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시기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10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 1854년 ~ 1938년)는 파리코뮌의 직접민주주의, 집산화를 주목하면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1881년에 런던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방문하였다. 그는 1888년까지 『노이에 차이트』의 편집자로서 엥겔스와 함께 『마르크스의 경제이론(Karl Marx’ ökonomische Lehren)』 등 마르크스 유고들을 출판하였으며, 『잉여가치학설사』(1904-10) 등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고도 출판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후계자로서 인정받았으며, 1891년 베벨, 베른슈타인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반영한 에르푸르트 강령을 기초하였다. 

카우츠키(1854∼1938)가 주도한 제2인터내셔널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와 1912년 바젤에서 전쟁에 반대하고 전쟁이 초래할 국내적 위기를 계급투쟁에 활용할 것을 결의했다. 1907년 제2인터내셔널에서 그는 식민지 노선에 반대하였지만 수정주의를 내세웠다. 1910년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서 카우츠키의 권위는 붕괴되었다. 

카우츠키는 1914년 8월 3일 전쟁부채 결의안 표결 하루 전 제국의회에서 방어적인 전쟁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당이 정부에 그러한 요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 정책을 좌절시키지 못해 세계전쟁이 일어났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전쟁이 일어난 이상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조국을 방위하고 전쟁이 끝나면 서로 용서해야 한다면서 전쟁에 협력했다.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카우츠키의 주장에 분개하여 그와 결별하였다. 카우츠키는 이처럼 방어전쟁에 동의했지만 마르크스는 보불전쟁에 직면하여 방어적이라고 해도 제국주의 전쟁에 노동계급이 동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제2인터내셔널은 소속정당들이 전쟁에 협력함으로써 붕괴됐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즉 계급투쟁으로 전환해 혁명을 달성하자는 레닌의 주장은 러시아에서 성공했지만 유럽에서 실패했다. 1차 대전 당시 카우츠키의 독일사민당은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을 정도의 의회정당이었다는 점이 러시아의 레닌과 처지가 다르다. 

1915년 6월 전비가 증가하고 전쟁이 참혹해지는 한편 제국의 점령의지가 명백해지자 1916년 봄부터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 하세(Hugo Haase) 등과 공개적으로 반전으로 돌아섰다. 1917년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 베른슈타인 등과 함께 독립사회민주당(Independent Social Democratic Party of Germany, USPD)을 창당하였다. 

룩셈부르크는 독립사회민주당의 좌파로서 있다가 스파르타쿠스단을 거쳐 독일공산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카우츠키는 반대로 사민당과의 통합협상에 주력하였다. 1차 대전 이후 독일 공산당은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해서 "사회파시즘"이라고 비판하였다. 공산당은 이후 나치에 맞서서 사회민주당에게 통일전선을 제안하였으나 결국에는 무산되었다. 

1922년 사민당에 복당한 카우츠키는 1925년 사민당의 하이델베르크 강령을 공동 기초하였다. 하이델베르크 강령은 1921년의 괴를리츠 강령에 비해 개혁보다는 혁명에 방점을 두었지만 여전히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라는 기조를 유지하였다.

카우츠키는 러시아혁명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917년 6월 러시아가 아직은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아독재(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에서 멘셰비키를 옹호하여 “10월 혁명을 불법이며 러시아를 후퇴시켰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카우츠키는 1919년 『러시아에서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를 발표하였다.

카우츠키는 자본의 집중과 집적, 독점화에도 불구하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부가 분산되는 주식회사의 기능을 주목하였다. 이로써 자본주의가 아직 붕괴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반면 마르크스는 오히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의 자기파괴라고 평가하였다.

카우츠키의 수정주의는 라쌀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자체로부터 유래하였다. 그의 주장은 혁명과 의회활동 모두를 인정한 마르크스의 입장과 같다. 카우츠키는 의회투쟁과 직접행동의 결합을 통한 민주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직접행동은 성공가능성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소극적이었다. 반면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에 대한 찬사에서 보듯이 혁명이 반드시 성공가능성이 있을 때만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사회주의혁명은 객관적 조건이 성숙된 후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하지만 물적 토대에서 아직도 자본주의의 생명력이 남아있고, 노동자들의 의식이 완전히 깨이지 않았다. 이러한 속류 유물론과 경제주의에 치우친 카우츠키(1964)는 자본주의가 아직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선 민주주의혁명이 우선이라면서 볼셰비키의 10혁명을 비난하였다.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카우츠키는 유물론과 관념론을 절충하여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의미를 훼손하였으며, 부르주아국가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자들이 주도가 된 계급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카우츠키를 비판하였다. 

마르크스 역시 1848년 혁명 당시 이미 유럽은 혁명의 객관적 조건에 도달하였다고 보았으며, 그 이후에도 경제공황이 발생하면 노동자들의 혁명적 저항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무엇보다 혁명의 객관적 조건에 따라 노동자들의 혁명의식과 혁명의 시작이 기계적으로 지배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카우츠키와 달리 마르크스에 따르면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은 반드시 경제적 동기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카우츠키(1914)는 제1차 대전 당시 단일한 국제 트러스트 형성의 가능성과 자본주의의 생명연장을 설명하는 초제국주의론을 주장하였다. 초제국주의론은 카르텔의 정책을 해외정책에 이식시킴으로써 국제적 금융자본에 의해 세계를 공동 착취하기 위한 주도적 자본주의 열강들의 정책이다. 카우츠키는 연합한 세계카르텔이 자본주의체제라는 틀 내에서 세계전쟁의 위험을 제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초제국주의는 후기 제국주의다.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 잉여생산은 증가하지만, 임금수준이 낮아 그 잉여를 모두 쓸 수 없고, 자본가들 역시 그 잉여생산을 모두 흡수하지 못하고 과소소비를 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를 모면하려고 잉여자본이 해외로 진출하여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나타난다. 

초제국주의론은 발전된 자본주의 열강들이 원료와 식량을 생산하는 1차 산업의 농업국가를 정복하려는 일정한 정책으로 파악된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단계가 아니라 정책의 하나로 본다. 따라서 카우츠키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반대 즉 혁명이 아니라 제국주의 협력체제 등에 대한 정책반대를 주장한다. 

또한 카우츠키는 경제적 제국주의를 인정한 반면 정치적 제국주의 즉 제국주의 전쟁의 필연성을 부정했다. 카우츠키는 자본주의가 전쟁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일시적으로 전쟁이라는 반동적 유혹에 빠져 있지만 아직은 바로 전쟁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독점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에서 거대 열강들 간에 비폭력적, 비제국주의적, 평화적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 그리스공산당의 제국주의 피라미드 주장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평화롭고 협력적인 동맹으로서 국제 트러스트라는 개념과 유사하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카우츠키의 유럽 전쟁 반대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 따라서 실제로 유럽전쟁이 일어나자 전쟁협조주의로 태도를 돌변했다. 

레닌은 제국주의와의 화해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평화를 요구하는 초제국주의론을 비판하면서 제국주의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자고 비판했다. 레닌에 따르면 제국주의 국가들도 불균등 발전을 한다. 레닌에 따르면 후발 제국주의국가인 독일과 미국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재분할하고자 전쟁을 하거나 전쟁에 개입했다. 

초제국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집적과 집중이 세계트러스트로의 경향을 발생시킴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적대적인 형태로 일어나기 때문에 트러스트가 채 발생하기도 전에 자본주의는 사멸되어 사회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증대하는 생산의 집적과 자본의 집중은 불가피하게 계급적 모순과 기타 사회적 모순들을 심화시키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정치적 불균등발전을 크게 증대시킬 것이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세계분할이란 맥락에서 불가피하게 세계전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레닌은 초제국주의 간의 동맹은 아예 불가능하거나 제국주의 국가들 간이나 자본가들 간의 일시적 합으로서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