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당 내 민주주의

보통선거와 평등선거가 도입된 이후 정당은 일반 유권자들로 구성된 대중정당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대중정당에서 대중과 갈수록 괴리되는 직업적 관료, 엘리트들이 성장하여 대부분의 대중정당들은 과두제라는 운명의 길로 들어섰다.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정당사회학:근대 민주주의의 과두적 경향에 관한 연구에서 독일사회민주당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경향은 어떤 음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신뢰와 헌신보다는 당 조직 자체의 내재적인 한계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가까운 시일 내에 정당 내 과두제가 전복될 기미는 없다. 정당 지도자의 독립성은 오히려 증대하고 있다. 대중들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과 재정적 보장은 갈수록 대중들에게 매혹적으로 보여지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특권적인 관료에 편입되고자 하는 노동운동 내 우수한 인자들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그 결과 과두제를 견제할 수 있도록 대중을 인도할 수 있는 대중 속 자체의 새롭고 지적인 잠재적인 지도력이 형성되기 힘들다. 심지어 오늘날의 대중들은 지도자의 명령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대중들은 때때로 지도자들에게 저항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오직 지배계급들이 사회적 관계가 파열될 정도로 무리한 정책을 추진할 때 정당의 대중들은 역사무대에 등장하여 과두제를 전복한다. 모든 자율적인 대중들의 운동은 그들의 지도자에게 심각한 혼란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시적인 중단을 제외하고는, 조직의 자연적인 정상적인 발전은 가장 혁명적인 정당에게까지 지울 수 없는 보수화의 낙인을 찍는다.
 
마르크스 정당이론은 대중의 자발성과 정치의식, 혁명적 지식인과 대중, 대중운동과 당 등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는 입장을 발전시켜왔다. 민주적인 사회제도를 수립하여 또한 대중교육의 확대를 통해 노동계급 다수의 자각을 고양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정당 내 교육받고 훈련 받은 소수와 다수 노동자들의 격차를 없애 나갈 때 노동계급의 집권이 점차적으로 가능해진다. 무엇보다 깨어 있는 당원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당원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들의 자각과 자율성을 프롤레타리아 당의 본질적 요소로 설정하였으며, 이를 프롤레타리아가 완전한 계급적 성숙과 계급적 자각으로 발전하는데 있어 보완적 요소로 여겼다. 따라서 정당 내부의 매우 발전한 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특징으로 파악하였다. 다만 이러한 자율성과 민주주의는 다양한 조건에서 다른 수준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몬티 존스톤, 1967)
이런 측면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과 국제노동자협회, 독일사회민주당에 이르는 정당 활동에서 민주주의적 토론과 민주주의적 대의기구의 구성을 강조하였다. 할 듀라퍼(Hal Draper)에 따르면 국제노동자협회 총칙이 선언하고 있는 노동계급 자신에 의한 해방이라는 원리는 스탈린주의 정당개념과 같은 엘리트정당개념과는 양립할 수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제노동자협회 시절부터 조직 내 민주주의 기능을 규율에 근거한 조직적 권위의 조건으로서 파악하였다. 엥겔스는 1890년 독일사회민주당처럼 거대정당이라도 당 내 토론의 완전한 보장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엥겔스에 따르면 당내 민주주의와 다양성, 토론이 가장 강력하고, 단련되고, 또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사회주의자 정당으로서 독일사회민주당에게 필요하였다.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대중자신의 권력을 조직하고, 대중의 물리적 권력을 통해 현재의 부르주아적 국가장치를 파괴하려고 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정당에서 민주주의는 인민의 투쟁역량과 정서, 욕망을 흡수하고 이것을 반자본적 역능으로 바꾸는 혈관에 속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을 비롯한 대중들을 정치의 주체로 만들며 그들 자신의 통치체제를 만드는 직접 민주적 권력체계를 만드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당은 반자본의 형식을 계급투쟁 속에서 실질적으로 구현하며 내용을 생산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시스템을 가져야 한다. 즉 대체권력인 코뮌과 같은 직접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와 소통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박영균, 2008)
당 내 민주주의 문제는 레닌의 전위정당론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제기되었다. 레닌의 입장에서 보면 짜르의 폭압정치 아래서 공개적이며 자유로운 토론과 민주적인 대의기구의 구성이 가능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수천명의 당원들이 선거에 의해 당을 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비합법조직으로 살아남기 위해 당 내 민주주의에 있어 일정한 제한을 둘 수밖에 없었다.
레닌에 있어 당 조직의 민주주의문제는 사회전체의 민주주의, 당과 계급의 관계, 당 내 민주주의 등 3가지 차원에서 제기되었다. 그 중 당 내 민주주의는 중앙기관과 지역조직의 관계, 지역조직과 지역활동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당의 최고 권위는 지역조직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중앙협의회에 있었다. 당 내 민주주의적 선거와 비판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았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정치적 자유가 확보되지 않은 조건에서 당내에서 형식적인 선거절차를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가장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또한 레닌은 그 당시 소위 비판이라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수정주의 입장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당 내 비판의 자유라는 슬로건에 반대하였다.
1905년 혁명시기에 레닌의 당 개념은 새로운 환경에 조응하여 변화되었다. 19052월 제3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이제 정치적 자유 아래서, 우리 당은 전적으로 선거의 원칙에 의해 구축될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레닌은 190511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 갈 수 없다고 지적하였으며, 당의 재조직화(The Reorganization of the Party)라는 문건을 통해 새로운 기초 위에 당을 전체적으로 재조직하기 위해 전당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레닌은 이 문건에서 우리당이 활동하였던 조건들이 급격히 변화되어 이제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가 확보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방법에 근거하여 당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볼세비키가 정권을 잡은 후 사회민주당 내 민주주의의 후퇴는 소수반대파의 운명으로 잘 설명된다. 1917년과 1918년 당 내에서 다양한 그룹들의 자유토론이 보장되었다. 여러 입장들이 당 기관지에서 공개적으로 제시되고 토론되었다. 1921년까지 소수 그룹의 강령들이 당에 의해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심지어 중앙위원회에 소수파들이 2명이나 선출되었다. 1923년에 이르러 프라우다에 소수파의 글이 하나 실리면 지도부를 옹호하는 글이 10개가 실리는 상황이었지만 토론 자체는 가능하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소수반대파의 행동은 실질적으로 제지당하기 시작하였다. 10차 당대회 이후 소수 그룹들은 활동이 금지되었다.
집권한 볼세비키에게 있어 당 내 민주주의 문제는 당과 국가의 관료화라는 형태로 드러났다. 물론 관료의 폐해는 혁명 이후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집권화 된 모든 조직에서 나타나는 문제이다. 다만 초창기 러시아 볼세비키의 경우 유럽과 달리 의원, 관리, 노동조합지도자 등 합법공간이 적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문제가 되더라도 타성에 빠진 관료라는 문제는 아직 부각되지 않았다. 레닌은 11차 당대회 중앙위원회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며 관료제의 폐해를 우려하였다.
 
저 거대한 관료기구를 생각하면 우리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저 괴물을 지배하고 있다고 과연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관료화를 정당화하는 상황논리로 혁명과정에서 짜르의 폭압과 기회주의자들의 준동이, 그리고 혁명 이후에는 국내의 반혁명세력과 해외의 제국주의국가들의 침략 위협이 주로 거론되었다. 볼세비키의 관료화는 스탈린 시대에 더욱 심화되었다. 물론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초기인 1905년에 즈음하여 레닌의 전위정당 이론을 자기의 기준에서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스탈린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결합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자들의 자각이 노동운동에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스탈린은 이러한 결합을 통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속도를 높여 약속 받은 땅으로 직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스탈린의 이러한 입장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1905년에 쓴 '프롤레타리아계급과 프롤레타리아당(The Proletarian Class and The Proletarian Party)'이다. 하지만 이 문건에서 보듯이 스탈린은 대중들의 후진성, 노동자대중의 지도자 그룹으로서 당, 엄격한 당원의 자격 등 레닌의 주장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엘리트주의적 당관은 이후 스탈린의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적 당관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스탈린은 이 문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자본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한, 프롤레타리아 전체는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대중들의 궁핍과 후진성 때문에 바람직한 계급의식 수준으로 향상할 수 없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군대를 사회주의 정신으로 계몽하여 그들을 지도하는 계급의식적인 지도자 그룹이 있어야 한다. 당이 바로 이러한 프롤레타리아의 지도자 그룹이다. 우리 당은 모든 측면에서 검열 받은 사람에게만 열려지는 문을 가진 요새이다. 당은 중앙집권적인 조직이 되어야 하고, 단일한 계획에 따라 지도되어야 한다. 우리당의 강령과 전술, 조직원칙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당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견해들을 적용하여 실천에 옮겨야 한다.
 
스탈린은 정권을 장악한 직후인 1924레닌주의의 기초라는 문건을 통해 자신을 레닌의 충실한 후계자로 설정하기 위해 레닌의 사상을 도그마형태로 편집하여 집대성하였다. 스탈린에 의하면 새로운 정당은 레닌주의정당이어야 하며, 이 새로운 정당은 노동계급의 조직된 선진적인 분견대로서 노동계급조직의 최고 형태이자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기구이다. 스탈린은 당의 균열을 허용할 수 없으며 분파를 추방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당은 분파와 양립할 수 없는 의사의 통일체이다. 당 안에서 철칙의 규율은 모든 당원의 행동을 완전하게 절대적으로 통일하지 않고서는 달성할 수 없다. 비판과 의견 갈등이 마무리된 이후에는 당의 의사와 행동의 통일이 필요하다. 당은 분파주의와 당 내 권력의 균열을 허용하지 않는다. 당의 결의문 '우리당의 통일성'에 따르면 레닌은 분파주의의 완전한 제거와 모든 분파의 즉각적인 해체를 요구하였다. 당 내 분파주의의 근원은 기회주의자적 요소이다. 당은 당 내 기회주의자적 요소를 정화함으로써 강해진다. 소부르주아 그룹들이 당에 침투하여 우유부단함과 기회주의, 사기저하 등을 초래하였다. 이런 것들이 분파주의, 분열주의, 비조직주의, 당의 파열의 근원이다. 이런 요소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 당으로부터 이들의 추방은 제국주의에 대한 성공적인 투쟁의 전제조건이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스탈린의 극단적인 엘리트 정당, 비판세력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인 정당에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관료화된 당에 대해서는 물론 레닌 시절부터 잠재되어 있던 관료화 경향까지도 선견적으로 비판하였다. 트로츠키는 이미 1904년 팜플렛에서 당 조직이 당을 대신하고,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대신하고, 결국은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신한다며 레닌의 중앙집권적인 당조직관을 비판하였다.(Tony Cliff,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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