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좌파정당과 최상급노조의 관계 악화

1) 양자의 제도화와 그 진행 속도의 차이
 
유럽의 노동자정당은 대중적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결합으로서 시작하였다. 대중적 노동운동은 전국적인 최상급노조로 발전하고 노동자정당은 좌파정당으로 정착되었다. 최상급노조의 정치세력화 전략은 산별노조의 확립을 통해 노동운동의 전국센터로서 위상을 확립하고 의회에서 자신을 대변해 줄 정당을 건설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양날개론이었다. 양날개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거나 당과 노조가 강력한 연대를 형성하여 국가와 사용자를 압박하여 노동자에게 유리한 사회적 타협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양날개론은 의석확대를 통해 국가의 의사결정권을 분점하려는 의회주의로 귀결되었다. 의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정당을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 즉 민중정당으로 변화시켰으며, 이러한 민중정당은 집권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국민정당의 경향을 드러냈다. 결국 과거의 노동자 계급정당은 국민정당의 경향을 지속적으로 심화한 끝에 오늘날 선거에서 다양한 계급과 계층의 표를 획득하고자 하는 포괄정당 혹은 선거정당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국민정당 혹은 포괄정당들은 득표율을 빠르게 높이고자 자신의 창당정신에서 멀어져 갔으며 국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침투를 포기하였다. 양날개론에 근거한 유럽의 노동자정당은 처음부터 혁명적 선언과 개량적 실천이라는 모순을 지니고 있었으나 점차 강령과 행동 모두에서 계급성보다는 대중성을 강조하면서 2차 대전 이후 개량주의가 확연해졌다. 사회민주주의정당들은 사회주의를 의회민주주의를 통한 자본주의 개혁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선언과 실천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였다.
노동계급 정당의 사회민주주의의 딜레마는 복지국가나 부의 재분배 같은 사회민주주의 정책이 자본주의 시장을 확대하고 계급 간의 공존을 보장하기 때문에 노동계급 정당이 애초에 극복하려는 자본주의를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는데 있다.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초기의 사회주의 정당이 우경화를 거듭하여 사회민주주의정당, 국민정당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반체제세력의 제도화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회주의 반체제정당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제도화의 의지가 없거나 제도화에 실패하여 첫 번째 진입장벽을 통과하지 못하면 비제도 정당으로 남으며 두 번째 정착장벽에 막히면 제도권 정당으로 전환되지만 소수정당에 머물게 된다. 정착장벽을 통과하여 다수정당이 되면 계급정당의 딜레마에 부딪치게 된다. 계급정당의 딜레마를 극복하여 사회주의 이념을 유지하면서 권력을 장악해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사회주의정당 지지론자들이 희망하는 바이지만 실제로 이러한 사회주의 수권 정당이 사회주의정책을 도입하려고 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다수 유권자는 이러한 혼란을 비판하면서 다른 정당을 선택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정당은 선거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
민주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딜레마는 노동조합에게도 해당된다. 노동조합은 애초에 국가와 자본에 도전하는 혁명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합법화는 개별적인 노동조합에서 시작하여 산별노조를 거쳐 전국적인 최상급노조의 형태로 완성된다. 최상급노조의 단계에 이르면 노동조합은 비로소 총자본과 국가에 대면하게 되고 이들과 한편으로는 대결하면서 한편으로는 협상하면서 자신의 이해를 관철할 수 있는 사회적 타협을 추구한다. 노동조합이 국가-노동-자본 간의 협상 테이블에 참여하면 각종 개혁정책을 성사시키고 사회민주화를 진전시킬 가능성이 있지만 노동조합이 국가와 자본을 압박할 수 있는 실질적인 투쟁력이 없다면 이러한 노사정 타협은 오히려 지배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결과 조합 내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한편 노동조합운동은 초기에 사회주의 운동으로서 나타났지만 점차 노동조합의 관심사는 작업환경과 임금, 노동시장 등과 같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로 전환되었다. 또한 노동자정당과 총연맹의 입장에서 정당정치와 선거는 겉보기에 유권자 다수를 획득하려는 게임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스스로 이러한 게임에 결합하거나 자신을 대변해줄 정당을 모색하였다. 결국 최상급노조는 사회적 절충 혹은 의회주의를 수용함으로써 개량화되었다.
다만 노동자 계급정당이나 최상급노조의 개량화 정도와 속도가 일치하기 않기 때문에 양자의 전략적 결합은 출발점과 달리 느슨해 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 계급정당의 개량화는 국민정당화 경향에서 보듯이 탈노동자화의 수준까지 이르는 반면 최상급노조의 개량화는 최소한 총연맹 조합원의 이해관계에 제한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머물고자 하는 최상급노조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으려는 좌파정당의 공식적 결합관계는 이완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정당의 초기에는 당과 노조가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나 노동조합은 정당의 변혁적 정치활동에 종속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반면 노동자정당이 집권을 경험한 후 다수당으로 남기 위해 노동조합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한다. 이를테면 독일의 자유노동조합은 사민당이 대중파업 등을 결정하기 전에 노동조합과 사전에 협의해야 한다는 1906년 만하임(Mannheim)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당에 대한 노조의 자율성을 획득하였다. 프랑스 노동총동맹은 1906년 아미앙헌장을 통해 사회당과의 공식적인 협력관계를 거부하고 노동총동맹의 가맹자는 외부에서 표명했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노동조합의 내부로 갖고 들어 올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서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보장받았다(이태복, 1980: 18). 반면 영국 노동당은 노동조합대표자회의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나 1994년 토니블레어(Tony Blair) 당수의 신노동당(New Labour) 노선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노동조합대표자회의의 투표권을 50%로 축소하고 1894년부터 유지되어 온 노동조합의 블록투표제도(block voting)를 폐지하는 한편 집산주의(collectivism)를 버리고 신자유주의적 이념을 수용하면서 노동조합대표자회의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좌파정당은 민중정당화 단계에서 지지층을 확대하기 위해 노동자정당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고자 했으며, 국민정당화 단계에서는 내부적으로는 노동자의 지지를 지속적인 목표로 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아예 노동자정당의 이미지를 버리려고 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였다.
또한 국민국가의 생산체제와 고용구조의 변화가 노동계급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조건에서 국민국가가 세계화 편입되면서 해외자본의 유치를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자 국제자본의 요구에 순응하려는 국민국가의 정책적 재량은 협소해졌고 그에 따라 노동계급에게 일정한 양보를 보장하는 코포라티즘이 유지될 수 없었다. 이는 사회민주주의 프로젝트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세계화 체제 속에서 집권당의 정치적 선택이 제한받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들 집권당과 밀접한 최상급노조 역시 집권당을 통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데 있어 과거보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최상급노조는 노동자정당의 국민정당화 경향을 경계하면서 당과 협력적 관계를 여전히 유지하되 자신의 정치적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노동자정당의 집권은 최상급노조에게 정부와 총자본에 협력하고 임금통제 정책을 찬성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을 조성하였다. 노동조합은 집권한 사회민주주의정당의 계급타협적 정책에 직면하여 찬반으로 분열하였고, 이러한 분열은 조직약화를 초래해 노조의 목표 달성을 방해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 정당과 노동조합에 대한 냉소주의와 무관심이 증가하면서 정당과 노조 내에서 새로운 분열 조짐이 두드러지고 있다(Hyman, 2010: 35-37). 이러한 사민주의적 노동정치의 위기는 당과 노조의 소원화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계급정당의 국민정당화와 노조-정당의 상호독립 과정은 서유럽 국가들의 일반적 현상으로 제시할 수 있다(정병기, 1994).
이처럼 서유럽에서 대부분의 경우 양자는 공식적인 조직적 관계를 맺지 않고 사안별로 협력하는 정치적 관계로 전환되었다. 결국 좌파정당과 최상급노조의 조직적 관계가 해소된 것은 노동자 계급정당의 국민정당화 경향 속에서 최상급노조가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유지하려는 정치적 자율성의 획득과정이었다.
서구의 좌파정당과 최상급노조는 양자 모두 제도화의 과정에서 계급정당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제도화의 차이로 인해 양자의 관계가 이완되고 있다. 좌파정당과 최상급노조 양자 모두 제도화의 과정을 거치지만 그 속도와 수준의 간격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양자의 관계 이완은 양자 관계의 사회민주주의 유형의 역사적 귀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양자의 동맹전략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거나 실패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소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오늘날 유럽의 최상급노조가 과거 좌파정당과의 정치적 동맹에서 유래된 동질적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다. 최상급노조의 사회적 대화 참여와 특정 정당과의 정치적 파트너십은 갈수록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노동조합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 양자의 관계가 이완되는 이유
 
첫째 서유럽과 같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후기 자본주의사회에서 산업구조와 사회구조의 변화로 인해 노동의 위기, 노동자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노동조합과 좌파정당의 노동계급대표성이 도전받고 있다. 노동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그 상당 부분은 최상급노조가 조합으로 포괄하지 못해 최상급노조의 대표성과 노동운동센터로서의 위상이 약화되고 있다. 사회구조가 다원화되면서 소비자 문제, 환경문제, 소수자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대립이 부각되면서 노자대립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결정적 모순으로서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으며 따라서 과거와 같은 사회적 규정력을 지니지 못한다. 산업 전체에서 탈노동화, 자동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과거와 같은 집단적 노동을 요구하지 않는 새로운 산업이 부각하고 있으며, 기존의 노동집약적 산업은 발전한 자본주의국가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사회로 인해 노동자 자체도 고령화되고 있으며, 출산률의 저하로 인해 신규노동자의 진입도 부진하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당과 노동조합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되어 체제로의 포섭이 강화되고 있다. 노동조합의 조직율의 저하, 산별노동조합의 위기 등으로 노동조합의 대표성은 더 약화되고 있으며 프랑스의 경우 단체효력의 확장 제도를 통해 대표성을 보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밖에도 노동조합이 다양한 사회적 의제 운동에 결합하여 사회적 대표성을 획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둘째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된 구조 아래서 노동조합과 좌파정당이 제도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한 사회변혁이라는 공동목표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의 각종 노동조합 보호법의 도입은 노동조합의 사회적·법적 지위를 강화시키는 동시에 노동조합 활동을 국가제도의 틀로 끌어들임으로써 노동조합의 투쟁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독일에 있어 정당과 노동조합의 상호작용 관계는 비스마르크 모델에 있어 강력한 복지국가 지향의 실용적인 개혁주의 형성에 기여했으며, 또한 다른 급진적인 노선과도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노동조합은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유리한 정책을 관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민당의 집권을 선호하고 또한 지원해왔다.
유권자 분포에서 노동자의 숫자가 줄고 있으며, 과거와 반대로 청년은 줄고 노년이 늘면서 유권자의 탈이념화 보수화가 진행되고 있다. 고소득 노동자, 전문직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등 일부 노동자들도 동일한 계급적 정체성을 강하게 보이고 있지 않다. 이런 조건에서 좌파정당은 득표율을 제고를 위해 국민정당화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탈이념화 혹은 몰계급화하려고 한다. 노동자정당이 좌파정당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민중정당화, 국민정당화에 반대하였던 당 내 사회주의 변혁세력이 당의 제도화를 일정시기 동안 견제해왔으나 결국 그 세력이 약화되거나 이탈하였고 이로 인해 당 강령의 우경화 등을 저지할 당내 세력이 강력하지 못하였다.
셋째 최상급노조의 경우 좌파정당 보다 자본주의 체제 내로의 제도화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 양자의 제도화에 간격이 존재하지만 노동조합은 정당의 제도화 속도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좌파정당은 2차 대전 이후 케인즈적 총괄조정과 공공선을 지향하고 사회적 분배 정의에 적합한 강력한 국가개입을 선택하였다는 점에서 친근로자적 국민정당또는 좌파 국민정당노선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오일쇼크 이후 이들 정당들은 케인즈주의를 포기하고 탈노동계급적 정책을 강화하면서 노동자가 아닌 일반 유권자로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좌파정당의 우경화는 탈이념화, 탈계급화할 수 있지만 최상급노조는 조합원의 이해관계가 제도화의 마지노선이기 때문에 노자대립과 친노동자성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옌취(W. M. - Jentsch)의 주장대로 포드주의와 케인즈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후기 산업사회에 들어 당과 노조라는 조직이원주의는 해체된 후 사민당은 보다 우경화하고, 노조는 좌경화할 운명에 처해졌다. 다시 말해 메쎌켄(K. Messelken)의 지적대로 전통적으로 우파사민주의였던 독일 노동조합운동은 좌파사민주의로 돌변하였고 반면 사민당은 우파사민주의로 돌변하였다(송태수, 2006: 18, 재인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상급노조가 좌파정당을 조합원의 이해관계 혹은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도록 할 수 있는 대중적 규정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좌파정당이 집권한 이후 탈노동정책을 시도하자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대응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집권한 좌파정당만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태도를 회피하고 있으며, 특정 정당에 의해 노동정치의 대리주의를 극복하려는 입장에서 다른 정당과의 연대를 통해 독자적인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고 있다. 좌파정당이나 최상급노조 모두 제도화의 진행에 따라 과두제와 관료의 폐해가 심화되고 있으나 당원과 조합원들은 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당과 노조의 관로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당원과 조합원들의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견제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결과 당원들과 조합원들의 정치적 조직적 재정적 영향력은 약화되고 있으며, 이들 개인의 민주적 소양과 교육 및 문화 역시 쇠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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