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마르크스부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자본주의 제국주의론 11

베른슈타인(1850년 ~ 1932년)은 엥겔스의 『반뒤링론』을 읽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베른슈타인은 1872년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아이제나하파의 당원이 된다. 1875년 아우구스트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아이제나하파와 라쌀파의 결합을 결정한 고타 전당 대회를 준비하였다. 

황제 암살 미수 사건과 사회주의자들은 무관하였으나 1878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제정되자 베른슈타인은 1878~88년 스위스로 이주하여 1880년에서 1890년까지 SPD의 비합법 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를 발행하였다. 1888년 프로이센의 압력을 받은 스위스 정부로부터 국외 퇴거 명령을 받고 다시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베른슈타인은 런던 망명 중에 엥겔스, 카우츠키와 교류하였다. 엥겔스와의 친밀한 관계가 1890년대까지 당내 이론가로서 지위에 도움이 되었다. 베른슈타인은 자신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런던에서 페이비언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연합(Social Democratic Federation)과 교류하면서 수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베른슈타인은 비스마르크 시대에 만들어진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폐지에 따라 1901년 독일로 귀국하였다. 1902년에서 1918년까지 제국의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1903년 드레스덴 전당 대회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부결되어 베른슈타인은 공식적으로는 패배하였으나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는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 1913년 사회민주당 좌파와 함께 군사력 증강법에 반대표를 던졌으나 1914년 전쟁 국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졌다. 하지만 이듬해 전쟁에는 반대하였다. 

사민당 지도부는 전쟁반대론자들을 제국의회에서 소외시켰다. 베른슈타인은 1917년 카우츠키와 함께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참가했으나 독립사민당은 베른슈타인의 평화적 이행에 반대하였다. 오히려 다수사민당(MSPD)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수용했기 때문에 베른슈타인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사회민주당에 복귀하였다.  베른슈타인은 1920년부터 1928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 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21년 괴를리츠 강령 기초를 도왔다.

그는 1877년  유대인 단체에서 물러났으나 1차 대전 이후 시온니즘에 대해 동조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반유대주의 정서에 편승하여 팔레스타인들을 위한 단체에도 가입하였다. 그는 사민당 내 최초의 동성애 허용론자이다. 

그는  '윤리적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물질적인 요소를 발달의 만능적인 힘으로 받드는 마르크스주의를 자기기만이라고 단정하였다. 그 이유는 정치적 · 도덕적 신념, 종교 등의 관념적인 요소는 경제적인 생산관계 또는 계급관계에 못지않게 사회생활과 문화생활의 제 현상에 원대한 작용을 미쳐서 인류 발달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발전을 유기적 진화론의 입장에서 사회주의의 평화적 이행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혁명을 부정하고 '궁극 목적은 무이고 운동이 전부다'라고 주장하였다. 

베른슈타인은 폭력적인 블랑키주의에 영향 받은 공산주의자동맹의 젊은 마르크스에 반대하고 후반의 마르크스를 지지하면서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점진적인 의회개혁으로 평화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카우츠키는 “선거제도는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베른슈타인의 의회주의는 진보적인 부르주아와 비노동계급적 동맹에 이르게 한다”고 비난하였다. 

엥겔스가 1895년 4월 1일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엥겔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의 신판에 자신이 쓴 서문이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에 의해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평화로운 길에 동의한 것처럼 편집된 것에 분개하였다. 

베른슈타인은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한 이후 「사회주의의 문제들(Probleme des Sozialismus)」(1896-98)을 발표했으며, 1899년에는 「사회주의의 문제들」을 보완하여 『마르크스주의비판』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저서와 1899년 『사회주의를 위한 전제들과 사회민주주의의 임무(Die Vor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 에서 유물론적 역사관, 노동가치론, 자본주의의 붕괴론, 계급투쟁론 등을 비판하였다.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를 위한 전제들과 사회민주주의의 임무』에서 산업화된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은 노동조합과 의회활동이라고 보았다. 그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필연적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상승하였으며,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대결이 가시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자본이 소수에게 집중되지도 않았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0년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를 통해 비판하였다.

베른슈타인에 따르면 자신의 이론은 공상주의와 폭력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마르크스주의 내의 이론과 실천의 충돌을 해소하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부정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패러다임의 이동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극복이자 발전이다. 즉 자신이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였다. 베벨은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최초로 마르크스주의 내용을 비판한 자라면서 베른슈타인을 사민당에서 축출하려 하였다. 하이만(Horst Heimann)에 따르면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은 수정주의를 확립하였는데, 이는 라쌀주의가 아니라 베른슈타인의 영향이다. 

베른슈타인에 따르면 자본은 끊임없이 집중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진보로 신규 중소기업이 생기고 이들은 대경영에 대항할 능력을 구비하고 있어 중간층이 두텁게 형성되고 있다. 그는 꾸준하게 프롤레타리아 일부가 자본가로 변신하고 있다고 봤으며 농민과 중산계급을 위한 민주주의적인 개혁, 협동조합의 조성을 주장하였다. 중간층의 존재는 자본주의적 집중설과 상충된다. 

집적설에 대해서도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의 징후’라고 본 주식회사의 발달에 의하여 자본의 소유가 한층 다수인에 분산되는 경향을 나타낼 뿐 아니라 생산조직의 발달로 노동자의 일부분은 점차로 자본의 소유자로 전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의 빈궁화는 다양한 이윤배분과 중소기업에 의해 저지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근대사회의 발전은 사회적 계층구조에서의 중간층의 역할과 위치에 의존한다고 하였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는 점차 복잡해지고 적응력도 커지고 있다고 본다. 즉, 그는 자본주의가 붕괴되어 사회주의가 출현할 것을 기다리기보다 현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베른슈타인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계급을 민주주의적으로 육성하여 모든 변혁을 국가 내에서 쟁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대규모 정치적 파업을 찬성하고 선거권 투쟁과 같은 의회투쟁을 강조하였다. 

독일의 노동조합들은 자본주의의 성공과 노동계급 조건의 개선을 목격하고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갈수록 동조하였다. 베른슈타인은 고소득노동자와 고학력 노동자들은 기존 체계에 편입하려고 하며 점진적 개혁을 선호한다고 보았으며 노동시간, 노령연급과 같은 타협책이 증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1848년 6월의 파리 노동자봉기와 같은 폭력혁명은 반동세력만을 강화시킨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독점기업의 사회화를 주장하였으며, 독점자본에 대항하여 부르주아 중간계급과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에 의해 사회주의가 달성된다고 보았다. 

사회운동의 실천에 있어서도 그는 마르크스의 국제주의 대신에 각국의 국민적 특성에 따라서 각각 다른 정치적 행동을 채택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베른슈타인에 따르면 개인적 자유 혹은 특정 집단의 사적 이해가 전체의 이해를 훼손할 수 있는데, 민주적 국가만이 이러한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 이점에서는 칸트 및 헤겔의 국가관과 유사하다. 정재환에 따르면 베른슈타인의 입장에선 계급지배의 도구로서 국가는 어떤 특정한 발전단계에 있는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지 국가 일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국가의 역할이 증대하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베른슈타인, 2002: 139).

베른슈타인은 ‘전세계인의 해방을 전제로 한 국가주의(cosmopolitan-libertarian nationalism)’를 주장하였다. 그는 자유무역이 평화, 민주주의, 번영, 인류의 물적 도덕적 복지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그는 독일의 보호주의 관세는 정치적 편의주의에 불과하고 오히려 독일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며, 국내 생산에 도움을 주지 못해 영국의 경쟁력에 대항할 수 없는 반면 임대료 인상, 이자율 인상, 물가인상을 초래한다고 봤다. 이런 관점에서 전쟁 이후 국가들의 연맹을 주장하였다. 

그는 높은 문명을 가진 국가가 그렇지 못한 국가를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인종적인 차별 의식을 지녔기 때문에 제국주의 식민지정책에 동조하였다. 

그는 높은 문명은 높은 권리를 지녔으므로 열대국가의 야만인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은 토지의 정당한 사용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을 얻는 것이라고 보아 식민지적 권리를 인정하였다. 특히 1896년 그는 야만인들은 높은 수준의 문명의 지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문명화를 거부하거나 능력이 없는 인종들은 문명화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우리들의 동정을 얻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외형상 국수주의와 전쟁에 반대하여 독일이 1차 대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당의 지도부에 설득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가의 역사적 역할을 긍정적으로 봐 노동자들은 외침에 대해 방어해야 하며, 국가체제(nation-states)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영불과 유대를 강조한 반면 러시아에 대해 독일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아 적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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