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제1차 (1889년) 파리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1876년 제1인터내셔널은 필라델피아에서 해산되었지만 그 이후 각국에서 노동조합과 사회주의정당이 성장했다. 이에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 독일사민당의 제안으로 제2 인터내셔널은 1889년 7월 14일 열린 국제 노동자 회의에서 설립되었다. 제2 인터내셔널은  당과 노동조합의 연합조직이었다. 영미의 실리주의, 프랑스의 생디칼리즘, 마르크스주의 노동조합주의가 혼재돼 있었다. 1908년 가입한 영국 노동당을 제외하면 마르크스주의정당들이다. 1893년과 1896년 총회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추방됐다. 1904년 대회 참가국 기준으로 21개국이 선거에 참여하여 660만표를 획득하였으며 의회에서 261석을 얻을 수 있었다. 1914년에는 400만명의 당원을 확보하였으며 유권자는 1200만이 되었다. 

대회는 사회주의 정당의 원칙과 독립성을 파괴할 수 있는 타협은 용인될 수 없으며, 부르주아 정당과는 별개의 노동자계급의 정책을 제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노동조합을 경시하는 독일사민당의 라쌀주의 전통, 그리고 이미 각국의 총연맹이 각 정당들과 연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에 대한 정치사업은 활발하지 못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총파업 투쟁을 강조했으며 주기적으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면서 노동절 시위를 조직했다. 



제2차 (1891년) 브뤼셀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부르주아 정당의 지배에 반대하는 노력을 결합하고, 노동자가 정치 권리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든 이 권리를 임금노예제로부터 해방을 이룩하기 위해 이용해야 한다


제3차 (1893년) 취리히 사회주의 노동자 대회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권력 장악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노동자계급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결의했다. 노동조합의 전국 연합체를 모든 나라에서 결성하고, 산업별 국제노동조합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제4차 (1896년) 런던 인터내셔널 사회주의 노동자 무역 동맹 대회

회원 자격문제를 둘러싸고  아나키즘의 가입을 제한했다.  "자본주의 소유와 생산을 사회주의 소유와 생산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입법 및 의회활동을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의 하나로 인정하는 조직의 대표"와 "비록 정치투쟁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지만, 입법과 의회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한다고 천명하는 노동조합"으로 결의했다. 노동자계급은 최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투쟁수단을 이용해야 하고, 이 경우 의회전술 문제에 대해서도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경제투쟁과 관련하여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강조했다.


제5차 (1900년) 파리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프랑스에서 1895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으로 1898년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공화파는 왈덱 루소(Waldeck Rousseau)내각을 출범시켰는데 이 내각에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이 상공장관으로 들어갔다. 밀레랑 옹호 진영은 입각이 기존체제 내에서 부분적인 개량 성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레스(Jaurs)는  '새로운 전술'의 모범, '부르주아지에 대한 정치적 탈취'로 평가했다. 이에 반해 게드(Guesde)는 당의 목표를 희석시키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원칙에 배치된다고 비난했다. 인터내셔널에서 당이 승인만 하다면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카우츠키의 타협안이 채택되었다.

한편 프랑스 게드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철폐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혁명 수단으로서 세계 규모의 총파업을 제안했다. 각국 대표들은 총파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이 제안은 대회에서 부결되었다.



제6차 (1904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독일 드레스덴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르주아 내각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과 의회주의를 주장하는 베른슈타인에 대한 비판 결의문이 통과된 이후 열린 대회에 이 문제로 베벨과 조레스가 대립했다. 조레스는 프랑스의 경우 왕정을 복구하려는 왕당파를 견제하기 위해 공화파 부르주아 내각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총회는 드레스덴 결의문에 25:5의 지지를 보냈고 12명은 기권하였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독일 대표자로서 인터내셔널에 남아 있었다.

또한 대회에 상정된 안은 먼저 총파업과 대중파업을 구분했다. 총파업은 체제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사회 전체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 '무정부주의적'인 행동으로 규정되었다. 정치적 대중파업은 일정한 조건에서만 즉,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에 어긋나는 반동적인 조치에 대항하기 위해 혹은 중요한 사회변화를 이끌기 위한 조건에서만 승인될 수 있는 최후 수단으로서 인정되었다. 그리고 대중파업도 그것이 일정한 조직 발전을 통해서, 계급투쟁에서 노동자들 사이의 단결과 세력 강화에 기여하는 경우에 한해서 허용된다고 강조됐다. 


제7차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논란 끝에 전쟁반대 결의안이 통과됐다. 나아가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마르토프가 제출한 수정안이 포함됐다. 이 수정안에 따르면 '어느 곳에서든 전쟁이 발발한 경우에는 전쟁의 빠른 종식을 위해서 개입해야 하고, 대중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전쟁에 의해서 생기는 모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위기를 전력을 다하여 활용해야 하며, 자본주의적 계급지배를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노동운동"의 임무이다.' 이러한 입장은 전쟁 1년 전인 1912년 바젤 대회까지 매번 확인됐다. 

식민주의는 보어전쟁 당시인 1900년의 인터내셔널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7년 후에 열린 슈투트가르트 회의에 참석했던 식민지 대표들 대부분은 '어떤 상황 하에서나 모든 식민지 정책을 일률적으로 거부할 수만은 없다.'고 주장했다. 즉 여기에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처럼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개화를 목적으로 한' 식민정책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제안은 논쟁 끝에 127:108로 부결되었다. '자본주의적 식민지 정책은 그 본질상 토착민들을 노예화시키고 노동을 강요하며 뿌리를 근절시킨다.'는 결의문이 통과되었다.


제8차 (1910년) 코펜하겐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제9차 (1912년) 바젤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긴급 대회)

평화를 위한 시위가 되었으며 또 다시 만장일치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혁명적 투쟁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제2인터내셔널의 주축이 되었던 정당들은 자국의 정부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을 지지했다. 인터내셔널의 붕괴는 자본주의 팽창의 절정이며 노동운동의 민족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세르비아, 헝가리 등의 당들만이 반전 노선을 견지했다. 

전쟁 중에, 중립국에 있는 당들을 중심으로 제2인터내셔널을 부활하려고 인터내셔널 사무국은 네덜란드로 옮겨졌다. 전쟁 직후 1919년의 베른 회의는 성과가 없었으며, 다음해에 제네바에서 17개국이 참가한 총회가 개최되었고 1923년에 함부르크 총회에서 제대로 부활됐다. 

이와 별도로 1921년에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Ö) 그리고 영국 노동당을 포함한 10여개국의 좌익 사회주의자들이 비엔나에 모여 '제2.5인터내셔널'이라는 별칭이 붙은 사회당 국제 노동동맹('비엔나 동맹')을 결성하였다. 비엔나 동맹은  제2인터내셔널과 통합하여 노동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결성했고, 이것은 1940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조직은 19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이어졌으나, 이는 세계에 퍼져있는 사회주의 정당 및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느슨해진 연합으로서 런던에 본부를 설치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1951년 6월 30일 창립대회에서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발표하여 무장혁명을 거부하고 사회민주주의노선을 천명하면서 소련을 비판했다.  2013년 주도국인 독일사민당이 탈퇴하여 진보동맹을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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