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좌파정당의 발생기 : 양자의 관계 설정

1) 독일
 
1848년 혁명 시기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한 갈래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이끈 공산주의자동맹이었고, 다른 하나는 18489월 제1회 노동자회의에서 결성되어 15천여 명의 회원을 보유했던 슈테판 보른(Stephan Born)노동자형제단(Arbeiterverb-ruederrung)’이었다(강명세, 2002: 6). 이 조직은 1850년에 이르러 250여개의 지방지부가 있었지만 독일혁명이 실패한 후 모두 해산되었다. 18547월 정치적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목적을 가진 노동조합 등의 조직에 대해서는 해산령이 내려졌고, 파업은 금지되었다. 1859년에는 공장노동자와 수공업자를 위한 교육중심의 노동운동조직의 연합체로서 노동자교육협의회가 구성되었다.

1862년 작센주가 처음으로 노동자의 단결을 허용하였으며, 1871년 독일제국이 성립되면서 전 독일에 걸쳐 노동자의 단결이 허용되었다. 1862년 런던을 방문하여 영국 노동조합을 시찰한 작센주의 노동자 그룹은 전국노동자회의를 소집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를 위해 라쌀과 접촉하였다. 이에 1863년 라쌀은 부르주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자주적인 노동자정당을 주장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11개의 도시에서 노동자대표들이 참석하여 최초의 독일 사민주의 노동자정당인 ADAV(전독일노동자연맹: Allgemeine Deutsche Arbeiterverein)을 결성하였다. ADAV는 라쌀의 주장에 근거하여 강령에서 임금철칙과 국가의 지원에 의한 생산조합의 필요성을 선언하고 자본가의 착취에 대한 계급투쟁과 보통선거의 도입, 자유롭고 생산적인 조합의 설립 등을 요구하였다(Potthoff, 2006; 30).
1863독일노동자협회대회(Vereinstag Deutscher Arbeitervereine: VDAV)’가 성립되었으나 베벨의 주도로 국제노동자협회의 강령을 지지하자 자유주의자 그룹이 탈퇴하였다. 1869VDAVADAV에서 탈퇴한 세력과 함께 독일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창당하였다. 마르크스의 영향에 있던 SDAP는 라쌀의 영향에 있던 ADAV와 통합하여 1875년 마르크스주의와 라쌀주의를 절충한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을 만든다. 독일사회민주노동자당은 1871102천표를 얻었으며,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은 1877110일에 실시된 독일제국의회 선거에서 175선거구에 후보자를 내어 전 투표수의 9%493천여표, 의석 12석을 얻고 제4당이 되었다(이태복, 1981: 7-8).
독일제국의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 온건 분파를 보수적 지배연합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1878년 빌헬름1세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을 빌미로 선거운동에의 참여와 의회 활동을 제외한 일체의 사회민주주의적 조직 활동과 공개적인 정치운동을 금지하는 사회민주주의자의 위험한 활동을 단속하는 법률(사회주의자탄압법)’을 만들었다.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 도입이 노동운동에 대한 당근이라면 사회주의자탄압법은 라쌀의 의회주의적 노동운동에 마르크스의 혁명적 노동운동이 결합되는 것을 막는 채찍이었다. 이 법률로 인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은 불법화되어 모든 당 회합과 출판물, 그리고 자금모금이 금지되었다. 사회주의자탄압법은 자유노동조합까지 탄압하였다.
하지만 사회주의자탄압법은 사회주의자들이 개인자격으로 제국의회에 입후보하거나 제국의회에서 토론과 연설을 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은 사회주의자탄압법에도 불구하고 선거참여와 의회활동 전술을 확장할 수 있었다.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은 1887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763천표를 얻었으며, 특히 18901427천표 19.7%를 얻어 최다 득표 당으로 부상하였다.
이에 1890년 독일제국은 사회주의법률을 폐지하였고 합법화된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은 독일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SPD)으로 당명을 바꾸고 반체제정당에서 합법정당으로 전환하였다. 독일사민당은 이듬해 에르푸르트 당 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 강령은 계급투쟁의 원칙을 선언하고 생산수단과 교환 및 분배의 사회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극복을 지향하였으며 동시에 법제도 개선과 선거를 통한 독일 정치체제의 민주적 개혁도 추구하는 등 점진적 수단에 의한 혁명적 목표의 달성을 내세웠다.
당시 독일제국의회는 내각해산권이나 제정된 법률의 시행을 강제하는 권한이 없었다. 사민당의 정치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하였지만 사회민주당의 성과는 노동계급에게 매우 고무적인 결과이었다. 당시 엥겔스는 독일사민당이 새로운 예리한 무기인 보통선거를 계속 활용한다면 20세기말에 이르러 쁘띠부르주아와 소농 등 중간계층의 대부분을 장악하여 결정적인 세력으로 성장할 것이다고 전망하였다(마르크스, 1988b, 25).
한편 독일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최초의 전국적인 산별노동조합은 1848년 혁명 당시 결성된 인쇄공조합과 연초제조공조합이었다(김금수, 1996; 22-23). 이후 1868년 마르크스의 영향 아래 있던 리프크네이트와 베벨 등이 사회주의에 의해 지도되는 최초의 노동조합중앙조직인 국제노동조합연합을 창설하였다. 1875년 마르크스파의 국제노동조합연합과 라쌀파의 노동조합이 통합하여 자유노동조합이 출범하였다. 이 시기 독일 노동자 운동에서 형식적으로는 라쌀주의가 점차 약화되고 마르크스주의가 득세하게 되는데, 사회주의 노동조합들이 1878년 사회주의자진압법에 대항하여 비밀리에 연합체를 구성하였다. 1890년 사회주의자진압법이 폐지되자 그해 11월 자유노동조합이 중심이 된 이 연합체에 3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참여하여 사회주의적 경향을 띤 최초의 전국조직인 독일노동조합중앙위원회(Generalkommission der Gewerkschaften)을 출범시켰다. 이 조직은 자유노동조합총연맹으로서 합법화되었다(그레빙, 1985; 98).
독일에서 좌파정당과 최상급노조의 초기 관계의 성격을 살펴보면 첫째 노동조합 창설에 가담한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은 노조의 독자적 역할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노동조합이 정치투쟁을 우선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에 당이 노조를 지도하는 관계가 설정되었다. 이는 노동조합이 부분의 현실적 이해를 대변하는 반면 사회민주주의정당은 노동계급 해방이라는 전체적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논리에 입각한 것이었다(박장현, 1997: 66).
대부분의 노조활동가는 1870-80년대의 억압기간에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의 열렬한 지지자로 변신하였다. 이들은 독일제국을 계급국가로 정의하고 계급국가를 사회주의 정치공동체로 바꾸는 것이 사민당의 과제이며 노조는 이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1891년의 마르크스주의적인 에르푸르트 강령을 받아들였다. 노동자들 역시 독일제국의 탄압, 의회민주주의의 한계, 중간계급의 소극적인 자유민주주의 때문에 반체제성향이 강하였으며 이는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다.
자유노조는 출범 당시부터 모든 노조원들에게 사민당에 가입할 의무를 부과하였는데 1914년 자유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이 250만 명에 이르렀고 사민당은 1914년까지 1백만 당원을 확보하였으며 이 중 90%는 육체노동자였다. 또한 사민당 의원 중 노조지도자는 189311.6%에서 191232.7%로 증가하였다.
둘째 자유노조는 1910년대를 지나면서 사회민주당의 강력한 지도에서 벗어나 노동조합으로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으며 나아가 점차 개량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미 자유노조는 1900년도를 전후해서 구성원의 수, 조직 강도 그리고 자금력에서 사민당을 능가하였으며, 노조의 조직이 강화되고 노동계급의 현실적 요구가 구체화되면서 조합 내에서 사회민주당의 일방적인 지도에 대해 반발이 생겨났다.
특히 1900년 이후 진행된 중립성(Neutralitat)’ 논쟁과 총파업(Massenstreik)’ 논쟁에서 정당이 노조의 동의 없이 정치적 대중파업을 지시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총파업논쟁의 결과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되는 노동자의 총파업에 사민당과 자유노조가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다시 말해 총파업의 결정에 노조도 참여하는 길을 열었다. 자유노조가 사민당에 대해 자율성을 주장해 온 결과 1906년의 만하임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양 조직은 정치적 대중파업과 같은 당과 노조의 공통의 이해관계에 관련되는 문제는 공동의 사전 협의과정을 거쳐 통일된 입장을 합의한다는 만하임(Mannheim)협정을 체결하였다. 만하임 전당대회는 지배세력이 제국의회의 존재, 선거법과 결사의 자유에 대해 공격할 경우에만 노조는 방어적인 총파업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확인하였다. 이는 선제적인 총파업뿐만 아니라 방어적인 총파업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의미한다(Potthoff and Susanne, 2006: 65-67).
이러한 자유노조의 동등권 선언으로 노조와 사민당의 관계는 점차 대등하게 재조정되었다(박장현, 1997: 73). 자유노조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민당의 하부조직이 아니라 동맹세력이 되었다(박규정, 2007). 이로써 사민당은 노동조합에 대한 일방적인 우위를 상실하였으며 적어도 경제투쟁 영역에서는 노조가 사민당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양자의 관계는 의회주의를 중심으로 정치투쟁을 하는 사민당과 임금투쟁을 중심으로 경제투쟁을 하는 노조로 설정되고, 다만 양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복지제도의 구축에 있어 협조하였다. 이는 사회주의정당이나 노동조합 모두 자신의 역할을 제한적으로 분담하는 자본주의 국민국가의 시스템에 편입되어 감을 의미하였다.
 
 
2) 영국
 
자본주의 초기에는 기계화 수준이 낮아 노동자의 숙련도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조는 숙련공 중심이었다. 이들 숙련공 노조는 자생적 조직 활동과 단체교섭을 통한 임금이나 노동조건 개선을 중시한 반면 정치활동을 통하여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려는 시도는 적었다. 다만 국가의 강한 규제에 놓여 있던 광산과 철도 노동자들은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계의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점차 반숙련공들이 증가하였고 반숙련공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투쟁을 조직해나갔다. 1824년 영국의회는 공장주와 노동자는 자유로이 협약을 맺을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1799년 제정되었던 파업의 주모자를 처벌하는 결사금지법을 폐지하였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열악한 노동조건의 폭로로 인해 노동문제가 사회적 현안으로 부각되면서 1837년에는 공장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1829년 하이드 지방에서의 파업실패를 경험한 면방적공들은 고용주의 단결에 대응할 필요성에서 1829년 영국일반노동조합대연합을 주도하였으나 아직은 랭카셔의 지역 노동조합연합체에 머물렀다. 183020개 직업대표가 참여한 노동자보호전국연합이 설립되었으나 1832년 이후 사실상 활동을 중단하였다. 이 조합은 1834년 전국노동조합대연합으로 계승되었으며, 조합원은 약 50만 명에 이르렀다. 전국노동조합대연합은 노동조합이 사회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나아가서 산업을 운영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출범 즉시 파업에 나섰으나 정부에 의해 범죄단체로 규정되어 해산당하고, 사업주들은 조합원들에게 향후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황견계약을 강요하였다. 이후 1845년 전국노동자보호노동조합동맹이 설립되었는데, 이 조합은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1851년 이후 실질적인 영향력은 없었지만 15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베아트리스 웹, 1990: 196).
1860년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거부하는 건축노동자들로부터 시작한 파업이 6개월 동안 지속된 끝에 노동조합의 교섭권이 사용자들로부터 인정되었다. 이 투쟁의 결과 런던직능평의회가 설립되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1866년 합동노동조합회의 혹은 평의회라고도 불리는 전국적인 노동운동 추진단체가 결성되었다. 평의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노동조합들이 매년 전국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는바 이것이 영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Trade Union Congress: TUC)이며 1869년 제1회 대회에는 25만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40명의 대의원들이 참석하였다.
TUC는 애초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기구는 아니었고 현안을 토의하고 노동계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한 느슨한 조직이었다. 초창기 TUC는 그 당시로는 거대한 전국적인 조직이었지만 주로 조합원들의 경제적인 이해관계 보호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노동자정당을 건설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창당을 주장하는 소수를 노조로부터 축출하는 반면 자유당과 정책연대를 하여 조합원을 자유당 소속으로 의회에 진출시켜 제도개선을 시도하였다. 당시 영국은 다수대표제를 근간으로 하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1678년에 창당한 토리당(Tory Party)을 계승하여 1834년에 창당된 보수당(Conservative Party)이 제1당이었으며, 휘그당을 계승한 자유당이 제2당으로서 확고한 양당담합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1885년 노동자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선거구 재분배법이 제정되었지만 아직도 독자적인 노동자정당이 양당구조에서 생존하기 어려웠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자들의 정치운동은 선거권 확대 운동에서 시작하여 노동자정당 건설 운동으로 발전하였는데, 엥겔스는 선거권 확대 운동을 세계사에 있어 최초의 '노동자정당 운동'으로 평가하였다(포스터, 1987: 58). 노동자들은 1819년 피털루에서 의회 개혁을 요구하는 군중집회를 개최하였으나 정부의 진압에 의해 다수가 학살되었으며, 이어 1820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두 곳에서 보통선거권, 매년 의회의 개원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동시에 계획되었으나 일주일 만에 진압되었다. 이후 노동자들은 중산층 부르주아와 함께 선거권 확대투쟁을 전개하였는데, 1832년에 도시 중간계급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1838년에는 보통선거의 실시, 선거구 제도의 개정, 국회의원 수당의 지급 등을 요구하는 인민헌장이 공표되었고, 1842년에는 330만 명이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선거권확대투쟁은 1848년에 이르러 청원숫자가 500만 명에 달하는 등 대규모 집회와 행진을 통해 가장 고조되었으나 군대에 의해 진압 당하였다. 1867년의 2차 개혁을 통해 성인남성의 40%에게, 1884년의 3차 개혁을 통해 대부분의 성인남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노동자들의 투쟁에 힘입어 1876년 노동조합법이 제정된 이후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선거권까지 획득하자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에 나섰고 먼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정당 건설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에 유입된 사회주의와 생디칼리즘은 전투적 노조운동인 신조합운동(New Unionism)’과 결합하여 노동계급이 정당을 결성하는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1881년 자유당 좌파이자 마르크수주의자인 하인드먼(Henry Mayers Hyndman)사회민주주의연맹(British Social Democratic Federation)을 결성하였다. 사회민주주의연맹은 노조가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지 못하며 자본가와 타협하고 있다고 보았고 노동계급 출신이라 하더라도 사회주의자가 아닌 후보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1885년 이래 총선에 참여한 사회민주주의연맹은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노조의 지지도 확보하지 못하였다.
1903년 사회민주주의연맹으로부터 발전해 나온 사회노동당은 산별노조의 임무를 국가를 파괴하고, 자본가들로부터 생산 통제권을 빼앗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노동당 당원들은 기존 노조에서 활동하면서 새로운 혁명적 노조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사회노동당은 1906사회민주당으로 다시 1911영국사회당으로 전환되었지만 여전히 노동조합운동 자체를 개량주의로 규정하면서 비판하였다.
한편 사회민주주의연맹의 일부 그룹은 연맹의 급진성에 회의를 품고 현실적 사회주의를 모색하였다. 이 현실주의자들은 노동자에 대한 사회주의 이념의 전파가 부진한 상태에서 연맹이 700명의 회원으로만 기존질서에 도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치활동이 스스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이 성과를 사회주의 건설과 연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최재희, 1997: 81). 이 현실주의자들이 1893독립노동당’(Independent Labour Party, ILP)을 건설하였는데 이들은 당명에 사회주의를 명기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고 당의 입장이 노동자의 이해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독립노동당은 전술적 유연성을 구사하여 안정된 지지기반의 확보와 정체성 확립의 기초를 노조와의 협조에서 찾았다. 하지만 1895년 총선거에서 28명의 독립노동당 후보가 입후보했지만 자유당과 연합한 2-3명의 후보를 제외하면 모두 낙선했으며 그 후 노조는 독립노동당과의 협조를 거부하였다.
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글래드스톤의 지도하에 있던 자유당을 지지하였으며, 그 결과 자유당과 노동조합의 연대(Lib-Lab)가 형성되었다. 노동조합이 자유당 내에 대표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1874년 광산노조 지도자가 자유당 의원으로 의회에 진출한 이후부터이다. 1885년까지 11, 그리고 1906년까지는 24명의 노동계 대표, 특히 광산노조 지도자들이 자유당 소속으로 의회에 진출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자유당 정부는 1871노동조합법을 통해 노조의 합법적인 쟁의활동을 민사소송의 대상에서 제외시켰고 공장과 광산의 노동조건을 개선하였으며 1893년의 전국적인 임금분쟁에서는 광산소유주에게 타협안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보수당 정부도 1875년 노동조합의 평화로운 피케팅을 허용했고, 1880고용주책임법을 도입하여 작업장에서의 재해에 대해 사용자들의 책임을 규정하였다.
1895년 선거 패배를 경험한 독립노동당은 노동조합, 사회주의자, 협동조합 운동의 모든 세력이 결집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1900년 노동자대표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이 회의에서 65개 노동조합대표, 협동조합대표, 독립노동당, 사회민주주의연맹 등으로 구성된 상설적인 노동자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여기에 1884년에 결성된 페브리언협회도 결합하였는데 이 노동자대표위원회가 영국노동당의 전신이다.
노동자대표위원회의 탄생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본가의 공세, 정치 및 법률의 중요성에 대한 노조 인식의 제고, 대규모 반숙련공을 기반으로 한 신조합주의의 등장으로 영국 노동계급 사이에서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당의 필요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즉 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기존 정당과의 사안별 연대를 통해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는 것이 곤란해지자, 단일 통합노조라는 대중적 기반을 토대로 자신의 정당인 노동당을 설립하였다. 특히 1900년의 테프 베일(Taff Vale) 판결은 노조가 파업으로 인한 기업의 손해를 배상하도록 하였는데, 노조는 정당의 입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 판결이 노동자대표위원회 창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03년에 채택된 노동자대표위원회의 헌장은 자신의 성격을 노조와 노동단체, 독립노동당, 사회주의 단체들과의 연합체로 정의하고 있다. 노동당은 1918년까지 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운영의 총 책임은 참가단체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회(National Executive Committee, NEC)가 지고 있었다. 초기 노동자대표위원회의 임무는 산하 각 단체가 모금해 온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것이었을 뿐 선거운동을 하거나 입후보자를 내세우지 않았다. 또한 위원회가 지명해서 선출된 사람들은 하원에서 특별한 정치그룹을 결성할 의무를 지니지 않았다. 중앙집행위원회 구성원 중에서도 가장 많은 재정적 후원을 했던 노동조합의 대표들이 NEC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동당의 최고정책의결기구인 당대회에서도 노동조합 대표들이 대다수의 대의원 의석을 차지하였다.
노동자대표위원회의 노선은 서구의 제도화된 사회주의정당과 마찬가지로 이념적 급진과 실천적 개량으로 압축된다. 노동자대표위원회의 이념적 급진은 독립노동당에 의해 형성되었다. 1905년 독립노동당은 노동자대표위원회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하고 모든 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공공소유체계를 수립한다는 선언을 통과시켰다. 이 선언이 그 다음해 선거에서 노동자대표위원회가 의회에 진출한 이후 노동당으로 전환될 때 규약 제4조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대표위원회의 탄생은 노동운동의 성장에 따른 지배층의 타협적 통치와 노동계급의 체제 내 제도화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노동자대표위원회는 현실적인 노선에 기울어져 있었다. 이른바 노동자주의1900년 노동자대표위원회에서 채택된 노동자정책 구현에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체제 자체는 긍정하며, 노조와 사용자 간에 타협을 통해 비혁명적 개혁의 길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페이비어니즘과 함께 1918년 노동당 당헌에 공식적으로 반영되었다.
노동당과 노동조합대표자회의의 초기 관계의 성격을 보면 첫째 노동당 창당이 노조에 의해 주도되어 초창기에는 노조의 노동당에 대한 우위가 지속된 것이 당연하지만 노동조합대표자회의 자체가 경제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느슨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노동당은 사실상 독자적인 의회활동을 보장받았다. 또한 노동조합이 당의 활동과 정책을 직접 지배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대표자들이 당의 기구에 들어오고 조합원들이 당의 조직에 가입하여 당의 의사결정절차에 참여하는 등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조직적 재정적 지원을 기반으로 하여 노동당 소속 의원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미 1871년부터 노동조합대표자회의 내에서 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지원하는 자유당 의원들에게 노동조합법의 개선을 위해 일하도록 압력을 넣는 의회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이 기구가 50년 동안 노동조합대표자회의에서 존재하였던 상설적인 중앙기구로서 노동당 소속 의원들과의 정책조정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둘째 노동당 의원이 늘고 특히 1921년 최초로 집권을 경험한 이후 노동조합 우위의 관계는 상호 대등한 협조적 관계로 전환되었다. 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숫자에 있어 노동당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좌우파의 대립으로 인해 당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앙당과 지구당은 노동조합과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자신의 경제적 이익이 침해받지 않는 한 전통적 정당-노조 분업관계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는 노동당에게 위임하였다. 노조의 당에 대한 제한적 개입으로 인해 노조원들이 의회에 진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회 내 노동정치는 산업민주주의로 대표되는 계급화해 노선으로 나타났다.
한편 노동당의 원내 활동은 일차적으로 원내노동당에 맡겨져 있었다. 하지만 원내노동당이 추진하는 노동당의 주요정책은 사전에 중앙집행위원회와 당대회에서 논의되어 결정되었고, 이러한 의사결정기구에 노동조합의 대표자들이 충분히 배치되어 있어 노동당의 원내 활동을 사전에 통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긴장적 협력관계로 인해 영국의 경우 노동당이 집권하여 탈노동계급적 경향을 띨 때까지는 당과 노조 사이의 갈등이 비교적 적었다.
 
 
3)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1791년에 제정된 단결금지법에 의해 노동조합은 불법화되었다. 또한 1830, 1848, 1871년의 혁명들은 보수파의 정권장악으로 끝났고 노동자들의 파업은 1864년까지 금지되었다. 그 이후 나폴레옹3세가 단결금지법을 일부 완화하여 노동조합을 묵인하였다.
1860년대 후반 파리의 수공업부문을 중심으로 노조가 조직되었다. 이들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18796만 명에 불과하였지만 189027만 명으로 늘었다(이태복, 1980: 15). 산업별 노동조합이 1879년 모자 제조공 조합부터 시작하여 1881년 출판, 1883, 탄광, 1890년 철도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수공업부문의 전국연맹들이 직종별 노동조합의 고립성과 분산성을 극복하기 위해 1886노동조합전국연맹’(FNS: Federation Nationale des Syndicats)을 조직하였다.
또한 1887년 지역별 노동조합의 성격을 지닌 노동조합사무소’(Bourse du Travail)가 파리에서 처음 조직되었고, 이들에 의해 1892년 노동조합사무소 전국회의가 개최되었다. 노동조합사무소는 원래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이 장악한 지방자치단체에서 노조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고 국가 개입을 통해 노자간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주로 직업소개와 노조활동 지원, 교육 및 직업훈련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노동조합사무소 운동은 사회주의정당을 가장 먼저 조직한 게드파에 예속되지 않고 노조의 독립성을 지키려 하였다(김현일, 1997: 66-68).
수직적인 구조의 직능 및 산업별 노동조합인 노동조합 전국연맹’(FNS)수평적인 구조인 노동조합사무소 전국연합1895년 통합되면서 노동총동맹’(CGT)이 결성되었는데, 여기에 혁명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게드파를 제외한 거의 모든 노동자조직이 결합하였다.
한편 파리코뮌 이후 1876년 파리에서 처음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려 360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1879년 제3차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인 쥴르 게드(Jules Guesde)는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하여 기존의 바르브레의 생산협동조합 노선을 폐기시키고 국제주의, 집산주의, 혁명 등을 표방하는 사회주의 노선을 관철시켰다. 이 대회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철폐와 집단적 소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집산주의를 채택하고 독자적 노동자계급정당을 건설할 것을 선언하였다.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생산 및 소비협동조합과 기타 노동단체를 총망라한 이 당의 이름은 프랑스사회주의노동자당연합(Fédération des travailleurs socialistes de France, FTSF)이었다. 1880년 창당된 이 당은 전국에 걸쳐 6개의 연맹조직으로 구성된 느슨한 연합체였다. 이것이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지만 중앙집권적 정당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연합체적 구조를 지녔고 1882프랑스노동당으로 발전하였다.
프랑스의 노동조합들은 1871년에 성립된 제3공화국을 왕당파로부터 수호하고자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정부와 대립하였다. 1872년 국민의회는 노동자들의 국내외 혁명 활동을 금지하는 뒤포르법을 제정하였지만 1880년대에 집권한 급진당의 공화주의자들은 1884년 노동조합을 허가 없이 설립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하였다. 이들은 또한 노동자의 지지확보를 위해 영국 모델에 따라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 제한, 작업조건의 개선 등을 강제하는 사회개혁법안을 추진하였고, 노사협의체를 구성하였으며, 1892년에 노사갈등의 중재를 위한 노동국을 설치하였다.
프랑스의 남성보통선거는 1848년 혁명 이후 실시되어 좌파정당들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으나 제3공화국 직후 1880년대에 혁명좌파는 아나키스트, 게드주의자(Guesdists)의 프랑스노동당(Partiouvrier français, POF), 브루스의 프랑스사회주의노동자연합(FTSF), 블랑키파의 중앙혁명위원회(CRC)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프랑스노동당은 마르크스의 이론과 전술을 충실하게 따른 반면, 프랑스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여전히 혁명적인 집산주의를 당연하게 유지하면서 활동과 선전에 있어서는 보다 유연한 태도를 취하였다. 프랑스노동당의 게드는 마르크스의 자문을 받아 명실상부한 사회주의 강령 개정안을 만들어 개량주의자들 및 아나키스트들과 대립하면서 사회주의세력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프랑스노동당과 달리 제3공화국을 인정하고 수호하려는 적극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당 내에 갈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Jaurès: 257). 이들로부터 1890년대에는 알레만의 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POSR)과 저명인사들의 인본적인 사회주의 조직인 독립사회주의자가 분화되었다(김금수 외, 1999: 45).
1899년 독자파 사회주의자 미예랑이 공화정 정부에 입각하자 사회주의정당들이 이에 대한 찬반으로 이합집산하였는데, 입각에 반대하는 프랑스노동당과 바이양의 혁명사회당이 계급정당 노선 아래 프랑스사회당(PS de F)으로 합당하고, 찬성하는 사회주의자들도 개혁정당 노선 아래 프랑스사회당(PSF)으로 합당하였다.
그런데 1904년 제2인터내셔널 제6차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계급정당 노선이 채택되고 부르주아정부로의 참여는 기본적으로 금지되고 예외적으로만 허용된다는 절충안이 통과되었다. 특히 이 대회에서 일국일당 원칙이 결의되면서 프랑스사회당(PS de F)과 프랑스사회당(PSF)1905년 계급정당 노선을 채택한 통합사회당(노동자인터내셔널프랑스 지부, 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ère, SFIO)으로 통합된다.
프랑스에서 당과 노조의 초기 관계를 살펴보면 첫째 프랑스 노동운동은 영국이나 독일과는 대조적으로 정당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원칙을 확립하게 된다. 그 결과 1914년까지 노동조합과 정당의 단절이 나타났다(, 1983; 138). 1895년 창립선언문에 따르면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은 정당과 무관하며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경제적 투쟁을 목표로 하고 총파업을 노동자 해방의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CGT1904년 무정부적인 생디칼리스트에 의해 장악된 이후 더욱 짙어졌다. 이러한 비정치성은 파리코뮌 실패로 인한 정치투쟁에 대한 좌절감, 사회주의지식인의 배반에 대한 분노, 3공화국의 부정부패에 대한 혐오를 반영한 것이었다(서울대프랑스사연구회, 1988: 299-303).
1906CGT의 아미앙대회에서 게드파인 빅몰 르날이 CGT 간부위원회와 사회당 전국평의회의 협력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대신 “CGT의 가맹자는 외부에서 표명했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노동조합의 내부로 갖고 들어 올 수 없다는 헌장이 채택되었다. 노동조합의 정치참여 대신 총파업과 직접행동을 강조하는 아미앙 헌장은 834 8이라는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었다.
아미앙헌장에 나타나는 생디칼리즘은 임노동과 국가를 부정하고 파업을 통해 국가를 전복하고 사유제를 철폐함으로써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헌장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파업을 통한 대중동원을 추구해야 하며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총파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노조는 미래의 사회주의사회의 기초로서 생산과 공유의 단위이며 사회 재조직의 기초로 인식되었다. 나아가 CGT1912년 생디칼리스트의 주도에 의해 '정당으로부터 독립선언서'격인 회장(回章)을 발표하였다.
둘째 생디칼리즘이 국가와 자본가의 탄압을 받게 되어 점차 위기에 봉착하자 CGT 지도부는 정당과의 협조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CGT 내 혁명파까지 지도부의 개혁주의 전략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면서 CGT와 사회주의 정당간의 협력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이미 CGT 내부에 광부, 인쇄공, 철도노조를 중심으로 단체교섭, 복지, 노사정의 3자 협의 등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성향이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CGT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국가와의 대결을 회피하고 급진당의 공화주의자, 사회주의 정치인과 협력하였는데 이러한 입장변화는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를 확대시켰고, 그 결과 노동자정당의 발전 가능성이 높아졌다(오삼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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