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과 분열의 주체 정파 문제

 정파에 점령당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정파는 크게 자주계열과 평등계열로 구분되는데, 이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 대한 당원들과 조합원들의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자주계열 중 구 전국연합계열이 가장 큰 규모였으며 이들은 주로 경기, 인천, 부산울산경남 등 지역별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각각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등 부문조직에 진출해 있었다. 이들 지역조직의 대표자들이 민주노동당 내에서 부정기적 협의를 통해 현안에 대응하였으며, 노동계에서는 전국회의에 주로 밀집되었고, 2006년 이후에는 당과 노동계의 구 전국연합 계열이 ‘전국모임’이라는 협의기구를 구성하여 정기적으로 회동하였다. 이들 자주계열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민중연대 등에서 평등계열을 견제해왔다. 

평등계열의 경우 다함께와 평등연대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서 정파조직으로서 존재했고, 나머지는 과거의 정치조직 출신별로 인적 네트워크에 머물렀으나 2004년 이후 자주계열에 대항하기 위해 전진, 혁신네트워크, 자율과 연대 등이 결성되었다. 민주노동당 평등계열 중 어느 정파도 특정지역을 지배할 수 있는 조직력이 없었으며, 이들은 연대하여 서울 등 일부지역에서 자주계열에 대한 우위를 유지했을 뿐이다. 

민주노총의 정파는 지역별 현장 조직이 합종연횡을 통해 전국적인 현장조직으로 발전한 형태와 민주노총 선거에 공동 대응하는 협의체에서 발전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민주노총 정파는 현대자동차 등 대규모 사업장에 있는 현장조직, 산업별연맹과 총연맹 차원의 인적네트워크, 전국적 차원의 소수 정파 등이 있으며, 이들은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국민파에는 전국회의, 현장실천연대, 노동운동전략연구회(노연)가 있었다. 

자주․민주․통일(자민통)을 표방한 현장 활동가들이 1999년 2월 금속산업연맹 선거를 거치면서 그간의 개별적이고 사업별 교류 수준이었던 연대의 틀을 넘어 2001년 ‘민주노동자전국회의(전국회의)’라는 전국적 단일조직을 건설하게 된다. 전국회의는 자주계열의 현장조직이었으나 전국연합을 중심으로 한 패권주의적 운영에 반발하여 현장실천연대가 2006년 10월 13일 추진모임을 결성하고 2년간의 활동을 거쳐 2008년 5월31일 발족하였다. 민주노총 내 선거 대응을 논의하던 산별연맹 위원장 이외에 주요 임원과 노동조합 상근 활동가들이 2002년 2월 모임의 명칭을 ‘노동운동전략연구회’로 공식화하고 기획단 중심의 모임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2003년 12월 평등회의와 민주노동당 내 서울을 근거지로 한 당내 소장파 그룹인 화요모임과 구 진정추 일부가 중심이 되어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전진)가 결성되었다. 전진은 2003년 11월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에서 당발전특별위원회 보고서 논란을 계기로 2004년 총선 비례대표후보 경선과 지도부 경선을 대응하고자 하였다. 전진은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 과정에서 다수가 진보신당으로 이전하였지만 일부는 탈당한 이후에도 진보신당에 결합하지 않았다. 전진은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기존의 활동가 조직의 성격이 탈각되면서 해산하기에 이른다. 현장노동자회는 전진의 해산과 더불어 금속 노조 중심으로 한 중앙파의 활동가 조직으로 2009년 2월 창립하기에 이른다. 

사회진보연대와 ‘노동자의 힘’ 및 메이데이 포럼 등 좌파들이 모인 현장파는 주로 민주노동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에 참여하는 다함께나 평등연대가 좌파로서 현장파로 분류되는 것에서 보듯이 현장파는 단일정파가 아니라 경향성이다(진숙경, 2008). 1997년 3월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결성되어 2008년 4월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전선’으로 이어진다. 1999년 8월 노동자의 힘이 결성되었으며 이것이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2008년 10월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약칭 사노준)로 이어진다. 



(1)  담합에 의한 의사결정과 선출의 왜곡


다양한 정파들은 크게 자주계열과 평등계열로 구분되어 협의체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경쟁하면서도 때로는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담합하기도 하였다. 국민파, 중앙파, 평등연대, 다함께 등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모두에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 조직의 선거와 의사결정과정에서 정파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는 여러 정파들이 후보등록 전에 합종연횡으로 후보들을 조율하여 지위를 나눠 갖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민주노동당에서 2004년 비례대표 후보경선이 당원직선제로 치러졌는데 단병호, 심상정 등 민주노총 주요 간부들이 출마하면서 민주노동당은 물론 민주노총의 정파들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면서 당원들을 상대로 전국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하였다. 2004년 총선 직후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자주계열과 중앙파는 김혜경 부대표를 당 대표로 추대하였으나 사무총장은 자주계열이 정책위원회 위원장은 평등계열이 승리하였다. 이후에도 자주계열은 정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인물을 당 대표로 영입하는 한편 자신들이 총장이나 정책위원장을 맡으면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2006년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자주계열은 중도성향의 문성현을 당 대표 후보로 지지하여 평등계열의 조승수 후보를 낙선시켰으며, 이때부터 자주계열의 우세가 고착화되었다. 2008년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자주계열은 구 전국연합 계열과 이에 비판적인 세력들로 양분되었는데, 구 전국연합 계열들이 강기갑 의원을 지지하여 민주노동당 혁신을 주창했던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의 이수호를 낙선시켰고 2010년 최고위원회 선거에서는 강기갑 대표 대신 이정희 의원을 당대표로 지지하였다.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는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의 3파전 구도로 치러지거나 아니면 국민파, 중앙파와 현장파의 연합구도로 치러졌다. 권영길 초대위원장은 3개의 거대정파가 정립되기 전에 1995년 11월 단일후보로 추대되었다. 1998년 3월 현장파인 이갑용 제2기 위원장은 중앙파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민파의 정갑득 후보를 이기고 당선되었다. 중앙파인 단병호 위원장은 1999년 9월 단일후보로 제2기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이어 2001년 1월 현장파의 지지를 얻어 국민파의 정갑득 후보와 현장파의 유덕상 후보를 이기고 3기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2004년 1월 국민파인 이수호 후보가 중앙파와 현장파가 추대한 유덕상을 이기고 제4기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2006년 2월 국민파의 조준호 위원장이 중앙파와 현장파 일부의 지지를 얻은 김창근을 이기고 제4기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07년 1월 국민파의 이석행 후보가 중앙파의 양경규와 현장파의 조희주 후보를 이기고 제5기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2009년 4월 중앙파의 임성규가 제5기 보궐선거에서 단일후보로 추대되었다. 2010년 1월 국민파의 김영훈이 현장파의 허영구를 이기고 제6기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지도부 선거에서 정파담합이 관례화됨으로써 개인적인 역량과 대중적 인지도를 지녔더라도 정파에 소속되지 않거나 정파의 지지를 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지도부에 진출할 수 없었다. 정파는 양 조직의 지도부 선거 이외에도 각종 간부의 선거까지 개입하였다. 정파의 공천권이 정치적 진출과 간부당선이 보장되는 왜곡을 낳았다. 정파에 소속된 간부들은 일반 당원과 조합원들에게 자기 정파의 후보를 지지하도록 종용하거나 유도하였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에서 각 정파들은 회의 전에 미리 자신들의 입장을 정하고 자신들에게 속한 대의원들이 정파 방침에 따라 투표하도록 강요하였다. 실제로 정파에 소속된 대의원들은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여 대의원대회에 반영하기 보다는 정파의 입장을 자기 현장에 전파하고, 대의원대회에 반영하였다. 따라서 대의원대회는 토론과 조정을 통해 의사를 실질적으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파대립구도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정파대립구도 때문에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내에서 하나의 조직으로서 활동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민주노동당의 정치방침에 통일적인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이를테면 2011년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묻는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 방침은 부결이었지만 민주노총에 할당된 대의원들 중 상당수가 찬성하였다.

중앙위원, 대의원 할당제는 당의 노동자중심성을 갖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으나 민주노총은 할당 대의원에 대한 통제권을 갖지 못한 채 개개인의 결정에 맡겼다. 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은 이들 대의원들이 노동자들의 요구에 기반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당내 정파들에게 휘둘리게 방치하였다. 민주노동당 중앙대의원대회나 중앙위원회에 민주노총 출신이 할당을 포함하여 30-40%를 유지하였지만 이들이 민주노총의 방침에 항상 따른 것은 아니다. 



(2) 공조직의 부실화와 대체화


정파는 자신의 활동가와 구성원들에게 공조직의 관점보다는 정파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하거나 선거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으며, 심지어 대중투쟁과 같은 실천 활동도 정파적 관점에서 기획하여 결합하거나 경우에 따라 소극적으로 임하였다. 그 결과 활동가와 구성원들은 공조직보다 정파를 더 우선시하게 되었고 당의 관료들과 주요 지역조직들이 당 중앙의 지도와 통제보다는 특정 정파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는 공조직이 부실화되고 정파에 의해 대체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지역과 단위 노조 등 양 조직의 말단에까지 만연되어 현장에서의 단결을 저해함으로써 양 조직의 실천력을 크게 훼손하였다. 이에 따라 정파는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노력하고 현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아 노조의 조직력을 추락시키고 붕괴시키고 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일부 지역조직은 특정 정파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되었다. 경기, 울산, 인천 등에서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민주노총 지역본부 지도부 간에 정파가 다를 경우 양자 간에 긴장이 조성되고 의사소통이 단절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정파연합적 구조와 노조 조직 간의 긴장이 조성되어 지역의 당 조직은 노조의 당 결합을 부담스러워했고, 노조는 당의 지역 활동에 결합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그 결과 양자는 서로 결합하기보다는 회피하는 퇴행적 모습을 보였다. 민주노동당 정파들은 대중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켰으며 중앙과 지역의 선거에 있어 정파담합을 반복함으로써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민주노총의 간부가 당의 간부로 당선되는 것을 차단하였다(이수봉, 2008).

다수파는 이러한 방식으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의사결정과 선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수파의 폐해는 패권주의로 나타났는데, 패권주의의 어두운 측면은 명망가의 제도권 진출이라는 출세주의와 그 동원전략으로서 활동가를 정파에 종속시키는 정파대립, 대중들을 장악하는 노선투쟁이었다. 특히 다수파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공조직의 성과를 사유화하였기 때문에 권력을 독점한 다수파는 더 많은 제도적 성과를 얻기 위해 기존 제도 내에 편입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이는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정파구도가 현장에게까지 파급됨으로써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간부들도 재선되기 위해서 혹은 현장에서 대중들을 장악하려면 정파에 의존해야 하였다. 상당수 간부들은 정파의 파견 관료 혹은 정파의 대리인으로 전락하여 공조직 중심의 사고와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정파권력의 재창출 도구로 전락한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혁신, 집단지도체제와 공동집행부의 구성, 상근인력의 순환, 정무직과 전문직의 역할 구분, 정파 파견관료 퇴출 등이 제기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하부영, 2009).



(3) 자정능력의 상실


정파의 폐해를 자주 목격하는 상급노조간부일수록 정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였다. 2004년 10월 민주노총 간부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정파문제가 없다는 응답은 13.7%인 반면에  문제가 있다는 응답은 63.7%이다. 2007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정파갈등이나 조직 내 갈등의 주요 원인에 대해서 ‘의사소통의 결여가 42.2%로 가장 많고 ’가치와 목표에 대한 인식 차이‘ 39.8%, 활동 방법상의 차이’ 29.7%, 집행 권력을 둘러싼 경쟁관계가 24.2%로 지적되었다(김태현, 2012). 

이러한 정파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이미 정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민주노총 활동가들은 정파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2005년 4월 29일 민주노총 조직혁신위원회가 주최한 ‘노동조합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서 이0수 조합원은 “정파조직이 자기의 의견을 대중조직을 통해서 실현하고 대중조직은 그런 의견을 받아서 자기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정도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의견그룹의 역할을 정리하면서 “이것은 우리 운동이 건강하게 가기 위해서 필요하다”라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0우 조합원은 “의견그룹이 노선과 실천을 명확히 드러내고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가지고 투명하게 대중 속의 활동을 통하여 평가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0호 조합원은 “의견그룹은 건강한 활동가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노동운동의 발전적인 토론과 대안 모색에도 기여할 수 있으며, 다만 과거의 운동에서 나타났던 방식의 의견그룹을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대중운동의 상황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파에 소속된 민주노총 활동가들 역시 정파의 폐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3월 12일 개최된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대토론회’에 참여한 전진의 한석호 집행위원장은 "정파들의 고민은 상대방을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로 변질돼 갔고, 중앙위나 대의원대회에선 쪽수 밀어붙이기와 퇴장하기가 일반화되었다"면서 "민주노총은 어떤 정파가 집행부를 구성하든 다른 정파들이 함께 힘을 합치지 않으면 어떤 혁신도 할 수 없으며 정파 간 소통과 타협으로 통합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전국회의 이승우 부의장은 "우리 스스로 선거에만 골몰하는 집단으로 전락한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밝혔다. 혁신연대 조형일 집행위원은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를 지적하면서 "운동역량이 과잉 투자됨으로써 실제 중요한 현장사업이나 외부사업들은 뒷전에 처지게 되고 역량의 배치도 왜곡됨으로써 운동전체에 마이너스 효과가 발생한다"고 지적하였다.

2011년 8월 31일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주최의 노동운동 평가대안포럼에서도 주요 정파 관계자들은 ‘패거리 운동’이나 ‘선거용 조직’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는 정파운동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2012년 ‘노동운동과 정파,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에서 전진 출신의 한석호는 “정파가 대중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면서 정파가 내세운 후보가 조직의 위원장이 되면, 위원장이 아닌 정파의 수장으로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상황에서 공조직(노조)은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하였다.

정파 활동가들은 정파가 스스로의 폐해를 청산하는 자정능력을 강조하였다. 2009년 민주노총 대의원 및 단위노조 대표자들의 수련회에서 다수의 참여자들은 정파 해체보다는 토론 문화를 통한 조직 내 민주주의와 실현, 상호협상과 견제, 신뢰 회복과 책임 있는 집행 등 대안을 제시하였다(김태현, 2012). 하지만 현실의 정파대립구도에서 정파는 조직논리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정능력이 작동될 수 있는 책임정치가 실종되었다. 정파들은 자신들이 추대한 지도부나 간부가 과오를 저질러도 이를 인정할 경우 다음 선거에서 경쟁정파에게 권력을 내주어야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파들은 선거승리를 모든 잘못을 면책 받고 권력을 다시 승인받는 정당성 획득으로 간주하였다. 정파의 지도부와 관료들은 조직운영과 정책수립에 있어 과오가 있더라도 정파대립구도를 방패로 삼았다. 따라서 거대정파가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선거를 통해 지속적으로 권력을 과점하였다. 통상 선거 결과는 민심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선거참여자는 선거의 결과를 수용하고 그 결과 선거는 당분간 갈등이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 마련인데, 정파선거에서는 그 결과에 대해 세력싸움에서 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거 결과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정파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대중적 지도력을 정립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스스로 정파대립구도를 해소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 초대위원장과 민주노동당 초대 대표를 맡은 권영길 정도만이 정파를 통제할 수 있는 대중적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권영길 역시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심상정, 노회찬과 경쟁하면서 정파에 의존하였고, 2011년 국민참여당과의 통합과정에서는 정파에 대한 지도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주역이자 민주노총의 주력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고령화현상도 민주노총이 새로운 활동가들을 양산해 내지 못하고 과거의 정파에 갇혀 활력을 잃어가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1998년과 2009년에 실시된 민주노총조합원 생활실태조사 결과를 비교해 보면 민주노총 조합원은 고령화되고 있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근로조건과 생활수준의 차이로 인해 조합의 균일성이 저해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민주노총, 1999b : 민주노총, 2010). 특히 정파의 주요활동가들은 위장취업을 불사하면서 노동운동을 20여년 이상 해왔으나 민주노총과 함께 기득권층으로 바꿨다(민주노동당, 2009b). 무엇보다 명망가와 활동가에 의해 지배당하는 대중들은 자주적인 정치주체로 나서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자발적인 투쟁역량까지 소진되었다.



(4) 정파구조로 인한 통합 리더십의 약화


민주노동당 대표 권영길, 김혜경, 문성현, 강기갑, 이정희 중 정파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리더십으로 당 대표에 오른 이는 권영길 뿐이다. 권영길은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으로서 1996년과 1997년 투쟁을 이끌었고, 1997년 민주노총이 주도한 민주노동당의 전신 ‘국민승리21’의 대통령후보를 역임하였으며,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하여 초대 당대표가 되어 민주노동당이 2004년 원내에 진출할 때까지 대표로 있었다. 권영길 대표는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지를 기반으로 민주노동당 내 다양한 정파를 아우르며 정파 간 갈등을 조정하였다. 권영길 대표가 정파에 휘둘리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보다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으로서 민주노총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당내 지도력을 견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2004년 총선까지는 자주계열의 상당수가 아직 입당을 하지 않아 민주노동당 정파구도가 평등계열에 기울어져 있어 정파 간 대립이 격화되지 않은 점도 있다. 

권영길 대표의 정파에 대한 리더십은 두 차례 위기를 겪으면서 점차 붕괴되었다. 2004년 총선 직후 국회의원은 당 지도부인 최고위원회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하는 ‘당직공직겸직금지당규’가 중앙위원회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권영길 의원이 직접 토론자로 나서 반대를 호소하였으나 애초에 이 당규에 찬성하였던 평등계열뿐만 아니라 일부 자주계열도 이 당규에 찬성함으로써 권영길 의원은 당대표에 출마할 수 없었다. 이는 당의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출마하여 전사한 당 내 주요활동가들이 국회의원과 당 지도부 모두를 겸직하고자 하였던 권영길, 천영세, 노회찬, 최순영 의원 등 전직 지도부에 대한 일종의 항의를 한 것이었다.

권영길 의원은 1997년과 2002년에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3% 이하의 저조한 결과를 얻었으나 2007년 민주노동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다시 출마하였다. 권영길 의원이 대선 3수를 한 것은 본인과 측근의 의지도 있었지만 원내 진출 이후 대중적 인기를 얻은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워 평등계열을 견제하려는 자주계열의 추대가 크게 작용하였다. 권영길 의원은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을 누르고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로 나섰으나 또다시 3% 이하의 성적을 거두는데 그쳤다. 2007년 대선 이후 권영길은 평등계열에 의해 자주계열에 경도되어 있는 것으로 비판을 받고 대선 패배의 책임론이 분당으로 이어지면서 과거 정파를 포괄하였던 리더십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 

권영길 의원은 대선 이후 2008년 총선에서 창원에서 재선하였으나 리더십은 회복되지 않았다. 2011년 가을 임시당대회에서 자주계열이 지배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추진하는 안건을 올리자 권영길 의원은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과 함께 반대 토론자로 나섰으나 민주노동당 주요 정파 대의원들의 야유를 받는 등 수모를 당하였고, 통합진보당 창당 이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였다. 

권영길 의원의 대국민이미지는 민주노총 위원장이라는 투사형보다는 전국으로 생중계된 대선후보 토론에서 형성되었는데, 서글서글한 인상에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라는 말을 회자시키며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주장하는 온건한 정책형으로 인식되었다.

김혜경은 민주노동당의 자주계열과 다수의 평등계열 그리고 민주노총의 국민파와 중앙파 등 주요 정파의 추대에 의해 2004년 총선 직후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김혜경은 대표는 자주계열과 평등계열의 갈등 속에서 완충적인 역할을 자임하였다. 2005년 10월 울산북구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나선 정갑득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이 패배하자, 평등계열은 최고위원회 총사퇴를 주장하고 자주계열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김혜경 대표는 최고위원회에서 최종 합의가 나오기 전에 전격적으로 사퇴하였다. 

문성현은 단병호, 심상정과 함께 민주노총 내에서 평등계열로 분류되었으나 2006년 자주계열의 추대에 의해 당 대표 경선에 나와 평등계열이 지지한 조승수 전 의원을 누르고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문성현 대표는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을 지휘하였으나 후보경선 과정과 선거운동 과정에서 자주계열과 평등계열의 대결을 조정하지 못하엿고 결국 대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은 분당으로 이어졌다. 

김혜경 대표와 문성현 대표는 국회의원 출신이 아니고 대통령후보도 역임하지 않았으며, 중앙정치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대국민적 인지도가 낮았으며, 당원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정파와 경쟁할만한 리더십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정치인의 경우 국회의원조차도 국민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원외 정치인은 비록 당 대표라고 해도 대국민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았다.    

강기갑 대표는 전농이 2004년 총선 직전 민주노동당에 조직적으로 입당할 때 전농부위원장의 자격으로 농민 대표로서 비례대표의원에 당선되었다. 강기갑 의원은 항상 한복 차림에 국회 안팎에서 진행되는 쌀개방 반대 투쟁이나 한미FTA반대 투쟁에 적극 참여하면서 농민을 대변하였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의원들이 모두 2008년 총선에서 낙마하고, 진보신당으로 당적을 바꾼 인기정치인 심상정 노회찬 의원도 국회 재입성에 실패한 가운데 강기갑 의원은 여권의 분열에 힘입어 경남 사천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강기갑 의원은 2008년 4월부터 촉발된 촛불집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달프’라는 별명과 함께 대중정치인으로 부상하였다. 그 당시 민주노동당은 분당 이후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혁신파가 ‘혁신재창당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당의 혁신과 재창당을 천명하면서 구 전국연합 계열과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수호 전 위원장이 혁신을 기치로 당 대표에 출마하자, 구 전국연합 계열은 대항마를 찾았고 내부의 인물이 적절하지 않자 당 대표 출마의 뜻을 지니고 있던 강기갑 의원을 추대하여 당선시켰다. 강기갑 의원은 2008-2010년 당 대표를 역임하는 동안 국회 안팎에서 민주노동당의 투쟁을 지휘하면서 ‘공중부양’ 비판에 휘말리는 등 강경한 투사형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강기갑 대표는 비록 구 전국연합의 지지로 대표가 되었으나 구 전국연합의 지도부와 달리 진보대통합에 적극적이었으며 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하였다. 구 전국연합은 2010년 당 대표 선거에서 강기갑 대표를 다시 추대하지 않고 자신들의 노선에 좀 더 부합하는 이정희 의원을 당 대표로 추대하였다. 강기갑 의원은 통합진보당이 2012년 총선 직후 5월 분열 사태에 직면하였을 때 구 전국연합 계열에 맞서는 측에 가담하여 7월 당 대표에 당선되었으나 구 전국연합 계열이 지도부 구성에 협조하지 않자 탈당하는 등 심상정, 유시민과 함께 통합진보당 분당사태를 주도하였다.

이정희 당 대표는 원래 민주노동당에 결합하지 않았으나 변호사로서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공동대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미군문제연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2008년 분당 이후 자주계열에 의해 비례대표 의원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구 전국연합 계열이 당권을 장악한 강기갑 대표 체제에서 정책위원장을 역임하다가 구 전국연합 계열에 의해 2010년 당 대표에 추대되어 선출되었다. 이후 이정희 대표는 진보신당과의 통합에 소극적이었으나 구 전국연합 계열과 함께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적극 나서 당내 분란과 민주노총과의 갈등, 진보대통합 원탁회의 내 논란에 일조하였다. 

통합진보당 창당 이후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 유시민 전 국민참여당 대표, 조준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등과 공동대표를 역임하였고 관악에서 출마하였으나 야권후보단일화를 위한 전화여론조사에서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답변을 허위로 하였다는 논란에 휩싸여 국회의원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이정희 대표는 2012년 5월 통합진보당 분열 사태 당시 구 전국연합 계열의 입장을 대변하다가 5월 12일 중앙위원회 폭력사태 직전에 중앙위원회 의장직까지 사임하여 의장직은 심상정 의원에게 넘어갔고 그 이후 중앙위원회는 폭력사태로 중단되었다. 이정희 의원은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 다시 구 전국연합이 당권을 장악한 이후 당 대표와 대통령후보에 선출되었다. 이정희 대표는 대통령 후보로서 박근혜, 문재인 등과 함께 2차례 TV 토론을 하였으나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등 시종일관 박근혜 후보를 공격하였다. 이정희 후보는 마지막 토론을 앞두고 정권교체를 위해 후보직을 전격적으로 사퇴하였으나 이후 야당이 정권교체에 실패하자 대선패배에 대한 책임 논란에 휩싸였다. 이정희 대표는 대선 이후에도 구 전국연합 계열에 의해 당 대표에 추대 선출되었으나 자신이 주도했던 국민참여당과의 진보대통합 실패, 통합진보당 분당, 대선 패배 등에 부담을 느끼고 지도부 사퇴 등을 고려하였으나 구 전국연합 계열의 만류로 통합진보당이 해산될 때까지 당 대표로 남았다.

이정희 대표는 2012년 대선 전까지는 야당과 야당 지지자들로부터 서울대 법대 출신의 엘리트가 좌파정당이라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다는 온정적인 이미지, 참신한 이미지를 얻고 있었고, 민주노동당 역시 야권연대, 진보대통합, 대국민 홍보 차원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2012년 총선 당시 출마지역구에서 여론조사 조작 시비, 통합진보당 분당 과정에서 일부 훼손되었고, 대선과정에서 박근혜 후보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과 완고한 자기논리를 표출함으로써 경직적인 이미지로 전환되었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당 대표직을 유지하였지만 대선후보 TV토론 당시 박근혜 후보에게 지나치게 경직적인 모습이 부각됨으로써 박근혜 대 문재인의 구도가 모호해졌다는 야당과 야당 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한 당내 거대정파의 지도자인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선동사건 이후 통합진보당의 대국민이미지가 추락하면서 이정희 대표의 대국민이미지 역시 더욱 악화되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권력구조는 당 대표와 실권을 쥐고 있는 사무총장의 쌍두마차였으나 이들은 선거에서 파트너가 아니라 각각 선출되어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에 근거하였다.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노회찬, 김창현, 김선동, 오병윤, 장원섭 등이었는데, 이들은 당의 재정과 조직 및 인사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였으며 당의 주요결정을 담당하는 최고위원회, 중앙위원회, 당대회의 안건을 성안하였고, 주요 안건에 대해 주요정파들과 사전에 의견을 조율하는 등 당의 의사결정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노회찬 사무총장은 넓게 보아 평등계열이나 사실상 이렇다 할 정파의 지지를 받지 않았으며, 그의 리더십은 오랜 좌파정당 활동의 경험과 대중정치인으로서 탁월한 개인적 역량에 근거하였고 2004년 당내 비례대표 의원 선거에서의 당선 역시 그 연장선이었다. 2004년 원내 진출 이후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권영길은 물론 민주노총 중앙파를 중심으로 한 주요 평등계열의 조직적 지지를 받은 심상정 의원에게도 패배하여 3위에 머무르는 등 조직 기반의 허약함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노회찬 의원은 이후에도 자신의 개인적 인기와 야권연대에 힘입어 3선을 하였다.

노회찬 총장을 제외하면 김창현, 김선동, 오병윤, 장원섭 총장은 구 전국연합의 계열이었으며, 특히 김창현 총장을 제외하면 모두 광주전남 출신으로서 경기출신들과 조직적 연대를 통해 당권을 장악하였던 실세들이었다. 실세 총장과 당 대표간의 알력은 항상 잠재되었으나 김선동 사무총장 이후 더욱 심화되었으며, 민주노동당이 분당되어 권력이 자주계열로 넘어간 이후인 강기갑, 이정희 대표 시절에는 당의 실권이 당 대표가 아닌 오병윤, 장원섭 등 사무총장에게 있었다. 

이정희 대표는 당내 독자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정파에 의해 국회의원, 당 대표에 발탁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리더십을 장원섭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한 정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통합진보당 분당과 대선 이후 통합진보당의 지지율이 계속 하락하는 상황에서 구 전국연합 계열은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이정희 대표를 계속 지지하였지만 통합진보당의 전망과 이정희 대표의 역할에 있어 구 전국연합과 이정희 대표 간에 미묘한 긴장이 형성되었다, 김혜경, 문성현, 강기갑 대표의 사례에서 보듯이 대중적 기반이 약한 당 대표들은 초반에 정파에 의존하나 점차 당대표의 위상을 정립하는 가운데 사무총장 등 정파의 지도자들과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정희 대표와 구 전국연합도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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