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동맹, 중·러, 남·북 순서로 정상 회담 전략
이재명 대통령의 정상외교가 본격화된다. 일단 미국에게 한·미·일 협력을 중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정상외교의 순서도 중요하다. 한·일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을 먼저하고 한·중 정상회담을 나중에 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조·러 밀착을 고려하여 껄끄러운 한·러 정상 회담을 나중에 하는 것이다. 남·북 수뇌회담은 이러한 동맹 외교와 중·러 외교를 통해 주변 정세가 성숙해지면 최대의 난제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이 친중이라는 미국의 의구심을 불식시키고자 한·미·일 간의 정상회담을 먼저 하면서도 중국을 달래기 위해 한·중 수교일(8월24일)을 계기로 삼아 박병석 전 국회의장 등 특사단을 중국에 보내는 것도, 제한적이지만 균형 외교를 추구한다는 메세지이다. 특사단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을 요청하는 내용이 포함된 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할 계획이다.
지난 6월 캐나다에서 열린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서 이 대통령은 시게루 총리와 30분 동안 짧은 정상회담을 가졌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이란 간 충돌 고조를 이유로 조기 귀국함으로써 한·미 정상 간의 만남은 연기됐다.
트럼프 보기 전에 이시바와 먼저 우호적 장면 연출
이 대통령은 8월 23일 출국해 24일까지 일본에 머물면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다. 한·일 정상은 이미 상견례를 했기 때문에 이번 정상회담에선 한·일 정상회담을 양국에서 번갈아 가며 하는 셔틀 외교를 복원하고 안보와 통상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의제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사도 광산,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제3자 변제 문제 등 민감한 문제는 실무협상에 맡기고 한·일 정상회담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관련하여 8월 15일 이시바 총리는 패전 80년 전몰자 추도식에서 "다시는 길을 잘못 가지 않겠다"며 '반성'을 언급했고, 같은 날 이 대통령 광복절 경축사에서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로 나아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한·일 정상이 회담 전에 과거사 문제에 대한 부담을 턴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국민의 여론을 고려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제에 대해 일반적인 수준에서 언급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전에 한·일 정상회담을 먼저 하는 것은 한·미·일 협력 체제를 강화하는 데 있어 한·일 협력이 핵심이라는 미국의 요청에 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최대한 우호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의제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요구에 한·일 정상이 어떻게 한 목소리로 대답하느냐이다. 대만 문제, 러시아 문제, 조선 문제 등 동북아 안보협력은 물론 우크라이나 지원과 재건과 같은 글로벌 이슈에 대해서도 한·일 정상이 미국에 협력 방안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양 정상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구상에 부응하기 위해 미군의 역할 변화와 조선의 핵과 미사일에 대한 공동 대응, 한·미·일 군사협력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 미국이 청구서를 내밀기 전에 한·일 정상이 역할 부담 수준을 미리 조율하는 것이다. 그밖에 한국은 일본이 주장하는 납치 문제에 대해 조선을 의식하면서도 일반적인 수준의 관심을 표명할 수 있다.
경제 분야에선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과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등이 검토될 수 있다. 미국의 관세 압박에 대해서는 미국에 맞서는 방식의 대응 방안보다는 한·미·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미국에게 "안보동맹을 배려하라"는 식으로 함께 설득하는 방식을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라인 사태 등 디지털 산업과 관련한 갈등을 부각하기보단 중국을 견제하는 한·미·일의 공급망 구축, 한·일 간 문화 교류 활성화 등 우호적인 한·일 관계를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어수선한 한·미 정상회담, 돌발변수 잠재
이 대통령은 한·일 정상회담을 진행한 뒤 미국으로 가 25일과 26일 미국에 머물며 한·미 정상회담을 진행할 예정이다. 지난번 한·미 정상회담이 불발돼 양 정상의 첫 번째 대면이라는 점에서 논의 내용보다는 만남 자체와 형식, 충분한 논의 시간 등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번 이 대통령의 방미는 국빈 방문이 아니라 실무방문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우크라이나전쟁 종결인데, 25일 한·미 정상회담까지 이 문제가 잘 풀리지 않으면 한·미 정상회담이 이에 영향 받을 수 있다. 지난 8월 15일 알래스카 미·러 정상회담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정상회담이 진행되고 마지막에 3국 정상회담을 통해 우크라이나 문제가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우크라이나 관련 일정 때문에 한·미 정상회담이 미국 입장에서는 중요도나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다. 이 대통령으로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집중할 수 없는 국제정세가 아쉬운 부분이다. 이 경우 한·미 정상은 기존 합의를 확인하고 복잡한 문제는 추후에 논의하거나 실무협상에 넘길 수 있다. 의제는 주로 한·미 동맹의 현대화와 관세 협상 마무리이지만 논란이 많은 한·미 동맹의 현대화 혹은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은 원칙만 확인하고 논란이 많은 핵심 의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한·미 정상은 실무에서 논의된 관세 협상 결과를 재확인하고,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을 배려하여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펀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선물 보따리를 풀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의 방미에 대기업 총수들이 포함된 경제사절단이 함께 하면서 반도체, 배터리, 조선업 등 경제 협력과 첨단 기술, 핵심 광물 등 경제협력이 논의될 것이다. 이 대통령은 방미에 앞서 19일 재계와 간담회를 가졌다.
한 박자 쉬는 한·미 정상회담, 혹은 트럼프 원맨쇼
안보문제와 관련하여 한·일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것을 중심으로 한·미·일 안보체제를 강화한다는 선언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연장선에서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도 논의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북·미 문제에 공을 들일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남·북 관계, 북·미 관계의 개선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미 관계 개선을 내용으로 하는 싱가포르 합의를 상기시킬 수 있다.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한국이 남·북 대화를 통해 역할을 하겠다고 남·북이 먼저 대화하는 것에 양해를 구할 수 있다. 양국 정상은 당장의 남·북·미 관계를 진전시키되 북핵 폐기를 장기적 목표로 삼는 단계적 비핵화에 대한 일반적 공감대를 최초로 합의할 수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25일 발표될 공동선언문에 '북·미 싱가포르 합의'를 명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세 차례 정상회담과 싱가포르 합의문을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성과로 강조하면서 그 연장선에서 북·미 대화를 재개하겠다고 밝혀왔다. 다만 미국의 주도권을 고려한다면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 공동선언 등 문재인 정부 당시 이뤄진 남·북 간 합의는 명시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정상회담이 상견례이고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 문제로 미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논란이 되는 이슈를 한·미 모두 피하는 것이 외교적 순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이 대통령이 피하고 싶은 의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등 돌발적인 공개 발언을 할 가능성도 있다.
이를테면 한국 정부의 입장과 달리 미국의 농산물을 대거 수입하라는 압박이나 국방비와 방위비 분담금 증액 문제를 언론 앞에서 핵심의제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특히 비용을 획기적으로 더 부담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는 엄포 발언을 할 수 있다.
반면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엄포에 대응하여 전시작전권 조기 전환 문제를 공세적으로 제기할 수 있다. 결국 한국의 고민은 이번 회담을 무난하게 이끌어 갈 것인지 트럼프식 요란한 쇼로 끝날 것인지는 이 대통령이 아닌 트럼프에 달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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