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 동맹과 제국주의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지구적 차원이므로 비자본주의적 사회는 서구 자본주의가 이룬 성취를 획득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이 비자본주의적 영역으로 확대되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지역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의 징조가 나타날 수 있다(앤더슨, 2020). 마르크스에 따르면 저발전 지역의 혁명운동이 선진 자본주의의 혁명운동의 동맹이자 기폭제로 기능할 수 있다. 실제로 아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운동은 반제국주의, 반식민지 민족운동의 과정에서 확산되었고 민족해방전쟁과 긴밀히 연결되어왔다.

1848년 2월 혁명은 노동자가 이미 권력의 주체로 참여하는 사회혁명이었다. 즉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중간단계였다. 반면 전제 군주 아래 분열된 독일연방의 혁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었다. 프랑스보다 늦게 발생한 독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특징은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발전한 가운데 발생했다는 점이다. 1848년 독일 혁명의 목적은 시민계급이 중심이 돼 민중들이 분열적인 봉건제도를 극복하고 프랑크푸르트 의회를 중심으로 민주적인 중앙집권적인 근대민족통일국가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맨체스터에서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노동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엥겔스가 1845년 『1830년대 영국노동자들의 상태』라는 책을 쓴 배경이다. 이 책의 무대에 해당하는 곳이 영국 맨체스터 리틀 아일랜드(원 스트릿)이다. 엥겔스가 경영수업을 받던 맨체스터의 방직공장에도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있었다. 특히 <리틀 아일랜드>라는 곳에서 많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빈민가가 형성하였다. 

산업혁명 당시 맨체스터는 인구가 폭발하고 공장의 급증으로 인해 환경 오염, 알콜중독, 범죄, 전염병 문제가 심각하였다. 엥겔스는 맨체스터의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던 아일랜드 여성 노동자 메리 번즈(Mary Burns)를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 역시 리틀아일랜드에서 거주하면서 엥겔스에게 그곳의 참상을 알려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리 번즈는 문맹이었지만 혁명적인 노동자 운동과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미 1845년 맨처스터를 방문해 엥겔스와 지낸 바 있으며 메리 번즈는 엥겔스와 마르크스에게 노동운동 조직과 아일랜드 독립운동 조직을 소개해주기도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평생 아일랜드의 공화국으로의 독립을 지지하고 지원활동을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출판한 직후 1848년 3월 하순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를 집필하였다. 그 내용은 독일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취해야 할 구체적인 강령이었다. 또한 이것은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서도 가능한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준비하게 되는 기초가 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동맹은 이 요구를 통해 이러한 강령이 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와 소농민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선언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민주주의 투쟁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창출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태도는 반제국주의 반봉건투쟁 일반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은 1846년에 크라코프 반란을 주도한 폴란드의 봉건귀족들의 반제투쟁을 지지하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빈 체제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아래 있는 폴란드에서 봉건세력이 민족해방전쟁을 치르는 경우, 노동자정당은 이를 한시적으로 지지할 필요가 있다. 

폴란드에서 11월 봉기(1830-31년)의 패배 이후에는 서구 등으로의 대규모 망명(대망명)이 발생함으로써 국외에도 해방운동의 거점이 만들어졌다. 맑스와 엥겔스는 렐레벨 등 폴란드 망명가들과 교류를 통해 폴란드 문제에 접했다. 엥겔스 역시 폴란드 해방투쟁에 주목하여 폴란드인을 '역사 없는 민족'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남슬라브인 등과 대치시켰다. 나아가 파리 코뮌 등 다른 국민의 혁명운동에도 자진해서 협력한 폴란드인을 '혁명의 코즈모폴리턴적인 병사'라고 칭찬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기 러시아나 독일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위해서는 폴란드의 해방이 불가결하다고 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6년에 만든 브뤼셀의 ‘공산주의통신위원회’는 차티스트 잡지 ≪북극성≫의 편집인 하니에게 영국 연락원의 소개를 부탁했고, 하니는 의인동맹 런던지부의 칼 샤퍼를 추천하였다. 두 조직은 접촉 이후 차티즘과 폴란드 봉기를 공동으로 지지하며 서로 협력을 약속하였다. 1847년 11월 마르크스는 브뤼셀의 ‘우애로운 민주주의자연합’의 부위원장 자격으로 런던의 ‘우애로운 민주주의자연합’이 개최하는 폴란드혁명 기념집회에 참가하고자 런던에 왔다. 

당시 공산주의자동맹은 벨기에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등 유럽 각국의 혁명가들이 모인 국제조직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동맹은 구식민지를 복원한 빈 체제를 타도하여 공화주의와 식민지 해방을 완수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빈 체제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아래 있는 폴란드와 같은 나라에서 민족적 봉건세력이 민족해방전쟁을 치르는 경우, 노동자정당은 이를 한시적으로 지지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물론 제국주의세력을 몰아내면 봉건귀족들은 그 반동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노동자들을 탄압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세력은 물론 민족주의 세력과 불가피하게 연대할 때도 이들이 본질적으로 반혁명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 

오스트리아령에서 슐라흐타가 주도한 크라쿠프 봉기(1846년)가 갈리치아의 농민운동을 적대하고, 러시아에 대한 1월 봉기(1863년)가 농민해방을 제기하면서도 결국 농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좌절했던 것처럼, 맑스 등이 폴란드 독립의 불가결한 조건으로서 기대한 농업혁명은 19세기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폴란드의 1월 봉기의 패배 후에 무장봉기에 의한 독립회복 노선이 후퇴하고 착실한 생산노동에 의한 자립을 지향하는 포지티비즘(positivism) 운동으로 대체된 이후 1870년대 후반에는 사회주의 운동이 조직화되어간다.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거의 동시기에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에 대항하면서 폴란드의 해방이라는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폴란드에서 1880년대 독립회복을 목표로 하는 그룹은 1890년대 폴란드 사회당으로 발전하고 사회주의세력들은 룩셈부르크 등을 중심으로 하여 1882년 창당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프롤레타리아트'를 흡수하여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을 결성했다. 양당은 제2인터내셔널에서도 대립했는데 엥겔스와 교류한 사회당이 우세했다.

사회당은 1906년 좌우로 분열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독립한 폴란드에서도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회당 우파의 피우스츠키가 집권했다. 사회민주당은 폴란드 독립 후에 사회당 좌파와 합동하여 폴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공산당의 전신)을 결성하고 레닌의 노선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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