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선공산당의 진보적 민주주의

1) 미소협력과 통일국가의 건국노선

서구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사회주의를 목격한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의 봉건적인 정치제도와 일제의 전체주의적 통치제도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의미로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당시 진보적 민주주의는 봉건제도와 자본주의 병폐를 극복한 새로운 민주주의’, 군국주의의 가짜 민주주의가 아닌 진정한 민주주의’,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결함을 극복한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인식되었다따라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민주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주장하며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지칭하였고 특히 중도파와 좌파는 이를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표방하였다이를테면 안재홍은 자신이 제창한 신민족주의신민주주의가 진보적 민주주의임을 자부하면서 사회주의자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비판하였다(김인식, 2008: 10-15).
해방 직후 이러한 국제적 정세 속에서 공산계열 역시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은 독일이 자신을 침공하자미국영국프랑스 등 자본주의 국가와 연합군을 형성하였는데소련은 2차 세계대전을 독일일본 등 파쇼적 제국주의국가에 대항하여 민주적 제국주의국가와 연대하는 반파쇼전쟁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이러한 행동을 합리화하였다소련은 2차 대전 직후에도 이러한 미소화해노선을 추구하였는바소련은 독일과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나라들에게 소련뿐만 아니라 다른 연합군도 동의할 수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건국노선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 20일 미소가 동시에 점령하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을 고려하여 조선공산당에게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추진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고 비밀지령을 내렸고(이완범, 2008: 14)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건국노선으로 채택하는 방식으로 스탈린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였다이에 박헌영과 김일성 모두 진보적 민주주의를 통일국가의 건국노선으로 적극 주장하였다(김인식, 2008, 김일성, 1975).
하지만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미국과 협상에 의한 통일국가 대신 북반부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박헌영과 김일성 역시 미소화해노선이 파탄됨으로써 통일국가가 불가능해지자소련의 방침에 따라 진보적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공산주의 세력이 단독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노선으로서 인민민주주의를 선언하였다.

2) 박헌영의 8월 테제와 진보적 민주주의

1945년 9월 15일 평양에서 현준혁에 의해 주재된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확대위원회에서 정치진로에 관하여라는 문건이 채택되었는데이 문건에 따르면 위원회는 향후 조선공산당 강령에서 미국과 영국의 진보성을 분명히 인정하고미국영국중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취지를 명기할 것을 결의하였다또한 조선혁명의 현 단계는 자본혁명단계이므로 친일세력을 철저하게 배제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본조건을 준비할 것을 결의하였다(이철순 1988: 12).
1945년 9월 20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박헌영 조선공산당 총비서가 작성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 테제)를 발표하였는데조선공산당은 이 문건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건국노선으로 천명하였다8월 테제에 따르면 현 단계 조선혁명의 성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며혁명적 민주주의 인민정부즉 인민공화국이 이러한 혁명과제를 달성해야 한다조선공산당은 8월 테제를 통해 진보적 민주주의의 핵심내용으로 조선의 완전독립과 토지혁명을 선언하였으며 그 외 언론·출판·결사·가두행진·파업의 자유, 8시간노동제의 실시일제 재산의 국유화무상교육과 누진세 도입국민의용병제, 18세 성인의 보통선거여성의 지위향상 등 10가지 사항을 제시하였다(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 2004).
조선공산당과 박헌영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있어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전환되는데이점이 다른 중도진영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와 구별되었다박헌영은 여운형과 마찬가지로 민족통일전선으로서 인민정부를 주장하고 혁명의 주체에 도시소시민과 지식인을 포함시켰지만 일체의 부르주아계급을 배제하였다.
8월 테제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미소협조 정세를 현실로 인정하여 미국과 소련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현 단계 조선혁명의 국가건설 이념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노선을 추구하였다또한 8월 테제가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로 규정한 것은 당시 남북 공산주의자들의 대미관과 일치하였다.
이처럼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미소협력을 현실로 인정하여 미국과 소련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건국노선으로 제시하였고 박헌영은 1945년 10월 27일 하지 중장과의 회담에서 진보적 민주주의의 이런 취지를 설명하였다(임경석. 2004). 1945년 말과 46년에 걸쳐 미소의 긴장이 격화되고미군정은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기점으로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하는 등 조선공산당을 탄압하였고북에서는 북조선노동당이 창당됐다미소협력노선과 미 군정청의 용공노선이 붕괴되자 조선공산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1946년 7월 26일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에 시달한 신전술이라는 문건에 의해 폐기된다. 1947년 미국이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하는데그 내용은 미소국제협조노선을 폐기하고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를 봉쇄하는 한편3세계에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는 것이었다미국의 반공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독일과 조선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대립전선을 형성했으며양국의 긴장은 급격히 높아져 미소냉전시대로 돌입하였다.
1947년 12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 및 민족민주전선이 공동으로 발표한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문건을 보면 이러한 정세를 반영하여 조선공산당의 정세인식은 1945년과 완전히 정반대로 나타난다이 문건은 미국을 반민주적인 제국주의로 규정하고미국이 국내의 친일세력과 반민주세력을 지원하여 반민주적반민족적 분단정권을 세워 조선반도의 남을 군사기지로 영원히 점령하려한다고 비판하고 있다이 문건은 미 군정청을 반민주적인 제국주의 군대로 인식하고 이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반민주적인 우익권력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대중투쟁을 선동하였다.
특히 이 문건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외국의 세력을 지칭하는 의미로서 단 한 차례 등장할 뿐이다이 문건에서는 여전히 인민정권의 수립을 강조하지만여기서의 인민정권은 진보적 민주주의보다는 사회주의적 지향을 분명히 하는 친소련적인 인민민주주의 정권으로 해석된다이 문건에서 박헌영은 미소 대립의 시기에 남조선에서 친소련적인 태도를 분명히 하면서 김구와 김규식 등 중간파의 타도를 주장하고 대중들의 봉기를 주장하였다하지만 박헌영 자신과 핵심인사들이 월북함에 따라 산발적인 봉기는 희생만 낳고 남조선의 공산당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박헌영의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은 2차 대전 직후의 국제정세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판단하여 미국과 소련의 협조노선이 체제경쟁으로 파탄날 것을 예상하지 못하였다사회주의계열은 미군청이 노골적인 탄압을 하기 전까지는 미군청에 대한 협력을 주장했는데소련의 협력노선과 당시 남조선 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해도 정확한 정세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따라서 애초부터 미국과 소련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절충적인 진보적 민주주의 정부형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박헌영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전선을 조직했던 여운형이나독자적인 무장역량을 성장시켰던 김일성에 비해 외세의존적인 성향이 강하였다박헌영의 정파적 활동이 조선공산당을 분열시킨 결과 조선공산당은 진보적 민주주의에서 주창하였던 민족통일전선의 중심이 되지못하였다이러한 비과학적 정세관외세의존적 행태고립적 정파활동은 미군청의 탄압에 직면하여 조급한 봉기주의로 나타났다.

3)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

김일성은 1945년 10월 3일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통해 다른 사회주의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건국노선으로 제기하였다김일성은 이 연설에서 일본이 미소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결과 조선이 해방됐지만조선의 완전한 해방은 조선민중의 힘으로만 달성할 수 있다면서 민족자주를 진보적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으로 강조하였다김일성은 이 연설에서 조선사회를 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민주주의혁명을 당면 과제로 삼았고여운형박헌영과 마찬가지로 민족통일전선으로서 인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지만 박헌영과 달리 사회주의 혁명의 지향점을 명시하지 않았다.
또한 김일성은 이 연설에서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으로서 특권폐지보통선거권공무담임권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거주의 자유를 강조하고 자립경제와 부강한 국가의 건설을 제시하였다김일성은 이밖에도 고용보장과 노동기본권의 보장높은 소작료와 고리대의 근절중소상공인의 보호공정한 세금제도학업과 과학의 보장인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국내평화와 국제평화민족문화 발달을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열흘 후인 10월 13일 각 도당 책임일꾼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 조선 실정에 맞는 새로운 진보적인 민주주의제도를 강조하였고이어 공산당북부조선 도련합회에서 한 당조직문제보고에서 현 단계에 있어서는 자본민주주의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완범 2008, 17-18). 즉 여운형이나 박헌영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 역시 소련군과 미군의 지배를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지원 아래 평화적으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달성하는 것을 당면 목표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은 미소냉전 이후 진보적 민주주의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을 포기하고 인민민주주의 단독정부 수립에 착수하였고 국호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하였다. 김일성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1947년 이후 부르주아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고 인민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북한은 박헌영의 숙청 이후 박헌영이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했던 것은 우경기회주의이며그 후 반미봉기노선으로의 전환은 극좌모험주의라고 몰아세우면서(이완범 2008, 22-25) 박헌영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부르주아노선이라고 외면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김일성 역시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45년 김일성의 연설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로부터 북한정권의 정통성을 합리화하고자 하였다북한은 1990년대 들어 박헌영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언급하지 않은 채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초기의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미화하여 북한식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역사적 단초로 재구성하였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은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한 해방직후 시기를 반제반봉건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시기로 규정하여 진보적 민주주의가 담고 있었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의 흔적을 지워버렸다오늘날 북한의 백과전서가 해방직후 시기에 있어 부르주아민주주의를 비난하고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강조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그런데 일부 학자에 의하면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 나오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 부분은 사후에 진보적 민주주의가 소부르주아 우경투항주의라는 비판을 회피하고자 가필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이완범에 따르면 1952년 일본판 김일성선집에 실린 1946년 9월 9일 김일성의 연설에서 언급된 부르주아민주주의는 1954년 평양판 김일성선집에서 민주주의적 과업으로 수정되었고나아가 1963년 평양판 김일성선집에서 다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수정되었으며 이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소부르주아 우경투항주의라는 비판을 회피하고자 가필한 것으로 보인다(이완범 2008, 19-20). 정창현 역시 통합진보당 해산 재판에 제출한 의견서를 통해 북한이 1970년대에 출판한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에 반제국주의반봉건 민주주의혁명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1945년 상황을 고려한다면 김일성이 실제로 이를 언급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진술하였다.
정부는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가 사후에 조작되었는가는 본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법무부, 2014b: 8). 하지만 통합진보당이 주장하는 바는 해방 당시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미국과 소련 모두를 지칭하는 의미로서 부르주아민주주의에 불과하여 폭력혁명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이 없었는데북한 정권이 성립한 이후 그러한 성격으로 변조되었다는 취지이므로 정부가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연결시키려는 해방 직후 진보적 민주주의의 위헌성을 다투는데 있어 중요한 사실이다.
정부는 해방 당시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자주연대연합평등혁명 등을 핵심으로 내걸었고이는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의 핵심내용이라고 주장하였다하지만 원래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혁명이 없었는데사후에 가필되었다는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 점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강령상 혁명적 성격이 없는 점자주와 연대연합 및 평등은 해방직후 진보적 민주주의와 무관하게 김구여운형 등 대부분의 독립인사가 주장하였고 최근에도 대부분의 진보정치세력이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정부의 주장은 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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