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로코뮤니즘의 진보적 민주주의

1) 유로코뮤니즘 이전의 진보적 민주주의
첫째진보적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개혁론을 의미하였다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은 1897년 칼맑스와 사회개혁(Karl Marx and Social Reform)”에서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를 1840년대의 영국의 차티스트(Chartists)나 프랑스의 급진적인 사회개혁론자들(Radical Social Reformers)처럼 사회주의에 이르지 못했으나 시대에 앞선 개혁론자들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Bernstein, 1897). 레닌 역시 1916년 “The Junius Pamphlet”에서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를 1848년 유럽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당시 봉건통치와 왕정을 반대하는 개혁론자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Lenin, 1961).
둘째진보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가는 과도기적 정치체제를 지칭하였다윌리암 모리스(William Morris)는 1888년 “Equality”에서 아직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수용하지 않은 조건에서 사회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라고 대체해 표현하려는 태도를 비판하였다(Morris, 1888).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Ezra Mandel, Ernest Germain)은 1949년 마르크스주의와 민주주의(Marxism and Democracy)’에서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를 소련에 전략적인 완충지대(strategic buffer-zone)로서 동유럽의 위성국가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였고또한 이러한 위성국가에서 스탈린의 관료국가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국가기구를 폐지하지 않고 인민들에 대한 지배에 활용하는 정치노선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Mandel, 1949). 만델과 마찬가지로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를 스탈린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은 제4인터내셔널에 이어졌으며이러한 비판에 따르면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는 2차 대전 이전에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민전선이라는 계급연합으로 나타났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의회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서유럽 공산당의 수정주의로 나타났다(Frank 1979).

 2) 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스페인 공산당의 진보적 민주주의
(1) 진보적 민주주의 도입 배경
유로코뮤니즘(Eurocommunism)’은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에 영향 받았다.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비공개 연설을 통해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 미소평화공존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국가기구 활용 등 수정주의 노선을 주장하였다이후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유럽의 공산당들에게 소비에트 모델 대신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적 길'과 '국가적 길'을 모색할 것을 권고하였다(Boggs & Plotke, 1980: 8). ‘국가적 길은 서구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소련 공산당을 지지하는 동시에 의회제를 통한 평화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하도록 허용하였다(도널드 서순 2014, 527-528). 흐루시초프가 수정주의 노선을 발표한 직후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세계 공산당·노동자당 회의(International Meeting of Communist and Workers’ Parties)’는 모스크바 선언을 통해 민주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의회를 통한 점진적인 사회주의혁명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로 향하는 새로운 길에 대한 가능성을 채택했는데소련의 영향에 있던 유럽의 공산당들이 이러한 수정주의노선을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로 지칭하였다(Spencer 1979).
1969년 모스크바에서 다시 열린 세계 공산당·노동자당 회의는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활동하는 공산당들이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를 실현할 것을 강조하였다이 회의는 공산당과 노동자당은 심화되는 경제적 사회적 요구를 위한 투쟁진보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으며독점체와 그들의 경제적 지배와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성취될 급진적인 민주주의적 변화(radical democratic change)는 대중들의 사회주의적 필요성을 자각하도록 촉진시킬 것이라고 선언하였다(Zagladin 1973, 138-139).
유로코뮤니즘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스페인의 공산당에 의해 주도되었다나머지 공산당들은 내분에 빠졌거나 선거에서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거와 의회를 활용하고자 하는 유로코뮤니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으며유로코뮤니즘 안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 직후 1956년 이탈리아공산당은 제8차 당대회를 열고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 공산당 서기장의 제안에 따라 사회주의로 가는 이탈리아 경로(Italian path to socialism)’를 채택하였다.
이 노선은 사회민주주의와 경제민주화를 심화시키면 이러한 민주주의 축적이 결국은 사회주의로 전이 될 것이라는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 혹은 반독점민주주의(antimonopolist democracy)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이는 1951년 영국 공산당 당대회가 채택한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 경로(British path to socialism)’와 유사하였다(Turrero 2014).
이탈리아공산당이 채택한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은 공산당이 전위정당이 아니라 다양한 세력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대중정당을 지향하면서 폭넓은 반자본주의 연합을 통해 점진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해간다는 것이며이탈리아공산당이 이러한 노선을 선언한 이유는 서구에서 자본주의 사회와 부르주아 국가의 위기가 장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러시아혁명과 같은 신속한 기동전을 환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정병기 2013).
스페인공산당 역시 진보적 민주주의를 수용하였는데에르네스트 만델은 1974년 스페인의 내일(Morrow on Spain)’에서 프랑코의 군사독재 아래에 있는 스페인공산당이 의회민주주의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 사회주의라는 단계적 혁명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Mandel 1974).
1968년 프랑스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를 위하여사회주의 프랑스를 위하여'라는 '샹피니강령(champigny manifesto)'을 채택하였고 1971년 19차 당대회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이행기로 규정하였다(Adereth 1984, 200).
프랑스공산당은 1976년 22차 당 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식적으로 폐기하였고 1979년 23차 당대회에서 상층의 통일전선과 하층의 통일전선을 강조하고 선거에 의해 점진적으로 달성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재확인하였다(Adereth 1984, 247). 프랑스공산당에 따르면 진보적 민주주의는 선거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공산당이 대중들을 조직화하고 이들 대중들이 행동에 나설 때 가능하다.
프랑스공산당은 러시아 볼셰비키가 차르 체제를 폭력으로 전복한 뒤에 기존의 모든 법들을 폐기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과 달리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이행기 체제인 진보적 민주주의에서 도입된 진보적인(progressive) 법률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 이유는 유럽혁명에서는 러시아와 달리 기존의 의회를 활용한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경로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Adereth 1984, 209).
(2) 유로코뮤니즘과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
유로코뮤니즘은 시민계급의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레닌의 주장을 진보적 민주주의를 통해 재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레닌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하려면 평화적 방법이나 무력의 방법합법이나 불법의 방법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하고다만 사회주의정당이 정세의 필요에 따라 이러한 전략적 수정을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특히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적 길은 사회주의 세력이 궁극적으로 혁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과도적으로 부르주아국가기구를 활용하는 것이다소련공산당과 프랑스공산당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기를 비교적 길게 보았으며이 이행기에서 독점자본주의의 정치체제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을 당면한 목적으로 삼았다(Stiefbold, 1977: 64-65).
이러한 전략은 스탈린이 지도하는 코민테른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회의 이래 소련과 유럽의 공산당은 점진적인 혁명을 추구하거나 의회를 활용하는 합법주의 전략을 채택하였으며 여러 민주주의 정당들과 인민전선을 통해 연대하는 것을 자신들의 전략으로 수용하였다(Terzi. 1980: 129-132).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 산티아고 카리요 (Santiago Carrillo)에 따르면 유로코뮤니즘은 다당제에 근거한 의회주의와 대의제를 수용하여 선거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자발적인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조직하고 결합하여 광범위한 인민들의 참여와 대중운동을 통해 사회주의로 점진적으로 또한 평화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유로코뮤니즘은 그러한 과정에서 사회주의 모델의 다원성에 근거하여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독재 및 공산당독재 등 현실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좌파연대뿐만 아니라 진보적 부르주아정당과의 민주적 연대를 통해 다양한 연립정치를 시도하였다(Carrillo, 1977).
유로코뮤니즘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선거와 의회 및 지방자치헌법상 기본권과 민주적 제도 등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활용하여 노동자와 시민들의 힘으로 구조개혁을 통해 독점자본주의 국가를 일하는 사람들의 국가로 전환하고민주적인 중간층과 연대하여 선거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Boggs & Plotke, 1980: 441-443).
유로코뮤니즘의 주장은 의회와 선거에 대한 참여를 인정하면서도 노동자와 시민들의 자발적인 대중투쟁을 강조하는 한편 파쇼정부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그람시의 시민사회의 헤게모니 장악을 통한 국가기구로의 침습이라는 진지전 논리와 유사하다다만 유로코뮤니즘은 의회주의를 더욱 강조한 것이다크리스 하먼 역시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의 길과 같은 유로코뮤니즘의 내용은 옥중수고 등 그람시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Harman. 1977).
유로코뮤니즘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단절되지 않고 연속적이라는 레닌의 주장에 근거하여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평가하였다유로코뮤니즘은 이러한 입장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경로(democratic roads)'를 강조하였으며그러한 경로에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State of advanced democracy)‘를 실현하고자 하였다이들이 주장에 따르면 부르주아민주주의와 형식적 자유는 지배계급이 아니라 인민들에 의해 더 발전될 수 있으며인민들의 투쟁에 의한 민주적 권리와 자유그리고 각종 제도의 민주화는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보장하여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용이하게 만든다(Weber 1978, 100).
유럽 공산당들은 개량은 착취를 철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점을 제한하고 노동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을 향상시키며반동세력을 고립시켜 진보세력의 통합을 촉진시킬 것이며그 결과 사회주의의 실현을 가속화시킬 것이라고 보았다프랑스와 스페인 및 이탈리아 공산당들은 이러한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에 따라 즉각적인 사회주의 실현이 아니라 국가재정의 개혁금융산업과 보험산업의 국유화독점기업의 사회화경작자에 대한 농지분배행정과 공공산업에 대한 민주적 통제 등 독점자본주의 국가를 약화시켜 사회주의 실현을 용이하게 하는 구조적 개혁을 주장하였다(Boggs & Plotke, 1980: 85).
하지만 유로코뮤니즘은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에서 개혁의 양적 축적이 혁명이라는 질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회민주주의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의회와 같은 국가기구를 개혁하여 사회주의 혁명 달성에 활용하고자 하였던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의 수정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다실제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및 스페인의 공산당 서기장들은 1977년 마드리드에서 유로코뮤니즘 정상회의를 개최하였는데이들은 여기서 부르주아정치가 구현한 헌법적 기본권과 민주주의 및 자유의 틀 안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하였다(Devlin. 1979). 따라서 스탈린주의를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를 부르주아국가 활용론과 선거혁명그리고 의회주의를 수용하는 스탈린식 수정주의를 비난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The October League 1975).
이러한 유로코뮤니즘을 수용한 공산당들은 점차 다양한 계급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화되었으며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경향은 독일 나치의 침략에 맞서 소련과 연합했던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 등 민주적인 제국주의 국가를 지지하고자 했던 2차 대전의 반파시즘에서 유래되었으며반파시즘은 1935년 제7차 코민테른회의의 인민전선노선에서부터 시작하였다(Mandel,1979).
반면 유로코뮤니스트들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전환시키려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개선하여 유지하려는 사회민주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한다유로코뮤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정당을 대중 투쟁하는 정당이자선거를 통해 진보적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고자하는 정당이라고 규정한다유로코뮤니즘에 따르면 독점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착취하는 자본가와 착취당하는 노동자라는 낡은 대립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조직된 독점자본주의 세력과 대중들의 대립이 새로이 형성된다따라서 노동계급의 단결과 모든 자본가 계급에 대한 투쟁 대신 소부르주아나 민주적 부르주아들과의 계급연합이 강조된다(Wood. 1983: 245).
이처럼 이들은 부르주아의 합법적인 틀 안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사회주의 실현의 조건들을 구축하려고 하였다결론적으로 유로코뮤니즘은 그람시 유산의 승리베른슈타인의 사회민주주의로의 배반스탈린주의의 위장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서로 상반될 수 있는 내용들이 뒤섞여 있었다(Piccone. 1981: 722).
(3) 유로코뮤니스트들과 소련의 관계
이탈리아와 스페인 및 프랑스의 유로코뮤니스트들은 미소 간의 긴장완화를 유럽 공산주의의 변화의 기회로 삼았다유로코뮤니즘은 미소 양극지배체제에서 유럽 공산당의 역할을 강조하는 독자노선을 채택하고자 하였다하지만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등 3개 공산당들은 유로코뮤니즘에 대해 서로 다른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유럽의 공산당을 점진적으로 개혁하여 그 역할을 높이는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고자 하였다이탈리아공산당은 정치적 다원주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과도적으로 용인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필요하다고 보았다이탈리아공산당은 대서양의 유럽 국가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와 같은 군사동맹을 맺는 것도 순수한 방어목적이라면 미소 양극 지배 질서에서 유럽의 균형자로서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점차 용인하게 되었다이탈리아공산당은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EEC) 역시 유럽 전체를 점차 민주적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의 일환으로서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Terzi. 1980:135).
프랑스공산당은 이탈리아공산당과 달리 유로코뮤니즘을 사회민주당과의 연대 등 국내문제에만 국한하고 국제문제에서는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였다스페인공산당은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인 서유럽과 동유럽을 포괄하는 전체 유럽공산당들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국제문제에 있어 이탈리아공산당만 소련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유럽의 공산당들의 일반적 입장으로 형성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이탈리아공산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기치로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동유럽의 공산당과 연대를 강화하여 소련에 다소 비판적인 이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특히 베를링게르(Berlinguer) 서기장은 유럽에 대한 소비에트의 지배를 완화시키고 동유럽의 개혁을 확대하여 유럽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을 만들고자 하였다이탈리아공산당은 유럽경제공동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한 유럽공산당들의 부정적 입장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양극지배체제를 유지하고자 유로코뮤니스트들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였다소련은 동유럽의 공산당들이 유로코뮤니스트들과 연결되어 소련 블록이 이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또한 1978년 미국은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게 유로코뮤니스트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Pons. 2010: 48-52).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 산티아고 카리요 (Santiago Carrillo)가 유로코뮤니즘과 국가에서 밝혔듯이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은 유로코뮤니즘이 소련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입장을 갖도록 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극대화되었다.
베를링게르 이탈리아공산당 서기장은 1978년 소련공산당의 수슬로프(Suslov)를 만나 국제 공산당에서 의견의 다원성과 정치적 자유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소련은 공산당과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주장하면서 이를 일축하였다.
결국 이탈리아공산당의 희망과 달리 유럽공산당들 대부분은 소련의 입장을 추종하여 유럽경제공동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발족에 강경하게 반대하였다이제 유럽의 공산당들은 이탈리아공산당의 입장에 대해 의견이 나누어졌으며 유럽 공산당의 일부는 이탈리아공산당의 모습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비판하였다(Pons. 2010: 47-52).
한편 포르투갈에서 살라자르 정권이 40년 이상 독재를 하면서 모잠비크앙골라 등 식민지의 민족해방전선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하였고이로 인해 포르투갈의 경제는 날로 피폐해졌는데이에 반발한 좌익장교들이 1974년 4월 25일 살라자르 정권을 무혈혁명으로 타도한 카네이션 혁명(carnation revolution)’이 발발하였다이 혁명 이후 좌익 진영 내에서 사민주의 세력의 혁명정부 참여를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 갈등이 발생하였다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공산당들은 알바루 쿠냘(Alvaro Cunhal)에 의해 지도되었던 포르투갈 공산당의 처신을 동유럽의 인민전선과 같다고 비판하면서 혁명정부 구성에 있어 사회민주주의 계열을 제외하고 공산당 정부를 구성할 것을 주장하였다하지만 프랑스공산당은 공산당만으로만 구성되는 정부는 미국이 조종하는 칠레 식 우익군부쿠데타를 유발할 수 있다는 소련의 입장을 추종하여 포르투갈공산당의 입장을 지지하였다이 문제를 조율하기 위해 조르쥬 마르세Georges Marchais)와 베를링게르 등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들이 만났으나 결국 입장차이만 확인하였다.
한편 1977년 유로코뮤니스트들의 마드리드 회동 이후 서유럽 공산당들이 선거에서 순차적으로 패배하여 집권의 가능성이 멀어지고 미소 간의 긴장완화즉 데땅트가 종식되자 유로코뮤니즘의 토대가 와해되었다프랑스 공산당은 선거에 패배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의 연립정부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고 공산주의 독자노선으로 회귀하였다스페인공산당은 총선에서 사회당에 비해 열세로 전락하였고 내분에 휩싸였다이탈리아공산당은 여전히 연립정부에 참가하였으나 실질적인 이익을 얻지 못하고 책임만 지는 꼴이 되었다그런데 1978년 극좌 무장 세력인 붉은 여단이 공산당과의 연립정부에 호의적이었던 기독교민주당의 아들로 모로(Aldo Moro) 대통령을 납치해 살해하자공산당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그 결과 이탈리아공산당은 1979년 선거에서 패배하고 더 이상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연립정부에 가담하기 어려워졌다이처럼 유럽의 공산당들이 선거에서 연이어 참패하여 연립정부의 참여가 불가능해지자의회와 국가를 활용한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 실현에 우호적인 조건을 만들겠다는 유로코뮤니즘의 진보적 민주주의 역시 퇴조하였다.
서유럽의 공산당들은 미소 간의 긴장완화와 미소공존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달성할 수 없었다더구나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소 간 긴장완화는 종식되었고 미소 간에서 균형을 취하려던 유로코뮤니즘은 자체 분열로 인해 더욱 퇴색되었다프랑스공산당은 소련의 침공을 두둔하였고 스페인 공산당은 분열되었지만 역시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였다이탈리아의 베를링게르가 1984년에 죽자유로코뮤니즘은 종말을 고하였고 다만 훗날 고르바조프(Mikhail Gorbachev)에게 영향을 미쳤다(Pons. 2010: 5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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