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사회주의 실패 원인과 소련 국가의 붕괴 원인 - 중국 사례와 비교

오늘날 어느 국가든 심지어 개인도 제도 시스템과 생존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면 대부분 생존을 선택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념이나 제도 시스템은 생존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생존과 상충된다면 당연히 이념이나 제도 시스템을 수정하고 생존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결국 이념이나 제도시스템도 주체의 생존을 중심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소련 붕괴의 구체적인 원인에 대해 박승호(2009)에 따르면 채만수 등 맑스레닌주의적 관점은 생산력이 낮은 구조적인 문제를 인정하지만 제국주의라는 외적 요소를, 유팔무 등 사회민주주의 입장은 중앙집권과 계획경제를, 프롤레타리아의 민주주의와 국제주의를 강조하는 이갑영은 공산당의 관료화, 노동계급의 대상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쇠퇴 등을 지적하였다.

채만수의 견해는 소련 붕괴보다는 소련 사회에서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없었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생산력이 낮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사회주의 출발점의 조건을 구비하지 못한 것이며, 제국주의 경쟁을 회피할 수 있도록 서구에서 연속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회주의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후속 조건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박승호는 현실사회주의 소련사회주의에 대한 성찰에서 동유럽이 붕괴한 반면, 쿠바는 생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낮은 생산력을 사회주의 붕괴의 주요 요인으로 제기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같은 논지로 쿠바나 조선, 베트남 모두 낮은 생산성과 제국주의의 압박에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채만수의 견해는 소련이 붕괴한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소련 사회에서 사회주의혁명은 이미 1980년 이전에 실패하였는데, 이는 더 이상의 획기적인 생산력의 발전도 불가능하고, 소련을 엄호할 연속혁명도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1980년 이후 소련의 지도부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도입하고 제국주의와 우호관계를 맺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에 낮은 사회주의적 생산력이나 연속혁명의 부재는 소련을 위협하는 요소가 아니었다.
계획경제 때문에 소련이 붕괴하였다는 유팔무의 견해는 소련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이후 계획경제를 대폭 수정하여 사회주의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하고 이를 확대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이 될지언정 소련이라는 국가가 붕괴한 원인은 아니다.
소련뿐만 아니라 다른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있어서도 관료화, 노동계급의 대상화가 일반적인 현상이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쇠퇴라는 것도 공통적인 조건임에도 어떤 나라는 붕괴하고 어떤 나라는 생존하였다는 점에서 이갑영의 견해도 소련 붕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국가로 보는 자칭 볼셰비키그룹2015년 토론회의 내용을 정리한 소련 붕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에 따르면 소련 붕괴의 원인은 낙후한 생산력, 관료집단의 등장과 득세, 선진국 등 후속 혁명의 불발, 제국주의 국가와의 군사 경쟁 등이며, 이러한 이유로 인해 관료들의 사적 소유 경향이 강해지는 반면 노동계급이 약화되어 소련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소련이 사회주의 이념을 구현하지 못한 이유에 불과하다.
한편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사회라고 보는 토니 클리프, 정성진, 최일붕 등은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 혹은 노동자국가가 아니었으므로 소련의 붕괴가 사회주의의 실패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라는 규정은 소련 붕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볼 것이다. 이들 견해 역시 소련 사회에서 관료제나 관료의 폐해를 지적하는데, 이것들은 소련식 사회주의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을지언정 소련 국가의 직접적인 붕괴원인이라고 볼 수 없다.
 
소련의 사회주의 실패 원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하지 않는 정성진(2017)의 견해에 따르면 마르크스 사회주의론의 주요 요소는 연속혁명, 세계혁명, 국가 소멸,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작업장 민주주의, 개인적 소유의 재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상품·화폐·시장의 소멸, 노동시간 단위 경제 조절, 노동의 폐지 등이다. 또한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라는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자본가 계급과 상품생산 등 자본주의 생산방식 폐지, 노동한 만큼 배분받아도 개인과 집단의 합리적인 수요를 충족할 수 있을 정도의 생산력,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 국가로의 전환,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지양한 사회주의민주주의, 집단과 개인의 조화, 프롤레타리아 국제연대 등 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기준에 의하더라도 소련에서 자본가계급이 소멸되었고 공산당 일당독재가 유지되었지만 노동자 국가가 실현되었거나 국가가 소멸할 징조는 없었다. 소련의 민주주의제도는 부르주아민주주의제도 보다 개인의 자율성을 덜 보장했음이 틀림없다. 소련의 인민들이 생필품 부족으로 불만이 높았다는 것을 볼 때 생산력의 발전도 사회주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세계혁명은커녕 소련 체제를 유지하기에 급급하여 서방 자본주의 국가와 병존하고자 하였다. 소련은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 관점에서 코민테른을 운영하였던 2차 대전 직전보다 후퇴하여 제3세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사회주의 국가끼리 정치적 경제적 협력을 하는 수준이었으며, 이것도 점차 쇠퇴하였다.
소련의 사회주의 실현은 생산력의 발전이 정체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불투명해지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소련의 지도부들까지도 전통적인 사회주의 실현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노선을 변화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소련에서 사회주의 실현이 불가능해진 사정 즉 소련식 사회주의 실패 자체가 국가적 위기를 불러온 것은 아니었다. 소련식 사회주의의 실패와 지도부의 노선변경이 명확해진 1980년의 소련의 각종 지표는 사회주의 실패로 인해 소련의 체제 피로도가 높다는 것을 설명할 뿐 소련 국가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생산력의 발전이 정체되고 있었지만 그 당시 소련의 생산력이 국가를 위기로 몰아갈 정도로 낮은 수준이 아니었으며, 퇴보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미국의 봉쇄와 압박, 반체제공작 역시 냉전 때부터 있어왔지만 소련은 비교적 국가의 위기를 겪지 않고 잘 견뎌왔다. 군비지출의 증가는 이미 1950년대부터 시작하여 1980년 직후까지 군비 지출이 계속 증가되었지만 그로인해 소련 경제가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은 것은 없다. 소련의 재정이 급격히 악화된 것은 1985년 이후 혼란시기부터이다. 더구나 미소간의 군축협상에 의해 1980년 초반을 정점으로 하여 군비지출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대외원조 역시 1950년대부터 무시하지 못할 수준을 유지하였지만 1980년대까지는 재정을 악화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에 소련식 사회주의의 실패가 소련 국가의 붕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이미 1980년 이전에 소련 국가의 위기가 왔거나 최소한 사회주의 실패의 후유증이 점진적으로 누적되어 왔다는 징후가 있어야 하지만 소련의 생산력 증가 추이나, 재정적자의 추이, 인플레 추이 등 주요한 지표는 1985년 이전에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따라서 소련식 사회주의의 실패는 소련 국가의 붕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없다. 즉 소련식 사회주의 실패 원인과 국가 붕괴 원인은 구별되어야 한다.
첫째 소련에서 사회주의 실현에 요구되는 생산력의 발전이 실패한 결과 인민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공업의 수준이 서구의 자본주의에 비해 열악하였다.
Allen이 농부의 모델(Feldman’s model)이라고 부른 스탈린의 경제성장 논리에 따르면 오늘의 소비를 참고 투자를 늘리면 미래에 그만큼 경제가 더 성장하므로 지금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다(Jose Luis Ricon. 2017: 14) 하지만 이런 논리에 따르면 미래의 성장을 위해 항상 소비를 참아야 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성장의 일정한 양은 소비로 돌리고 나머진 다시 투자하게 된다.
어쨌든 사회간접시설과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던 소련의 초기에는 이러한 투입에 비례하는 산출논리가 작동하여 경제성장이 비교적 수월하였다. 이러한 투입은 노동 부문부터 시작하였다. 소련은 1930년대까지 대농장화를 추진함으로써 농촌의 잠재적 실업상태인 유휴 노동력을 도시 노동자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농촌에서 방출된 노동자들은 강제로 도시에 이주하여 사회간접시설 건설, 경공업 종사 등 육체노동에 종사하였다.
농민이 줄어들자 농업의 생산성이 높아졌고, 유휴 농민은 농업보다 생산성이 훨씬 높은 초보적인 2차 산업에 종사함으로써 소련 사회의 전체적인 경제적 효율성이 높아졌다. 이러한 풍부한 노동력은 석탄, 석유, 가스 등 채굴산업, 철강, 중화학 등 노동집약적 산업을 발전시켰다. 소비에트 계획경제가 본격화된 스탈린 시대에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연 20% 내외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으며, 전쟁 후 1950년대까지는 10%대를, 1960년대는 10% 미만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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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소득증가율 출처 :(Jose Luis Ricon. 2017: 9)>
 
소련은 1950년대에는 미국보다 먼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인공위성을 먼저 발사하였다. 일부 좌파 경제학자들은 소련이 같은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룬다면 수십 년 안에 미국을 따라 잡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인민들의 생활수준도 사회주의 노동과 복지 시스템으로 인해 전쟁을 겪은 서유럽에 못지않았고, 경공업 수준도 인민들의 요구에 부응할 정도였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노동집약적 산업이 일정한 한계에 도달한 후 경제성장은 둔화되었다. 1950년을 기준으로 봐서 1970년까지 20년 동안 1인당 국민소득은 두 배로 늘었는데, 그 이후에는 거의 정체상태였다. 노동력을 조직하여 동원하는 투입 - 산출의 강제적인 방식의 경제계획이 더 이상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보장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1인당 국민소득의 절대 액이 소련보다 높아서 소득 증대의 여력이 부족하였지만 서서히 증가하였고,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은 다른 나라들은 소련과 달리 증가 폭이 컸다.
저성장의 원인을 보면 먼저 민간분야에서 서비스 산업, 고부가가치 산업, 첨단 산업의 발전이 지체되었다. 소련에서 서비스는 대체로 공공서비스로서 사회주의 체제에 이미 편입되어 있었으므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줄 수 없었다. 반면 기존의 서비스는 경영 개선과 서비스기술 혁신 부족으로 인해 인민들의 높은 기대 수준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스탈린은 중공업과 경공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면서 인민들의 생활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경공업을 더욱 육성한다는 경제정책을 채택하였지만 현실에서는 국방과 경제발전에 필요한 군수산업과 중공업을 발전시켰다. 나라의 자원을 군수산업과 중공업에 집중함으로써 인민의 생활에 제공할 경공업 제품 즉 생활필수품이 양적으로 부족하였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또한 서방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경공업에 대한 인민들의 기대 수준은 높아졌지만 상품의 질, 디자인은 향상되지 못하였다. 물론 소련은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미국 못지않은 첨단기술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러한 첨단기술이 경공업과 민간 영역으로 확장되지 못하였다. 군수산업에 인적 물적 자원을 집중함에 따라 군수산업의 혁신을 경공업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하였다. 중공업과 군수산업의 기술혁신을 경공업의 기술혁신으로 조직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행정 관료와 기술 관료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소련에서 관료의 폐해는 전 분야에 걸쳐 병목현상을 초래하였다.
배급체제와 구매체제의 운영 실패로 인해 생필품 비축이나 생필품을 얻기 위한 장기 대기와 같은 병목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소련은 외부에서 특히 서방에서 경공업 제품과 생필품을 구입하여 연방 내 인민과 사회주의 블록의 인민들에게 공급해왔다. 하지만 달러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외부에서 생필품 조달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달러 부족으로 인해 식료품 수입이 줄어들었으며 특히 가공 식품 문제가 점점 심각해졌다.
둘째 러시아혁명은 서유럽에 확산되지 않았고, 소련은 세계혁명을 포기하였으며, 러시아에 의해 강제로 소련에 편입되거나 소련에 의해 위성국가로 전락한 나라들은 점차 탈소련의 경향을 보이는 등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이완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선 러시아혁명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없었고 1차 대전에서 패한 독일의 집권당 사민당의 좌파가 혁명을 시도하였지만 세력이 크지 않았고 사민당 우파와 보수세력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서유럽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대립관계였으며, 먼저 민주화된 서유럽은 제정러시아에 대한 우월한 의식이 있었다. 서유럽의 다수의 좌파들도 1차 대전에서 패한 제정러시아에서 발생한 혁명이 유럽에 적용돼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사후에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와 공존하는 것을 수용하였으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이 주도한 유로코뮤니즘을 보듯이 유럽에서 폭력혁명 대신 선거혁명 모델을 적용하고자 하였다. 미국에서는 기독교와 양당제, 레드컴플렉스로 인해 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사회주의 세력이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제3세계를 지원하는 수준에 불과하여 연속혁명이나 세계혁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이 주도한 코민테른 역시 제3세계의 혁명에 영향을 미쳤을 뿐 서유럽에 혁명수준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냉전 기간 동안에 일부 제3세계에서 좌익혁명이 발생하였지만 소련 체제를 옹호하고 세계혁명으로 발전할 정도의 혁명은 없었다. 2차 대전 이후 코민테른마저 해체되었고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에서 대회를 여는 수준의 연대에 그쳤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동유럽은 소련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따라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소련은 동유럽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친소정권을 세웠으나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에서 반소 봉기가 일어났으며 유고는 소련으로부터 이탈하여 독자노선을 걸었다. 특히 과거에 러시아, 소련에 영토를 일부 할양하였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반소적인 정서가 강한 폴란드에서 1956년 반소 민족주의 정권이 성립하여 1970년까지 유지되었다. 1976년 물가폭등으로 인해 노동자 학생이 봉기하였으며, 1981년부터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노조가 전국적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었으며, 교황이 방문하여 민주화를 촉구하는 등 서방의 지원도 확대되어 1990년 바웬사가 민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소련은 냉전 기간 동안 친소정권에게 각종 원조를 제공하면서 독재를 묵인하였다. 서구가 1970년대까지 황금기를 겪은 이후 소련과 동구권은 서구에 비해 경제수준과 생활수준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자신들이 유럽인이지만 서유럽보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것에 대해 불만이 높아졌다. 점차 서구와의 접촉이 늘어나자 이러한 불만이 증가하였다.
동유럽 인민들의 최대 불만은 생필품 부족 등 경제적인 측면과 자유를 제한하는 감시체제였다. 특히 소련이 재정위기로 인해 사회주의 블록에 대한 지원을 삭감하자, 경공업과 에너지 부족으로 인한 인민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소련 대신 서구와 협력하려는 경향이 높아졌다. 소련이 약화된 1989년 헝가리, 체코, 불가리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몽고 등 대부분의 소련의 위성국가에서 탈소 민주화시위가 발생하였다.
셋째 소련은 러시아혁명 직후부터 미국과 서방의 군사적 압박과 경제봉쇄 및 체제전복 공작에 시달렸는데, 소련은 점차 이런 체제 피로도를 극복할 수 없게 되었다.
1차 대전 중 협상국과 동맹국 모두 군대를 파견하여 적군과 싸웠다. 1917년 윌슨 대통령은 러시아제국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윌슨 대통령에게 파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윌슨 대통령은 19186월 전쟁장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5천여 명으로 구성된 북러시아 원정대(American North Russia Expeditionary Force)를 러시아 북부 Arkhangelsk에 보냈다. 미국의 개입 명분은 러시아 제국에게 제공한 전쟁물자의 회수와 체코군의 구출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사회주의혁명이 시간이 지나면 쇠약해져 민주주의를 회복할 것이라고 보았으며 전면전은 적군을 더 단결시킬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전면전은 회피하였다.
윌슨 대통령은 한편 8천여 명으로 구성된 시베리아원정대(American Expeditionary Force Siberia) 역시 불라디보스톡에 상륙하였다. 윌슨은 겉으로는 적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의 민족자결과 독립을 위해 개입한다고 하였지만 시베리아의 자원과 철도를 일본이 차지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모든 미군은 연합군과 함께 1920년 철수하였으나 일본은 1922년까지 시베리아 일부와 사할린 북부를 지배했고 1925년 사할린 북부를 돌려주었다. 미국의 러시아혁명 개입으로 미국과 소련은 당분간 냉냉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후버 대통령은 국내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대기근에 대한 인도적 목적으로 1921년 소련에 대규모 식량 지원을 하였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정부는 소련정부에게 소련에서 국유화된 미국 자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1933년 미국의 자본가들과 언론인들은 소련 진출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소련과의 관계회복을 주장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과 협상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교역 확대와 과거 러시아 제국의 채무 변제, 미국 자산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며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다. 하지만 미국이 원하는 수준의 교역이나 보상은 없었다.
1933William Bullitt 초대 주소련미국대사가 파견되어 1936년까지 주둔하였지만 Bullitt 는 반소인사가 되었다. 미소관계는 다시 냉냉해졌지만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은 미국의 주요 우방이 되었으며 미국의 무기지원 프로그램(Lend-Lease program)에 따라 비행기, 함정 등의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2차 대전에서 1700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일이 항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독일군은 소련 침공에 실패하여 소련주둔군 사령관이 항복하였으며, 동유럽에서 베를린까지 소련군에 밀렸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2차 대전 중에 동유럽에서 독일에게 치명타를 안기고 있는 소련에게 경제적 지원은 물론 전쟁물자까지 지원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세계평화를 위해 소련과 협력해서 전쟁을 빨리 끝내고 UN을 통해 세계질서를 안정화시키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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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721pixel, 세로 500pixel
<미소의 국방비 지출 출처 : (Jose Luis Ricon. 2017 : 163)>
 
트루먼 대통령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급서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과 달리 정반대의 반소정책을 채택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이 정립한 냉전 시기 미국의 소련에 대한 전략은 지정학적으로 소련이 대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봉쇄하고 군사적으로 군비증강과 지역분쟁에 힘을 소진하도록 하며 경제적으로 교역을 차단하고 심리적으로 자유화 정책, 인권정책 등으로 체제 내부의 불만을 심화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이 해체되기 직전 정규군은 5백만여 명이 넘었고 예비군은 천만 명이 넘었다. 소련군은 주도 동유럽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소련은 붕괴 당시에도 동독에서만 5만여 명을 주둔시켰다. 소련의 국방비는 2차 대전 중에는 미국보다 높았지만 전쟁 직후 감소하였다. 1950년 소련의 국방비는 미국의 국방비에 비해 낮은 수준이었으나 1960년대부터 급증하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 미국의 국방비를 추월하였다. 이후 미국의 국방비가 급증하여 소련의 국방비도 증가되었지만 1980년대 초반 미국의 국방비와 같은 수준이었다. 재정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이른 소련의 국방비는 1980년대 초반 이후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았다
소련은 레이건 대통령이 1983년 추진한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 등 소위 스타워즈에 대응하여 군비를 약간 증강하였지만 국방비에 부담을 주는 액수는 아니었다. 소련은 미국의 전략방위구상 이전에 이미 1976년 자신의 우주방위계획 Skif Project를 수립하고 있었지만 1987년 이후 더 이상 추진되지 않았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미국의 군비증강에 대응하기보다는 군축 협상을 선택하였다.
레이건 정부 당시 소련은 추가적인 군비증강을 할 수 없었던 조건이었기 때문에 레이건의 군비증강은 결국 소련의 군축협상을 도출하는데 성공한 셈이었다. 미국과 군비경쟁을 피하려는 소련의 이러한 태도는 재래식 무기경쟁에서도 나타난다(Amundsen, 2017: 78-80). 소련의 국방비는 1980년 중반 이후 재정적자로 인해 소련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국방비 보다 더 급속하게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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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701pixel, 세로 527pixel
<미소의 GDP 대비 국방비 비율 출처 : (Jose Luis Ricon. 2017 : 161)>
 
냉전 기간 중 소련에 경제적 타격을 준 것은 미국의 저유가 정책이다. 1910년 처음으로 발견되어 1915년부터 시작된 원유 생산은 1928년부터 본격화되었다. 1950년대부터 10년 동안 수출을 위해 원유 생산이 두 배로 증가하여 소련은 세계 제2의 원유생산국이 되었다. 원유 수출은 소련 수출액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미국은 원유의 개발원가가 낮은 중동국가를 지배하면서 이들에게 석유의 증산을 통해 저유가 정책을 강요하였다. 저유가 정책은 소련,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미국의 적대국가를 겨냥한 것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유전 개발 원가가 높은 영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취약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를테면 201412월 기준으로 유가가 60달러 일 때 각국의 원유 생산비용을 보면 사우디아라비아가 25달러 이하로 가장 낮고, 중동은 40달러, 러시아는 45달러 수준이며, 미국은 55달러, 중국은 62달러, 미국의 셰일가스는 80달러 수준인데, 만약 사우디아라비아나 중동이 원유 생산을 늘려 국제 유가가 45달리 이하로 떨어지면 러시아는 원유를 팔 수가 없게 된다.
미국과 서방이 소련과 공산권에 접근하기 힘들었던 데탕트 이전에는 일반적인 반체제 공작은 방송선전활동이었다. 1942년 나치 치하의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미국 국무부의 미국의 소리 방송이 냉전시기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에 대해 각국 언어로 반공선전에 대한 방송을 시작하였다. CIA는 동유럽에서 좀 더 과감한 선전활동을 하기 위해 1950자유유럽방송(Radio Free Europe)’을 별도로 만들어 본격적인 체제전복을 선동해왔다. 주로 동구권 국가들의 피난민들을 방송요원으로 채용하였다. 소련은 이 방송의 선전공작에 의해 동구권 주민들이 사상적으로 동요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연간 최고 3,000만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예산을 들여 전파차단 조치를 취했다.
1956년 헝가리 봉기 당시 자유유럽방송의 헝가리 지국은 만약 봉기가 일어난다면 미국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내용을 방송하여 반소 민족주의자들을 부추겼던 것으로 드러났다. 헝가리 봉기의 참사는 CIA 내부에 심각한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심리전을 이용한 미국의 비밀공작은 전반적으로 쇠퇴했다.
데탕트 이후 미국과 서방에게 소련의 상황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 이후부터는 반체제공작이 주로 소련의 인권문제에 개입하는 것이었다. 소련 내 인권운동가를 지원하거나 미국으로 망명시켜 소련의 폭압을 알리고 해외에 반소기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소련의 수소폭탄을 설계한 사하로프 박사가 인권운동에 나서자 미국과 서방은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도록 하여 소련 내 인권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고르바초프가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가택연금 중이던 사하로프 박사를 사면해주었다. 작가 솔제니친은 소련 사회를 고발하는 저술활동을 하는 중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러 출국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고르바초프 이후 미국과 서방이 소련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되자 반체제 공작은 반공단체, 인권단체, 민주화단체, 종교단체, 분리주의자 단체 등을 직접 지원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가장 과감한 반체제공작은 소련이 지원하는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전복하고 소련군에 저항하고자 하는 오사마 빈라덴과 같은 이슬람과격주의자들에게 무기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정책으로 인해 시위와 집회, 소요를 부추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반체제 공작은 이 부분에 집중되었다. 이미 미국은 냉전기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운동을 통해 공산권 국가의 체제전환 혹은 체제진화를 추구하는 소프트 파워 전략을 구사하였다. 특히 진 샤프가 정립한 스워밍 전술은 비폭력전술로서 야당의 시위를 지원하여 적대적 정부를 민주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서 인터넷이나 휴대폰 메시지 등 다중의 최첨단 네트워크를 활용한다.
진 샤프는 1983년 포드재단과 미국 의회와 CIA가 지원하는 국립민주주의기금(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의 자금을 받아 알버트 아인슈타인 연구소를 설립한 후 전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비폭력 전복 행위를 자문해주고 있다. 진 샤프는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 직전에 중국을 극비리에 방문하여 민주화 세력을 지원하였다. 1990년 저서 시민을 토대로 한 방어 전략은 독립시위를 주도한 리투아니아의 국방장관이 핵폭탄보다 더 갖고 싶은 책이다.”라고 할 정도로 발트 3국의 독립시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미국 국방부는 진 샤프의 개념을 받아들여 소프트 파워 전략을 구체화한 전방위 지배 전략을 수립하였다. 진 샤프의 1993년 저서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 해방을 위한 개념 체계 -.”은 공산정권이나 비민주적인 정권을 타도하는 비폭력적 전술을 제시하고 있다.
 
소련 국가의 붕괴 원인
 
 
첫째 소련은 유가하락, 원조경제, 경제정책 실패, 물가급등 등으로 인한 재정적자 급증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50년대 이후 소련에서 석유와 가스 개발이 확대되자 이를 수출하여 얻는 경화 즉 달러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오일 달러는 소련에서 자급자족할 수 없는 가공식품이나 경공업 제품 등을 수입하는데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수입 물품의 일부는 오일 달러와 함께 공산권과 소련에 우호적인 개발도상국에 차관으로 혹은 무상으로 지원되었다. 이런 시스템은 1970년대 오일이 급등하면서 소련에 부담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운영될 수 있었다. 고유가 시대인 1970년대까지 값싼 노동력으로 채굴된 소련의 원유는 서유럽에 국제시세대로 팔았고 사회주의 블록에 싸게 팔았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에 유가는 하락하는 반면 소련의 노동자의 임금이 높아져 원유의 생산비용이 높아졌다. 따라서 브레즈네프는 1975년대 후반부터 재정에 소요되는 달러 획득을 위하여 정책을 바꾸어 동유럽에게도 원유를 시세대로 팔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생산을 급증하여 원유 가격이 폭락하여 소련의 달러 수입이 줄어들었으며,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인해 서유럽에 대한 원유수출이 급감하였다. 고르바초프는 가격경쟁력 있는 원유의 생산을 위해 원유산업에 대한 투자를 증대하였고 시장원리를 도입하여 동유럽에게 원유 가격의 인상을 통보하고 원유 대금으로 달러를 요구하였다. 또한 서방의 투자도 허용하였다(Goodrich. 2013).
국제유가는 1970년대 폭등하여 1982년에 고점이었으며, 이후 1988년까지 하락하였다. 이후 국제 유가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가격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소련의 원유 생산비용이 높아졌지만 유가가 계속 떨어지자 소련의 석유는 중동 석유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져 원유 수출이 급감하였다. 그로 인해 에너지 수출로 인한 달러 수입이 감소하자 외화부족 현상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소련은 자신과 사회주의 블록을 위해 서방으로부터 소비재 상품을 계속 수입해야만 하였다. 결국 달러 부족으로 인해 재정적자에 직면하였다.
유가하락이 소련경제에 미쳤던 영향은 현재 러시아가 유가하락에 영향받는 충격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12년 기준으로 러시아의 수출 중 32%가 원유, 13%가 천연가스, 2.3%가 석탄이며 이러한 에너지 수출은 총수출의 48%에 달한다. 나아가 전체 에너지 산업은 러시아 GDP30%, 수출의 70%, 재정수입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유가가 약 10% 떨어질 때 러시아 GDP는 약 1%가 하락한다(김동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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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지민. 2015. “지난 40년간 국제유가 변동 추이.”세계일보(2015.01.02.)>
 
따라서 유가 하락은 러시아 경제에 직접적인 치명타가 되곤 한다. 1996년에 고점을 찍은 원유 가격이 이후 계속 하락하면서 러시아는 1998년에 들어 단기 유동성 위기로 인해 IMF의 차관을 빌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불황으로 유가가 하락하자 러시아의 루불화 가치는 6개월 사이에 50% 가까이 폭락하였다. 2008년 경제성장률은 5.6%였지만 2009년 경제성장률의 1% 이후로 예상되었지만 실제로는 마이너스 7.9%를 기록하였다.
2014년 유가가 하락하자 루불화의 가치는 폭락하고 국가신용등급이 경제파탄 직전을 의미하는 '투기등급 직전'으로 추락하였다. 그에 따라 물가도 전년도에 비해 11.4%로 두 배의 증가율을 보였으며 시민들이 몸으로 느끼는 생활물가 상승률은 이보다 더 높았다. 유가 폭락 이후 1년간 외환보유액이 1,200억 달러 이상 줄어 총액이 39백억 달러로 감소하였다.
경제상호원조회의, 즉 코메콘(COMECON, 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1949년 마살 플랜에 대응하고자 하는 소련의 주도 아래 창립되었으며, 10개 국가가 회원이며, 12개 국가가 준가맹국 혹은 협력국, 참관국이었다. 코메콘의 무역체계는 달러를 사용하지 않는 물물교환 즉 구상무역이었다. 따라서 소련과 공산권 나라들은 달러를 얻기 위해 서방과 교역을 할 필요가 적었다. 코메콘은 석유와 석탄을 중심으로 197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교역을 하였다. 데탕트 시절에 동유럽과 중부유럽은 서유럽과의 교역을 증대시켰다.
소련은 1954년부터 1991년까지 연평균 총국민소득(GNI)0.20~0.25%를 공산권 국가와 개발도상국가에 대한 대외 원조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추계하면 총780억 달러이다(김동혁, 이상준, 2018). 이러한 대외원조는 주로 코메콘을 통해 집행되었다. 소련이 대외원조 기금의 대부분을 부담하였지만 동유럽도 일부 부담하였다. 유상 차관의 경우 제3세계는 1% 이하의 이자를 부담하였으며 동유럽은 2-3% 수준이었다.
코메콘의 회원국인 베트남 정부의 비공식 추계에 따르면, 1965~75년의 전쟁 기간 매년 약 7억불의 원조가 소련으로부터 왔다(최우영. 2011). 또한 1987년 코메콘의 대외원조의 3/4은 쿠바, 베트남, 몽골에게 집중되었는데, 각각 20억불, 40억불, 10억불 정도였다. 소련과 동유럽의 제3세계의 원자재나 농산물을 시장가격보다 비싸게 사는 방식으로 지원을 하였다. 쿠바는 설탕의 80%를 이렇게 동유럽에 팔 수 있었고, 몽골의 지하자원도 시세보다 비싸게 팔렸다(Glenn, 1992).
흐루시초프 이후 소련은 오일을 수출하는 대신 다른 나라가 만든 상품을 대가로 받았다. 1970년대부터 소련의 원유와 천연가스가 시장 가격 이하로 코메콘 국가에게 제공되었다. 소련은 제3세계에 동유럽보다 낮은 가격에 원유를 공급하였다. 고르바초프 때 동유럽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파이프라인 프록젝트가 추진되었다. 소련은 손실을 감수하면서 국제유가 보다 낮은 가격으로 사회주의 블록 국가들에게 석유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재정이 악화되었다.
1980년에 들어 코메콘은 침체에 빠졌다. 1980년대 후반 코메콘이 붕괴되면서 공산권 국가들은 교역을 하기 위해 달러가 필요해졌는데, 달러 부족으로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지 못하거나 재정적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동유럽 일부 국가들은 1980년대 들어 일부 시장 기능을 도입하는 등 개혁에 나섰으며, 소련의 관료들은 동유럽 모델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의 경제분야는 크게 군수분야, 에너지 분야, 농업 분야로 나눌 수 있었다. 1987년 고르바초프는 1965년에 도입된 국영기업의 독립채산제를 경공업, 자동차공업, 콜호즈 등에 확대하였고 가내 생산과 수리업 등 29개 업종에 대해 민간 기업을 인정하였으며, 외국과의 합작 투자도 허용하였다. 소련의 무역을 통제하던 기관이 폐지되었으며, 계획경제 기구들도 대폭 축소되었다.
주요 산업의 실질적인 경영자는 공장지배인이거나 공장 지배인 출신 반관반민의 자산가였으며 이들은 1990년에 올리가르히라는 독점자본가 계급으로 전환되었다. 신층자본가 계급은 관료와 밀착하여 부패를 일삼는 한편 경제개혁에 저항하였고 그 결과 경제개혁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오히려 혼란이 증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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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악화 : 출처(Miller, Chris. 2016)>
 
경영자유화로 인해 자본가들의 수익은 늘었지만 사회복지체계가 개혁되지 않아 이들은 사회복지비용을 부담하지 않았다. 반면 국가의 수익은 줄어들었지만 국가는 여전히 사회복지제도를 책임져야 하므로 재정적자는 확대되었다. 유가 하락과 경제개혁 실패로 인해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소련 말기인 1985년부터 1990년 사이에 재정적자는 GDP10% 이하에서 30%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해 경제성장률은 1980년대 중반 1% 내외였지만 후반에 이르러 거의 성장이 중단되었다.
소련은 재정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각종 보조금 삭감, 미국과의 군축, 증세 등의 정책을 시도하였다. 인민에 대한 보조금이나 사회주의 블록에 대한 재정지원은 인민들과 타 사회주의 국가의 반발에 직면하여 삭감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미국과의 군축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 1979년부터 1989년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의 침공으로 인해 군비는 그다지 감축되지 않았다.
증세는 주로 간접세인 거래세를 통해 추진되었는데, 사회주의 성격상 사기업에 대한 법인세나 소득세의 기반이 약하였고, 세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인민들에게 조세저항이 약한 간접세가 수월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암시장이 발달함으로써 증세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소련 사회에서 알콜 문제는 심각하였기 때문에 알콜의 생산과 매매 및 소비를 제한하였는데, 암시장은 알콜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전체 소비품으로 확대되었다.
소련 경제는 기본적으로 배급경제라서 인민들은 화폐를 많이 소유할 필요가 없었다. 기업 역시 대부분 국영기업이라서 기업 간의 거래는 미리 정해진 가격지표로서 이루어지므로 이러한 거래에 통화가 필요 없었다. 그런데 소련은 점차 배급체제를 일부 축소하고 구매체제로 전환하면서 임금을 인상하였고 임금 지불을 위한 화폐를 추가로 발행하였다.
특히 고르바초프는 1987년 사회복지제도를 대폭 축소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30% 내외로 인상하였다. 인민들은 임금인상으로 화폐를 보유하게 되었지만 경공업의 침체로 인한 생필품 부족으로 화폐의 가치는 떨어지고 생필품의 가격은 상승하였다. 나아가 소련은 각종 경제정책이 실패하자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화폐를 남발하였는데, 이는 기존의 인플레를 더욱 악화시켰다. 또한 소련은 경영자유화, 투자자유화, 거래활성화를 위해 통화량을 증가시켰지만 유동성 함정으로 인해 경제를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인플레를 심화시켰다.
통화량 증대로 인한 인플레는 1980년대 중반에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재정적자 확대, 경제정책 실패, 화폐남발로 인해 1985년 이후 급증하였다. 경제개혁이 있던 다음해 1988년 인플레는 최대 65%를 기록하였으며, 그 뒤에도 50% 이상의 수준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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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 추이 : 출처(Miller, Chris. 2016)>
 
 
둘째 처음부터 소련에 강제로 편입된 이질적인 공화국들이 소련 연방의 중앙권력이 느슨해지자 민족문제로 인해 소련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하였고 연방유지파의 군부 쿠데타가 실패한 후 중앙권력은 이를 저지할 실질적인 권력을 상실하였다.
소련의 연방체제는 인종과 언어, 그리고 종교가 다른 15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되었다. 러시아가 가장 큰 면적과 인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공화국을 완전히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다. 정치체제나 군사체제에 있어서도 각 공화국은 자율성이 있었고 러시아에 완전히 종속된 상태는 아니었다.
소련 연방 중 가장 불안한 공화국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이었다. 이들 나라는 주로 독일과 러시아뿐만 아니라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의 각축장이었다. 1차 대전 이전까지 자치권을 갖는 러시아의 영토였다고 1차 대전 이후 독립되었다. 그런데 1939년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양분하고, 발트 3국을 러시아에 양도하는 밀약을 체결하였으며, 소련은 1940년 발트 3국을 침공하여 소련 영토로 만들었다.
이들 나라들은 독일 문화가 강하고 종교나 언어 측면에서 스스로를 중앙유럽이라고 자처하면서 유럽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이 점차 와해되는 과정에서 1989년 이런 밀약이 에스토니아 인들에게 널리 공표되면서 독립운동이 거세졌다. 결국 소련 연방 중 에스토니아가 제일 먼저 독립을 선언하였다.
고르바초프나 옐친 등 연방과 개별공화국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 연대가 쇠퇴하는 조건에서 이질적인 소련연방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각 개별공화국에게 좀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는 느슨한 연방을 구성하고자 협상하였다. 1991317일 실시된 전연방 국민투표에서, 발트 3국과 아르메니아, 조지아, 몰도바를 제외한 나머지 공화국들은 새로운 연방체제를 창설하는데 합의했고, 이어지는 협상에서 9개 공화국 중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공화국들이 새로운 연방 체제를 구성하는데 동의했다.
이에 따라 고르바초프의 제안에 의해 각 공화국들은 여전히 공산당이 지배하는 느슨한 새로운 연방협약을 19918월 서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옐친은 우크라이나의 불참과 공산당 지배의 존속을 이유로 서명을 거부하였고, 군부쿠데타로 고르바초프의 제안은 무산되었다.
보수파의 군부쿠데타 이후 소련 연방은 실질적인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러시아가 독립을 선언한 후 러시아의 예를 따라서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스가 독립을 선언하였다. 소련 연방의 해체가 기정사실화되자 옐친은 고르바초프를 배제하고 199112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정상과 비밀리 만나 소련 연방의 해체와 독립국가연합(CIS)의 성립을 내용으로 하는 벨라베자 조약에 서명하였다.
셋째 소련공산당은 국가에 대한 지도를 상실하였으며, 국가는 집단지도체제를 고르바초프 1인 지배체제로 전환하였으나 고르바초프는 개별 공화국을 견제하여 소련을 유지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흐루시초프가 제1서기가 되어 1964년 물러났으며, 이후 브레즈네프가 1982년까지 장기 집권하였다. 이후 권력을 장악한 안드로포프는 2년만에, 체르넨코는 1년 만에 사망하였다. 19853월에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러시아혁명 이후에 태어난 세대로서 첫 번째 지도자였지만 혁명세대가 모든 퇴장한 상태에서 권력 기반이 취약하였다. 19889월 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12월 최고회의를 폐지하고 인민대의원대회를 설치하였으며, 19903월에는 복수정당제와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집단지도체제를 폐지한 고르바초프는 인민대의원대회에서 대통령에 간접 선출되었지만 자신의 주변에는 자신을 지지해 줄 당과 국가의 간부들도 인민들도 없었다. 소련의 국회 격인 소련 인민대표회의가 1990년 소련 헌법에서 공산당의 국가에 대한 우위와 지도력 조항을 삭제한 이후 고르바초프는 소련연방의 대통령으로서 역할이 축소되었다. 그는 서방에서 인기가 높아졌지만 국내 권력기반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그는 집권 후 공산당에 대한 비판과 종교 활동, 그리고 제한적인 사유재산 제도, 서방 대기업의 일부 진출 등을 허용하였다. 그는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관료들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연방정부 인사를 하면서 기존의 연방 관료 대신 등 개별 공화국 출신의 신진 인사를 발탁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개혁과 개방 정책에 반대하고 연방의 강력한 권한을 고수하는 공산당 내 보수적인 연방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옐친을 19862월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발탁하는 등 개별 공화국의 엘리트들을 중앙정치로 끌어들였다.
 
옐친은 이미 고르바초프에 의해 198512월부터 모스크바의 시장에 해당하는 모스크바 공산당 제1서기가 되어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면서 시민들의 인기를 얻은 상태였다. 급기야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불충분하며 더디다고 공격하였으며, 그 결과 198710월 보수파의 저항으로 모스크바의 제1서기에서, 19882월 고르바초프에 의해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해임되는 등 중앙정치에서 밀려났다(정옥경. 2005). 하지만 옐친은 19893월 최초의 자유 총선거에서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89%의 득표율로 연방 대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옐친은 급진 개혁파의 수장이 되었고 공산당 내에서 고르바초프와 대립하다 19907제국시대는 끝나고 모든 국민은 자율적 결정권이 있다.”면서 급진 개혁파와 함께 공산당을 탈당했다(김춘옥. 1991).
넷째 고르바초프는 소련 국내와 동유럽의 독립운동과 자유화 운동에 대해 무력개입을 포기하고 이들 지역에서 탈소련의 정권이 부상하는 것을 방치하여 소련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미국과 군축을 추진하는 등 친서방적인 온건한 외교정책을 선택하였다. 그는 미국과 서방의 요구대로 반체제인사들을 석방하고 민주화 조치를 지속하겠다는 대외적 선언을 하였으며, 미국, 유럽, 중국, 일본, 한국 등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소련을 개혁과 개방으로 바꿔 나갈 것을 공언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연방 내에서 발트 3국 등 여러 공화국이 독립운동을 거세게 하고 동유럽에서 탈소련의 민주주의 시위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국내외 민주화운동을 탄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는 소련 내와 동유럽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도 과거처럼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지 않겠다는 신호로 인식되었다.
자유화 시위를 걷잡을 수 없이 번져 1989년 발트 3국에 이어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등 주로 이슬람 지역에서 대규모 민족주의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고르바초프는 민주화 시위가 거센 동독의 호네커 등 동유럽의 공산당에게 자신이 추진하는 것과 같은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였다. 특히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때에도 소련군은 동독 공산당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독일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서독의 수상 헬무트 콜이 제시한 거액의 대소 경제지원을 받는 것으로 독일 재통일에 승인을 보냈다. 고르바초프는 일본, 한국 등과도 관계를 정상화하는 대신 그 대가로 대규모 경제 지원을 받았다. 미국과 서유럽은 소련에 재정지원을 하면서 동유럽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 것과 국내 민주화와 인권을 개선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서방의 요구대로 개혁과 개방조치는 더욱 가속화하였다.
소련 내부에도 민주화와 인권, 자유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198612월 라트비아에서 반공산당, 반소련, 반러시아 시위가 발생하였고 같은 달 카자흐스탄에서 수천 명이 사상당하는 소요가 일어났다. 1987년 모스크바에서 5월 러시아 독립주의자들이, 7월에는 타타르족이 기습시위를 하였다. 1987년에는 발트 3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1988년에 이르러 소련 지도부는 각 공화국에서 민주화, 자유화,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경제적 문제로 인한 소련과 사회주의 블록의 노동자의 파업도 점차 확대되었다. 폴란드에서 연대노조의 성공으로 소련 내외의 노동운동은 더욱 과감해졌다. 19897월 시베리아와 우크라이나의 광부들이 파업에 나서 석탄으로 운영되는 산업들을 마비시켰고 광부 파업은 1990년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915월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파업과 경제혼란으로 소련 경제의 국내총생산이 10% 감소했다.”면서 에너지, 화학, 야금 분야의 파업을 금지시키고 주동자를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소련 지도부는 이미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다섯째 소련의 붕괴에 즈음하여 연방의 중앙권력은 공권력과 민주적 기반이 약화된 반면 소련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개별공화국의 공권력과 민주적 기반은 오히려 강화되어 소련은 자신의 해체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탄력성을 상실하였다.
소련 체제는 중앙집권 체제, 1인 지배 체제였기 때문에 중앙정부와 지도자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이를 일시적으로 대체할 공적 권력이 취약하였다. 소련 체제에 있어 공산당이 산업, 학교, 문화, 군대 등 전 분야에 간부를 파견하여 감시하고 정치적으로 지도하였다. 하지만 1990년 공산당이 국가에 대한 통제를 포기한 후 이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즉 국가권력이 혼란에 빠질 때 공산당이 국가 권력을 대체할 수 없었다. 또한 소련 연방의 중앙권력이 붕괴되면 연방을 지탱하는 지방권력이 작동해야 하는데, 지방권력은 오히려 소련 연방을 해체하는 쪽에 힘을 실었다.
보리스 옐친이 1990년에 러시아 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고, 19916월 직접 투표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어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탈당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연방의 대통령이었으나 인민대의원 대회에서 선출되어 옐친보다 대중적지지 기반이 약하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중앙권력은 경찰과 군대 등 공권력을 동원한다. 붕괴 당시 소련은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한 공권력이 있었지만 국가를 수호하는데 실패하였다. 소련군은 지역별로 군관구를 두고 있었으며 총참모본부 이외에 국방인민위원회가 있었다. 공산당은 정치장교를 모든 부대에 파견하여 통제하였다. 연방뿐만 아니라 각 공화국도 최소한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부쿠데타는 쉽지 않았다.
19918월 고르바초프와 옐친 등 소련의 지도부가 보수파인 수상, 국방장관, 내무장관, 국가보안위원회의 국장을 교체하려고 하자 이를 도청한 국가보안위원회의 국장이 부통령, 고르바초프의 비서실장까지 포함한 쿠데타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휴가차 크림반도에 있는 고르바초프에게 사임하고 부통령에게 권한을 넘기라고 요구하였으나 고르바초프가 반대하자 그를 억류하였다. 쿠데타 세력은 국가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고르바초프의 와병을 핑계로 부통령을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쿠데타 세력은 옐친을 구금하지 않았는데,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쿠데타를 진압하려고 러시아 공화국의 자체 군대에 계엄령을 검토하였다. 이에 쿠데타 세력은 연방 차원의 국가비상사태를 발령하였다. 하지만 크렘린을 보호하는 전차 대대는 옐친의 러시아 편으로 넘어왔다. 국가비상대책위원회는 모스크바의 연방군대에게 크렘린을 지키는 러시아 공화국의 군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일부는 거부하였고, 일부는 러시아 공화국의 편으로 돌아섰으며, 탱크부대 일부만이 크렘린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탱크를 저지하는 시민 2명이 죽고 부상자가 나오자 탱크는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고, 쿠데타 지휘부는 군대에게 철수명령을 내려 쿠데타는 실패하였다.
공산당의 보수파가 쿠데타를 주도하였으므로 공산당이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공산당의 활동은 금지되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연방정부는 실질적인 권한을 상실하고 쿠데타를 막은 러시아 공화국의 지도부로 권력이 넘어갔다. 러시아 연방군이 대부분의 무기와 인력을 흡수하였고, 소련의 붕괴로 독립한 다른 공화국들도 일부를 자국군으로 흡수하였다.
보수파의 쿠데타가 옐친과 반공산당 세력에 의해 실패한 후 권력은 연방을 해체하고자 하는 세력들에게 넘어갔다. 199112, 벨라베자 조약에 의해 소련은 해체되었으며, 고르바초프는 1226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다.
소련 붕괴 이후 옐친의 국내 지지는 급속히 쇠약해져 그의 권력기반은 대외적으로 서방의 지원이었으며, 국내 기반은 과거 기업 지배인이었던 레디드렉터라고 불리는 신흥 재벌이었다. 이들 신흥 재벌은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특히 석유와 가스 등은 서방의 거대자본과 협력하였다. 1993년 옐친은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확대하고 러시아의 서방화를 촉진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을 부여하고, 소련의 잔재였던 인민대표회의와 최고회의를 폐지하고 상하원을 신설하는 개헌을 시도했다. 이에 다수당인 공산당이 의사당을 점거하고 옐친을 탄핵하자, 옐친은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를 폭격하여 의회를 굴복시켰다. 옐친은 서방의 지원으로 1999년까지 집권하였으나 이후 자신이 발굴한 푸틴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중국의 개혁과정과의 비교
 
중국식 사회주의 발전모델은 정치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병행하는 사회주의시장경제모델이다. 이 모델에서 공산당과 국가는 인적 물적 자원의 거시적인 분배를 책임지면서 사회간접시설을 구축하고 국영기업 중심으로 국내 경제와 대외경제를 발전시켰는데, 이는 경제 운영방식에 있어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식 모델은 중국 내부 경제모델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칭화대 교수와 골드만삭스의 자문역을 지낸 레이모(2016)에 따르면 중국은 미국식 자유경제체제의 대외 확산 전략인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응하여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의제 아래 중국식 모델의 대외적인 확산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이 자신의 모델을 확산하려는 것은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우군을 만들어 안보적 위협을 줄이고, 대외 투자와 교역을 늘리며,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국의 자원을 획득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중국은 중남미,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 자원 국가에 대한 인적 물적 투자를 증대하고 있으며, 미국에 대항하여 경제협력체, 국가신용등급제도, 위안화를 중심으로 한 국제결제시스템 등 독자적인 국제경제체제의 구축에 힘쓰고 있다. 나아가 김관옥(2008)과 이보고(2014)에 따르면 중국은 중화문화의 확산을 위해 공자학원 등 국제적인 네트워크와 중국식 소프트 파워의 보급에 나서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실제로 덩샤오핑은 같은 시기에 비슷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Chris Miller(2016)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중국식 사회주의 모델을 소련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지도부와 관료들은 이미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기 이전인 1980년대 초반부터 상해 등 중국의 산업 시설을 시찰하면서 중국식 모델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덩샤오핑은 공산당과 국가를 구별하여 국사는 국가기관이 맡도록 하고 공산당은 다만 정치적으로 지도하도록 헌법과 법률을 수정하였는데, 고르바초프 역시 당과 국가를 구별하고 국가기관의 지위를 강화하였다는 점에서 동일하였다. 고르바초프가 도입한 국영기업의 독립채산제, 소규모 사기업의 인정, 부분적인 민영화, 시장의 확대, 서방과의 관계 개선과 투자 유치, 화폐사용의 확대, 무역의 개방 등은 중국의 개혁정책과 동일하였다.
고르바초프와 덩샤오핑은 개혁과 개방에 따른 국내외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실험을 위해 기꺼이 연대할 의사가 있었다. 특히 두 지도자 모두 국내의 민주화 시위와 소수민족 독립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다만 고르바초프는 국제적으로 개혁의 상징인 반면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19895월 베이징을 방문해서 덩샤오핑과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할 것을 합의하였다. 당시 베이징에서는 6월 천안문 사태를 앞두고 30만여 명의 중국 대학생과 시민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시위대들은 개혁과 개방의 상징인 고르바초프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어쨌든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방식을 수용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서방과의 교역을 추진하는 사회주의시장경제로 전환하고자 하였지만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과 달리 개혁을 완수할 국가적인 지도력이 없었기 때문에 소련은 붕괴하고 중국은 살아남았다.
첫째 소련의 개혁과 개방은 1985년 마지막 혁명세대인 체르넨코가 사망하자마자 권력을 잡은 신진엘리트 고르바초프에 의해 전격적으로 추진된 반면, 덩샤오핑 주석은 마오쩌둥 사후 실권을 장악한 1978년부터 1993년 퇴임할 때까지 전당적 토론과 전국가적 토론을 통해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점진적으로 실시하였다. 중국모델의 기본사항은 덩샤오핑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에 6번의 헌법 개정을 통해 법제화되었다. 개혁과 개방의 기본원칙을 담은 헌법 초안은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회의 토론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이는 정치국 확대회의와 전체회의를 거쳐 전국대표대회에서 결정되었으며, 최종적으로 국가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이 공포되었다.
1978년 헌법은 금세기 내에 중국의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 등의 4개 분야를 현대화한다는 목표를 선언하였다. 1979년 헌법 초안은 형식적으로 공산당이 아니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결정하는 모습을 취하였는데, 이는 헌법발의권을 공산당이 아니라 의회가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헌법은 현급 인민대표대회에서 직접투표, 복수후보, 무기명투표 제도를 도입하였다. 의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발의한 1980년 헌법은 문화혁명의 잔재인 대명, 대방, 대변론, 대자보의 권리를 의미하는 ‘4를 폐지하였다.
1982년 중국헌법은 마오쩌둥 시기의 헌법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1954년의 사회주의헌법을 토대로 하여 사실상 전면 개정했다. 1982년 헌법은 실사구시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개혁과 개방의 기본원칙들을 선언하였다. 이 헌법은 정치적으로는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의 1인 지배에 대한 평가를 반영하여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하여 권력을 분산하는 등 인치사회주의법치로 전환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중국의 당면과제를 초급공산주의로 나가가기 위한 생산력의 발전이라고 규정하고 상품경제와 시장의 도입, 경제특구, 대외개방, 공유제 등을 도입하였다.
1988년 헌법은 사영경제와 토지사용권의 양도를 허용하였으며, 1993년 헌법은 천안문 사태에도 불구하고 개혁과 개방의 원칙을 재확인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이 1992년 결정한 사회주의초급이론과 사회주의시장경제론을 선언하였다.
둘째 중국 공산당은 정치적 민주화가 아닌 경제 개혁과 경제적 자유를 먼저 도입하여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였다. 덩샤오핑은 농촌 개혁과 경제특구를 먼저 시범적으로 실시하여 개혁과 개방의 충격을 최소화하였다.
반면 고르바초프는 경제적 성과가 나기도 전에 정치적 민주화를 먼저 허용하여 경제 불만이 바로 정치적 불안으로 전환되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이상주의자였고, 덩샤오핑은 현실주의자였다. 덩샤오핑은 온갖 풍상을 겪은 혁명 1세대로 흑묘백묘론에서 보듯이 사고의 해방을 주장하면 관념적인 이념투쟁보다 실리를 중시하였다.
반면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대학 법학과 졸업한 후 최연소 정치국원과 당 내 2인자인 이데올로기 담당 서기를 지내 실질적인 경험이 부족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체르넨코를 보좌하다 1980년 초반부터 캐나다, 영국 등 서방을 자주 방문하여 서방의 영향을 많이 받은 상태에서 체르넨코 사후 갑자기 개혁파의 수장이 되었다. 고르바초프 역시 2007년 인터뷰에서 당시 소련 사회는 변화의 속도에 견디지 못하였고, 준비 없이 사회를 너무 빨리 개방하였다.”고 인정하였다.
셋째 중국공산당은 집단지도체제를 강화하고 세대교체에 성공한 반면 소련 공산당의 경우 러시아 혁명 이전에 태어난 혁명세대들이 차기 세대에게 집단지도체제를 안정적으로 물려주지 못하였다. 소련의 혁명세대들은 집단지도체제를 1인 지배체제로 변질시켰으며, 공산당 지도부의 선임자가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하고 이후 후임자가 다시 또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 결과 소련 말기에는 안정적인 지도부가 구축되지 못하였으며,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장악하였을 때 공산당의 전현직 간부가 국정을 조율하는 집단지도체제는 실질적으로 붕괴된 상태였다.
반면 중국공산당의 경우 총서기 자오쯔양과 총리 리펑 등 새로운 지도부가 개혁과 개방 추진하고 실권자인 덩샤오핑은 배후에서 이들을 후견하였다. 즉 중국공산당은 전현직의 간부들이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며 권력의 세대교체를 성공시켰다. 등소평은 모택동의 과오를 비판하고 스스로 현직에서 물러나는 등 1인 통치를 청산하였다. 김정계(2008)과 정차근(2002)에 따르면 중국은 공산당 간부의 경우 60세 이상이면 중책을 맡지 못하게 하는 정년제를 운영하였고 정부의 각료급 이상은 2차례만 연임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당과 정부는 10년마다 지도부가 교체되었다.
또한 중국지도부의 핵심은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인데, 이정남(2018)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은 유능한 청년 당원들을 발굴하여 이들 정치 엘리트들을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성장시켜 집단지도체제의 안정적인 권력승계를 위한 장기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공봉진(2017)에 따르면 상해방, 공청단, 태자당 등의 공산당 내 파벌들은 특정 파벌이 독주하지 못하도록 서로 경쟁하는데, 그 결과 파벌간의 권력이 교체되어 비록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유지되지만 그 안에서 제한적인 권력교체의 효과가 나타난다. 또한 양갑용(2013)에 따르면 전현직 정치국 상무위원 등 중국공산당의 간부들은 베이징의 중난하이 지역에 주거시설과 업무시설을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일상적으로 교류하도록 하며 공산당의 주요 회의에 앞서 공식적인 혹은 비공식적인 집단 토론 혹은 집단학습을 통해 차기 지도부 등 중요 결정을 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였다.
넷째 러시아의 연방제는 중국의 중앙집권적 공화국에 비해 체제 불안요소가 더 많았다. 반면 중국은 연방제인 소련보다 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였으며, 특히 한족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면서 다른 민족을 억압할 수 있었다.
중국은 소수민족의 독립 문제에 대해 한편으로 조기에 강경 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 한족의 인구와 문화로 압도하는 정책을 구사하였다. 1951년 티베트를 점령한 공산당은 달라이 라마의 자치권을 보장하였으나 1958년 토지개혁에 반발하는 귀족들과 대기근에 항의하는 티베트 인민들이 봉기를 하자 유혈 진압하였다. 중국공산당은 달라이 라마가 망명한 이후에도 사찰을 파괴하는 등 탄압정책을 유지하였고, 서방은 중국의 소수민족과 인권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달라이 라마를 지원하고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였다. 중국공산당은 1989년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벌어진 독립 시위를 강경 진압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중국공산당은 1955년 자치권을 획득한 신장 위구르 지역의 독립 시위에도 유혈진압을 하는 등 소수민족 문제에 강경하다.
중국공산당은 역사 정립 사업인 공정사업을 통해 중국민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소수민족들을 한족에 문화적으로 복속시키고 있다. 공정사업은 중국의 고대사를 미화하는 단대공정, 탐원공정 이외에도 베트남 방향의 남방공정, 몽골 방향의 북방공정, 티베트 방향의 서남공정, 신장위구르 방향의 서북공정, 만주 방향의 동북공정을 포함한다.
또한 중국은 소수민족 밀집지역에 한족들을 대거 이주시켜 지역주민으로서 지역 권력을 장악하고 소수민족을 한족 문화로 흡수하여 소수 민족 독립문제를 근원적으로 차단하여왔다. 특히 1990년까지 타림강 댐 건설을 하면서 위구르에 한족이 대거 이주해왔다. 이러한 방식은 민주화시위가 잦은 홍콩에도 적용되었다.
다섯째 덩샤오핑은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여 소요사태의 확산을 저지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중국공산당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혈진압하면서도 개혁개방정책을 지속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9894월 전 공산당 총서기 호요방이 사망하자, 애도활동이 천안문 광장의 학생소요로 발전했다. 이에 이붕은 당 중앙을 대표하여 부분적으로 계엄을 실시하여 진압했다. 19896월 중국공산당 134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동란 지지와 당분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조자양을 당 중앙의 총서기 등의 직위를 박탈하고, 장쩌민을 총서기로 선출했다. 장쩌민은 같은 해 11135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제3대 지도집단의 핵심이 됐다.
 
 
사회주의 실패와 구별되는 소련 국가의 붕괴 원인
 
피터 터친에 따르면 강력한 제국은 번영을 통해 인구증가와 과잉인구, 1인당 소독의 감소를 순차적으로 경험한다. 처음에는 저임금을 활용하여 상류층이 증가하지만 상류층의 인구와 탐욕이 증가하면 생활수준이 열악해진 일반 대중의 불만이 증가한다. 엘리트들은 국가에 의지해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국가의 지출을 늘리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은 악화된다. 국가 재정이 파탄나면 군대와 경찰을 동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대해진 엘리트층 내부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빈곤한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기근과 전쟁, 전염병을 거친 후 평민과 엘리트의 인구 모두가 감소하여 내부 경쟁이 쇠퇴하여 안정과 평화가 찾아오면 새로운 제국이 탄생한다(터친, 20111: 20). 피터 터친의 이러한 분석은 소련의 붕괴 과정에 비교적으로 부합한다.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은 1980년대 이후 사회주의 실현의 사명이라는 근본주의적 굴레나 운명론적 결정론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사회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국가의 생존을 위해 개혁과 개방에 나섰다. 소련이나 중국을 포함하여 사회주의 국가는 투입과 산출이 비례하는 일차원적인 경제성장이 끝난 후 심각한 경제침체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경공업의 후진성으로 인해 생필품이 부족하고 개인적 자유가 억압되어 인민들의 불만이 쌓여져 갔다. 서방의 봉쇄와 공작은 여전하였으며, 소비품의 수입 대금으로 쓸 외화가 부족하여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중국과 소련 모두 사회주의 실현에 실패하였지만 국가의 붕괴여부는 불일치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실현 실패 원인과 국가의 붕괴 원인은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사회주의 실패 원인인 낮은 생산력이나 연속혁명의 불발, 변질된 계획경제를 소련이라는 국가의 붕괴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 붕괴 원인을 사회주의의 실패 원인과 혼동하는 것이다. 소련 자체의 붕괴는 사회주의 실패 이후의 문제이며, 국가의 해제에 관한 문제이다.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동시에 하는 급진적인 고르바초프 방식은 경제개혁 이후 정치개혁을 점진적으로 하고자 하였던 중국의 방식에 비해 소련이 불만과 혼란을 통제하는데 더 큰 난관을 조성하였다. 먼저 개혁의 경제적 효과가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이 쌓인 개별 공화국과 개인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자, 이들은 소련 연방 자체를 불만의 표적으로 삼았다. 구 엘리트를 대변하는 고르바초프는 체제의 폐지가 아닌 개선을 추구하였지만 옐친처럼 기존 체제를 지배도구로 인식한 신엘리트들은 고르바초프의 구상에 반대하였다.
소련 연방의 해체 과정을 통해 부상한 개별 공화국의 신엘리트들은 경직된 사회주의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민들, 연방의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주의자들, 소련을 붕괴시키려는 서방의 지지를 받으며 소련 국가를 해체하였다.
소련이라는 국가는 이미 연방의 해체 과정에서 실질적인 공권력과 지도 중심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개별공화국의 엘리트들, 민족주의자들, 자유를 갈구하는 인민들,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의 소련에 대한 공격에 대해 제대로 된 반격을 할 수 없었다. 연방 독자의 공산당이 해체되고 연방의 집단지도체제도 없는 상태에서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된 고르바초프의 권력은 직접 투표로 당선된 개별 공화국의 대통령과 비교하여 지역적 토대는 물론 인민의 지지를 받는 민주적 정당성도 없었기 때문에 소련 해체를 막을 민주적 역동적 주체들을 조직할 역량이 없었다.
첫째 소련의 붕괴에 대해 체제의 한계로 인해 불가피하다는 근본주의적 관점과, 체제의 한계가 있더라도 그것을 수정하면 존속할 수 있기 때문에 소련 붕괴는 불가피하지 않다는 진화론적 관점이 있는데, 소련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진화론적 관점에서 사회주의 이념과 제도를 수정하려는 의사가 분명하였다.
Robinson(2017)에 따르면 전체주의 사회는 국가이데올로기, 일당체제, 공포정치, 관료에 의한 경제 통제, 언론장악, 군국주의 등이 서로 보완해줄 때 제대로 작동하는데, 이중 하나라도 붕괴되면 전체 사회가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전체주의 사회는 그 경직성으로 인해 체제 위기 상황에 있어서도 개혁을 추진할 수 없기 때문에 체제 붕괴는 시간문제이다.
하지만 반대 견해에 따르면 국가 자체와 그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구별하면서 전체주의 국가라도 조건에 맞추어 변화되며, 국가 자체의 생존을 위한 자신의 시스템을 수정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소련이라는 국가는 소련의 시스템을 제대로 변경하였다면 얼마든지 존속할 수 있었다. 따라서 소련이라는 국가는 그러한 성공적인 변경을 방해하는 돌발적인 상황 때문에 붕괴된 것이다.
과거 역사를 보면 자신의 이념이나 정치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체제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1980년대 이후 어려움에 처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대부분 체제의 유지를 위해 자신의 이념과 제도를 수정하였다. 소련 지도부의 의사 역시 사회주의를 실질적으로 포기하더라도 국가를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은 이념보다 국가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이런 지도부의 속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소련의 붕괴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수정하여 국가를 유지하려는 과정 속에서 주어진 특정 조건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수정하면서 국가를 유지시키려다 발생한 소련 붕괴는 민족적 모순에 기인하였다. 소련의 경우 소비에트 연방은 처음부터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된 인위적인 통합이었다. 물론 사회주의가 발전하면 인종과 언어, 민족과 문화가 달라도 하나의 지구촌을 형성할 수 있지만 소비에트는 처음부터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소련연방에서 가장 먼저 탈퇴한 발트3국의 예에서 보듯이 사회주의 조국 러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강제적으로 묶인 것이었다. 언제든지 중앙권력이 느슨해지면 해체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또한 소련이 위성국가 체제를 만들어 폴란드처럼 소련과 적대적인 역사를 경험한 나라들에게 소련을 위한 완충국가를 강요하였지만 이러한 관계는 소련의 힘이 약해질 때 언제든지 파열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소련이 강력할 때에서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에서는 소련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적 저항이 있었다.
셋째 소련 붕괴를 막을 수 있는 민주적인 권력주체가 없었다. 먼저 체제전환의 소용돌이에 빠진 1980년대의 소련에 있어 중앙차원에서 권력의 세대교체가 실패하고 집단지도체제가 붕괴하였는데, 이를 보완할 지도 중심이나 정치적 대중 주체가 없었다. 나아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수호해 줄 노동자 대중은 소련이 사회주의 실현에 실패함에 따라 관료들에 의해 압살당하였다. 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의 인반 인민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 경도되어 연방 체제를 수호할 대상이 아니라 소멸되어야 할 지배기구로 인식하였다. 소련이 러시아 대민족주의에 근거하여 민족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억압하였는데, 정작 러시아 사람들은 연방체제에서 러시아가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연방에서 이탈하고자 하였다.
김근식(2010)에 따르면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은 경제부문과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정치부문을 동시에 변화시키는 체제전환이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변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체제전환에 있어 엘리트의 개혁, 대중들의 급진적인 요구,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서로 충돌하는 사회적 충격이 불가피해진다. 김근식에 따르면 이러한 체제전환에 있어 루마니아는 민중봉기로 기득권 세력이 제거되었고, 폴란드는 지배엘리트와 저항엘리트의 타협으로 체제전환이 성공한 반면 소련은 지배층의 분열로 위로부터의 개혁이 실패하고 체제가 붕괴되었다. 결론적으로 체제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불만과 저항을 중국의 당 엘리트들은 극복한 반면 소련은 신구 엘리트로 분열되어 극복하지 못하였다.
소련붕괴를 막으려는 구지배층과 소련 붕괴를 획책하였던 신지배층은 각각 고르바초프와 옐친으로 대표된다. 옐친과 같은 연방의 지방권력 즉 각 공화국은 연방을 유지하기보다 오히려 연방을 해체하는 쪽을 선호하였다. 특히 연방 내에서 가장 큰 공화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앞장섰다. 소련 붕괴를 저지하려는 고르바초프는 옐친과 달리 최고인민회의에서 간접 투표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층이 없었다.
소련 체제를 지탱해줄 밑으로부터의 대중적 권력도 없었지만 상층의 대의적 권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연방의 의회나 연방의 사법부 역시 각 공화국과 구별되는 연방 차원의 실질적인 대의적 권력을 보유하지 못하였다. 소련공산당은 이미 정치적 지도의 권한과 의무를 1990년 헌법에 의해 포기하였으며, 개별 공산당 조직과 개인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연방을 보호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19918월 고르바초프는 옐친과 연방을 공동 통치한다는 조건으로 연방의 공산당 조직을 해체하였다.
소련이라는 국가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소련의 내분을 극복하는 장치이다. 또한 그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게끔 하는 문제는 주체의 능력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소련 국가의 붕괴 원인은 소련 연방의 취약성과 그 취약성을 극복하지 못한 민주적 주체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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