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위정당과 대중정당

살핀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정치투쟁과 정당이 필요하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떻게 반작용을 극복하고 계급의식을 형성하여 당을 건설하는 길로 나아가는가?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가 선진인사들이 먼저 정당을 결성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하는가, 혹은 자본주의모순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가 대자적 존재가 돼 당을 자발적으로 만드는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 논란이 되고 있다.

마르크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정당의 역할을 소극적으로 평가하였다. 블랑키 경향, 그리고 바쿠닌의 무정부주의에 따르면 봉기는 조직된 당의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되고 대중 자체로부터 터져 나와야 하였다. 대중은 명령을 받음이 없이, 스스로 자신의 사슬을 부셔버리고 이윽고는 자본가와 군주의 낡은 중앙집권적 국가 대신에 소규모의 자유로운 협동체를 세워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 무정부주의에 따르면 혁명이 성공한다면 어떠한 형태이든 조직이 필요해지기 때문에 이 이론은 내적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정부주의자들도 정당 그 자체의 필요성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못하였다.
마르크스는 당을 우연한 결사가 아니라 모든 나라의 혁명투사의 위대한 공동체로 이해하였으며, 또한 당을 적극적이고도 지속적인 선전을 통하여 의식화된 군대로서 이해하였다.(아르투어 로젠베르크, 1990) 또한 존 몰리뉴에 따르면 노동자의 의식은 종종 모순되는 많은 요소의 복합물이기 때문에 물질적 필요성, 투쟁에의 직접참여, 정치적 상황의 극적인 변화 등과 같은 조건하에서는 매우 빨리 급진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혁명적 상황에 대비하여 당은 혁명적 상황 이전부터 계급을 어느 정도 앞설 필요가 있다.(존 몰리뉴, 1986)
마르크스는 선진적인 인자, 즉 공산주의자에 의한 적극적인 정당건설과 정치투쟁을 인정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위한 계급투쟁의 실천이라는 기초 위에서 얻어지는 지도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속에서 운동의 전체적인 목표를 세운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국제노동자협회창립선언은 노동자 대중이 정치조직에 망라되고, 지식에 의하여 지도되는 때에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주적인 정치조직과 비밀노동자당과 공개적인 노동자당을 창조하게끔 이끌어져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전제로 하여 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코뮌이 혁명에 실패한 원인을 민중을 이끌어 나갈 혁명적인 노동자정당이 없었다는 점에서 찾았다. 물론 그 당시 인터내셔날은 파리에 지부가 있었지만 주로 푸르동주의자들이어서 대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블랑키는 체포당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소수의 선진인사들로만 구성된 전위정당을 정당의 일반 형태로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 국제노동자협회, 독일사회민주당 등 노동계급과 정당의 발전에 따라 정당을 협소한 전위정당보다는 노동자대중정당으로 발전적으로 파악하였다. 독일사회민주당의 사례에서 보듯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말년에 이르러 공산주의자 대중정당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발전된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는 사회주의 이론이 공산주의자동맹처럼 소수의 선진노동자에게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거대하고 증가하는 부분에서 수용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63년 라살레에 의해 설립된 독일노동자총동맹(Allgemeiner Deutscher Arbeiterverein: ADAV)을 노동자당으로 보기보다는 노동자들의 한 분파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18698, 아이제나흐에서 열린 독일노동자총동맹 대회에서 마르크스파의 리프크네히트, 베벨 등에 의해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이 결성되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이 해체된 이후 최초로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나왔다고 보고 이 당을 '우리의 당'이라고 표현하였다.(몬티 존스톤, 1967)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은 18755월 고타에서 열린 합동대회에서 독일노동자총동맹과 통합되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이 되었다. 합동대회는 임금철칙 등 라살레주의적 색채가 짙은 고타 강령을 채택했으며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을 통해 당 강령의 라살레주의적 색채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양당의 합당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라살레파에 대한 양보를 비판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에 결합하였으며, 이 당을 우리의 당’(our party)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엥겔스는 말년에 이 합당에 의해 당의 힘이 강력해졌다고 평가하였다. 마르크스 입장에서 자신의 혁명적인 강령을 수용하는 노동자대중의 사회주의정당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또한 그러한 정당은 소수의 뛰어난 음모가들만의 비합법적인 비밀정당일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은 사회주의자진압법이 폐지되는 1890년 독일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개정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를 당 강령으로 수용하였다. 그 당시 독일사회민주당은 이미 합법적이며 대중적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레닌(Vladimir Il'Ich Lenin)의 전위정당론은 짜르의 압제와 혁명의 미성숙이라는 배경에서 출현하였다. 레닌에 의하면 이상주의자만이 전제주의하에서 광범한 노동자조직을 가지고 싶어 한다. 레닌에 따르면 러시아 전제주의의 탄압을 효율적으로 극복하려면 직업혁명가로 구성된 전위당이 대중적 계급운동을 지도해야 한다. 또한 당과 계급의 구별은 러시아의 특수성이 아니라 자본주의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 상황으로 볼 수 있다. 레닌은 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당은 계급과 밀접하게 결합되면서도 무엇보다도 전체 계급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레닌에 의하면 러시아와 같은 폭압적 정치상황에서 철통같은 규율과 혁명이론으로 무장된 직업혁명가들로 구성된 투쟁적 전위정당만이 짜르의 비밀경찰과 맞서 전민중적 해방이라는 과제를 성취할 수 있다. 또한 탄압을 극복하기 위해 합법과 비합법을 적절히 혼합해야만 하였다.
레닌에 따르면 당의 핵심이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노동자계급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계급으로부터 적극적인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진다. 따라서 짜르 치하에서 조직의 규모와 보안의 문제는 효율성 및 엄격한 규율의 필요성과 불가분하게 연계되었으며, 그에 근거하여 직업적 혁명가의 개념이 고안되었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전제국가하에서 혁명가 조직의 가입자격을 직업적으로 혁명활동에 참가하는 사람, 정치경찰과의 투쟁에서 직업적으로 훈련된 사람들로 제한하면 혁명가 조직이 노출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런 점에서 직업적 혁명가들의 견고한 핵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의 자생적 의식들이 가진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노동조합적 정치활동과 사회민주주의적 정치활동을 구분하였다. 나아가 레닌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정치적 폭로와 이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화에 초점을 두었다.
레닌에 의하면 당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외부성으로 존재한다. 또한 당은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의식을 창출하고 자율적인 대중자치권력인 코뮌을 생산하는 형식일 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부르주아 정당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자본에 외부적이면서 제도에 외부적인 형식 그 자체이다. 당은 부르주아혁명 전이나 후에도 여전히 제도 밖에서 대중권력을 창안하는 정치조직이자 대중을 정치화하는 형식이다. 형식을 채우는 대중의 자생성, 조직의 민주적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당은 대중의 무의식적 혁명성을 담는 그릇이며 대중의 자발성은 당의 형식을 채우는 내용일 뿐이다. 직접민주주의 체계는 이 내용을 소통시키며 당을 대중의 혁명성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혈관이다. 내용은 노동운동의 자생성에서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는 레닌이 말하는 외부로부터의 도입을 내용으로 동일시하고 중앙집권적인 엘리트정당의 지도성으로 오인하였다.(박영균, 2008)
레닌의 당이론은 혁명적 실천과정에서 결정론과 주의설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종합한 구체적인 표현이며, 그것이 시기마다 달리 표현된 것이다. 레닌의 전위정당론은 러시아의 폭압정치를 고려한 전술적인 선택이지 정세를 초월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정당은 기본적으로 선진적인 노동자의 독립적 조직이며, 노동자의 이해에 영향을 주는 모든 투쟁에 실천적인 지도를 제공하지만 어떤 시기 동안에는 고립된 소수자의 위치를 기꺼이 수용한다. 따라서 레닌이 전위정당을 강조했지만 사회주의 운동이 진전됨에 따라 직업적 활동가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노동자의 입당도 주장하였다. 다만 존 몰리뉴에 의하면 혁명기에 당의 개방적 팽창은 그 이전에 전위정당론에 기초하여 당을 확고하게 준비해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볼세비키와 멘세비키는 당원의 범위와 관련하여 대립하였다.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사상으로 무장한 전위들과 적극적인 프롤레타리아트를 당의 구성원으로 보았다. 레닌은 당원이란 당 강령을 수용하고 당에 협력하는 것 이상으로 물질적 수단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당의 조직에 스스로 적극 참여함으로써 당을 지지하는 자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마르토프는 당에 대한 협력과 당의 임무수행을 당원의 자격으로 주장하였다. 레닌은 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당원을 지식인, 혁명적 활동가와 같이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로 제한하면 당원 중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율이 낮아질 것을 우려하였다.
1905년 부르주아혁명의 시기에 있어 직업적 혁명가가 타성에 젖은 반면 각급 위원회에 노동자 당원이 별로 없어 노동자당원의 충원이 요구되었다. 레닌은 지금 수천 개의 서클들이 우리의 도움 없이 도처에서 궐기하고 있다고 밝히고 명백히 사회민주주의가 아닌 것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서클들을 당에 직접 가입시키거나 당과 연합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레닌은 그들이 국제적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대의에 반발하든 공감을 하든 사회민주주의자가 그들 사이에서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기만 하면 조직적 연계를 맺을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노동자대중의 투쟁이 확산되자 레닌은 과거의 전위정당론을 완화하여 엘리트주의적 요소를 일부 수정하였다. 레닌은 1905년 볼세비키 3차 대회에서 노동자들은 계급본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치적 경험이 거의 없어도 매우 빨리 굳건한 사회민주주의자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전위라는 역할로 자부하는 것 따위는 터무니없는 일로서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05년 혁명이 실패한 후 볼세비키 조직들이 궤멸되다시피 하고 짜르의 폭정이 복원되자 레닌은 다시 전위정당을 강조하면서 당 조직과 이념의 사수에 전념하였다. 레닌에 의하면 당은 공격조직일 뿐 아니라 질서정연한 후퇴를 위한 조직이다. 따라서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을 그 조직상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완수하여 모든 비혁명적인 요소와 결별해야한다.(존 몰리뉴, 1986) 하지만 1917년 혁명에 즈음하여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짜르의 압제를 극복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자,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전위정당에서 대중적인 정당으로 성장하였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19178월에 전위정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20만명의 당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레닌의 전위정당론은 짜르 시기 폭압과 이를 돌파할 사회주의세력의 힘이 부족했다는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서유럽과 같이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보장된 곳에서까지 일반화시킬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룩셈부르크는 당시 러시아는 절대군주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하에서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정치적 교육과 조직의 이점을 갖지 못하였다고 진단하였다. 따라서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서 일부 선진적인 분자들에 의한 전위정당이 일정부분 불가피한 점을 인정하고 레닌이 왜 중앙집권적인 전위정당에 치중했는지 수긍하였다.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전위정당을 지나치게 절대화하면 노동자계급 자체의 순조로운 발전과 창의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운동의 거대한 전진은 지도자들이나 중앙위원회에 의해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격동하는 운동의 자연발생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의 전위정당론을 과도집중제라고 비판하였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험, 그리고 그 이후 서유럽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변천을 볼 때 합법적 대중정당이냐, 혹은 비합법적 전위정당이냐의 문제는 지배계급의 탄압정도와 같은 각국의 정치적 상황과 당의 주체역량의 준비정도에 따라 선택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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