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시기 독일사민당의 우경화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6

독일사민당은 이념에 있어 사회주의를 선언하였지만, 현실에 있어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를 통한 개혁이라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명확히 함으로써 선거를 통한 합법적 토대를 확충해왔다. 전국적으로 1913년까지 약 1만3천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지자체 의원에 당선되었는데 이는 지역수준에서는 사민당이 다른 부르주아 정당과 선거협약을 맺은 효과이기도 하였다. 1910년까지 십만 명의 당 지지자가 사회보험과 고용정책 집행기구에 일하게 된다. 

베른쉬타인은 “프롤레타리아 궁핍화와 계급구조의 단순화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았다”고 진단하면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변화를 주장하였다. 그는 “운동이란 국가 속에서의 모든 개량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민당이 실질적인 민주개혁을 추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계급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 등 좌파뿐만 아니라 베벨, 칼 카우츠키 등 정통파도 이러한 수정주의를 반대하였다. 

독일사민당의 지도부는 1899년과 1903년의 당 대회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거부하였지만 “사민당이 계급투쟁을 강화하고 정치에 참여하여 혁명을 준비해야 하나 국가에 대한 직접행동으로 대결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카우츠키 역시 “사민당은 혁명적 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혁명적 대기주의로 비판받았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정치적 총파업을 개시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촉발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당 지도부는 당에 의한 총파업 투쟁은 노조의 생존과 조직 자율성에 대한 위협이라며 반대하였다.

한편 사민당은 1889년 발족한 제2 인터내셔널의 주도세력이었으며 열강들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타국 노동자와의 연대파업을 지지하였다. 이 때문에 사민당은 독일 보수주의자나 민족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비애국적이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민당 의원들은 1880년대 이후 제국의회에서 예산편성 표결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예산에 독일군부의 군사비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3년 사민당은 당시 예산이 자신의 당론인 직접세 시행을 포함하자 그 동안의 전통을 깨고 예산에 동의하였다. 나아가 사민당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더욱 반동적인 러시아 정부에 대한 방어투쟁으로 인식하고 전쟁국채발행 법안에 만장일치로 동의하면서 제국정부를 지지하기에 이른다. 

1915년 12월 초기의 전쟁에 대한 흥분이 사라지면서 베른슈타인 같은 반전 수정주의자와 좌파 의원들이 전쟁에 반대하였지만 이들은 1916년에 다수결에 의해 사민당에서 축출되었다. 이들은 1917년 4월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창당하였다가 1922년 사민당과 다시 통합하였다. 또한 전쟁국채 발행에 반대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사민당을 탈퇴하여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하였으며, 이는 1918년에 독일공산당으로 발전하였다. 독일공산당은 1920년 선거에서 2.09%에 4석, 1924년 5월 선거에서 12.61%에 62석, 1928년 선거에서 10.6%에 54석, 1930년 선거에서 13.13%에 77석, 1932년 선거에서 14.32%에 89석을 얻었다.

한편 러시아제국과 독일제국은 1차 대전에서 서로 적국이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가 독일에 항복하는 과정과 함께 진행됐다는 점에서 이미 전쟁에 대한 협조를 통해 애국주의 관점에 빠져 있던 독일 다수 정치인들에게 자국 패전과 내전이라는 러시아식 혁명을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수파사민당 역시 이러한 입장을 견지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또한 이를 통해 혁명을 실현하자는 레닌의 전략은 스파르타쿠스단에게만 수용됐다. 1차 대전 직후 혁명기간 중에 권력을 인수했던 사민당의 지도부들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혼란을 회피하겠다는 의도 하에 국가의 전복을 방해했으며, 오히려 기존 권력이 유지되도록 기여했다(Freyberg, 1989; 86). 

독립사민당 역시 내전을 회피한다는 명분으로 독일제국의 지배층을 청산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사민당 지도부들은 오히려 제국 군대와 연합하여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였다. 집권세력이 된 다수파사민당은 새로운 헌법에 에르푸르트 강령이 포함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애초에 주장한 대기업의 사회화와 대토지소유의 폐지, 토지개혁 등은 실현되지 못했다. 다수파사민당은 국가재건을 위해 지배세력과 타협하였고 그 결과 대자본과 대지주가 군대, 정치, 사법부, 행정기관 등에 대해 영향을 미쳤던 권력의 사회적 토대는 유지되었다(Freyberg, 1989;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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