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해체과정

1) 혁명의 실패와 공산주의자동맹의 재건
 
18483월 독일혁명의 결과 독일 각지에서 부르주아 정부가 들어섰으나 1849년에 이르러 이들 부르주아 정부는 봉건세력들에 의해 와해되거나 반동의 길로 들어섰다. 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의 혁명적 성격이 자취를 감춘 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성격은 아직 성숙된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은 실패하고, 반동적 정부들은 공산주의자동맹과 같은 혁명적 민주주의자들과 노동자 조직을 탄압하였다. 독일 공산주의자동맹의 주요 지도자들은 주로 런던으로 망명하여 동맹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열성적인 구성원들은 전투 중 사망하거나 체포되었고, 나머지 구성원들도 대부분 연락이 두절되었다. 또한 중앙위원회는 기능을 중단했고, 지방조직도 대부분 붕괴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포함한 공산주의자동맹의 중앙위원회 구성원들은 1849년 가을 런던에 모였다. 혁명 당시 중앙위원회로부터 전권을 부여받은 바 있는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을 미래의 대규모적인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핵심으로 재건하고자 하였다. 이에 마르크스는 18498월 말 내지 9월 초에 런던에서 중앙위원회를 재건하였다.
혁명기간 중에 공산주의자동맹은 다른 노동자조직과 마찬가지로 언론출판 및 집회의 자유 등 합법적인 정당 활동의 자유를 얻었었다. 하지만 이들은 혁명의 패배와 함께 대륙에서 이러한 자유를 박탈당하였다. 1849년 혁명이 실패한 후 독일의 경찰뿐만 아니라 프랑스 경찰까지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런던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동맹원들을 철저히 감시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동맹은 혁명 전과 마찬가지로 반혁명의 탄압에 직면하여 비밀리에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자동맹 앞에 놓인 주요과제는 독일 내 비밀조직과 공개조직을 동시에 갖춘 독자적인 노동계급 당을 창건하는 일과, 각 동맹의 지방조직을 합법적인 노동자 중심의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일이었다. 마르크스는 185036일에 공산주의자동맹의 기관지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서 런던과 함부르크, 뉴욕을 발행지로 하는 월간지 신라인 신문 · 정치경제 평론을 창간하였고 이 잡지는 11월까지 발행되었다. 공산주의자동맹 런던 중앙위원회는 합법적으로 회동하고 발표할 수 없는 조건에서 조직을 재건하여 비밀리에 혁명 활동에 나서고자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결정하였다.
첫째, 동맹은 불가피하게 비밀스런 중앙집권적인 당으로 전환하기로 하였다. 동맹의 재조직화는 중앙위원회의 지령을 받은 비밀활동가를 통해 추진되었다. 노동자정당을 비밀리에 다시 조직하기 위해 중앙위원회의 지령을 잘 수행할 수 있는 훈련된 비밀활동가를 독일 각지에 파견하는 일이 극히 중요해졌다. 혁명의 실패로 인해 약화된 중앙위원회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연락원과 비밀활동가가 독일 전역에 파견되어 동맹의 회원들을 다시 규합하여 지방조직을 재건하였다.
둘째, 동맹은 기존의 계급연합적인 민주주의 연합조직에서 탈퇴하여 동질적인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조직의 설립을 추진함으로써 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과 완전히 결별하기로 하였다. 지난 노동자 혁명운동은 전체 민주주의 운동 속에서 소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의 지도와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 하지만 부르주아는 18483월 혁명 이후 장악한 국가정권을 이용하여 자기의 전투적 동맹자이던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종전의 피압박상태로 되돌아가게 했다. 부르주아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 3월에 패배한 봉건당파와 동맹을 맺고, 봉건 전제주의 당파에 지배권을 양도하였다.
또한 부르주아는 정부의 재정난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지배권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여 줄 조건들을 확보해 놓았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와 다시 연합한다면 자기의 독립적 지위를 상실할 것이며, 노동자는 또다시 어용 부르주아 민주파의 부속물로 되고 말 것이 분명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사태는 끝내야 하고, 노동자들의 독자성이 회복되어야 했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자동맹의 6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은 일부 지부의 계급 연합적 구성을 비판하며 노동자중심의 조직으로 전환할 것을 강조하였다. 예를 들어 6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스위스 지부가 거기에 망라된 성원들이 잡다하였기 때문에 어떤 일정한 정당의 성격을 띠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1849918일 마르크스는 독일망명자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이어 11월에 소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공산주의자들로만 구성된 사회민주주의망명자위원회를 재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셋째 동맹은 1848년 혁명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로운 혁명이 임박하였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특히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은 1849년 혁명을 전망하는데 있어 프랑스로부터 선제적인 혁명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혁명이 다시 발발한 경우 노동계급의 승리는 유럽전쟁으로 비화될 것이고, 거기에 영국이 연루될 것이기 때문에 곧 세계전쟁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믿었다. 마르크스는 1847년 유럽 경제공황의 여파가 1849년 당시에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씨앗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동맹은 이러한 혁명적 전망에 근거하여 노동자들에게 무장봉기를 포기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승리의 첫 시각부터 노동자를 배반하기 시작하는 부르주아 당파를 제압하자면 노동자들은 무장하여야 하며, 조직이 있어야 한다. 소총, 기병총, 대포, 탄약으로 즉시 무장해야 한다. 새로운 공식적 정부와 나란히 노동자들은 시위원회와 시의회의 형태, 노동자클럽, 혹은 노동자위원회의 형태로 그들 자신의 노동자정부를 건설해야 한다. 무기와 탄약은 어떤 이유로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넷째, 동맹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강조하였다. 이는 부르주아혁명 이후 부르주아가 토지분배를 통해 농민을 회유하면서 동맹을 맺어 노동자와 대립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 장기적으로 소농의 착취구조를 만드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향후 혁명과정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이 봉건제도의 철폐를 놓고 충돌할 것이며, 이때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에 대한 소토지 부여에 반대하고 그 대신에 봉건영지를 국가재산으로 몰수하여 국영 노동자농장으로 만들어 농촌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하도록 하고 이들과 연합해야 한다.
 
다섯째 동맹은 독일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지방분권의 확대보다는 단일한 독일공화국을 고수하고 전 국가의 힘을 중앙정부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맹은 1793년 프랑스의 경우처럼 당시의 독일에서 엄격한 중앙집권제의 실시야말로 진정한 혁명당의 과제라고 인식하였다.
18503월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는 혁명운동을 재개하고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로 하여금 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의 목적은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그 당시 정세와 혁명시기에 있어 노동자 당의 입장 특히 동맹의 입장을 전체 동맹의 구성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에 따르면 혁명운동에 참가하였던 대부분의 동맹원들이 1848년 혁명의 고조기에 비밀결사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이제는 공개적 활동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일부 조와 반들은 중앙위원회와의 연계를 끊어 버렸다. 그 결과 공산주의자동맹은 자신의 유일한 공고한 기둥인 중앙위원회를 잃고, 기껏해야 개개의 지방에서 지방적 목적을 위한 조직형태로 존속하였을 뿐이며, 일반적 운동에서 전적으로 소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의 지배와 지도하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중앙위원회는 특사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18506월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는 다시 한 번 전체 구성원에게 보내는 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이 호소문의 목적은 3월에 각국에 파견한 특사의 보고를 통해 각국의 공산주의자동맹의 활동을 점검하고, 특히 모범사례를 공유함으로써 조직 재건을 독촉하려는 것이었다. 중앙위원회는 이때까지 여전히 새로운 혁명이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바라보면서 각 지도조들에게 6월 호소문을 동맹원들에게 배포하고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호소문에 따르면 독일 전국 각처에서 혁명적 정당의 강력한 비밀조직을 요망하는 기운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또한 스위스에서 새로운 비밀단체를 창설하려는 시도가 생겨 중앙위원회는 이곳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중앙위원회는 중앙위원회와 연계가 끊어져 조직이 붕괴된 파리 조가 향후 조직 재건과정에서 신입 동맹원을 신중하게 심사할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 런던 조는 독일인 노동자 계몽협회 등을 무대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혁명적 차티스트당의 지도자들과도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런던 지도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맹의 재건은 중앙위원회나 개개의 지구 단위로는 진행되긴 했으나 제3회 전체 대회를 열 정도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2) 공산주의자동맹의 분열과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
 
마르크스는 혁명은 자본주의 생산력과 부르주아 생산양식이 서로 모순관계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이므로 또 다른 유럽 혁명은 또 다른 공황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1850년 중반까지 당시 유럽이 1847년 공황의 여파에 있었고 나아가 또 다른 공황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곧이어 발생할 유럽의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1850년 중반 이후 경제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조만간 유럽에 공황이 발생하여 혁명이 촉발하리라는 예상이 타당하지 않다고 깨달았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1848 혁명의 동인이었던 1847년 경제공황은 완전히 소멸했으며, 1849년과 1850년에 이르러 유럽의 경기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치솟아 유럽 반동들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즉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함께 잠정적인 비혁명기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전반적 번영기에는 진정한 혁명에 대해 논할 수 없기 때문에 1850년 중에는 더욱 확실하게 새로운 혁명의 기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엥겔스는 1895년 쓴 마르크스의 프랑스의 계급투쟁서문에서 1850년을 회상하면서 역사는 우리 자신이 오류에 빠져 있음을 입증해주었다. 당시 대륙 내 경제발전은 자본주의 생산의 폐지에 도달할 만큼 무르익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밝혔다.
또한 유럽에서 혁명의 기운이 수그러들고, 다시 폭압적인 반동정치가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섣부른 봉기는 지배계급의 탄압을 불러일으켜 조직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이미 추방자동맹과 의인동맹 시절부터 경솔한 봉기로 인해 수차례 조직이 노출되고 핵심지도자들이 체포됨에 따라 붕괴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런 무분별한 봉기를 일관적으로 반대하였다. 이러한 전망에 따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당분간 혁명이 촉발되지 않는다는 전망 아래 비교적 긴 반동적 통치기를 가정하고 공산주의자동맹의 기존의 전술을 재고하고 새로운 조직 활동을 모색하였다.
반면 윌리히와 샤퍼 등 공산주의자동맹 내 좌익파벌은 혁명운동의 퇴조기라는 마르크스의 진단을 비판하면서 여전히 위험한 모험주의적 봉기전술을 주창하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과정에서 바덴봉기의 지휘자였던 감정적 공산주의자인 윌리히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제치고 런던에서 좌익파벌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윌리히와 샤퍼 진영은 중앙위원회에서는 소수파에 머물러 있었지만, 런던의 동맹 조직 전체에서는 압도적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좌익파벌은 공산주의 확립을 위해 어떤 물질적 전제조건들이 요구된다는 점을 부정하고, 소수의 의지를 관철함으로써 단번에 공산주의가 확립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는 독일혁명에 있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제들은 공산주의적 변혁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씨름해야 하는 선결과제라며 이들에 반대하였다. 이들 좌익파벌들은 마르크스의 전술을 거부하면서 동맹이 즉각적인 독일혁명을 실현하려는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1850915일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에서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 회의에서 마르크스는 논쟁을 일삼는 런던 선동가들로 인해 중앙위원회가 어떤 지도력도 발휘할 수 없으므로 중앙위원회를 쾰른으로 옮기자고 제안하였다. 또한 마르크스는 런던에 두개의 지부를 설치하여 좌익파벌들과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이들 좌익파벌들은 런던에 독자적인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별도의 조직인 '분리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에 중앙위원회 다수파인 마르크스 진영은 자신들의 중앙위원회를 쾰른으로 옮겼다. 쾰른 중앙위원회는 12월 마르크스의 주도에 의해 윌리히와 샤퍼를 제명하였다.
1851510일 쾰른 중앙위원회의 밀사인 페터 노트융이 라이프니치히에서 체포되고, 이어서 함부르크에서 하우프트가 체포되었다. 특히 하우프트가 변절하여 동맹의 중앙위원들을 쾰른 당국에 밀고하였고, 그 결과 프로이센 비밀경찰 참사관 슈티버가 쾰른의 공산주의자동맹 주소록과 런던의 공산주의자동맹 자료를 손에 넣었다. 이로써 공산주의자동맹의 존재가 드러났다. 18515월과 6월에 걸쳐 독일 전역에 검거선풍이 불어 닥쳤다. 뷔르거스, H. 베커, 다니엘스 등 쾰른 중앙위원회 거의 모든 멤버들이 체포당하였다. 프로이센 정부는 체포된 11명의 공산주의자동맹 회원들을 대역죄의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죄명으로 기소하였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오랫동안 연기되다가 쾰른에서 1852104일부터 5주간 열렸다. 변절한 하우프트와 비밀경찰 슈티버가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섰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에서 추방당한 후 런던에서 봉기를 선동한 샤퍼 - 윌리히파에게 반역죄의 혐의를 돌리고 공산주의자동맹 자체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1112일 공산주의자동맹의 중앙위원 대부분에게 유죄가 선거되었고, 11명 중 7명이 6-7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 탄압으로 쾰른의 중앙위원회는 괴멸하였다.
마르크스는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의 진상이라는 익명의 소책자에서 이 사건이 프로이센 당국이 공산주의자를 박멸하기 위해 꾸민 계략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샤퍼 - 윌리히파가 프로이센 정부와 내통하여 일부러 공산주의자동맹의 자료를 경찰에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가 샤퍼 - 윌리히파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우려 한 것은 이들이 무장봉기를 주장하며 공산주의자동맹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실제로 반역죄의 혐의가 있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을 견제하려고 한 측면이 컸다.
한편 18524월 파리에서 쉼멜페니히가 가택수색을 당하고 8월에는 파리에서 공산주의자의 음모가 발각되어 셰르처, 셰르발, 기펄리히가 체포되었다. 이들은 재판을 받지 않는 대신 프랑스에서 추방당하였다. 마르크스는 이것도 샤퍼 - 윌리히파에 의해 발각된 자료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1852년 쾰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판결과 함께 독일의 독자적인 노동운동은 제1기를 끝마쳤다. 반동세력이 날로 강화되어 갈수록 공산주의자동맹은 더 이상 여력이 남지 않았다. 결국 마르크스 진영의 공산주의자동맹은 18521117, 마르크스의 제의에 기초하여 스스로 해산하였다. 윌리히 - 샤퍼의 분리동맹도 수개월 후 1853년에 아주 없어졌다.
동맹의 해체 이후 마르크스가 소속되었던 공산주의자동맹의 잔류파들도 내부투쟁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런던의 독일망명자 그룹의 이러한 분열에 점차 환멸을 느끼고 런던에서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경제학을 연구하기 위해 대영박물관 열람실로 들어갔다. 이 시기에 런던의 독일망명자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1852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 등 에 의해 집필된망명자 위인전이다. 이 저서는 1850년부터 51년에 걸친 런던의 독일인 정치망명자들의 정치활동과 대립을 보여주고 있다. 1861년 이후 킨켈을 비롯한 많은 망명자들이 독일로 돌아가거나 윌리히처럼 미국으로 건너가는 가운데 마르크스, 루게, 샤퍼 등은 망명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없어졌지만, 혁명과 그 전후를 포함한 동맹의 교훈은 1864년에 결성된 '국제노동자협회'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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