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변혁에 있어 러시아 경로와 유럽 경로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4

마르크스가 참여했던 1848년 유럽혁명은 대중투쟁에 의한 무장혁명이었다. 하지만 1848년 혁명의 결과 각국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점차 도입되면서 무장혁명보다는 의회를 통한 사회개혁이 더 부각됐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민주주의 사례를 들며 의회를 통한 혁명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1871년 파리코뮌이 붕괴된 이후 프랑스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완료되고 의회주의가 발전했다. 독일도 1870년 프로이센 중심으로 통일된 이후 보통선거가 도입됐고, 독일사민당은 1891년 독일제국 의회에서 득표율로 제1당으로 부상했다.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는 독일사민당의 성공을 보면서 선거를 통한 혁명이 독일에서도 가능함을 인정하였다. 

1860년대 라쌀은 독일에서 보통선거를 도입하여 의회를 통한 혁명이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마르크스 그룹은 라쌀의 독일국가를 통한 사회주의혁명 노선에 대한 이론적 조직적 투쟁을 전개하여 1890년 에어푸르트 강령 시기에 종국적으로 승리하였다. 따라서 의회주의라는 사민당의 수정주의는 라쌀주의의 계승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 리프크네히트와 베벨,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으로 이어지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변질과정이다.

마르크스의 1차 계승자인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은 평생 동안 독일제국의 사민당 의원으로서 의회주의의 부정으로부터 긍정으로 점차 입장을 변화시켰다. 역시 런던으로 가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2차 계승자인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은 처음부터 의회주의자로서 러시아의 방식의 무장혁명을 독일에 적용하기를 거부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독일제국의 1차 대전 패전 직후 독일사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러시아식 무장혁명을 독일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와 달리 독일 황제가 이미 의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민당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등 독일사민당의 당 내외 조건이 러시아와 달라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자본주의는 1873년부터 1890년대 초에 이르는 대불황을 거치면서 독점자본주의로 전환됐다. 특히 1900년~1903년의 공황을 거치면서 해외시장을 획득하려는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이 국제적 독점자본으로 융합됐으며, 각국의 독점자본은 해외시장을 쟁탈하기 위해 군비경쟁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세계대전이 임박한 가운데 제2인터내셔널은 1907년 스투트가르트 대회와 1912년 바젤 대회에서 임박한 세계전쟁을 제국주의적 반동적 노예제적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전쟁에 반대했으며, 전쟁이 발생할 경우 종전에 노력하고 전쟁이 초래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자본주의를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독일의 사민당, 프랑스 사회당, 영국의 노동당 등 대부분의 유럽의 원내 사회주의 정당들은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 협력했다. 이들 사회주의 정당과 동맹적 관계를 맺고 있던 독일, 프랑스, 영국의 총연맹들은 정당들보다 먼저 전쟁에 협력했으며, 이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동맹적 관계에 있던 사회주의 정당들에게 전쟁에 협조할 것을 압박했다. 

1차 대전 당시 유럽의 총연맹과 원내 사회주의 정당들은 이미 부르주아 국가에 편입돼 엄청난 특혜를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할 경우 자본주의 국가로부터의 온갖 특혜가 중단될 처지였다. 나아가 이들 노조와 정당들은 애국주의 열풍과 공권력의 탄압을 이겨 낼 수 있는 역량과 의지가 없었다.

반면 러시아의 경우 폭압적인 차르 체제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기운이 높았다. 특히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노동자계급이 성장하면서 자본과 폭압적인 차르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1848년 독일 혁명과 같은 정세였다. 더구나 1905년 러시아가 일본에게 전쟁에 패하면서 전쟁과 폭정에 지친 민중들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1차 유혈 혁명에 나섰다. 

러시아가 발칸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독일과 1차 대전을 치르고 있었을 당시 러시아의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은 국가로부터 특혜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탄압을 받고 있었다. 민심은 황제로부터 멀어져갔고,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해 애국주의 열풍이 없었다. 러시아의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은 전쟁에 협조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쟁을 기회로 차르체제를 전복하고 부르주아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연달아 달성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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