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좌파정당의 성장기 : 양자의 동반성장

1) 독일
 
독일사민당은 1890년 총선 이후 최다득표 정당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특히 1912년에는 34.%를 획득, 최다득표 및 최다의석(382석 중 110)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사민당의 이러한 성공은 노동계급의 숫자와 영향력이 증대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함께 연대할 수 있는 다양한 근로계층들이 급증했기 때문이다(Freyberg, 1989; 41).

1차 대전이 끝나 독일제국이 붕괴되고 독일공화국이 성립된 1919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37.9% 득표하여 165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사민당은 1920, 1924, 1928, 1930년 선거에서도 최다득표 및 최다의석을 유지하였으나 과반수 득표나 과반수 의석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독일사민당은 1932년 선거에서 21.58%133석을 얻어 37.27%230석을 얻은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에 제1당의 자리를 빼앗겼고 19333월 선거를 끝으로 나치에 의해 다른 당과 마찬가지로 강제로 해산되었다.
19181차 대전 중에 노동자병사평의회가 조직되고 노동자와 병사들의 봉기가 베를린으로 확산되자,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가 독일사민당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퇴위하였고, 즉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수상은 사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맡았다. 사민당은 1919년 제헌의회 선거 이후 1920년까지 독일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수상을 배출하였으며, 다시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집권당이 되어 수상을 맡았다. 특히 사민당의 에베르트는 1925년까지 바이마르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사민당이 서유럽의 다른 사회민주주의정당과 마찬가지로 초창기에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첫째, 유권자 중에서 노동자와 노동조합 조합원의 비율이 늘면 사회균열이론에서 보듯이 이러한 계급균열은 정당의 지지율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특히 기계제 대공업으로 인한 비숙련노동자의 폭발적 증가, 1차 세계대전 중의 임금격차의 축소 등으로 노동계급의 동질화가 심화되고 그에 따라 노동자 유권자의 계급정체성이 강화되었고 이러한 유권자의 계급균열이 정당의 지지율에 비교적 큰 왜곡 없이 반영되었다.
둘째, 사민당은 이념에 있어 사회주의를 선언하였지만, 현실에 있어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를 통한 개혁이라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명확히 함으로써 선거를 통한 합법적 토대를 확충해왔다.
독일사민당의 지도부는 1899년과 1903년의 당 대회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거부하였지만 사민당이 계급투쟁을 강화하고 정치에 참여하여 혁명을 준비해야 하나 국가에 대한 직접행동으로 대결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카우츠키 역시 사민당은 혁명적 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혁명적 대기주의로 비판받았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정치적 총파업을 개시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촉발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당 지도부는 당에 의한 총파업 투쟁은 노조의 생존과 조직 자율성에 대한 위협이라며 반대하였다.
한편 사민당은 1889년 발족한 제2 인터내셔널의 주도세력이었으며 열강들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타국 노동자와의 연대파업을 지지하였다. 이 때문에 사민당은 독일 보수주의자나 민족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비애국적이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민당 의원들은 1880년대 이후 제국의회에서 예산편성 표결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예산에 독일군부의 군사비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3년 사민당은 당시 예산이 자신의 당론인 직접세 시행을 포함하자 그 동안의 전통을 깨고 예산에 동의하였다. 나아가 사민당은 19141차 세계대전을 더욱 반동적인 러시아 정부에 대한 방어투쟁으로 인식하고 전쟁국채발행 법안에 만장일치로 동의하면서 제국정부를 지지하기에 이른다.
191512월 초기의 전쟁에 대한 흥분이 사라지면서 베른슈타인 같은 반전 수정주의자와 좌파 의원들이 전쟁에 반대하였지만 이들은 1916년에 다수결에 의해 사민당에서 축출되었다. 이들은 19174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창당하였다가 1922년 사민당과 다시 통합하였다. 또한 전쟁국채 발행에 반대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사민당을 탈퇴하여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하였으며, 이는 1918년에 독일공산당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1차 대전 직후 혁명기간 중에 권력을 인수했던 사민당의 지도부들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혼란을 회피하겠다는 의도 하에 국가의 전복을 방해했으며, 오히려 기존 권력이 유지되도록 기여했다(Freyberg, 1989; 86). 독립사민당 역시 내전을 회피한다는 명분으로 독일제국의 지배층을 청산하지 않았다. 사민당 지도부들은 오히려 제국 군대와 연합하여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였다. 집권세력이 된 다수파사민당은 새로운 헌법에 에르푸르트 강령이 포함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애초에 주장한 대기업의 사회화와 대토지소유의 폐지, 토지개혁 등은 실현되지 못했다. 다수파사민당은 국가재건을 위해 지배세력과 타협하였고 그 결과 대자본과 대지주가 군대, 정치, 사법부, 행정기관 등에 대해 영향을 미쳤던 권력의 사회적 토대는 유지되었다(Freyberg, 1989; 85). 또한 사회민주당은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집권을 계속하려면 당의 지지기반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1921년 민중정당 노선을 천명하였다.
2차 대전 직전까지 사민당이 발전하는 동안 노동조합도 사민당의 개량주의에 동조하면서 동반 성장하였다. 이 시기 양자의 관계를 보면 첫째 노동조합들은 공산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급진적인 노동자투쟁에 반대하였다. 자유노동조합총연맹은 독일제국의 포섭정책에 따라 독일제국에 대해 점차 온건한 태도로 전환하였다. 그 결과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노동계급의 총파업을 통해 체제변혁을 성취하겠다는 사회민주당 내 좌파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나 리프-크네히트 등 대해 강한 반감을 지니게 되었다. 1918111차 대전 막바지에 병사들과 노동자들의 혁명이후 전국적인 노동자협의회가 출범하였는데, 여기에서 사회민주당 소속 노동조합과 자유노동조합총연맹 소속의 우파 노동조합들이 이탈하여 1919년 독일노동조합총연맹(Allgemein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 ADGB)를 설립하였다.
사민당 좌파들이 탈당하여 만든 독일공산당은 개량적인 노동조합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공산당은 독자적인 최상급노조를 결성하지 못하였고, 루르 지방의 노동자평의회에 진출하는 수준이었다. 독일공산당은 1922년 당시 직장위원회 운동에는 영향력을 미쳤고 그해 라이프치히 노동조합대회에서 대의원 의석의 1/8을 차지한 것이 가장 높은 수치이다.
둘째 자유노조는 정치적인 총파업에 대해 사민당의 지도부보다 더 비판적이었으며 그 연장선에서 1차 대전에 반대하는 정치파업을 회피하고 전쟁에 협조하였다. 자유노조는 이미 과거에 사민당의 좌파가 노동조합에게 1905년 러시아 식 노동자 봉기를 요구하는 것에 반발한 바 있었다. 노조 지도부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 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 지도부는 인위적인 정치적 총파업에 반대하면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타협하는 대신 자신들에 대한 노조의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들은 반체제노선을 고수할 경우 온건화 된 노동조합의 지지를 잃고, 국가의 탄압에 의해 고립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개량주의 노선을 더욱 강화하였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들은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를 포기하는 대신 당 조직의 성장과 의석확대를 위해 선거에서 득표율 증대를 당의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노선은 노동조합 지도부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자유노조는 정치파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경제파업만 시도하였으며 사회적인 문제를 국가권력 참여와 사회법 제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자유노조는 사민당이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의회주의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지지하였으며, 자신들도 정부와 사용자에게 협조하였다. 노동조합은 제국의 전쟁에도 동의하였는데 1914년 사민당이 전쟁국채 발행에 찬성하기 이틀 전에 총회를 열어 일체의 파업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결의하였다.
셋째 자유노조와 그 이후 독일노동조합연맹의 지도부들은 사민당의 의회진출과 국가권력 참여에 비례하여 자신들도 의회와 정부조직, 그리고 지방차원의 권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민당과 노동조합은 사회변혁의 지향성을 상실하고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의회와 국가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해가는 나치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못하였다. 1933ADGB는 나치 정권에 의해 해제되고 일부 우파 지도부들이 나치에 순응하는 노조연합 지도부(Fuhrerkreis der vereinigten Gewerkschaften)’를 결성하였다. 기독교 노조와 자유주의(liberal) 노조들도 나치에 의해 해체되었다. 저항적 활동가들 중 대부분이 처형되었으며, 화를 면한 지도자들도 망명하였다.
 
 
2) 영국
 
1903년 노동자대표위원회 소속의 독립노동당의 제임스 램지 맥도널드(James Ramsay MacDonald)와 자유당의 글래드스톤은 특정지역에서 독립노동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는다면 자유당이 대신 다른 지역에서 독립노동당 후보를 지지하기로 하는 비밀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으로 도움으로 1906년 총선에서 보수당의 장기집권에 맞서 자유당과 노동자대표위원회 양측이 승리하였다. 또한 노동자대표위원회 소속의 독립노동당 후보 29명이 최초로 의회에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06년 자유당 안의 노동자 출신 의원 즉 리브러브의원이 54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노동자대표위원회가 1906년 노동당으로 전환될 때 자유당에서 탈당하여 노동당에 결합하였다. 1903년의 자유-노동연합’(Lib-Lab alliance)은 일부 지역에서 자유당과 노동당 후보 간에 분쟁이 있었으나 1914년까지 지속되었다.
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1870-80년대에 단지 전체 노동자의 4%(50만 명)만 조합원으로 두고 있었지만, 1914년에 전체 노동자의 20%(400만 명)을 조합원으로 두고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이호근, 2000: 121). 거대해진 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노동당을 공식적으로 지지함에 따라 노동당 당원 수가 급증하였다.
1922년 선거에서 38.2%345석을 얻은 보수당에 이어 노동당은 29.5%의 득표로 142석을 획득하여 제2당이 되었고 반면 자유당은 29.1% 지지로 116석에 머물렀다. 노동당은 이듬해 선거에서 30.5%의 지지에 191석을 얻어 29.6%의 지지에 159석을 확보한 자유당과 소수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반면 보수당은 38.1%의 지지에 258석을 얻었다. 1924년 선거에서 소수 연립정부는 패배하였지만 노동당은 33%의 지지에 151석을 얻어 17.6%의 지지에 40석에 그친 자유당을 큰 차이로 누르게 되고 반면 보수당 48.3%의 지지에 419석을 얻어 정권을 탈환하였다. 1929년 선거에서 노동당은 37.1%의 지지에 288석을 얻어 23.4%의 지지에 59석을 획득한 자유당과 다시 소수연립정부를 구성하였고, 반면 보수당은 38.2%의 지지에 260석에 그쳐 정권을 잃었다.
한편 독립노동당( Independent Labour Party)은 영국사회민주주의연맹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정치단체가 노동당에 결합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영국사회민주주의연맹은 독립노동당이 주축이 된 노동당에 결합하지 못하다가 1912년 독립노동당의 좌파와 함께 영국사회당(British Socialist Party)을 창당하였다.
하인드먼의 지도 아래에 있던 영국사회당은 노동자 폭력혁명보다는 선거를 통한 국가권력 장악을 선호하였다. 영국사회당은 노동당과 공식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노동당을 혁명적인 노동자정당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였지만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이 시기 레닌은 노동당을 자본주의 노동자정당으로 규정하고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당과 공식적인 관계를 끊는 대신 개별적으로 노동당에 입당하여 노동당의 기층당원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입당전술을 권유하였다(클리프, 2008; 173). 영국사회당은 1차 대전에 직면하여 전쟁에 협조하려는 우파와 반대하는 좌파로 나누어졌으며 우파의 일부는 1916년 노동당에 흡수되었고, 잔존하였던 좌파는 1920년 대브리튼공산당(Communist Party of Great Britain)으로 전환하였다.
노동당은 독일사민당과 마찬가지로 제1차 대전에 즈음하여 자국의 제국주의 전쟁 가담에 반대하고 국가전복을 꾀하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였다. 애초에 노동당과 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1차 대전을 제국주의 경쟁의 산물로 보고 영국의 참전을 반겨하지 않았다. 1912년 노동당은 향후 전쟁 발발 시 총파업을 개시하는 문제를 검토하기로 하였으나 노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독일제국이 벨기에를 침공한 이후 노조 지도부는 제1차 대전을 영국의 민주주의와 독일제국의 권위주의간의 대결로 보면서 전쟁에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동조합의 입장은 노동당에게도 그대로 투영되어 노동당은 19148월에 자발적으로 전시파업을 중단하는 선언을 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정부와의 협정을 통해 전시군수법에 동의하였고 1916년에 이르러 자유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전쟁내각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계급타협은 전시상태에서 노동계급의 양보를 강요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당이 전쟁 중에 의회에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노조의 대표로서 자기 입지를 확고히 하였고 정부의 필수적인 파트너라는 정치적 지위를 획득하도록 하였다.
1918년 노동당 당헌은 당의 궁극적 목표를 전시노동자 및 육체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의 완전한 대가를 받고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를 기반으로 가능한 한 가장 균등한 분배를 확보하여 공공행정과 각 산업 및 서비스의 통제를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라 표명하였다. 이러한 사회주의 당헌은 광산과 철도의 국유화, 사회복지의 발전, 의료 주택 교육의 최소기준 채택, 자유무역의 재개, 시민적 자유의 회복, 누진세 등의 내용을 포함하였다. 하지만 당헌 채택 이후에 사회주의적 정책은 구체화되지 못하였다. 1918년 사회주의 당헌 초안은 온건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페이비언 협회에 의해 작성되었기 때문에 애초에 소련식의 계획경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이 아니라 페이비언의 이론적 입장에서 노동당 내의 급진적인 독립노동당과 개량적인 노동조합대표자회의의 입장을 절충한 것이었다.
노동당이 1차 대전 이전에는 노조를 위한 의회의 압력집단에 불과하였지만 1차 대전 직후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1차 대전 중에 자유당과 소수연립정부를 함께 운영하면서 일반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이 노동자의 이익뿐만 아니라 국민의 이익도 대변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특히 전쟁 내각을 주도하면서 국정운영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노동당 지도부는 연립정부에서 사회주의 정책을 고집하기보다는 타당과 협조하면서 노동당도 통치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역점을 두었는데, 심지어 부두노조의 파업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파견하였다. 1929년과 1931년 사이 노동당은 다시 정부를 구성하게 되는데 맥도날드 수상은 세계공황에 직면하여 거국일치를 주장하고 노동당의 사회계획을 포기하였다.
노동당과 노동조합대표자회의의 관계는 독일이나 프랑스와 달리 공식적인 지지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기구와 집행기구까지 상호 인적 자원을 공유하였는데, 이는 각종 할당 제도를 두어 조직적 결합을 제도화했던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와 유사하였다.
첫째 조직적인 결합을 보면 일단 1990년대 중반까지 노동당 당원의 95%가 노동조합대표자회의(TUC) 조합원이었고 조합원들은 대의원의 자격으로 당 대회에 참석해 정책을 결정하고 이들 대의원들이 선출한 노동조합의 대표자들은 중앙집행위원회(NEC)에서 당 운영에 관여하였다. TUC 총평의회, 원내노동당, 당 지도부가 참여하는 전국합동위원회(National Joint Council)’1931년 구성원 비율을 살펴보면 전체 13명의 위원 가운데, TUC7명의 위원을 차지하고 있었다(임무송, 1997: 16-17). 또한 중앙집행위원회 대표는 자동적으로 배정받는 10개 노조의 위원들과 나머지 노동조합들이 공동으로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노동당 초기에 지도부에 대한 선출권한은 노동당 의원들에게만 주어졌으나 1981년 정당대회 이후 노동조합 40%, 지구당 30%, 원내노동당 30% 등으로 지도부를 선출할 선거인단이 구성하게 되었다. 다시 1993년 정당대회 이후 노동조합, 지구당, 원내노동당이 모두 3분의 1씩 참여해 선거인단을 구성하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정당대회의 투표권의 약 90%를 노동조합이 점유하고 있었으며, 상위 4대 노조가 60%의 유효 득표를 점유하였다. 특히 1995년 폐지되기 전까지 정당대회에서 단일 노조의 지도부의 결정이 전체 조합원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해 해당 조합의 모든 투표권을 하나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블록투표(block vote)를 유지하고 있었다.
둘째 재정적 결합을 보면 노동당은 초기에 TUC와 조직을 공동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에 노동당 운영비의 약 90%TUC의 정치자금에 의존하였다(임무송, 1997: 16), 이 비율은 1970년에는 88%, 1980년대 말에는 80%,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65%로 점차 낮아졌다(Djanogly and Duncan, 2007: 1). 1918년 노동당 지도부는 노동조합의 의존에서 벗어나고자 노동조합의 권한을 훼손하지 않는 조건에서 당비를 내는 개인당원제를 강령에 도입하였다. 노조원은 조합의 정치자금을 통해 노동당에 가입비를 지불하고 대표와 부대표 선거 등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당원이 되려면 개인당원으로서 별도의 당비를 내야만 하였다. 또한 TUC 내 단위노조들은 개별적으로 노동조합후원 의원(Trade Union-sponsored MPs)’을 지정하여 재정지원을 할 수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약 80-90%의 노동당 의원이 이에 해당하였고, 이 제도가 폐지된 1996년까지 조합후원 의원은 전체 노동당 의원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단일노조들은 후원할 의원을 선출하여 선거비용의 최대 80%까지 지원을 하고, 1년간 지구당 운영비를 지원할 수 있었다(채준호, 2008: 38).
셋째 당과 노동조합은 지방과 국가 차원에서 의회와 정부에 참여하여 상호 의제를 관철하고자 노력하였다. 1926년 총파업의 실패는 노조가 의회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조직한 총파업은 처음에는 150만 명이 참여하였으나 총연맹의 지도부가 9일 만에 총파업을 철회한 후에도 석탄노동자는 9개월 동안 파업을 이어갔다. 이 파업이 실패한 이후 영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지도부는 지도력에 큰 타격을 받았으며, 정부정책을 바꾸기 위해서는 파업과 같은 노동현장의 동원뿐만 아니라 의회에서의 정치력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노동당에 대한 경제적 조직적 지원을 확대하는 등 노동당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하였다. 노동당이 국가권력에 접근함에 따라 노동조합대표자회의 지도부 역시 국가기구에 참여하거나 의사결정에 관여하였는데, 각종 정부위원회에 참여한 조합원의 수는 19321명에서 193912, 194860명으로 증가하였다. 2차 대전 직후 집권한 Attlee 정부에서 주요 각료 20명 중 6명이 노조 출신이었고, 주요 고위직 81명 중 29명이 노조후원의원들이었다. 노동조합은 또한 전시에 설립된 노동정책 협의기구인 전국합동자문위원회(National Joint Advisory Council)’1947년 설립된 경제기획위원회등 다양한 노사정 3자 기구에 참여하며 당시 노동당 정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임무송, 1997: 17- 18).
 
 
3) 프랑스
 
프랑스통합사회당은 1906년 득표율 10%90만 표 득표에 전체 585석 중 51석을, 1910년에는 득표율 12%100만 표 득표에 전체 595석 중 76, 1914년에는 득표율 17%140만 표 득표에 전체 601석 중 103, 1919년에는 득표율 21%172만 표 득표에 전체 613석 중 68석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통합사회당 당원은 190545천 명, 19149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192012월 통합사회당은 뚜르전당대회에서 압도적 다수결로 소련공산당이 주도하는 제3인터내셔날인 코민테른에 가입하기로 결의하였고, 레닌이 제시한 21개의 가입조건도 승인하였는데 이에는 모든 개량주의자의 축출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대회에서 통합사회당의 소수세력이 표결의 결과에 항의하며 전당대회장에서 퇴장하자, 다수세력은 그 자리에서 공산당을 창당하였고 소수파는 통합사회당에 잔류하였다(이학수, 2004). 통합사회당의 18만 명 당원 중 14만 명이 공산당(PCF)으로 옮겼지만 기존 지도부와 의원의 대부분, 지역간부 등이 통합사회당에 남았다.
이후 총선에서 경쟁관계에 있었던 양당의 선거 결과를 보면 공산당이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1924년 통합사회당이 20.1%104, 공산당이 9.82%26, 1928년 통합사회당이 18.05%100, 공산당이 11.26%11, 1932년 통합사회당이 20.51%132, 공산당이 8.32%10석을 획득하였다. 1936년 선거에서 통합사회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였으며(19.86%, 149), 공산당도 크게 약진하였다(15.26%, 72).
당원 수를 보면 통합사회당이 1926년까지 11, 1932년에는 13만 당원을 확보하였고, 반면 공산당 당원은 192013만에서 19323만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19366월 공장점거 대중파업을 전후로 공산당 당원 수가 폭증하여 통합사회당 당원 수를 넘어서기 시작하여 1938년에는 35만에 도달하였는데 이때 통합사회당 당원 수는 24만이었다.
1차 대전을 전후로 프랑스 좌파정당은 다른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원내 주요정당으로 성장하지만 프랑스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통합사회당은 영국노동당이나 독일사민당과 달리 1차 대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 직전에 통합사회당은 국제적 총파업을 통해 반전운동을 펼친다는데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가 독일의 침략을 받을 경우에는 공화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통합사회당은 부르주아내각으로의 참여 반대 입장을 철회하고 우파인 민주공화동맹 레몽 푸앵카레(Raymond Poincaré)대통령에 의해 수상으로 임명된 독립사회주의자인 르네 비비아니(Rene Viviani)의 부르주아내각에 참여하였다. 통합사회당과 CGT의 전쟁협력에 대해 정부는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신뢰정책(policy of confidence)으로 보답하였다.
하지만 1917년 수상이 된 클레망소가 신뢰정책을 중단하자 통합사회당은 영국과 달리 전쟁 중에 연립정부에서 이탈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1810월 당대회에서 마르크스의 손자인 장 롱게가 이끄는 소수파가 전쟁에 협조하였던 다수파를 비판하면서 통합사회당 집행부와 기관지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전시체제의 탄압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정부에 더욱 비판적인 경향을 보이고 통합사회당과 CGT 내에서 러시아혁명과 레닌의 영향력이 증가하였고 이러한 흐름은 결국 다수파의 공산당 창당으로 귀결되었다.
둘째, 개량주의가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는 영국이나 독일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개량주의적인 통합사회당과 소련을 추종하는 완고한 공산당이 양립되었고, 그러한 분열 때문에 영국이나 독일과 달리 통합사회당의 집권은 1932년에 가서야 급진당과의 선거연합으로서 가능하였다.
공산당은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의 노선을 수용하였는데, 그 결과 당의 권력은 집중되고 당의 입장이 경직성을 띠었으며, 특히 코민테른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변덕스런 입장을 추종하였다. 공산당은 1928년부터는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라 통합사회당을 사민주의 파시스트라고 공격하였다. 그 결과 일부 지도자는 코민테른의 사회민주주의 공격노선에 항의하여 공산당을 떠났다.
그런데 급진당이 연립정부의 파트너를 통합사회당에서 우파정당으로 바꾸면서 경기침체와 정국혼란이 가중되었다. 이 와중에 1934년 파리에서 파시스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에 대항하여 공산당과 사회당이 시위를 하고 CGT와 통일노동총동맹(CGTU)이 파업에 나서 프랑스 공화국이 위기에 빠졌다.
19346월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노선변화에 따라 통합사회당을 포함한 중간층에게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인민전선’(Popular Front)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공산당과 통합사회당 및 급진당은 1935년 반파시스트 시위를 함께 조직한 후 1936년 인민전선을 구성하였고 인민전선은 그해 5월 선거에서 우파의 긴축정책의 실패로 인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다만 공산당은 연립정부를 지지하면서도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인민전선은 19376월까지 유지되었으나 급진당이 지배하는 상원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의 경제포고령권한을 거부하면서 분열이 가시화되었다. 이후 급진당이 내각을 이끌게 되나 19384월 달라디에가 사회당을 배제하고 중도-우파연합정부를 구성하여 인민전선은 붕괴되었다.
그런데 프랑스 공산당은 1939년 스탈린과 히틀러 간의 불가침조약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반파시스트 투쟁에서 평화 옹호로 노선을 바꾸었고 달라디에정부는 이를 기회로 공산당을 불법화하였다.
2차 대전 이전까지 당과 노조의 관계를 보면 첫째 프랑스노동총동맹이 생디칼리즘에서 일부 후퇴하여 통합사회당과의 협력을 높이자, 노조원의 정치참여가 증가하였다. 통합사회당은 1906년의 아미앙헌장을 수락하고 노조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CGT와의 관계 강화를 추구하였다. CGT의 반정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노조원들은 사회주의를 지지하였으며 노조 지도자들이 대거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통합사회당의 성공이 의미하는 것은 프랑스 노동운동은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정당과 적극적 연대를 결정한 1914년 이전에 이미 국가공동체에 통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통합사회당이 1차 대전을 전후로 하여 전쟁협조와 전쟁반대 사이에서 혼선을 걷다 다수파가 코민테른의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분당되자 노동총동맹 역시 이러한 혼란을 겪으면서 2차 대전 직전까지 분열되었다. 19141차 세계대전에 즈음하여 통합사회당은 국제적 총파업을 통해 반전운동을 펼친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1792-93년간 프랑스 혁명방어를 위해 나섰던 자코뱅의 예를 따라 모든 사적 이익을 국가 방어의 필요성에 종속시켜야 하며 군사적 비상시에 모든 정당정치를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에 선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통합사회당은 비비아니 내각에 두 명의 사회주의자를 참여시켰는데 그 중 하나는 프랑스의 대표적 마르크시스트인 게드였다. 또 다른 독립사회주의였던 브리앙이 191510월 수상이 되었을 때도 3명의 사회주의자가 내각에 참여하였다.
CGT는 원래 국가권력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파업을 번번이 진압하는 군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전쟁이 발발하면 총파업으로 저항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실제 독일과의 전쟁이 발생하자 CGT 사무총장이었던 주오는 공화국을 외침에서 방어하고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적극 참여할 것을 밝혔다. 이에 상응하여 CGT의 대부분의 지도자들도 비공식적으로 파업 자제와 전시 산업동원에 협조하였다. 물론 이러한 입장변화는 사실 프랑스 노동자 대중의 의식 수준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로써 자기부정적인 한계를 노출한 생디깔리즘은 쇠퇴하였다. 이러한 쇠퇴 이전에 CGT는 이미 정부에 보조금을 요청하는 등 비정치성에 반하는 행보를 해왔으며, 이렇다 할 총파업을 조직한 바도 없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소수파도 두 파가 있었는데 온건파는 군사적 승리보다는 협상을 통한 평화를 지지하였으나 산업동원과 파업자제에는 찬성하였다. 급진파는 아나키스트와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로 구성되었는데 평화와 혁명을 연계시키면서 다수파를 공격하였다.
1차 세계대전 중에 CGT 다수파는 보다 일관되고 명백하게 개혁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개혁의 내용에는 계약적 노사관계, 노동자 대표의 인정, 임금과 노동조건에 관한 협의, 국가 규제의 확대, 광산과 철도에 대한 국유화 등이 포함되었다. CGT1918년 개혁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면서 거리의 봉기만이 아닌 보다 건설적인 노선을 주장하였다. 경제민주주의와 산업민주주의, 특히 노사정이 참여하는 전국 경제위원회 설치를 요구하였다. 반면 소수파는 전시동원과정에서의 억압적 측면 때문에 더욱 급진화하였고 혁명노선을 강화하였다. 1919년의 총파업 실패와 국가의 억압은 통합사회당 내 급진적 소수파의 영향력 확대로 연결되었고 이는 공산당 창당의 배경이 되었다.
코민테른은 각국의 공산당들에게 노동조합 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혁명적 노동조합을 건설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이에 따라 192112월 노동총동맹 내 공산당 당원들은 공산당에 의해 지도되는 통일노동총동맹(CGTU)을 결성하였다. CGTU는 공산당과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로 구성되었으나 공산당의 당 우위 노선으로 많은 생디칼리스트가 탈퇴하여 결국 공산당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하였다. 공산당의 지도를 당연시하는 CGTU의 노선은 정당으로부터 독립을 강조하는 CGT의 생디칼리즘 전통이 공식적으로 부인되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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