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좌파정당의 쇠퇴기 : 양자의 이완

1) 독일
 
첫째, 사민당은 강령적 차원에서 기존의 친근로자적 좌파 국민정당'에서 국민적 현대경제정당'으로의 전환하였다(Zeuner,1999: 정병기, 2003b). 선거에 연거푸 패배한 사민당은 1989EC시장 통합 하에서 자유와 평등 및 연대의 새로운 사회건설을 내용으로 하는 '베를린 강령' 을 채택하였다. 베를린 강령은 지금까지 좌파가 소홀하게 다루었던 환경보호, 여성할당, 남북의 빈부격차 등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사민당은 세계화의 도전에 직면하여 '베를린 강령'을 보완하여 1998라이프치히 강령을 채택하였다.

사민당은 1998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앞세워 승리를 거두고 녹색당과 신-구 좌파연정을 수립함으로써 보수-중도 연정시대를 마감하였다. 선거 기간 중에 슈뢰더는 '새로운 중도노선', '좌파 속의 우파' 등을 주장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문가, 지식인, 젊은 기업가 등 신 중간층의 표를 흡수하고자 하였던 토니 블레어의 '3의 길'과 유사하였다.
슈뢰더는 수요 대신 공급을 중시하는 최소국가를 강조하고 탈규제와 개방 및 민영화 그리고 복지삭감 등을 통해 독점자본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슈뢰더는 통화주의 정책을 통해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보장하려는 경쟁력 있는 국민국가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슈뢰더의 사회조절정책은 국가의 직접 개입 대신 간접 개입을 확대하는 공급조절 코포라티즘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60년대의 수요조절 코포라티즘이 친근로자적 전통사민주의 국민정당의 통치전략이자 케인즈주의 복지국가 체제의 운영 원리와 과정이라면 1990년대의 공급조절 (사회)코포라티즘은 슘페터적 경제정당으로서의 현대사민주의 국민정당의 통치전략이자 신자유주의 국가체제의 운영 원리와 과정이다(정병기, 2004b).
슈뢰더 정부는 기존의 복지제도를 실업부조로 대체하였으며,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을 강화하였고, 이른바 근로를 촉진하는 국가를 추구하면서 비록 실업자를 줄였으나 저임금 일자리를 확대시켰다. 반면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여 코소보와 아프가니스탄에 독일 군인들을 배치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사민당 정부는 금융시장의 세계화에 직면하여 국내 경제를 초국적 자본에 최적화하였다. 기업가와 투자자를 유치하려는 의도는 자본에 대한 조세감면, 저임금, 사회복지의 삭감으로 나타났다(김수행 외, 2003: 187-207).
한편 노동조합은 사민당 정부와 고용, 교육 및 경쟁력을 위한 동맹을 체결해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고자 하였다. ‘고용경쟁력 동맹1970년대 사회협약과 달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노동조합과의 생산성 협정의 성격을 띤다. 이는 사회생활 영역에서 조합의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경쟁력뿐 아니라, 분배조건도 개선하려는 조합주의적 사회조정 내지 사회통치의 수단을 의미한다(송태수, 2006: 53). 이 동맹은 2002년 선거에서 간발의 차이로 승리한 사민- 녹색당의 적녹 연정에 의해 지속되었으나, 이를 둘러싸고 노조와 사민당 간에는 갈등이 증폭되었다.
슈뢰더 총리는 2002년 적녹연정 2기의 출범에 즈음하여, ‘개혁과 지속가능한 경제발전 그리고 사회적 통합을 강조하면서 복지국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Schröder, Gerhard, 2002). 하지만 구체적인 재정, 경제, 고용 분야에서 복지보다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강조하였고 실제로 복지를 감축하고 고용창출은 비정규직에 집중되었다(Die Deutsche Bundesregierung, 2003).
둘째, 사민당이 처해 있는 사회구조적 조건으로 인해 사민당의 탈노동자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전체 유권자에서 노동자의 비율은 195336%에서 200720%로 급락했으며, 노동조합원의 비율은 198020%에서 199813%로 떨어졌다. 195040%에 달하였던 노동조합 조직율이 하락하고, 전체 노동자 중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1965년에 56%에서 2007년에 25.4%로 급감한 반면 서비스부문의 노동자는 2007년에 72%에 달하였다. 2007년 기준으로 취업상태에 있지 않은 조합원이 전체의 20%이다. 고소득 서비스노동자들은 사민당에 대한 충성심이 높지 않으며, 반면 실업 상태의 조합원들은 집권 사민당에 냉소적인 편이다. 사민당 자체의 사회적 위상도 약화되고 있다. 사민당의 당원 수는 194670만명에 이르렀고, 1976년에 102만명으로 최고점에 달하였으나, 당원 수가 1990년에는 94만 명으로, 2007년에는 47만 명으로, 2010년에는 50만 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Sara, 2011 : 5). 1998년 사민당은 집권하였지만, 당원 수는 늘지 않았고, 2003년 슈뢰더 총리가 사회복지를 대폭 삭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2010년 아젠다를 발표한 후 당원 수가 다시 줄었다.
또한 사민당 내 노동자 당원의 수는 줄고 다른 계층의 당원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사민당의 투표자 중 노동자의 비율은 195050%였으나 1998년에는 25%이다. 또한 사민당의 투표자 중 노동조합원의 비율은 30%에서 17%로 감소하였다. 사민당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는 카톨릭 신자가 아닌 노동조합원인데, 이들의 사민당 지지율은 197273%가 가장 높고 199048%가 가장 낮으며,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추세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사민당 평균 득표율보다 11.7% 높게 사민당에 투표하고 있으나 이 비율은 1998년에 비해 2002년에 8%가 감소했으며, 2005년에는 다시 5%가 더 감소하였다. 노동자인 노동조합원은 사민당 평균 득표율보다 23.2% 높게 사민당에 투표하고 있으나 이 비율 역시 2002년에는 11%가 감소하였으며, 2005년에는 다시 4%가 더 감소하였다.
 
3 사회와 사민당 및 DGB 내 노동자, 사무직, 공무원의 비율 변화(%)
 
 
 
 
 
사회 일반
SPD
DGB
1950
80
2000
1952
74
2002
1950
80
2000
노동자
48,8
42,3
33,4
45,0
27,4
19,3
83,2
68,2
60,2
사무직
16,5
37,2
48,5
17,0
23,4
27,8
10,5
21,0
28,6
공무원
4,1
8,4
6,8
5,0
9,4
10,7
6,3
10,8
7,2
기타*
30,6
12,1
11,3
33,0
39,8
42,2
0,0
0,0
4,0
* 가정주부, 학생, 연금수혜자, 자영업. 출처 : 사민당 연방지도부(Parteivorstand, 2004).
셋째, 사민당은 득표율 하락에 직면하여 조직기반의 재구축과 사회민주주의 정체성의 강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기 보다는 비노동자층의 지지를 확대하려는 중도정당의 경향을 심화시켰다. 2005년 총선에서 패배한 사민당은 2009년 총선에서 4년 만에 지지층의 1/3620만 표를 잃었고, 득표율이 11,2%나 하락하여 23%라는 최악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페터 라둔스키(Peter Radunski, 2011: 93)에 따르면 과거 사민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 중 110만 명은 좌파당, 87만 명은 녹색당, 88만 명은 기민/기사 연합, 53만 명은 자민당, 32만 명은 기타 정당에게 투표했고 200만 명은 기권한 것으로 나타났다(장환석, 2012: 5, 재인용).
사민당은 지지기반의 확충에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오히려 보수정당과의 담합을 통해 대연정을 하는 방식으로 국가권력에 집착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카르텔정당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독일 사민당은 이미 1차 대전 직후 최초로 연립정부를 구성하였으나, 이는 사민당이 연립정부의 다수세력으로서 주도권을 가진 경우였고, 연립정부의 상대방도 중도정당에 머물렀다. 하지만 사민당은 1969년 제1당이 되어 자유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것에서 보듯이 집권을 경험한 이후 정권유지를 위해 보수정당과도 연정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사민당은 소수정당으로서 연립정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음에도 1966년 기독교민주당(CDU)-기독교사회당(CSU) 연합과 대연정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최근에 와서 반복되고 있다. 사민당은 2013년 총선에서 정권탈환에 실패하였으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기독교민주당(CDU)-기독교사회당(CSU) 연합과 4년간 대연정에 합의하였다.
1990년대 이후 사민당과 노동조합연맹의 관계를 보면 첫째, 1999년 이후에도 DGB 출신 인사들이 사민당 정부에 참여했지만, 사민당이 저성장, 국채증가, 실업증가에 대응하고자 사회국가와 노동조합 분야에서 정책 후퇴를 거듭하자, DGB와 사민당의 긴장은 오히려 높아졌다. 1988년 선거에서 사민당과 DGB는 노동시간 단축을 공동의제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의 수상후보인 라퐁테는 임금인상이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하고, 노동총동맹이 반대하는 신노동개념을 강조하는 등 DGB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1990년과 1994년 선거 패배 이후 라퐁테가 사민당 당수로 나서 노동조합의 의제를 적극 옹호하는 등 관계 회복에 나섰다. 1991년 사민당이 금속노조의 지원을 받아 하원의장을 차지하는 등 사민당과 노동총동맹의 관계는 다소 회복되었다. 노동조합은 1996년 봄 고용유지와 해고제한을 위해 콜 정부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하였고 1998년 선거에서 콜 정부의 정책 폐기, 경영조직법의 개선, 집단소송의 도입, 단체교섭의 자율성 보장 등에 관해 사민당과 협약을 맺고 사민당을 인적으로 재정적으로 적극 지원하였다(Schroeder, 2007: 12). 사민당 정부는 1999년 집권하자마자 삭감된 사회복지를 원상회복하고 금속노조의 발터 리스터가 노동부장관에 임명되어 양자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등 DGB와의 관계개선에 나섰다.
하지만 사민당과 DGB의 관계는 1998년 선거에서 슈뢰더가 영국의 블레어 수상과 함께 유럽 사민주의의 나아갈 길을 발표하면서 이미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하였으며, 슈뢰더 수상이 발표한 2002년의 수상교지(Kanzleramtspapier), 2003년의 ‘2010아젠다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Bodo Zeuner 1999). ‘유럽 사민주의의 나아갈 길은 세계화에 부응하여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고 사회복지를 축소하고 기업의 세금을 감면하여 투자를 유치하는 신중도노선을 내용으로 하며, 이는 총선에서 중간층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것이었지만 노동조합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특히 2006년 노동부장관에 의해 노동자의 정년을 늘리고, 퇴직연금 기간을 줄이는 정책이 강행되자 양자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둘째 사민당이 사회민주주의 가치마저 상실해가면서 보수정당과 큰 차별성이 없게 되자, 당과 노조 내에서 지지층의 이탈이 가속화되어 결국 1 : 1 협력관계라는 사회민주주의모델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사민당 내에서 노동문제의 중요성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당내 노동조합의 영향력도 감소하였다. 사민당 (SPD) 내에서도 노동조합과 거리를 두는 당원과 비근로자 비율이 점차 증가하였다. 사민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사민당과 DGB 내에서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긴장이 높아졌다.
1990년 총선 후 사민당의 경우 DGB 소속 의원의 비율이 74%이었으며, 2005년 총선 후에는 59%로 낮아졌다. 젊은 의원들은 사회적 정의, 복지국가, 노동조합 등의 가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사민당 내 DGB 소속 의원들은 기업가들로부터 노동조합 분파로 비난받았지만 의회 내에서 노동조합을 위한 전략수립에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Schmollinger 1973: 229, Schroeder, 2007: 16-17, 참조). 이제 사민당 의원들은 득표에 유리하기 때문에 아직도 노조원 자격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 의원들이 사민당이나 국회에서 노조원의 자격으로 노동조합을 대변하지 않았다.
1999년 사민당의 집권 이후 독일좌파당처럼 사민당보다 더 좌익에 있는 정당들이 출현함에 따라 사민당과 DGB의 관계는 그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한편 DGB는 여전히 사민당을 지지하지만 과거와 달리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투쟁을 통해 국가를 직접 상대하고자 하였다. DGB는 사민당을 통하지 않고 정부에 대해 고용협약을 이행하라고 직접 압박하였으며, 일부 노동조합들은 노조가 직접 정치 활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슐테(Dieter Schulte) DGB 위원장은 사민당 지지를 호소하면서도 콜 총리 시절부터 고용안정을 위한 3자 회담을 강력히 주장해 왔다. 슐테 위원장은 블레어 - 슈뢰더 성명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였으며, 슈뢰더 정부가 총임금수준의 하락을 유도하자 생애노동시간 단축, 직업교육 확대를 통한 일자리 배분을 내용으로 하는 연방정부 혁신행동강령을 위한 DGB 이니셔티브(Initiative des DGB fur ein Innovations - und Aktionsprogramm der Bundesregierung, 1999)”를 발표하였다(송태수, 2006: 52).
셋째 사민당과 DGB의 관계는 반복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강령, 선거참여, 개인적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파괴되지 않았다(Schroeder, 2007: 2, 재인용).
먼저 양자의 관계 악화에 대해 슈뢰더 이후 사민당이 세계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양자의 전통적인 관계가 비로소 사실상 해체되었다는 의견(Piazza 2001)과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초반 사민당의 젊은 지도자들은 탈이념적 태도를 보이며 노동조합에 대한 전통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다(Schroeder, 2007). 하지만 양자의 관계가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면서도 조직적 정책적 긴밀성이 완화되는 비동조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국가의 모델 안에서 파탄되기보다는 불안정한 상태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Schroeder, 2007: 4).
사민당 의원 등 사민당의 지도부 다수는 DGB의 조합원이고, 사민당 당원의 1/3이 조합원이다. 독일 금속노조 10명의 중집위원 가운데 9명은 사민당, 그리고 1명은 기민/기사연 소속이다. 독일통일 때까지 연방하원에서 DGB 소속 의원들의 비율은 사민당의 경우 90%,이었으며 기민·기사연의 경우 19%이었다. 2000년 당시 DG) 간부의 약 75~85%는 사민당에 가입해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송태수, 2006: 15, 66). 사민당의 집권 기간 중 2002년까지 전직 DGB의 집행부들이 비록 개인 자격이지만 사민당 정부의 장관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는 노조의 지도부가 사민당과 정부에 타협적일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DGB2000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직접 당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일자리와 교육 및 사회정의를 위한 한 표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며 실질적으로 사민당 지지를 호소하였다. 쿠르 트벡(Kurt Beck)이 사민당 의장이 된 후 사민당 지도부는 2004년 이후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이 처음으로 요구한 최저임금 법제화 추진, 2010년 아젠다의 수정 등을 통해 이러한 DGB을 지속적으로 포섭하고자 하였다. 또한 2007년 사민당은 기본강령 개정을 통해 변화된 조건에서도 독일모델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을 재천명하였다.
 
 
2) 영국
 
첫째 노동당은 선거에서 일반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얻어 독점자본주의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좌파적 대안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보수당의 대처리즘을 닮아갔다. 이미 키녹당수는 90년대 노동당의 방향을 시장과 선택, 경제적 자유주의, 그리고 애국주의라고 주장하였다. 1995년 당 대회에서 노동당은 토니 블레어(Tony Blair)의 주도로 당헌에서 공공소유를 폐기하고 공급중시 경제학에 따른 영국의 새로운 경제전망프로그램을 선언하였다. 블레어의 신노동당(New Labour)은 과거 노동당 가치인 집산주의(collectivism)를 버리고 신자유주의적 이념을 수용해 개인의 자유와 시장주의를 강조하였다. 199710월 전당대회에서 노동당 내에서 전통 좌파 세력을 대표하는 존 프레스콧(John Prescott)은 철도의 재국유화를 반대하며 시장주의의 수용, 자유로운 경쟁의 보장에 대해 노동당 내의 좌우파 간 이견이 없음을 대외적으로 선포하기에 이른다(강원택, 2001). 노동당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노동계급 이외의 중간층의 지지를 확대하였고 1997년 총선에서 418석을 차지하며 원내 의석의 63.4%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18년만의 재집권의 대가는 반노동자적 정책의 심화로 나타났다.
둘째 노동당의 탈이념화는 노동계급의 지위 약화라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순응하여 득표율을 높이려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노동조합 가입자 수는 19791,320만 명을 정점으로 20년 간 계속 감소하여 1999780만 명으로 줄었다. 특히 청년 노동자의 노조 가입률은 198444%에서 199918%로 급감하였다. 노조가입률의 하락은 노동조합의 위상 약화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 노동조합의 단체교섭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는 직장의 비율은 198070%에서 199835%로 감소하였다.
조합원 중 계급적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중간층 노동자가 늘어남으로써 조합원의 탈정치화가 진행되어 기존 조합원의 노동당 지지율도 하락하였다. 신흥 화이트칼라 노동조합은 TUC 내 영향력을 증대시켰지만 이들 대부분은 노동당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이들 노동조합들의 대표들은 1983TUC 총회에서 TUC의 정치 전략의 수정과 새로운 현실주의로의 변화를 촉구하였다.
2005년 총선 이후 조합원의 45.7%가 노동당에 투표했으며, 19%는 보수당에, 22.1%는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 나머지 13.2%는 기타정당에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Djanogly and Duncan, 2007: 2 ; 채준호, 2008: 119). 심지어 노동조합에 노동당 지원을 위한 정치자금비(political levy)를 내는 조합원들 중 다수가 노동당의 개인당원이 아니었으며, 상당수는 총선에서 노동당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노동당 지지층 중 노동자의 비율이 낮아지는 만큼 노동당은 노동계급 이외의 중간층을 흡수하고자 노선을 더욱 우경화하였다.
영국노동당이 신노선을 채택한 이후 노동조합대표자회의와 관계를 보면 첫째, 영국노동당의 노동조합과의 거리두기’(distance the Party from trade unionism)는 유권자를 의식한 것이지만 노동당의 진퇴양란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Waddington, 2003. 352-353).
1970년대에 노동조합과 노동당의 포괄적 사회협약이 정권창출에 큰 힘이 된 것이 사실이나 집권 이후에는 노동당과 노동조합 사이에서 사회협약이 오히려 이해관계의 충돌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호 제약을 경험한 후, 양 조직은 블레어 정부에 와서는 느슨한 형태의 사회이슈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협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1994년 노동당이 신노동당노선을 결정한 직후 몽크스 TUC 위원장은 당의 신노선을 수용하는 ‘TUC의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고 1996년 전국대의원대회를 통해 노조활동의 공공선 지향과 정부의 공평성 및 노사의 동반자관계를 지향하는 신노조프로젝트를 통과시켰다.
블레어정부 출범 이후 노조는 신노조 전략을 통해 정부와의 사회협약을 기대했지만, 노동당은 노조와의 관계를 부담스러워 하였고, 급기야 정책 결정에서 노조를 배제하였다.신노동당노선은 경제사회 정책의 탈정치화, 노조와의 관계 단절 등의 제도개혁으로 가시화되었다(정병기, 1999b:1999). 노동당 정부는 사회협약 대신 노동자들의 인적 자본을 향상시켜 기업의 효율적 파트너로 배양하고자 하였고 노조가 각종 유연화 정책을 수용한다면 최저임금의 법제화와 유럽 사회헌장을 수용하겠다고 제안하였다. 노동당 정부 아래서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여 조직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던 노동조합의 계획은 틀어지고 정부와의 갈등이 증대되었다. 나아가 정부가 공공부문의 임금을 억제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하자, 노조들은 투쟁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둘째, 양자의 관계가 과거와 달리 느슨해지고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재정지원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TUC는 당과 공식적인 관계를 통하지 않고도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대안을 찾기 시작하였다.
조합원들은 노동당에 실망하여 지지층으로부터 점차 이탈하였다. 영국 내 노동조합에 가입된 유권자는 1964년부터 1987년 사이 6%가 줄어들었으나, 이 시기 실질적으로 줄어든 노동당의 득표율은 13%였다. 또한 조합원들이 당의 활동에 결합하는 수준이 낮아졌다. 1994년 당 대표 경선에서 노동조합의 투표율은 19.5%에 불과해 지구당 당원의 69%와 비교하면 상당히 저조하였다. 노동당을 지지한다는 확인서에 서명한 경우에만 조합원들의 선거 참여를 허용한 변경된 규정은 조합원들의 투표율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McIlroy, 1995: 304).
1990년 대 초 노동당원의 72%가 당대회에서의 노조의 블록투표가 당의 평판을 나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McIlroy, 1995: 292). 블록투표 방식 때문에 당대회에 해당 조합원이 참여하지 않아도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 이들 조합원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블록투표 방식은 특히 노동당 가입 노동조합의 수가 195099개에서 199030개로 줄어들어, 소수 대형 노동조합 지도부에 의해 전체 조합원의 의사가 결정되는 제도적 결함을 드러냈다. 1995년부터는 노동조합에게 유리하였던 블록투표제가 폐지되고 대의원별로 개별 투표가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조합 출신 대의원들은 일치된 의견으로 투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블레어 노동당 대표는 1995년 당헌 개정을 통해 당내 민주화를 저해하다는 이유로 당대회에서 블록투표제를 폐지하고 노동조합의 투표권을 50%로 축소하였다.
중앙집행위원회(NEC)는 이미 실질적으로 원내노동당(PLP)의 영향력 아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위원 선출권한은 전체 30명 중 17명에서 전체 32명 중 12명으로 축소되었다. 당대회가 노조와 당의 결합체인 ‘TUC-노동당 연락위원회’(Liaison Committee)를 사실상 대신했지만 정작 주요 사안은 중앙집행위원회와 의회위원회의 합동위원회에서 실질적으로 결정되고 당대회는 단지 형식적으로 결의할 뿐이었다(Beech and Lee, 2008: 125).
셋째, 노동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수용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대표자회의와 노동당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국으로 치닫고 있지 않으며, 노동조합의 재정적 지원이나 선거지원은 아직도 이들 관계를 묶어놓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양 조직은 1994년 정책에 대한 이견을 조정하고 노동당의 선거를 지원하기 위해 양 조직의 지도부, 원내노동당 등이 참여하는 노동조합·노동당 연락위원회(Trade Union and Labour Party Liaison Committee, TLLC)’를 노동당 당사에 설치하였다.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 소속 노동조합들은 재정지원과 더불어 93개의 전략 지역에 노조에 고용된 인력을 지원하였다. 93개 전략 지역 중 92곳에서 노동당은 승리하였다. 2001년 선거에서도 노동당 전체 선거비용의 약 55%를 노동조합의 지원으로 충당했으며, 146개 전략지역 중 114개 전략지역에 인력을 지원하였다. 2001년 총선 당시 일반 유권자와 비교해 조합원들의 노동당 지지는 10% 정도 높았다(Ludlam and Taylor, 2003: 733-4).
2008년에는 일부 노동조합들을 중심으로 노동당과의 관계를 정리하자는 논의와 노동당에게는 희망을 찾을 수 없으니 새로운 정당을 출범시켜야한다는 논의까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고 일부 노조가 노동당을 탈퇴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노동당 탈퇴나 새로운 좌파정당 건설이 현실적인 대안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양당제의 영국에서는 대안적 정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조합들에게는 정치적 채널로서 노동당이 여전히 필요한 파트너이다(채준호, 2008: 133). 양자는 최소한 노동관련 입법에 대해서는 상호협의를 거치고 있다. 이를테면 2004년 노동당은 노동조합의 불만을 희석시켜 이듬해 선거에서 조합원의 지지를 얻고자 노동조합현대화기금등이 포함된 워윅협정(Warwick Agreement)’을 체결하였다.
 
 
3) 프랑스
 
1984년 프랑스공산당과 프랑스사회당의 연립정부가 와해된 이후 공산당의 쇠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유로코뮤니즘의 퇴조와 함께 국회에서 차지하는 공산당의 의석수가 7%까지 감소하였다. 프랑스공산당은 1978년 총선에서 20.7%를 얻었지만 1981년에는 16.1%, 1986년에는 9.6%로 감소하였다. 198811.1%를 득표하면서 일시적으로 회복되었지만 1993년에는 다시 9.1%로 떨어진 후 회복하지 못하였다.
프랑스공산당의 쇠퇴는 지지율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친소적인 입장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당은 반공주의노선을 분명히 하면서 프랑스공산당에 대한 우위를 굳혔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사회당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권자 다수의 취향에 따라 변화시켜 국민정당 노선으로 전환하고 나아가 점차 탈이념화 경향을 보였다면 프랑스공산당은 이념정당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공산당이 유로코뮤니즘을 통해 친소적 색채를 완화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유로코뮤니즘은 사실 소련의 양해아래 진행된 것이었고 본질적인 노선전환이 아니었다. 흐루시초프는 1956년 소련공산당 당대회에서 미소평화공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 국가기구 활용 등을 주장하였고 그 이후 유럽의 공산당들에게 소비에트 모델 대신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적 길''국가적 길'을 모색할 것을 권고하였다(Boggs & Plotke, 1980: 8). ‘국가적 길은 서구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소련 공산당을 지지하는 동시에 의회제를 통한 평화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하도록 허용하였다(도널드 서순 2014, 527-528). 이 노선은 1957세계 공산당·노동자당 회의(International Meeting of Communist and Workers’ Parties)’에서 사회주의로 향하는 새로운 길에 대한 가능성이라는 선언으로 확인되었으며, 1969세계 공산당·노동자당 회의에서 진보적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로 구체화되었다. 이 회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일부로 간주하였으며, 선언문을 통해 독점체와 그들의 경제적 지배와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성취될 급진적인 민주주의적 변화(radical democratic change)는 노동자와 대중들의 사회주의적 필요성을 자각하도록 촉진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Zagladin 1973, 138-139).
이탈리아공산당은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 직후 사회주의로 가는 이탈리아 경로(Italian path to socialism)’를 채택하였는데, 이 노선은 사회민주주의와 경제민주화를 심화시키면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사회주의 사회로 전이 될 것이라는 반독점민주주의(antimonopolist democracy)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고, 이는 1951년 영국 공산당 당대회가 채택한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 경로(British path to socialism)’와 유사하였다(Turrero 2014).
둘째 유로코뮤니즘은 미소 양극지배체제에서 유럽 공산당의 역할을 강조하는 독자노선을 채택하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입장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거부되었다. 소련은 동유럽의 공산당들이 유로코뮤니스트들과 연결되어 소련블록이 이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미국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게 유로코뮤니스트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Pons. 2010: 48-52).
프랑스와 이탈리아 및 스페인의 공산당 서기장들은 1977년 마드리드에서 부르주아정치가 구현한 헌법적 기본권과 민주주의 및 자유의 틀 안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하였다(Devlin. 1979). 이탈리아공산당은 국제문제에 있어 소련을 비판하면서 유럽경제공동체뿐만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까지도 순수한 방어목적이라면 미소 양극 지배 질서에서 유럽의 균형자로서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점차 용인하게 되었다(Terzi. 1980:135). 하지만 프랑스 공산당은 유로코뮤니즘을 국내문제에만 국한하고 이탈리아공산당의 입장을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비판하면서 유럽경제공동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발족, 소련의 체코 침공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국제문제에서는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였다(Pons. 2010: 47-52).
셋째 프랑스공산당에게 있어 유로코뮤니즘은 반파쇼인민전선과 같이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활용하려는 전술적인 태도에 불과하였다. 프랑스공산당은 유로코뮤니즘을 내건 시기에서조차 당내 조직 원칙은 여전히 스탈린의 관료적 중앙집중주의를 고수하였다. 이를테면 1978년 사회당(PS)과의 연립을 둘러싼 의사결정에서 대중에 대한 충분한 설득과 공개적 의사결정 과정 없이 지도층의 협상과 독단을 보이는 등 당의 계급성과 통일성을 당 지도부의 정치노선과 등치시켰다.
넷째 1977년 마드리드 회동 이후 서유럽 공산당들이 선거에서 패배하여 연립정부의 가능성이 멀어지자 유로코뮤니즘의 국내 정치적 토대가 와해되었다. 프랑스 공산당 역시 선거에 패배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의 연립정부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고 공산주의 독자노선으로 회귀하였다. 특히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후 미소대립이 다시 격화되면서 미소 간에서 균형을 취하려던 유로코뮤니즘은 내분에 휩싸였고, 베를링게르가 1984년에 죽자, 유로코뮤니즘은 종말을 고하였고 다만 훗날 고르바조프(Mikhail Gorbachev)에게 영향을 미쳤다(Pons. 2010: 58-65).
유로코뮤니즘의 실패 이후 프랑스공산당과 CGT의 관계를 보면 노동현장에서의 CGT의 위상도 추락하여 다른 최상급노조와 경쟁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에 CGT는 인기가 없는 프랑스공산당과 비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할 뿐이다. 프랑스에서 CGT, CFDT, FO 등 최상급노조가 복수로 존재하지만,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장 단위로 노동자 대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을 대변하는 최상급노조를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최상급노조의 단체협약의 효력을 자신에게 적용받는다.
프랑스처럼 복수의 최상급노조가 경쟁할 경우 공산당의 정치적 한계와 그에 대한 비판은 바로 공산당에 종속되어 있던 CGT의 조직적 한계와 CGT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났다. 이는 CGT가 다른 최상급노조와의 경쟁에서 불리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특정 정당에 종속될 경우 그 정당의 당원들이 당의 입장을 노동조합 내에서 관철하고자 조합에 침투하여 조합이 당의 입장을 따르도록 정치사업을 하는데, 이러한 특정정당을 위한 정치방침은 자신의 당면한 정책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적 행동을 하고자 하려는 노동조합 지도부의 입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 정당에 소속된 조합원과 그렇지 않은 조합원 간의 견해의 대립도 노동조합의 정치적 활동 능력에 장애를 초래하였다. 결국 정치적 선택의 유연성과 다른 노조와의 경쟁을 고심하는 노동조합의 지도부와 특정 정당에 소속되지 않는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이 정당에 종속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고 정당과 일정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Poirmeur, 1986: 55).
프랑스에서 1981년 이후부터 선거가 한번은 좌파, 한번은 우파 이런 식으로 매번 바뀌어 왔지만 투표에 기권하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해서 증가하였다(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2006). 기존의 우파, 좌파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새로운 정당을 지지하게 되어 프랑스는 다당제로 전환되었다. 노동총동맹은 공산당의 지지율 하락이 노동조합에 파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총동맹(CGT)은 공산당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으로부터 독립된 조직임을 자처하였다. 민주노조(CFDT) 등 다른 노동조합 역시 사회당을 친근하게 여기고 있으나 독립성 자체는 유지하였다. 현재 프랑스에서 노동조합원은 다양한 당적을 지니고 있지만 조합 내에서 특정 정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사실상 금지되고 있다. 노동조합들은 사회적 의제에 따라 뜻이 맞는 정당과 사안별로 공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산당은 노동총동맹의 상층을 장악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조합원 중 공산당 당원 수는 소수이지만 선거에서 다수의 조합원들이 공산당을 지지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