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의 정치방침 평가와 교훈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평가

민주노총은 출범 당시부터 좌파정당 창당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러한 목표는 ‘국민승리21’과 ‘진보정당 창당준비위원회’,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거쳐 민주노동당으로 실현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만을 통해 정치세력화를 한다는 ‘배타적지지’는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창당 직전 2000년 1월 대의원대회에서 당과 노조의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입장을 천명하였는데, 이를 통해 민주노총이 지향하는 배타적 지지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민주노총은 “정당과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한 조직체이면서도 상대적 독자성과 자율성을 가지로 있으므로 이에 대한 상호 존중과 이해, 긴밀한 협력관계가 요구 된다”고 밝히면서 동시에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중심성과 투쟁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2008년 이후 좌파정당들 간의 경쟁과 대중투쟁전선 내부의 분열이 확연해지자,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졌다. 조합원들과 간부들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사회당 등에 혼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는 진보신당의 반발은 물론, 일부 조합원과 조합 간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진보신당이나 사회당이 원내 의석을 지니지 못하고 민주노동당이 유일하게 원내에 진출한 좌파정당이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위협받지 않았다. 2011년 9월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시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시도하면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로 상징되는 양자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파탄되었다.

민주노동당을 계승한 통합진보당은 2012년 민주노총에 대한 할당제도를 폐지하고 당 지도부가 노동부문 대의원을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민주노총과의 조직적 관계를 끊었지만 민주노총은 여전히 각종 선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통합진보당에 계승되었음”을 확인하고 조합원들에게 통합진보당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였다.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유지되었고, 사회당과 통합한 진보신당은 배타적 지지를 얻지 못한 채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2012년 총선 직후 통합진보당이 비례대표 국회의원후보 선출 부정선거 시비로 인해 정쟁에 휘말리고 그로 인해 중앙위원회 폭력사태가 발생하여 노동자와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자,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공식적으로 철회하였다. 그 이후 민주노동당의 후신인 통합진보당에서 정의당이 분당되어 나왔지만 민주노총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였다. 결국 민주노총은 어느 정당과도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이는 민주노총의 1기 정치세력화가 민주노동당의 성과를 계승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음을 의미하였다.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로 인해 공식적으로 민주노동당 이외의 정당에 대한 민주노총 차원의 지원이 차단되고 간부들의 다른 당 후보 출마가 제한되었다. 하지만 일반 조합원 차원에서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여 조합원들의 투표 성향을 실질적으로 구속할 수 없었다. 조합원들이 실제 각종 선거에서 당선 가능한 후보를 찍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지역구 선거에서는 당선권에 있는 다른 정당 후보를 찍는 경우가 많았으며, 단지 비례대표 정당명부는 대부분 민주노동당을 찍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창당을 의회주의로 비판해오던 민주노총 내 현장파는 독자적인 계급정당 건설을 지향하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방침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2008년 진보신당 창당 이후에는 진보신당 지지자들도 배타적 지지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이후 진보신당에 결합한 민주노총 중앙파 일부 역시 과거의 주장과 달리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비판하였다. 이들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가 없어지면 많은 조합원들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없어진 후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가 여전히 상대적으로 높을 뿐, 다른 좌파정당의 지지율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상당한 부동층이 형성되고 그 일부가 거대야당에 대한 지지자로 전환되었다. 통합진보당 지지에서 이탈한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계급정당 건설보다는 민주당이나 박원순 서울시장과 같은 유력한 정치인 쪽으로 이동하였다. 심지어 민주노총 전직 지도부 일부는 대통령선거에서 노동계를 대표하는 인사의 자격으로 거대 야당의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를 상징하는 배타적 지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첫째 배타적 지지로 구체화된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는 서유럽의 사례와 비교하더라도 애초부터 개량주의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태생적 개량주의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영향력을 보장하는 배타적 지지를 통해 민주노동당에게 그대로 투영되었다. 

먼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와 민주노동당 창당은 최상급노조가 강력한 산별노조를 기반으로 좌파정당과 조직적 연대를 한다는 양날개론에 근거하였으나 실제로는 노동자 조직화라는 객관적 토대가 취약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산별노조가 먼저 건설되었다면 결합이 가능했던 지역의 일반노조나 노동운동단체가 민주노총에 결합하지 못했으며, 민주노총은 출범 이후에도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김창우, 2007). 무엇보다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변혁적 노동운동을 지향하였던 전노협이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 등과 ‘전국노조대표자회의’를 구성하면서 조기에 청산됨으로 민주노총은 사무전문직과 대기업노동자의 온건 노선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노동조합의 형태가 아닌 다양한 변혁적 노동운동세력들은 민주노총 건설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민주노총은 출발부터 개량주의에 경도되었다. 

이러한 성급한 양날개론은 국민승리21의 급조와 민주노동당 창당이라는 선거주의, 의회주의로 나타났다. 민주노총 1기 집행부가 선언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투쟁력을 기반으로 사회적 대타협과 의회에서 입법개선을 중요시하는 국민파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온건노선은 창당 시절부터 민주노동당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전신은 ‘국민승리 21’이었는데, 이는 이름에서 보듯이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 창당노선에 반영된 것이었다. ‘국민승리 21’이 1997년 대선에서 내걸었던 ‘일어서라 코리아’ 역시 ‘국민승리 21’이 ‘투쟁하는 노동자정당’으로 각인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온건노선이었는데, 김세균 교수 등 평등계열 일부는 이를 우경화로 비판하면서‘국민승리 21’에서 탈퇴하였다.

둘째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민주노총이 의무적으로 민주노동당에게 인적 지원, 조직적 지원, 재정적 지원을 하고 선거 때마다 표를 주는 경직적인 관계를 형성시켜 오히려 양자 모두에게 독이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선 굳이 민주노총의 요구를 진지하게 실천하지 않더라도 일방적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노동중심성의 강화라는 당의 과제를 기필코 달성하겠다는 절박성이 부족하였다. 즉 노동중심성 실현에 대한 압박요인 없었기 때문에 이는 강제성이 없는 선언적인 의미에 그쳤다. 이처럼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민주노총이 조합원의 정치활동을 민주노동당에 일임하는 대리주의로 변질되었으며, 그 결과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기도 전에 의회주의에 몰입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는 대중적인 정치기반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물론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 스스로 이러한 대리주의를 경계하였다. 민주노총은 2000년 1월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와 별개로 “주요한 정치정세나 사업에 대해서 독자적 방침을 가지고 조합원에 대한 정치의식화와 교육, 활동 및 사업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에도 정치위원회를 통해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하겠다는 애초의 목표는 거의 성과가 없었다. 민주노총이 추구하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 활동에 국한되어 당원확대사업으로 축소되었고, 노동자의 정치적 단결이라는 자기과제를 민주노동당으로 넘겨 버리는 결과로 나타났다(민주노동당, 2009b). 

민주노총이 일반 조합원을 상대로 하는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포기함으로써 민주노총의 정치활동은 민주노동당 창당과 지원을 위한 상층간부들의 활동으로 축소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민주노총상임집행위원회는 1999년 7월 19일 ‘상임집행위원회 사업평가(안)을 통해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창당 추진주체들이 상층중심의 사업으로 인하여 노조 내의 광범위한 동의와 대중적 동력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민주노총이 진보정당의 창당일정과 사업방침을 결정하는데 있어 대중조직의 발전과 역량에 맞게 조절, 추진하지 못하였다. 당건설의 과정에서 대중조직의 발전과 통일단결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2) 민주노총의 2007년 대선전략 실패

민주노총 정치위원회는 20077월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노동위원회와 합동수련회를 열어 정치실천본부 구성, 세액공제 활성화, 노동자 참정권 확대, 100만 민중총궐기 등의 사업을 논의하였다. 민주노총은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을 결합하고 노동공약과 진보의제를 발굴하여 이를 여론전을 통해 전파하기로 했으며 이를 위해 정치참여와 교육, 홍보로 조합원의 정치의식을 향상시켜 정치간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대선기간동안 중앙 지도부만 무려 600회가 넘는 조합원 교육을 실시하였다. 전국에서 2,000명 이상의 정치실천단을 조직하고 행복8010’에 총력을 기울였다(민주노총, 2007).

민주노총의 대선 전략을 살펴보면 먼저 민주노총은 계급투표전략의 일환으로서 배타적 지지단체인 민주노총, 전농, 전여농, 전빈련 등이 참여하는 100만 민중참여경선제로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를 선출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민주노총은 민중참여경선제에 사회당 등 진보진영의 후보를 참여시켜 진보진영 후보단일화를 성사시킨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20073월 민주노동당대회에서 2/3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해 개방형경선제당헌개정이 부결되었다.

이에 민주노총은 계급투표를 조직하기 위해 민중참여 경선제 재추진을 위한 당대회를 소집 요구하였으나 6월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당대회 소집 자체가 과반수 동의를 얻지 못해 부결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중참여경선제가 부결된 조건에서 진보대연합 실현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진보대연합 연석회의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나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독자후보 선출에 나섰다. 2007년 대선 직전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한국사회당 금민 후보와 선거연합 및 후보단일화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협상에 착수하였으나 끝내 단일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각각 출마하였다(이윤원, 2007).

대선 기간 중 민주노총은 정치기금을 마련하고 세액공제를 조직하여 민중참여 경선제가 도입되면 200억을 모금할 계획하였으나 민중참여 경선제 도입 실패 후 모금액을 39억으로 수정하였다. 민주노총은 비당권자의 당권을 회복하고 투쟁사업장 등에서 집단 입당을 조직하였으나 당원과 당권자는 크게 늘지 않았다.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이 3번째 대선에 도전하였지만 득표율이 3.01%(712.121)에 불과하여 민주노동당은 대선패배의 책임소재를 두고 분란을 거듭하여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결국 민주노총이 2007년 대선 목표로 설정한 대통령후보 민중경선제를 통한 계급투표 전략, 진보대연합을 통한 후보단일화, 대선 300만 표 획득, 18대 총선 원내교섭단체 구성, 당원 30% 확대 등은 모두 실패하였다(민주노총, 2007).

대선패배 이후 구성된 심상정 비상대책위원회의 20082월 임시당대회 평가안은 선거패배의 객관적인 요인으로서 노무현 심판론에 따른 보수세력 결집과 이에 따른 민주노동당의 여당과의 동반하락, 다자간 선거구도를 들었으며, 주체적인 요인으로서 진보적 대안 제시 실패와 계급투표의 실패, 대선과정에서 내부 갈등, 후보 이미지의 한계 등을 제시하였다.

반면 민주노동당 당원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7년 대선패배의 원인으로서 객관적인 조건이 46.1%, 당 자체의 문제가 46.2%라고 답변하였다. 내부 원인으로서 공약과 당 이미지가 22.1%, 계급투표 실패가 20.3%, 후보이미지가 19.6%라고 답변했으며 외부 원인으로서는 노무현 심판여론이 44%, 유사세력 출마가 27.8%라고 답변하였다. 당 운영 혁신을 위해 어떤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는지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 중 42.7%가 정파갈등해소라고 답하였다. 지도부가 안정적인 집행을 할 수 있는 구조 확립이 시급하다고 본 당원은 21.7%, 지도부 교체 등 중앙당 인적쇄신이라고 답한 당원은 17.8%로 그 뒤를 이었고 의원단 및 지도부에 대한 당원 평가 시스템 마련이라고 답한 당원은 12.5%였다.

한편 비상대책위원회 평가안은 당의 노동정치가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민주노총에 맡기는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안은 민주노동당이 민감한 사안을 함께 책임지지 않고 민주노총을 감싸 안기보다는 돈과 표밭으로 대상화하면서 보수언론의 이미지왜곡에 편승하려고 한다는 민주노총 조합원의 반발만 키웠다(이수봉, 2008).


3)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 실패

2011년 6월 19일 민주노동당이 정책당대회에서 ‘5.31최종합의문’을 먼저 승인하였다. 진보신당은 3월 27일 정기당대회에서 대북문제, 총선과 대선 방침, 당 운영방안 등의 진보대통합 기준을 결정하였는데, 이는 통합에 소극적인 내용이었다. 6월 26일 진보신당은 대의원대회에서 3월 27일 결정에 미흡하다면서 ‘5.31최종합의문’ 승인을 유보하고 대신 조직진로에 대한 특별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국민참여당은 5.31합의문 논의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2011년 7월 10일 중앙위원회에서 과거에 대한 조직적 반성과 성찰을 통해 '새통추'에 참여의사를 밝혔으며, ‘5.31최종합의문’과 그 ‘부속합의서1’를 승인하고 합의문에 동의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추진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때부터 정당들 사이에서 국민참여당의 진보대통합 참여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거세졌다.

7월 15일 진보대통합 당사자들은 ‘5.31최종합의문’을 재확인하고 7월 말까지 ‘새로운 통합추진위원회(이하 '새통추')’를 구성하기로 했으나 국민참여당의 '새통추' 참여 문제와 당 운영과 관련된 세부방안(부속합의서 2)에 대한 이견 때문에 구성이 늦어졌다. 2011년 8월 27일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추진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문(부속합의서 2)”이 채택되었다. 마지막 남은 쟁점인 국민참여당의 '새통추' 참여 문제에 대해서도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의 입장이었던 ‘선 진보통합 후 국민참여당 논의’를 전격 수용하였다. 

다음날 8월 28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가장 핵심 쟁점이었던 국민참여당의 참여 문제에 대해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은 국민참여당 참여 문제에 대하여 합의하기 위해 진지한 논의를 하되 합의가 되지 않더라도 '새통추'에 참가한 개인과 세력을 중심으로 9월 25일 창당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8.28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잠정)합의문’을 도출하였다.

진보신당은 9월 4일 임시당대회에서 ‘5.31최종합의문’과 ‘8.28 합의문’을 토론했으나 54%의 찬성에 그쳐서 부결되었다. 진보신당의 부결로 진보양당의 통합이라도 실현하고자 했던 민주노총의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2011년 9월 23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통합안을 부결시킨 진보신당에 대한 한시적 지지를 철회하였다. 또한 이날 중앙집행위원회는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의 우선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으며 다만 5.31최종합의문에 근거하여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인지의 여부를 논의할 수 있으며, 그 판단의 주체는 5.31 합의와 8.27 합의에 따라 '새통추'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이 통합을 거부한 이후 9월 25일 임시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허용하는 안건을 논의했으나 이 안건이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당내 반발과 민주노총의 반대로 2/3의결정족수에서 2% 부족하여 부결되었다. 이 당대회에서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반대 발언을 하는 동안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일부 간부들이 강하게 항의하는 등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심각한 내분 양상을 보였다.

10월 7일 민주노동당 7차 수임기관 전체회의에서 1)진보대통합을 빠른 시일 안에 성사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2) 향후 진보대통합 방식, 시기 등에 대한 당원 의견수렴 및 관련 단위들과의 협의에 착수한다. 3) 위의 사항을 당대표와 최고위원회가 추진한다는 결정을 하고 당 내외 의견수렴에 들어갔다.

한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당 대 당 통합은 무산되었으나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진보신당 통합파들이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새진보통합연대’를 구성한 후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11월 3일 ‘새진보통합연대’가 ‘12월 10일 이전에 모든 정당, 대중조직, 단체 개인 등의 참여를 광범위하게 열어놓고 진보대통합정당 창당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 국민참여당이 통합을 위한 협상에 나섰으며 이들은 11월 20일 통합진보정당 건설 추진을 선언하였다.

11월 23일 먼저 새진보통합연대에서 공동대표단-지역대표자회의 통해 통합 방안을 승인하고, 이어서 민주노동당이 11월 27일 임시당대회에서 통합 방안을 90.1%로 가결시켰고, 국민참여당 역시 12월 4일 임시전국당원대회에서 통합 방안을 89.33%로 통과시켰다. 

2011년 12월 5일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 국민참여당이 수임기관 합동회의를 열고 당명을 ‘통합진보당’으로 정하고 이정희·유시민·심상정 공동대표 체제로 신설합당을 의결하였고 12월 11일 통합진보당 창당 선포식을 개최하였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 등 3자에 의한 통합진보당 창당은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가 2011년 9월 23일에 결정한 ‘새통추를 통한 통합’이 아니었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3자 통합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결과 민주노총은 국민참여당을 진보대통합의 주체로 인정하는 민주적 절차를 거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새통추'를 통해 국민참여당 문제를 논의하지 못한 이유는 새통추에 국민참여당을 포함한 통합을 주장했던 ‘진보통합시민회의’의 상당수가 거대야당 건설 쪽으로 방향을 틀어 새통추 안에서 국민참여당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실익이 없었고, 더구나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총선을 겨냥한 신속한 논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민주노동당, 2012b).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총대의원대회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내용으로 하는 정치방침을 전국적으로 토론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민주노총은 2012년 4월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사회당의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특히 통합진보당을 비례대표지지정당으로 선택하였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은 총선직후 지역구후보 선출 부정 논란, 후보단일화 특혜 논란, 비례대표후보 선출 부정 논란에 휩싸이면서 심각한 내분에 빠졌다. 패권주의와 이념논쟁이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과 마찬가지로 국민참여당 계열까지 가세하여 재연되었으며, 부정선거와 부실선거에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서로를 공격하면서 중앙위원회 폭력사태를 초래하였고 결국 분당되었다. 

2012년 5월 17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42명 중 32명의 찬성으로 구당권파가 강기갑 혁신비대위의 혁신안을 수용할 때까지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로 하는 '조건부 지지 철회'를 결정하였다. 이어 2012년 8월 14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39명 중 27명의 찬성으로 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였다(민주노총, 2012a).

결국 민주노총이 최종적인 진보대통합 과정에 참가하지 못하였다는 점,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통합진보당에 결합하지 않아 반쪽짜리 진보대통합이 되었다는 점,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에 책임이 있는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민주노총이 애초에 의도하였던 ‘노동중심의 진보대통합’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만 국민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상층부 일부가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려고 했고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사실상 분당 이전까지 고수하였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으로 민주노총의 진보대통합이 완전히 실패하였다고 볼 수 없다. 국민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반대한 것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자체보다는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 노동계를 배제한 통합절차 등에 반대한 것으로 판단된다. 노선의 문제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중앙파 인사들도 이후에 새로운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면서 국민참여당 계열이 주요세력인 정의당에 결합하였다.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통합함으로써 중도보수정당과 조직적으로 함께 할 수 없다는 민주노동당 당원과 민주노총 조합원의 심리적 저지선이 무너졌다. 민주노총 국민파에 속하였던 정치위원장들 중 다수는 민주노동당 시절에 의회진출을 도모하다 결국에는 2012년 대선 직전에 보수야당의 대선 캠프에 결합하였고 특히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민주노총 출신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문재인 민주당후보 캠프에 결합하였다.

결국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노동정치의 성공모델을 만들고 확산하여 국민들에게 노동정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이르지 못하였고 특히 민주노총은 결과적으로 민주노총 소속으로 당선된 최고위원이나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차원에서 노동정치의 상을 제시하고 실현하도록 강제하는 것에 실패하였다. 


민주노동당의 조로화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실패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가 현상적으로 실패한 계기는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분열,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회피와 통합진보당의 외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좌파정당과 ‘긴장적 협력관계’를 유지할 역량이 부족했던 노동운동의 한계로 인해 실패하였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를,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기득권 경향을 견제하지 못하였다.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의 결합은 상호의존성을 증대시켜 양자의 단점도 상호작용하였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양자는 의회주의 몰입, 정파지배구조 등 부정적 동조화로 인해 양자의 장점을 상승시키기는커녕 자신들의 조로화와 미성숙을 극복할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 조로화의 상징적인 사건은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과 다른 진보정당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과 ‘민주당과의 획일적인 후보단일화’를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민주노동당이 2009년 정책당대회에서 채택하여 통합진보당 이후에도 고수한 ‘진보대통합을 통한 야권연대’방침의 파행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이 방침은 보수양당 중심의 소선거구제 아래서 진보정당이 의회에 진출하려면 진보대통합이 불가피하다는 진보정당 내부의 필요와 2008년 촛불정국 이후 형성된 야권 단결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외부의 필요를 접목한 것이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의 조로화를 견제하지 못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가 파탄된 이유를 크게 보면 대표성, 자주성, 민주성, 변혁주체의 문제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계급을 대표하거나 대변하려는 의지와 역량이 부족했으며 이로 인해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에 있어 사민주주의 모델에서의 양날개론은 그 전제조건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민주노총은 정규직 대기업중심 노조운동, 노동운동의 연대성 약화,  분파주의 경향, 현장조직력 약화 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이상학, 2005). 물론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를 조직화하여 민주노총의 조직율을 높이고 당원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 중 그나마 노동조건이 괜찮아 조직결성이 가능한 비율이 높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조조직화 전략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사회의제 투쟁전략이 병행되어야 했는데, 당과 노조 안에서 조직투쟁과 의제화투쟁의 병행전략에 대한 혼선이 존재하여 효과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 파고에 대응한 민주노조운동의 전략은 산별노조와 좌파정당 건설이었으나 이러한 전략은 1987년 체제의 민주화대항헤게모니에 머물렀으며 특히 경제주의, 의회주의, 조합주의적 실천의 한계 속에 갇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 헤게모니 연대로 확장되지 못하였다(노중기, 2012: 81). 민주노총 조합원은 기업별 노조 안에 갇혀 사회투쟁보다 기업 내 기득권에 안주하려고 하였다. 민주노총 역시 개별적인 노사관계를 둘러싼 단체협약개선투쟁에 경도되었고, 기업주와의 협상에 매몰되어 있는 조합간부들의 관료화를 저지하지 못하였다.

둘째 양자는 노동조합과 정당이라는 차이를 인정하는 속에서 상호 자주성을 존중하는 한편 노선과 활동에 있어서 조직적으로 제도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서로가 발전할 수 있는 공동운명이라는 측면을 고려하지 못하였다(민주노총, 2006a). 

선거 시기에만 정치에 개입하는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자정권’ 수립과 관계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민주노총은 당원가입, 세액공제, 후보발굴, 선거운동 등 당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동원부대로 대상화되었다. 극소수의 민주노총 조합원만이 국회나 지방의회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대중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민주노동당의 의회활동만 바라보았다. 그 결과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이 의회 내로 협소해졌다(김영수, 2007: 100).

이러한 노동정치의 대리주의는 노동조합의 약화로 더욱 심화되었다. 이를테면 노동조합이 강력하다면 노동조합 스스로 국가 단위의 정치적 행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지만 노동조합이 분산되고 조합원에 대한 동원력이 약화될수록 노동조합은 직접행동보다는 친노동자적인 정당을 통해 자신의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합원을 유권자로 동원하고자 한다(송태수, 2006: 30).

민주노총이 조합원의 정치활동을 민주노동당이 대리하도록 방치하였다면 민주노동당은 노동운동의 문제를 민주노총에 떠넘기고, 특히 국민이나 미조직노동자가 지적하는 민주노총의 한계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하려는 의지가 부족하였다. 반대로 민주노동당은 정치문제에 있어 민주노총을 동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배타적 지지로 인해 어차피 자신의 결정을 따라 올 것이라고 보았고, 민주노총 역시 통합진보당에 대한 관성적 지지에서 보듯이 민주노동당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민주노총 일반 조합원 당원은 대부분 당의 지역조직 활동에 거의 결합하지 않았는데 특히 대도시의 경우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다. 당이 조합원 당원에 대한 정치사업은 민주노총에 일임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정작 민주노총의 경우에 사업장 단위에서까지 정치사업을 추진할 조건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물론 민주노총은 조합원 정치교육을 통해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을 높여 자발적인 정치주체를 형성하고 그 결과 정치투쟁을 고양하고, 민주노동당 집단입당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일환으로 민주노총은 중앙 교육사업과 현장 교육사업을 입체적으로 진행하고자 정치교육을 담당할 강사를 육성하고 교육교재를 개발하여 각 사업장별로 최소한 분기마다 전체 조합원에 대한 정치학교를 열고자 하였다. 하지만 사업장 차원의 독자적인 교육사업과 정치사업을 담당할 사업장의 정치위원회 자체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았다. 그 결과 사업장의 정치사업은 선거지원에 머물렀으며, 그나마 상황이 좋은 단위노조에서는 당원확대사업이 진행되었다. 

 직장분회가 사업장에 있는 당원들에 대한 정치사업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통로였지만 직장분회는 사실상 당 조직이 아니라 민주노총 조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당의 지역조직이 직장분회를 통제하면서 사업장 조합원 당원들의 정치사업을 주도할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지역별 조직체계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업별 노조의 사업장에 갇혀 있는 민주노총 조합원 당원에 대한 정치사업을 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일부에서 조합원 집단가입, 현장분회 등의 활동이 있었지만 현장과 지역을 토대로 한 노동자정치활동의 모범을 창출하고 이를 전면화해내지 못하였다. 

총연맹 차원에서도 조합원 당원에 대한 교육사업과 정치사업을 추진할 예산이나 인력 등이 부족하였다. 총연맹은 정치위원장과 담당국장 1인 등 2명의 상근인력으로 전체 연맹의 정치사업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이에 민주노총은 450여명에 달하는 민주노동당의 중앙과 지역 상근자의 30% 정도를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순환근무할 것을 검토하기도 하였으나 실제로 집행되지 않았다. 다만 겸직이 가능한 지역 당 조직의 간부의 경우 민주노총 지역간부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민주노총, 2006a).

민주노동당은 양자의 소통에 있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고, 당으로서 대중조직에 대한 선도성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양자는 제도화의 성과를 분배하는 문제과정에서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양 조직 모두 의회주의에 경도되어감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정파지도자와 민주노총의 지도부는 당직과 공직을 놓고 당내 선거에서 경쟁하였다. 이러한 쟁탈전은 자주계열 대 평등계열의 경쟁에서 자주계열 내의 경쟁으로, 다시 구 전국연합 계열 내의 경쟁으로 분화되는 등 민주노동당을 균열시키는 폐해를 초래하였다.

셋째 민주노총은 당원의 다수가 민주노총 조합원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내의 조합원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민주노동당 내의 당원 민주주의로 현실화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의 의사결정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쇠퇴해졌다. 

민주노동당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역시 과두와 관료 및 정파의 폐해를 통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키지 못했으며, 자신의 혁신을 담당할 자주적인 의식주체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민주노총 조합원은 물론 민주노동당 당원들조차 좌파정당에 걸 맞는 정치의식을 지니지 못하였다. 활동가의 정치간부화를 모색하고 관료제를 희석할 수 있는 윤번제, 호선제, 추천제, 등이 논의되었으나 실제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선출제는 절차적 민주주의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과두와 정파의 지배구조에 활용되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서 당원교육과 조합원 교육에 있어 민주적이며, 자발적인 정치주체를 형성한다는 전략이 부족했으며, 오히려 산발적이고 개별화된 교육은 정파의 현장 선전과 침투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활동가들은 명망가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대중조직과 당에서 관료로 변질되었다. 초기에는 민주노총의 정파 대립이 민주노동당에 투영되었지만 나중에는 민주노동당의 정파갈등이 민주노총 내에서 재생산되었다. 

넷째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내에서 그리고 이들 밖의 비제도권에서 양 조직의 성급한 제도화를 견제할 수 있는 급진적 주체의 형성이 미흡하였다. 민주노총 스스로 과도하게 제도화되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몰입을 지연시킬 제도권 밖의 역량을 구비하지 못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이후 자신의 우측에 민주노총, 전농, 전여농, 전빈련, 한국청년단체협의회, 한총련 등 배타적 지지의 대중단체를 포괄하였으며, 좌측에 정치투쟁전선으로서 민중연대를 포진시키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의회에서 적극적인 제도정치 개입을 통해 대중투쟁을 지원하고 그 파급력을 최대화하면서 투쟁으로부터 얻은 제도적 성과를 다시 부문대중들과 공유하는 것을 자기활동의 방향으로 삼았다. 이러한 3자 동맹은 배타적 지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진보적 대중정당은 대중조직과 전선체를 좌우 양날개로 삼는다”라는 자주계열 나름의 ‘양날개론’에 근거한 것이었고, 이러한 시도는 민중연대를 계승한 진보연대나 민중의 힘에서도 지속되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자주계열은 민주노동당 초기에 전국연합과 통일연대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신 평등계열과 함께 하는 대중투쟁조직으로서 민중연대 건설에 나섰지만 강령의 노선 문제, 중앙집권적 단일조직 문제, 민주노동당지지 문제 등으로 강력하고 상설적인 민중투쟁조직 즉 상설연대체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이후 민중연대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려는 진보연대, 민중의 힘 등 상설연대체 시도가 있었지만 고질적인 노선 갈등과 정파적 주도권 문제로 인해 상설적인 민중투쟁조직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이러한 제도권 밖의 대중투쟁조직의 약화는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등 부문조직, 당, 대중투쟁조직이라는 3자동맹의 정치투쟁의 약화로 이어졌으며, 이는 반대로 민주노동당이라는 제도권으로 대중투쟁조직이 동조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빠르게 제도화되는 민주노동당을 견제할 수 있는 비제도권의 역할은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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