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국주의 국제포럼에서 연설문

전 남코리아의 사회주의 활동가입니다. 어제와 오늘 토론회에 참여한 동지들의 규모나 열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미중러 경쟁 사이에 낀 남코리아 민중의 입장에서 말하고 싶습니다. 중국은 거대한 인구를 먹여 살리고 높은 수준의 소비를 유지하려면 세계에서 자원을 획득해야 합니다. 중국은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상품과 자본을 수출해야합니다.  미국은 이러한 중국의 자원 획득과 경재발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일대일로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봉쇄를 돌파하려는 전략입니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향해 뻥 뚫려 있습니다. 중국은 일본, 남코리아, 대만, 필리핀, 인도에 포위돼 있습니다. 중국은 아주 좁은 바다를 통해  세계에 진출하려고 합니다. 중국은 바다에서 불리함을 극복하려고 육지의 비단길을 재건하려고 합니다. 중국이 자본주의인지 중국의 말대로 중국식 사회인지 토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내용은 경제적으로 집단적 소유이며 정치적으로 노동자민중의 권력수립입니다.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시대마다 나라마다 특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같은 저개발된 국가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레닌은 러시아혁명은 다른 나라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는 높은 수준의 인민들의 생활을 보장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 사회주의국가도 일정한 시장. 그리고 세계적 차원의 분업과 교류를 필요로 합니다.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종합하면 중국은 중국의 조건에 따른 중국식 사회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중국 내부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미래에도 잘 통제할 수 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경쟁하거나 협력하는 중국식 모델을 조선이나 쿠바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이들 나라는 미국 제국주의와 투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미국제국주의와 투쟁하는 북 코리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에 소극적이라는 점입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제국주의입니까? 레닌의 개념에 따라 판단하고자 합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상품수출과 자본수출을 합니다. 하지만 금융자본은 경제적으로 산업자본을 지배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국가권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도 국경문제나 안보문제 때문에 이웃나라를 침략하여 점령하거나 지배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가 자본수출과 상품수출을 위해 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다른 대륙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그곳에 대리정권을 세운 적이 없습니다. 반면 미국은 전 세계를 10개의 사령부로 나눠 군대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중국을 패권주의 국가. 팽창주의 국가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마르크스나 레닌의 관점에 따르면 경제적 착취와 수탈 그리고 정치적 지배를 동시에 추구하는 제국주의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 동지들에게 질문합니다. 세계는 신 냉전입니까? 아닙니다. 미중러는 분업과 경쟁 관계에 있습니다. 중국은 미국 등 제국주의국가와 분업하면서 미국을 따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중러와의 경쟁에 이기기 위해 유럽과 남코리아, 우크라이나, 대만에 줄서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동유럽, 남코리아, 대만을 떼려고 합니다. 미국은 이들 나라들에게 이간질하고 무력충돌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미중러는 분업과 경쟁이지만 대만, 한국, 우크라이나에선 냉전입니다 미국은 중러와 세계대전을 원하지 않지만 동유럽과 동아시아에서 국지전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즉 세계는 신냉전이 아니지만 코리아반도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지금까지 70년 동안 계속해서 냉전 중입니다.

미국이 중러를 지치게 만들려고 한국, 우크라이나, 대만을 전쟁으로 내몰면서 이 나라 민중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코리아반도에서 전쟁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북코리아의 핵무기 때문에 코리아반도에서 전면전의 위험은 사라졌지만 군사적 긴장을 고조하려는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은 어느 때 보다 높습니다. 한미일은 북코리아 핑계를 대면서 코리아반도의 동해와 서해에서 전면전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권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대만 분쟁에 개입할 의사를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권은 독일에 있는 미군 부대에 포탄 30만 발을 제공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 가담했습니다.

남코리아 노동자민중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쟁정책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코리아반도는 미국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그리고 현실에서도 전쟁 중입니다. 미국은 코리아반도에서 전쟁을 끝내는 종전협정 혹은 평화협정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북코리아의 코앞에서 하는 대규모 침략훈련은 훈련이 아니라 전쟁입니다. 한미 양군은 원산 상륙전쟁을 가정해 포항에서 북을 침공하는 대규모 공격훈련을 해왔습니다. 북 코리아는 한미일이 군사훈련을 할 때마다 많은 자원을 동원해 방어훈련을 해야 합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서방의 봉쇄로 인해 자원이 부족한 북코리아가 한미일 훈련에 대응하느라 경제발전을 못하는 것입니다. 지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의 전쟁계획은 북의 코앞에서 실시하는 침공훈련을 훈련이 아니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이른바 저강도전쟁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동지들은 코리아반도에서 저강도의 전쟁이 진행 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 전쟁정책에 저항하는 남코리아의 노동자민중을 지지할 것을 호소합니다. 감사합니다.

민주노동당 평가에 대한 10문 10답

1.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란주체로서 정치부대의 형성, 정치교육과 정치투쟁, 강력한 원내정당 건설이다. 민주노총은 엘리트정치인에 의존하는 대리정치를 극복 못했다. 정치위원회가 회의체 수준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치실천단은 제대로 구성조차 되지 못해 정치부대 형성에 실패했다. 민주노총은 조합원에 대한 정치교육을 정당에 떠넘겼으며, 정당 역시 독자적인 노동자정치교육을 실시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정치투쟁에 있어 민주주의, 반전평화, 통일, 생태 등을 위한 거리투쟁과 양당제 돌파를 위한 정치개혁투쟁을 나름 전개해왔다. 강력한 원내 정당 건설은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희망적인 출발을 하였으나 견고한 보수양당제의 장벽을 넘지 못했으며, 이념논쟁, 패권과 분열로 인해 퇴보해왔다.

-민주노총 내부에 정치부대 형성, 정치투쟁과 정치교육 강화라는 목표에 대해 큰 이견은 없다. 다만 기업별 노조 대표자 조직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민주노조운동의 쇠락이라는 구조적 한계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이후 정치세력화 논란에서 보듯이 핵심적인 쟁점은 원내정당의 건설에 동의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건설하느냐이다.


2. 민주노총 주도의 진보정당이 왜 존재하지 않나?

-1997년부터 2014년까지 존재했던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포함)은 과거 민중당과 달리 총연맹이 주도적으로 만든 진보정당, 소위 민주노총당이다. 민주노동당은 원내교섭단체(20명 의원)를 만들지 못했고, 광역단체장을 배출하지 못했지만 과거 진보정당들 중 대중투쟁과 의회진출에서 가장 큰 성과를 냈다

-하지만 200410명의 의원이 당선된 이후 정파들의 권력투쟁(패권논쟁), 이념대립(종북논쟁), 의석경쟁이 격화돼 2008년 분당됐다

-민주노동당은 2011년 과거 신자유주의세력인 국민참여당, 평등계열의 주류(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 창당에 나섰으나 13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대립이 재현되고 특히 의석경쟁이 극단화돼 부정선거 논란을 빚다가 중앙위원회 폭력사태까지 이르러 다시 분당됐다

- 의석경쟁에 밀린 비정파 출마자들은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에서 배제 혹은 차별화되자 반발해 민주당에 입당했다

-잔류한 통합진보당은 이석기 의원 사태를 겪으면서 해산 당했으나 그 이후 진보당, 민중민주당으로 재건됐다

-탈당한 노심조는 국민참여당 세력, 일부 자주계열과 함께 현재의 정의당으로 이어졌다

-2008년 분당 당시 진보신당은 노심조가 떠난 후 사회당과의 통합하여 노동당이 됐으나 사회당 지도부는 자신들이 추진하던 당명개정이 부결되자 탈당하여 기본소득당을 창당했다. 노동당은 원외 사회주의정당인 사회변혁노동자당과 통합했다

-녹색당은 독자적인 녹색노선을 고수하나 2020년 민주당 위성정당에 참여하는 당원총투표를 통과시켰으나 민주당 측의 거절로 인해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현재 민주노총 지지정당은 노동당, 녹색당, 진보당, 정의당이나 이들의 창당이나 운영에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결합한 바가 없어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로 보기 힘들다.

 

3. 민주노동당은 실패 혹은 성공 사례인가?

 1) 실패라고 보는 입장

 - 원내교섭단체조차 구성못해 집권가능한 세력이 된 적이 없다

- 패권, 종북논쟁, 정파대결로 분열되고 이석기 의원 사건, 폭력사태까지 일어나 공안탄압을 극복하지 못했다.

- 강력한 원내정당과 산별노조라는 유럽식 양날개론이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았다.

- 소선거구제 아래서 선거를 통한 의회진출은 민주노동당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200410명 당선은 노무현 탄핵에 대한 반발에 편승한 것이고 201213명 당선은 민주당과의 전면적인 후보단일화의 결과이다.

-울산북구를 완전히 점령했으나 음식물자원화시설 강행으로 주민의 심판을 받는 등 진보집권모델을 창출하는데 실패했다울산에서 노동자보다는 정파의 리더들이 공직을 차지했다.

- 합법대중정당 노선은 국회의원 배지를 위해 운동의 원칙을 내팽개친 진보정치의 괴물을 만들었다.

- 문제는 단순히 진보정당의 연합 또는 재건이 아니라, "운동정당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이다. 

 

2) 성공한 사례라고 보는 입장

집권목표에 접근하지 못하고 분당, 해산됐지만 한국적 특수성에선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한 원내 진보정당이다.

-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과정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80년대 이후 통일운동, 노동운동, 사회주의운동의 주류를 결집시킨 시대적 산물이다.

- 당지도부, 중앙위원, 대의원 등 대의체제에서 민주노총 할당이 공식적으로 25%, 실질적으로 40% 수준을 유지하는 등 인적 물적으로 민주노총당이었다.

- 대공장 남성노동자라는 노동자군대의 쇠퇴, 산업의 고도화에 따른 노동계급의 분화, 저출산고령화 사회,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의 동기가 약화되는 구조적 조건을 볼 때 민주노동당 수준의 원내 진보정당은 향후 양당제가 완화되지 않는 한 출현하기 힘들다.

- 무상급식, 무상보육, 건강보험의 확대 등 복지정책에 있어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조선사회민주당과의 공식교류 등 남북교류에도 공헌을 했다.

- 노농빈청학의 전국적인 조직의 배타적 지지를 기반으로 통일연대, 민중연대 등 상설투쟁체와 긴밀히 결합했고, 평택미군기지 투쟁, FTA 투쟁, 비정규투쟁에서 지금은 볼 수 없는 투쟁력을 보여줬다.

- 노동빈청학의 기층 대중조직, 대중적 진보정당, 상설투쟁체라는 민주노동당 모델이 한국사회의 구조적 변화로 인해 쉽지 않지만 아직도 유효한 모델이다.

 

4.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정파대결과 그로인한 분당과정은 어땠나?

 - 정파들은 담합에 치중해 당의 의사결정과 선출에서 밑으로부터의 의견 수렴보다는 지도자와 활동가들의 의견을 과다 대표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공조직이 부실화되고 정파가 상근활동가를 통해 공조직을 사실상 대체했다

-편가르기 정파대결이 표결 결과로 정당화되면서 사안별 합리성, 책임정치가 실종되고 자정능력도 사라졌다

- 이러한 정파구조에서 권영길조차 후반부에 범정파적인 리더십이 약화돼 이후 당대표는 정파의 대표로 위상이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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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원칙상 다수가 절차적 민주주의에 따라 권력을 독점하는 패권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나 패권이 소수파인 평등계열이 분당한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 자주계열이 패권을 구조화하는 제도를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1인 다표는 평등계열이 만들었다. 다만 자주계열은 2008년 분당 직전 1인 다표제도를 수정하는 당규개정에 반대했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활동가(정치인 포함)들은 당권파(구 전국연합, 전국회의 계열)이 당직과 공직후보를 장악하는 패권을 부렸고 종북 등 노선 때문에 탈당했다고 주장했다.

-2008년 자주계열이 밀어붙인 권영길 대선후보의 패배에 대한 책임과 당직자 정보를 북에 전달한 일심회 관련 당직자의 제명을 다룬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임시집행부이던 평등계열이 표결에 패배하자 본격적으로 탈당했다

-하지만 한석호, 조승수 등은 임시대의원대회 이전에 탈당과 신당창당을 이미 가시화한 상태였다.

-통합진보당 분당사태는 민주노동당 분당의 재현이지만 부정선거 논란과 민주당과의 전면적인 후보단일화 과정, 분당의 촉발점인 중앙위원회 폭력사태에서 보듯이 의석경쟁이 더 극단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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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주계열의 패권과 종북을 비난하던 평등계열은 왜 자주계열과 다시 통합했나?

- 소수파인 평등계열은 자신의 분당을 대중에게 정당화하기 위해 패권주의와 친북을 활용했을 뿐이고 실제로 평등계열 엘리트들이 분당한 이유는 소수로 전락해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당과 통합을 되풀이하게 된 근본 원인은 국회의원 당선가능성 즉 의회주의 몰입이다. 패권주의 친북 등은 분당과 통합을 반복해 온 의회주의 몰입을 대중들에게 정당화하는 하위 명분이다.

-노심조는 민주노동당은 종북정당으로 낙인돼 자신들이 신당을 창당하면 2008년 총선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봤으나 신당은 의석 획득에 실패하고 잔류 민주노동당은 5석을 얻었다.

-2008년 광우병 시위 이후 진보정당과 민주당의 공동투쟁이 형성되고 2009년 보궐선거,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야권단일후보가 연달아 승리하면서 노심조의 진보신당도 진보재결합,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에 주력하게 됐다. 즉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은 자주계열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립돼 독자노선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민주노동당 당권파 역시 의석 확대를 위해 진보재결합과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에 주력하면서 구 민주노동당 세력들의 재결합에 대한 이해관계가 접근하게 됐다.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자세히 보려면 누르세요.

6. 선 진보대통합, 후 선택적 야권연대의 민주노동당 선거방침은 어떻게 망가졌나

 -민주노동당은 2009년과 2011년 정책대의원대회를 통해 진보재결합을 전략적인 조직방침으로 정하고 진보대통합의 힘으로 민주당과 힘 있는 선거연합을 제한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민주노동당 당권파(경기도와 광주전남 세력의 연합)는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의 판을 키우고 연립정부 구상까지 가지면서 유시민의 국민참여당까지 포함된 대통합을 강행했고 이에 민주노총은 대통합에서 이탈했으며, 노심조는 마지못해 동의해 통합진보당이 창당됐다

-유시민은 2012년 대선에서 진보정당 후보 사퇴와 민주당 후보를 단일후보로 만들기 위해서 즉 야권연대 차원에서 대통합에 동조했다. 실제로 이정희와 심상정은 대선을 완주하지 않아 문재인이 단일후보가 됐다.

-통합진보당은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으로 진보대통합 원칙을 훼손한 후 민주당과 전국적인 무차별적인 총선 후보단일화를 추진했다

- 전국을 통합진보당 단독후보, 민주당 단독후보, 양당의 경선 후보 선거구로 나눴는데, 야권단일후보가 될 경우 당선가능성이 매우 높아 여론조사, 당원투표, 시민경선 과정에서 과열, 부실선거, 부정선거가 난무했다

-결국 비상식적인 의석경쟁과 부정선거 책임에 대한 정파대결, 당권대결, 폭력사태로 다시 분당됐다.

분당과 통합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역할 실패를 보려면 누르세요

7. 현재의 진보정당들은 왜 민주노총 대표정당이 될 수 없나?

 -정의당은 애초 국민참여당, 노심조, 인천연합, 일부 민주노총 진영 등 다양한 통합진보당 탈당세력이 모여 정체성이 모호했고 유일한 원내정당이었지만 노동중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진보당은 당세가 확장되고 있으나 진보정치와 민주노총 내에서 패권세력으로 비난받고 있으며, 과거 사태에 대한 조직적 성찰이 없으며, 이석기 의원 사건으로 정치적으로 고립돼 있어 독자적으로 원내정당으로 성장하기 힘들다.

-노동당은 대중투쟁이나 득표 면에서 유의미한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녹색당은 2020년 당원총투표를 통해 민주당 위성정당 참여를 결정한 것에서 보듯이 노동 중심성이 약하며 역시 유의미한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8. 진보정당들과 활동가 당원들은 진보정당 통합에 소극적인데 왜 일반 조합원들은 선거에서 하나의 지지정당을 요구하는가?

- 2차례 분당과 폭력사태를 경험한 활동가 수준에서 정서적으로 통합을 수용하기 힘들다. 분당의 원인인 패권과 노선대립이 이후에도 해결되기 어렵다고 본다.

-일반 조합원들은 구체적인 경험이 없어 트라우마가 없고, 단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완화시켜 줄 정치적 대변자가 필요할 뿐이다

- 이를테면 과거 민주연합노조 사례에서 보듯이 구청노동자의 경우 기초의원 한명만 있더라도 노동조건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민주노동당 경험이다

-국회에 노동자를 대변하는 원내정당이 있다면 전체 노동계급의 요구사항을 지금보다 더 많이 관철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일반 조합원은 현실적인 요구가 먼저이고, 패권이나 노선대립 특히 의석경쟁은 실감되지 않으므로 활동가들과 달리 이런 부작용들을 통합 혹은 연합의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는다.

 

9. 통합이 아니라도 진보정당들의 연합이 왜 한국에서 어려운가?

- 보수양당들이 돌아가면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는 한편 소수세력의 연합을 막기 위해 이중당적 금지 등 각종 정당법, 선거법 독소조항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제안하는 선거연합 정당은 이러한 제도장벽을 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서 이중당적 문제 때문에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다.


10. 다른 나라들은 총연맹과 원내 진보정당들의 관계가 어땠나?

 - 민주노동당뿐만 아니라 독일사민당, 프랑스사회당, 영국노동당 등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당들은 민중정당, 국민정당으로 나아가면서 이념적 조직적 분화, 창당강령의 포기, 의회주의 몰입과 부르주아정당과의 연대라는 보편성을 보여준다.

서유럽과 민주노동당의 유사성을 자세히 보려면 누르세요.

- 민주노동당은 노동자표를 결집하기도 전에 민주당과의 전면적인 선거연합 등 의회주의와 우경화로 나갔다. 민주노동당 역시 서구 정당의 100년 역사를 십수년만에 재현했다. 즉 유사성을 보인다

-민주노동당이 조로화된 것은 한반도 냉전과 분단으로 인해 국민국가를 완성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자당이 아니라 민중정당으로 출발해 서구보다 더 빨리 국민정당화(의회주의)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엔엘과 피디라는 전근대적인 정파 대결이 지속됐고, 국가보안법과 정당해산에서 보듯이 부르주아국가가 노동계급에 대해 제한적인 포섭전략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특수성을 자세히 보려면 누르세요.

 - 서유럽의 원내 진보정당은 집권, 혹은 원내 다수당이 될 때까지 총연맹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집권을 위해 의회주의와 우경화로 나서 노동자뿐만 아니라 몰계급적인 득표를 구걸하고 집권 후 국민의 이익을 대변한다면서 총연맹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했기 때문에 총연맹과의 관계는 점차 멀어지게 됐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 저서 목차를 보려면 누르세요

민주노동당의 영국 프랑스 독일에 대한 특수성(조로화의 원인)

국지적 냉전과 분단 고착으로 인한 국민국가의 미완성

(1) 민중정당으로서 출발과 의회주의 몰입

서구의 좌파정당은 1차 대전 전후의 민중정당화와 2차 대전 이후 국민정당화를 거쳐 1990년 이후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는데, 민주노동당은 창당 10여년 만에 국민정당적 성격을 드러내었고,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정당과 통합하였다. 민주노동당이 서구의 좌파정당과 달리 노동자정당이 아닌 민중정당으로 출범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의 우경화는 매우 빨리 진행되었다.

독일사민당과 프랑스사회당 및 영국노동당은 창당 당시 민주노동당과 달리 사회주의 노선을 명확히 하였다. 이 정당들은 이념지향적인 중앙지도부가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이념으로 포섭하고 조직화함으로써 처음부터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의회진출을 지향한 합법정당이었다. 

이들 좌파정당은 노동자정당으로 출발하였지만 점차 노동자 이외에 농민이나 사무직 등 다양한 일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자 민중정당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사민당은 1921년 괴를리찌 대회에서 사민당은 도시와 농촌에서 노동하는 ‘민중의 정당’임을 천명하게 된다. 사민당과 같은 서구의 노동자정당이 주장하는 민중정당은 보수정당이 주장하는 국민정당과 다른 것이었으나, 노동자정당의 우경화로 인해 2차 대전 이후에는 민중정당은 갈수록 국민정당화되었다. 

프랑스의 좌파정당 역시 창당 당시에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정당의 성격을 지녔다. 1905년 프랑스의 통합사회당은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선거에 치중하는 개량주의를 주장하는 다양한 집단의 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사회주의정당, 노동자정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장 조레스와 바이양은 이러한 입장을 ‘혁명적 개혁주의’, ‘혁명적 진화론’ 등의 용어로 설명하였다. 조레스는 특히 노동자가 공화국에 참가하여 국가권력을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통합사회당은 급진당의 사회개혁법안에 조건부 지지입장을 보였으며 부르주아 정당과의 제휴는 피하였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독일사민당, 영국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당과 달리 처음부터 사회주의 노선을 명확히 하지 않고 다양한 계층을 포괄한 민중정당이었는데, 이는 민주노동당 창당의 역사적 조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식민지와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제3세계의 경우 부르주아민주주의 보장과 국민국가 달성이 동시대적 과제로 나타날 때 민족민주혁명 혹은 민족민주전선이 사회주의 정당의 발현 양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민주노동당은 창당 때부터 체제변혁을 지향하는 강도가 서구의 좌파정당 창당 당시보다 약하였고 창당 주체 역시 노동자 이외에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였다.

한국은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배한 후 자신의 힘이 아니라 연합군에 의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다시 미소에 의해 분단되고 동족간의 이념전쟁을 치렀으며, 전쟁 이후에도 1987년 민주화까지 군부독재 아래에 있었고 지금까지도 냉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오늘날 한국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경제사회 영역이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영역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장귀연(2002)은 이러한 한국적 특성에 주목하여 한국은 정치영역이 시민사회영역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탈구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탈구현상의 내면에는 분단과 이념대립으로 인한 반공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으며, 지배세력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용인할 수 없는 좌경화로 보고 있다. 정진상(2005)에 따르면 1987년 민주화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가 약화되어 노동계급 형성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었지만, 반공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노동운동이 노동자 정치운동으로 나아가는 데에 장애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한계로 인해 노동자들은 한편으로는 지배세력의 탄압으로 인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와 연대하여 자신의 생존권을 보장받거나 외세와 지배세력에 저항하여 분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다른 계층들의 요구에 의하여 자신의 정치세력화를 노동자정당보다는 좀 더 폭넓은 민중정당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결국 한국의 탈구현상으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임현진(2009)이 지적하듯이 노동자정당보다는 민중정당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불완전한 민주주의, 분단, 냉전의 잔존, 노동자의 좌경화에 대한 탄압, 보수정당의 기득권 등 한국적 상황은 좌파정당의 출현을 지연시켰다. 장귀연(2002) 역시 탈구현상에 의해 좌파정당이 늦게 출현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김수진(2008) 등 다수의 학자들이 1987년 민주화 이후 계급정치가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로 반공주의와 보수독점체제를 들고 있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합법적인 사회주의정당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해방 직후와 4.19혁명, 1987년 민주화 기간 동안 사회주의세력 중 일부는 ‘대중적 진보정당’이라는 민중정당을 시도하였으나 국가의 탄압과 기존 보수정당의 담합구조에 의해 제도권 진입이 차단되었고, 창당에 이른 경우도 노동조합의 정치세력화 금지, 소선거구제 등 각종 진입장벽에 의해 원내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서구에서는 시민들의 기본권 쟁취투쟁과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투쟁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좌파정당의 창당에 강력한 원동력을 제공하였다(이수봉, 2008). 한국에서도 1987년 6월 민주화투쟁과 7월 노동자투쟁이 결합되어 노동자정당의 출현으로 나타났다면 노동자정당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은 큰 진전을 이루었지만 노동자들은 시민운동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정치참여의 자유를 쟁취하지 못하였다. 반면 2001년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1997년 노동법개악반대투쟁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그 당시 조직결성의 자유, 선거권, 민주적 기본권이 이미 주어진 상태에서 창당했기 때문에 서유럽의 좌파정당과 달리 창당과정이 노조 이외의 반체제세력의 제도화 투쟁과 결합될 기회가 없었다.

민주노총의 투쟁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정치세력화가 합법화되고 정당명부제가 일부 시행됨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이르러 사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노동자정당이 가능하였지만 민주노총은 노동자정당이 아니라 다양한 민중들과 함께 민중정당을 창당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노동자 이외에도 농민, 빈민, 학생, 통일운동 인사 등이 결합하여 민중정당 성격을 지녔다. 

민주노동당 창당강령은 서구 초창기 사회주의정당과 마찬가지로 총론과 이념에서는 사회변혁을 선언했지만 각론과 실천에서는 체제개선을 도모하였다고 불 수 있다. 서구 좌파정당이 선언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노동자정당 정체성을 강령에 채택하였지만 민주노동당의 경우 창당강령에 노동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피지배계층을 당의 기반으로 선언하였으며, 사회주의적 이상과 가치를 강조하였지만 사회주의 자체를 적극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노동자정당 변혁정당이라기보다 민중정당, 체제개선 정당의 성격이 강하였다.

민중정당으로 출발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정당으로 출발한 서구의 좌파정당들보다 더 빠르게 정당제도와 선거제도에 의존하면서 제도 권력에 참여하려는 의회주의성향을 강화시켰다. 불완전한 민주주의, 분단, 대외의존성을 극복하고 국민국가를 완성하려는 당내외 열망은 이러한 열망을 원내 의석확대와 국가권력 참여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일정부분 정당화시켰다. 이를테면 민족주의적 경향의 자주계열들은 민주노동당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의 주요정당으로 성장하기도 전에 야권연대와 후보단일화 및 연립정부를 통해 소선거구다수득표제의 양당제를 돌파하고 자주와 민주 및 통일의 과제를 조속히 해결하겠다고 공언하였으며, 그러한 명분 아래 노동계급의 기반을 확고히 하지 않은 채 다수득표를 위해 우경화로 나아갔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은 강령의 변혁적 성격의 완화와 선거몰입을 통해 서구의 노동자정당보다 더 빠르게 국민정당화로 나아갔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때부터 사회주의 색채를 두고 논쟁을 치렀으며 2011년 강령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을 삭제하고 성격이 모호한 개량적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한편, 다른 좌파정당과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을 무릅쓰고 신자유주의 도입 세력인 국민참여당까지 포함하는 진보대통합을 추진하면서 국민정당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한국사회가 급속히 후기산업사회와 저출산고령화사회로 진입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의 외적인 조건은 노동자정당보다는 국민정당의 길을 재촉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민주노동당은 서구의 좌파정당보다 빨리 ‘노동조합과의 거리두기’에 나섰고, 점차 노동자정당의 색채를 지우려고 하였다. 반면 민주노총은 의석확보를 위한 당 내 정파들의 무한경쟁, 중도보수정당과의 후보단일화, 국민참여당과의 합당, 연립정부 구상 등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견제할 실질적인 힘이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진보대통합을 통한 야권연대’방침에 따라 진보대통합을 통해 몸집을 키운 이후 2012년 총선에서 보수야당과 선택적인 야권연대를 통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대선에서 후보단일화를 통해 보수야당과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민주노동당, 2009h: 민주노동당, 2011b).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진보대통합보다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주력하였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견지하는 선택적 야권연대보다는 의석확대를 극대화할 수 있는 획일적인 야권연대를 추진하여 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민주노동당은 서구의 좌파정당보다 빠르게 의회주의에 몰입하여 조로화의 경향을 보이고, 결국은 통합진보당을 거쳐 정부의 정당해산으로 인해 소멸하였다. 민주노동당이 조로화를 거쳐 소멸에 이른 것은 한국이 국지적인 냉전과 분단의 고착으로 인해 온전한 국민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객관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러한 객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주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2) 전근대적 정파의 발호

민주노동당 내 정파들은 분단구조와 군부독재에 저항하던 통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내의 정파 활동 즉 민족해방(NL)/민족민주(ND)/민중민주(PD), 국민파/중앙파/현장파 등)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정파는 크게 보면 민족해방을 중시하는 자주계열과 노동해방을 중시하는 평등계열로 분류되는데, 이러한 정파구조는 국지적 냉전과 분단 고착으로 인한 한국자본주의의 모순 즉 국민국가의 미완성을 배경으로 한다. 서유럽이 동서냉전과 영토분쟁을 극복하고 자본주의 국민국가를 발전시켜왔다는 점에서 한국의 냉전과 분단은 전근대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정파구조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특징을 반영한다.

한국의 좌파운동 내 전근대적 정파는 정당민주주의 관점에서 자신의 과거 활동에 대한 재평가를 거치지 않고 민주노동당 안에서 과거 노선에 치중한 인적 결합으로 재현되었다. 결국 과거의 정파는 근대적인 정파의 재구성이라는 자기과제를 외면한 채 민주노동당에서 권력집단으로 부상하였다.

민주노동당 내 정파는 이론적으로 당의 구심력으로 혹은 원심력으로 작동할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주로 원심력으로 작동하였다. 당 활동가들은 물론 일반 당원들도 민주노동당의 정파분열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일반 시민들에게 민주노동당의 정파대립이 보수 언론에 의해 부각되었다. 중앙위원들과 상근자들은 정파의 존재 자체보다는 투명하지 못한 활동을 문제 삼고 있었다(민주노동당, 2007c; 131). 일부에서는 이들 정파들이 공개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브라질 노동자당처럼 ‘정파명부비례대표제’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민주노동당, 2005c; 17 : 민주노동당, 2007a; 135).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에 비해 더욱 정파구조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 과정을 보면 첫째, 각 정파가 먼저 지역대학, 대규모 사업장, 지역청년회나 사회단체 등 지역별로 거점을 확보하여 지역지배구조를 구축한 후 지역 차원의 반대세력을 권력에서 소외시켰다. 특히 자주계열은 자기 계열 내에서는 지역별 분할지배체제를 용인하되, 중앙에서는 협의 창구를 운영하면서 전국적인 정파로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정파가 과거 경기동부, 광주전남, 부산울산경남, 인천 등 전국연합 계열이다. 민주노동당에 늦게 결합한 실천연대 등 군소 정파들도 특정 거점 지역에 집중하여 지역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전체 자주계열의 협의 창구에 결합하였다.

둘째, 정파들은 자신들의 소속 활동가들을 민주노동당, 노동조합, 농민조직 등 각종 대중조직의 중간간부로 진출시키거나 이들 중간간부들을 포섭하였고 이러한 중간간부 장악은 정파가 각종 선거와 이슈에 있어 당원들을 동원하는 경로가 되었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 달리 지도부와 대의원 및 지역간부들을 동시에 선출하고 대의원과 지역간부들은 중앙지도부의 방침에 따르는 전당적인 의사결정구조를 구축하고 있어 정파의 소수 지도자 – 정파의 활동가 – 당원 이라는 비공식 소통구조가 당 지도부 – 당 지역조직 – 당원이라는 공식적인 통로의 외피를 쓸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정파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각종 선거와 의사결정기구 안에서 정치적 운명을 공유했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지도부와 개별 노동조합 간부들의 관계에 비해 훨씬 정파적이었다.

셋째, 민주노동당은 투표자가 3만여명에 불과하여 정파들이 활동가들을 통해 이들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각 시도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자주계열들이 중앙에서 협의 창구를 통해 각각 자기 지역에서 적게는 3천여명, 많게는 5천여명의 당원들을 활동가들을 통해 조직해내는 방식으로 최고위원, 대의원, 지역간부를 선출하는 동시전국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평등계열과 자주계열은 모두 전국적인 선거본부를 꾸리고 당원조직화에 나섰으나 조직력은 자주계열이 우세하였다. 당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경기 동부의 실질적인 리더인 이석기 의원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경선에서 1위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활동가 당원을 장악하고 있는 이러한 정파네트워크 덕분이었다.

물론 민주노동당이 정파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울산북구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한 2005년과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2007년 등 두 차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민주노동당 쇄신 방안과 민주노동당 혁신재창당 방안 등을 마련하여 추진하였다. 민주노동당은 그밖에도 당발전방안, 당 혁신 방안, 조직강화방안, 당직선출방안, 두 차례의 제도개선방안 등을 결의하여 실행하였으나 고질적인 정파대립과 정파담합 및 노선갈등 그리고 이에 따른 각종 선거에서의 당원 동원과 과열 경쟁 등의 폐해를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원내외 지도부의 불협화음, 활동가들의 관료화도 차단하지 못하였다(민주노동당, 2008c). 


(3) 국가의 제한적인 포섭전략과 진보당 해산

근대 부르주아 시민혁명은 자본주의 민족통일국가의 완성, 집회결사표현의 자유 등 부르주아민주주의 실현을 그 내용으로 한다. 서구의 경우 시민혁명 이후 노동계급이 이러한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자신들에게도 적용되도록 투쟁한 것이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한국처럼 식민지와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제3세계의 경우 근대 부르주아 시민혁명이 뒤늦게 나타나며 부르주아민주주의 실현도 불완전하다.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지배계급이나 국가가 반체제세력에 대한 포섭전략을 제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반체제세력의 일부가 제도권 밖에서 아직도 강력하게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경우 좌파정당은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정치적 자유를 억압받고 있으며, 그 때문에 강경한 좌파들은 제도권 밖에서 반체제세력으로 남아 있다. 노동조합 역시 공무원과 교사는 조직결성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받고 있으며, 주요산업의 핵심 업무에 종사하는 노조원들은 파업을 할 수 없으며, 모든 노동조합들은 정치파업을 할 수 없다. 정부는 남분 분단을 이유로 통일운동 인사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고 있다. 이러한 지배세력의 불완전한 포섭전략은 좌파정당이 원내 주요정당과 집권정당으로 성장하는데 장벽을 이루고 있는 반면, 반체제세력을 잔존시켜 좌파정당이 반체제세력과 연대할 경우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국가의 포섭전략은 좌파정당의 탄생과 성장 및 소멸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당들의 분포가 사회균열을 반영한다고 볼 때 사회균열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는 국가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점을 이미 살펴보았다. 시민혁명을 전후로 한 민족통일국가의 완성과 함께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허용수준은 좌파정당의 제도권 진입장벽과 퇴출장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냉전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분단국가인 한국의 경우 지배세력의 반체제세력에 대한 포섭전략이 제한적이라는 것은 국가보안법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 통합진보당 해산에서도 입증되었다.

헌법재판소(2014)는 통합진보당의 목적인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이 대한민국 헌법의 자유민주주의기본질서에 반하고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선동 활동이 통합진보당의 활동으로 인정된다는 이유로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다. 헌법재판소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코민테른의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NLPDR,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을 남한 상황에 맞게 변형시킨 북한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NLDR, National Liberation Democracy Revolution)’의 위장노선으로 판단하였다. 헌법재판소는 이석기 의원이 주도한 내란선동을 위한 회합이 통합진보당의 경기도당위원장에 의해 주최되었고 그 자리에 중앙당을 포함한 통합진보당의 당직자들이 참석하였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강령을 채택하고 반정부적 선동을 해온 독일공산당의 해산판결을 모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따르면 위장노선이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달리 명시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지 않으며, 폭력이 아니라 자유선거를 통한 사회변혁을 추구하며, 소수의 독재에 기반한 민주집중제가 아니라 다수결에 근거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진보적 민주주의 자체가 아닌 진보적 민주주의의 숨은 목적을 심판한 셈이었다. 또한 독일헌법이 정당해산 사유로서 ‘당원의 활동’을 제시하는 반면 우리헌법은 ‘정당의 활동’을 들고 있기 때문에 이석기 의원이나 경기도당의 활동을 통합진보당 전체의 활동으로 인정하려면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통합진보당 해산은 야권공조와 후보단일화에 적극적이었던 민주노동당에게 ‘종북’ 낙인을 찍어 야권공조를 파괴하여 야당의 집권을 저지하는 한편, 대선기간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독설을 퍼부었던 이정희 진보당 대표 등 반정부인사를 제도권에서 퇴출하기 위하여 뿌리 깊은 빨갱이 공포(레드컴플렉스)를 악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일부 세력들이 원외정당을 창당하였으나 특정 정파의 외연에 불과하여 민주노동당의 재현으로 볼 수 없다. 또한 국민참여당 출신과 진보신당 출신, 민주노동당 일부 출신 인사들이 정당해산 전에 통합진보당을 탈당하여 정의당을 만들었으나 창당의 배경이나 당의 노선, 그리고 인적 구성으로 볼 때 민주노동당의 맥을 잇는다고 볼 수 없다. 

독일 프랑스 영국 한국의 노동자당의 유사성

 1. 영국, 독일, 프랑스와 한국의 좌파정당 제도화 과정 비교


영국, 독일, 프랑스와 한국에서 좌파정당의 제도화에 영향을 미치는 객관적 요인으로서 산업혁명을 전후로 한 노동계급의 형성, 포드주의 시대의 대공장노동자의 결집, 후기산업사회의 노동의 지위 약화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총자본과 국가는 노동계급에 대한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허용, 노동계급과의 타협을 통한 복지국가 실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세 등의 포섭전략을 구사하여왔다. 영국, 독일, 프랑스와 같은 발전한 자본주의 국민국가에서 노동조합과 좌파정당은 총자본과 국가의 이러한 전략에 포섭되어 매 시기마다 압박과 타협을 반복하면서 길게 보면 제도화에 점차 몰입되어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편입되어왔다. 이러한 제도화 과정은 원내 진출과 다수득표 및 권력참여라는 의회주의로 규정될 수 있다.

비록 한국에서 민주주의 진전과 자본주의 발전이 서유럽에 비해 제한되었고 따라서 총자본과 국가가 제한된 포섭전략을 구사하였지만 민주노동당 역시 서유럽과 유사한 객관적 요인을 배경으로 총자본과 국가의 전략에 포섭되면서 빠르게 의회주의에 빠져들었다. 이 논문은 먼저 이들 서유럽국가와 한국에서 좌파정당의 제도화 과정이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한국에서의 특수성이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제도화 과정의 유사성


(1) 이념적 조직적 분화


반체제정당은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 결성 때의 혁명노선을 수정하고 점차 체제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체제정당이 체제에 통합되는 모습은 첫째 초기에 체제에 대해 정당성을 거부하는 태도와 이후 입장을 바꿔 체제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태도에 의해 좌우되는데, 이는 정당의 지도자나 간부가 사회화되는 과정과 밀접히 관련된다(사르토리, 1986: 197-201). 유럽의 사회주의 반체제세력 역시 좌파정당으로 제도화되면서 과거의 이념적 급진성을 완화시켰다. 좌파정당들이 반체제정당으로서 속성을 상실하자 당 내 급진세력이 이에 반발하여 분당하였다. 

좌파정당은 초창기에 정강의 총론에 있어 변혁적 선언을 하지만 정강의 각론에 있어 개량적 실천을 규정하였다. 독일사민당의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은 이념적 측면에서는 ‘사회의 완전한 변혁’을 선언했지만, 구체적인 실천적 내용에 있어서는 여성에 대한 투표권 부여, 8시간 노동제, 소득세 부과 등 국가를 통한 점진적인 개혁에 머물렀다. 이러한 급진적 이념과 개량적 실천의 괴리는 이후 사민당 분열의 배경이 되었다(Schorske, 1955). 1890년 이후 사민당이 의회에서 다수당으로 부상하자 점차 기존의 정치질서에 부분적이나마 통합되어 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노동조합이 점차 체제에 순응하게 되었으며, 사민당 당료들의 관료화, 지도부의 과두화 등이 심화되었고 이들은 당 노선과 전략을 개량주의로 이끌었다. 

좌파정당은 이러한 이념과 실천의 모순으로 인해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하여 급진적인 공산주의와 개량적인 사회민주주의로 나눠지는데,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개선할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애국주의를 수용하여 1차 대전에서 자국의 제국주의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이들은 러시아혁명모델을 배척하는 등 폭력혁명에 반대하고, 소련과 소련의 지도하에 있던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에 반해 공산주의는 독일사민당의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전쟁협력을 반대하고 러시아식 폭력혁명을 시도하거나, 프랑스의 공산당처럼 소련 및 코민테른과의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독일사민당에서 보듯이 공산주의의 폭력혁명 시도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가담한 지배세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러시아식 폭력혁명이 유럽에서는 옳지 않다는 대중적 정서 속에서 공산주의는 유권자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고 2차 대전 후 반소냉전이 심화되자 이러한 양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프랑스 통합사회당의 좌파들이 1920년 공산당으로 분당한 이후 개혁주의와 혁명주의를 봉합하려고 했는데 레온 블룸은 1926년 사회주의혁명인 ‘권력의 정복’과 부르주아정부로의 참여인 ‘권력의 행사’를 구분하고 통합사회당이 연립정부 내에서 제1당이 되는 조건에서 권력의 정복을 위해 필요하다면 권력의 행사도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사회당은 의회에서 노동계급 이익의 대변자라고 자처하였으며, 공화국의 방어를 최우선 순위에 두면서 중도-우파 정당들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독일사민당과 프랑스통합사회당과 달리 영국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마르크스주의자와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배제하였기 때문에 애초부터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기반하였다. 즉 혁명주의와 개량주의의 갈등이 아니라 혁명주의에 대한 분리와 배제가 이뤄진 셈이다.

좌파정당이 공산당과 사민당으로 분열되자, 노동조합 역시 분열되었다. 독일사민당에서 분리된 공산당은 별도의 노동조합을 조직해나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영국노동당에 결합하지 못한 공산계는 노동당과의 연대를 둘러싸고 코민테른의 혼선을 답습하였고 노동당에 대항하는 별도의 정치적 노동조합을 묶어내고자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반면 1920년대의 프랑스 노동운동은 공산당과 CGTU, 사회당과 CGT로 크게 분열되었다. 당과 노조에서 좌파의 분열은 1930년대 인민전선 때까지 이어졌으며 양대 노총은 1936년 다시 합병하였다. 하지만 독소불가침조약 이후 CGT 내의 공산당 당원들이 반파시스트 투쟁에서 평화옹호 노선으로 전환하자, CGT 지도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추방되었다.

최근 서구의 정당들이 중도정당으로 변화되면서 좌파정당으로서 정체성을 잃어가자 좌파정당 내부에서 혹은 좌파정당의 외부에서 좌파정당의 전통적인 가치와 노선을 유지하려는 새로운 정당의 흐름이 나타났다. 특히 좌파정당이 득표율을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는 선거전문가정당이나 미디어정당에 이르면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져 새로운 좌파정당이 출현하게 된다. 독일사민당의 오스카 라퐁텐 당수와 슈뢰더 수상 후보와의 갈등에서 보듯이 국민 다수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인기 후보와 당의 전통적인 노선은 충돌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당 내 좌파들이 우경화에 반발하여 탈당하거나 새로운 좌파정당을 창당하기도 한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당 분열은 온건파의 권력장악과 강경파의 이탈이라는 측면보다는 일부 강경파의 이탈이 있었지만 크게 보면 온건파 내부의 노선과 조직의 갈등, 즉 정파경쟁의 측면으로 볼 수 있다. 민주노동 창당부터 해산될 때까지 강경한 사회주의 세력이 당에 결합하지 않았고, 당에 결합한 일부 사회주의 세력은 사회민주주의로 노선으로 전환하거나 사회주의 입장을 견지하다가 탈당하였다. 

노선측면에서 보면 초기의 소수의 사회주의 강경노선과 다수의 사회민주주의 온건노선의 대립이 있었는데, 사회민주주의 내에서 다시 반미자주화와 남북통일 문제에 방점을 두는 자주계열과 노동과 복지문제에 방점을 두는 평등계열이 있었다. 하지만 원내 진입 이후 심상정과 민주노총 출신, 노회찬 같은 구 혁신정당 계열 모두 사회민주주의노선으로 전환하면서 주요 노선 대립은 온건노선 내에서 자주계열과 평등계열의 대립으로 형성되었다. 

유럽에서 공산계열에 대한 친소논쟁이 있었다면 한국의 민주노동당과 그 이후 통합진보당에선 종북논쟁이 있었다. 유럽에서 친소적인 공산당은 분리되어 프랑스공산당처럼 냉전 기간 중 이념적인 공격을 받고 소련 붕괴 이후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걸었다. 혹은 독일공산당처럼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지만 군소정당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영국의 친소 공산당은 시종일관 군소정당에 불과하였다. 

반면 한국에서는 자주계열의 주축이 종북세력으로 공격받았으며, 1차로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때 고립되었다가 통합진보당 때 일시적으로 다른 세력과 통합하였으나 2012년 5월 이후 분당 사태로 2차로 고립되었다. 통합진보당은 결국 이념공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2014년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으며, 그 잔존세력이 정당으로서 복원을 시도하고 있으나 2016년까지 과거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정파대립 구조의 전개과정을 보면 원내 진출하기 직전까지는 민주노동당의 다수는 평등계열이었고 이들이 중앙당과 서울시당, 부산시당, 인천시당 등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말과 2004년 초 민주노동당 원내진출 직전 비례대표 후보선출을 기점으로 국민파와 중앙파의 경쟁이라는 민주노총의 정파구조가 민주노동당에 전이되었다. 2004년 상반기 최고위원회 선거부터 2006년까지 지도부선거에서 전국연합 출신을 주축으로 한 자주계열과 다양한 소수 정파의 연합인 평등계열이 대립하였다. 

2008년 분당을 기점으로 평등계열이 대거 탈당한 후 자주계열 내부의 정파구도로 전환되었다. 구 경기동부연합과 구 광주전남연합을 주축으로 하여 구 부산울산경남연합과 구 실천연대 등이 당권파를 이루었다. 구 인천연합과 전국연합 출신이 아닌 자주계열, 민주노총 국민파 중 ‘노동운동전략연구회’ 출신의 ‘혁신연대’ 등이 댱권파에 대항하여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당 대표로 출마시켰다. 하지만 전국연합 출신들이 강기갑 의원을 당대표로 당선시키면서 이수호 선본 등이 추진한 혁신과 재창당은 실패하였다. 이 시기 민주노총의 국민파 역시 전국연합 계열인 ‘전국회의’와 노연 출신들의 혁신연대 등으로 대립하였다. 이러한 전국연합 계열의 독주로 인해 다른 자주계열은 소외되고, 이러한 대립구도는 민주노총 중앙선거와 산별선거 및 대기업 노동조합 선거로 파급되어 민주노총이 전체적으로 정파대립구도에 휩싸였다. 

정파의 폐해는 정파의 존재 자체보다는 이들이 정당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부정적 행태라고 볼 수 있다. 서유럽의 경우나 한국의 경우나 좌파정당의 구성원들은 권력을 추구하면서 경쟁하게 되는데, 한국에서 경쟁은 노선논쟁이나 종북논쟁을 매개로 정파대결로 나타났다. 즉 권력을 추구하는 의회주의라는 본질이 정파투쟁의 외피를 띠고 나타난 셈이었다. 

민중운동과 좌파정당을 비교적 잘 알고 있고 특정 정파에 깊숙이 몸담고 있지 않았던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는 민주노동당이 분당되는 과정이나, 통합진보당이 사실상 식물상태에 빠지게 되는 과정에서 그 결정적인 이유가 패권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민주노총, 2012a). 표면적으로는 종북주의 논쟁이나 대선결과에 대한 평가의 차이가 부각되었지만 그 배후에는 조직간 권력경쟁이 있었다. 

사실 민주노동당은 2008년 분당 이후 더욱 민족문제에 활동의 방점을 두었고, 북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변화시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김형탁, 한석호 등 패권과 종북 문제를 쟁점화하여 민주노동당 분당을 주도한 평등계열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면서도 자신들이 창당을 주도한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2011년 민주노동당과 통합하였고, 통합과정에서 종북문제보다 패권문제 즉 의회주의 성과물을 배분하는 문제에 더 골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 지역구후보 선출과 비례대표후보 선출의 부정선거 논란으로 촉발된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에서 국민참여당 계열이 다시 종북문제를 부각시켰고 구 민주노동당의 평등계열은 사실상 여기에 다시 동조하였다.

종북주의 논쟁, 대선결과 평가는 모두 파벌 간 주도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요소들이었다. 다수세력에 있어 패권주의적 행태와 정치연합의 취지를 무색케 하는 승자독식주의가 난무했고, 다른 한쪽은 분당을 하더라도 충분히 생존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대부분의 정파들은 정파문제가 대두된 이후 줄곧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혁신과 단결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정파의 불가피성을 피력하면서 구태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민주노동당 정파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파대립구도를 노선대립구도로 전환하여 대중들을 장악하였다. 정파에 종속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중간간부들은 정파들이 대중을 장악하도록 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지도부에 정파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정파에 소속된 간부들이 내부정치에만 매몰되면서 일반 당원들과 일반 조합원들을 정치 주체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이런 문제는 다수파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당내 정파들은 다 이러한 조직문화에 휩쓸려 있었다(이수봉, 2008).  

특히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나 선거에서 자주와 평등노선은 ‘종북 논쟁’, ‘사회주의 논쟁’ 등으로 왜곡되어 나타나 대중을 동원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하였고 이는 강령논쟁으로 발전하였다. 

통합진보당 분당 역시 제도화의 과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정파 간의 무리한 경쟁이 초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통합진보당 창당세력으로서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이질적이었던 정파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과거 정권의 핵심세력까지 결합한 조건에서 통합진보당은 처음부터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문화, 심지어 단일조직의 민주주의가 적용될 수 없었다. 따라서 통합진보당이 단일조직이 아니라 기존 정당들의 이념과 강령, 조직을 존중하면서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한 공동요구들을 중심으로 선거투쟁과 대중투쟁을 포함하는 공동활동을 수행하는 이른바 공동전선 형태의 당(정성진, 2012)으로 시작하였다면 당의 붕괴를 좀 더 지연시킬 수 있었다. 통합진보당은 총선 이후 각 정파들이 창당의 한계를 무시하고 단일조직에서나 가능한 다수결과 승자독식에 근거한 권력투쟁에 몰입한 결과 창당한지 반년도 안 돼 태생적 한계가 곪아 터진 것으로 봐야 한다.

민주노동당에서 통합진보당에 이르기까지 정당의 분열은 민주노총의 내분을 가져왔으나 프랑스의 경우처럼 노조의 분열로 악화되지는 않았다. 민주노총의 다수는 민주노동당 초창기 때 소수 강경세력의 반대를 누르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을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이러한 배타적 지지방침은 1차로 큰 타격을 받았고 민주노동당이 통합진보당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문제로 실질적인 힘을 상실하였으며,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 공식적으로 소멸하였다. 그 이후 민주노총은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반대하는 입장과,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인정하되 어느 정당을 지지할 것인가를 두고 다시 대립하는 입장 등으로 나누어졌지만 조직적 내분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2) 창당강령의 포기


영국노동당과 독일사민당의 경우 창당 당시의 사회주의 강령을 최초의 집권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 강령으로 후퇴시켰다가 오늘날에는 사회민주주의의 핵심 정강마저 포기하였으며, 그 결과 창당강령과 현재의 강령을 비교하면 사실상 창당강령을 포기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프랑스사회당은 영국노동당과 독일사민당의 길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다만 프랑스공산당의 경우 친소적인 공산주의강령을 유지하다가 미소데탕트 시절에 일시적으로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으로 완화하였다가 다시 공산주의강령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프랑스공산당은 소련붕괴 이후 사회민주주의 강령 수준으로 다시 후퇴하였다.

독일사민당의 경우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이 선언적이나마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주의를 선언하였으나 1차 대전 직후 첫 집권 이후 1921년 괴를리찌 강령(Görlitzer Programm)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민중정당’임을 자처하면서 현실주의노선으로 수정하였다. 사민당은 1959년 고데스부르그 강령(Godesberger Programm)에 이르러 사회민주주의로의 노선수정을 분명히 하면서 노동자에 기반한 국민정당으로 전환되었다. 사민당은 이후 1989년 베를린 강령, 2007년 함부르그 강령에 이르기까지 수정주의 노선을 강화하였으며, 특히 슈뢰더 이후에는 ‘친노동자적 복지국가’라는 사회민주주의 가치도 사실상 포기하였다.

영국노동당은 애초부터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둔 온건한 사회주의에 기초하였다. 영국노동당의 급진적 선언과 개량적 실천이라는 모호한 입장은 1918년 제 1 야당의 위치에서 자유당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근대적이고 전국적인 노동자대중정당을 지향하며 채택한 새로운 당헌에 반영되었다. 노동당이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립정부에 참가하면서 전시의 경제통제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성과로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당헌 4조를 채택하였다. 하지만 2차 대전 직후 노동당이 추진한 국유화정책은 실패하였고 그 여파로 노동당은 국유화정책을 번번이 후퇴시켰으며 1995년 ‘신노동당’ 노선을 앞세운 토니 블레어에 의해 당헌 4조가 폐기되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다른 서구의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친소노선으로 인해 2차 대전 이후 냉전구도에서 유권자의 외면으로 사회민주주의를 내건 사회당에 비해 열세였다. 하지만 1970년대에 이르러 냉전체제가 이완되면서 미소가 일시적으로 화해하고 상호공존을 인용하는 미소의 긴장완화 국면 즉 데땅트(detente)시기에 유럽의 공산당들은 선거에서 선전하자, 이들은 기존의 공산주의 노선을 현실주의 노선으로 수정하였다. 이것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의 공산당이 주도하였던 유로코뮤니즘이고 특히 프랑스 공산당은 유로코뮤니즘을 정강차원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로 구체화시켰다.

유로코뮤니즘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선거와 의회 및 지방자치, 헌법상 기본권과 민주적 제도 등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활용하여 노동자와 시민들의 힘으로 구조개혁을 통해 독점자본주의 국가를 일하는 사람들의 국가로 전환하고, 민주적인 중간층과 연대하여 선거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Boggs & Plotke, 1980: 441-443). 

이러한 유로코뮤니즘을 수용한 공산당들은 점차 다양한 계급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화되었으며,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경향은 독일 나치의 침략에 맞서 소련과 연합했던 민주적인 제국주의 국가를 지지하고자 했던 1935년 제7차 코민테른회의의 인민전선 노선에서부터 시작하였다(Mandel,1979). 이러한 주장은 그람시의 ‘시민사회의 헤게모니 장악을 통한 국가기구로의 침습’이라는 진지전 논리와 유사한 것으로서 다만 유로코뮤니즘은 의회주의를 더욱 강조한 것이다. 크리스 하먼 역시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의 길과 같은 유로코뮤니즘의 내용은 옥중수고 등 그람시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Harman. 1977). 간단히 말해 유로코뮤니즘은 베른슈타인의 사회민주주의로의 배반, 스탈린주의의 위장, 그람시 유산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서로 상반될 수 있는 내용들이 뒤섞여 있었다(Piccone. 1981: 722). 

1968년 프랑스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를 위하여, 사회주의 프랑스를 위하여'라는 '샹피니강령(champigny manifesto)'을 채택하였고 1971년 19차 당대회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이행기로 규정하였다(Adereth 1984, 200). 프랑스 공산당은 1976년 22차 당 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식적으로 폐기하였고 1979년 23차 당 대회에서 선거에 의해 점진적으로 달성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재확인하였다(Adereth 1984, 247). 

프랑스 공산당은 차르 체제를 폭력으로 전복한 뒤에 기존의 모든 법들을 폐기해야 한다고 보았던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달리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이행기 체제에서 도입된 진보적인(progressive) 법률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유럽혁명에서는 러시아와 달리 기존의 의회를 활용한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경로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Adereth 1984, 209).

민주노동당의 노선에 있어 노동자정당 노선과 민중정당 노선의 대립은 창당 당시 사회주의 강령 논쟁, 2003년 임시당대회 당시 사회주의 노선 논쟁, 2011년 사회주의 삭제와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 논쟁 등 평등계열의 사회주의 노선과 자주계열의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선갈등을 고려하여 민주노동당의 창당 이념은 노동자정당 노선과 민중정당 노선을 절충하였다. 민주노동당 강령 전문은 평등계열의 노선을 반영한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의 계승 발전’과 자주계열의 노선을 반영한 ‘민중 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이 섞여 있었고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체제가 현실사회주의 구체제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유형이라는 점을 천명하였다. 강령상의 사회주의와 자주적 민주정부는 민주노동당 내 다수 의견에 따르면 논리적으로 결합될 수 없는 것이나 당의 정파연합적 성격을 고려한 것이었다(민주노동당, 2009g).

강령은 주요산업의 국공유화, 정치개혁을 통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자주권의 강화, 민중생존권의 보장, 제국주의 지배질서의 부정 등을 강조하였으며, 그 밖에 대부분은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주의 사회의 상을 제시하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필요한 구체적인 입법과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한편 2007년 5월 집권전략위원회가 민주노동당 중앙위원과 대의원 전체를 상대로 한 이메일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극복하여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입장이 각각 75%와 67%에 달하고 있다. 다만 자본주의를 전복하여 사회주의적 목표를 실현해야 한다는 입장은 각각 13%와 17%에 불과하다. 강령의 내용과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민주노동당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막연하나마 과거 혁명방식은 아니지만 자본주의를 극복한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라고 볼 수 있다(민주노동당, 2009e; 84-85)

민주노동당 노선의 우경화 과정을 살펴보면 평등계열은 2003년 11월 원내 진출을 앞두고 임시대의원대회에 “민주노동당이 향후 5년 동안 사회주의적 노선과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는 당발전특별위원회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에 대해 일부 자주계열이 사회주의 노선의 편향성을 지적하면서 좀 더 대중적인 노선으로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제기하였다(민주노동당. 2003)

민주노동당 내에서 자주계열이 점차 다수를 이루고 평등계열 내에서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사회민주주의로 노선전환을 하는 세력들이 늘면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정당 노선을 완화시켰다. 자주계열이 주축이 된 민주노동당 내에서 사회주의 가치를 완화시켜야 한다는 다수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강령개정 작업에 나섰다. 2008년 평등계열이 대거 탈당한 직후 민주노동당은 혁신재창당준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다양한 전문가 집단으로 국민평가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국민평가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민주노동당이 계급정당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여 서민대중을 대표-대변하려는 진보적인 국민정당으로서의 이념지표를 재정립하고, 다양해지는 계층·집단을 포괄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민주노동당, 2008b; 99-100). 

민주노동당은 2008년 혁신재창당방안에 따라 ‘강령검토소위원회’에서 강령개정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였다. 2009년 정책당대회는 강령개정위원회를 구성하였고 2011년 정책당대회는 진보대통합을 앞두고 당 내 사회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강령개정 해설에 따르면 이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진보대통합의 노선을 제기하려는 의도이자, 진보대통합 협상 과정에서 평등계열의 사회주의 강령에 대응하여 민주노동당의 강령안을 미리 확정하려는 의도였다(민주노동당, 2011c). 

사회주의를 주장한 세력 중 해방연대는 2008년에 탈당하였으나 정당 결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노회찬, 심상정, 일부 민주노총 조합원 등 탈당자 다수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화한 진보신당을 창당하였으나, 이들은 2011년 진보대통합 과정에서 사회주의 강령을 고집하지 않았다. 노회찬은 원래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자처하였으며, 심상정은 2012년 대선 전에 사회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노선 전환을 하였다. 진보신당 출신들은 통합진보당에 합류한 후 다시 국민참여당 출신들과 탈당하여 정의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사실상 포기하였다.

민주노총 역시 창립 때부터 자신의 정치세력화를 순수한 노동자정당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의회주의에 입각하여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기치아래 다양한 계급이 함께 하는 민중정당을 설정하였는데 이 기조는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에도 일관적으로 유지되었다. 이를테면 민주노총은 2003년 대의원대회에서 ‘향후 5년간 민주노총의 운동방향’을 논의하면서 “평등’, ‘자주’, ‘연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변혁의 전망을 열어 나가야 한다”고 선언하였는데, 노동자중심의 진보정당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학생, 시민사회단체 등 민주세력과 함께 민중생존권, 사회개혁, 반미 반전평화, 자주통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활동 목표로 삼았다(민주노총, 2003; 75-83).



(3) 의회주의 경도와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대


서구의 경우 나라마다 시차가 있으나 대부분 좌파정당이 합법적으로 결성되고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나라에서 보통선거와 평등선거가 실시되었고 선거운동에서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어왔다. 좌파정당이 선거에 참여하면서 지지율 확대 차원에서 노동자대중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까지 당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의회정치가 활성화되고 다양한 대중매체가 의회에서 정당의 각축을 실시간으로 보도함에 따라 대중들은 자신이 이해관계가 정당으로 대변되고 사회의 계급갈등이 의회에서 정당의 경쟁으로 재현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그 결과 대중들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정당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대중정당이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의 여론을 반영하는 대중정치가 정착되었고, 그로 인해 정당의 대중적 기반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대중정치의 역학관계는 정당의 지지율 혹은 득표율로 지표화되었으며, 그 최종 결과물은 국회의원 의석수이거나 대통령과 같은 공직선출자의 당선이었다. 정당들에게 있어 공직자의 당선은 정당지지자에 대한 보상이자, 국가권력으로의 접근 그 자체였다. 

좌파정당 역시 불특정 다수인 전체 유권자의 지지를 얻고자 다른 정당과 경쟁을 하였다. 그 결과 좌파정당들의 포괄정당화 경향은 노동계급의 지지를 기반으로 국민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는 국민정당화로 나타났다. 보수정당이 자본주의 정책을 추진하다 실패하면 유권자들 사이에서 그 후유증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아져 좌파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하거나 집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거에서 이긴 좌파정당은 자본주의사회를 폐지할 수 있는 사회주의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정당의 자본주의 정책 실패를 치유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즉 좌파정당은 선거라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개량화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 공직당선자를 배출하거나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정당간의 경쟁은 거꾸로 당선이나 권력창출을 위한 정당간의 협조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정당들의 경쟁과 협조의 양태는 선거제도, 정당제도, 국가권력구성방법에 따라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났지만 그 어느 것이든지 당선자를 늘리고 국가권력에 참여하려는 것이었다. 좌파정당 역시 야권연대로서 후보단일화를 통해 당선자수를 늘리려고 하였으며, 연립정부 참여를 통해 국가권력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영국은 소선거구제를 유지하였는데, 노동조합 출신의 정치인들은 이러한 다수대표제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영국노동당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자유당의 당적으로 출마하여 원내에 진출하였고, 광부 노조는 영국노동당 창당 이후에도 당분간 자유당의 당적으로 출마하였다. 영국노동당은 제 1차 대전 전까지 자유당의 선진적 부문과의 선거연합에 큰 비중을 두었다. 영국노동당은 자유당과의 비밀협상을 통해 특정 선거구에서 후보단일화를 하기로 하였고 그 결과 각자 우세한 지역에서 단일후보로 출마하여 보수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프랑스의 결선투표 즉 2차 투표에서 보듯이 선거제도에 따라 선거연합 즉 후보단일화가 어느 정도 강제되기도 했다. 좌파정당 후보가 부르주아 정당 후보를 누르고 보수정당 후보와 다투는 경우 결선투표는 좌파정당에게 유리하지만 대부분 좌파정당 후보는 부르주아 정당 후보에 뒤졌다. 그 결과 결선투표가 없을 때보다 있을 때 좌파정당의 일부 후보가 원내에 진출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르주아 정당의 후보가 결선투표에 나아가게 된다. 즉 결선투표로 인해 부르주아 정당이 좌파정당보다 더 많은 이익을 보게 되고 그 결과 양당의 의석차이는 더욱 확대된다. 프랑스 공산당이 사회당과 선거연합을 하여 일부 의석을 차지하였지만 크게 보면 공산당의 약화와 사회당의 강화로 귀결되었고 그 결과 공산당은 선거연합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처럼 선거연합은 좌파정당에게 초기에는 의회진출을 보장해주지만 그 이후에는 주요정당으로 성장을 가로막는 양날의 칼이다. 

1899년 프랑스의 좌파정당 출신들이 공화정의 연립정부에 결합하자, 프랑스 좌파정당들은 이에 대한 찬반으로 심각한 내분을 겪다가 부르주아정부로의 예외적 결합이라는 마지노선에 합의한 끝에 통합사회당을 출범시켰다. 독일사민당이나 영국노동당 역시 제1차 대전을 전후로 하여 부르주아 연립정부에 참여하였고, 이후 선거에서 지지기반 확대를 목표로 노동자 이외에도 농민과 소생산자 등 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중정당 노선을 제기하였다. 

오늘날 영국에서 노동당과 보수당의 양당체제가 자리 잡아 소선구제임에도 불구하고 후보단일화를 위한 선거연합은 흔하지 않지만 자유민주당과 같은 제3당이 선거에서 부상하는 경우 원내 다수를 확보하기 위한 연립정부가 출현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다당제 아래의 소선거구제와 결선투표로 인해 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파정당들의 선거연합이 매 선거마다 논쟁이 되고 있다. 독일은 하원의 경우 정당명부제를 채택하여 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할 필요성이 거의 없으며, 단지 원내 다수를 확보하기 위한 연립정부 출현은 빈번한 편이다.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경향은 이미 2004년 원내 진출을 앞두고 예정되었던 수순이었다. 선거가 반복됨에 따라 당의 활동에서 선거의 비중은 중요해졌으며, 선거 전후에 집중적으로 입당한 당원들은 기존의 당원에 비해 당의 기반을 득표율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각종 선거가 끝날 때마다 유권자의 성향에 부합하는 ‘대중정당’이 강조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원래 선거방침은 진보의 독자성을 견지하는 선택적 야권연대였지만 2012년 총선의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는 획일적인 전국적인 야권연대였으며, 그 결과 일부 지역에서는 진보진영이 동의할 수 없는 보수적인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져 논란이 되었다. 또한 통합진보당이 경선 없이 민주당에게 양보를 받은 지역구의 경우 그 선정의 객관적 기준이 논란이 되었으며, 당내 소수세력은 다수세력이 야권협상을 통해 특혜를 받았다고 반발하였다.

민주노동당 내에는 야권연대에 의한 정권교체의 요구도 존재했는데, 야권단일정당이라는 빅텐트를 통해 정권교체를 하고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은 2012년 총선과 2012년 대선을 거치면서 보수야당으로 흡수되었다. 반면 민주노동당의 다수를 구성했던 자주계열은 전통적으로 연립정부의 성격을 지니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통일과 민중의 해방을 앞당긴다는 전략을 지향하였고 이러한 전략은 민주노동당 강령에 진보적 민주주의노선으로 표현되었다. 2011년 자주계열이 다수결로 통과시킨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은 명분상으로는 자주와 민주 및 통일을 지향하는 자주계열의 정당노선이었지만 실제로는 계급정당이 아니라 민중정당임을 선언하면서 선거연합, 연립정부 등 선거몰입과 그로인한 국민정당화의 길을 이론적으로 허용하였다. 

민주노동당 내 평등계열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때까지 중도정당과의 후보단일화 및 연립정부에 반대하였고, 이들이 만든 진보신당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민주당 등이 후보단일화를 하여 큰 성과를 낸 후 진보신당은 후보단일화에 적극적이었으며, 점차 연립정부 수용론도 제기되었다. 노회찬, 심상정 등 평등계열이 민주노동당 및 국민참여당과 함께 창당한 통합진보당의 경우 구 민주당 세력들이 대거 결합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연립정부 수용론에 기울어져 있었다.

심상정은 2011년 진보신당 전 대표의 자격으로 미국에서 한 강연을 통해 민주당이 포함된 연립정부를 통해 2012년 정권교체를 하자고 제안하였으며, 정의당 시절에는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연립정부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특히 2016년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정의당 대표의 자격으로서 ‘더불어민주당’에 대해 연립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박사논문 목차

VI.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 126

 1. 민주노동당의 발생기 : 전략적 동반성장 관계 126

  1)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창당 주도 126

  2) 민주노동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배타적지지 129

  3)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결합 132

   (1) 선거 결합 132

   (2) ‘거대한 소수’와 ‘선택과 집중’ 136

  4) 조직적 결합 142

   (1) 인적 결합 142

   (2) 기관 결합 147

   (3) 사업장과 지역 결합 151

  5) 재정적 결합 155

 2. 민주노동당의 성장기 : 긴장관계 158

  1) 민주노동당의 민주노총과의 거리두기 158

   (1) 국민의식과 조합원의식 및 당원의식의 괴리 158

   (2) 민주노총에 대한 국민의 인식 악화 163

   (3) 민주노총과의 관계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태도 164

  2) 민주노총의 2007년 대선전략 실패 167

  3)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169 3. 민주노동당의 소멸 : 양자 관계의 파탄 175

  1)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 175

  2) 정파에 점령당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177

   (1) 담합에 의한 의사결정과 선출의 왜곡 178

   (2) 공조직의 부실화와 대체화 180

   (3) 자정능력의 상실 181

   (4) 정파구조로 인한 통합 리더십의 약화 184

  3)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 실패 190

 4. 민주노동당의 조로화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실패 194


VII. 좌파정당과 노조의 관계 변화에 관한 비교 200

 1. 영국 독일 프랑스와 한국의 좌파정당 제도화 과정 비교 200

  1) 제도화 과정의 유사성 200

   (1) 이념적 조직적 분화 200

   (2) 창당강령의 포기 206

   (3) 의회주의 경도와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대 211

  2) 국지적 냉전과 분단 고착으로 인한 국민국가의 미완성 214

   (1) 민중정당으로서 출발과 의회주의 몰입 214

   (2) 전근대적 정파의 발호 219

   (3) 국가의 제한적인 포섭전략과 진보당 해산 221

  2. 좌파정당의 제도화 진행에 따른 최상급노조와의 관계 비교 223

  1) 양자의 관계 유사성 223

   (1) 노조와의 조직적 연계 223

   (2) 노조와의 거리두기 및 노조의 영향력 감퇴 226

   (3) 노조의 정치활동 대리주의 229

  2) 양날개론의 전제조건 형성의 실패 232

   (1) 노조 조직율과 산별노조의 한계 232

   (2) 집권에 접근하지 못한 미약한 좌파정당 235

   (3) 노동의 자본과 국가에 대한 힘의 균형 실패 237 3. 당과 노조의 관계 변화에 대한 비교분석의 시사점 238

  1) 좌파정당과 최상급노조의 관계에 있어 제도화 동조 현상 238

  2) 제도화의 회피 및 지연 전략의 필요성 240








패권과 분열의 주체 정파 문제

 정파에 점령당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정파는 크게 자주계열과 평등계열로 구분되는데, 이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 대한 당원들과 조합원들의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자주계열 중 구 전국연합계열이 가장 큰 규모였으며 이들은 주로 경기, 인천, 부산울산경남 등 지역별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각각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등 부문조직에 진출해 있었다. 이들 지역조직의 대표자들이 민주노동당 내에서 부정기적 협의를 통해 현안에 대응하였으며, 노동계에서는 전국회의에 주로 밀집되었고, 2006년 이후에는 당과 노동계의 구 전국연합 계열이 ‘전국모임’이라는 협의기구를 구성하여 정기적으로 회동하였다. 이들 자주계열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민중연대 등에서 평등계열을 견제해왔다. 

평등계열의 경우 다함께와 평등연대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서 정파조직으로서 존재했고, 나머지는 과거의 정치조직 출신별로 인적 네트워크에 머물렀으나 2004년 이후 자주계열에 대항하기 위해 전진, 혁신네트워크, 자율과 연대 등이 결성되었다. 민주노동당 평등계열 중 어느 정파도 특정지역을 지배할 수 있는 조직력이 없었으며, 이들은 연대하여 서울 등 일부지역에서 자주계열에 대한 우위를 유지했을 뿐이다. 

민주노총의 정파는 지역별 현장 조직이 합종연횡을 통해 전국적인 현장조직으로 발전한 형태와 민주노총 선거에 공동 대응하는 협의체에서 발전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민주노총 정파는 현대자동차 등 대규모 사업장에 있는 현장조직, 산업별연맹과 총연맹 차원의 인적네트워크, 전국적 차원의 소수 정파 등이 있으며, 이들은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국민파에는 전국회의, 현장실천연대, 노동운동전략연구회(노연)가 있었다. 

자주․민주․통일(자민통)을 표방한 현장 활동가들이 1999년 2월 금속산업연맹 선거를 거치면서 그간의 개별적이고 사업별 교류 수준이었던 연대의 틀을 넘어 2001년 ‘민주노동자전국회의(전국회의)’라는 전국적 단일조직을 건설하게 된다. 전국회의는 자주계열의 현장조직이었으나 전국연합을 중심으로 한 패권주의적 운영에 반발하여 현장실천연대가 2006년 10월 13일 추진모임을 결성하고 2년간의 활동을 거쳐 2008년 5월31일 발족하였다. 민주노총 내 선거 대응을 논의하던 산별연맹 위원장 이외에 주요 임원과 노동조합 상근 활동가들이 2002년 2월 모임의 명칭을 ‘노동운동전략연구회’로 공식화하고 기획단 중심의 모임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2003년 12월 평등회의와 민주노동당 내 서울을 근거지로 한 당내 소장파 그룹인 화요모임과 구 진정추 일부가 중심이 되어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전진)가 결성되었다. 전진은 2003년 11월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에서 당발전특별위원회 보고서 논란을 계기로 2004년 총선 비례대표후보 경선과 지도부 경선을 대응하고자 하였다. 전진은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 과정에서 다수가 진보신당으로 이전하였지만 일부는 탈당한 이후에도 진보신당에 결합하지 않았다. 전진은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기존의 활동가 조직의 성격이 탈각되면서 해산하기에 이른다. 현장노동자회는 전진의 해산과 더불어 금속 노조 중심으로 한 중앙파의 활동가 조직으로 2009년 2월 창립하기에 이른다. 

사회진보연대와 ‘노동자의 힘’ 및 메이데이 포럼 등 좌파들이 모인 현장파는 주로 민주노동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에 참여하는 다함께나 평등연대가 좌파로서 현장파로 분류되는 것에서 보듯이 현장파는 단일정파가 아니라 경향성이다(진숙경, 2008). 1997년 3월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결성되어 2008년 4월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전선’으로 이어진다. 1999년 8월 노동자의 힘이 결성되었으며 이것이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2008년 10월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약칭 사노준)로 이어진다. 



(1)  담합에 의한 의사결정과 선출의 왜곡


다양한 정파들은 크게 자주계열과 평등계열로 구분되어 협의체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경쟁하면서도 때로는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담합하기도 하였다. 국민파, 중앙파, 평등연대, 다함께 등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모두에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 조직의 선거와 의사결정과정에서 정파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는 여러 정파들이 후보등록 전에 합종연횡으로 후보들을 조율하여 지위를 나눠 갖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민주노동당에서 2004년 비례대표 후보경선이 당원직선제로 치러졌는데 단병호, 심상정 등 민주노총 주요 간부들이 출마하면서 민주노동당은 물론 민주노총의 정파들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면서 당원들을 상대로 전국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하였다. 2004년 총선 직후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자주계열과 중앙파는 김혜경 부대표를 당 대표로 추대하였으나 사무총장은 자주계열이 정책위원회 위원장은 평등계열이 승리하였다. 이후에도 자주계열은 정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인물을 당 대표로 영입하는 한편 자신들이 총장이나 정책위원장을 맡으면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2006년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자주계열은 중도성향의 문성현을 당 대표 후보로 지지하여 평등계열의 조승수 후보를 낙선시켰으며, 이때부터 자주계열의 우세가 고착화되었다. 2008년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자주계열은 구 전국연합 계열과 이에 비판적인 세력들로 양분되었는데, 구 전국연합 계열들이 강기갑 의원을 지지하여 민주노동당 혁신을 주창했던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의 이수호를 낙선시켰고 2010년 최고위원회 선거에서는 강기갑 대표 대신 이정희 의원을 당대표로 지지하였다.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는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의 3파전 구도로 치러지거나 아니면 국민파, 중앙파와 현장파의 연합구도로 치러졌다. 권영길 초대위원장은 3개의 거대정파가 정립되기 전에 1995년 11월 단일후보로 추대되었다. 1998년 3월 현장파인 이갑용 제2기 위원장은 중앙파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민파의 정갑득 후보를 이기고 당선되었다. 중앙파인 단병호 위원장은 1999년 9월 단일후보로 제2기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이어 2001년 1월 현장파의 지지를 얻어 국민파의 정갑득 후보와 현장파의 유덕상 후보를 이기고 3기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2004년 1월 국민파인 이수호 후보가 중앙파와 현장파가 추대한 유덕상을 이기고 제4기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2006년 2월 국민파의 조준호 위원장이 중앙파와 현장파 일부의 지지를 얻은 김창근을 이기고 제4기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07년 1월 국민파의 이석행 후보가 중앙파의 양경규와 현장파의 조희주 후보를 이기고 제5기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2009년 4월 중앙파의 임성규가 제5기 보궐선거에서 단일후보로 추대되었다. 2010년 1월 국민파의 김영훈이 현장파의 허영구를 이기고 제6기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지도부 선거에서 정파담합이 관례화됨으로써 개인적인 역량과 대중적 인지도를 지녔더라도 정파에 소속되지 않거나 정파의 지지를 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지도부에 진출할 수 없었다. 정파는 양 조직의 지도부 선거 이외에도 각종 간부의 선거까지 개입하였다. 정파의 공천권이 정치적 진출과 간부당선이 보장되는 왜곡을 낳았다. 정파에 소속된 간부들은 일반 당원과 조합원들에게 자기 정파의 후보를 지지하도록 종용하거나 유도하였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에서 각 정파들은 회의 전에 미리 자신들의 입장을 정하고 자신들에게 속한 대의원들이 정파 방침에 따라 투표하도록 강요하였다. 실제로 정파에 소속된 대의원들은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여 대의원대회에 반영하기 보다는 정파의 입장을 자기 현장에 전파하고, 대의원대회에 반영하였다. 따라서 대의원대회는 토론과 조정을 통해 의사를 실질적으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파대립구도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정파대립구도 때문에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내에서 하나의 조직으로서 활동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민주노동당의 정치방침에 통일적인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이를테면 2011년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묻는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 방침은 부결이었지만 민주노총에 할당된 대의원들 중 상당수가 찬성하였다.

중앙위원, 대의원 할당제는 당의 노동자중심성을 갖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으나 민주노총은 할당 대의원에 대한 통제권을 갖지 못한 채 개개인의 결정에 맡겼다. 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은 이들 대의원들이 노동자들의 요구에 기반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당내 정파들에게 휘둘리게 방치하였다. 민주노동당 중앙대의원대회나 중앙위원회에 민주노총 출신이 할당을 포함하여 30-40%를 유지하였지만 이들이 민주노총의 방침에 항상 따른 것은 아니다. 



(2) 공조직의 부실화와 대체화


정파는 자신의 활동가와 구성원들에게 공조직의 관점보다는 정파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하거나 선거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으며, 심지어 대중투쟁과 같은 실천 활동도 정파적 관점에서 기획하여 결합하거나 경우에 따라 소극적으로 임하였다. 그 결과 활동가와 구성원들은 공조직보다 정파를 더 우선시하게 되었고 당의 관료들과 주요 지역조직들이 당 중앙의 지도와 통제보다는 특정 정파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는 공조직이 부실화되고 정파에 의해 대체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지역과 단위 노조 등 양 조직의 말단에까지 만연되어 현장에서의 단결을 저해함으로써 양 조직의 실천력을 크게 훼손하였다. 이에 따라 정파는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노력하고 현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아 노조의 조직력을 추락시키고 붕괴시키고 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일부 지역조직은 특정 정파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되었다. 경기, 울산, 인천 등에서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민주노총 지역본부 지도부 간에 정파가 다를 경우 양자 간에 긴장이 조성되고 의사소통이 단절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정파연합적 구조와 노조 조직 간의 긴장이 조성되어 지역의 당 조직은 노조의 당 결합을 부담스러워했고, 노조는 당의 지역 활동에 결합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그 결과 양자는 서로 결합하기보다는 회피하는 퇴행적 모습을 보였다. 민주노동당 정파들은 대중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켰으며 중앙과 지역의 선거에 있어 정파담합을 반복함으로써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민주노총의 간부가 당의 간부로 당선되는 것을 차단하였다(이수봉, 2008).

다수파는 이러한 방식으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의사결정과 선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수파의 폐해는 패권주의로 나타났는데, 패권주의의 어두운 측면은 명망가의 제도권 진출이라는 출세주의와 그 동원전략으로서 활동가를 정파에 종속시키는 정파대립, 대중들을 장악하는 노선투쟁이었다. 특히 다수파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공조직의 성과를 사유화하였기 때문에 권력을 독점한 다수파는 더 많은 제도적 성과를 얻기 위해 기존 제도 내에 편입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이는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정파구도가 현장에게까지 파급됨으로써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간부들도 재선되기 위해서 혹은 현장에서 대중들을 장악하려면 정파에 의존해야 하였다. 상당수 간부들은 정파의 파견 관료 혹은 정파의 대리인으로 전락하여 공조직 중심의 사고와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정파권력의 재창출 도구로 전락한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혁신, 집단지도체제와 공동집행부의 구성, 상근인력의 순환, 정무직과 전문직의 역할 구분, 정파 파견관료 퇴출 등이 제기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하부영, 2009).



(3) 자정능력의 상실


정파의 폐해를 자주 목격하는 상급노조간부일수록 정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였다. 2004년 10월 민주노총 간부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정파문제가 없다는 응답은 13.7%인 반면에  문제가 있다는 응답은 63.7%이다. 2007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정파갈등이나 조직 내 갈등의 주요 원인에 대해서 ‘의사소통의 결여가 42.2%로 가장 많고 ’가치와 목표에 대한 인식 차이‘ 39.8%, 활동 방법상의 차이’ 29.7%, 집행 권력을 둘러싼 경쟁관계가 24.2%로 지적되었다(김태현, 2012). 

이러한 정파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이미 정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민주노총 활동가들은 정파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2005년 4월 29일 민주노총 조직혁신위원회가 주최한 ‘노동조합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서 이0수 조합원은 “정파조직이 자기의 의견을 대중조직을 통해서 실현하고 대중조직은 그런 의견을 받아서 자기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정도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의견그룹의 역할을 정리하면서 “이것은 우리 운동이 건강하게 가기 위해서 필요하다”라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0우 조합원은 “의견그룹이 노선과 실천을 명확히 드러내고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가지고 투명하게 대중 속의 활동을 통하여 평가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0호 조합원은 “의견그룹은 건강한 활동가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노동운동의 발전적인 토론과 대안 모색에도 기여할 수 있으며, 다만 과거의 운동에서 나타났던 방식의 의견그룹을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대중운동의 상황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파에 소속된 민주노총 활동가들 역시 정파의 폐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3월 12일 개최된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대토론회’에 참여한 전진의 한석호 집행위원장은 "정파들의 고민은 상대방을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로 변질돼 갔고, 중앙위나 대의원대회에선 쪽수 밀어붙이기와 퇴장하기가 일반화되었다"면서 "민주노총은 어떤 정파가 집행부를 구성하든 다른 정파들이 함께 힘을 합치지 않으면 어떤 혁신도 할 수 없으며 정파 간 소통과 타협으로 통합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전국회의 이승우 부의장은 "우리 스스로 선거에만 골몰하는 집단으로 전락한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밝혔다. 혁신연대 조형일 집행위원은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를 지적하면서 "운동역량이 과잉 투자됨으로써 실제 중요한 현장사업이나 외부사업들은 뒷전에 처지게 되고 역량의 배치도 왜곡됨으로써 운동전체에 마이너스 효과가 발생한다"고 지적하였다.

2011년 8월 31일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주최의 노동운동 평가대안포럼에서도 주요 정파 관계자들은 ‘패거리 운동’이나 ‘선거용 조직’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는 정파운동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2012년 ‘노동운동과 정파,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에서 전진 출신의 한석호는 “정파가 대중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면서 정파가 내세운 후보가 조직의 위원장이 되면, 위원장이 아닌 정파의 수장으로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상황에서 공조직(노조)은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하였다.

정파 활동가들은 정파가 스스로의 폐해를 청산하는 자정능력을 강조하였다. 2009년 민주노총 대의원 및 단위노조 대표자들의 수련회에서 다수의 참여자들은 정파 해체보다는 토론 문화를 통한 조직 내 민주주의와 실현, 상호협상과 견제, 신뢰 회복과 책임 있는 집행 등 대안을 제시하였다(김태현, 2012). 하지만 현실의 정파대립구도에서 정파는 조직논리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정능력이 작동될 수 있는 책임정치가 실종되었다. 정파들은 자신들이 추대한 지도부나 간부가 과오를 저질러도 이를 인정할 경우 다음 선거에서 경쟁정파에게 권력을 내주어야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파들은 선거승리를 모든 잘못을 면책 받고 권력을 다시 승인받는 정당성 획득으로 간주하였다. 정파의 지도부와 관료들은 조직운영과 정책수립에 있어 과오가 있더라도 정파대립구도를 방패로 삼았다. 따라서 거대정파가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선거를 통해 지속적으로 권력을 과점하였다. 통상 선거 결과는 민심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선거참여자는 선거의 결과를 수용하고 그 결과 선거는 당분간 갈등이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 마련인데, 정파선거에서는 그 결과에 대해 세력싸움에서 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거 결과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정파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대중적 지도력을 정립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스스로 정파대립구도를 해소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 초대위원장과 민주노동당 초대 대표를 맡은 권영길 정도만이 정파를 통제할 수 있는 대중적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권영길 역시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심상정, 노회찬과 경쟁하면서 정파에 의존하였고, 2011년 국민참여당과의 통합과정에서는 정파에 대한 지도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주역이자 민주노총의 주력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고령화현상도 민주노총이 새로운 활동가들을 양산해 내지 못하고 과거의 정파에 갇혀 활력을 잃어가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1998년과 2009년에 실시된 민주노총조합원 생활실태조사 결과를 비교해 보면 민주노총 조합원은 고령화되고 있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근로조건과 생활수준의 차이로 인해 조합의 균일성이 저해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민주노총, 1999b : 민주노총, 2010). 특히 정파의 주요활동가들은 위장취업을 불사하면서 노동운동을 20여년 이상 해왔으나 민주노총과 함께 기득권층으로 바꿨다(민주노동당, 2009b). 무엇보다 명망가와 활동가에 의해 지배당하는 대중들은 자주적인 정치주체로 나서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자발적인 투쟁역량까지 소진되었다.



(4) 정파구조로 인한 통합 리더십의 약화


민주노동당 대표 권영길, 김혜경, 문성현, 강기갑, 이정희 중 정파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리더십으로 당 대표에 오른 이는 권영길 뿐이다. 권영길은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으로서 1996년과 1997년 투쟁을 이끌었고, 1997년 민주노총이 주도한 민주노동당의 전신 ‘국민승리21’의 대통령후보를 역임하였으며,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하여 초대 당대표가 되어 민주노동당이 2004년 원내에 진출할 때까지 대표로 있었다. 권영길 대표는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지를 기반으로 민주노동당 내 다양한 정파를 아우르며 정파 간 갈등을 조정하였다. 권영길 대표가 정파에 휘둘리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보다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으로서 민주노총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당내 지도력을 견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2004년 총선까지는 자주계열의 상당수가 아직 입당을 하지 않아 민주노동당 정파구도가 평등계열에 기울어져 있어 정파 간 대립이 격화되지 않은 점도 있다. 

권영길 대표의 정파에 대한 리더십은 두 차례 위기를 겪으면서 점차 붕괴되었다. 2004년 총선 직후 국회의원은 당 지도부인 최고위원회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하는 ‘당직공직겸직금지당규’가 중앙위원회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권영길 의원이 직접 토론자로 나서 반대를 호소하였으나 애초에 이 당규에 찬성하였던 평등계열뿐만 아니라 일부 자주계열도 이 당규에 찬성함으로써 권영길 의원은 당대표에 출마할 수 없었다. 이는 당의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출마하여 전사한 당 내 주요활동가들이 국회의원과 당 지도부 모두를 겸직하고자 하였던 권영길, 천영세, 노회찬, 최순영 의원 등 전직 지도부에 대한 일종의 항의를 한 것이었다.

권영길 의원은 1997년과 2002년에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3% 이하의 저조한 결과를 얻었으나 2007년 민주노동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다시 출마하였다. 권영길 의원이 대선 3수를 한 것은 본인과 측근의 의지도 있었지만 원내 진출 이후 대중적 인기를 얻은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워 평등계열을 견제하려는 자주계열의 추대가 크게 작용하였다. 권영길 의원은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을 누르고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로 나섰으나 또다시 3% 이하의 성적을 거두는데 그쳤다. 2007년 대선 이후 권영길은 평등계열에 의해 자주계열에 경도되어 있는 것으로 비판을 받고 대선 패배의 책임론이 분당으로 이어지면서 과거 정파를 포괄하였던 리더십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 

권영길 의원은 대선 이후 2008년 총선에서 창원에서 재선하였으나 리더십은 회복되지 않았다. 2011년 가을 임시당대회에서 자주계열이 지배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추진하는 안건을 올리자 권영길 의원은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과 함께 반대 토론자로 나섰으나 민주노동당 주요 정파 대의원들의 야유를 받는 등 수모를 당하였고, 통합진보당 창당 이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였다. 

권영길 의원의 대국민이미지는 민주노총 위원장이라는 투사형보다는 전국으로 생중계된 대선후보 토론에서 형성되었는데, 서글서글한 인상에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라는 말을 회자시키며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주장하는 온건한 정책형으로 인식되었다.

김혜경은 민주노동당의 자주계열과 다수의 평등계열 그리고 민주노총의 국민파와 중앙파 등 주요 정파의 추대에 의해 2004년 총선 직후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김혜경은 대표는 자주계열과 평등계열의 갈등 속에서 완충적인 역할을 자임하였다. 2005년 10월 울산북구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나선 정갑득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이 패배하자, 평등계열은 최고위원회 총사퇴를 주장하고 자주계열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김혜경 대표는 최고위원회에서 최종 합의가 나오기 전에 전격적으로 사퇴하였다. 

문성현은 단병호, 심상정과 함께 민주노총 내에서 평등계열로 분류되었으나 2006년 자주계열의 추대에 의해 당 대표 경선에 나와 평등계열이 지지한 조승수 전 의원을 누르고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문성현 대표는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을 지휘하였으나 후보경선 과정과 선거운동 과정에서 자주계열과 평등계열의 대결을 조정하지 못하엿고 결국 대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은 분당으로 이어졌다. 

김혜경 대표와 문성현 대표는 국회의원 출신이 아니고 대통령후보도 역임하지 않았으며, 중앙정치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대국민적 인지도가 낮았으며, 당원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정파와 경쟁할만한 리더십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정치인의 경우 국회의원조차도 국민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원외 정치인은 비록 당 대표라고 해도 대국민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았다.    

강기갑 대표는 전농이 2004년 총선 직전 민주노동당에 조직적으로 입당할 때 전농부위원장의 자격으로 농민 대표로서 비례대표의원에 당선되었다. 강기갑 의원은 항상 한복 차림에 국회 안팎에서 진행되는 쌀개방 반대 투쟁이나 한미FTA반대 투쟁에 적극 참여하면서 농민을 대변하였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의원들이 모두 2008년 총선에서 낙마하고, 진보신당으로 당적을 바꾼 인기정치인 심상정 노회찬 의원도 국회 재입성에 실패한 가운데 강기갑 의원은 여권의 분열에 힘입어 경남 사천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강기갑 의원은 2008년 4월부터 촉발된 촛불집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달프’라는 별명과 함께 대중정치인으로 부상하였다. 그 당시 민주노동당은 분당 이후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혁신파가 ‘혁신재창당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당의 혁신과 재창당을 천명하면서 구 전국연합 계열과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수호 전 위원장이 혁신을 기치로 당 대표에 출마하자, 구 전국연합 계열은 대항마를 찾았고 내부의 인물이 적절하지 않자 당 대표 출마의 뜻을 지니고 있던 강기갑 의원을 추대하여 당선시켰다. 강기갑 의원은 2008-2010년 당 대표를 역임하는 동안 국회 안팎에서 민주노동당의 투쟁을 지휘하면서 ‘공중부양’ 비판에 휘말리는 등 강경한 투사형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강기갑 대표는 비록 구 전국연합의 지지로 대표가 되었으나 구 전국연합의 지도부와 달리 진보대통합에 적극적이었으며 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하였다. 구 전국연합은 2010년 당 대표 선거에서 강기갑 대표를 다시 추대하지 않고 자신들의 노선에 좀 더 부합하는 이정희 의원을 당 대표로 추대하였다. 강기갑 의원은 통합진보당이 2012년 총선 직후 5월 분열 사태에 직면하였을 때 구 전국연합 계열에 맞서는 측에 가담하여 7월 당 대표에 당선되었으나 구 전국연합 계열이 지도부 구성에 협조하지 않자 탈당하는 등 심상정, 유시민과 함께 통합진보당 분당사태를 주도하였다.

이정희 당 대표는 원래 민주노동당에 결합하지 않았으나 변호사로서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공동대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미군문제연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2008년 분당 이후 자주계열에 의해 비례대표 의원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구 전국연합 계열이 당권을 장악한 강기갑 대표 체제에서 정책위원장을 역임하다가 구 전국연합 계열에 의해 2010년 당 대표에 추대되어 선출되었다. 이후 이정희 대표는 진보신당과의 통합에 소극적이었으나 구 전국연합 계열과 함께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적극 나서 당내 분란과 민주노총과의 갈등, 진보대통합 원탁회의 내 논란에 일조하였다. 

통합진보당 창당 이후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 유시민 전 국민참여당 대표, 조준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등과 공동대표를 역임하였고 관악에서 출마하였으나 야권후보단일화를 위한 전화여론조사에서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답변을 허위로 하였다는 논란에 휩싸여 국회의원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이정희 대표는 2012년 5월 통합진보당 분열 사태 당시 구 전국연합 계열의 입장을 대변하다가 5월 12일 중앙위원회 폭력사태 직전에 중앙위원회 의장직까지 사임하여 의장직은 심상정 의원에게 넘어갔고 그 이후 중앙위원회는 폭력사태로 중단되었다. 이정희 의원은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 다시 구 전국연합이 당권을 장악한 이후 당 대표와 대통령후보에 선출되었다. 이정희 대표는 대통령 후보로서 박근혜, 문재인 등과 함께 2차례 TV 토론을 하였으나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등 시종일관 박근혜 후보를 공격하였다. 이정희 후보는 마지막 토론을 앞두고 정권교체를 위해 후보직을 전격적으로 사퇴하였으나 이후 야당이 정권교체에 실패하자 대선패배에 대한 책임 논란에 휩싸였다. 이정희 대표는 대선 이후에도 구 전국연합 계열에 의해 당 대표에 추대 선출되었으나 자신이 주도했던 국민참여당과의 진보대통합 실패, 통합진보당 분당, 대선 패배 등에 부담을 느끼고 지도부 사퇴 등을 고려하였으나 구 전국연합 계열의 만류로 통합진보당이 해산될 때까지 당 대표로 남았다.

이정희 대표는 2012년 대선 전까지는 야당과 야당 지지자들로부터 서울대 법대 출신의 엘리트가 좌파정당이라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다는 온정적인 이미지, 참신한 이미지를 얻고 있었고, 민주노동당 역시 야권연대, 진보대통합, 대국민 홍보 차원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2012년 총선 당시 출마지역구에서 여론조사 조작 시비, 통합진보당 분당 과정에서 일부 훼손되었고, 대선과정에서 박근혜 후보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과 완고한 자기논리를 표출함으로써 경직적인 이미지로 전환되었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당 대표직을 유지하였지만 대선후보 TV토론 당시 박근혜 후보에게 지나치게 경직적인 모습이 부각됨으로써 박근혜 대 문재인의 구도가 모호해졌다는 야당과 야당 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한 당내 거대정파의 지도자인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선동사건 이후 통합진보당의 대국민이미지가 추락하면서 이정희 대표의 대국민이미지 역시 더욱 악화되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권력구조는 당 대표와 실권을 쥐고 있는 사무총장의 쌍두마차였으나 이들은 선거에서 파트너가 아니라 각각 선출되어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에 근거하였다.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노회찬, 김창현, 김선동, 오병윤, 장원섭 등이었는데, 이들은 당의 재정과 조직 및 인사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였으며 당의 주요결정을 담당하는 최고위원회, 중앙위원회, 당대회의 안건을 성안하였고, 주요 안건에 대해 주요정파들과 사전에 의견을 조율하는 등 당의 의사결정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노회찬 사무총장은 넓게 보아 평등계열이나 사실상 이렇다 할 정파의 지지를 받지 않았으며, 그의 리더십은 오랜 좌파정당 활동의 경험과 대중정치인으로서 탁월한 개인적 역량에 근거하였고 2004년 당내 비례대표 의원 선거에서의 당선 역시 그 연장선이었다. 2004년 원내 진출 이후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권영길은 물론 민주노총 중앙파를 중심으로 한 주요 평등계열의 조직적 지지를 받은 심상정 의원에게도 패배하여 3위에 머무르는 등 조직 기반의 허약함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노회찬 의원은 이후에도 자신의 개인적 인기와 야권연대에 힘입어 3선을 하였다.

노회찬 총장을 제외하면 김창현, 김선동, 오병윤, 장원섭 총장은 구 전국연합의 계열이었으며, 특히 김창현 총장을 제외하면 모두 광주전남 출신으로서 경기출신들과 조직적 연대를 통해 당권을 장악하였던 실세들이었다. 실세 총장과 당 대표간의 알력은 항상 잠재되었으나 김선동 사무총장 이후 더욱 심화되었으며, 민주노동당이 분당되어 권력이 자주계열로 넘어간 이후인 강기갑, 이정희 대표 시절에는 당의 실권이 당 대표가 아닌 오병윤, 장원섭 등 사무총장에게 있었다. 

이정희 대표는 당내 독자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정파에 의해 국회의원, 당 대표에 발탁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리더십을 장원섭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한 정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통합진보당 분당과 대선 이후 통합진보당의 지지율이 계속 하락하는 상황에서 구 전국연합 계열은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이정희 대표를 계속 지지하였지만 통합진보당의 전망과 이정희 대표의 역할에 있어 구 전국연합과 이정희 대표 간에 미묘한 긴장이 형성되었다, 김혜경, 문성현, 강기갑 대표의 사례에서 보듯이 대중적 기반이 약한 당 대표들은 초반에 정파에 의존하나 점차 당대표의 위상을 정립하는 가운데 사무총장 등 정파의 지도자들과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정희 대표와 구 전국연합도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

민주노동당은 2003년 말 임시당대회를 열고 의회주의 몰입을 차단하기 위해 지도부와 국회의원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을 논의했는데, 이는 당의 지도역량을 원내외에 골고루 배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대표, 부대표, 사무총장 등 선거권이 없었던 부대표 1인을 제외하고 모든 대표단이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총선이 끝난 후 주로 낙선한 지역구 출마자로 구성된 중앙위원회는 국회의원이 최고위원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하는 당규를 제정하였다. 이는 원내 진출이 가능한 명망가와 원내 진출이 막힌 지역 중견활동가들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의회주의 몰입으로 인한 당의 갈등을 예고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2008년 분당 직후부터 2012년 통합진보당 창당까지 ‘선 진보대통합 후 야권연대를 통한 정권교체’를 정치노선으로 삼았다. 2008년 이후 촛불집회에 나타난 정권교체의 열망을 반영하여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전체 야권은 재보궐선거와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켜 승리하였으며, 민주노동당 후보들 역시 야권단일후보로 나서 지방의원은 물론 인천과 울산 등 네 곳에서 구청장에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세력 등이 2011년 12월 통합한 ‘통합진보당’은 2012년 총선 직전 민주당과의 정책연대와 후보단일화 협상을 타결하였다. 전국의 모든 선거구는 민주당 후보, 통합진보당 후보, 경선지역으로 분류되었고 그 결과 통합진보당도 지역구 8석, 비례대표 5석 등 총 13석을 얻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은 당내 비례대표후보 경선과정에서 부정선거 시비, 후보단일화 협상의 특혜 논란으로 깊은 내분에 빠지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선거정당화 경향은 노동자정당의 국민정당화라는 일반적인 경향뿐만 아니라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자주계열의 전망과도 관련된다. 자주계열은 궁극적으로 노동해방을 지향하지만 당면해서는 자주적 민주정부에 의한 연방제 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자주계열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 고양된 정권교체의 열망을 야권연대를 통해 실현하고, 민중생존권 개선과 남북관계 개선을 달성할 수 있는 정권을 탄생시키고자 했으며, 그들 스스로 이러한 역사적 사명의식을 명분으로 삼아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자주계열의 지도부들은 이러한 자기정당성과 이해관계에 근거하여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제도정치에 점차 몰입하게 되었고, 2012년 총선을 앞 둔 이석기 의원의 급작스런 부상 역시 이러한 연장선에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민주노동당의 일각, 그리고 그 이후 통합진보당 역시 내심 2012년 대선에서 후보단일화 나아가서 정권교체 이후 연립정부의 구성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주계열의 정치전망은 의회진출을 통해 노동현안을 해결하고자 했던 민주노총 내 국민파의 의도와 사실상 일치하였고, 국민과 함께 하는 사회개혁투쟁이라는 민주노총의 창립정신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반면 평등계열의 경우는 서구 노동자정당의 변화과정과 유사하게 점차 원내 의석 확대를 당의 목표로 설정하였으며,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후퇴하고 있었다. 특히 진보신당의 2008년 원내 진출 실패와 그 이후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의 성공은 평등계열이 과거에 반대했던 보수야당과의 선거연합을 수용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총선과 대선과 대선이 치러지는 2012년을 앞두고 진보신당의 잠재적인 대선후보들은 연립정부의 가능성까지 용인하였다. 

실제로 자주계열이나 평등계열을 막론하고 유력한 대선후보들은 진보정치의 이름으로 국민들의 선택을 받는 대신에 야권연대를 통한 정권교체라는 명분에 굴복하였다. 진보정당 2012년 11월 26일 진보정의당의 심상정 대선후보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직을 일방적으로 사퇴하였고,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후보 역시 모든 유권자에게 공보물을 발송하고 TV대선토론까지 한 상황에서 대선을 3일 앞두고 진보와 민주 및 개혁세력의 연대를 통한 정권교체를 주장하며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통합과 분열의 반복

 3)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평등계열은 2006년 최고위원회선거에 조승수 전 의원을 대표로 출마시키는 등 지도부 선거에 전면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자주계열은 자신이 추대한 문성현 경남도당위원장을 대표에 당선시키고 사무총장과 정책위원장 선거에서도 승리하였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평등계열의 김형탁 등은 비례대표 선출방식을 소수파도 당선이 가능하도록 1인1표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추진하였으나 자주계열의 반대로 표결에서 패배하였다.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1차 선거에서 노회찬 의원을 이겨 평등계열 다수의 지지를 받은 심상정 의원이 주로 자주계열의 지지를 받은 권영길 의원에게 패배하였다. 이즈음 평등계열은 각종 선거와 투표에서 자주계열에게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주요 당직과 공직을 모두 당원 직선으로 뽑았는데, 인지도가 높은 후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선거는 인물 중심보다는 정책 중심 혹은 노선 중심이었다. 따라서 각종 선거에서 정파의 지지를 받는 후보들이 정책 논쟁, 노선 논쟁을 통해 정파의 구성원들을 결집시키고 후보나 정파 구성원들이 일반 당원들에게 이념적 자극을 주면서 지지자로 포섭하였다. 민주노동당 당원 중 당권자만 선거권이 있고 실제로 선거에 임하는 당권자들은 많아야 3만 명 수준이었으며, 이들은 사회단체 소속이거나 과거 학생운동에 영향 받는 등 대부분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서 정책 논쟁, 노선 논쟁에 거부감이 없었다. 일반 당원들도 몇 번의 선거를 통해 ‘자주파’니 ‘평등파’니 정파와 노선에 익숙해지고 그 결과 자신도 정파갈등의 당사자가 되었다. 

이러한 정파갈등은 대선기간 중 더욱 악화되었다. 대권영길 후보가 자주계열의 이용대 정책위원장이 주도한 ‘코리아연방공화국안’을 공약으로 채택하자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이 이에 공개적으로 반발하였으며, 선거본부의 인선, 재정 문제로 평등계열과 자주계열은 대립하곤 하였다. ‘자율과 연대’에 소속된 평등계열의 일부 네티즌과 ‘전진’에 소속된 민주노총 일부 조합원을 중심으로 2006년 최고위원회 선거가 끝난 후 당원게시판 등에서 탈당과 분당이 개별적으로 언급되다가 대선 직전 정파갈등이 심화되자 실제로 탈당이 일어났고 분당을 주장하는 글이 공개되었다(신윤동욱, 2015).

대선 직후 상당수 당원들이 대선 패배에 대한 실망감, 자주계열의 패권적 형태에 대한 반감을 당원게시판에 표출하였고 그 중 일부가 민주노동당이 북과 관련된 일심회 사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면서 탈당하였다. 1월 7일 백현종 경기도 구리시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구리시위원회 운영위원 9명 전원이 “패권주의를 거부하고 민생을 생각하는 ‘진정한 진보정치의 길’에 동참하겠다며 당 간부로서 최초로 집단탈당하였다. 11일에는 부산에서 해운대지역위원회를 중심으로 집단탈당이 이어졌다.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 김형탁 전 대변인, 한석호 민주노총 소속의 중앙위원 등은 2008년 1월 14일 ‘새로운진보정당운동(새진보정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상근체제와 광역별 지부 결성을 추진하는 등 신당추진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준비위원회는 다음날 ‘민주노동당 비대위에 바라는 입장’을 통해 당해산과 창당준비위원회 체계로의 전환 등을 심상정 비대위원회가 수용할 것을 당 잔류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하였다. 이에 심상정 비대위원장은 15일 ‘당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을 통해 “대선 이후 탈당은 무효”라며 “신당 추진을 중단하고 당 혁신과 제2창당에 나서달라”고 호소하였다(이윤원, 2008). 심상정 비대위원회가 중앙위원회를 예정보다 앞당겨 2월 3일 열어 혁신안을 확정할 것을 천명하였지만 이미 중앙위원회 전에 전남 여수와 광주의 당원들이 집단탈당하였다.

‘새로운진보정당운동’ 준비위원회는 26일 '새로운진보정당운동' 출범식을 강행하였고 조승수 전 의원,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김석준 부산시당위원장을 공동대표로 선출하였으며,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 김형탁 전 당대변인 등 민주노동당 전현직 간부 50여명이 추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심상정 비대위원회가 제출한 민주노동당 혁신안을 2월 3일 논의하기로 하였으나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을 주도하는 조승수와 김형탁 등이 2월 1일에 미리 탈당하는 등 분당은 가시화되고 있었다(이경태, 2008).

분당을 주도하는 세력들은 자주파 지도부의 대선 패배의 책임을 거론하는 것 이외에도 자주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청산을 요구하였으며 특히 이 문제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정파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밝혔으며, 또한 남북을 민족적 특수관계가 아닌 주권국가간의 관계로 재설정하고 민주노동당이 북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질 것을 요구하였다.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농민회총연합,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한국청년단체협의회 등은 2008년 1월 31일 성명서를 내고 자신들이 계급투표를 조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면서 민주노동당에게 대선패배에 대한 반성과 그에 따른 혁신을 요구하는 한편 분당을 추진하는 ‘새로운진보정당운동’출범식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이들은 심상정 비대위가 혁신의 핵심내용으로 제출하고 있는 내용이 민중들이 수구보수의 반통일세력과 투쟁하면서 쌓아온 통일운동의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민주노총, 2008d). 이들은 민주노동당의 분당 여부를 사실상 확정짓는 2월 3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를 앞두고 2월 1일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민주노동당 내 다양한 인사들을 초청하여 토론회를 열어 분당을 막을 수 있는 절충지점을 모색하였다(민주노총, 2008b). 

2월 3일 중앙위원회에서 혁신안의 쟁점은 패권논쟁 보다는 종북논쟁이었고 그 핵심은 북에 각종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소위 ‘일심회’에 소속되어 있던 당시 사무부총장에 대한 제명안이었다. 심상정 비대위원회가 제출한 원안은 대의원대회 결정으로 관련자들을 바로 제명하자는 것이었고, 주로 자주계열과 국가보안법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일부 평등계열은 이 제명안의 삭제를 요구하였다. 한편 민주노동당이 국가보안법 자체에 반대하고, 이들에 대한 유죄가 확정되지 않았고 제명은 당헌상 당기위원회의 전속권한이므로 대의원대회는 직접 제명을 할 권한이 없는 반면 이들이 당원의 정보를 북에 제공한 정황은 명백하니 일단 당기위원회에 제소하여 철저히 조사하여 엄중 조치할 것을 요구하자는 절충안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정파대결과 노선대립이 대의원대회를 지배하였고 절충안은 극히 소수만이 지지하였으며, 결국 표결 끝에 심상정 비대위원회 안이 부결되자, 심상정 비대위원장 등이 이에 반발하여 즉시 퇴장하여 대의원대회가 파탄되고 대규모 분당사태가 이어졌다.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등 배타적 지지단체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당 상층과 일부 당원들에 의해 촉발되고 당원 일반으로 확대되었다. 분당을 주도하고 있는 일부 평등계열의 시각에서 보면 이들 대중조직의 지도부들 역시 진보진영을 좌지우지하는 자주계열의 정파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민주노동당 대선후보경선 과정에서 주로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여 대선패배에 책임이 있으며, 종북논쟁의 당사자로서 자주계열의 노선에 경도되어 있었다. 즉 이들 대중조직들은 민주노동당의 갈등구조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경향이나 당 내 갈등을 긍정적으로 조정할 힘을 사실상 상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대중조직은 민주노동당의 분당이 완료된 직후 각종 성명서를 발표하고, 토론회를 열면서 민주노동당의 혁신과 진보정치의 재통합을 주장하였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수동적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민주노총, 2008c : 민주노총, 2008e).

한편 민주노동당에서 평등계열이 대거 탈당한 후 이제 자주계열 내에서 정파갈등이 증폭되었는데, 대부분 자주계열이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던 대중조직들 역시 정파갈등에 휩싸였다. 즉 대중조직 내에서도 자주계열 대 평등계열, 이후 자주계열 내의 갈등과 같이 민주노동당의 갈등구조가 그대로 재현되었다. 당과 마찬가지로 대중조직 역시 스스로 정파의 폐해에 대해서는 인정하였지만 자신들도 정파구조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특별한 묘책은 없었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2008년 2월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재확인하였다. 하지만 진보신당의 창당 이후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더욱 비판받았다. 민주노동당 창당에 관여했던 정파들은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잔존파는 배타적 지지의 유지를 주장하고 분당파는 해소를 주장하여 정치방침을 둘러싼 민주노총의 분열을 심화시켰다(김승호, 2012). 좌파정당의 분열은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전체 진보운동의 분열로 나타나 진보운동의 대중적 파급력이 급감하였고 이는 2008년 촛불정국에서 진보정당의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민주노동당 분열로 인해 민주노총 역시 내분에 휩싸였으며, 이러한 기류는 배타적 지지단체뿐만 아니라 진보연대 추진 실패에서 보듯이 상설연대체까지 파급되었다. 

민주노총은 2009년 1월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재확인하고 동시에 진보정당의 분열을 극복하는 제2의 정치세력화를 선언하면서 진보대통합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면서 이를 위해 민주노동당 세액공제에 참가했던 민주노총 20만 조합원의 재조직화와 2010년 지자체 선거까지 민주노동당의 노동자 10만 당원 운동을 선언하였다(민주노총, 2009c). 민주노총은 2009년 7차, 8차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진보정당세력의 단결과 통합을 위한 민주노총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민주노총은 2009년 9월 대의원대회에서 ‘진보정당 단결과 통합 촉구 민주노총 선언문’을 채택하고 이를 위해 조합원 10만 선언과 서명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민주노총은 2010년 대의원대회에서 “진보정치 대통합을 위한 대승적 차원에서 통합에 동의하는 진보정당에 대해 한시적으로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을 유예한다”는 결정을 함으로써 조합원이 민주노동당 이외의 진보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사회당은 민주노총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고 진보신당은 동의하였다. 그 결과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모두를 지지하는 선거방침을 정하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대해 후보단일화를 요구하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은 야권과 공조하여 진보교육감을 당선시켰고, 진보후보 단일화와 야권연대 성사에 성과를 냈다. 민주노총은 2010년 하반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대하여 “2011년 5월 1일 노동절기념행사까지 선 통합선언 및 수임기구 구성을 포함하는 추진계획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였는데, 민주노총 내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선 통합의 대상에 사회당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12월 7일 대표 회동을 통해서 진보 양당이 중심이 되어서 광범위한 진보세력이 참여하는 ‘진보정치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뜻을 같이하고, 이에 동의하는 진보진영대표자들의 연석회의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기류를 반영하여 2011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제2의 노동자정치세력화, 진보정치 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노총 정치선언’을 채택하였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2009년 정책당대회에서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치대연합 및 민주노동당 강화를 결의하였는데, 실제로는 아래로부터의 재창당, 대중과 함께하는 재창당, 단계적 재창당을 주장하면서 당분간 독자적인 성장론에 방점을 두었다. 다만 민주노동당은 진보대연합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서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단체가 포함된 진보원탁회의를 제기할 수 있음을 밝혔다(민주노총, 2009d).

하지만 분당 후 2008년과 2010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당의 혁신과 진보대통합을 내걸었던 후보들이 패배하고, “먼저 민주노동당을 강화하고 진보대통합은 그 이후 시간을 두고 추진하자”고 주장했던 경기도와 광주전남 및 울산 등 거대정파들의 후보가 지도부로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진보후보 단일화와 야권연대로 승리한 이후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방침과 당 내외 여론을 수용하여 진보대통합에 적극 나섰다. 민주노동당은 2011년 4월 진보대통합 방안을 확정하는데, 이념과 가치의 차이를 인정하고 연북의 입장에서 사안에 따라 북을 비판하거나 칭찬할 수 있으며,  ‘묻지마 범야권연대’가 아니라 선택적 범야권연대를 추진하며, 특히 패권주의와 분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공동대표제, 1인1표제, 합의 존중, 정책명부 할당제, 당원총투표제 등을 도입하기로 하였다(민주노동당, 2011a). 

드디어 2011년 1월 20일 ‘진보정치 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1차 연석회의’를 시작으로 대표자 연석회의 6차례, 집행책임자 회의 15차례, 정책책임자 회의 7차례를 진행하여 5월 31일 ‘진보정치 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5.31최종합의문’이 도출되었다. 이러한 진보대통합 논의 과정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진보적 시민사회단체 등이 참여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종합의 과정에서 사회당은 북에 대한 입장 차이 등을 이유로 합의 주체에서 빠졌다. 또한 국민참여당은 연석회의 논의 과정에 참여 의사를 밝혀왔지만 연석회의 내부에서 국민참여당이 먼저 지난 정부 시절에 대해 조직적 성찰과 반성을 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국민참여당의 참여 문제는 이후 과제로 미루어졌다.


3)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 실패

 2011619일 민주노동당이 정책당대회에서 ‘5.31최종합의문을 먼저 승인하였다. 진보신당은 327일 정기당대회에서 대북문제, 총선과 대선 방침, 당 운영방안 등의 진보대통합 기준을 결정하였는데, 이는 통합에 소극적인 내용이었다. 626일 진보신당은 대의원대회에서 327일 결정에 미흡하다면서 ‘5.31최종합의문승인을 유보하고 대신 조직진로에 대한 특별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국민참여당은 5.31합의문 논의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2011710일 중앙위원회에서 과거에 대한 조직적 반성과 성찰을 통해 '새통추'에 참여의사를 밝혔으며, ‘5.31최종합의문과 그 부속합의서1’를 승인하고 합의문에 동의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추진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때부터 정당들 사이에서 국민참여당의 진보대통합 참여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거세졌다.

715일 진보대통합 당사자들은 ‘5.31최종합의문을 재확인하고 7월 말까지 새로운 통합추진위원회(이하 '새통추')’를 구성하기로 했으나 국민참여당의 '새통추' 참여 문제와 당 운영과 관련된 세부방안(부속합의서 2)에 대한 이견 때문에 구성이 늦어졌다. 2011827새로운 통합진보정당추진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문(부속합의서 2)”이 채택되었다. 마지막 남은 쟁점인 국민참여당의 '새통추' 참여 문제에 대해서도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의 입장이었던 선 진보통합 후 국민참여당 논의를 전격 수용하였다.

다음날 828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가장 핵심 쟁점이었던 국민참여당의 참여 문제에 대해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은 국민참여당 참여 문제에 대하여 합의하기 위해 진지한 논의를 하되 합의가 되지 않더라도 '새통추'에 참가한 개인과 세력을 중심으로 925일 창당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8.28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잠정)합의문을 도출하였다.

진보신당은 94일 임시당대회에서 ‘5.31최종합의문‘8.28 합의문을 토론했으나 54%의 찬성에 그쳐서 부결되었다. 진보신당의 부결로 진보양당의 통합이라도 실현하고자 했던 민주노총의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2011923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통합안을 부결시킨 진보신당에 대한 한시적 지지를 철회하였다. 또한 이날 중앙집행위원회는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의 우선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으며 다만 5.31최종합의문에 근거하여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인지의 여부를 논의할 수 있으며, 그 판단의 주체는 5.31 합의와 8.27 합의에 따라 '새통추'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이 통합을 거부한 이후 925일 임시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허용하는 안건을 논의했으나 이 안건이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당내 반발과 민주노총의 반대로 2/3의결정족수에서 2% 부족하여 부결되었다. 이 당대회에서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반대 발언을 하는 동안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일부 간부들이 강하게 항의하는 등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심각한 내분 양상을 보였다.

107일 민주노동당 7차 수임기관 전체회의에서 1)진보대통합을 빠른 시일 안에 성사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2) 향후 진보대통합 방식, 시기 등에 대한 당원 의견수렴 및 관련 단위들과의 협의에 착수한다. 3) 위의 사항을 당대표와 최고위원회가 추진한다는 결정을 하고 당 내외 의견수렴에 들어갔다.

한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당 대 당 통합은 무산되었으나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진보신당 통합파들이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새진보통합연대를 구성한 후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113새진보통합연대‘1210일 이전에 모든 정당, 대중조직, 단체 개인 등의 참여를 광범위하게 열어놓고 진보대통합정당 창당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 국민참여당이 통합을 위한 협상에 나섰으며 이들은 1120일 통합진보정당 건설 추진을 선언하였다.

1123일 먼저 새진보통합연대에서 공동대표단-지역대표자회의 통해 통합 방안을 승인하고, 이어서 민주노동당이 1127일 임시당대회에서 통합 방안을 90.1%로 가결시켰고, 국민참여당 역시 124일 임시전국당원대회에서 통합 방안을 89.33%로 통과시켰다.

2011125일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 국민참여당이 수임기관 합동회의를 열고 당명을 통합진보당으로 정하고 이정희·유시민·심상정 공동대표 체제로 신설합당을 의결하였고 1211일 통합진보당 창당 선포식을 개최하였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 등 3자에 의한 통합진보당 창당은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가 2011923일에 결정한 새통추를 통한 통합이 아니었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3자 통합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결과 민주노총은 국민참여당을 진보대통합의 주체로 인정하는 민주적 절차를 거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새통추'를 통해 국민참여당 문제를 논의하지 못한 이유는 새통추에 국민참여당을 포함한 통합을 주장했던 진보통합시민회의의 상당수가 거대야당 건설 쪽으로 방향을 틀어 새통추 안에서 국민참여당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실익이 없었고, 더구나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총선을 겨냥한 신속한 논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민주노동당, 2012b).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총대의원대회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내용으로 하는 정치방침을 전국적으로 토론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민주노총은 20124월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사회당의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특히 통합진보당을 비례대표지지정당으로 선택하였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은 총선직후 지역구후보 선출 부정 논란, 후보단일화 특혜 논란, 비례대표후보 선출 부정 논란에 휩싸이면서 심각한 내분에 빠졌다. 패권주의와 이념논쟁이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과 마찬가지로 국민참여당 계열까지 가세하여 재연되었으며, 부정선거와 부실선거에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서로를 공격하면서 중앙위원회 폭력사태를 초래하였고 결국 분당되었다.

2012517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42명 중 32명의 찬성으로 구당권파가 강기갑 혁신비대위의 혁신안을 수용할 때까지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로 하는 '조건부 지지 철회'를 결정하였다. 이어 2012814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39명 중 27명의 찬성으로 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였다(민주노총, 2012a).

결국 민주노총이 최종적인 진보대통합 과정에 참가하지 못하였다는 점,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통합진보당에 결합하지 않아 반쪽짜리 진보대통합이 되었다는 점,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에 책임이 있는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민주노총이 애초에 의도하였던 노동중심의 진보대통합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만 국민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상층부 일부가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려고 했고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사실상 분당 이전까지 고수하였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으로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이 완전히 실패하였다고 볼 수 없다. 국민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반대한 것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자체보다는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 노동계를 배제한 통합절차 등에 반대한 것으로 판단된다. 노선의 문제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중앙파 인사들도 이후에 새로운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면서 국민참여당 계열이 주요세력인 정의당에 결합하였다.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통합함으로써 중도보수정당과 조직적으로 함께 할 수 없다는 민주노동당 당원과 민주노총 조합원의 심리적 저지선이 무너졌다. 민주노총 국민파에 속하였던 정치위원장들 중 다수는 민주노동당 시절에 의회진출을 도모하다 결국에는 2012년 대선 직전에 보수야당의 대선 캠프에 결합하였고 특히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민주노총 출신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문재인 민주당후보 캠프에 결합하였다.

결국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노동정치의 성공모델을 만들고 확산하여 국민들에게 노동정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이르지 못하였고 특히 민주노총은 결과적으로 민주노총 소속으로 당선된 최고위원이나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차원에서 노동정치의 상을 제시하고 실현하도록 강제하는 것에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