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의 개요와 창립대회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노동사회가 연재한 세계노동운동사와 기타자료를 참조했습니다. 참조목록은 최종본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http://klsi.org/bbs/board.php?bo_table=B07&wr_id=160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세르비아의 지원국인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고,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원국인 독일이 총동원령을 내렸다. 양국이 대립하다 결국 독일이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앞서 제2인터내셔널은 1912년 제9차 대회까지 전쟁협조 거부 노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했던 독일사민당의 다수는 전쟁에 협력했다. 심지어 독일사민당의 필립 샤이데만 제국의회 부의장은 러시아가 전쟁가 유발했으나 방어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사회당, 영국 노동당 등 대부분의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들은 전쟁에 협력했다. 

이에 레닌은 1914년 11월 겉으로만 사회주의를 외치면서 개량주의로 흐르는 사회배외주의(Social Chauvinism)의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하기로 했다. 한편으로 당시 사회배외주의 주창자와 중앙파는 공산주의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제2인터내셔널 사무국을 중립국인 네덜란드로 이전하는 등 개량주의로 전락한 제2인터내셔널을 부활하고자 했다. 

이에 대응하여 1918년 1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간부들의 대표 회의에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미국,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의 대표들이 결합했다. 참가한 정당들은 1차 대전에서 본국 정부에 반대하고 즉시 강화를 목표로 혁명적 투쟁의 길로 나아가기로 했다. 1919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 좌익 조직 대표회의에서 제3인터내셔널을 조기에 창설하자는 레닌의 주장이 수용됐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호소문은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 스파르타쿠스단의 강령에 기초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목표·전술 및 조직원칙을 제시했다. 드디어 같은 해 3월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Comintern)이 창설됐다. 


1919년 3월 2일 레닌 30개 나라의 35개 공산당 및 공산주의 단체가 창설

1920년 7월 19일 2차 대회

1921년 6월 22일 3차 대회

1922년 11월 5일 4차 대회

1924년 6월 17일 5차 대회

1928년 7월 17일 6차 대회

1935년 7월 25일 7차 대회

1943년 5월 15일 집행위원회의 해산 선언

1947년~1956년 코민포름(사회주의국가 정보공유기구)

1957년. 1960년. 1969년 세계공산당 및 노동당대회

1955~1991년 바르샤바조약기구


1935년까지 7차 대회 전부 모스크바에서 열렸으며, 2차와 4차는 페트로그라드에서도 분산돼 열렸다. 4차 대회 당시 최대 규모로 340명의 대표와 48명의 자문위원이 참여했다. 코민테른의 최고기관은 코민테른 대회이고 대회와 대회사이의 지도기관은 집행위원회이며, 당의 일상사업은 집행위원회가 선거한 상무위원회가 지도하였다. 매개 나라에는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코민테른 지부를 두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총회(Plenums of Executive Committee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는 대회의 대행기관으로서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매년 13차례 열렸으며 1922년과 1926년엔 두 번 열렸다. 단 1930년 회의는 정식회의가 아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산하에 암스테르담, 극동, 스칸디나비아, 발칸, 비엔나, 남부(Scandinavian Bureau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등 6개의 비서부가 있었다. 

코민테른 초대 의장 그레고리 지노비예프가 7년 동안 역임했으나 트로츠키를 지지하다가 스탈린에 의해 해임됐다. 니콜라이 부하린이 후임으로 선출됐으나 1928년 소련공산당의 서기장(General Secretary) 스탈린으로 교체됐다. 레닌은 1922년 4차 대회까지 참석했다.

코민테른에서 채택된 결정이나 결의의 주제를 분류해보면 주로 초기에 신경제정책과 같은 소련 문제, 공산주의인터내셔널과 각국 공산당, 노동조합의 조직과 전략을 다루었으며 농업 및 농민 문제, 청년, 여성 등 부문 대중에 대한 것도 논의했다. 

1920년 제2차대회에서 후진국과 종속국에서 노농동맹, 부르주아민주파와의 연합이 제기됐다. 노동자통일전선은 주로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이 활성화된 유럽에 관련된 것으로서 1921년 제3차대회부터 끝까지 중요한 문제였으나 각 시기 별로 단결해야 할 대상과 전선의 목표는 정세에 따라 변해돼 왔다. 초기 반제국주의 노동자통일전선 혹은 반제국주의 인민전선을 강조할 경우 제국주의 전쟁에 협조한 사민주의 세력을 통일전선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했다. 노동자통일전선이 부각되기 직전인 1921년 사민주의 노조에 대립하여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설립이 추진됐다. 

1930년을 전후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시트가 성장함에 따라 사민주의 세력을 포함한 반파쇼 인민전선으로 발전했다. 반파쇼인민전선이 독소불가침조약으로 파탄된 것은 코민테른이 해산되는 중요한 원인이다. 반파쇼인민전선은 코민테른 차원에서는 와해됐지만 독일에 점령된 유럽국가 특히 동유럽에서 인민민주주의 노선으로 발전했다. 이들 나라에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인민정부가 출범하였다. 

민족 문제와 식민지(종속국) 문제 역시 코민테른 전 기간 동안 논의돼 왔던 것으로서 제국주의 국가의 민족 문제와 사회주의운동과의 관계까지를 포함한다. 관련하여 1927년에는 식민지 압제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계대회(World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 1929년에는 제국주의 반대동맹대회, 1930년에는 국제흑인노동자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 of Negro Workers)가 열렸다. 특히 비서국이 설치된 동양 문제가 지속적인 주제였으며, 1920년 동방인민대회,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 등 관련 대회가 열렸다. 식민지 문제가 노동자통일전선과 결합돼 민족해방 통일전선, 반제민족해방통일전선 등으로 발전했다. 코민테른에서 인민전선 문제가 본격 논의되면서 식민지에서 반제민족해방인민전선이 부각됐다. 식민지에선 파쇼 제국주의나 부르주아 제국주의나 모두 축출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코민테른이 해산된 이후 반제민족해방통일전선은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으로 발전하였으며, 중국에선 신민주주의 혁명이론으로 구체화됐다. 2차 대전 종결 이후 많은 식민지가 해방된 후 이러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이론 따른 인민정권이 들어섰다.

식민지 조선과 관련된 것이 극동비서국이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는 1921년 2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주에 설치됐으며, 1920년 7월 설치된 러시아 공산당 시베리아국 산하 동양국이 개편된 조직이다. 설립 당시 93명의 임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극동비서부장에 슈먀츠키(Boris Zakharovich Shumyatsky)가, 책임 비서에 보이친스키(Voytinskiy)가 선임되었다. 한국, 중국, 일본, 몽골·티베트 네 개의 민족별 지부가 조직되어 있었다. 

코민테른 초기에는 극동비서국과 러시아연방 내 극동공화국(치타공화국)이 동양의 민족 문제를 담당했다. 1920년 러시아연방의 공산당 시베리아국 동양민족부는 시베리아에서 극동공화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코민테른이 러시아 동양민족부를 코민테른의 기구로 편입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1920년 9월 15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극동비서국을 두기로 결정했다. 1921년 1월 15일에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국은 러시아 공산당 시베리아국 동양민족부를 코민테른에 이관할 것과 슈먀츠키를 극동 주재 코민테른 대표자로 임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극동비서국의 설치로 인해 극동에서 한인사회주의 운동은 과거와 달리 러시아나 극동공화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코민테른의 일원적 지도를 받게 됐다. 


1919년 코민테른 창립대회

크레믈린에서 열린 창설대회에서  대회 의장단으로는 레닌, 에벨라인(독일), 플라텐(스위스)이 선출되었고 이어 코민테른 의장으로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가 선출됐다. 집행위원회 내 간부회는 지노비에프 의장과 발라바노바, 제르긴 서기 등 5명이었다. 당시 러시아 공산당과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 공산당 외에 유럽에 존재했던 공산당은 6개 국가뿐이었다. 식민지나 종속국에서 온 대표가 대표자 52명 가운데 이란, 중국, 조선, 터키 등 12명이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침」은 “자본주의 해체의 시대,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밝혔다. 지침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이 주도하여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부르주아 국가기관을 철폐함과 동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소비에트 체제로 대체해야 한다. 

레닌은 「부르주아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테제와 보고」를 통해 민주주의가 피억압계급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또 “역사의 교훈은 무릇 피억압계급이 독재의 시기를 거치지 않고 지배의 지위에 올랐던 예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지주나 부르주아의 독재가 주민의 대다수 즉, 근로대중의 반항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착취자 즉, 주민 중에서 극소수인 지주와 자본가의 반항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레닌에 의하면 러시아에서 혁명 초기의 타 정당들이 반혁명에 가담함으로써 일당제로 귀결됐다. 반면 폴란드 체코 등은 여러 정당들이 함께 파시즘에 대항하고 민주주의 개조에 참여했기 때문에 일당제로 귀결된 러시아와 다르다.

러시아혁명 확산을 막으려는 유럽과 미국 정부의 방해로 인해 해외를 대표하는 상당수는 실제로 러시아 거주자였으며, 해당국 노동계급의 공산당 대표가 아니라 소그룹 출신자였다. 대회는 제2인터내셔널을 부정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뿐만 아니라 중앙파(카우츠키파)와 결별하기로 했다. 같은 취지로 사민주의 노조와 구별되는 적색노조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즉 아직은 노동자통일전선이 첨예하게 부각되지 않았다.

대회는 제국주의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 투쟁과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과의 밀접한 결합을 끊임없이 실현하고,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종국적인 붕괴를 촉진하기 위하여” 피억압 민족의 투쟁을 지지할 것을 자신의 의무로 내걸었다(김성윤, 1986 Ⅰ: 76).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