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진보적 민주주의 역사와 폭력혁명론

진보적 민주주의는 공산계열을 포함하여 다양한 정치세력에 의해 채택되었지만 정부의 주장과 달리 폭력혁명노선으로 제기된 적은 없다.
첫째정부는 해방공간에서 진보적 민주주의가 공산주의계열에서만 사용한 건국이념이라고 하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는 해방 전후로 우리나라에서 이념에 상관없이 일상적으로 쓰인 단어이다모든 정치세력이 민주주의를 내걸고이 앞에 진보적’ 또는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는 점에서해방정국의 민주주의론은 진보적 민주주의론’, ‘새로운 민주주의론으로 귀결되며다시 말하면 국가건설의 정체는 민주주의이의 성격은 진보적 민주주의’,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용어상의 공통점을 갖는다즉 해방 이후 진정한 민주주의새로운 민주주의진보적 민주주의는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었다(김인식, 2008:10.13.15).
이를테면 1946년 1월 9일자 동아일보, 1988년 8월 14일 한겨레신문에 의하면 해방 직후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해방공간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어떤 특정세력의 민주주의가 아니었으며반봉건반파쇼정치적 기본권보장 등을 공통적인 내용으로 하였다다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공통적이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자본주의를 수용하되 그 폐해를 개선하자는 입장과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사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누어졌다.

해방직후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은 2차 대전 직후의 국제정세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판단하였다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직후 독일과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이 소멸된 조건에서 미소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표 주자로서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절충적인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를 주장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미국소련영국프랑스를 봉건제와 전체주의를 청산한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보았다이들은 미소가 남북을 점령한 상태에서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은 미소의 협력 없이 불가능하다고 인식하였다이러한 시대인식에 근거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자이든 자본주의자이든혹은 미국이든 소련이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통일국가의 건국노선으로서 폭넓게 제기되었다(법무부, 2014:67).
김규식여운형 등이 주도한 신한청년당이 1920년 간행한 신한청년은 31운동에 대하여 진보적 민주주의의 격랑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자유와 행복을 위해 총궐기하게 만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이해창 1983). 중도주의자인 안재홍은 자신이 제창한 신민족주의신민주주의가 진보적 민주주의임을 자부하면서 공산주의자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비판하였다(김인식, 2008, 10-15).
또한 김구는 1942년 12월 29일 태평양전쟁 발발 1주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에서 “3 · 1운동 이후 우리는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 이상을 가지고 혁명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했으며 그것이 현재의 중경임시정부이다라고 밝혔다(백범학술원 2005, 160), 독립기념관 원문정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 45(36차 임시의회 선언 기사)에 의하면 1944년 4월 2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은 성명서를 통해 임시헌법인 임시헌장의 원리가 진보적 민주주의임을 밝히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 2009, 372).
둘째정부는 진보적 민주주의는 한국에서 인민민주주의 이론이 체계화되기 전의 용어로서 인민민주주의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주장하거나 해방직후 사회주의혁명을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포장해 부르기도 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정부의 주장은 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부르주아민주주의진보적 민주주의를 구분하였던 해방직후의 역사인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해방정국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다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즉 인민민주주의와도 다른 노선으로 인식되었다이를테면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라는 단체가 서울의 사회단체 인사 195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희망하는 정부형태설문조사에 따르면 민주주의 28%, 입헌군주제 21%, 진보적민주주의 16%,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15%, 사회주의 9%, 신민주주의 7%, 기권 2% 등으로 나타났다(정병준 2005, 267-270).
셋째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채택했을 때도 정부 주장과 달리 그 내용에 폭력혁명 주장은 없었다여운형박헌영김일성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는 미소의 지원 아래 인민정부에 의해 혁명적 방식이 아닌 평화합법적 방식으로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자주적 민주적 통일국가를 의미하였다다만 부르주아민주주의의 내용과 인민정부의 주체는 각자의 정치노선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특히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조차 폭력혁명전략으로 볼 수 없다정부가 제출한 이완범의 2008년 논문이 지적하듯이북한은 단독정부 수립 이후 진보적 민주주의의 성격을 부르주아민주주의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으로다시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수정하였다면 이는 해방 직후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무관한 것이다.
조선공산당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자본민주주의)를 의미하였으며부르주아민주주의는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한다진보적 민주주의국가란 조선의 봉건체제와 일본의 전체주의를 극복한 부르주아민주주의국가(시민민주주의국가)이다즉 진보적 민주주의의 국가의 본질은 부르주아국가 즉 시민국가로서 민주주의 권리의 보장봉건잔재의 청산자본주의 폐해의 극복다양한 계급계층의 연대를 통한 자주적인 통일국가의 형성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이러한 입장은 소련의 지령과 동일하였다스탈린과 박헌영은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를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하였다소련의 영향권에 있었던 이북의 조선공산당 역시 미국을 민주적인 제국주의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하였다(오문환, 2006:224-227, 이완범, 2008:17-21).
그것(조국의 해방)은 우리 民族의 主觀的 鬪爭的인 힘에 의해서보다도 進步的 民主主義國家 蘇中 등 聯合國勢力에 의하여 實現된 것입니다.
소련이 조선공산당에게 통일국가를 부르주아국가로 건설하라고 지령한 것은 미국의 동의를 얻는 한편사회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단계를 먼저 거쳐야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즉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거친 나라는 서유럽처럼 자유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할 수 있거나 소련처럼 사회주의로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소련 모두 부르주아민주주의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부르주아민주주의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입장에서 이념의 자유경쟁을 보장하는 개방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 해방 직후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라고 주장하나(법무부, 2014: 69,106) 사실은 부르주아민주주의이다프랑스영국독일러시아 등 역사적으로 부르주아민주주의는 보통 봉건제도를 폭력으로 전복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의한다하지만 해방 직후 부르주아민주주의는 타도대상인 봉건제도와 일본제국주의가 이미 소멸하였고지배세력은 소련군과 미군이었다그런데 공산계열조차 진보적 민주주의는 소련군과 미군의 지배를 타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동의와 지원을 얻는 합법적 평화적 방식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따라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혁명적 방식에 의해 부르주아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므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아니라 단순한 부르주아민주주의로서 혁명적 성격보다는 대안국가 혹은 대안정책적 성격을 지닌다.
넷째 정부는 남한의 NL들이 1990년대 정립된 북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종한 결과 북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지금까지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 계승되어왔다고 주장하나 남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과 상관없이 그전부터 회자되어왔고, 1987년 민주화 이후 운동노선으로 정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부에 따르면 1990년 12월 27일 김정일이 우리식 사회주의는 김일성의 1945년 진보적 민주주의를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고 연설한 이후 북한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단계적인 사회주의혁명론으로 정립하고 북한의 매체를 통해 남에 전파하였다하지만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민주정부 등 그와 관련된 핵심 내용이 이미 위에서 본 것처럼 1980년대부터 남한의 진보정당과 진보진영에 의해 본격적으로 주장되어왔기 때문에 1990년 이후 북한으로부터 전파되었다는 것은 사실관계에 맞지 않는다.
남북이 각각 정부를 출범시킴으로써 분단이 고착화되자 미소화해노선에 근거한 통일국가 건국노선인 진보적 민주주의는 남북의 지배세력에 의해 외면당하였다그 결과 남에서는 미군정의 통치 아래 이승만의 반공 자유주의 정권이 들어서고북에서는 소련의 후원에 의해 김일성의 공산 인민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다하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여 이념대결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하자는 주장이 사라지지 않았다. 1956년 납북인사들이 조소앙안재홍을 중심으로 하는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을 구성하고 김일성의 인민민주주의 단독정권을 비판하면서 통일국가의 건국노선으로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제시하였다(경향신문』 91/10/05,4).
남한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조선공산당의 건국노선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수면 아래로 잠잠해졌으나진보적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내용은 1950년대의 조봉암의 진보당에 이어져왔다조봉암 선생이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 위원장을 맡을 때 부위원장으로 함께 일했던 신태범 외과의사가 1991년 MBC TV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은 조봉암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나아가 4.19혁명, 87년 민주화운동과 같은 격변기 때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냉전과 분단을 극복한 통일국가 건국노선으로서군사독재를 극복한 진정한 민주주의 노선으로서 진보적 학계와 진보정치 세력에 의해 꾸준하게 제기되어왔다.
해방직후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진보적이라는 단어는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김인식. 2008:267). 1960년 4.19 직후 신민당은 진보적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창당하였다동아일보』 1956년 2월 27일 기사에 의하면 1948년 최재희 교수는 발전적 자유주의의 사상체계라는 저서를 통해 진보적 민주주의를 언급하였다경향신문은 1968년 5월 18일 유럽의 민주화시위 사태를 보도하면서 스페인의 민주화세력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목표로 내걸었다고 밝히고 있다동아일보』 1986년 11월 3일 기사에 따르면 안병영 연세대 교수는 자신이 진보적 민주주의자라고 밝히고 있다. 1972년 11월 9일 경향신문은 미국 대통령선거를 해설하면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보통명사로서 사용하고 있다동아일보』 1987년 6월 22일 기사에 의하면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의 관리들이 한국에서 민중의 힘으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탄생시킬 기회를 잡으려고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정당의 노선으로도 채택되었는데, 4.19 혁명 직후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진보정당들이 다수 존재하였고(동아일보』 60/05/05,1), 1980년대 민중당 역시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을 계승하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평민당에 입당한 재야인사들이 평화민주연구회를 설립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을 노선으로 제시하였고(한겨레신문』 88/10/01,3) 전대협이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을 주장하였다(경향신문』 87/08/19,3). 1989년 장기표가 서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주최하는 민주통일 시민학교에서 민족해방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연하였다(한겨레신문』 89/01/13,7).
1989년 진보진영에 있어 진보적 대중정당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여기서 진보란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족자주와 정치적 민주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의미이며진보적 대중정당의 역할은 대중접촉을 통한 범국민적 민주화운동대중운동 활성화선거와 의회에서 통일적 대응민주대연합 등이었다(한겨레신문』 89/11/21,3). 특히 1995년 김진균 교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통일국가의 노선으로 주장하였는데이는 해방 직후 독립운동가들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한겨레신문』 95/08/15,15).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인사들 역시 진보적 민주주의를 사회주의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0대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2011년 민중의 소리 부설 미래전략연구소 창립토론회에서 발표한 “6월항쟁 이후 한국사회성격의 변화추이와 진보운동의 과제에 따르면 1987년 이후 부르주아민주주의 변혁과정에서 민주적 개혁이 미온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철저한 부르주아적 개혁을 통해 각계각층 민중의 요구를 담아내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며이는 형식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실질적인 자유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