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의 영국 프랑스 독일에 대한 특수성(조로화의 원인)

국지적 냉전과 분단 고착으로 인한 국민국가의 미완성

(1) 민중정당으로서 출발과 의회주의 몰입

서구의 좌파정당은 1차 대전 전후의 민중정당화와 2차 대전 이후 국민정당화를 거쳐 1990년 이후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는데, 민주노동당은 창당 10여년 만에 국민정당적 성격을 드러내었고,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정당과 통합하였다. 민주노동당이 서구의 좌파정당과 달리 노동자정당이 아닌 민중정당으로 출범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의 우경화는 매우 빨리 진행되었다.

독일사민당과 프랑스사회당 및 영국노동당은 창당 당시 민주노동당과 달리 사회주의 노선을 명확히 하였다. 이 정당들은 이념지향적인 중앙지도부가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이념으로 포섭하고 조직화함으로써 처음부터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의회진출을 지향한 합법정당이었다. 

이들 좌파정당은 노동자정당으로 출발하였지만 점차 노동자 이외에 농민이나 사무직 등 다양한 일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자 민중정당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사민당은 1921년 괴를리찌 대회에서 사민당은 도시와 농촌에서 노동하는 ‘민중의 정당’임을 천명하게 된다. 사민당과 같은 서구의 노동자정당이 주장하는 민중정당은 보수정당이 주장하는 국민정당과 다른 것이었으나, 노동자정당의 우경화로 인해 2차 대전 이후에는 민중정당은 갈수록 국민정당화되었다. 

프랑스의 좌파정당 역시 창당 당시에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정당의 성격을 지녔다. 1905년 프랑스의 통합사회당은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선거에 치중하는 개량주의를 주장하는 다양한 집단의 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사회주의정당, 노동자정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장 조레스와 바이양은 이러한 입장을 ‘혁명적 개혁주의’, ‘혁명적 진화론’ 등의 용어로 설명하였다. 조레스는 특히 노동자가 공화국에 참가하여 국가권력을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통합사회당은 급진당의 사회개혁법안에 조건부 지지입장을 보였으며 부르주아 정당과의 제휴는 피하였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독일사민당, 영국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당과 달리 처음부터 사회주의 노선을 명확히 하지 않고 다양한 계층을 포괄한 민중정당이었는데, 이는 민주노동당 창당의 역사적 조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식민지와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제3세계의 경우 부르주아민주주의 보장과 국민국가 달성이 동시대적 과제로 나타날 때 민족민주혁명 혹은 민족민주전선이 사회주의 정당의 발현 양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민주노동당은 창당 때부터 체제변혁을 지향하는 강도가 서구의 좌파정당 창당 당시보다 약하였고 창당 주체 역시 노동자 이외에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였다.

한국은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배한 후 자신의 힘이 아니라 연합군에 의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다시 미소에 의해 분단되고 동족간의 이념전쟁을 치렀으며, 전쟁 이후에도 1987년 민주화까지 군부독재 아래에 있었고 지금까지도 냉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오늘날 한국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경제사회 영역이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영역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장귀연(2002)은 이러한 한국적 특성에 주목하여 한국은 정치영역이 시민사회영역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탈구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탈구현상의 내면에는 분단과 이념대립으로 인한 반공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으며, 지배세력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용인할 수 없는 좌경화로 보고 있다. 정진상(2005)에 따르면 1987년 민주화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가 약화되어 노동계급 형성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었지만, 반공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노동운동이 노동자 정치운동으로 나아가는 데에 장애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한계로 인해 노동자들은 한편으로는 지배세력의 탄압으로 인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와 연대하여 자신의 생존권을 보장받거나 외세와 지배세력에 저항하여 분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다른 계층들의 요구에 의하여 자신의 정치세력화를 노동자정당보다는 좀 더 폭넓은 민중정당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결국 한국의 탈구현상으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임현진(2009)이 지적하듯이 노동자정당보다는 민중정당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불완전한 민주주의, 분단, 냉전의 잔존, 노동자의 좌경화에 대한 탄압, 보수정당의 기득권 등 한국적 상황은 좌파정당의 출현을 지연시켰다. 장귀연(2002) 역시 탈구현상에 의해 좌파정당이 늦게 출현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김수진(2008) 등 다수의 학자들이 1987년 민주화 이후 계급정치가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로 반공주의와 보수독점체제를 들고 있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합법적인 사회주의정당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해방 직후와 4.19혁명, 1987년 민주화 기간 동안 사회주의세력 중 일부는 ‘대중적 진보정당’이라는 민중정당을 시도하였으나 국가의 탄압과 기존 보수정당의 담합구조에 의해 제도권 진입이 차단되었고, 창당에 이른 경우도 노동조합의 정치세력화 금지, 소선거구제 등 각종 진입장벽에 의해 원내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서구에서는 시민들의 기본권 쟁취투쟁과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투쟁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좌파정당의 창당에 강력한 원동력을 제공하였다(이수봉, 2008). 한국에서도 1987년 6월 민주화투쟁과 7월 노동자투쟁이 결합되어 노동자정당의 출현으로 나타났다면 노동자정당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은 큰 진전을 이루었지만 노동자들은 시민운동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정치참여의 자유를 쟁취하지 못하였다. 반면 2001년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1997년 노동법개악반대투쟁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그 당시 조직결성의 자유, 선거권, 민주적 기본권이 이미 주어진 상태에서 창당했기 때문에 서유럽의 좌파정당과 달리 창당과정이 노조 이외의 반체제세력의 제도화 투쟁과 결합될 기회가 없었다.

민주노총의 투쟁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정치세력화가 합법화되고 정당명부제가 일부 시행됨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이르러 사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노동자정당이 가능하였지만 민주노총은 노동자정당이 아니라 다양한 민중들과 함께 민중정당을 창당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노동자 이외에도 농민, 빈민, 학생, 통일운동 인사 등이 결합하여 민중정당 성격을 지녔다. 

민주노동당 창당강령은 서구 초창기 사회주의정당과 마찬가지로 총론과 이념에서는 사회변혁을 선언했지만 각론과 실천에서는 체제개선을 도모하였다고 불 수 있다. 서구 좌파정당이 선언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노동자정당 정체성을 강령에 채택하였지만 민주노동당의 경우 창당강령에 노동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피지배계층을 당의 기반으로 선언하였으며, 사회주의적 이상과 가치를 강조하였지만 사회주의 자체를 적극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부터 노동자정당 변혁정당이라기보다 민중정당, 체제개선 정당의 성격이 강하였다.

민중정당으로 출발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정당으로 출발한 서구의 좌파정당들보다 더 빠르게 정당제도와 선거제도에 의존하면서 제도 권력에 참여하려는 의회주의성향을 강화시켰다. 불완전한 민주주의, 분단, 대외의존성을 극복하고 국민국가를 완성하려는 당내외 열망은 이러한 열망을 원내 의석확대와 국가권력 참여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일정부분 정당화시켰다. 이를테면 민족주의적 경향의 자주계열들은 민주노동당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의 주요정당으로 성장하기도 전에 야권연대와 후보단일화 및 연립정부를 통해 소선거구다수득표제의 양당제를 돌파하고 자주와 민주 및 통일의 과제를 조속히 해결하겠다고 공언하였으며, 그러한 명분 아래 노동계급의 기반을 확고히 하지 않은 채 다수득표를 위해 우경화로 나아갔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은 강령의 변혁적 성격의 완화와 선거몰입을 통해 서구의 노동자정당보다 더 빠르게 국민정당화로 나아갔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때부터 사회주의 색채를 두고 논쟁을 치렀으며 2011년 강령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을 삭제하고 성격이 모호한 개량적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한편, 다른 좌파정당과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을 무릅쓰고 신자유주의 도입 세력인 국민참여당까지 포함하는 진보대통합을 추진하면서 국민정당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한국사회가 급속히 후기산업사회와 저출산고령화사회로 진입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의 외적인 조건은 노동자정당보다는 국민정당의 길을 재촉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민주노동당은 서구의 좌파정당보다 빨리 ‘노동조합과의 거리두기’에 나섰고, 점차 노동자정당의 색채를 지우려고 하였다. 반면 민주노총은 의석확보를 위한 당 내 정파들의 무한경쟁, 중도보수정당과의 후보단일화, 국민참여당과의 합당, 연립정부 구상 등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견제할 실질적인 힘이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진보대통합을 통한 야권연대’방침에 따라 진보대통합을 통해 몸집을 키운 이후 2012년 총선에서 보수야당과 선택적인 야권연대를 통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대선에서 후보단일화를 통해 보수야당과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민주노동당, 2009h: 민주노동당, 2011b).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진보대통합보다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주력하였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견지하는 선택적 야권연대보다는 의석확대를 극대화할 수 있는 획일적인 야권연대를 추진하여 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민주노동당은 서구의 좌파정당보다 빠르게 의회주의에 몰입하여 조로화의 경향을 보이고, 결국은 통합진보당을 거쳐 정부의 정당해산으로 인해 소멸하였다. 민주노동당이 조로화를 거쳐 소멸에 이른 것은 한국이 국지적인 냉전과 분단의 고착으로 인해 온전한 국민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객관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러한 객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주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2) 전근대적 정파의 발호

민주노동당 내 정파들은 분단구조와 군부독재에 저항하던 통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내의 정파 활동 즉 민족해방(NL)/민족민주(ND)/민중민주(PD), 국민파/중앙파/현장파 등)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정파는 크게 보면 민족해방을 중시하는 자주계열과 노동해방을 중시하는 평등계열로 분류되는데, 이러한 정파구조는 국지적 냉전과 분단 고착으로 인한 한국자본주의의 모순 즉 국민국가의 미완성을 배경으로 한다. 서유럽이 동서냉전과 영토분쟁을 극복하고 자본주의 국민국가를 발전시켜왔다는 점에서 한국의 냉전과 분단은 전근대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정파구조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특징을 반영한다.

한국의 좌파운동 내 전근대적 정파는 정당민주주의 관점에서 자신의 과거 활동에 대한 재평가를 거치지 않고 민주노동당 안에서 과거 노선에 치중한 인적 결합으로 재현되었다. 결국 과거의 정파는 근대적인 정파의 재구성이라는 자기과제를 외면한 채 민주노동당에서 권력집단으로 부상하였다.

민주노동당 내 정파는 이론적으로 당의 구심력으로 혹은 원심력으로 작동할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주로 원심력으로 작동하였다. 당 활동가들은 물론 일반 당원들도 민주노동당의 정파분열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일반 시민들에게 민주노동당의 정파대립이 보수 언론에 의해 부각되었다. 중앙위원들과 상근자들은 정파의 존재 자체보다는 투명하지 못한 활동을 문제 삼고 있었다(민주노동당, 2007c; 131). 일부에서는 이들 정파들이 공개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브라질 노동자당처럼 ‘정파명부비례대표제’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민주노동당, 2005c; 17 : 민주노동당, 2007a; 135).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에 비해 더욱 정파구조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 과정을 보면 첫째, 각 정파가 먼저 지역대학, 대규모 사업장, 지역청년회나 사회단체 등 지역별로 거점을 확보하여 지역지배구조를 구축한 후 지역 차원의 반대세력을 권력에서 소외시켰다. 특히 자주계열은 자기 계열 내에서는 지역별 분할지배체제를 용인하되, 중앙에서는 협의 창구를 운영하면서 전국적인 정파로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정파가 과거 경기동부, 광주전남, 부산울산경남, 인천 등 전국연합 계열이다. 민주노동당에 늦게 결합한 실천연대 등 군소 정파들도 특정 거점 지역에 집중하여 지역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전체 자주계열의 협의 창구에 결합하였다.

둘째, 정파들은 자신들의 소속 활동가들을 민주노동당, 노동조합, 농민조직 등 각종 대중조직의 중간간부로 진출시키거나 이들 중간간부들을 포섭하였고 이러한 중간간부 장악은 정파가 각종 선거와 이슈에 있어 당원들을 동원하는 경로가 되었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 달리 지도부와 대의원 및 지역간부들을 동시에 선출하고 대의원과 지역간부들은 중앙지도부의 방침에 따르는 전당적인 의사결정구조를 구축하고 있어 정파의 소수 지도자 – 정파의 활동가 – 당원 이라는 비공식 소통구조가 당 지도부 – 당 지역조직 – 당원이라는 공식적인 통로의 외피를 쓸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정파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각종 선거와 의사결정기구 안에서 정치적 운명을 공유했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지도부와 개별 노동조합 간부들의 관계에 비해 훨씬 정파적이었다.

셋째, 민주노동당은 투표자가 3만여명에 불과하여 정파들이 활동가들을 통해 이들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각 시도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자주계열들이 중앙에서 협의 창구를 통해 각각 자기 지역에서 적게는 3천여명, 많게는 5천여명의 당원들을 활동가들을 통해 조직해내는 방식으로 최고위원, 대의원, 지역간부를 선출하는 동시전국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평등계열과 자주계열은 모두 전국적인 선거본부를 꾸리고 당원조직화에 나섰으나 조직력은 자주계열이 우세하였다. 당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경기 동부의 실질적인 리더인 이석기 의원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경선에서 1위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활동가 당원을 장악하고 있는 이러한 정파네트워크 덕분이었다.

물론 민주노동당이 정파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울산북구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한 2005년과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2007년 등 두 차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민주노동당 쇄신 방안과 민주노동당 혁신재창당 방안 등을 마련하여 추진하였다. 민주노동당은 그밖에도 당발전방안, 당 혁신 방안, 조직강화방안, 당직선출방안, 두 차례의 제도개선방안 등을 결의하여 실행하였으나 고질적인 정파대립과 정파담합 및 노선갈등 그리고 이에 따른 각종 선거에서의 당원 동원과 과열 경쟁 등의 폐해를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원내외 지도부의 불협화음, 활동가들의 관료화도 차단하지 못하였다(민주노동당, 2008c). 


(3) 국가의 제한적인 포섭전략과 진보당 해산

근대 부르주아 시민혁명은 자본주의 민족통일국가의 완성, 집회결사표현의 자유 등 부르주아민주주의 실현을 그 내용으로 한다. 서구의 경우 시민혁명 이후 노동계급이 이러한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자신들에게도 적용되도록 투쟁한 것이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한국처럼 식민지와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제3세계의 경우 근대 부르주아 시민혁명이 뒤늦게 나타나며 부르주아민주주의 실현도 불완전하다.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지배계급이나 국가가 반체제세력에 대한 포섭전략을 제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반체제세력의 일부가 제도권 밖에서 아직도 강력하게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경우 좌파정당은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정치적 자유를 억압받고 있으며, 그 때문에 강경한 좌파들은 제도권 밖에서 반체제세력으로 남아 있다. 노동조합 역시 공무원과 교사는 조직결성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받고 있으며, 주요산업의 핵심 업무에 종사하는 노조원들은 파업을 할 수 없으며, 모든 노동조합들은 정치파업을 할 수 없다. 정부는 남분 분단을 이유로 통일운동 인사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고 있다. 이러한 지배세력의 불완전한 포섭전략은 좌파정당이 원내 주요정당과 집권정당으로 성장하는데 장벽을 이루고 있는 반면, 반체제세력을 잔존시켜 좌파정당이 반체제세력과 연대할 경우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국가의 포섭전략은 좌파정당의 탄생과 성장 및 소멸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당들의 분포가 사회균열을 반영한다고 볼 때 사회균열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는 국가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점을 이미 살펴보았다. 시민혁명을 전후로 한 민족통일국가의 완성과 함께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허용수준은 좌파정당의 제도권 진입장벽과 퇴출장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냉전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분단국가인 한국의 경우 지배세력의 반체제세력에 대한 포섭전략이 제한적이라는 것은 국가보안법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 통합진보당 해산에서도 입증되었다.

헌법재판소(2014)는 통합진보당의 목적인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이 대한민국 헌법의 자유민주주의기본질서에 반하고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선동 활동이 통합진보당의 활동으로 인정된다는 이유로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다. 헌법재판소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코민테른의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NLPDR,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을 남한 상황에 맞게 변형시킨 북한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NLDR, National Liberation Democracy Revolution)’의 위장노선으로 판단하였다. 헌법재판소는 이석기 의원이 주도한 내란선동을 위한 회합이 통합진보당의 경기도당위원장에 의해 주최되었고 그 자리에 중앙당을 포함한 통합진보당의 당직자들이 참석하였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강령을 채택하고 반정부적 선동을 해온 독일공산당의 해산판결을 모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따르면 위장노선이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달리 명시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지 않으며, 폭력이 아니라 자유선거를 통한 사회변혁을 추구하며, 소수의 독재에 기반한 민주집중제가 아니라 다수결에 근거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진보적 민주주의 자체가 아닌 진보적 민주주의의 숨은 목적을 심판한 셈이었다. 또한 독일헌법이 정당해산 사유로서 ‘당원의 활동’을 제시하는 반면 우리헌법은 ‘정당의 활동’을 들고 있기 때문에 이석기 의원이나 경기도당의 활동을 통합진보당 전체의 활동으로 인정하려면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통합진보당 해산은 야권공조와 후보단일화에 적극적이었던 민주노동당에게 ‘종북’ 낙인을 찍어 야권공조를 파괴하여 야당의 집권을 저지하는 한편, 대선기간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독설을 퍼부었던 이정희 진보당 대표 등 반정부인사를 제도권에서 퇴출하기 위하여 뿌리 깊은 빨갱이 공포(레드컴플렉스)를 악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일부 세력들이 원외정당을 창당하였으나 특정 정파의 외연에 불과하여 민주노동당의 재현으로 볼 수 없다. 또한 국민참여당 출신과 진보신당 출신, 민주노동당 일부 출신 인사들이 정당해산 전에 통합진보당을 탈당하여 정의당을 만들었으나 창당의 배경이나 당의 노선, 그리고 인적 구성으로 볼 때 민주노동당의 맥을 잇는다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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