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장봉기와 합법투쟁의 병행

1) 무장봉기의 불가피성과 그 조건들
 
보통선거권이 일반화되고, 공권력이 강화된 오늘날 폭력에 의한 권력획득은 오히려 예외적 상황이다. 사회체제가 복잡할수록, 국가권력조직이 정비될수록 무장봉기는 더욱 곤란해진다. 오늘날 경찰, 군대 등 각종 공권력은 근대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무기와 감시장비 등이 발달돼 있다. 군대는 증강되었고, 진압군의 무기는 시민군의 무기보다 훨씬 강력해졌고, 교통의 발달로 진압군의 배치가 신속해졌다. 이러한 조건에서 무장봉기의 역할은 줄어들고 합법적 투쟁의 역할은 증대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보통선거권과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일반화된 조건에서는 평화적인 권력획득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마르크스는 영국과 같이 선거가 발전한 나라에서 혁명이 평화적으로 이행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민의 대의기관이 전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고, 인민다수의 지지가 있을 경우 원하는 모든 일을 합헌적으로 행할 수 있는 프랑스, 미국, 영국의 경우, 낡은 사회가 새로운 사회로 평화적으로 이행하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다만 엥겔스에 따르면 혁명이 평화적으로 시작되었더라도 반동계급의 반발이 폭력으로 나타난다면 반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무장혁명이 불가피하다. 1878년 가을 마르크스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문제에 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해 제국의회에서 내무장관이 언급한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목적은 노동계급의 해방과 거기에 수반되는 사회의 변혁이다. 역사적 발전은 그때의 지배권력자 측에서 아무런 폭력적인 방해를 하지 않는 한에서만 평화적일 수 있다. 예컨대 영국이나 미국에서 노동계급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한다면 노동계급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발전에 방해가 되는 법률과 제도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인 운동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거부로 말미암아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장봉기는 많은 희생이 따르고 희생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 역시 평화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역사적 현실은 평화적인 혁명이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혁명은 낡은 법적 상부구조를 파괴하기 때문에 법의 테두리 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혁명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사회는 낡은 법과 제도를 폐기하고 새로운 법과 제도를 창출한다. 이는 사회가 법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에 기초해야 하고 그것은 특정한 시기에 우세한 물질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연원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혁명이 궁극적으로 성공하려면 일반적으로 무장봉기가 필요하다. 특히 노동자 일반이 선거참여와 같은 합법적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던 근대국가 초기에는 폭력에 의한 권력획득이 불가피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정부가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려면 부르주아를 위협하는 데 꼭 필요한 수단을 장악해야 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얻을 수 있는 강제력이 있어야 한다.
1840~ 1850년 독일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공산주의자동맹은 비합법적인 방법에 의한 권력획득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취약한 독일에서는 순수한 시민혁명이 불가능하였고, 따라서 반봉건민주주의혁명 혹은 사회공화주의적 혁명이 가능하였다. 독일혁명은 실제로 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지녔으며, 이 경우 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연대가 혁명의 성공에 있어 중요하였다.
하지만 독일 부르주아는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주장한 부르주아와 연대는 결과적으로 망상이었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 반봉건민주주의혁명은 불가능해졌고,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볼 때 이제 공화주의자들의 봉기가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부르주아의 배반에 의해 반혁명이 승리한 후에 184811월 신라인신문에서 마르크스는 독일부르주아의 배반에 대해 비난하고 낡은 사회의 살인적인 치명상, 즉 새로운 사회의 유혈진통을 단축하고 단순화시키고 집중시킬 수 있는 수단은 단지 혁명적인 테러리즘뿐이다고 주장하였다. 18503월 마르크스가 작성한 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혁명이 승리한 첫 시각부터 노동자를 배반하기 시작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 당파를 견결하고 엄흑하게 제압하자면 노동자들은 무장하여야 하며, 조직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모조리 소총, 기병총, 대포, 탄약으로 즉각 무장해야 한다. 특히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이 선거하는 지휘관과 총참모부를 가진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자위대를 조직하여 그것을 국가주권의 지휘 하에 두지 말고 노동자가 창설한 혁명적 시, , 촌 평의회들의 지휘 하에 두어야 한다.
 
다만 마르크스에 따르면 무장봉기에 의해 권력획득이 가능하려면 외적 요건이 필요하였다.
첫째 혁명은 현대적 생산력과 부르주아적 생산형태가 서로 모순에 빠지는 시기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공황에 연이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1847년 세계무역공황이 2월 혁명과 3월 혁명의 진정한 모태였다. 하지만 1848년 중반 이래로 유럽은 공황에서 서서히 벗어나 1849년과 1850년에는 산업번영이 유럽반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850년에 들어 혁명의 폭풍우가 점차 잦아들어 혁명의 새로운 앙양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이 실패한 이후 다음에 일어날 혁명은 연쇄적인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공황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혁명일 것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양대 계급 간의 결전이 다음 공황에 이어서 확실히 세계전쟁으로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2년 후의 루이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에서는 이러한 전망이 철회된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1850년 중반 이후 혁명이 곧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마르크스는 자신의 봉기주장을 철회하였다. 그 당시 유럽대륙에서의 경제발전의 상황이 자본제 생산의 폐지에 이를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중의 혁명적 분위기는 급속하게 권태로, 심지어 급격한 반동의 감정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1850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혁명은 새로운 공황의 결과로서만 가능하지만 혁명은 이 공황만큼이나 분명하다는 환상적인 생각과 영원히 결별하였다.
 
천박한 민주주의는 폭군들에 대항한 인민의 신속하고 최종적인 승리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천박한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새로운 돌발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반면 우리는 1850년 가을 최소한 혁명적 시기의 첫 장은 막을 내렸고, 세계정세의 새로운 위기가 돌발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둘째, 지배계급 특히 진압군이 분열되어 적극적인 진압을 할 수 없었을 경우 무장봉기가 성공하였다. 무장봉기에 의한 혁명의 성공은 주로 전면전이 아니라 도시의 시가전에 의해 가능하였다. 특히 시가전의 고전적 시대에서 바리케이드는 물리적 효과보다는 도덕적 효과를 더 크게 불러일으켰다. 이는 군대의 확고부동함을 흔들어 놓는 수단이었다. 이러한 효과가 얻어질 때까지 바리케이드가 유지되어진다면 승리가 얻어졌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패배하였다. 바로 이점이 장래에 있을 수도 있는 시가전의 가능성을 고려할 때에 유의해야 할 중요한 점이다. 하지만 1849년 이후 바리케이드의 마력은 깨어졌다. 진압병사들은 바리케이드 뒤에 인민이 있음을 더 이상 보지 못하였다. 엥겔스는 1895지금 제정신이 박힌 혁명가라면 베를린 북부 혹은 동부의 새로운 노동자 계급의 지역을 바리케이드전의 장소로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830년과 1848년의 혁명이 성공할 때는 군대가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지 않은 경우이다. 1848319일 베를린의 전투에서 반란군이 승리했던 것은 반란군은 밤새 지원군을 얻은 반면, 진압군은 탈진과 식량부족으로 인해 지휘체제가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8482월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필립 황제는 민병조직인 국민군에 파리의 치안유지를 맡기고 있었지만, 소상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파리의 국민군은 이미 1847년부터 전개된 선거법 개정 운동에 가담하면서 인민들의 혁명을 묵인하고 있었다. 1871년 파리코뮌을 탄생시켰던 3월의 봉기가 성공한 것도 정부의 진압군이 내부분열에 빠져 봉기를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71318일 티에르의 임시정부는 정규군에게 농성 중인 국민군(의용병)이 사용한 대포 227문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명령에 불복종하는 하극상을 보였고 르콩트와 토마 장군을 사살하였다. 이어 곧 정규군과 국민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19일 양자의 대표는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중앙위원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코뮌(인민의회)의 선거가 실시될 것이며, 중앙위원회는 그 때까지의 잠정기관임을 분명히 하였다.
반면 지배세력이 단결하거나 연대하여 정부군이 일사불란하게 진압에 나선 경우인 18486월 파리봉기, 184810월 비엔나 반란, 18495월 드레스덴 봉기, 나아가 18715월의 파리코뮌의 전투에서 혁명군은 학살당하다시피 대패하였다. 1871521일 마크 마옹(Mac-Mahon)의 지휘 하에 정부군이 파리로 진입하여 코뮌을 진압하였다. 528일 최종적인 진압 후 최소 1만명 이상이 살해되고 파리코뮌의 연루자 10만여 명이 체포되어 그 중 4만여 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었다. 33일부터 마르세이유, 리옹, 생테티엔, 툴루즈, 나르본, 그레노블, 리모쥬 등의 지방 도시에서도 코뮌 결성이 선언되었지만 모두 단기간에 진압되었다. 이러한 진압은 프랑스 지배세력의 단결과 독일군의 지원으로 가능하였다.
셋째, 단기적인 봉기가 성공하려면 전국적인 차원에서 봉기가 일어나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했다. 봉기가 산발적이고, 고립적이면, 반동적 국가권력은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지역의 도움을 받아 봉기지역을 고립시키고 진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코뮌이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도 파리의 봉기가 고립되었다는 점이다. 파리코뮌에 있어 혁명을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는 내용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코뮌은 유일하게 한 도시에서만 실현되었고, 사회적인 다수를 획득하지도 못했고 획득할 수도 없었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는, 파리에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수단을 넘어서서 스스로 박차를 가해 밀고 나갈 실제적인 권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프랑스 나머지 지역에서는 수적으로 우세한 농민과 소부르주아 속에서 거의 길을 잃은 채 산재해 있는 공업중심지들로 몰려 들어갔다.
특히 1848년과 1849년 독일 각지의 혁명이 반동적인 연합군에 의해 진압당하고, 1871년 파리코뮌이 프로이센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부군에 의해 진압당한 것에서 보듯이, 지배세력이 국제적인 연합을 하고 있을 경우, 혁명세력 역시 국제적인 봉기와 지원으로 대응하여 반혁명 연합세력을 분산시키지 않는 한 봉기에 성공할 수 없었다.
넷째, 18482월 혁명의 성공이 보여주듯이 노동자, 농민이 프롤레타리아트 주변에 결집하여 인민이 단결했을 때 혁명은 강력한 지렛대를 얻게 된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가 인민의 단결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하면 혁명은 힘을 잃게 된다. 이를테면 18486월 노동자 봉기를 진압한 부르주아공화국의 편에는 군대, 금융귀족, 산업부르주아뿐만 아니라 상인과 같은 소부르주아, 심지어 기동방위대로 조직된 룸펜프롤레타리아트, 성직자, 농민이 가담하였다. 반면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 편에는 그들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이 구비되지 않았음에도 섣불리 무장봉기를 제기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을 통해 18482월 혁명 직후 선거에 의해 탄생한 부르주아적인 국민의회의 도발에 의해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6월 봉기를 강요당해 패하지만, 반혁명적인 부르주아 독재가 산출됨으로써 양대 계급 간의 대립이 선명해졌다고 본다.
1848년 프랑스 봉기의 교훈은 봉기가 가져다 줄 제 결과에 충분히 대처할 준비기 되어 있지 않을 경우 결코 봉기를 경솔히 일으키지 말 것과, 일단 시작된 봉기의 경우 최대한 단호함으로 행동하며 공세를 유지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독일 노동자계급은 혁명을 통해서만 자신들을 독재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나,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조직되고 교육되기 전까지는 합법성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는 노동자의 혁명시도를 불법이라고 선언하면서 공권력으로 재빨리 탄압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1870년 파리가 내전으로 치달을 때도 이 같은 입장을 유지하였다. 1870년 마르크스는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에 관한 두 번째 연설에서 파리가 프로이센군에 의해 포위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정부를 전복하려는 파리만의 봉기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 마르크스 자신이 1881년에 네덜란드의 사회주의자 페르디난드 바메이 니웬호이스의 편지에 답하면서, “파리 코뮌은 예외적 조건 하에서의 한 도시의 반란일 따름이고 민중 전체에게 있어 유리한 조건으로 베르사유와 타협하는 것이 당시 획득 가능한 유일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반동세력이 막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으며, 또 왕정이 복고될 위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프랑스 노동자들이 재봉기를 시도한다면 그것은 자포자기적인 우행일 뿐이다. 엥겔스 역시 독일군대에게 진압되어 혁명이 다시 20년 정도 뒤로 내팽개쳐질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적군인 독일군이 보이는 앞에서 시민전쟁을 일으킨다면 노동자는 1848년과 마찬가지로 고립되고 농민과 소도시민 대중이 대자본편으로 떠밀려날 수 있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획득한 공화주의적 자유들을 이용하여 그들 자신의 조직을 공고히 하는 데 노력을 경주하라고 충고하였다.
 
 
2) 부르주아 권리의 획득과 선거참여 및 의회활용

첫째, 부르주아가 다양한 민주주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반민주적인 봉건지배계급과 투쟁할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들 부르주아를 지지할 필요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를 추동하여 결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와 같은 민주주의 권리들을 얻는다면 노동자 혁명운동과 혁명조직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엥겔스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 종속시키기 위해 모든 합법적 수단을 혁명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신라인신문을 공산주의자동맹의 실질적인 기관지로 활용했던 것에서 보듯이 노동자당은 출판의 자유를 통해 혁명적인 선전선동활동을 할 수 있고, 집회와 시위 및 행진의 자유를 통해 대규모의 대중운동이 가능하다.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는 독일 각지의 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이 역시 언론출판의 자유가 일부나마 확보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부르주아가 반동에게서 빼앗아 내는 이러한 쟁취물은 노동자에게 유리하다. 이러한 자유가 없이는 노동자당 자체가 운동의 자유를 가질 수 없다. 이것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종국적 승리에 필요한 무기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가 집회와 결사 그리고 출판의 자유, 또한 보통선거권 등 그들 자신의 요구를 철저히 실행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반동세력과 싸우는 부르주아 운동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완전히 손을 떼고 부르주아를 그들의 운명에 내맡기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정치적 기권과 같다. 다만 이 경우에 있어서 노동자당은 단순히 부르주아의 뒤꽁무니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그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당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즉 창을 잡고 선물을 받을지어다.
또한 18503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민주주의자들은 당면한 운동에서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면 부득이 어느 정도 사회주의적 방책을 내놓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들이 가능한 진취적 정책을 시행하도록 압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는 1871노동계급의 정치적 행동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정당으로서 노동자의 당은 벌써 대다수의 나라들에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의 거부를 설교함으로써 노동자 당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혁명은 정치의 최고행위이다. 노동자들을 교양하는 수단과 정치적 활동도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적 행동이 없이는 노동자들은 전투가 끝난 이튿날에는 언제나 도당에 의하여 우롱당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출판의 자유는 우리의 무기이다. 온갖 정치적 행동은 현존제도의 승인과 같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제도가 우리의 수중에 반대하는 투쟁수단을 제공할진대 이 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현존제도의 승인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선거와 같은 정치무대에서 적과 투쟁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투쟁수단의 하나 특히 조직과 선전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지형이 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정치인들은 갈등을 사유화하고, 사회 균열을 편향적으로 동원하며, 정치계급화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합법적인 제도가 선거이다.(배성인, 2011)
마르크스가 프랑스 노동자당 강령에서 보통선거제를 기만의 수단에서 해방의 도구로 변형되었다라고 규정하고, 엥겔스가 독일사민당과 독일 노동자들의 중대한 공헌 가운데 하나를 보통선거제를 이용하는 방법을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함에 따라 보통선거제는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중대한 논쟁거리로 부상하였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보통선거제는 부르주아 의회공화정의 출현을 낳았으나, 다른 한편 프롤레타리아트가 독자적인 정당을 조직하여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으며, 끝으로 프랑스의 보나파르트와 독일의 히틀러 예에서 보듯이 독재체제가 합법적으로 집권하는 반동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최형익, 2011)
선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이에 전념하는 의회주의, 선거참여를 거부하는 극좌적 입장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들과 달리 선거 속에 체제안정적 기능과 계급투쟁적 측면이 공존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의 선거에 대해 누가 의회를 통해 인민을 억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보통선거권을 영국의 예에서 보듯이 노동계급의 목표를 평화적 선전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으로 보았다. 선거는 양날의 칼이며, 이 중 어느 측면이 우세한가는 구체적 실천과 상황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입장이 타당하다.(손호철, 2011)
1895년 엥겔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서문에서 “1848년과 같은 폭풍적 습격은 이제 낡았고 보통선거권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계급투쟁의 새로운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엥겔스에 따르면 보통선거권을 통해 독일의회에 진출한 베벨과 립크네히트는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의회 내 활동에 있어 출판물과 집회를 통해 진행한 수년간의 선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1870년 이후에는 독일의 노동자 정당의 선거참여와 의회진입이 주목을 받았다. 특히 1890년 사회주의진압법이 폐지된 후 독일사회민주당이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엥겔스는 말년에 보다 더 의회에 의한 평화적 정권획득을 기대하였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225만 가량의 투표자에 기대를 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우리는 금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소부르주아와 소농 둥 중간계층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될 것이고, 국내에서 결정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여 여타의 모든 세력이 좋든 싫든 그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다.
 
독일의 노동자 정당은 선거유세를 통해 인민대중과 접촉할 수 있었다. 또한 혁명적 의원들이 의회 내에서 반대자들에게, 의회 밖에서 대중들에게 연설할 수 있는 연단을 만들어주고, 언론과 회합에서는 전적으로 다른 권위와 자유를 마련해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는 혁명가이며 체제전복자인 우리는 비합법수단과 전복보다는 합법적 수단으로 훨씬 더 번창하고 있으며 자칭 질서파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합법적 조건들 하에서 사멸해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노동자들이 중앙 및 지방대의기구 선거에 참여하여 소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에 대한 평형추로서 모든 지역에서 노동자 후보를 추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테면 18481월 노동자연맹 위원회에서 마르크스는 우리의 공동의 적, 즉 절대왕정이 승리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민주주의자들과 야당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의회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찬성한다고 밝혔다.
공산당 선언은 보통선거를 전투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우선의 임무 중의 하나로 선언하였다. 역시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는 만 21세 이상의 모든 독일인에게 선거권을 부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동맹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보통선거가 일반화되지 않아 선거참여가 반드시 전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동맹은 선거권확대운동을 중시하였다.
18503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에 따르면 혁명이 승리한 후 현존 정부들이 전복된 후에는 곧 국민대표회의를 선출하여야 하며, 부르주아 민주파 입후보자들에 대치하여 도처에서 노동자 입후보자를 될수록 공산주의자동맹원 중에서 내세워야 한다. 또한 이 호소문은 독일 노동자도 독일 인민의회에서 의석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인민대표들을 유급제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자 후보가 당선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에서도 노동자들은 자기의 입후보자를 내세우고, 자기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자기의 힘을 검열하며, 자기의 혁명적 입장과 자기 당의 견해를 공공연하게 선포하여야 한다. 또한 인민들은 노동자 후보를 내세우는 것이 민주세력을 분열시키고 반동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준다는 부르주아의 언사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보통선거는 민주주의의 전제 즉 필요조건이나 그것으로서 민주주의가 당연히 보장되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 선거와 정당이 발전한 일부 국가에 대해 의회와 선거에 의한 노동계급의 집권 가능성을 추상적으로 언급했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어도, 선거를 통해 혁명을 완수할 수 없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국가는 의회 이외에 관료와 군사기구를 구비하고 있으므로 의회장악만으로 국가를 재편할 수 없다. 또한 지배계급이 비합법적 방법으로 공격해 올 경우 선거를 통한 혁명은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비합법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선거가 아닌 비합법적인 공격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보통선거권을 기만의 도구로부터 해방의 도구로 전환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의 선거참여와 의회진출을 가능케 하는 선거권확대운동 즉 성인남성에 대한 보통선거권의 요구는 1848년 유럽 전체 민주주의적, 민족주의적 운동의 기본적 요구의 하나이었다. 18555월 신오데르신문을 통해 마르크스는 보통선거권은 민중계급의 헌장이며 그들의 사회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치권력의 획득을 뜻한다고 밝혔다.
공산주의자동맹 당시에 영국에서는 차티스트운동을 통해 보통선거권 획득운동이 노동자 정치운동적 성격을 지녔다. 프랑스에서는 보통선거에 의해 보나파르트의 제정이 복원되어 보통선거에 대한 환상이 자리 잡지 못하였다. 독일의 남성보통선거는 1866년 북부독일연방 연방의회 선거에서 실현됐다. 보통선거권이 실현되자, 독일에서 선거를 통한 정치투쟁이 더욱 강조되었다.
셋째, 부르주아 국가기구들이 노동계급에게 부르주아계급과 투쟁할 수 있는 보다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마르크스에 따르면 공산주의로의 발전과정 속에서 국가는 종국적으로 사멸해야 한다. 반면 국가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고 단순히 재편성하면 된다는 생각은 국가를 소유주체의 계급적 속성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 있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다.
노동자계급이 국가적인 규모로 자신의 권력을 수립한 이후에라도 그 권력은 산발적인 노예소유주들의 폭동에 의해 계속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반혁명을 억누르기 위해 필요한 제반조치를 취하기 위해 잘 조직되고 또 강력한 것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혁명 직후 강력하고 투쟁적인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정치적 과도기에 있어 국가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 이외의 다른 아무 것으로도 될 수 없다. 혁명 직후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즉시 완전히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구를 완전히 개조하여 과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18503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호소문혁명 활동은 중심이 있어야만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1793년의 프랑스처럼 현재의 독일에서도 극히 엄격한 중앙집권제의 실시야 말로 진정한 혁명당의 과제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선거를 통해 장악한 국가권력의 본질은 부르주아권력이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 자체를 그대로 두고 혁명으로 나아갈 수 없다. 국가의 성격을 완전히 전환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기성의 국가기구를 접수하여 이것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착취계급의 국가와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 엥겔스도 혁명 이후에 국가가 즉시 완전히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개조되어 일정기간 활용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반귄위론자들은 권위적인 정치적 국가를 낳은 사회단계를 폐기하기 전에 국가를 일격에 폐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혁명이란 주민의 일부분이 다른 부분에 대하여 소총과 총창과 대포를 가지고 자기의 의사를 강요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승리한 정당이 자기의 노력의 성과를 상실하지 않으려면 무기로써 반동분자들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방법으로 자기의 지배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의 지적대로 1848년 프랑스 혁명과 1871년 파리코뮌은 혁명 후 부르주아국가의 성격을 노동자국가로 완전히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결국 혁명이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18482월 혁명 이후 노동계급의 지도자와 혁명적 민주주의자 일부가 혁명 임시정부의 내각에 입성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들은 임시정부를 노동자정부로 전환하는데 실패하였다. 그 결과 혁명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와 중간계급, 농민에 대한 지도적 지위를 잃고 6월의 노동자봉기는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계급연합세력들에게 철저하게 진압당하였다.
 
상비군은 인민의 민병대로 대체되고, 국가기생자들의 군대는 제거되며, 성직자의 특권계급은 교사에 의해 밀려나가고, 국가재판은 코뮌의 기관으로 변화되고 국민대표의 선출은 전능한 정부의 잽싼 손재주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조직된 코뮌을 계획에 따라서 표현하는 것이 되고, 국가의 기능은 일반적인 국가적 목적들을 위한 단 몇 가지 기능으로 축소되어야 했다.
 
이러한 사례는 독일에서도 발견된다. 바덴에서 1848412일 남 바덴에서 4,000-5,000명이 무장봉기하였으나, 이 부대는 23일 전투에서 뷔르템베르크 군에 패배하였다. 같은 해 921일에는 시민군에 의해 바덴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또한 184958일의 라슈타트 요새에서의 바덴 군 병사들의 반란을 계기로 혁명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어서 팔츠도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6월에 약 45,000명의 독일 제국군과 프로이센군에 맞서 바덴에서는 27,000명의 혁명군이 충돌했다. 아우구스트 빌리히, 요제프 몰(전사),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 공산주의자동맹 멤버들도 다수 의용병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혁명군의 패배로 625일 브렌타노 임시정부는 붕괴되고, 723일 라슈타트 요새의 혁명군이 항복함으로써 세 번에 걸친 바덴 봉기는 막을 내렸다. 바덴의 혁명정부는 돈, 무기, 병사, 군용창고 등 모든 것을 혁명군이 사용할 수 있었으며, 정규군병사들이 반란군의 최정예에 속하였다. 그러나 혁명군은 군사부문을 뛰어넘어 정부 전체를 접수하여 혁명적으로 개조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혁명군은 관료와 같은 봉건잔재인 정부기구의 반동적 방해를 격파하지 못했고, 그 결과 바덴의 전 역량을 총동원하지 못하였다. 혁명군은 시민들로부터 고립되어 스위스로 이동하여 괴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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