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를 둘러싼 총연맹과 산별의 긴장

사회적 합의는 사안별로 산별노조가 주도해야


민주노총이 격론 끝에 26년 만에 국회가 주도하는 노사정기구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노동조합의 제1의 목적은 노동자의 권익보호이다. 이를 위해 노조는 정부와 자본에 대해 투쟁을 하고 투쟁의 결과물로서 타협을 한다. 즉 노조는 투쟁만 해서도 안 되고 타협만 해서도 안 되고 둘 다 해야 한다. 투쟁을 통해 교섭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기구나 노사정은 타협기구이니 투쟁을 통한 교섭력이 확보된다면 노동조합이 이에 참여할 수 있다. 반대로 투쟁을 통한 교섭력이 확보되지 못한다면 참여할 수 없다. 또한 사회적 합의기구에 참여한다고 해도 논의 주체를 총연맹이나 산별이 중심이 될 것인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총연맹과 산별 사이에 논의 주체에 대한 긴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사회적 합의는 투쟁력과 진보정당이 동력


사회적 합의 혹은 사회적 대타협은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이 발달한 유럽에서 노사정협력(코포라티즘)으로서 발전했다. 유럽의 노동조합은 산별노동조합 중심으로 규모면에서 단결력 측면에서 파업을 할 경우 경제 전반에 충격을 줄 정도로 투쟁력과 교섭력을 확보했다. 진보정당 역시 노동자 유권자를 기반으로 성장하여 단독집권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노동조합이 투쟁하면 진보정당이 투쟁의 요구를 원내에서 법제화하는 역할분담이 구조화됐다. 더 나아가 진보정당이 집권할 경우 노사정이 사회적 타협을 도출하고 법제화했다. 이러한 균형이 가능한 이유는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의 힘이 강력해 총자본이 어느 정도 양보했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은 집권하기 전에 노동조합과 협약을 맺어 집권 이후 노사정을 통해 협약을 이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진보정당이 노동자 표를 얻기 위해 집권 전에 장밋빛 약속을 하고 집권 이후 지키지 않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진보정당이 집권한 이후 경제적 충격을 고려하여 노동조합에게 임금동결, 파업 자제 등을 요구했다. 


진보정당이 갈수록 중간계층의 지지를 얻고자 노동조합에게 인내를 강요했다. 그럴수록 노동조합 내 불만이 높아지고, 일부 조합원들은 지도부에 맞서며 파업을 강행했다. 진보정당이 집권을 반복하면서 친노동자적 성격을  점차 포기하면서 노동조합은 사회적 합의가 노동조합에게 반드시 유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했다. 결국 노동조합은 특정 진보정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추진하는 기존의 방식을 점차 포기하게 됐다.



노조를 대변할 진보정당과 투쟁력이 없는 한국의 노사정


우선 각종 법제도에 따라 다양한 노사정기구들이 일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노사정기구들 중 노동위원회, 최저임금위원회 같은 구속력이 있는 기구들도 있고 법제화를 건의하는 자문기구들도 있다. 이러한 위원회에서 노사정 3자는 비록 동등한 인원을 배분받는다고 해도 한국의 현실에서 정부 측 위원들은 결국 자본 측 위원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한다. 즉 자본에게 아주 작은 양보를 촉구하면서 노사정이라는 계급화해를 강요하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를 흉내 내는 노사정 기구는 합의를 도출하고 법제도화를 건의하는 역할을 한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 민주노총이 참여하게 된 배경은 IMF로 인해 경제주권을 박탈당해 외국자본의 요구에 굴종해야 되는 국가적 상황,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겠다는 김대중 정권의 탄생, 한국노총 참여로 인한 위기감, 노동조합의 숙원사항 논의 필요성 등이었다. 


노동조합의 숙원사항은 공무원·교사의 노동기본권 보장,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 실업자 조합원 자격 인정,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를 보장하는 정치자금법 개정 등이었다. 반면 정부와 총자본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압박했다. 민주노총의 협상팀은 노사정 사회협약에 합의하였으나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찬성 54, 반대 184로 부결됐다. 사회협약에 민주노총이 요구한 사항이 일부 반영됐지만 정리해고, 근로자파견제이 포함되고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됐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사퇴하고 총파업을 결의했지만 결국 철회했다. 



한국에서 사회적 합의나 노사정의 가능성


사회적 합의, 혹은 사회적 합의 성격의 노사정위원회는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의 투쟁력이 약한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 즉 노동조합의 협상력이 부족한 반면, 정부와 총자본이 결국은 한통속이 돼서 노동조합에게 양보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노동조합을 대변해주는 강력한 원내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부 혹은 정당은 총자본의 입장을 대변할 뿐이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정부나 총자본의 양보를 얻어낼 정도의 투쟁력과 협상력이 부족하다. 일단 산별노동조합이 실질적으로 구성돼 있지 않기 때문에 투쟁의 주체가 강력하지 못하다. 총연맹이 투쟁한다고 하지만 경제 전반에 충격을 줄 정도의 파괴력이 없다. 


노동위원회, 최저임금위원회, 산재심사위원회 등 사안별 정부위원회도 일종의 노사정위원회이다. 다만 포괄적인 합의, 즉 계급화해를 강요하는 성격이 약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위원회도 기본적으로 정부위원과 기업위원이 협력하는 경우가 많아 노동조합에게 불리한 위원회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원하는 만큼의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장기적인 개선의 효과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저임금의 경우 아직도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물가인상율보다 최저임금 인상율이 높았다. 1989년 600원, 1999년 1,600원, 2009년 4,000원, 2019년 8,350원, 2026년 10,320원으로 인상돼왔다.



노사정 대신 노정교섭을 요구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


노사교섭은 노동관계법에 따라 단체행동에 따른 투쟁력을 기본으로 노사자율이 원칙이다. 노동계 일부는 총연맹이 총자본과 같은 자리에 앉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노정교섭만을 주장한다. 노동계 입장에선 일리가 있지만 국가는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으므로 노정교섭만으로 현안이 실질적으로 타결될 리가 없다. 정부 입장에선 노사 양측과 동시에 효율적으로 논의하려고 한다. 


노정교섭은 노사정교섭과 동등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공공부문은 정부가 사용자이므로 노정교섭이 가능하고, 정부정책에 대한 것도 노정교섭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본이 중요한 이해관계를 가지는 사안을 노정교섭으로 하자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이러한 주장은 노사정 논의를 거부하는 명분으로 활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조가 자본을 제치고 정부와 적절한 논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환상과 오해에 불과하다.


한국 현실에서 교섭력을 전제로 한 사회적 합의나 사회적 타협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런 목적으로 노사정도 마찬가지이다. 투쟁력으로 담보되지 않는 포괄적인 노사정협의는 계급화해와 노동조합의 양보를 강요해 노동조합 내 분열을 자초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노동조합은 한편으로 사안별 문제해결이라는 개선을 외면할 수 없다. 개선은 조합원의 요구이기도하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투쟁력을 높이는 조건에서 제한적으로 사안별로 노사정협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투쟁력을 전제로 한 사안별 노사정협의는 산별노동조합에서 담당할 수 있다. 지금까지 노사정참여 논쟁을 보면 노동조합이나 노조원들은 사안별로 노사정협의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포괄적인 합의기구에 대해 총연맹 집행부는 긍정적으로 접근하고 주요산별은 이에 반발해왔다. 


실질적인 투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산별이 사안별 노사정기구에 참여하고 총연맹은 이를 승인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총연맹 차원에서 법제화가 필요한 사항, 산별이나 총연맹이 협상에 나설 사항, 그러한 사항에 대한 실현전략 등이 미리 논의되고 합의돼야 한다.



정년연장과 4.5일제는 기업 규모보다 산업별로 접근해야


전체 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총연맹이 논의주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총연맹의 투쟁력의 토대나 실체가 산별노조라는 점에서 이 경우에도 총연맹의 이름으로 참여해도 산별노조가 논의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현재 조합원들은 노후자금과 국민연금 공백기간 때문에 정년연장을 원한다.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도 마찬가지이다. 조합원들은 이러한 근로조건 개선 사항에 대해 산별노조이든, 총연맹이든 법제도 개선 협상에 나서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즉 사안별로 사회적 합의에 대한 조합원의 요구는 존재한다. 


문제는 정년연장과 노동시간 단축을 법제화하는데 있어 총연맹 혹은 산별노조가 사회적 논의기구에 참여할지, 이런 법제화를 기업규모별로, 혹은 산업별로 순차적으로 도입할지이다. 현재 정년연장과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은 개별사업장에서 노사교섭에 의해 일부 도입되고 있다.


투쟁을 담보로 한 조합원의 요구 관철이라는 점에서 정년연장과 4.5일제는 기업 규모보다는 산업별로 순차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노동조합에 유리하다. 근로조건이 유리한 공공기관, 투쟁력이 담보되는 산업에 먼저 도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해 사안별 노사정협의기구가 생긴다면 산별노조가 참여하는 것이 노조의 투쟁력을 활용하고 총연맹과 산별의 긴장도 완화하는 방법이다.



법제화 논의기구도 사안별로 돌파하는 것이 유리


이번 노사정기구의 특징은 법제도를 마련하는 국회가 주도한다는 것이다. 즉 입법화에 좀 더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노사정기구라는 점에서 총연맹이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문제는 국회에 총연맹을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면 이러한 포괄적인 노사정기구는 계급화해와 노동조합의 양보를 강요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재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은 아무리 좋게 봐도 착한 척 하는 자본가정당일 뿐 노동조합을 대변하지 않는다. 대기업이 지배하는 총자본이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를 핑계로 정부와 민주당을 압박할 경우 노사정협의기구에서 노조는 불리한 구조에 놓인다. 최근 정창래 민주당 대표가 상공인연합회와 간단담회를 진행하면서 이미 통과된 노동법에 대해 "5인 미만 사업장에 노동법을 적용하는 것을 유예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노조의 당면한 요구만을 다루는 사안별기구 참여 수준을 넘어선 계급타협 기구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이미 총연맹이 참여를 결정한 상황에서 해당 사안에 당면한 요구를 지니고 실현가능성이 있는 산별노조 중심으로 참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비록 포괄적 기구이지만 사안별 논의로 제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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