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코민테른 3차 대회

많은 사회주의정당들이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공산당으로 개칭했으며 신생국에서도 공산당이 창당됐다.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의 좌파 세력이 192010월에 열린 당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했으며, 이듬해 독일 공산당과 통합하여 독일 통일공산당(VKPD)을 창립했다. 192012월에 프랑스 사회당 대회가 투르에서 열렸는데, 대회는 코민테른 가맹을 결정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이 1920년 코민테른에 가입했지만 19211월 당 대회에서 중앙파와 개량주의자에 맞서 소수의 그룹이 퇴장하여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했다.

그런데 자본가들이 탄압과 함께 양보정책을 구사하자 계급평화, 평화적 이행을 강조하는 개량주의자들이 득세했다. 19192월 베른에서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하기 위한 회의에는 카우츠키 등 26개국으로부터 102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2인터내셔널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독일 측에 돌리고,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승인했다.

192012월과 19212월에 중앙파에 속하는 각 당이 오스트리아의 베른과 빈에서 열린 두 차례의 회의를 통해 사회주의 정당 국제활동연합’(International Working Union of Socialist Parties)을 결성했다. ‘빈연합또는 2.5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조직은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체코 사회민주당,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발칸 반도의 모든 사회민주당 그룹 등을 규합했다. 1919년 여름에는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스위스 사회민주당,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 등의 러시아 비()볼셰비키파, 영국의 독립노동당 등도 여기에 합류했다.

사회개량주의와 좌파공산주의, 중앙파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 등의 분열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좌파공산주의의 선동에 따라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을 탈퇴한 노조들은 혁명 지향 노선을 내걸었으나 개량주의적인 노동조합에 남아있던 광범한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고립됐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자통일전선이 다시 부상했다. 192117일 독일 통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과 독일의 모든 노동자 조직(독일 노동총연맹, 자유직원조합연맹, 일반노동자연맹, 자유노동자연맹 = 생디칼리스트 조직) 앞으로 공개장을 발표하고, 거기서 노동자와 노동대중의 긴요한 요구를 위해 반동 공세에 대항하는 공동투쟁의 전개를 호소했다. 이 공개장은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 수립을 위한 투쟁에서 최초의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공개장은 자본주의 해체의 진행, 개시된 세계공황이 독일의 특수한 공황에 미치는 반작용, 화폐가치의 계속적 저하, 독일에서 역시 높아가고 있는 모든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의 가격 등귀, 실업의 증대, 광범한 대중의 빈곤화 등은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방위에 나설 것, 즉 그들이 공업프롤레타리아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제 점차 자기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자각해 가는 모든 층들을 고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개장은 임금·연금·은급·실업자의 급료 인상, 모든 임금생활자와 하급 봉급생활자에 대한 식료품 공급, 빈집의 징발과 노동자 주택조건 개선, 보유 원료와 석탄 그리고 비료의 경영평의회 관리, 생필품을 생산하는 유휴경영의 조업재개, 농장평의회와 소농평의회의 모든 농산물 경작·수확·판매 관리 등을 요구했다. 또 모든 부르주아적 자위단의 무장해제와 해산, 프롤레타리아 자위단 결성, 정치범과 생활 곤궁으로 인한 범죄인의 석방 및 사면, 파업 금지령 폐지, 소비에트 러시아와 통상·외교관계의 즉시 수립을 위해 공동행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했다.

사회민주당, ‘독립파’,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과 같은 극좌파도 공개장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 지노비예프와 집행위원 부하린이 좌파의 견해를 옹호하여 공세이론을 들고 나와 공개장 제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와는 반대로 레닌은 공개장을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을 수립하기 위한 올바른 시도라고 평가했다.

대회는 노동자통일전선에 관한,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 및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노동자와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 조직들을 지지하는 노동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테제를 채택하고 좌파의 공세이론을 거부했다. ‘국제정세와 코민테른의 임무에 따르면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봉기, 불확실한 투쟁방법과 목표, 그리고 지배계급의 극단적인 혼돈상태를 특징으로 하는 전후 혁명운동의 제1기가 종료했다. 대회는 광범한 일반 민주주의적 전선을 결성하기로 했으며 노동자 통일전선의 실시, 대중 속으로!”라는 전술을 채택했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여성단체, 청년단체 내에서의 당 활동 문제를 다루었다. 79일부터 23일까지에 걸쳐 제2회 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 대회가 열렸으며, 6월에는 국제공산주의여성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협동조합 내에서의 당 활동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다.

집행위원회는 제2인터내셔널에 192110월 헝가리와 스페인의 백색 테러를 규탄하는 공동행동을 제안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자본가의 노동자경제투쟁에 대한 공세, 파시스트의 태동, 군비증대와 전쟁 위험 등으로 인해 사회민주주의 조직이나 개량주의적 노동조합도 노동자통일전선에 관심을 지니게 됐다.

2()인터내셔널 내 프랑스 사회당은 코민테른을 포함한 국제회의를 주장했으나 영국노동당이 반대했다. 논란 끝에 제2반 인터내셔널 정치국은 114일 베를린 회의에서 “119일 유럽의 경제정세와 반동의 공격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행동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3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와 공동으로 국제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19222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1회 확대집행위원회는 노동자통일전선에 대한 12월 테제를 승인하고 세계대회에 모든 노동조합, 전국적 연합체와 국제적 연합체를 참가시키자고 결정했다.

반면 사민주의와 대립하는 기존의 노선도 유지됐다. 국제노동조합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Trade Unions =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은 코민테른 경향보다 거의 3배가 되는 약 2,200만 명을 포괄하고 있었다. 192173일 모스크바에서 혁명적 산업별 노동조합의 제1회 국제대회가 열렸으며 이 대회는 국제연맹에 부속되어 있는 국제노동기구(ILO)와 암스테르담 노동조합 인터내셔널(국제노동조합연맹)에 반대하는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Profintern)을 창립했다.

프로핀테른은 소련과 아프리카의 노동조합, 사민주의 경향의 국제노동조합연맹의 반대파와 제명된 노조 들이 모여 결성됐으며, 반파쇼 인민전선에 따라 사민주의와 협력노선이 강조되면서 193712월에 해체되었다. 프로핀테른은 서방의 제국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에 식민지나 종속국의 노동 운동을 지원했다. 프로핀테른은 일국 1노조 방침에 따라 재일 조선인은 일본인과 단일한 노조를 결성할 것을 지시했다.

이밖에 레닌의 러시아 공산당의 전술에 관한 보고는 네프를 설명하고 노농동맹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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