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오늘날 모든 전쟁의 원인이다. 제1차 대전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전체를 전쟁 수행에 종속시키고, 노동자, 농민, 식민지 인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자본주의 정책을 유지했다.
세계혁명은 독일과 같은 선진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성장해가는 중진국의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식민지의 민족해방 전쟁으로 분류된다. 선진국의 노동계급은 자신의 혁명을 시도하면서 식민지의 민족해방과 소련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지원해야 한다.
대회는 “제국주의, 계급투쟁의 격화, 내란의 두려움은 과두지배로 나타나 결국 의회주의가 파산했다”고 진단했다. 파시즘은 불안정한 자본주의 관계, 다수의 계급 탈락분자, 도시의 소부르주아와 지식인의 빈곤, 농촌 소부르주아의 불만, 노동자 투쟁의 격화에 직면한 부르주아 제국주의의 반동적 공세이다.
파시즘은 대중의 불만을 이용해 유급 파시스트 무장세력을 육성하며, 정당들에 침투하여 직계조직을 설치하고 선동가가 대중을 선동하여 백색테러를 유발하고,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주장한다. 파시즘은 처음에는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취하지만 국가권력을 장악하면 대자본의 테러독재를 노골화한다(동녘, 1989 1: 93~94).
이 시기 1918년 핀란드 노동자 혁명, 1918년 일본 쌀 폭동, 1918년 오스트리아와 독일 혁명, 1919년 헝가리의 노동자 혁명과 조선의 독립운동 및 독일 바이에른 소비에트 권력 수립, 1920년 터키 부르주아 민족혁명과 이탈리아 노동자의 공장 점거, 1921년 인도 노동자 봉기, 1923년 불가리아 봉기와 독일 위기, 1924년 에스토니아 봉기, 1925년 모로코 봉기 및 시리아 봉기, 1926년 영국 총파업, 1927년 빈 노동자 봉기, 인도네시아 봉기와 중국혁명 등이 이어졌다.
식민지 노동계급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 독자조직을 건설하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공격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민족혁명을 조정하고 민족 소부르주아의 동요를 비판하고 폭로해야 한다.
대회는 12차례 회의 끝에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의 혁명운동에 대하여” 테제를 채택했다. 식민지로의 자본수출은 식민지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를 발전시켜 노동계급을 형성한다. 하지만 잉여가치의 대부분이 본국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식민지 발전을 방해한다. 교통수단 등의 발전은 식민지 종속성을 심화시킨다.
식민지로 수입된 자본은 대부분 원료의 취득과 1차 가공에 집중돼 농업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가난한 농업노동자와 빈농을 양산시켰다. 식민지는 제국주의 전쟁과 혁명적 대중운동의 원천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는 경제외적 강제에도 바탕을 둔 부르주아의 독점이다. 상업부르주아는 제국주의에 직접 봉사하는 매판 부르주아이며, 토착 산업부르주아는 개량적인 부르주아이다. 반제국주의 해방투쟁은 국내 계급투쟁, 나아가 제국주의 내 계급투쟁과도 결합된다.
동양서기국 책임자 쿠시넨이 인도의 사례를 들어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이 식민지의 공업화를 촉진한다는 탈식민지화론을 비판했다. 탈식민지화론에 따르면 식민지 인도에서 봉건계급이 몰락해 인도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의 정치적 불일치의 근거가 소멸했다. 하지만 쿠시넨은 인도의 예속화가 심화되고 있는 점, 토지혁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조건에서 농촌의 빈곤화가 공업 발전의 장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1919~1923년 식민지에서 소부르주아에 의해 노동운동이 조직됐으나 노동계급의 이익은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토착 민족부르주아의 이익에 종속됐다. 1924년 코민테른 제5회 대회 이후 노동계급이 민족부르주아와 주도권을 다툴 정도로 성장했다.
1928년 이후 경제위기가 심화되자 노동계급과 공산당은 개량주의와 분리됐으나 제6회 대회를 기점으로 코민테른에 대한 무비판적인 복종이 요구됐다. 유럽 지식인들은 서유럽의 혁명 실패, 파시즘의 승리, 스탈린주의에 직면하여 수동적인 태세로 후퇴했다(일리, 2008: 476~477). 핼러스에 따르면 이 시기 각국의 공산당들은 좌경화로 인해 소련에 종속되거나 반대로 기권주의 경향을 보이며 노동계급 대중으로부터 고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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