태에 따르면 통합진보당 당비 납부율이 57%에 달해 10%내외에 불과한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김영태 외. 2012). 통합진보당의 당비 부담률이 높다는 것은 당원의 참여가 높다는 것이며이것은 당원들이 소속 정당에 대한 소속감도 높고 본인의 정치적 의사를 실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들은 다른 정당의 국회의원보다 소액정치자금 기부 비율이 가장 높았다중앙선관위가 2006년 후원금 모금 집계 결과를 공개한 것에 따르면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많은 후원금을 모집한 데는 개미군단’, 즉 소액다수 정치자금 기부가 작용하였다후원금 모금 건수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긴 결과 단병호(3), 심상정(4), 노회찬(9), 천영세(10), 현애자(17), 권영길(18), 강기갑(20등 상위 20위 안에 민주노동당 의원 7명이 포함됐다이런 사실은 정당별 기부건수에서도 확인되는데, 2006년 민주노동당 의원 한 명이 평균적으로 기부받은 건수는 4,302건인데이는 한나라당의 1,409열린우리당의 1,117건에 비해 3~4배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민주노동당은 정당의 재정자립도를 강조하였는데그런 관점에서 당비납부액과 국고보조금을 연동시키는 제도를 도입하여 정당의 재정자립도를 높이자고 주장해왔다통합진보당의 국가보조금 사용은 당의 회계원칙에 의해 엄격히 집행되고당헌에 의해 분기별로 실시되는 자체 예결산위원회의 업무감사와 대의기관에 대한 보고의무 등 이중삼중 장치에 의해 자체적으로 규율되고나아가 중앙선관위의 회계 지도와 감사를 통해 통제 및 시정되었다예결산위원회의 감사결과는 중앙위원회에 보고되며그 보고내용과 처리결과에 따라 개선조치혹은 당기위원회 회부 등의 조치를 취해왔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선거비용 공영제를 운영하였다각종 당 내 선거에 있어 특별한 기탁금을 받지 않으며공식적인 선거비용은 당의 재정으로 부담하였다중앙당은 기본적으로 대통령 후보와 국회의원 후보뿐만 아니라 지방선거의 후보에 대해 기탁금을 지원하고 있으며공식적인 선거비용은 해당 지역의 당원들이 특별당비를 내거나 자원봉사 형태로 지원하였다다만 후보가 선거 후 선거비용을 국가로부터 보전 받으면 당이 지원한 비용을 반환하도록 하였다이러한 당원민주주의 때문에 당 지도부나 당의 유력자가 공직자와 공직희망자에 대해 가지는 영향력은 다른 당의 경우보다 현저히 적었다.
민주노동당은 지역조직의 재정자립을 지향하는데 당비의 20%만을 중앙당이 사용하고나머지 80%는 시도당과 시군구당이 각종 사업비로서 활용하였다.
(3)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사회주의 국가기관의 구성은 주권은 분할할 수 없다는 인민주권에 기반하고 있다사회주의 국가가 이러한 인민주권에 따라 민주집중제의 방식으로 국가기관을 구성하는 것을 민주주의중앙집권제라고 한다북한의 2010년 사회주의헌법 제5조에 따르면 모든 국가기관들은 민주주의중앙집권제원칙에 의하여 조직되고 운영된다.
민주주의 중앙집권제의 내용을 보면 먼저 사회주의 국가는 주권의 단일성에 근거하여 총선거에 의해 구성되는 최고인민회의 혹은 소비에트로부터 입법부사법부행정부 등 모든 권력이 나온다따라서 입법부 우위에서 국가기관이 실질적으로 통합되어 있으므로 사법부와 행정부의 독립이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에 비해 약하다사법부와 행정부는 자본주의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능상 독립이 보장되어 있으나그 구성과 해임에 있어 입법부에 강하게 의존되어 있다.
물론 스위스와 같은 의회정부제를 보거나 우리헌법의 국무총리와 대법관 및 헌법재판관에 대한 국회 동의나 미국의 고위법관의 국회 동의 절차를 보건대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행정부나 사법부의 구성과 해임이 일정부분 입법부에 의존하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엄격한 3권분립과 지방분권의 강화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기관 구성에 있어 민주주의 중앙집권제를 주장하지 않는다민주노동당의 강령이 사회주의 국가의 민주집중제인 중앙집권과 달리 권력분립과 지방분권을 강조하고 있는바이러한 관점에서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는 민주적 국가균형발전전략과 3권분립에 근거한 대안적인 정부조직 개편안을 제출하였다새세상연구소 김장민 연구위원 역시 중앙집권을 목적으로 하는 정부주도의 행정구역개편을 반대하는 행정구역개편의 방향을 제시한바 있으며특히 주민자치를 통해 밑으로부터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읍면동자치모델의 모색을 발표하였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국가권력을 절대화하지 않고 국민의 정치참여를 강조하였는데강령과 공약에서 국회의원과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제도 도입을 명시하였다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강령과 공약은 대통령이 독점하고 있는 국민투표 부의권한을 원래 제도의 취지대로 국민에게 돌려 줄 것을 선언하고 있다이밖에도 통합진보당은 비정규직 노동자 등 서민들의 투표참여를 높이기 위해 투표시간 연장과 투표시간 유급처리와 같은 공약을 제시한 바 있다특히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주민소환제도와 참여예산제도가 실현되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하였다.
과거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국민여론에 밀려 주민소환제도 도입에 합의하였지만 실제로는 소극적이었다. 2006년 5월 1일 열린우리당 소속 김원기 국회의장이 동북아역사재단법부동산대책법안 등 4개 법안의 직권상정을 결정한 바 있었는데 여기에 주민소환법은 포함되지 않았다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주민소환법을 직권 상정하는 법안에 포함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국회의 법률안 표결에 참여하겠다고 국회의장에 통보함으로써 주민소환법은 국회 통과의 급물살을 탔다. 2006년 5월 2일 한나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장이 주민소환법 등 6대 주요법안을 직권 상정하여 표결처리함으로써 통과되었다.
김근래 2010년 지방선거 민주노동당 하남시장 후보는 오랫동안 하남시에서 주민참여예산운동과 무상급식운동을 주도해왔다김 후보는 이런 지역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2007년에 광역화장장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김황식 하남시장을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민소환을 성사시켰다김 후보는 2007년 7월 광역화장장 유치반대 범시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와 하남시 주민소환추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아 주민소환 서명운동을 시작한지 12일 만에 전체 유권자 10여만명 중 김황식 하남시장 32,749김병대 시의회의장 12,398임문택시의회부의장 18,956유신목 시의원 19046명 등 서명을 받았다. 2007년 12월 주민소환 투표결과시의원들에 대한 투표율이 37.7%로 주민소환이 확정되었고시장에 대한 투표율이 31.1%로 투표권자 총수의 3분의1인 33.33%에 2.2%가 부족하여 부결되었다.
울산시 동구에서 참여예산제도는 재정운용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 노력과 민주노동당 소속 구청장의 의지가 결합되어 성사되었다이갑용 동구청장은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2002년 지방선거에서 참여예산제의 도입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이갑용 동구청장은 지방정부의 권력은 곧 단체장의 권력으로서단체장이 가진 가장 큰 권력은 예산권과 인사권이므로 주민참여예산제도를 통하여 단체장의 예산권을 주민이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제도의 도입 필요성을 제기하였다동구의 유권자는 상대적으로 젊고 노동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참여예산제도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지가 높다는 점에서 여타의 어떤 자치단체보다 재정민주제의 구축에 앞장섰다(박미옥. 2006: 13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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