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와 7차 대회

자본주의는 오늘날 모든 전쟁의 원인이다. 제1차 대전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전체를 전쟁 수행에 종속시키고, 노동자, 농민, 식민지 인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자본주의 정책을 유지했다.

세계혁명은 독일과 같은 선진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성장해가는 중진국의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식민지의 민족해방 전쟁으로 분류된다. 선진국의 노동계급은 자신의 혁명을 시도하면서 식민지의 민족해방과 소련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지원해야 한다. 

대회는 “제국주의, 계급투쟁의 격화, 내란의 두려움은 과두지배로 나타나 결국 의회주의가 파산했다”고 진단했다. 파시즘은 불안정한 자본주의 관계, 다수의 계급 탈락분자, 도시의 소부르주아와 지식인의 빈곤, 농촌 소부르주아의 불만, 노동자 투쟁의 격화에 직면한 부르주아 제국주의의 반동적 공세이다. 

파시즘은 대중의 불만을 이용해 유급 파시스트 무장세력을 육성하며, 정당들에 침투하여 직계조직을 설치하고 선동가가 대중을 선동하여 백색테러를 유발하고,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주장한다. 파시즘은 처음에는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취하지만 국가권력을 장악하면 대자본의 테러독재를 노골화한다(동녘, 1989 1: 93~94).

이 시기 1918년 핀란드 노동자 혁명, 1918년 일본 쌀 폭동, 1918년 오스트리아와 독일 혁명, 1919년 헝가리의 노동자 혁명과 조선의 독립운동 및 독일 바이에른 소비에트 권력 수립, 1920년 터키 부르주아 민족혁명과 이탈리아 노동자의 공장 점거, 1921년 인도 노동자 봉기, 1923년 불가리아 봉기와 독일 위기, 1924년 에스토니아 봉기, 1925년 모로코 봉기 및 시리아 봉기, 1926년 영국 총파업, 1927년 빈 노동자 봉기, 인도네시아 봉기와 중국혁명 등이 이어졌다.

식민지 노동계급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 독자조직을 건설하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공격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민족혁명을 조정하고 민족 소부르주아의 동요를 비판하고 폭로해야 한다. 

대회는 12차례 회의 끝에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의 혁명운동에 대하여” 테제를 채택했다. 식민지로의 자본수출은 식민지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를 발전시켜 노동계급을 형성한다. 하지만 잉여가치의 대부분이 본국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식민지 발전을 방해한다. 교통수단 등의 발전은 식민지 종속성을 심화시킨다.  

식민지로 수입된 자본은 대부분 원료의 취득과 1차 가공에 집중돼 농업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가난한 농업노동자와 빈농을 양산시켰다. 식민지는 제국주의 전쟁과 혁명적 대중운동의 원천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는 경제외적 강제에도 바탕을 둔 부르주아의 독점이다. 상업부르주아는 제국주의에 직접 봉사하는 매판 부르주아이며, 토착 산업부르주아는 개량적인 부르주아이다. 반제국주의 해방투쟁은 국내 계급투쟁, 나아가 제국주의 내 계급투쟁과도 결합된다.

동양서기국 책임자 쿠시넨이 인도의 사례를 들어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이 식민지의 공업화를 촉진한다는 탈식민지화론을 비판했다. 탈식민지화론에 따르면 식민지 인도에서 봉건계급이 몰락해 인도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의 정치적 불일치의 근거가 소멸했다. 하지만 쿠시넨은 인도의 예속화가 심화되고 있는 점, 토지혁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조건에서 농촌의 빈곤화가 공업 발전의 장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1919~1923년 식민지에서 소부르주아에 의해 노동운동이 조직됐으나 노동계급의 이익은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토착 민족부르주아의 이익에 종속됐다. 1924년 코민테른 제5회 대회 이후 노동계급이 민족부르주아와 주도권을 다툴 정도로 성장했다. 

1928년 이후 경제위기가 심화되자 노동계급과 공산당은 개량주의와 분리됐으나 제6회 대회를 기점으로 코민테른에 대한 무비판적인 복종이 요구됐다. 유럽 지식인들은 서유럽의 혁명 실패, 파시즘의 승리, 스탈린주의에 직면하여 수동적인 태세로 후퇴했다(일리, 2008: 476~477). 핼러스에 따르면 이 시기 각국의 공산당들은 좌경화로 인해 소련에 종속되거나 반대로 기권주의 경향을 보이며 노동계급 대중으로부터 고립됐다. 

1928년 이후 코민테른은 스탈린에 의해 지배됐으며 소련 외교정책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스탈린에 대항하여 트로츠키 등은 1938년에 제4인터내셔널을 창설했으나 분열을 거듭했다. 

1935년 제7차 대회는 기존의 반파쇼 노동자 통일전선을 반파쇼 인민전선으로 더욱 구체화시켰다. 대회는 공산당은 노동자정당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정당과 함께 인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인 제국주의로서 노동자를 약탈하고 전쟁을 획책하고 소련을 침략하고 중국을 분할하려고 한다. 
스페인에서 1931년에 왕정이 폐위되고 공화파, 파시스트, 인민전선이 각축을 벌렸다.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을 거치면서 1936년 인민전선이 집권하나 파시스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 상태에 빠졌다. 1937년 “이탈리아 사회당-공산당의 행동통일 신협정”이 발표됐다. 
프랑스에서 1934년 2월 공산당과 사회당이 반파쇼 총파업에 나섰고, 공산당은 5월부터 사회당에 반파시즘 행동통일을 제안했다. 7월 사회당-공산당 행동통일 협정이 체결됐으며, 공산당은 10월 인민전선 슬로건을 내걸었다. 1935년 6월 공산당, 사회당, 급진사회당등 50개의 단체가 참가하는 “인민연합 전국위원회”가 결성됐다. 1936년 1월 “프랑스 인민전선강령”이 선포되고 4월 총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했으며 사회당의 블룸을 수반으로 하는 사회당-급진사회당 정부가 성립했다. 공산당은 내부결정에 따라 입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1938년 인민전선 내 급진당의 달라디에 총리는 사회당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는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공산당이 이 협정에 반대하자 급진당은 1938년 10월 마르세유 대회에서 인민전선에서 이탈했다.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체결되고 전쟁이 발생하자 전쟁에 반대한 코민테른에 속해 있던 공산당은 불법화된다. 독소조약에 따라 코민테른 지부들은 소련의 동부 폴란드 합병을 지원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심지어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10월 31일 침략자로 간주되는 것은 히틀러의 독일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라고 선언했다. 이는 결국 반파쇼 인민 전선 정책의 파탄을 의미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코민테른이 연합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독일을 옹호해야 하는 상황이 극복됐다. 하지만 그 사이 코민테른과 각국의 공산당은 신뢰를 상실했다. 소련이 미국, 영국, 중국과 연합군을 구성하고 협력하면서 코민테른이 연합국 내에서 혁명활동을 할 명분이 사라졌다. 반파쇼전쟁에 더욱 집중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우려를 고려하여 집행위원회는 1943년 5월 15일 사실상 사망상태에 있던 코민테른의 해산을 선언했다. 
그후 코민테른의 일부 업무는 비밀리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로 이관됐다. 스탈린은 1947년 코민포름(공산당 정보국)을 설립했으나 정보네트워크에 불과해 스탈린 사망 이후 유명무실화됐다. 코민포름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사회주의 종주국 논란으로 인해 1956년 해산됐다. 이후 모스크바에서는 국제공산당 및 노동당 대회가 1969년까지 3차례 열렸다. 이후 중단된 국제공산당 및 노동당 대회는 소련이 붕괴된 이후 그리스공산당의 주도로 1998년부터 2022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와 1924년 5차 대회

코민테른 자격심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이 당시 각국 공산당의 대열에는 125만 3,000명의 당원이 있었고, 그 가운데 당원 82만 5,000명이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에 소속하고 있었다. 다만 17개 당은 당원 수에 대한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김성윤, 1986 Ⅰ: 183).

대회는 국제파시즘을 노동자계급의 혁명과 부르주아민주주의 일반을 폭력적으로 억누르고자 하는 거대 부르주아지의 방편이라고 특징지었다. 따라서 반파시즘 통일전선에 노동자가 선두에 서야 하며 중간층까지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체트킨이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파시즘이 소부르주아, 계급 내 몰락한 분자,  계급의식이 열악한 노동자에 기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부르주아 독재와는 구별된다고 지적했다. 파시즘에 대응하는 노동자의 방어투쟁이 필요하고 나아가 노동자·농민정부를 구호로 내걸어야 한다. 

집행위원회는 부르주아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노동대중의 투쟁을 탄압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민주주의적인 통치제도를 파시스트적인 지배체제로 바꾸려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노동자정부에 대해 지노비에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지만 대회는 노동자정부를 통일전선 정부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발전해 가는 과도기적 형태로 규정했다. 노동자정부는 대중투쟁을 전제로 한다면 의회를 통해서도 성립될 수 있다. 노동자정부의 임무는 노동자계급을 무장시키고 생산을 통제하고 부르주아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등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적 반항을 진압하는 것이다. 

나아가 대회는 ‘농업 행동강령 개요’는 러시아와 동유럽 등의 사례를 반영하여 노동자계급과 근로농민의 동맹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노동자·농민정부를 슬로건으로 정했다.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강령은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의 실현을 그 내용으로 했다.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노동운동은 전체적인 반제전선 속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갖는다. 식민지·반식민지의 노동자계급은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통해서만 혁명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김성윤, 1986 Ⅰ: 194). 

대회는 민족부르주아지의 불철저성을 비판하면서도 민족혁명의 범위 내에서 반제투쟁을 실현하려는 민족 부르주아지를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이 유지되는 경우에만 민족 부르주아와 세일시적인 연합이 가능하다. 

레닌이 참여한 마지막 대회였으며, 레닌이 제출한 ‘러시아 혁명 5개년과 세계혁명의 전망’은 러시아의 경험을 다른 나라에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경계했다.

1922년 11월1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제2회 대회 역시 노동자 통일행동 전술을 구체화했다. 1922년 12월10일 헤이그에서 열린 ‘경제회의’에 맞춰 같은 도시에서 제2인터내셔널과 제2반 인터내셔널이 함께 국제평화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소비에트 러시아 노동조합 대표자는 전쟁 위험 반대 투쟁을 위한 국제위원회 창설, 반군국주의 선전주간 실시, 24시간 시위 총파업에 의한 투쟁주간 등 노동자 통일전선의 구체적 행동강령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한편 1922년 13개국의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스트는 1922년 12월25일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를 창립하고 제1인터내셔널의 상속자를 자임했다. 이들은 ‘자주관리생산자’ 제도의 옹호자라고 자처했다. 


5차 대회에서 채택된 ‘코민테른 당들의 볼셰비키화에 관한 테제’는 올바른 이론과 대중성 모두를 강조하며 레닌주의를 각국의 조건에 따라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1926년 10월26일 열린 제15회 전연방공산당 대표자회에서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일국 사회주의를 비판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영구혁명론에 따라 유럽혁명 없이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며, 일국사회주의는 세계혁명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방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구혁명론은 세계적 차원의 생산력 발전과 계급투쟁에 기반하고 있으며 세계혁명을 진퇴를 거듭하는 영구적인 과정으로 본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영구혁명론은 첫째 민주주의혁명에서 시작해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둘째 정치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가족, 나아가 일상생활들이 상호작용하며 발전하는 과정이며, 셋째 혁명은 일국에서 시작되지만 일시적일 뿐이며 일국에서 완성될 수 없다. 일국혁명은 국제적인 사슬의 한 고리일 뿐이므로 러시아혁명과 같이 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유일한 출구는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서 혁명이 성공하는 것이다(트로츠키, 1989: 135~138).

트로츠키는 세계혁명이 승리하지 못하면 소련은 변질과 부패를 극복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경제도 제국주의 압력에 의해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결과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부활될 수 있다. 트로츠키는 소련의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혁명을 추동해야 하고 필요하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국사회주의를 위해) 국제평화를 추구하는 외교정책을 비판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150).

트로츠키는 세계혁명의 추동이라는 좌경노선에 기울어져 지노비예프와 함께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서 탈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은 좌경화돼 1927년 4월 국공합작에서 이탈해 도시봉기 노선에 따라 상해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국민당의 좌파까지 나서 강경진압에 나섰다. 

반면 집행위원회는 1926년 영국 탄광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연대를 제안하는 등 노동자통일전선을 견지했다. 

집행위원회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비록 안정적이지만 소련의 발전, 영국에서 자본주의 쇠퇴와 계급투쟁 심화, 중국의 민족혁명 등으로 인해 언제든지 자본주의의 일시적인 안정이 깨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집행위원회는 소련이 국제혁명의 중심으로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실현해왔기 때문에 일국사회주의가 민족적 편협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며 트로츠키파를 비판했다. 집행위원회 간부회의는 트로츠키파에 동조하는 지노비예프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 직무에서 해임하였다(김성윤, 1986 Ⅰ: 267). 


1921년 코민테른 3차 대회

많은 사회주의정당들이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공산당으로 개칭했으며 신생국에서도 공산당이 창당됐다.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의 좌파 세력이 192010월에 열린 당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했으며, 이듬해 독일 공산당과 통합하여 독일 통일공산당(VKPD)을 창립했다. 192012월에 프랑스 사회당 대회가 투르에서 열렸는데, 대회는 코민테른 가맹을 결정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이 1920년 코민테른에 가입했지만 19211월 당 대회에서 중앙파와 개량주의자에 맞서 소수의 그룹이 퇴장하여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했다.

그런데 자본가들이 탄압과 함께 양보정책을 구사하자 계급평화, 평화적 이행을 강조하는 개량주의자들이 득세했다. 19192월 베른에서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하기 위한 회의에는 카우츠키 등 26개국으로부터 102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2인터내셔널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독일 측에 돌리고,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승인했다.

192012월과 19212월에 중앙파에 속하는 각 당이 오스트리아의 베른과 빈에서 열린 두 차례의 회의를 통해 사회주의 정당 국제활동연합’(International Working Union of Socialist Parties)을 결성했다. ‘빈연합또는 2.5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조직은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체코 사회민주당,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발칸 반도의 모든 사회민주당 그룹 등을 규합했다. 1919년 여름에는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스위스 사회민주당,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 등의 러시아 비()볼셰비키파, 영국의 독립노동당 등도 여기에 합류했다.

사회개량주의와 좌파공산주의, 중앙파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 등의 분열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좌파공산주의의 선동에 따라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을 탈퇴한 노조들은 혁명 지향 노선을 내걸었으나 개량주의적인 노동조합에 남아있던 광범한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고립됐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자통일전선이 다시 부상했다. 192117일 독일 통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과 독일의 모든 노동자 조직(독일 노동총연맹, 자유직원조합연맹, 일반노동자연맹, 자유노동자연맹 = 생디칼리스트 조직) 앞으로 공개장을 발표하고, 거기서 노동자와 노동대중의 긴요한 요구를 위해 반동 공세에 대항하는 공동투쟁의 전개를 호소했다. 이 공개장은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 수립을 위한 투쟁에서 최초의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공개장은 자본주의 해체의 진행, 개시된 세계공황이 독일의 특수한 공황에 미치는 반작용, 화폐가치의 계속적 저하, 독일에서 역시 높아가고 있는 모든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의 가격 등귀, 실업의 증대, 광범한 대중의 빈곤화 등은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방위에 나설 것, 즉 그들이 공업프롤레타리아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제 점차 자기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자각해 가는 모든 층들을 고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개장은 임금·연금·은급·실업자의 급료 인상, 모든 임금생활자와 하급 봉급생활자에 대한 식료품 공급, 빈집의 징발과 노동자 주택조건 개선, 보유 원료와 석탄 그리고 비료의 경영평의회 관리, 생필품을 생산하는 유휴경영의 조업재개, 농장평의회와 소농평의회의 모든 농산물 경작·수확·판매 관리 등을 요구했다. 또 모든 부르주아적 자위단의 무장해제와 해산, 프롤레타리아 자위단 결성, 정치범과 생활 곤궁으로 인한 범죄인의 석방 및 사면, 파업 금지령 폐지, 소비에트 러시아와 통상·외교관계의 즉시 수립을 위해 공동행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했다.

사회민주당, ‘독립파’,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과 같은 극좌파도 공개장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 지노비예프와 집행위원 부하린이 좌파의 견해를 옹호하여 공세이론을 들고 나와 공개장 제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와는 반대로 레닌은 공개장을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을 수립하기 위한 올바른 시도라고 평가했다.

대회는 노동자통일전선에 관한,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 및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노동자와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 조직들을 지지하는 노동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테제를 채택하고 좌파의 공세이론을 거부했다. ‘국제정세와 코민테른의 임무에 따르면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봉기, 불확실한 투쟁방법과 목표, 그리고 지배계급의 극단적인 혼돈상태를 특징으로 하는 전후 혁명운동의 제1기가 종료했다. 대회는 광범한 일반 민주주의적 전선을 결성하기로 했으며 노동자 통일전선의 실시, 대중 속으로!”라는 전술을 채택했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여성단체, 청년단체 내에서의 당 활동 문제를 다루었다. 79일부터 23일까지에 걸쳐 제2회 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 대회가 열렸으며, 6월에는 국제공산주의여성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협동조합 내에서의 당 활동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다.

집행위원회는 제2인터내셔널에 192110월 헝가리와 스페인의 백색 테러를 규탄하는 공동행동을 제안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자본가의 노동자경제투쟁에 대한 공세, 파시스트의 태동, 군비증대와 전쟁 위험 등으로 인해 사회민주주의 조직이나 개량주의적 노동조합도 노동자통일전선에 관심을 지니게 됐다.

2()인터내셔널 내 프랑스 사회당은 코민테른을 포함한 국제회의를 주장했으나 영국노동당이 반대했다. 논란 끝에 제2반 인터내셔널 정치국은 114일 베를린 회의에서 “119일 유럽의 경제정세와 반동의 공격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행동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3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와 공동으로 국제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19222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1회 확대집행위원회는 노동자통일전선에 대한 12월 테제를 승인하고 세계대회에 모든 노동조합, 전국적 연합체와 국제적 연합체를 참가시키자고 결정했다.

반면 사민주의와 대립하는 기존의 노선도 유지됐다. 국제노동조합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Trade Unions =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은 코민테른 경향보다 거의 3배가 되는 약 2,200만 명을 포괄하고 있었다. 192173일 모스크바에서 혁명적 산업별 노동조합의 제1회 국제대회가 열렸으며 이 대회는 국제연맹에 부속되어 있는 국제노동기구(ILO)와 암스테르담 노동조합 인터내셔널(국제노동조합연맹)에 반대하는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Profintern)을 창립했다.

프로핀테른은 소련과 아프리카의 노동조합, 사민주의 경향의 국제노동조합연맹의 반대파와 제명된 노조 들이 모여 결성됐으며, 반파쇼 인민전선에 따라 사민주의와 협력노선이 강조되면서 193712월에 해체되었다. 프로핀테른은 서방의 제국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에 식민지나 종속국의 노동 운동을 지원했다. 프로핀테른은 일국 1노조 방침에 따라 재일 조선인은 일본인과 단일한 노조를 결성할 것을 지시했다.

이밖에 레닌의 러시아 공산당의 전술에 관한 보고는 네프를 설명하고 노농동맹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코민테른 제2차 대회

규약은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운동의 지도자이자 조직자로서, 공산주의의 원칙과 목적의 담지자로서 코민테른은 노동자계급의 다수와 광범위한 무산농민층을 획득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세계독재를 수립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소비에트공화국의 세계연방을 창설하기 위하여, 계급을 완전히 폐지하고 공산주의 사회의 제1단계인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고 규정했다.

규약 제1조에서 “코민테른은 모든 나라의 공산당이 단일한 공산주의적 세계당으로 결합한 것이다. 코민테른에 가입한 각 당은 코민테른 지부가 되며, 지부인 당은 각국에 하나만 존재할 수 있다. 코민테른 지부의 당원 개인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은 소속 지부 중앙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세계대회는 2년마다 한 번씩 열리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국제통제위원회를 선출하는 기능을 갖는다. 집행위원회는 각 지부의 강령을 승인하고, 각 지부에 수임자를 파견할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집행위원회는 월 1회 이상 개최하도록 했다. 국제통제위원회는 코민테른 소속 지부의 통일과 단결 및 여러 지부의 당원 개개인에 대해 공산주의자로서 행동을 평가하는 것에 관한 문제들을 검토한다.

대회는 「코민테른의 가입조건」즉 ‘21개 조’를 확정했다. 주요 조건은 노동운동 내의 책임 있는 부서에서 개량주의자와 ‘중앙파’ 지지자들을 배제할 것, 합법적인 투쟁방법과 비합법적인 투쟁방법을 결합시킬 것, 식민지와 피억압 민족 문제에 대해 정확하고 명백한 방침을 정할 것, ‘어용노동조합’의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과 투쟁할 것, 당은 민주적 중앙집권제 원칙에 따라 건설되어야 하고 소부르주아 분자들을 당에서 배제할 것, 각 당은 가입을 위한 대회를 개최하고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명명할 것, 각 대회의 모든 결정과 집행위원회의 모든 결정은 코민테른에 가입한 모든 당을 구속한다는 것 등이다.  다만 코민테른과 집행위원회는 각 당이 처한 다양한 조건과 다양한 활동을 충분히 고려하여, 전체를 구속하는 결정은 그 결정이 가능한 문제에 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김성윤, 1986 Ⅰ: 104).

1차 대전에 협조한 사민주의를 비판하고 러시아혁명 방식을 감행한 독일 공산주의 세력의 투쟁이 강조됐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대회 기간 중 페트로그라드 우리츠키 광장에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기념비의 초석이 세워졌다. 이러한 정세를 반영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의 공산당 역할에 관한 테제」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내란의 시대를 맞이해 무장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테제는 당, 소비에트,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전환할 것을 제시했으며 민주집중제의 레닌주의 정당을 강조했다. 또한 두 테제는 당과 노동계급 및 대중과의 관계를 정립했다. 

「코민테른의 기본적 임무에 관한 테제」는 부르주아 타도, 노동계급의 지도적 역할, 농업과 상업 및 사무직 등 중간층의 중립화 등 3가지 임무를 제시했다. 

레닌이 기초한 「농업문제에 관한 테제」는 노·농 동맹을 강조했다. 동맹의 대상은 농업노동자, 자영농, 반고용상태의 영세농이다. 공업노동자가 직업적 이익에 사로잡혀 자신의 경제적 상태를 개선하는 데만 관심을 갖고 개량적 결과에 대한 자기만족에 빠져버린다면 인류를 자본의 압제나 전쟁으로부터 해방시킬 사명을 이룰 수 없다. 중농은 차지료 폐지, 생산도구 지원, 채무 탕감 등의 정책을 통한 중립화 대상으로 분류됐다. 대농에 대해 점진적인 사회화를 제시했다. 무노동 지주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몰수를 강조했다.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레닌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 원안’을 수정했다. 이 테제는 민족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각 정세를 고려할 것, 피착취자의 이익과 기만적인 전 국민의 이익을 구별할 것, 제국주의와 그 종속국의 민족주의를 구별할 것 등을 강조했다. 발전한 자본주의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피억압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단일한 반제국주의적 조류로 융합시킬 임무를 강조했다. 

이 테제에 따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본성적으로 민족의 평등을 포함한 평등 일반의 문제를 추상적 또는 형식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그 고유한 특징이다. 다만 코민테른은 식민지나 후진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파와 일시적 협정을, 때로는 동맹도 맺어야 하지만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 되며, 비록 맹아적 형태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자주성을 무조건 유지해야 한다. 소비에트, 자본주의 노동운동, 민족해방운동이 단결해야 하며 특히 소비에트가 제국주의를 제압하는 것이 민족해방의 유일한 길이다. 

인도의 로이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보완 테제」에 따르면 외국 제국주의는 동양 민족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사회적·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저지했다. 제국주의 정책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최근까지 성립할 수 없었다. 토착 수공업은 파괴되어 제국주의 국가들의 집중화된 공업 생산물에 의해 자리를 빼앗겼다. 그 결과 인구의 대다수는 외국으로 수출할 곡물이나 원료를 생산하기 위해 농촌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 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대지주, 금융자본가, 국가의 수중에 토지가 급속히 집적되고, 이에 따라 엄청난 수의 토지 없는 농민이 창출되었다.

로이의 테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민족주의운동을 농민과 노동자의 대중행동과 구별했다. 대부분의 동양 제국에서는 순수 공산주의 원칙에 기초하여 농업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상당한 오류이다. 

식민지에서의 혁명은 그 초기 단계에서는 토지 분배 등과 같은 소부르주아적·개량적 조항을 많이 포함하는 강령에 기초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혁명의 지도권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적인 혁명 분자와의 협력도 유익하다면서, 그러나 가장 필요한 임무는 농민과 노동자를 조직하여 혁명과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을 향해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전위당을 창설하는 것이다.

제3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의 개요와 창립대회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노동사회가 연재한 세계노동운동사와 기타자료를 참조했습니다. 참조목록은 최종본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http://klsi.org/bbs/board.php?bo_table=B07&wr_id=160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세르비아의 지원국인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고,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원국인 독일이 총동원령을 내렸다. 양국이 대립하다 결국 독일이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앞서 제2인터내셔널은 1912년 제9차 대회까지 전쟁협조 거부 노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했던 독일사민당의 다수는 전쟁에 협력했다. 심지어 독일사민당의 필립 샤이데만 제국의회 부의장은 러시아가 전쟁가 유발했으나 방어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사회당, 영국 노동당 등 대부분의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들은 전쟁에 협력했다. 

이에 레닌은 1914년 11월 겉으로만 사회주의를 외치면서 개량주의로 흐르는 사회배외주의(Social Chauvinism)의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하기로 했다. 한편으로 당시 사회배외주의 주창자와 중앙파는 공산주의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제2인터내셔널 사무국을 중립국인 네덜란드로 이전하는 등 개량주의로 전락한 제2인터내셔널을 부활하고자 했다. 

이에 대응하여 1918년 1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간부들의 대표 회의에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미국,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의 대표들이 결합했다. 참가한 정당들은 1차 대전에서 본국 정부에 반대하고 즉시 강화를 목표로 혁명적 투쟁의 길로 나아가기로 했다. 1919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 좌익 조직 대표회의에서 제3인터내셔널을 조기에 창설하자는 레닌의 주장이 수용됐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호소문은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 스파르타쿠스단의 강령에 기초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목표·전술 및 조직원칙을 제시했다. 드디어 같은 해 3월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Comintern)이 창설됐다. 


1919년 3월 2일 레닌 30개 나라의 35개 공산당 및 공산주의 단체가 창설

1920년 7월 19일 2차 대회

1921년 6월 22일 3차 대회

1922년 11월 5일 4차 대회

1924년 6월 17일 5차 대회

1928년 7월 17일 6차 대회

1935년 7월 25일 7차 대회

1943년 5월 15일 집행위원회의 해산 선언

1947년~1956년 코민포름(사회주의국가 정보공유기구)

1957년. 1960년. 1969년 세계공산당 및 노동당대회

1955~1991년 바르샤바조약기구


1935년까지 7차 대회 전부 모스크바에서 열렸으며, 2차와 4차는 페트로그라드에서도 분산돼 열렸다. 4차 대회 당시 최대 규모로 340명의 대표와 48명의 자문위원이 참여했다. 코민테른의 최고기관은 코민테른 대회이고 대회와 대회사이의 지도기관은 집행위원회이며, 당의 일상사업은 집행위원회가 선거한 상무위원회가 지도하였다. 매개 나라에는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코민테른 지부를 두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총회(Plenums of Executive Committee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는 대회의 대행기관으로서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매년 13차례 열렸으며 1922년과 1926년엔 두 번 열렸다. 단 1930년 회의는 정식회의가 아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산하에 암스테르담, 극동, 스칸디나비아, 발칸, 비엔나, 남부(Scandinavian Bureau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등 6개의 비서부가 있었다. 

코민테른 초대 의장 그레고리 지노비예프가 7년 동안 역임했으나 트로츠키를 지지하다가 스탈린에 의해 해임됐다. 니콜라이 부하린이 후임으로 선출됐으나 1928년 소련공산당의 서기장(General Secretary) 스탈린으로 교체됐다. 레닌은 1922년 4차 대회까지 참석했다.

코민테른에서 채택된 결정이나 결의의 주제를 분류해보면 주로 초기에 신경제정책과 같은 소련 문제, 공산주의인터내셔널과 각국 공산당, 노동조합의 조직과 전략을 다루었으며 농업 및 농민 문제, 청년, 여성 등 부문 대중에 대한 것도 논의했다. 

1920년 제2차대회에서 후진국과 종속국에서 노농동맹, 부르주아민주파와의 연합이 제기됐다. 노동자통일전선은 주로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이 활성화된 유럽에 관련된 것으로서 1921년 제3차대회부터 끝까지 중요한 문제였으나 각 시기 별로 단결해야 할 대상과 전선의 목표는 정세에 따라 변해돼 왔다. 초기 반제국주의 노동자통일전선 혹은 반제국주의 인민전선을 강조할 경우 제국주의 전쟁에 협조한 사민주의 세력을 통일전선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했다. 노동자통일전선이 부각되기 직전인 1921년 사민주의 노조에 대립하여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설립이 추진됐다. 

1930년을 전후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시트가 성장함에 따라 사민주의 세력을 포함한 반파쇼 인민전선으로 발전했다. 반파쇼인민전선이 독소불가침조약으로 파탄된 것은 코민테른이 해산되는 중요한 원인이다. 반파쇼인민전선은 코민테른 차원에서는 와해됐지만 독일에 점령된 유럽국가 특히 동유럽에서 인민민주주의 노선으로 발전했다. 이들 나라에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인민정부가 출범하였다. 

민족 문제와 식민지(종속국) 문제 역시 코민테른 전 기간 동안 논의돼 왔던 것으로서 제국주의 국가의 민족 문제와 사회주의운동과의 관계까지를 포함한다. 관련하여 1927년에는 식민지 압제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계대회(World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 1929년에는 제국주의 반대동맹대회, 1930년에는 국제흑인노동자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 of Negro Workers)가 열렸다. 특히 비서국이 설치된 동양 문제가 지속적인 주제였으며, 1920년 동방인민대회,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 등 관련 대회가 열렸다. 식민지 문제가 노동자통일전선과 결합돼 민족해방 통일전선, 반제민족해방통일전선 등으로 발전했다. 코민테른에서 인민전선 문제가 본격 논의되면서 식민지에서 반제민족해방인민전선이 부각됐다. 식민지에선 파쇼 제국주의나 부르주아 제국주의나 모두 축출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코민테른이 해산된 이후 반제민족해방통일전선은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으로 발전하였으며, 중국에선 신민주주의 혁명이론으로 구체화됐다. 2차 대전 종결 이후 많은 식민지가 해방된 후 이러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이론 따른 인민정권이 들어섰다.

식민지 조선과 관련된 것이 극동비서국이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는 1921년 2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주에 설치됐으며, 1920년 7월 설치된 러시아 공산당 시베리아국 산하 동양국이 개편된 조직이다. 설립 당시 93명의 임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극동비서부장에 슈먀츠키(Boris Zakharovich Shumyatsky)가, 책임 비서에 보이친스키(Voytinskiy)가 선임되었다. 한국, 중국, 일본, 몽골·티베트 네 개의 민족별 지부가 조직되어 있었다. 

코민테른 초기에는 극동비서국과 러시아연방 내 극동공화국(치타공화국)이 동양의 민족 문제를 담당했다. 1920년 러시아연방의 공산당 시베리아국 동양민족부는 시베리아에서 극동공화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코민테른이 러시아 동양민족부를 코민테른의 기구로 편입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1920년 9월 15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극동비서국을 두기로 결정했다. 1921년 1월 15일에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국은 러시아 공산당 시베리아국 동양민족부를 코민테른에 이관할 것과 슈먀츠키를 극동 주재 코민테른 대표자로 임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극동비서국의 설치로 인해 극동에서 한인사회주의 운동은 과거와 달리 러시아나 극동공화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코민테른의 일원적 지도를 받게 됐다. 


1919년 코민테른 창립대회

크레믈린에서 열린 창설대회에서  대회 의장단으로는 레닌, 에벨라인(독일), 플라텐(스위스)이 선출되었고 이어 코민테른 의장으로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가 선출됐다. 집행위원회 내 간부회는 지노비에프 의장과 발라바노바, 제르긴 서기 등 5명이었다. 당시 러시아 공산당과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 공산당 외에 유럽에 존재했던 공산당은 6개 국가뿐이었다. 식민지나 종속국에서 온 대표가 대표자 52명 가운데 이란, 중국, 조선, 터키 등 12명이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침」은 “자본주의 해체의 시대,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밝혔다. 지침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이 주도하여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부르주아 국가기관을 철폐함과 동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소비에트 체제로 대체해야 한다. 

레닌은 「부르주아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테제와 보고」를 통해 민주주의가 피억압계급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또 “역사의 교훈은 무릇 피억압계급이 독재의 시기를 거치지 않고 지배의 지위에 올랐던 예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지주나 부르주아의 독재가 주민의 대다수 즉, 근로대중의 반항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착취자 즉, 주민 중에서 극소수인 지주와 자본가의 반항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레닌에 의하면 러시아에서 혁명 초기의 타 정당들이 반혁명에 가담함으로써 일당제로 귀결됐다. 반면 폴란드 체코 등은 여러 정당들이 함께 파시즘에 대항하고 민주주의 개조에 참여했기 때문에 일당제로 귀결된 러시아와 다르다.

러시아혁명 확산을 막으려는 유럽과 미국 정부의 방해로 인해 해외를 대표하는 상당수는 실제로 러시아 거주자였으며, 해당국 노동계급의 공산당 대표가 아니라 소그룹 출신자였다. 대회는 제2인터내셔널을 부정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뿐만 아니라 중앙파(카우츠키파)와 결별하기로 했다. 같은 취지로 사민주의 노조와 구별되는 적색노조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즉 아직은 노동자통일전선이 첨예하게 부각되지 않았다.

대회는 제국주의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 투쟁과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과의 밀접한 결합을 끊임없이 실현하고,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종국적인 붕괴를 촉진하기 위하여” 피억압 민족의 투쟁을 지지할 것을 자신의 의무로 내걸었다(김성윤, 1986 Ⅰ: 76). 

제2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제1차 (1889년) 파리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1876년 제1인터내셔널은 필라델피아에서 해산되었지만 그 이후 각국에서 노동조합과 사회주의정당이 성장했다. 이에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 독일사민당의 제안으로 제2 인터내셔널은 1889년 7월 14일 열린 국제 노동자 회의에서 설립되었다. 제2 인터내셔널은  당과 노동조합의 연합조직이었다. 영미의 실리주의, 프랑스의 생디칼리즘, 마르크스주의 노동조합주의가 혼재돼 있었다. 1908년 가입한 영국 노동당을 제외하면 마르크스주의정당들이다. 1893년과 1896년 총회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추방됐다. 1904년 대회 참가국 기준으로 21개국이 선거에 참여하여 660만표를 획득하였으며 의회에서 261석을 얻을 수 있었다. 1914년에는 400만명의 당원을 확보하였으며 유권자는 1200만이 되었다. 

대회는 사회주의 정당의 원칙과 독립성을 파괴할 수 있는 타협은 용인될 수 없으며, 부르주아 정당과는 별개의 노동자계급의 정책을 제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노동조합을 경시하는 독일사민당의 라쌀주의 전통, 그리고 이미 각국의 총연맹이 각 정당들과 연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에 대한 정치사업은 활발하지 못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총파업 투쟁을 강조했으며 주기적으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면서 노동절 시위를 조직했다. 



제2차 (1891년) 브뤼셀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부르주아 정당의 지배에 반대하는 노력을 결합하고, 노동자가 정치 권리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든 이 권리를 임금노예제로부터 해방을 이룩하기 위해 이용해야 한다


제3차 (1893년) 취리히 사회주의 노동자 대회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권력 장악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노동자계급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결의했다. 노동조합의 전국 연합체를 모든 나라에서 결성하고, 산업별 국제노동조합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제4차 (1896년) 런던 인터내셔널 사회주의 노동자 무역 동맹 대회

회원 자격문제를 둘러싸고  아나키즘의 가입을 제한했다.  "자본주의 소유와 생산을 사회주의 소유와 생산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입법 및 의회활동을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의 하나로 인정하는 조직의 대표"와 "비록 정치투쟁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지만, 입법과 의회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한다고 천명하는 노동조합"으로 결의했다. 노동자계급은 최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투쟁수단을 이용해야 하고, 이 경우 의회전술 문제에 대해서도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경제투쟁과 관련하여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강조했다.


제5차 (1900년) 파리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프랑스에서 1895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으로 1898년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공화파는 왈덱 루소(Waldeck Rousseau)내각을 출범시켰는데 이 내각에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이 상공장관으로 들어갔다. 밀레랑 옹호 진영은 입각이 기존체제 내에서 부분적인 개량 성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레스(Jaurs)는  '새로운 전술'의 모범, '부르주아지에 대한 정치적 탈취'로 평가했다. 이에 반해 게드(Guesde)는 당의 목표를 희석시키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원칙에 배치된다고 비난했다. 인터내셔널에서 당이 승인만 하다면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카우츠키의 타협안이 채택되었다.

한편 프랑스 게드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철폐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혁명 수단으로서 세계 규모의 총파업을 제안했다. 각국 대표들은 총파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이 제안은 대회에서 부결되었다.



제6차 (1904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독일 드레스덴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르주아 내각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과 의회주의를 주장하는 베른슈타인에 대한 비판 결의문이 통과된 이후 열린 대회에 이 문제로 베벨과 조레스가 대립했다. 조레스는 프랑스의 경우 왕정을 복구하려는 왕당파를 견제하기 위해 공화파 부르주아 내각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총회는 드레스덴 결의문에 25:5의 지지를 보냈고 12명은 기권하였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독일 대표자로서 인터내셔널에 남아 있었다.

또한 대회에 상정된 안은 먼저 총파업과 대중파업을 구분했다. 총파업은 체제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사회 전체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 '무정부주의적'인 행동으로 규정되었다. 정치적 대중파업은 일정한 조건에서만 즉,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에 어긋나는 반동적인 조치에 대항하기 위해 혹은 중요한 사회변화를 이끌기 위한 조건에서만 승인될 수 있는 최후 수단으로서 인정되었다. 그리고 대중파업도 그것이 일정한 조직 발전을 통해서, 계급투쟁에서 노동자들 사이의 단결과 세력 강화에 기여하는 경우에 한해서 허용된다고 강조됐다. 


제7차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논란 끝에 전쟁반대 결의안이 통과됐다. 나아가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마르토프가 제출한 수정안이 포함됐다. 이 수정안에 따르면 '어느 곳에서든 전쟁이 발발한 경우에는 전쟁의 빠른 종식을 위해서 개입해야 하고, 대중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전쟁에 의해서 생기는 모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위기를 전력을 다하여 활용해야 하며, 자본주의적 계급지배를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노동운동"의 임무이다.' 이러한 입장은 전쟁 1년 전인 1912년 바젤 대회까지 매번 확인됐다. 

식민주의는 보어전쟁 당시인 1900년의 인터내셔널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7년 후에 열린 슈투트가르트 회의에 참석했던 식민지 대표들 대부분은 '어떤 상황 하에서나 모든 식민지 정책을 일률적으로 거부할 수만은 없다.'고 주장했다. 즉 여기에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처럼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개화를 목적으로 한' 식민정책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제안은 논쟁 끝에 127:108로 부결되었다. '자본주의적 식민지 정책은 그 본질상 토착민들을 노예화시키고 노동을 강요하며 뿌리를 근절시킨다.'는 결의문이 통과되었다.


제8차 (1910년) 코펜하겐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제9차 (1912년) 바젤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긴급 대회)

평화를 위한 시위가 되었으며 또 다시 만장일치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혁명적 투쟁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제2인터내셔널의 주축이 되었던 정당들은 자국의 정부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을 지지했다. 인터내셔널의 붕괴는 자본주의 팽창의 절정이며 노동운동의 민족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세르비아, 헝가리 등의 당들만이 반전 노선을 견지했다. 

전쟁 중에, 중립국에 있는 당들을 중심으로 제2인터내셔널을 부활하려고 인터내셔널 사무국은 네덜란드로 옮겨졌다. 전쟁 직후 1919년의 베른 회의는 성과가 없었으며, 다음해에 제네바에서 17개국이 참가한 총회가 개최되었고 1923년에 함부르크 총회에서 제대로 부활됐다. 

이와 별도로 1921년에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Ö) 그리고 영국 노동당을 포함한 10여개국의 좌익 사회주의자들이 비엔나에 모여 '제2.5인터내셔널'이라는 별칭이 붙은 사회당 국제 노동동맹('비엔나 동맹')을 결성하였다. 비엔나 동맹은  제2인터내셔널과 통합하여 노동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결성했고, 이것은 1940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조직은 19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이어졌으나, 이는 세계에 퍼져있는 사회주의 정당 및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느슨해진 연합으로서 런던에 본부를 설치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1951년 6월 30일 창립대회에서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발표하여 무장혁명을 거부하고 사회민주주의노선을 천명하면서 소련을 비판했다.  2013년 주도국인 독일사민당이 탈퇴하여 진보동맹을 출범시켰다. 

제1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1848년 혁명이 실패한 후 마르크스는 런던 망명기간 중에 영국의 식민지 아일랜드, 프로이센과 러시아 사이에 끼인 폴란드 문제를 다뤘다. 1863년 러시아의 지배에 있던 폴란드 민중이 봉기하자, 이듬해 각국의 노동자들이 폴란드 봉기를 지원하기 위해 런던에 모였고, 이를 계기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가 출범하였다. 

당시 영국의 노동조합들은 자신들의 파업을 와해시키기 위해 자본가에 의해 고용되는 폴란드와 아일랜드 이주노동자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국제노동자협회 즉 제1인터내셔널 설립에 협조했다. 

마르크스는 루이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이 전쟁을 할 것을 우려하였는데, 카우츠키와 달리 마르크스에 따르면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은 반드시 경제적 동기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보불전쟁에 직면하여 방어적이라고 해도 제국주의 전쟁에 노동계급이 동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북독일연방 의회에서 보불전쟁을 위한 국채 발행에 기권하였기 때문에 작센인민당 내에서 비판받았다. 1870년 보불전쟁이 임박하자 리프크네히트는 독일사회민주노동자당 기관지 ≪인민국가≫를 통해 전쟁에 반대하고 양국의 노동자들이 힘을 합해 양국의 지배계급을 타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비스마르크 정부는 그와 베벨을 반역죄로 기소하였다. 두 사람은 1872년 2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마르크스주의 세력이 보불전쟁을 자본가들의 전쟁으로 규정하면서 전쟁을 거부하였다. 반면 슈바이처 당은 이에 찬성하였다. 그런데 프랑스가 패배하자 양당 모두 전쟁을 확대하는 것과 알자스로렌 지방을 병합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전쟁 이후 라쌀주의자들도 마르크스파와 마찬가지로 파리코뮌을 지지하였다.


공산주의자 동맹과 제국주의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지구적 차원이므로 비자본주의적 사회는 서구 자본주의가 이룬 성취를 획득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이 비자본주의적 영역으로 확대되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지역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의 징조가 나타날 수 있다(앤더슨, 2020). 마르크스에 따르면 저발전 지역의 혁명운동이 선진 자본주의의 혁명운동의 동맹이자 기폭제로 기능할 수 있다. 실제로 아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운동은 반제국주의, 반식민지 민족운동의 과정에서 확산되었고 민족해방전쟁과 긴밀히 연결되어왔다.

1848년 2월 혁명은 노동자가 이미 권력의 주체로 참여하는 사회혁명이었다. 즉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중간단계였다. 반면 전제 군주 아래 분열된 독일연방의 혁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었다. 프랑스보다 늦게 발생한 독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특징은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발전한 가운데 발생했다는 점이다. 1848년 독일 혁명의 목적은 시민계급이 중심이 돼 민중들이 분열적인 봉건제도를 극복하고 프랑크푸르트 의회를 중심으로 민주적인 중앙집권적인 근대민족통일국가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맨체스터에서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노동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엥겔스가 1845년 『1830년대 영국노동자들의 상태』라는 책을 쓴 배경이다. 이 책의 무대에 해당하는 곳이 영국 맨체스터 리틀 아일랜드(원 스트릿)이다. 엥겔스가 경영수업을 받던 맨체스터의 방직공장에도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있었다. 특히 <리틀 아일랜드>라는 곳에서 많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빈민가가 형성하였다. 

산업혁명 당시 맨체스터는 인구가 폭발하고 공장의 급증으로 인해 환경 오염, 알콜중독, 범죄, 전염병 문제가 심각하였다. 엥겔스는 맨체스터의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던 아일랜드 여성 노동자 메리 번즈(Mary Burns)를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 역시 리틀아일랜드에서 거주하면서 엥겔스에게 그곳의 참상을 알려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리 번즈는 문맹이었지만 혁명적인 노동자 운동과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미 1845년 맨처스터를 방문해 엥겔스와 지낸 바 있으며 메리 번즈는 엥겔스와 마르크스에게 노동운동 조직과 아일랜드 독립운동 조직을 소개해주기도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평생 아일랜드의 공화국으로의 독립을 지지하고 지원활동을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출판한 직후 1848년 3월 하순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를 집필하였다. 그 내용은 독일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취해야 할 구체적인 강령이었다. 또한 이것은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서도 가능한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준비하게 되는 기초가 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동맹은 이 요구를 통해 이러한 강령이 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와 소농민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선언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민주주의 투쟁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창출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태도는 반제국주의 반봉건투쟁 일반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은 1846년에 크라코프 반란을 주도한 폴란드의 봉건귀족들의 반제투쟁을 지지하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빈 체제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아래 있는 폴란드에서 봉건세력이 민족해방전쟁을 치르는 경우, 노동자정당은 이를 한시적으로 지지할 필요가 있다. 

폴란드에서 11월 봉기(1830-31년)의 패배 이후에는 서구 등으로의 대규모 망명(대망명)이 발생함으로써 국외에도 해방운동의 거점이 만들어졌다. 맑스와 엥겔스는 렐레벨 등 폴란드 망명가들과 교류를 통해 폴란드 문제에 접했다. 엥겔스 역시 폴란드 해방투쟁에 주목하여 폴란드인을 '역사 없는 민족'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남슬라브인 등과 대치시켰다. 나아가 파리 코뮌 등 다른 국민의 혁명운동에도 자진해서 협력한 폴란드인을 '혁명의 코즈모폴리턴적인 병사'라고 칭찬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기 러시아나 독일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위해서는 폴란드의 해방이 불가결하다고 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6년에 만든 브뤼셀의 ‘공산주의통신위원회’는 차티스트 잡지 ≪북극성≫의 편집인 하니에게 영국 연락원의 소개를 부탁했고, 하니는 의인동맹 런던지부의 칼 샤퍼를 추천하였다. 두 조직은 접촉 이후 차티즘과 폴란드 봉기를 공동으로 지지하며 서로 협력을 약속하였다. 1847년 11월 마르크스는 브뤼셀의 ‘우애로운 민주주의자연합’의 부위원장 자격으로 런던의 ‘우애로운 민주주의자연합’이 개최하는 폴란드혁명 기념집회에 참가하고자 런던에 왔다. 

당시 공산주의자동맹은 벨기에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등 유럽 각국의 혁명가들이 모인 국제조직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동맹은 구식민지를 복원한 빈 체제를 타도하여 공화주의와 식민지 해방을 완수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빈 체제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아래 있는 폴란드와 같은 나라에서 민족적 봉건세력이 민족해방전쟁을 치르는 경우, 노동자정당은 이를 한시적으로 지지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물론 제국주의세력을 몰아내면 봉건귀족들은 그 반동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노동자들을 탄압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세력은 물론 민족주의 세력과 불가피하게 연대할 때도 이들이 본질적으로 반혁명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 

오스트리아령에서 슐라흐타가 주도한 크라쿠프 봉기(1846년)가 갈리치아의 농민운동을 적대하고, 러시아에 대한 1월 봉기(1863년)가 농민해방을 제기하면서도 결국 농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좌절했던 것처럼, 맑스 등이 폴란드 독립의 불가결한 조건으로서 기대한 농업혁명은 19세기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폴란드의 1월 봉기의 패배 후에 무장봉기에 의한 독립회복 노선이 후퇴하고 착실한 생산노동에 의한 자립을 지향하는 포지티비즘(positivism) 운동으로 대체된 이후 1870년대 후반에는 사회주의 운동이 조직화되어간다.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거의 동시기에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에 대항하면서 폴란드의 해방이라는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폴란드에서 1880년대 독립회복을 목표로 하는 그룹은 1890년대 폴란드 사회당으로 발전하고 사회주의세력들은 룩셈부르크 등을 중심으로 하여 1882년 창당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프롤레타리아트'를 흡수하여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을 결성했다. 양당은 제2인터내셔널에서도 대립했는데 엥겔스와 교류한 사회당이 우세했다.

사회당은 1906년 좌우로 분열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독립한 폴란드에서도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회당 우파의 피우스츠키가 집권했다. 사회민주당은 폴란드 독립 후에 사회당 좌파와 합동하여 폴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공산당의 전신)을 결성하고 레닌의 노선에 가까워졌다. 

마르크스 시대 폴란드와 아일랜드 문제

이제부터는 국제당(공산주의자동맹, 제1~3 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문제를 살펴 봅니다.

폴란드는 10세기 중엽 단일국가로 성립했으나 1138년  볼레스와프 3세가 아들들에게 공작령으로 분배했다. 1320년 브와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를 통일시켰다. 카지미에시 3세가 후대가 없어 폴란드의 왕위는 헝가리 국왕이 계승했다. 헝가리 국왕이 1383년에 죽은 이후에는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은 리투아니아의 야기에우워 왕조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결성했다. 이후 약 400여 년 동안 폴란드는 번영한다. 폴란드 군대가 1610년 클루시노 전투에서 승리하고 모스크바까지 점령하였으며, 1611년 러시아가 폴란드에게 조공을 바쳤다. 폴란드는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여 다른 나라와 달리 종교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폴란도의 정치적 구심은 귀족들의 연합이었는데 이 과두정이 약해지면서 1648년 코사크인 반란이 일어나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게 잃었다. 스타니스와프 국왕이 폴란드를 넘보는 러시아와 화해정책을 추진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1768년 바르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1772년에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영토의 30%를 찬탈했다(1차 폴란드 분할). 스타니스와프 국왕이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자 1792년 귀족과 동맹한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프러시아와 러시아는  2차 폴란드 분할에 나서 대부분의 폴란드 영토를 차지했고 나머진 속국으로 전락했다. 1795년에 러시아에 대한 코시치우슈코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3차 분할하여 폴란드를 멸망시켰다.

1807년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으로 독립시켰으나 1815년의 빈 체제에 의해 러시아와 프러시아에 복속됐다. 러시아가 폴란드에 입헌 괴뢰국을 세웠으며, 프러시아는 아예 독일화정책을 추진했다. 1830년에는 바르샤바에서 사관생도들의 주도로 11월 봉기가 일어나 러시아 군대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주변국이 도움을 주지 않아 러시아에게 항복하고야 말았다. 봉기가 진압되자 폴란드 입헌왕국은 러시아 제국에게 합병됐다.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는 상대적으로 탄압이 덜해서, 특히 크라쿠프 자유시 등에서 폴란드 문화가 흥성했다. 여기서 보수적인 폴란드 귀족(szlachta)들이 1846년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1848년 혁명에서 프러시아령 포센 대공국 폴란드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한 후 완전히 프러시아에 병합되었다.

1863년에는 또다시 봉기가 일어나 러시아에 대항하였으나 패배했다. 이후 러시아의 지배 아래 폴란드 입헌왕국은 독립보다는 근대화에 주력하여 19세기 말에 산업화로 번창했다. 

1918년 11월에 패전한 독일과 평화협정이 맺어지면서 폴란드 제2공화국이 성립됐다. 이후 폴란드 군대가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소비에트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9년 9월 1일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9월 17일에는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9월 28일에는 바르샤바가 함락되었으며, 독-소 불가침 조약에서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카틴 학살 등이 발생했다. 독일도 폴란드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서부 전선에 참여했으며 동부 전선에서는 소련의 지휘를 받으며 전쟁에 참여하였다. 

1944년 8월에는 소련이 바르샤바로 진격하기 직전에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945년 소련은 폴란드의 20%를 자국령으로 편입하였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에도 이 영토는 다시 폴란드에게 돌아가지 않았으며, 대신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의 영토가 되었다. 한편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는 오데르-나이세선이라고 하는 새로운 국경선이 확립돼 폴란드가 영토를 회복했다. 

얄타 회담에서 런던의 망명정부 대신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공산주의 폴란드 임시정부의 수립이 승인되었다. 1945년 선거에서 친소 공산당이 집권해 1952년에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1956년 스탈린격하 운동에 자극을 받아 포즈난 시위가 확대되면서 소련군이 개입했으며 최대 100명이 사망했다. 

아일랜드는 영국에 정복당하였지만 영국의 1648년 청교도혁명까지는 여전히 형식적으로 독립된 나라 즉 속국이었다. 그런데 청교도 혁명 당시 왕위에서 쫓겨난 왕이 아일랜드로 피신하여 영국의 왕조를 다시 재건하고자 하였다. 이에 영국의 혁명군이 아일랜드를 점령하여 아일랜드를 영국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후 아일랜드는 영국을 위한 목축지로 전락하였다. 목축지를 만들기 위하여 농민들의 경작지는 영국인 대지주 소유로 넘어갔다. 땅을 빼앗긴 아일랜드인들은 영국과 미국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들은 영국과 미국의 산업혁명 당시 공장노동자로서 힘든 삶을 살아야 하였다. 또한 아일랜드는 카톨릭국가였는데, 영국은 성공회국가였기 때문에 카톨릭 신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당시 아일랜드 인구는 400만 명이었는데, 런던에만 12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이 있었고, 맨체스터에도 4만 명이 살았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 왕정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아일랜드공화당을 만들었지만 영국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영국의 각지에서 아일랜드공화당원들이 활동하였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자본주의 최고단계)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12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당시 멘셰비키와 개량주의자들을 포함한 각국 사회주의자들은 조국방위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지지했다. 그러나 레닌의 볼셰비키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반대했다. 

제국주의론 노트(레닌선집 39권)는 1915년~1916년에 집필됐으나 후에 발견돼 1933년~1938년에 출판됐다. 《제국주의론, 자본주의 최고단계》은 1916년 집필돼 1917년 출판됐다. 레닌은 제국주의론과 제국주의론 노트를 통해 홉스의 제국주의론, 힐퍼딩의 금융자본론, 로자의 자본축적론,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을 종합분석하고 비판했다. 

레닌은 선행하는 저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제국주의의 개념을 정립했다. 레닌에 따르면 제국주의의 본질은 독점자본주의이며, 독점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나타난다. 제국주의는 사회구성체로서 경제적 토대와 토대에 부응하는 상부구조를 포함한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지니는 경제적 토대의 특성으로서 상품수출, 자본수출, 금융자본의 우위, 세계시장의 분할을 제기하고 상부구조의 특성으로서 타국의 지배 즉 식민지 체제를 제기했다. 

여기서 금융자본은 금융자본 중심으로 산업자본이 융합된 독점자본을 의미한다. 금융자본의 우위는 단순히 산업자본에 대한 우위만을 뜻하지 않고 정치권력의 배후로서 정치적 우위를 포함한다. 레닌이 제기한 제국주의 표지 5개는 선행연구를 비판적으로 종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레닌은 영토를 점령당한 식민지뿐만 아니라 정책결정권을 박탈당한 수준의 반(半)식민지도 정치적 지배에 포함시켰다. 

5개 표지로 구성된 레닌의 제국주의 개념은 사회구성체로서 정치경제적 종합개념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따라서 단순히 경제적 이윤만 얻고 정치적 지배가 없는 경우, 경제적 이윤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 단순한 정치적 지배만 있는 경우는 제국주의 혹은 독점자본주의라고 볼 수 없다. 

홉스, 힐퍼딩, 로자, 카우츠키는 제국주의를 정책으로 파악했는데, 레닌을 이들을 비판하면서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한 단계 즉 사회구성체로서 파악했다. 제국주의론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제국주의 전쟁에 협조하려는 카우츠키의 제국주의 평화론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간의 불가분 관계,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강조했다. 제국주의론은 국제사회주의 운동이 개혁과 혁명으로 분열한 배경을 설명하고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반제국주의 저항을 초래하여 민족해방전쟁이 발생한다는 점을 밝혔다.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국가들은 불균형적으로 성장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최고 형태로서 제국주의국가들은 불균형적으로 식민지를 분할한다. 1차 대전 당시 후발자본주의 독일의 경제력은 영불을 추월했지만 식민지는 거의 없었다. 이처럼 경제력과 식민지 지분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런 불균등 발전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이 됐다. 전 세계가 이미 분할됐으므로 거대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를 확대하는 방법은 다른 경쟁자들을 희생시키는 것밖에는 없었고, 이것은 전쟁을 의미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한 단계도 아니고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도 아니며 일부 금융자본이 “선호하는” 정책일 뿐이다. 또한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가장 강력한 카르텔과 국가들이 전쟁과 군비경쟁을 포기하는 국제협정을 체결해서 “초제국주의” 단계가 시작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늘날 통찰력 있는 자본가들은 모두 자기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할 것이다. 만국의 자본가여, 단결하라!”

하지만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세력권과 식민지 등을 분할하는 근거는 오직 그 분할에 참여하는 나라들의 경제력·군사력뿐이다. 제국주의 나라들의 힘은 현재도 미래도 균등하게 변화하지 않는다. 10~20년이 지난 뒤에도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상대적 힘이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제국주의 간’ 동맹이나 ‘초제국주의’ 동맹은 전쟁과 전쟁 사이의 일시적 ‘휴전’에 불과하다. 실제로 1차 대전이 끝난 후 제국주의 국가들은 군비경쟁에 나서 2차 대전에 돌입했다. 

레닌에 따르면 제2인터내셔널에서 기회주의 혹은 개혁주의가 풍미한 것은 제국주의와 이들 세력의 물질적 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레닌은 이미 19세기 중후반 영국이 산업과 식민지를 독점한 것과 영국 노동운동에서 개혁주의가 득세한 것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봤다. 제국주의 국가 내에서 독점 자본가들은 세계에서 얻은 초과이윤으로 사회주의정당과 노동조합의 관료들을 매수할 수 있었다. 

레닌에 따르면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유발하기 때문에 그런 투쟁을 적극 지지하는 것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의무이다. 레닌의 이러한 주장 전에는 사회주의 운동이 식민지의 민족 해방 운동을 중요한 전략적 의의가 있는 운동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레닌의 입장에 따라 코민테른이 창설됐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2차 세계 대회에서는 ‘민족·식민지 문제’가 핵심 주제가 됐다. 레닌은 억압 민족과 피억압 민족의 민족주의를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한편으로 선진 자본주의 나라와 러시아의 노동계급,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피억압 민중 사이의 혁명적 동맹을 제안했다. 1920년 9월 코민테른이 바쿠에서 개최한 제1차 동방민족대회의 구호는 “만국의 노동자와 피억압 민족이여 단결하라!”였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11

베른슈타인(1850년 ~ 1932년)은 엥겔스의 『반뒤링론』을 읽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베른슈타인은 1872년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아이제나하파의 당원이 된다. 1875년 아우구스트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아이제나하파와 라쌀파의 결합을 결정한 고타 전당 대회를 준비하였다. 

황제 암살 미수 사건과 사회주의자들은 무관하였으나 1878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제정되자 베른슈타인은 1878~88년 스위스로 이주하여 1880년에서 1890년까지 SPD의 비합법 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를 발행하였다. 1888년 프로이센의 압력을 받은 스위스 정부로부터 국외 퇴거 명령을 받고 다시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베른슈타인은 런던 망명 중에 엥겔스, 카우츠키와 교류하였다. 엥겔스와의 친밀한 관계가 1890년대까지 당내 이론가로서 지위에 도움이 되었다. 베른슈타인은 자신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런던에서 페이비언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연합(Social Democratic Federation)과 교류하면서 수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베른슈타인은 비스마르크 시대에 만들어진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폐지에 따라 1901년 독일로 귀국하였다. 1902년에서 1918년까지 제국의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1903년 드레스덴 전당 대회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부결되어 베른슈타인은 공식적으로는 패배하였으나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는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 1913년 사회민주당 좌파와 함께 군사력 증강법에 반대표를 던졌으나 1914년 전쟁 국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졌다. 하지만 이듬해 전쟁에는 반대하였다. 

사민당 지도부는 전쟁반대론자들을 제국의회에서 소외시켰다. 베른슈타인은 1917년 카우츠키와 함께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참가했으나 독립사민당은 베른슈타인의 평화적 이행에 반대하였다. 오히려 다수사민당(MSPD)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수용했기 때문에 베른슈타인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사회민주당에 복귀하였다.  베른슈타인은 1920년부터 1928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 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21년 괴를리츠 강령 기초를 도왔다.

그는 1877년  유대인 단체에서 물러났으나 1차 대전 이후 시온니즘에 대해 동조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반유대주의 정서에 편승하여 팔레스타인들을 위한 단체에도 가입하였다. 그는 사민당 내 최초의 동성애 허용론자이다. 

그는  '윤리적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물질적인 요소를 발달의 만능적인 힘으로 받드는 마르크스주의를 자기기만이라고 단정하였다. 그 이유는 정치적 · 도덕적 신념, 종교 등의 관념적인 요소는 경제적인 생산관계 또는 계급관계에 못지않게 사회생활과 문화생활의 제 현상에 원대한 작용을 미쳐서 인류 발달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발전을 유기적 진화론의 입장에서 사회주의의 평화적 이행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혁명을 부정하고 '궁극 목적은 무이고 운동이 전부다'라고 주장하였다. 

베른슈타인은 폭력적인 블랑키주의에 영향 받은 공산주의자동맹의 젊은 마르크스에 반대하고 후반의 마르크스를 지지하면서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점진적인 의회개혁으로 평화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카우츠키는 “선거제도는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베른슈타인의 의회주의는 진보적인 부르주아와 비노동계급적 동맹에 이르게 한다”고 비난하였다. 

엥겔스가 1895년 4월 1일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엥겔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의 신판에 자신이 쓴 서문이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에 의해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평화로운 길에 동의한 것처럼 편집된 것에 분개하였다. 

베른슈타인은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한 이후 「사회주의의 문제들(Probleme des Sozialismus)」(1896-98)을 발표했으며, 1899년에는 「사회주의의 문제들」을 보완하여 『마르크스주의비판』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저서와 1899년 『사회주의를 위한 전제들과 사회민주주의의 임무(Die Vor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 에서 유물론적 역사관, 노동가치론, 자본주의의 붕괴론, 계급투쟁론 등을 비판하였다.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를 위한 전제들과 사회민주주의의 임무』에서 산업화된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은 노동조합과 의회활동이라고 보았다. 그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필연적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상승하였으며,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대결이 가시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자본이 소수에게 집중되지도 않았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0년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를 통해 비판하였다.

베른슈타인에 따르면 자신의 이론은 공상주의와 폭력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마르크스주의 내의 이론과 실천의 충돌을 해소하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부정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패러다임의 이동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극복이자 발전이다. 즉 자신이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였다. 베벨은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최초로 마르크스주의 내용을 비판한 자라면서 베른슈타인을 사민당에서 축출하려 하였다. 하이만(Horst Heimann)에 따르면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은 수정주의를 확립하였는데, 이는 라쌀주의가 아니라 베른슈타인의 영향이다. 

베른슈타인에 따르면 자본은 끊임없이 집중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진보로 신규 중소기업이 생기고 이들은 대경영에 대항할 능력을 구비하고 있어 중간층이 두텁게 형성되고 있다. 그는 꾸준하게 프롤레타리아 일부가 자본가로 변신하고 있다고 봤으며 농민과 중산계급을 위한 민주주의적인 개혁, 협동조합의 조성을 주장하였다. 중간층의 존재는 자본주의적 집중설과 상충된다. 

집적설에 대해서도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의 징후’라고 본 주식회사의 발달에 의하여 자본의 소유가 한층 다수인에 분산되는 경향을 나타낼 뿐 아니라 생산조직의 발달로 노동자의 일부분은 점차로 자본의 소유자로 전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의 빈궁화는 다양한 이윤배분과 중소기업에 의해 저지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근대사회의 발전은 사회적 계층구조에서의 중간층의 역할과 위치에 의존한다고 하였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는 점차 복잡해지고 적응력도 커지고 있다고 본다. 즉, 그는 자본주의가 붕괴되어 사회주의가 출현할 것을 기다리기보다 현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베른슈타인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계급을 민주주의적으로 육성하여 모든 변혁을 국가 내에서 쟁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대규모 정치적 파업을 찬성하고 선거권 투쟁과 같은 의회투쟁을 강조하였다. 

독일의 노동조합들은 자본주의의 성공과 노동계급 조건의 개선을 목격하고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갈수록 동조하였다. 베른슈타인은 고소득노동자와 고학력 노동자들은 기존 체계에 편입하려고 하며 점진적 개혁을 선호한다고 보았으며 노동시간, 노령연급과 같은 타협책이 증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1848년 6월의 파리 노동자봉기와 같은 폭력혁명은 반동세력만을 강화시킨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독점기업의 사회화를 주장하였으며, 독점자본에 대항하여 부르주아 중간계급과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에 의해 사회주의가 달성된다고 보았다. 

사회운동의 실천에 있어서도 그는 마르크스의 국제주의 대신에 각국의 국민적 특성에 따라서 각각 다른 정치적 행동을 채택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베른슈타인에 따르면 개인적 자유 혹은 특정 집단의 사적 이해가 전체의 이해를 훼손할 수 있는데, 민주적 국가만이 이러한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 이점에서는 칸트 및 헤겔의 국가관과 유사하다. 정재환에 따르면 베른슈타인의 입장에선 계급지배의 도구로서 국가는 어떤 특정한 발전단계에 있는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지 국가 일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국가의 역할이 증대하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베른슈타인, 2002: 139).

베른슈타인은 ‘전세계인의 해방을 전제로 한 국가주의(cosmopolitan-libertarian nationalism)’를 주장하였다. 그는 자유무역이 평화, 민주주의, 번영, 인류의 물적 도덕적 복지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그는 독일의 보호주의 관세는 정치적 편의주의에 불과하고 오히려 독일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며, 국내 생산에 도움을 주지 못해 영국의 경쟁력에 대항할 수 없는 반면 임대료 인상, 이자율 인상, 물가인상을 초래한다고 봤다. 이런 관점에서 전쟁 이후 국가들의 연맹을 주장하였다. 

그는 높은 문명을 가진 국가가 그렇지 못한 국가를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인종적인 차별 의식을 지녔기 때문에 제국주의 식민지정책에 동조하였다. 

그는 높은 문명은 높은 권리를 지녔으므로 열대국가의 야만인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은 토지의 정당한 사용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을 얻는 것이라고 보아 식민지적 권리를 인정하였다. 특히 1896년 그는 야만인들은 높은 수준의 문명의 지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문명화를 거부하거나 능력이 없는 인종들은 문명화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우리들의 동정을 얻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외형상 국수주의와 전쟁에 반대하여 독일이 1차 대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당의 지도부에 설득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가의 역사적 역할을 긍정적으로 봐 노동자들은 외침에 대해 방어해야 하며, 국가체제(nation-states)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영불과 유대를 강조한 반면 러시아에 대해 독일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아 적대적이었다. 

레닌 시기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10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 1854년 ~ 1938년)는 파리코뮌의 직접민주주의, 집산화를 주목하면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1881년에 런던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방문하였다. 그는 1888년까지 『노이에 차이트』의 편집자로서 엥겔스와 함께 『마르크스의 경제이론(Karl Marx’ ökonomische Lehren)』 등 마르크스 유고들을 출판하였으며, 『잉여가치학설사』(1904-10) 등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고도 출판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후계자로서 인정받았으며, 1891년 베벨, 베른슈타인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반영한 에르푸르트 강령을 기초하였다. 

카우츠키(1854∼1938)가 주도한 제2인터내셔널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와 1912년 바젤에서 전쟁에 반대하고 전쟁이 초래할 국내적 위기를 계급투쟁에 활용할 것을 결의했다. 1907년 제2인터내셔널에서 그는 식민지 노선에 반대하였지만 수정주의를 내세웠다. 1910년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서 카우츠키의 권위는 붕괴되었다. 

카우츠키는 1914년 8월 3일 전쟁부채 결의안 표결 하루 전 제국의회에서 방어적인 전쟁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당이 정부에 그러한 요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 정책을 좌절시키지 못해 세계전쟁이 일어났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전쟁이 일어난 이상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조국을 방위하고 전쟁이 끝나면 서로 용서해야 한다면서 전쟁에 협력했다.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카우츠키의 주장에 분개하여 그와 결별하였다. 카우츠키는 이처럼 방어전쟁에 동의했지만 마르크스는 보불전쟁에 직면하여 방어적이라고 해도 제국주의 전쟁에 노동계급이 동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제2인터내셔널은 소속정당들이 전쟁에 협력함으로써 붕괴됐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즉 계급투쟁으로 전환해 혁명을 달성하자는 레닌의 주장은 러시아에서 성공했지만 유럽에서 실패했다. 1차 대전 당시 카우츠키의 독일사민당은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을 정도의 의회정당이었다는 점이 러시아의 레닌과 처지가 다르다. 

1915년 6월 전비가 증가하고 전쟁이 참혹해지는 한편 제국의 점령의지가 명백해지자 1916년 봄부터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 하세(Hugo Haase) 등과 공개적으로 반전으로 돌아섰다. 1917년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 베른슈타인 등과 함께 독립사회민주당(Independent Social Democratic Party of Germany, USPD)을 창당하였다. 

룩셈부르크는 독립사회민주당의 좌파로서 있다가 스파르타쿠스단을 거쳐 독일공산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카우츠키는 반대로 사민당과의 통합협상에 주력하였다. 1차 대전 이후 독일 공산당은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해서 "사회파시즘"이라고 비판하였다. 공산당은 이후 나치에 맞서서 사회민주당에게 통일전선을 제안하였으나 결국에는 무산되었다. 

1922년 사민당에 복당한 카우츠키는 1925년 사민당의 하이델베르크 강령을 공동 기초하였다. 하이델베르크 강령은 1921년의 괴를리츠 강령에 비해 개혁보다는 혁명에 방점을 두었지만 여전히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라는 기조를 유지하였다.

카우츠키는 러시아혁명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917년 6월 러시아가 아직은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아독재(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에서 멘셰비키를 옹호하여 “10월 혁명을 불법이며 러시아를 후퇴시켰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카우츠키는 1919년 『러시아에서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를 발표하였다.

카우츠키는 자본의 집중과 집적, 독점화에도 불구하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부가 분산되는 주식회사의 기능을 주목하였다. 이로써 자본주의가 아직 붕괴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반면 마르크스는 오히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의 자기파괴라고 평가하였다.

카우츠키의 수정주의는 라쌀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자체로부터 유래하였다. 그의 주장은 혁명과 의회활동 모두를 인정한 마르크스의 입장과 같다. 카우츠키는 의회투쟁과 직접행동의 결합을 통한 민주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직접행동은 성공가능성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소극적이었다. 반면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에 대한 찬사에서 보듯이 혁명이 반드시 성공가능성이 있을 때만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사회주의혁명은 객관적 조건이 성숙된 후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하지만 물적 토대에서 아직도 자본주의의 생명력이 남아있고, 노동자들의 의식이 완전히 깨이지 않았다. 이러한 속류 유물론과 경제주의에 치우친 카우츠키(1964)는 자본주의가 아직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선 민주주의혁명이 우선이라면서 볼셰비키의 10혁명을 비난하였다.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카우츠키는 유물론과 관념론을 절충하여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의미를 훼손하였으며, 부르주아국가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자들이 주도가 된 계급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카우츠키를 비판하였다. 

마르크스 역시 1848년 혁명 당시 이미 유럽은 혁명의 객관적 조건에 도달하였다고 보았으며, 그 이후에도 경제공황이 발생하면 노동자들의 혁명적 저항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무엇보다 혁명의 객관적 조건에 따라 노동자들의 혁명의식과 혁명의 시작이 기계적으로 지배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카우츠키와 달리 마르크스에 따르면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은 반드시 경제적 동기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카우츠키(1914)는 제1차 대전 당시 단일한 국제 트러스트 형성의 가능성과 자본주의의 생명연장을 설명하는 초제국주의론을 주장하였다. 초제국주의론은 카르텔의 정책을 해외정책에 이식시킴으로써 국제적 금융자본에 의해 세계를 공동 착취하기 위한 주도적 자본주의 열강들의 정책이다. 카우츠키는 연합한 세계카르텔이 자본주의체제라는 틀 내에서 세계전쟁의 위험을 제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초제국주의는 후기 제국주의다.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 잉여생산은 증가하지만, 임금수준이 낮아 그 잉여를 모두 쓸 수 없고, 자본가들 역시 그 잉여생산을 모두 흡수하지 못하고 과소소비를 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를 모면하려고 잉여자본이 해외로 진출하여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나타난다. 

초제국주의론은 발전된 자본주의 열강들이 원료와 식량을 생산하는 1차 산업의 농업국가를 정복하려는 일정한 정책으로 파악된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단계가 아니라 정책의 하나로 본다. 따라서 카우츠키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반대 즉 혁명이 아니라 제국주의 협력체제 등에 대한 정책반대를 주장한다. 

또한 카우츠키는 경제적 제국주의를 인정한 반면 정치적 제국주의 즉 제국주의 전쟁의 필연성을 부정했다. 카우츠키는 자본주의가 전쟁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일시적으로 전쟁이라는 반동적 유혹에 빠져 있지만 아직은 바로 전쟁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독점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에서 거대 열강들 간에 비폭력적, 비제국주의적, 평화적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 그리스공산당의 제국주의 피라미드 주장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평화롭고 협력적인 동맹으로서 국제 트러스트라는 개념과 유사하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카우츠키의 유럽 전쟁 반대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 따라서 실제로 유럽전쟁이 일어나자 전쟁협조주의로 태도를 돌변했다. 

레닌은 제국주의와의 화해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평화를 요구하는 초제국주의론을 비판하면서 제국주의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자고 비판했다. 레닌에 따르면 제국주의 국가들도 불균등 발전을 한다. 레닌에 따르면 후발 제국주의국가인 독일과 미국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재분할하고자 전쟁을 하거나 전쟁에 개입했다. 

초제국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집적과 집중이 세계트러스트로의 경향을 발생시킴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적대적인 형태로 일어나기 때문에 트러스트가 채 발생하기도 전에 자본주의는 사멸되어 사회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증대하는 생산의 집적과 자본의 집중은 불가피하게 계급적 모순과 기타 사회적 모순들을 심화시키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정치적 불균등발전을 크게 증대시킬 것이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세계분할이란 맥락에서 불가피하게 세계전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레닌은 초제국주의 간의 동맹은 아예 불가능하거나 제국주의 국가들 간이나 자본가들 간의 일시적 합으로서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레닌 시기 로자의 자본축적론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9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나오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관계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 1913년 《자본축적론》을 저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축적론에서 팽창해야 축적이 가능한 자본의 본질을 분석하고, 자본 팽창의 종착지가 전 세계 차원의 사회주의라고 전망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비자본주의 사회를 착취하면서 생겨나는 자본 축적 과정을 밝혔다.

룩셈부르크는 자본론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만이 소비자로 존재하는 순수한, 폐쇄적 사회에서는 소비부족으로 인해 상품 형태의 잉여가치가 확대 재생산을 위한 화폐 형태로 전환될 수 없다는 점을 논증했다. 마르크스가 전제한 자본주의 생산 양식만이 존재하는 조건에서 자본의 축적은 현실적으로 계속 증가해야 할 수요의 부족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재생산 공식이 이러한 구체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룩셈부르크는 소비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외의 제3의 소비층, 즉 비자본주의 외부세계가 존재해야 한다고 봤다. 로자의 의견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공황 또는 필연적 붕괴를 막기 위해 비자본주의 영역을 자본주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며, 독점자본주의에 대한 피착취 자본주의 영역이 많아질수록, 자본주의는 쉽게 유지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시초부터 외부 제3의 소비자를 찾아 운동하는 세계 차원의 시스템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군국주의화하고 제국주의로 나아간다. “제국주의란 아직도 비자본주의적 환경을 지닌 세계의 나머지를 독차지하려고 경쟁하는 자본축적 과정의 정치적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제국주의적 팽창과 외부세계 착취와 황폐화, 비자본주의 세계의 종국적 몰락은 불가피하며, 그 결과 자본주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자본 축적의 토대인 비자본주의 세계는 더욱 빠르게 사라진다. 제국주의의 몰락은 이러한 자본주의 외부 토대를 없애버리는 것이며 그 종착지 위에 세워질 사회주의는 일국 차원이 아니라 세계 차원의 경제 형태일 수밖에 없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자본주의에 착취당하고 있는 비자본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할 경우 독점자본주의 국가의 시장 조절 수위의 한계점이 가까워지고 자본의 계속적인 축적이 어려워진다. 그로 인해 제국주의는 붕괴되고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노동자 혁명이 앞당겨진다. 이러한 입장은 사미르 아민의 종속이론의 핵심과 유사하다. 

하지만 레닌은 1913년 로자가 자본축적론에서 큰 혼란에 빠져 있으며 마르크스를 왜곡했다고 비판했다(Lenin to Kamenev, March 1913). 레닌은 로자가 자본론 2권 3절의 확대재생산 도표를 잘못 수정했다고 비판했다. 즉 로자의 확대재생산도표가 틀렸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만든 확대재생산표식에는 C/V, S/V가 연도에 따라 변동하지 않는데, 이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축적에 따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하고 잉여가치율이 상승한다”고 주장한 것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로자는 비판했다. 이리하여 로자는 자기 자신의 확대재생산표식을 만들어 내는데, 이 재생산표식의 오류로 로자는 과소 소비론에 빠지게 되었다(김수행. 2008). 즉 과소 소비론을 근거로 하여 자본가와 노동자만 있는 순수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확대재생산 혹은 자본축적이 불가능하다는 로자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레닌은 로자와 달리 어떤 나라에서 비자본주의 영역으로 확장이 없다고 해도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확대재생산될 수 있다고 봤다. 이미 1895∼96년에 저술한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통해 러시아가 농촌공동체를 통해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에로 이행한다고 주장한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을 비판했다. 인민주의자들은 해외시장이 없는 러시아에서 잉여가치가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식민지 없이 확대재생산을 할 수 없다는 로자의 주장과 유사했다. 

하지만 레닌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하였고, 이로 인해 사회주의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이 형성됐다. 그는 농업에서 현물경제의 상품경제로의 이행, 공업에서는 수공업에서 기계제대공업에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농민층의 분해와 노동자계급이 증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Daniel Gaido, Manuel Quiroga. 2013: 449-450).

또한 레닌은 자본축적론이 제국주의가 새로운 비자본주의 영역에 확장되는 것만 주목하여 기존의 자본주의 영역 내에서의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쟁탈전 이를테면 스페인-미국 전쟁과 같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 아프리카 보어 전쟁, 중국에서 제국주의 군대의 의화단 반란 진압과 같은 사건의 중요성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레닌은 자본 수출과 금융자본의 출현, 이윤율의 하락, 불균등 발전 등 현대 제국주의의 배경을 밝힌 힐퍼딩의 금융자본론이 로자가 간과한 것들을 분석했다고 평가했다(Daniel Gaido, Manuel Quiroga. 2013: 450-451).


레닌 직전 힐퍼딩의 금융자본론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8

루돌프 힐퍼딩(1877년 ~ 1941년)은 오스트리아 유대인 상인 집안 출신으로서 대학시절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는 이후 독일사민당의 초청으로 1906년 독일사민당 교육원의 국민경제학 강사가 되었고 1916년까지 사민당 기관지인 전진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14년에 그는 전쟁을 반대하는 SPD의 좌파에 가담했으나 1915년까지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의사로 강제징집 당했다. 

1918년부터 1923년까지 독립사민당 기관지 ‘자유’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사민당에 통합된 후 그는 제국의회의원을 지냈으며, 1929년 12월 말 뉴욕증시 폭락으로 재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1933년 나치스 정권 성립 후 추방되어 스위스를 거쳐 1938년부터는 프랑스에 머물렀으며, 망명사민당의 지도부로서 활동했다.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 후에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탈출하려다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파리에서 고문 받다가 사망했다. 나치 지도자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대 초반 독일은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점자본의 카르텔을 형성했다. 이를 목격한 힐퍼딩은 ‘금융자본론-자본주의적 발전의 최근 단계’(1910)를 저술했다. 이책은 경쟁적이고 다원적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독점적인 '금융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을 분석했다. 이 저서는 레닌과 부하린의 저서로 연결된다. 

금융자본은 최고로 발전한 자본 형태로 일종의 “삼위일체”를 이룬다. “왜냐하면 산업자본은 성부로서 상업자본·은행자본이라는 성자를 낳았고, 화폐자본은 성령이기 때문이며, 성자·성부·성령은 셋이면서 금융자본에서는 하나로 통일되기 때문이다. 이 삼위일체는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고 관철시켜 주는 강력한 국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외한 사회계급이 이 삼위일체와 연합한다. 이로써 국가독점자본주의가 형성되고 조직자본주의가 나타난다.

힐퍼딩의 이론적 논의는 화폐에서 시작하는데, 이는 화폐의 기능과 의미를 올바로 파악해야 가치의 문제와 이 가치를 통해 형성되고 유통되며 작동하는 각종 자본의 문제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는 힐퍼딩의 기본입장을 반영한다. 이어서 신용, 주식회사, 산업자본과 은행자본, 증권거래소와 상품거래소, 카르텔과 트러스트, 공황 등에 대한 논의가 전개된다. 

실천적 논의는 이러한 금융자본의 발전이 주요한 사회계급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힐퍼딩은 금융에 의한 경제와 산업의 지배, 산업과 금융 및 국가의 유착을 지적했다. 산업, 상업 및 은행 이해관계의 통합은 중상주의의 자유방임이 아니라 국가의 개입을 요구한다. 집중되고 독점이익이 누리는 자본은 과거 부르주아 일반을 위한 국가에서 독점자본을 위한 국가를 추구한다. 이러한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점자본은 농민과 소생산자들을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시켰다. 

힐퍼딩은 금융자본의 정책은 전쟁으로 나아가고 그리고 혁명적 폭풍을 촉발시킬 것이라고 봤다. 그는 대(금융)자본가들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대체되면서 사회변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이 독점자본을 자신의 소유로 만든다면 농민과 소생산자의 사적 소유 역시 간접적으로 사회적 소유로 전환된다. 즉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는 농민과 소생산자의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기 위해 직접 몰수하지 않더라도 독점자본의 사회화를 통해 전체 사회를 사회주의사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극소수의 독점자본을 타도하는 혁명경로는 독점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농민과 소생산자 등 다양한 계급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이후 이러한 반독점사회주의혁명의 경로는 자본주의가 발전한 유럽식 혁명 즉 유로코뮤니즘으로 구체화됐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매우 성숙할 때 즉 농민과 소생산자들이 노동자로 몰락하거나 자본가로 성공하는 계급분화의 시기를 거쳐야 가능하다. 하지만 힐퍼딩에 따르면 이러한 자본주의 성숙 이전에도 독점자본이 국가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달리 자본주의가 성속하지 않은 나라에서도 독점자본을 사회화하는 방식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 독점자본 이전의 마르크스의 혁명경로와 달라질 수 있다. 

힐퍼딩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근단계로 봤다. 다만 힐퍼딩의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미국과 서유럽 같이 성숙한 자본주의 단계에서뿐만 아니라 독점자본이 정치엘리트와 결탁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개발독재, 혹은 파쇼체제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레닌은 힐퍼딩의 이론을 참조하여 독점자본주의를 제국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며 자본주의 최후 단계로 규정했다. 


독일 혁명 실패 이후 좌익공산주의(평의회주의)의 태동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7

1차 대전 직후 독일혁명에서 소비에트의 활약이 유럽의 평의회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독일황제는 항복하면서 러시아식 혁명을 두려워하여 제1당인 사민당의 당수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구체제와 의회주의자들의 화해와 연대 때문에 독일에서 광범위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불필요해지면서 혁명세력은 극좌세력으로 축소돼 고립됐다. 이점이 러시아혁명과 다른 점이다. 

1차대전에 협조하던 독일사민당을 비난하면서 전쟁반대 파업을 감행했던 조합원들이 독일 좌익공산주의의 기원이다. 이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독일 공산당(KPD)을 창당했다. 로자의 스파르타쿠스단은 중앙집권화, 대중조직에서의 활동을 강조했고 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평의회 체제와 분권화된 협의체를 강조했다. 

독일국제공산주의자들에 따르면 사민당과 노조가 1차 대전에 참여한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혁명의 최초에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에 반대하여 노동자평의회와 쏘비에뜨가 제기된 것은 실질적 운동이었고 그것은 옳았다는 것이다. 독일혁명 당시 병사평의회가 Altona 주둔 제9군단, Hannover 주둔 제10군단을 장악하는 등 도시 지역까지 평의회가 구성돼 광역지방자치단체까지 통제했다. 제1차 전독일 노병평의회 총회(1918.12.16-20)는 독일 사회주의 공화국의 중앙평의회를 선출하고 이 최고의 평의회 기구에게 제국정부와 프로이센에 대한 의회적 감독의 권한을 위임했다. 1919년 봄 뭰헨에서 바바리아 레테공화국(R?terepublik)을 창설했다. 에센 노병평의회는 루르지방의 광산의 사회화를 독자적으로 개시토록 결의하고 임금, 가격 등 산업을 통제했다. 하지만 제국정부는 전국적으로 노병평의회를 유혈 진압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독일공산당(KPD)에서 제명당하자, 독일공산노동자당(KAPD)을 창당했으나 곧 쇠퇴횄다. 일부는 제3인터내셔널에 합류했다. 안토니 파네쿡 등 KAPD의 이론가들은 정당조직 반대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들을 고안해 냈고, 그 결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KAPD는 ‘세계자본주의는 쇠퇴기’에 들어섰으며 “독일에서의 경제ㆍ정치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발할 만큼 무르익었다”고 파악하고 “독일 혁명의 문제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의식 자체의 발전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의회에 참여는 개량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평의회 체제를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노동조합 역시 독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장벽으로 노동조합의 반혁명적 성격은 노조의 구조와 작동방식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노조의 파괴만이 독일에서 사회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의 대안으로 “공장평의회”를 강조했다.

이탈리아의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1926년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축출됐다. 이후 이들은 의회를 통한 혁명이라는 혁명적 의회주의에 반대했다. 또한 이들은 소련이 부르주아국가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이 국제주의를 포기했다고 비판했으며, 코민테른의 통일전선 방침에 반대했다. 특히 이들은 공산당들이 반파쇼민주주의 통일전선이라는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제2차 대전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다만 이들은 혁명적이라는 조건 아래 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했으며, 맑스 및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을 프롤레타리아트의식이 단련되는 “공산주의의 학교”로 파악했다. 다만 노조 내 투쟁을 통해 개량주의 지도부를 축출할 것을 강조했다. 반면 혁명당 국제서기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은 노동과 자본의 중매기관인 노동조합을 혁명기관으로 변혁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각국의 평의회주의자 혹은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주장을 펼치나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레닌주의의 전위당론과 민주집중제가 공산당을 독재 집단으로 타락시킨다고 봤다. 로자의 주장을 수용해 혁명적 정당은 노동계급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선전 선동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고 봤다. 이들에 따르면 노동자평의회는 혁명이 성숙할 때 등장하는 노동자계급의 자생적인 조직이고 노동자계급의 권력과 동일하므로 공산당의 지시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 

좌익공산주의자에 따르면 소련은 국가자본주의체제였다. 이들은 10월 혁명을 초창기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농촌 부르주아 혁명 즉 이중혁명으로 규정했으나 나중에 부르주아 혁명으로 변질됐다고 설명한다. 소련의 일당독재 체제에서 의회인 소비에트는 민주적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1년에 한번 열리는 거수기였다. 결국 공산당 관료가 자본가처럼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10월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에 가깝다. 

영국의 일부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선거참여를 거부했으며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전술적인 협력을 하는 레닌의 공동전선 역시 거부했다. 영국의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의회참여와 노동당에 대한 입당 전술의 차이 때문에 분열되어 통합된 공산당을 건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닌은 좌익소아병(1920)에서 의회 참여거부는 오류지만 그렇다고 그런 문제 때문에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통합을 못하는 것은 더 큰 오류라고 봤다. 또한 레닌은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전위와 대중의 관계, 당과 계급의 관계, 전위정당 건설과 당의 대중적 지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레닌에 따르면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오로지 곧은길만을 인정하고 우회와 협조와 타협을 거부하면 공산주의에 대하여 중대한 해독을 가져 올 수 있다.  레닌에 따르면 좌익공산주의자들은 경험과 이론 부족으로 인해 노조와 당과 같은 합법 활동을 활용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엥겔스 역시 이미 블랑키파 코뮌 망명자의 강령(1874)을 통해 당시의 급진적인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엥겔스에 따르면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중간역이나 타협을 뛰어넘는 선량한 의지만 갖고 있으면 혁명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혁명이 발생하여 자기들이 정권을 잡기 만하면 내일 혹은 모래에 ‘공산주의가 실현된다’고 낙관했다. 엥겔스는 이러한 좌익공산주의자에 대해 성급함을 하나의 설득력 있는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어린애다운 소박함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레닌 시기 독일사민당의 우경화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6

독일사민당은 이념에 있어 사회주의를 선언하였지만, 현실에 있어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를 통한 개혁이라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명확히 함으로써 선거를 통한 합법적 토대를 확충해왔다. 전국적으로 1913년까지 약 1만3천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지자체 의원에 당선되었는데 이는 지역수준에서는 사민당이 다른 부르주아 정당과 선거협약을 맺은 효과이기도 하였다. 1910년까지 십만 명의 당 지지자가 사회보험과 고용정책 집행기구에 일하게 된다. 

베른쉬타인은 “프롤레타리아 궁핍화와 계급구조의 단순화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았다”고 진단하면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변화를 주장하였다. 그는 “운동이란 국가 속에서의 모든 개량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민당이 실질적인 민주개혁을 추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계급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 등 좌파뿐만 아니라 베벨, 칼 카우츠키 등 정통파도 이러한 수정주의를 반대하였다. 

독일사민당의 지도부는 1899년과 1903년의 당 대회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거부하였지만 “사민당이 계급투쟁을 강화하고 정치에 참여하여 혁명을 준비해야 하나 국가에 대한 직접행동으로 대결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카우츠키 역시 “사민당은 혁명적 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혁명적 대기주의로 비판받았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정치적 총파업을 개시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촉발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당 지도부는 당에 의한 총파업 투쟁은 노조의 생존과 조직 자율성에 대한 위협이라며 반대하였다.

한편 사민당은 1889년 발족한 제2 인터내셔널의 주도세력이었으며 열강들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타국 노동자와의 연대파업을 지지하였다. 이 때문에 사민당은 독일 보수주의자나 민족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비애국적이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민당 의원들은 1880년대 이후 제국의회에서 예산편성 표결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예산에 독일군부의 군사비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3년 사민당은 당시 예산이 자신의 당론인 직접세 시행을 포함하자 그 동안의 전통을 깨고 예산에 동의하였다. 나아가 사민당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더욱 반동적인 러시아 정부에 대한 방어투쟁으로 인식하고 전쟁국채발행 법안에 만장일치로 동의하면서 제국정부를 지지하기에 이른다. 

1915년 12월 초기의 전쟁에 대한 흥분이 사라지면서 베른슈타인 같은 반전 수정주의자와 좌파 의원들이 전쟁에 반대하였지만 이들은 1916년에 다수결에 의해 사민당에서 축출되었다. 이들은 1917년 4월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창당하였다가 1922년 사민당과 다시 통합하였다. 또한 전쟁국채 발행에 반대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사민당을 탈퇴하여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하였으며, 이는 1918년에 독일공산당으로 발전하였다. 독일공산당은 1920년 선거에서 2.09%에 4석, 1924년 5월 선거에서 12.61%에 62석, 1928년 선거에서 10.6%에 54석, 1930년 선거에서 13.13%에 77석, 1932년 선거에서 14.32%에 89석을 얻었다.

한편 러시아제국과 독일제국은 1차 대전에서 서로 적국이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가 독일에 항복하는 과정과 함께 진행됐다는 점에서 이미 전쟁에 대한 협조를 통해 애국주의 관점에 빠져 있던 독일 다수 정치인들에게 자국 패전과 내전이라는 러시아식 혁명을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수파사민당 역시 이러한 입장을 견지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또한 이를 통해 혁명을 실현하자는 레닌의 전략은 스파르타쿠스단에게만 수용됐다. 1차 대전 직후 혁명기간 중에 권력을 인수했던 사민당의 지도부들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혼란을 회피하겠다는 의도 하에 국가의 전복을 방해했으며, 오히려 기존 권력이 유지되도록 기여했다(Freyberg, 1989; 86). 

독립사민당 역시 내전을 회피한다는 명분으로 독일제국의 지배층을 청산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사민당 지도부들은 오히려 제국 군대와 연합하여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였다. 집권세력이 된 다수파사민당은 새로운 헌법에 에르푸르트 강령이 포함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애초에 주장한 대기업의 사회화와 대토지소유의 폐지, 토지개혁 등은 실현되지 못했다. 다수파사민당은 국가재건을 위해 지배세력과 타협하였고 그 결과 대자본과 대지주가 군대, 정치, 사법부, 행정기관 등에 대해 영향을 미쳤던 권력의 사회적 토대는 유지되었다(Freyberg, 1989; 85). 


레닌 시기 홉슨의 제국주의론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5

유럽에서 제국주의 시작은 상품의 지리적 가격 차이를 이용해 돈을 버는 원거리 무역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상대적으로 값싼 향신료, 담배, 은 등을 사와 유럽에서 비싸게 파는 것이다. 가격 차이를 이용한 이윤은 거래량뿐만 아니라 거래회수에 좌우된다. 따라서 연쇄적 상품 거래를 하는 3각 무역이 발전했다. 영국의 공산품(소총)을 싣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사서 아메리카의 농장에서 담배와 바꾼 다음 영국에서 이를 팔아 다시 공산품을 싣고 아프리카로 가는 방식이다. 

이런 원거리 무역은 거대한 투기자본에 의해 진행됐으며, 엄청난 이익을 남기기 때문에 독점적 무역특권을 국가권력으로부터 부여받았다. 또한 항해 중 해적 퇴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현지 권력과의 충돌에 대비하여 무역상인들은 무장을 했고 경우에 따라 신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용병 혹은 정규군을 대동했다. 아메리카를 비롯하여 많은 미개척지가 원거리 상업자본, 투기자본에 의해 식민지로 변했다. 

즉 산업자본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이전에 상업자본이 주도하는 제국주의가 선행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상품시장을 찾기 위한 목적의 새로운 제국주의가 대두됐다. 특히 과잉생산으로 인해 상품이 남아돌자, 19세기 유럽에서 한 국가가 원자재와 소비시장을 얻기 위해 다른 국가를 침략하고 지배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홉슨의 <제국주의론>(1902)에 따르면 제국주의란 사유재산제 아래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경제체제가 과잉생산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책이다. 홉슨은 제국주의의 경제적 동기를 강조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소득분배가 불균형하게 되어 부자들의 과잉저축이, 빈민들의 과소소비가 발생하고, 생산물은 다 소비되지 못한다. 그에 따라 국내에서 소비, 투자가 어려워지므로 해외시장을 찾는다. 

새로운 시장의 획득은 정치적, 군사적 수단에 의해 추진되고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원동력이 된다. 홉슨에 따르면 각국의 국내 불평등이 투자자에게 시장과 투자의 기회를 해외에서 찾도록 하고 이런 각국 투자자의 경쟁이 국제 분쟁의 요인으로 되었다.

홉스에 따르면 독점은 이익을 소수에게 집중시키고 경쟁을 약화시킨다. 소수의 독점은 과잉저축을 하고 과소소비를 하므로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여 저임금을 형성하여 다시 구매능력을 감소시키는 악순환에 빠져 국내 투자기회는 점차 줄어든다. 따라서 제국주의의 근원은 해외 투자를 필요로 하는 과잉생산물이나 과잉자본이다. 제국주의의 외교정책은 해외투자를 보장하기 위한 지배와 종속이다. 홉스에 따르면 금융자본의 끝없는 무한 욕망이 제국주의를 탄생시키는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홉슨은 제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 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홉스에 따르면 독점세력들은 국내외적인 분파를 형성하여 서로 경쟁하고 전쟁에 돌입한다. 홉스는 이러한 전쟁에 반대하면서 최저임금 및 누진 과세와 같은 정책으로 새로운 국내 소비를 창출할 수 있도록 부를 재분배할 것을 주장한다. 즉 그는 독점세력이 국내에서 제한적 범위나마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개혁을 주장했다. 요즘말로 빈자가 부자에게 혜택을 받는 낙수효과와 같은 재분배정책을 주장한 것이다. 

홉스 이후 힐퍼딩은 과잉저축이나 독점세력을 금융자본으로 더 구체화했다. 레닌 역시 힐퍼딩의 금융축적론의 내용을 참조하여 독점적인 은행자본과 독점적인 산업자본의 융합 또는 유착에 의하여 성립되는 자본형태인 금융자본의 성장과 발전이 제국주의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레닌은 힐퍼딩의 견해를 수용해 이러한 독점세력의 증가와 발전이 은행의 성장과 경제적 우위로 이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레닌에 따르면 은행과 경제적 독점세력이 새롭게 공존하는 지배체제는, 새로운 자본의 합병을 가져와 이동 가능한 금융 자본을 창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농업을 후진 단계의 산업으로 만듦과 동시에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야기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자본주의를 지나치게 무르익게 만들었다. 결국 과잉자본의 불가피한 몰락을 유발하는 단계이다.

홉슨과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결과로서 설명하는 점,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해결되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통한다. 양자의 차이는 과잉 저축 대 금융자본, 둘째, 과소 소비 대 자본주의의 과잉 숙성, 셋째, 국내와 국제적 분파 형성 대 글로벌 분단, 넷째, 사회 개혁 대 국내 혁명 등이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과 함께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한 것이며 마르크스가 예측한 자본주의의 붕괴를 필연적으로 초래할 것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