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에 대한 논의 변화

1) 당 활동과 노동조합 활동의 결합
 
마르크스는 18656월 국제노동자협회 중앙평의회에서 임금, 가격, 이윤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면서 자본주의는 평균임금을 하락시키므로 노동자계급은 경제투쟁을 통해 이에 저항할 것을 주장하여 경제투쟁의 의의를 경시한 프루동, 라쌀, 바쿠닌을 비판하였다(Marx, 1988b: 367). 마르크스는 1866노동조합 - 그 과거, 현재 미래, 1871노동자계급의 정치행동에서 노동자계급은 경제투쟁 속에서 결집시켜 온 총력을 정치투쟁을 위한 지렛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치투쟁을 우위에 둔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을 강조하였다.

마르크스는 1871년 볼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표준노동일을 강제하는 법률제정 투쟁에 대해 개별적인 경제적 운동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Marx, 1968a). 즉 마르크스는 경제투쟁이 자동적으로 정치투쟁으로 발전하므로 의식적인 정치투쟁은 필요 없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특히 마르크스는 임금, 가격, 이윤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현존 제도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고 단지 제도의 결과만을 반대하면서 자신의 힘을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실패한다면서 영국의 노동조합주의를 비판하였다.
엥겔스 역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을 역설하였는데, 1844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파업은 사회적 전쟁의 하나이며, 노동자의 군사학교이다고 지적하면서 노동자는 파업을 통해 임금제도의 폐지를 위한 피할 수 없는 대투쟁을 준비한다강조하였다. 특히 엥겔스는 1881521레이버 스탠다드잡지에서 임금법칙은 노동조합의 투쟁으로 타파되지 않으며 노동자계급이 일체의 노동수단의 소유자가 되고 모든 노동생산물의 소유자가 되기까지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해방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전혜원, 1988: 98).
레닌 역시 노동조합과 당의 독자성,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독자성을 인정하였으나 노동조합과 당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원리를 사회민주당의 조직원리로 발전시켰는데,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결합시켜 사회민주당이 성립하게 된다.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는 점을 인식한 레닌은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대회의 결의초안에서 경제투쟁과 노동조합운동의 사회민주적 성격을 강화할 것을 강조하였다. 1905년 혁명이 실패한 후 사회민주당이 다시 불법화되자 노동조합과 의회 등 합법적 공간에서만 활동하자는 청산주의자와 반대로 모든 합법적 공간을 거부해야 한다는 소환주의자들이 대립했으나 레닌은 노동조합은 당 활동의 대중적인 전선이라며 양자를 모두 비판했으며, 이러한 입장은 1912년 러시아사회민주당 제6차 전국협의회 결의문에 반영되었다(하몬드, 1986: 80-81).
룩셈부르크는 대중스트라이크, 당과 조합 에서 사회민주당은 정치활동, 노동조합은 경제활동을 독립적으로 해야 한다는 동권론을 비판하면서 정치행동과 경제행동은 하나의 계급투쟁에 있어 단지 두 국면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孝橋正一, 1983: 83). 룩셈부르크에 의하면 노동조합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임금법칙을 관철하는 수단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공격수단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압력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조직적인 방어수단에 불과하다.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사회주의와 결합할 때에만 노동자의 해방에 기여할 수 있고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노동자계급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이다.
 
 
2) 노동조합에 대한 당의 지도
 
첫째,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정치투쟁의 우위, 당의 우위는 레닌에 이르러 노동조합에 대한 당의 지도로 한층 강화되었다.
레닌의 사회민주당의 조직원리는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관계를 지도와 피지도의 관계로 설정하였다(Lenin, 1972d). 레닌은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경제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정치투쟁의 우위를 강조하였다. 레닌에 의하면 계급적 정치의식은 외부로부터만, 즉 경제투쟁의 외부로부터만, 다시 말해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의 영역 외부로부터만 노동자들에게 도입될 수 있으며 특히 계급투쟁은 정당의 투쟁 속에서 가장 목적의식적이며, 포괄적일뿐만 아니라 정형화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레닌은 사회민주당 강령 초안과 해설에서 당의 임무로서 노동자의 계급적 자각을 발전시키는 것, 노동자의 조직화를 돕는 것, 노동운동에 있어 투쟁의 임무와 목표를 제시하는 것 등을 강조하였다(Lenin, 1972a). 레닌은 사회민주당 당원들은 조합 내에 강고한 당세포를 조직하여 당 중앙의 지령에 따라 노동조합을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당세포를 통한 노조의 통제라는 입장은 1912년 볼세비키 프라하 협의회 결의문에 반영되었다.
레닌에 의하면 과학적 사회주의 혁명이론과 민주집중제에 기초를 둔 프롤레타리아적 규율로 무장하고 모든 기회주의, 수정주의 경향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새로운 유형의 당이 노동자계급과 모든 근로대중을 지도할 때 사회주의혁명과 노동자계급의 권력이 실현될 수 있다(김상복, 1991: 166).
레닌은 노동조합에 대한 당의 지도를 서구의 경우에도 적용하였다. 레닌은 1907년의 슈투트가르트 국제사회주의자대회를 계기로 노동조합의 중립성에 대해 반대하면서 노동조합과 당의 긴밀한 접근을 강조하였다. 레닌은 1908노동조합의 중립성에서 노동조합의 중립성은 부르주아 지향의 사상적인 외피라고 비판하였다(Lenin, 1972c).
레닌은 1차 대전 중 노동조합이 사회민주당의 이데올로기적 지도를 받아들이도록 고무시키고 노동조합과 조직적 유대를 세우는 것이 주된 과제라면서 독일 자유노동조합의 정치적 중립성을 비판하였다. 레닌에 의하면 유럽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부르주아의 공작이 행해지지 않았던 초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기반을 넓히는 수단으로서 노동조합의 중립성을 주장해도 좋았지만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러 부르주아가 노동조합을 사회주의와의 모든 결합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에 노조의 중립성은 허용될 수 없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혁명에서의 당의 지도 역할을 서구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경계하고 서구에서 당의 지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사실 러시아의 1905년 혁명 당시 노동조합원은 255555명에 불과하였으며, 차르체제에서 노동조합결성은 사실상 불법이었기 때문에 19172월 혁명까지 대중적인 노동조합활동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현실에 존재하는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가 아니라 당과 노동조합의 이상적 관계라는 추상적 수준에서 논쟁이 진행되었다(클리프·글룩스타인, 2014).
로자 룩셈부르크는 당의 노동조합에 대한 지도는 노동조합의 자발성을 존중하는 정치적 지도라고 보았다. 룩셈부르크의 1899사회개혁 혹은 혁명에 따르면 계급은 외부의 지도에 의해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과 투쟁을 통해 각성되고 의식화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가 되며 하나의 계급으로서 조직된다(Luxemburg, 1964). 사회민주주의 투쟁은 기본적인 계급투쟁이라는 일련의 창조적 행위의 산물이다. 노동자계급 중에 선진 노동자와 후진 노동자가 있다. 선진노동자의 임무는 혁명정당을 건설하여 후진 노동자를 지도하는 것이다. 당의 정치적 지도와 대중의 자발적인 투쟁의 통일이 혁명의 길을 개척한다.
그에 따르면 대중파업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지도부의 계획에 따라 실행되는 경직된 행동의 도식이 아니라 혁명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많은 혈과에 의해 혁명의 몸 자체와 결합되어 있는 피와 살이 자발적으로 약동하고 있는 생명의 일부분이다. 이처럼 대중파업이 자연발생적인 것이지만 당의 지도를 필요로 한다. 다만 그 지도가 인위적이고 조직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의 사상, 강령 및 슬로건 등 주로 선전활동을 통해 행사되는 정치적 지도여야 한다. 당의 전술이 현실의 세력관계에 선행되어야 하지만 당이 행동지령을 내리거나 실제로 선두에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에 내재하고 있는 자발적 힘을 전면적으로 발휘시키는 투쟁으로 유도되어야 한다. 대중들 사이에서의 활동의 결과로서만 당은 이들로부터 그들의당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따라서 당은 노동조합의 제한적인 경제투쟁을 지원함으로써 그리고 노동계급의 직접적 이해요구에 관련한 강령들을 제기하고 선동함으로써 노동계급을 선도하고 정치적으로 단결시킨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당과의 관계에서 조합원 공통의 이해를 전제로 하는 대중적 성격을 충분히 보장받아야 한다. 그가 반대한 것은 당의 지도 자체가 아니라 당의 계급대중에 대한 일방적 지도이다.
지도하는 당이 어떤 종류의 당인가라는 점이 레닌과 달랐다. 룩셈부르크가 작성한 스파르타쿠스 강령에 의하면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노동자계급 위에 군림하여 노동자계급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는 당이 아니라 노동운동을 지도하는 노동자계급의 한 부분일 뿐이다(클리프 1989: 56).
안토니오 그람시는 레닌의 전위정당에 의한 대중조직의 지도를 기본적으로 인정하였지만 오늘날 서구의 혁명정당이 장기적인 진지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당의 지도를 좀 더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문제로 파악하였다(Gramsci, 2000). 그람시는 일단 노동자운동을 추동시키는 공산당의 지도를 인정하고 당은 노동자계급의 안내자이자 지식인이라고 보았다. 다만 이 당은 다양한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수행되는 계급투쟁의 다양한 형태와 단계로부터 통일성을 이끌어 내는 대중정당이자 혁명정당이다.
당은 노동자국가의 수립을 위하여 필수적인 모든 세력들을 프롤레타리아 주위로 조직하고 그 동맹군을 프롤레타리아 봉기를 위한 전체적 투쟁이라는 방향으로 인도하며,(그람시, 2001: 396) 이를 위해 공산주의자들은 노조를 포함한 모든 대중 조직들 내에서 프랙션방식으로 조직해나가야 하며, 대중조직이 전개하는 투쟁의 최일선에 참여하여 그들이 당의 강령과 슬로건들을 지지하게 만들어야 한다(그람시, 2001: 408).
그런데 그람시에 따르면 서구에서는 러시아에서 했듯이 혁명세력이 기동전으로 국가를 전복한다고 해도 시민사회가 변혁되지 않는 한 부르주아 지배질서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즉 혁명은 바리케이드 전투를 통해 단기간에 국가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노동자 대중이 스스로 교육하며 조직하고, 또한 지도해가면서 국가를 전복하고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과정이다. 즉 오늘날 시민사회는 기동전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진지전으로 이 참호를 점령해나가야 한다.
그람시에 따르면 적극적인 대중에 기반한 혁명적인 정당에 의해 조직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란 관점에서 대중들의 전반적인 저항은 성공적으로 대중을 조직하고 움직이게 하는 철저한 정치적 작업에 의해 형성된다. 오로지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만 기존 사회의 범주를 초월할 수 있는 의식의 전환이 이론분야에서뿐만 아니라 혁명적인 실천분야에서도 가능하다. 또한 이럴 때만 혁명적인 조직의 적극적인 교육과 정치적 활동을 통해 노동자나 지식인 모두를 새로운 종류의 지식인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Merrington, 1968).
따라서 노동계급이 종국적인 승리를 하려면 유기적 지식인은 계급동맹을 통해 노동계급 이외의 다른 계급의 이해관계도 포함하는 저항이데올로기를 창출해야 한다. 그람시는 이러한 유기적 지식인의 총체가 혁명적인 대중정당이라고 보았다, 특히 그람시는 당은 사회계급의 힘을 대표하고 있지만 대중들의 참여가 없다면 당의 정치투쟁이 의미를 가질 수 없다면서 노동계급 집권 이전의 당의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교육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Pozzolini, 1970: 77).
둘째, 노동조합에 대한 당의 지도는 노동조합의 당으로의 종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닌은 1921노동조합, 현재 상태와 트로츠키, 부하린의 잘못에서 당과 대중은 쌍방 통행하는 관계이며 노동조합은 당과 대중을 연결하는 매개고리이다면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결합을 강조하였다(Lenin, 1965). 레닌에 따르면 당은 노조를 통제하고, 노조는 선진계급을 통제하고, 선진계급은 다시 근로대중과 농민대중을 통제한다. 또한 레닌에 따르면 대중이 충분히 조직되지 못한 사회경제적 저발전 수준의 국가에서 집권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선전해 내고 대중을 묶어낼 수 있는 대중 조직이 필요하다. 레닌의 이러한 인식은 사회주의 혁명이 달성된 이후 노동조합이 공산당의 노동자대중 장악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변질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레닌에 의하면 당은 부르주아혁명 전이나 후에도 여전히 제도 밖에서 대중권력을 창안하는 정치조직이자 대중을 정치화하는 형식이다. 형식을 채우는 대중의 자생성, 조직의 민주적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당은 대중의 무의식적 혁명성을 담는 그릇이며 대중의 자발성은 당의 형식을 채우는 내용일 뿐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는 레닌이 말하는 외부로부터의 도입을 내용으로 동일시하고 중앙집권적인 엘리트정당의 지도성으로 오인하였다(박영균, 2008).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과 국제노동자협회, 독일사회민주당에 이르는 정당 활동에서 민주주의적 토론과 민주주의적 대의기구의 구성을 강조하였다. 국제노동자협회 총칙이 선언하고 있는 노동계급 자신에 의한 해방이라는 원리는 스탈린주의 정당개념과 같은 엘리트정당개념과는 양립할 수 없다(Draper, 1971).
마르크스는 18691117일 독일금속노동조합의 회계담당인 하만(Haman)과의 대담에서 정당과 노동조합을 한 무더기로 묶으려는 견해에 반대하면서 노동조합은 사회주의를 위한 학교로서 특정 정치단체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전혜원, 1988: 66). 당시 라쌀주의자들은 파업과 같은 노동조합의 정치적 행동을 부정하면서 노동조합의 정당에 대한 종속을 주장하여 노동조합의 단결권을 무시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라쌀주의자들을 종파로 규정하고 이들을 비판하였다. 당시 라쌀주의 영향에 있었던 슈바이처는 노동조합은 정치단체의 이데올로기에 제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마르크스는 186810월 슈바이처에게 쓴 편지에서 그러한 태도를 계급적 운동에 대립하는 종파적 운동이라고 비판하였다(전혜원, 1988: 54).
물론 마르크스의 이러한 입장은 절대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 당시 독일의 노동조합이 특정한 노동자정당을 건설하는 등 배타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 또한 라쌀주의가 독일 노동조합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영국의 노동조합은 독자적인 노동자정당을 건설하는 것 대신에 자유당에 경도되어 있었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노동조합이 노동자정당 일반에 대하여 중립적인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단지 정치투쟁의 우위와 정당의 우위가 노동조합의 정당으로의 종속으로 변질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3) 노동조합과 당의 상호 민주적 통제
 
첫째, 러시아혁명 이후 소련에서 당을 전체 노동계급과 일치시키고, 당이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중조직들의 정치적 결정을 대리하고 그 결정에 따라 대중조직들의 활동까지 지시하는 대리주의가 점차 심화되었다.
레닌의 전위정당 개념에는 애초에 대리주의가 싹틀 여지가 있었다(Cliff, 1960). 1917년 혁명 이후 중앙위원회 권한의 극대화, 소자본가인 농민의 지도부 장악, 당의 관료화, 총비서의 개인적인 독재, 당의 고립 등의 이유 때문에 혁명적 엘리트가 노동계급을 대신하였다.
스탈린은 당을 노동계급의 일부분으로 보는 레닌과 달리 당과 계급을 일치시킴으로써 일당체제를 설정하였다. 또한 스탈린은 당의 권력과 국가의 권력을 일치시킴으로써 일당독재를 정당화하였다. 스탈린은 당 조직 특히 중앙위원회가 당을 대신하고, 최고지도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신하는 대리주의를 심화시켜 당 내 민주주의를 훼손하였다.
이러한 대리주의는 공산당 활동가와 국가 공무원의 관료화로 인해 당과 국가 및 사회 전체에 더욱 공고화되었다. 러시아에서 관료화를 정당화하는 상황논리로 혁명과정에서 차르의 폭압과 기회주의자들의 준동이, 그리고 혁명 이후에는 국내의 반혁명세력과 해외의 제국주의국가들의 침략이 주로 거론되었다.
스탈린의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적 당관은 러시아혁명 초기의 엘리트주의적인 당권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Klugmann, 1953). 스탈린은 1905년에 쓴 '프롤레타리아계급과 프롤레타리아당'에서 대중들의 후진성을 지적하면서 노동자대중을 계몽하는 지도자 그룹으로서 당의 성격을 강조하였으며 당원의 자격을 강령과 전술 및 조직원칙을 수용하고 실천하며 모든 측면에서 검열 받은 자에게 국한할 것을 요구하는 등 레닌의 당 이론을 더욱 경직화시켰다(Stalin, 1954).
스탈린의 대리주의와 관료주의적인 중앙집권적인 당관은 당을 대리하는 자신과 당 지도부의 독재를 합리화시키고 반대세력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스탈린은 1924레닌주의의 기초라는 문건을 통해 자신을 레닌의 충실한 후계자로 설정하고(Van Ree, 1993) “레닌주의는 모든 분파의 해체와 제거를 요구한다면서 민주주의 중앙집중제를 명분으로 당 결정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완전히 부정하였다.
반면 레닌의 민주집중제에 따르면 자유로운 토론에 의한 결정에 따라 행동을 통일하되 결정에 대한 비판자체를 허용하여 결정의 수정가능성이 열려져 있었다. 트로츠키 역시 잘못을 발견할 때 신속하게 방향전환을 할 수 있는 볼세비키의 장점을 강조하였다.
트로츠키는 이미 1904년 팜플렛에서 당 조직이 당을 대신하고,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대신하고, 결국은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신한다며 레닌의 중앙집권적인 당조직관을 비판하였다(Cliff, 1960). 스탈린 시대에 당과 국가가 일체화된 상태에서 국가가 먼저 관료화되자 당 역시 관료화되었다. 심지어 선진적인 노동자가 당과 국가로 편입되어 관료로 전환되었다. 트로츠키는 소련을 타락한 모습의 노동자국가라고 규정했으며, 관료제를 기생적인 카스트에 불과하다고 봤다(몰리뉴, 1986).
1923년 트로츠키는 프라우다지에 신노선을 발표하면서 당 내 민주주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였다. 트로츠키는 당의 입장은 의견의 대립 속에서 형성되어야 하며 당 자체가 민주적이지 못하면 분파가 생겨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비판이라면 모조리 파벌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간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Trotsky, 1923b).
하지만 소련공산당은 트로츠키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1937년 부하린과 트로츠키를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암살 기도, 자본주의 복원 음모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하였으며 그 결과 부하린은 처형당하고 트로츠키는 망명하였다(Commission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PSU, 1939).
트로츠키는 배반당한 혁명에서 계급독재와 당 독재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하나의 계급에도 여러 부분이 있으므로 같은 계급에서도 여러 정당이 생겨날 수 있다면서 일당독재를 사실상 부정하였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소련에서 내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반대정당이 모두 금지되었는데 이는 소비에트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조치였기 때문에 방위를 위한 일시적인 고육지책이었다(Trotsky, 1937). 나아가 트로츠키는 1938년 제4인터내셔날 강령에서 다양한 소비에트 정당들의 합법화를 통한 소비에트의 민주화를 강조하면서 노동자 농민이 자유 투표를 하여 어떤 정당들을 소비에트 정당으로 인정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트로츠키의 노력은 소련에서 실패하였으나,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흐름을 형성하여, 스탈린체제가 붕괴된 후 유럽을 중심으로 새로운 혁명적인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건설하는 데 있어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둘째, 서구의 사회주의정당과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제도 내에 고착됨에 따라 당과 노조가 일부 엘리트에 의해 좌우되는 과두제와 활동가들의 관료화가 심화되었다.
1900년대에 이르러 각국에서 중앙집권적인 전국단위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반숙련공들이 노동조합에 편입되어 노동조합이 대중화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숙련공 중심의 노동귀족, 혹은 노동관료와 조합원 대중과의 긴장이 형성되었으며, 노동조합 내에서 민주주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는 보통선거의 확대로 인한 노동자정당의 대중정당화, 숙련공 중심에서 탈피해 가는 노동조합의 대중화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과거 소수의 정당과 노동조합이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노동조합 자체의 본질적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은 노조의 관료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레닌은 독점자본의 초과이윤 일부에 의해 매수된 노동자의 지도자나 상층 노동귀족은 부르주아의 주요한 사회적 지주라고 지적하였다. 즉 레닌에 의하면 이들은 노동자의 대리인이지만 동시에 부르주아의 앞잡이다. 따라서 당은 노동조합의 관료와 과두를 지도와 실천을 통해 정치적으로 순화시켜야 한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혁명가는 늘 대중과 함께, 때로는 동요하는 노조 지도자와 함께, 그러나 노조 지도자들이 대중의 선두에 서 있을 때만 대중이 동요하는 노조 지도자들을 앞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동안에는 한 순간도 노조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활용해야 한다. 토니 클리프에 따르면 노동조합 관료는 개량주의적이기 때문에 국가가 노조를 통제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대중투쟁을 더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노조관료는 정치조직에 의해 견제되어야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점차 제도정당의 길을 걷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현실에 직면하여 노동자 대중의 모든 역사적 주동성이 당으로만 옮겨가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는 관료적 중앙집권제가 혁명적 사회주의를 망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노동자의 혁명적 주동성과 자기희생을 강조하였다(Harman, 1980). 그에 따르면 조직화된 중핵과 노동자대중 사이에 혈액순환이 있을 때에만 그리고 하나의 심장고동이 이 양자에게 생명을 줄 때에만 당은 자신의 위대한 역사적 행위를 할 수 있다(孝橋正一, 1983: 81). 이런 서구의 문제의식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의 엘리트적인 전위정당을 모든 나라에 절대화하면 노동자계급 자체의 순조로운 발전과 창의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자정당의 노동조합에 대한 관료적 지배를 비판하고 노동자정당의 노동조합에 대한 우위성은 양자의 민주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룩셈부르크는 1904러시아사회민주주의의 조직문제에서 무오류의 최선의 중앙위원회 보다는 과오로 얼룩진 대중의 자발적인 혁명운동이 더 가치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러시아혁명론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민주주의 적용방식이지, 민주주의 폐기가 아니고 또한 계급의 독재이지, 정당이나 파벌의 독재가 아니다면서 공산당이 자신을 계급과 일치시키는 경직적인 일당독재를 비판하였다.
그람시 역시 대중과 지도자들 간의 적절한 수치적 균형관계를 강조하면서 당과 노조의 관료화를 비판하였다. 그람시는 노동자정당을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로 파악하였고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에 있어 종속의 관계도 평등의 관계도 배제하였다. 특히 정당 내 힘과 동의, 권위와 헤게모니, 지도와 피지도, 규율과 창의성, 연속성과 변화의 변증법적 통일을 강조하였다. 그람시에 따르면 혁명은 자각된 노동계급의 지휘관에 의해 엄밀하게 준비되고 지도되어야 하지만 노동계급운동의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대중에 기반해야 하고, 행동에 돌입하기 전에는 대중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Pozzolini, 1970: 80).
또한 그람시는 1920사회당의 혁신을 위하여에서 사회당이 자율적인 조직이 아니라 관료적인 제도에 머문다면 노동계급은 다른 정당의 건설로 나아갈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경우 무정부주의자들이 정당의 집중성과 관료제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결국 대중은 무정부주의적 경향으로 옮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그람시, 2001).
셋째, 스탈린 사후 서구의 공산당들은 당과 노조에 스며든 관료주의와 잘못 운영되어왔던 민주주의 중앙집중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하고 그 개념을 재정립하였다.
스탈린주의정당은 마르크스주의정당의 한계를 벗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함에 있어서 독재적인 소집단이 노동계급 자체를 대신하고 있는 스탈린체제와 같은 일당시스템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Johnstone, 1967). 다만 레닌에 의하면 러시아에서 혁명 초기의 타 정당들이 반혁명에 가담함으로써 일당제로 귀결되었으며, 반면 폴란드 체코 등은 여러 정당들이 함께 파시즘에 대항하고 민주주의 개조에 참여했기 때문에 일당제로 귀결된 러시아와 다르다. 또한 레닌에 의하면 착취자들에게서 선거권을 빼앗는 문제는 순수한 러시아의 문제이지, 프롤레타리아 독재 일반의 문제는 아니다(자글라딘, 1988).
스탈린주의정당이론에 영향 받았던 기존의 유럽 공산당들이 스탈린체제 붕괴 후 침체의 길로 들어섰고 스탈린 격하운동이 전개되었다. 스탈린주의정당에 대한 반발로 인해 레닌의 민주적인 중앙집권적 정당까지 거부하고,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룩셈부르크의 입장을 중앙집권적인 정당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과도하게 해석하는 혼란이 발생하였다.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은 레닌의 중앙집권적 정당을 스탈린의 정당과 일치시키면서 일체의 중앙집권적 정당을 부정하는 흐름과 이와 반대로 당의 무조건성을 강조하는 스탈린주의 모두를 비판하였다. 특히 크리스 하먼은 중앙집권적 조직은 관료주의를 낳고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진정한 레닌주의 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크리스 하먼에 따르면 볼셰비키가 혁명 전에는 폭압정권 아래서 비합법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혁명 후에는 원래의 이론과 실천이 스탈린주의로 인해 타락되었기 때문에 레닌의 조직관은 그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다(크리스, 1968). 크리스 하먼은 오늘날 당이 양적 팽창에만 관심을 가지면 조직적 지도력이 약화되고 정치적 자각이 부족한 당원이 양산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하먼은 이러한 측면에서 조직의 견고함을 훼손시킬 수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입장을 비판하고 레닌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던컨 핼러스(Duncan Hallas, 1996)는 지금까지 공산당의 영향권에 있었던 산업전사들, 혁명적인 그룹들 속에 있는 급진적인 젊은 노동자와 학생들이 이러한 혁명적인 사회주의자정당을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라고 보았다. 그는 혁명적인 정당은 레닌식의 민주적이면서도 중앙집권적인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조직을 집단적으로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주장은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므로 사회주의도 불가능하다고 주장과 마찬가지다고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관료제적인 당과 레닌의 중앙집권적인 당을 구별하였다.
 
 
4) 스탈린 이후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 훼손
 
첫째 소련은 서구의 특성을 무시한 채 코민테른을 통해 공산당과 공산주의 노조의 관계를 지도하려고 하였다. 개량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노조에 대한 코민테른의 혼란스런 입장은 코민테른이 국제노동자 혁명의 도구에서 소련의 외교정책 도구로 급속히 변질되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레닌은 1920좌익소아병에서 사회민주주의자는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비록 그곳이 반동적인 곳이라도 후진적 노동자 대중을 반동적 지도자와 노동귀족의 영향력 아래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존의 노동조합과 별도의 조직을 만들기보다는 그 안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이러한 레닌의 주장은 초창기 코민테른에 수용되었다.
하지만 서구 개혁주의 노선의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대항하여 1920년 코민테른 2차대회의 제안에 따라 같은 해 적색노동조합이 창립되었고, 이는 서구의 노동운동을 분열하게 만들었다. 1921년 코민테른 3차 대회는 서구에서 노동조합의 개혁적 지도부를 제거하고 노동조합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근거지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과 미국의 대표들은 노동조합의 관료를 통제하는 것은 혁명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고, 그 전에는 노동자 대중이 관료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싸우는 한편 관료에 저항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코민테른은 1922년 기존의 입장을 수정하여 아무 전제조건 없이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과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이 연합총회를 하지고 제안하면서 노동조합 관료와의 동맹을 모색하였다(클리프·글룩스타인,2014: 83-95).
코민테른은 1928년에 이르러 다시 입장을 바꿔 서구의 사회민주당이 객관적으로 사회파시즘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서구의 공산당에게 사회민주당과 공동전선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히틀러의 등장 이후 반파시즘의 명목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인민전선을 구성함으로써 다시 번복되었고 이 같은 혼란은 히틀러와 소련의 불가침조약,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계기로 수차례 반복되었다. 이와 같이 코민테른의 실질적인 목적은 소련이 영향력 있는 정치세력이나 지도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이들이 서방의 소련 개입에 반대하도록 포섭하는 것이고, 이러한 방침은 각국의 공산주의 경향의 정당과 노동조합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클리프·글룩스타인,2014: 161-163).
둘째 스탈린의 집권 이후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노조는 공산당의 행정기구로 격하되었다. 소련에서 자본가가 없다는 이유로 파업은 그 개념조차 사라지고 노동조합은 공산당 및 국가와 협조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기업을 감시하는 행정기관으로 변질되었다. 루마니아의 예에서 보듯이 최상급노조는 국가사회복지평의회를 통해서 국가사회복지부의 활동을 통제하였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각 노동조합은 중앙정부로부터 각각의 직장에 이르기까지 생산회의에 참석하고, 5개년계획의 작성에 참여하였다(포스터, 1987: 75). 동독의 노동조합은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되었는데, 노조들은 상급단체인 동독자유노련(Frei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 FDGB)에서부터 사업장 수준에 이르기까지 통일사회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의 지도 아래 당과 국가가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매개고리로 기능하였다(Müller, 1990). 노조는 기업 계획회의에서 구속력이 없는 제안을 할 수 있었으며, 단체협약 중 해고와 산업안전 문제 부분에 대해 합의를 요구할 수 있었다. 경영진과 기업노조 지도부는 기업당조직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정병기, 200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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