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와 7차 대회

자본주의는 오늘날 모든 전쟁의 원인이다. 제1차 대전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전체를 전쟁 수행에 종속시키고, 노동자, 농민, 식민지 인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자본주의 정책을 유지했다.

세계혁명은 독일과 같은 선진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성장해가는 중진국의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식민지의 민족해방 전쟁으로 분류된다. 선진국의 노동계급은 자신의 혁명을 시도하면서 식민지의 민족해방과 소련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지원해야 한다. 

대회는 “제국주의, 계급투쟁의 격화, 내란의 두려움은 과두지배로 나타나 결국 의회주의가 파산했다”고 진단했다. 파시즘은 불안정한 자본주의 관계, 다수의 계급 탈락분자, 도시의 소부르주아와 지식인의 빈곤, 농촌 소부르주아의 불만, 노동자 투쟁의 격화에 직면한 부르주아 제국주의의 반동적 공세이다. 

파시즘은 대중의 불만을 이용해 유급 파시스트 무장세력을 육성하며, 정당들에 침투하여 직계조직을 설치하고 선동가가 대중을 선동하여 백색테러를 유발하고,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주장한다. 파시즘은 처음에는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취하지만 국가권력을 장악하면 대자본의 테러독재를 노골화한다(동녘, 1989 1: 93~94).

이 시기 1918년 핀란드 노동자 혁명, 1918년 일본 쌀 폭동, 1918년 오스트리아와 독일 혁명, 1919년 헝가리의 노동자 혁명과 조선의 독립운동 및 독일 바이에른 소비에트 권력 수립, 1920년 터키 부르주아 민족혁명과 이탈리아 노동자의 공장 점거, 1921년 인도 노동자 봉기, 1923년 불가리아 봉기와 독일 위기, 1924년 에스토니아 봉기, 1925년 모로코 봉기 및 시리아 봉기, 1926년 영국 총파업, 1927년 빈 노동자 봉기, 인도네시아 봉기와 중국혁명 등이 이어졌다.

식민지 노동계급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 독자조직을 건설하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공격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민족혁명을 조정하고 민족 소부르주아의 동요를 비판하고 폭로해야 한다. 

대회는 12차례 회의 끝에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의 혁명운동에 대하여” 테제를 채택했다. 식민지로의 자본수출은 식민지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를 발전시켜 노동계급을 형성한다. 하지만 잉여가치의 대부분이 본국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식민지 발전을 방해한다. 교통수단 등의 발전은 식민지 종속성을 심화시킨다.  

식민지로 수입된 자본은 대부분 원료의 취득과 1차 가공에 집중돼 농업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가난한 농업노동자와 빈농을 양산시켰다. 식민지는 제국주의 전쟁과 혁명적 대중운동의 원천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는 경제외적 강제에도 바탕을 둔 부르주아의 독점이다. 상업부르주아는 제국주의에 직접 봉사하는 매판 부르주아이며, 토착 산업부르주아는 개량적인 부르주아이다. 반제국주의 해방투쟁은 국내 계급투쟁, 나아가 제국주의 내 계급투쟁과도 결합된다.

동양서기국 책임자 쿠시넨이 인도의 사례를 들어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이 식민지의 공업화를 촉진한다는 탈식민지화론을 비판했다. 탈식민지화론에 따르면 식민지 인도에서 봉건계급이 몰락해 인도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의 정치적 불일치의 근거가 소멸했다. 하지만 쿠시넨은 인도의 예속화가 심화되고 있는 점, 토지혁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조건에서 농촌의 빈곤화가 공업 발전의 장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1919~1923년 식민지에서 소부르주아에 의해 노동운동이 조직됐으나 노동계급의 이익은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토착 민족부르주아의 이익에 종속됐다. 1924년 코민테른 제5회 대회 이후 노동계급이 민족부르주아와 주도권을 다툴 정도로 성장했다. 

1928년 이후 경제위기가 심화되자 노동계급과 공산당은 개량주의와 분리됐으나 제6회 대회를 기점으로 코민테른에 대한 무비판적인 복종이 요구됐다. 유럽 지식인들은 서유럽의 혁명 실패, 파시즘의 승리, 스탈린주의에 직면하여 수동적인 태세로 후퇴했다(일리, 2008: 476~477). 핼러스에 따르면 이 시기 각국의 공산당들은 좌경화로 인해 소련에 종속되거나 반대로 기권주의 경향을 보이며 노동계급 대중으로부터 고립됐다. 

1928년 이후 코민테른은 스탈린에 의해 지배됐으며 소련 외교정책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스탈린에 대항하여 트로츠키 등은 1938년에 제4인터내셔널을 창설했으나 분열을 거듭했다. 

1935년 제7차 대회는 기존의 반파쇼 노동자 통일전선을 반파쇼 인민전선으로 더욱 구체화시켰다. 대회는 공산당은 노동자정당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정당과 함께 인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인 제국주의로서 노동자를 약탈하고 전쟁을 획책하고 소련을 침략하고 중국을 분할하려고 한다. 
스페인에서 1931년에 왕정이 폐위되고 공화파, 파시스트, 인민전선이 각축을 벌렸다.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을 거치면서 1936년 인민전선이 집권하나 파시스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 상태에 빠졌다. 1937년 “이탈리아 사회당-공산당의 행동통일 신협정”이 발표됐다. 
프랑스에서 1934년 2월 공산당과 사회당이 반파쇼 총파업에 나섰고, 공산당은 5월부터 사회당에 반파시즘 행동통일을 제안했다. 7월 사회당-공산당 행동통일 협정이 체결됐으며, 공산당은 10월 인민전선 슬로건을 내걸었다. 1935년 6월 공산당, 사회당, 급진사회당등 50개의 단체가 참가하는 “인민연합 전국위원회”가 결성됐다. 1936년 1월 “프랑스 인민전선강령”이 선포되고 4월 총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했으며 사회당의 블룸을 수반으로 하는 사회당-급진사회당 정부가 성립했다. 공산당은 내부결정에 따라 입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1938년 인민전선 내 급진당의 달라디에 총리는 사회당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는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공산당이 이 협정에 반대하자 급진당은 1938년 10월 마르세유 대회에서 인민전선에서 이탈했다.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체결되고 전쟁이 발생하자 전쟁에 반대한 코민테른에 속해 있던 공산당은 불법화된다. 독소조약에 따라 코민테른 지부들은 소련의 동부 폴란드 합병을 지원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심지어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10월 31일 침략자로 간주되는 것은 히틀러의 독일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라고 선언했다. 이는 결국 반파쇼 인민 전선 정책의 파탄을 의미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코민테른이 연합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독일을 옹호해야 하는 상황이 극복됐다. 하지만 그 사이 코민테른과 각국의 공산당은 신뢰를 상실했다. 소련이 미국, 영국, 중국과 연합군을 구성하고 협력하면서 코민테른이 연합국 내에서 혁명활동을 할 명분이 사라졌다. 반파쇼전쟁에 더욱 집중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우려를 고려하여 집행위원회는 1943년 5월 15일 사실상 사망상태에 있던 코민테른의 해산을 선언했다. 
그후 코민테른의 일부 업무는 비밀리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로 이관됐다. 스탈린은 1947년 코민포름(공산당 정보국)을 설립했으나 정보네트워크에 불과해 스탈린 사망 이후 유명무실화됐다. 코민포름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사회주의 종주국 논란으로 인해 1956년 해산됐다. 이후 모스크바에서는 국제공산당 및 노동당 대회가 1969년까지 3차례 열렸다. 이후 중단된 국제공산당 및 노동당 대회는 소련이 붕괴된 이후 그리스공산당의 주도로 1998년부터 2022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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