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혁명 실패 이후 좌익공산주의(평의회주의)의 태동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7

1차 대전 직후 독일혁명에서 소비에트의 활약이 유럽의 평의회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독일황제는 항복하면서 러시아식 혁명을 두려워하여 제1당인 사민당의 당수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구체제와 의회주의자들의 화해와 연대 때문에 독일에서 광범위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불필요해지면서 혁명세력은 극좌세력으로 축소돼 고립됐다. 이점이 러시아혁명과 다른 점이다. 

1차대전에 협조하던 독일사민당을 비난하면서 전쟁반대 파업을 감행했던 조합원들이 독일 좌익공산주의의 기원이다. 이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독일 공산당(KPD)을 창당했다. 로자의 스파르타쿠스단은 중앙집권화, 대중조직에서의 활동을 강조했고 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평의회 체제와 분권화된 협의체를 강조했다. 

독일국제공산주의자들에 따르면 사민당과 노조가 1차 대전에 참여한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혁명의 최초에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에 반대하여 노동자평의회와 쏘비에뜨가 제기된 것은 실질적 운동이었고 그것은 옳았다는 것이다. 독일혁명 당시 병사평의회가 Altona 주둔 제9군단, Hannover 주둔 제10군단을 장악하는 등 도시 지역까지 평의회가 구성돼 광역지방자치단체까지 통제했다. 제1차 전독일 노병평의회 총회(1918.12.16-20)는 독일 사회주의 공화국의 중앙평의회를 선출하고 이 최고의 평의회 기구에게 제국정부와 프로이센에 대한 의회적 감독의 권한을 위임했다. 1919년 봄 뭰헨에서 바바리아 레테공화국(R?terepublik)을 창설했다. 에센 노병평의회는 루르지방의 광산의 사회화를 독자적으로 개시토록 결의하고 임금, 가격 등 산업을 통제했다. 하지만 제국정부는 전국적으로 노병평의회를 유혈 진압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독일공산당(KPD)에서 제명당하자, 독일공산노동자당(KAPD)을 창당했으나 곧 쇠퇴횄다. 일부는 제3인터내셔널에 합류했다. 안토니 파네쿡 등 KAPD의 이론가들은 정당조직 반대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들을 고안해 냈고, 그 결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KAPD는 ‘세계자본주의는 쇠퇴기’에 들어섰으며 “독일에서의 경제ㆍ정치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발할 만큼 무르익었다”고 파악하고 “독일 혁명의 문제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의식 자체의 발전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의회에 참여는 개량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평의회 체제를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노동조합 역시 독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장벽으로 노동조합의 반혁명적 성격은 노조의 구조와 작동방식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노조의 파괴만이 독일에서 사회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의 대안으로 “공장평의회”를 강조했다.

이탈리아의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1926년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축출됐다. 이후 이들은 의회를 통한 혁명이라는 혁명적 의회주의에 반대했다. 또한 이들은 소련이 부르주아국가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이 국제주의를 포기했다고 비판했으며, 코민테른의 통일전선 방침에 반대했다. 특히 이들은 공산당들이 반파쇼민주주의 통일전선이라는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제2차 대전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다만 이들은 혁명적이라는 조건 아래 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했으며, 맑스 및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을 프롤레타리아트의식이 단련되는 “공산주의의 학교”로 파악했다. 다만 노조 내 투쟁을 통해 개량주의 지도부를 축출할 것을 강조했다. 반면 혁명당 국제서기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은 노동과 자본의 중매기관인 노동조합을 혁명기관으로 변혁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각국의 평의회주의자 혹은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주장을 펼치나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레닌주의의 전위당론과 민주집중제가 공산당을 독재 집단으로 타락시킨다고 봤다. 로자의 주장을 수용해 혁명적 정당은 노동계급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선전 선동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고 봤다. 이들에 따르면 노동자평의회는 혁명이 성숙할 때 등장하는 노동자계급의 자생적인 조직이고 노동자계급의 권력과 동일하므로 공산당의 지시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 

좌익공산주의자에 따르면 소련은 국가자본주의체제였다. 이들은 10월 혁명을 초창기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농촌 부르주아 혁명 즉 이중혁명으로 규정했으나 나중에 부르주아 혁명으로 변질됐다고 설명한다. 소련의 일당독재 체제에서 의회인 소비에트는 민주적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1년에 한번 열리는 거수기였다. 결국 공산당 관료가 자본가처럼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10월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에 가깝다. 

영국의 일부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선거참여를 거부했으며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전술적인 협력을 하는 레닌의 공동전선 역시 거부했다. 영국의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의회참여와 노동당에 대한 입당 전술의 차이 때문에 분열되어 통합된 공산당을 건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닌은 좌익소아병(1920)에서 의회 참여거부는 오류지만 그렇다고 그런 문제 때문에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통합을 못하는 것은 더 큰 오류라고 봤다. 또한 레닌은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전위와 대중의 관계, 당과 계급의 관계, 전위정당 건설과 당의 대중적 지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레닌에 따르면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오로지 곧은길만을 인정하고 우회와 협조와 타협을 거부하면 공산주의에 대하여 중대한 해독을 가져 올 수 있다.  레닌에 따르면 좌익공산주의자들은 경험과 이론 부족으로 인해 노조와 당과 같은 합법 활동을 활용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엥겔스 역시 이미 블랑키파 코뮌 망명자의 강령(1874)을 통해 당시의 급진적인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엥겔스에 따르면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중간역이나 타협을 뛰어넘는 선량한 의지만 갖고 있으면 혁명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혁명이 발생하여 자기들이 정권을 잡기 만하면 내일 혹은 모래에 ‘공산주의가 실현된다’고 낙관했다. 엥겔스는 이러한 좌익공산주의자에 대해 성급함을 하나의 설득력 있는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어린애다운 소박함이라고 비아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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