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와 1924년 5차 대회

코민테른 자격심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이 당시 각국 공산당의 대열에는 125만 3,000명의 당원이 있었고, 그 가운데 당원 82만 5,000명이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에 소속하고 있었다. 다만 17개 당은 당원 수에 대한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김성윤, 1986 Ⅰ: 183).

대회는 국제파시즘을 노동자계급의 혁명과 부르주아민주주의 일반을 폭력적으로 억누르고자 하는 거대 부르주아지의 방편이라고 특징지었다. 따라서 반파시즘 통일전선에 노동자가 선두에 서야 하며 중간층까지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체트킨이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파시즘이 소부르주아, 계급 내 몰락한 분자,  계급의식이 열악한 노동자에 기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부르주아 독재와는 구별된다고 지적했다. 파시즘에 대응하는 노동자의 방어투쟁이 필요하고 나아가 노동자·농민정부를 구호로 내걸어야 한다. 

집행위원회는 부르주아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노동대중의 투쟁을 탄압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민주주의적인 통치제도를 파시스트적인 지배체제로 바꾸려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노동자정부에 대해 지노비에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지만 대회는 노동자정부를 통일전선 정부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발전해 가는 과도기적 형태로 규정했다. 노동자정부는 대중투쟁을 전제로 한다면 의회를 통해서도 성립될 수 있다. 노동자정부의 임무는 노동자계급을 무장시키고 생산을 통제하고 부르주아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등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적 반항을 진압하는 것이다. 

나아가 대회는 ‘농업 행동강령 개요’는 러시아와 동유럽 등의 사례를 반영하여 노동자계급과 근로농민의 동맹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노동자·농민정부를 슬로건으로 정했다.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강령은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의 실현을 그 내용으로 했다.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노동운동은 전체적인 반제전선 속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갖는다. 식민지·반식민지의 노동자계급은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통해서만 혁명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김성윤, 1986 Ⅰ: 194). 

대회는 민족부르주아지의 불철저성을 비판하면서도 민족혁명의 범위 내에서 반제투쟁을 실현하려는 민족 부르주아지를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이 유지되는 경우에만 민족 부르주아와 세일시적인 연합이 가능하다. 

레닌이 참여한 마지막 대회였으며, 레닌이 제출한 ‘러시아 혁명 5개년과 세계혁명의 전망’은 러시아의 경험을 다른 나라에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경계했다.

1922년 11월1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제2회 대회 역시 노동자 통일행동 전술을 구체화했다. 1922년 12월10일 헤이그에서 열린 ‘경제회의’에 맞춰 같은 도시에서 제2인터내셔널과 제2반 인터내셔널이 함께 국제평화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소비에트 러시아 노동조합 대표자는 전쟁 위험 반대 투쟁을 위한 국제위원회 창설, 반군국주의 선전주간 실시, 24시간 시위 총파업에 의한 투쟁주간 등 노동자 통일전선의 구체적 행동강령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한편 1922년 13개국의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스트는 1922년 12월25일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를 창립하고 제1인터내셔널의 상속자를 자임했다. 이들은 ‘자주관리생산자’ 제도의 옹호자라고 자처했다. 


5차 대회에서 채택된 ‘코민테른 당들의 볼셰비키화에 관한 테제’는 올바른 이론과 대중성 모두를 강조하며 레닌주의를 각국의 조건에 따라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1926년 10월26일 열린 제15회 전연방공산당 대표자회에서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일국 사회주의를 비판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영구혁명론에 따라 유럽혁명 없이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며, 일국사회주의는 세계혁명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방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구혁명론은 세계적 차원의 생산력 발전과 계급투쟁에 기반하고 있으며 세계혁명을 진퇴를 거듭하는 영구적인 과정으로 본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영구혁명론은 첫째 민주주의혁명에서 시작해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둘째 정치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가족, 나아가 일상생활들이 상호작용하며 발전하는 과정이며, 셋째 혁명은 일국에서 시작되지만 일시적일 뿐이며 일국에서 완성될 수 없다. 일국혁명은 국제적인 사슬의 한 고리일 뿐이므로 러시아혁명과 같이 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유일한 출구는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서 혁명이 성공하는 것이다(트로츠키, 1989: 135~138).

트로츠키는 세계혁명이 승리하지 못하면 소련은 변질과 부패를 극복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경제도 제국주의 압력에 의해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결과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부활될 수 있다. 트로츠키는 소련의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혁명을 추동해야 하고 필요하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국사회주의를 위해) 국제평화를 추구하는 외교정책을 비판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150).

트로츠키는 세계혁명의 추동이라는 좌경노선에 기울어져 지노비예프와 함께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서 탈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은 좌경화돼 1927년 4월 국공합작에서 이탈해 도시봉기 노선에 따라 상해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국민당의 좌파까지 나서 강경진압에 나섰다. 

반면 집행위원회는 1926년 영국 탄광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연대를 제안하는 등 노동자통일전선을 견지했다. 

집행위원회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비록 안정적이지만 소련의 발전, 영국에서 자본주의 쇠퇴와 계급투쟁 심화, 중국의 민족혁명 등으로 인해 언제든지 자본주의의 일시적인 안정이 깨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집행위원회는 소련이 국제혁명의 중심으로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실현해왔기 때문에 일국사회주의가 민족적 편협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며 트로츠키파를 비판했다. 집행위원회 간부회의는 트로츠키파에 동조하는 지노비예프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 직무에서 해임하였다(김성윤, 1986 Ⅰ: 267).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