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미국의 중동 지배의 역사

오스만 제국은 중앙유럽까지 지배하였으나 1492년 그라나다에서 철수함으로써 스페인을, 1699년 헝가리를, 1829년 그리스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1912년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주변을 제외한 유럽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알바니아가 독립하였으며 불가리아그리스세르비아는 영토를 확장하였다데이비드 프롬킨(2015)에 의하면 현대 중동의 기원은 이 지역을 20세기까지 지배해왔던 오스만 제국의 몰락이다.
영국프랑스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 오스만 제국을 해제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이 계획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전후 문제를 다룬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해 실현되었다먼저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모든 이권을 박탈당하였다프랑스영국이탈리아는 비밀리에 "삼자 조약"을 체결하여 석유 개발독일의 오스만 투자 등 영국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한 독일의 이권을 넘겼다.

오늘날 중동의 여러 나라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오스만 제국이 1920년 세브르조약 영국 등 승전국에 의해 분할됨으로써 탄생하였다당시 중동은 페르시아 즉 이란을 제외하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발칸반도는 게르만계와 슬라브계가 지배권을 놓고 대결해왔다발칸반도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는 둘 다 슬라브 계열이지만 이슬람인 보스니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와 분쟁관계에 있었다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쇠약해지자 발칸반도가 독립하였다오스트리아 대공이 보스니아를 방문 중 세르비아의 사주를 받은 보스니아인에게 암살당하자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게르만 국가는 보스니아에 대한 세르비아의 지배권을 차단하고자 전쟁을 개시하였고 이에 세르비아를 지원하는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하였다이에 독일은 러시아를 침공하기 위해 프랑스를 침략하고자 하였으므로 프랑스와 영국 등이 참전하여 결국 제1차 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서방 열강들이 전쟁을 통해 자신의 영토를 분할할 것을 염려하여 어느 족에 가담할 것인지 고민하다 독일제국에 가담하였다오스만 제국은 1853년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기독교도들이 거주하던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에게 자치를 허용하는 등 사실상 지배권을 상실하였는데 오스만은 제1차 대전에서 독일을 도와 러시아 지역의 영토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세브르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어 지금의 터키로 축소되었다아라비아와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 아래 두고모로코와 튀니지는 프랑스의 보호 아래 두었다지중해 동쪽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가 갈라서 점령하여 영국 위임통치령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프랑스 위임통치령은 시리아 및 레바논에 설치되었다이밖에도 프랑스는 마라슈우르파 및 안테플 등을이탈리아는 아나톨리아 남서부를 차지하였고 아르메니아는 독립하였지만 터키의 침공을 받은 후 소련에 복속되었다.
오늘날의 터키 ·이라크 ·이란에 걸친 쿠르디스탄 지역에 거주하던 쿠르드족은 세브르조약으로 자치정권이 약속되었으나 로잔조약으로 취소되었다쿠르드족에 대한 독립 약속이 이행되지 않자 쿠르드족은 이 지역에서 지금까지 분쟁의 중심에 있어왔다여러 나라에 걸쳐 식민지 상태에 있던 쿠르드족은 1925년에는 술탄국을 건국하고자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진압되었다이란의 쿠르드족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자치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소련군 철수와 함께 붕괴되었다이라크령의 쿠르드족은 1991년 걸프전 이후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한편 그리스는 이 조약으로 이즈미르와 동부 트라크야 지역을 얻었는데터키로부터 추가적인 영토를 양보받기 위해 세브르 조약에 반대하였다그리스는 터키를 침공하였지만 1922년 케말 파샤가 그리스 군대를 격파하였다.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소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를 포함하는 오늘날의 터키를 탄생시켰다세브르 조약은 그리스와 전쟁을 하면서 잠시 무효화되었지만 그리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1923년 영국과 터키가 로잔 조약을 통해 오늘날의 터키 영토를 확정함으로써 그 효력이 다시 인정되었다.
이슬람은 종교적 지도자인 칼리프와 칼리프를 대리하여 세속을 지배하는 술탄을 구별하였다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이슬람의 술탄의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스스로 칼리포로 인식하였다이슬람의 성지인 아라비아 반도의 왕족들은 자신들이 술탄이 되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갈구하였다. 1차 대전 당시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분열시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여러 민족들에게 자신들에게 협력하면 전쟁 후에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였으며이들 민족의 반란을 유도하였다.
영국의 국방장관인 키치너는 오스만을 약화시키고자 무함마드의 고향인 아라비아인 이븐 사우드을 칼리프로 만들고자 하였다키치너는 영국령 이집트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공격하면 아라비아가 오스만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계획을 수립하고 1916년 이 계획의 실행을 위해 사이크스 피코 협정을 프랑스와 맺었다. 1916메카의 샤리프는 영국군의 지원 아래 아라비아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고자기 자신을 헤자즈의 왕으로 선포했다헤자즈 왕국은 1920년 세브르조약에 의해 독립을 인정받았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미 1902년 리야드를 탈환하여 네지드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이븐 사우디가 1차 대전 직후 오스만 제국의 혼란을 틈타 1921년 라시드 가를 멸망시키고 신정일치의 네지드 술탄국을 세웠다. 1925년 이븐사우드의 네지드 술탄국은 헤자즈 왕국을 정복하였고 이븐사우드는 1926년 네지드-헤자즈 왕국의 왕이 되었다이븐사우드는 1927년 제다 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는데 이 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알사우드 국왕은 1945년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후 친미노선을 걸었다후임자들도 이집트의 사다트와 함께 친미친이스라엘노선을 따랐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하였으며이로 인해 사우디의 친미노선이 강화되었다이후 미군의 주둔까지 허용하여 9.11테러의 명분이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절대왕정국가로서 의회수상 등이 없고 왕족이 모든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사우디는 세계 3위의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으며소말리아 등에 병력을 파견하였다사우디아라비아는 메카와 메디나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내세우며 이슬람 중심국으로 자부하고 있으나 정치적군사적문화적 영향력은 이집트나 터키에 미치지 못한다종교적 영향력은 이란과 경쟁하고 있다.
2016년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과의 수니파-시아파 갈등으로 빚어진 외교 문제로 인하여 이란과의 국교를 단절하였다이란이 핵무장을 한다면 사우디도 핵무장을 할 가능성이 있다사우디는 미국의 압력 때문에이란을 견제하려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사우디는 이슬람 극단주의 종파인 와하브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따라서 권력을 잡은 왕족은 겉으로 친미노선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반 국민이나 권력에서 소외된 왕족들은 반미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사우디의 일부 왕족들은 탈레반무자헤딘알 카에다, IS 등에게 재정 지원을 하고 있으며일반 국민들과 함께 이들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한다오사마 빈 라덴에게 흘러들어간 돈만 매년 600만 달러가 넘었다. 9.11 테러 희생자 유가족들이 테러 공격 관여 의혹을 받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9·11 소송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와의 방위계약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영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점령할 때 석유자원의 가치를 잘 몰랐으나 1차 대전 후 그 진가를 알았으며미국 정유회사들은 1930년대 초 사우디아라비아에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2차 대전 이후에 영미의 경쟁이 확연해졌다.
iii) 이집트
이집트는 1517년부터 오스만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1798년 나폴레옹의 원정으로 1801년까지 프랑스가 점령하였다. 1805년 오스만 제국은 무함마드 알리를 이집트 총독으로 보냈으나 무함마드 알리는 이집트 내 저항세력을 진압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통치의 재량권을 얻었다무함마드 알리는 서방의 지원으로 이집트를 근대화하고 군사력을 키웠다.
이집트는 1832년 레반트와 헤자즈를 정복하는 것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멀어졌으며 1841년 독립을 선언하였다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독립을 허용하지 않고 자치만을 부여하였다이집트 역시 오스만 제국과 타협하였고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은 무함마드 알리 가문의 총독직의 세습을 인정하였고 이집트 역시 오스만 제국에 공납하였다.
한편 무함마드 알리는 수에즈 운하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와 합작하였으나 프랑스의 이집트 진출을 견제하려는 영국이 공사를 방해하였다영국을 달래기 위해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이집트가 단독으로 보유한다는 합의 이후 수에즈 운하는 1869년 완공되었다하지만 운하가 개통되자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주식을 대량으로 매입하여 운하의 운영에 개입하였다그런데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혼란에 빠지자영국이 1876년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만들어버렸다.
영국은 1882년 이집트의 민족주의 저항 운동이 거세지자 반란 진압과 운하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상주시키고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았다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과 이탈리아 등이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려고 하자 영국은 과거의 조약을 전부 무효화하고 수에즈 운하를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었다. 1914년 영국은 이집트를 완전히 왕령식민지로 병합하려 하였으나 이집트인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대신 공식적인 영국의 보호령이 된다. 1차 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 운동에 따라 자유주의 정당인 와프트당의 주도로 1922년 이집트 왕국으로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이집트에 대한 터키의 권리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1922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공화국 대국민의회와 영국 간에 체결된 로잔조약에서 터키가 이집트와 키프로스이라크 등 옛 오스만 제국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면서부터다.
이집트는 1937년부터 별도의 군대를 가졌지만 영국군은 수에즈 운하의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주둔시키고 이집트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1956년 쿠데타로 대통령이 나세르는 미소 등거리정책을 하고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독자노선을 걸었다나세르는 소련과 무기협정을 통해 동유럽의 무기를 수입하고 서방의 자금지원으로 아스완 댐을 건설하고자 하였다하지만 나세르의 독자노선을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은 자금지원을 거부하였고나세르는 소련과 아스완 댐 건설 합의를 하는 등 친소노선을 강화하였다또한 서방에 대한 보복으로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강제로 매입하여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였다.
영국은 나세르를 중동의 히틀러로 비난하면서 알제리의 독립운동 지원을 못마땅하게 여긴 프랑스와 함께 이집트를 공격하였다이스라엘은 미리 영국프랑스와 3자 비밀회담을 통해 먼저 이집트를 공격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중립을 가장하여 개입하기로 하였다영국은 이집트와 이스라엘 모두의 수에즈 운하로부터의 철수를 주장하였고 이집트가 불응하자 프랑스와 함께 전면전을 개시하였다.
이집트는 3개 나라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집트의 후견인을 자처한 소련이 프랑스와 영국에게 핵 공격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하였다이집트는 선박을 침몰시키는 방식으로 수에즈 운하를 봉쇄하여 서방의 원유 수송을 차단하였고그 결과 영국은 경제적 손실과 파운드화의 폭락 위기그리고 재정 위기에 처하였다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이 공격을 하더라도 도와주지 않겠다고 경고하였다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 전쟁 이후 미국에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스라엘이 1960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수에즈 운하를 포함하여 시나이 반도를 한때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국교를 정상화함으로써 수에즈 운하에 대한 이집트의 소유권은 확립되었다.
1970년 나세르가 갑자기 사망한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사다트 대통령은 1973년 시리아 등 아랍국들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침공하였다초기에 이스라엘이 밀렸지만 미국이 포위된 이스라엘을 도우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다소련은 이집트를 지원하였는데미국이 봉쇄된 이스라엘을 위해 5000번이 넘는 항공운송 작전을 펴고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까지 점령하려고 하자미소는 직접적인 전쟁 위기에 직면하였다전면전을 우려한 미소가 유엔을 통해 중재안을 관철시켜 전쟁은 중단되었다.
사다트 대통령은 1976년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소련 기술자들을 추방하였으며 친미노선으로 전환하였다그는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하였으며 카터 대통령의 중재를 받아들여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하지만 소련과 다른 중동국가들이 사다트를 비난하였다. IMF의 요구대로 빵 보조금을 폐지하여 폭동이 발생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다 1981년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81년 대통령이 된 무바라크는 2011년 민중봉기로 퇴임할 때까지 사다트의 노선을 승계하여 친미친이스라엘 정책을 추진하였다.
iv) 이라크
이라크는 오스만 제국에 속하였다가 1차 대전 직후부터 1932년까지 영국령이 되었으며 그 후 군주제로 독립하였다이라크의 카심 장군은 1958년 7월 군부를 동원한 쿠데타를 일으켜 이라크 왕국을 철폐하고 정권을 장악했다이후 그는 1963년 2월 이슬람 사회주의 정당인 바트(Baath)당이 주도한 쿠데타로 정권이 전복될 때까지 수상으로 재임했다재임 중 카심은 영국이란터키파키스탄 등과 함께 참여했던 반소동맹에서 탈퇴하고소련으로부터 무기를 도입했으며공산주 의자들을 실세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반()서방 친소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1970년대 미국 NSC 위원으로 근무했던 모리 스(Roger Morris)는 1963년 2월 카심 수상을 권좌에서 몰아낸 바트당의 쿠데타 배후세력 으로 CIA를 지목했다특히 그는 케네디 대통령이 쿠데타 계획에 대한 CIA의 배후 지원을 사전에 승인했다고 주장했다.
바트당의 청년당원이었던 후세인은 카심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후 시리아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바트당이 집권한 후 후세인은 정보기관의 수장과 부통령을 거쳐 1979년 대통령에 올랐다수니파였던 후세인은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국내의 시아파에게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미국의 지원 아래 1980년 이란을 공격하였다. 8년간 지속된 전쟁 중 서방은 이라크를 지원하였는데미국영국프랑스의 지원 무기 중 생화학무기의 원료도 포함되었다.
1991년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하고 사우디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이는 후세인이 중동의 친미국가들을 순차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석유 자원을 통제하는 한편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적하는 중동의 이슬람 지도자로 부상하려는 의도였다미국은 후세인의 의지를 꺾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하여 제1차 이라크 전쟁인 걸프 전쟁이 발생하였다그 당시 세계 유전의 25%는 사우디, 12%는 이라크, 8%는 쿠웨이트에 있었다.
미국은 시아파가 다수인 이라크에 이란의 시아파 회교혁명이 확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따라서 미국은 수니파인 후세인이 이란을 계속 견제해주길 원하였기 때문에 후세인과 협상하여 전쟁을 중단하였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후세인이 테러단체를 지원한다고 압박하고 대량살상무기를 개발 중이라는 이유로 유엔안보리를 통해 제재하였다. 2003년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하여 2006년 후세인을 교수형시키고 시아파 친미정권을 세웠다미국은 2011년 철군하였으나 이후 이라크 정부가 쇠약해져 IS가 득세하자 2014년 다시 파병하였다.
시아파 이라크 정부는 미국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벗어나자 같은 시아파인 이란과 관계개선에 나서고 있다양국 지도자는 상대방을 방문하고 영사관을 개설하고 군사협력협정을 맺었다이란은 이라크를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전력을 공급하는 등 재건사업을 도와주고 낮은 가격에 생필품 등을 공급해주고 있다. 2010년 총선에서 시아파가 승리하도록 시아파 주민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018년에는 이라크 총리가 미국의 이란 제재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이라크는 점차 미국에서 벗어나고 이란에 접근하고 있다.
v)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영국의 처칠은 남시리아 지역을 요르단을 기준으로 분할하였는데 그 서쪽 지역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다그런데 영국은 맥마흔 선언(1915)을 통해 이 지역을 아랍인에게 돌려줄 것을벨푸어 선언(1917)을 통해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서 국가를 건설하도록 허용하는 약속을 하였다. 1922년 팔레스타인 지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유대인은 약 8만명으로 무슬림의 7/1에 불과하였으나 점자 유대인의 이민이 증가하였다. 2차대전 직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까지 이 지역에서 아랍인의 반란이 자주 발생하였고 이때마다 아랍인과 유대인 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영국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유대인을 2만명 이상의 아그나 혹은 하가나라는 방위조직으로 무장시켜주었다.
2차 대전 후 팔레스타인은 해방되었고 1947년 유엔은 이 지역을 아랍인 지역중간지대유대인 지역으로 분할하였으나 아랍인들이 반발하였다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시온주의에 근거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에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려고 몰려들었다홀로코스트가 세상에 알려진 후 반유대주의는 약화되었는데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이를 적극 활용하였다.
1차 중동 전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이로 인한 팔레스타인 문제로 이집트요르단시리아레바논이라크 등 5개국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 간에 벌어졌다1차 중동전쟁에서 아랍국가들은 영국계이었고미국은 유대인의 정착촌이 소비에트와 유사하다고 보아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오히려 소련이 이스라엘의 반영 국가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서 체코를 통해 이스라엘에 무기를 지원하였다초기에는 이스라엘이 고전하였으나 스웨덴의 중재가 있는 동안 미국의 무기 지원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스라엘이 1967년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함으로써 6일 전쟁 즉 제3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이집트이라크요르단 등이 시리아와 연합군을 형성하였으나 이스라엘이 공군력을 앞세워 승리하였다.
vi) 이란
1886년 인도의 유전을 개발하기 위해 설립된 랑군 오일(Rangoon Oil)이 오늘날 British Petroleum의 모태이다. 1908년 영국의 지질학자가 이란에서 유전을 발견하자 이란 군주 모하메드 알리 샤는 영국에 개발권을 주었다랑군 오일의 자회사인 Anglo-Persian Oil Company (APOC)가 1909년 정유공장을 건설하였다. 1913년 영국정부는 전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기 위해 윈스턴 처칠의 제안으로 APOC의 국유화를 단행하였다. 1915, APOC의 자회사는 1차 대전 중에 British Petroleum Company를 인수하였다.
이란은 1907년 러시아와 영국의 보호지대로 분할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석유 자원 때문에 전쟁터가 되었다영국은 1919년 이란을 러시아혁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보호령으로 삼았다영국은 1920년대 이후 이란의 원유를 100% 독점하고 수익의 14%를 이란에게 주었다반면 미국은 사우디에게 45%의 수익을 주었다.
1928년 세계의 주요 석유 기업들이 터키레바논요르단예멘오만이라크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바레인 등 오스만 영토에서 경쟁하기 않기로 합의하는 적색협정을 체결하였다이들은 아나톨리아 반도와 사우디아라비아 반도를 적색으로 표시하면서 자신들의 독점을 선언하였다이 적색협정에 따르면 로열 더치 셸그룹, APOC,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을 포함한 5개의 미국회사프랑스 석유회사 CFP 등 4개 회사는 각각 23.75%의 지분을 가지고 나머지 지분 5%는 굴베키안이 갖기로 하였다미국의 5개 회사 중 엑슨과 모빌을 제외하고 모두 이 카르텔에서 탈퇴하였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유럽 경제를 장악하자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이 1949년 이 카르텔을 파기하였다.
1935년 APOC는 Anglo-Iranian Oil Company(AIOC)로 변경되었다. AIOC와 친 서방 정책을 펴고 있던 이란의 알리 라즈마라 수상은 1951년 암살당하고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sadegh)가 수상이 되었다. 1951 모사데그는 원유의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세워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이란 수상에 당선되었다모사데그 수상이 영국계 소유의 영국-이란 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를 국유화하자 영국은 기술자를 철수시키고 이란 원유의 수입을 중단하였다이란에서 쫓겨난 AIOC와 영국 정부는 헤이그에 있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 국유화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하였지만 기각되었다.
이에 처칠 수상은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모사데그가 공산주의 정책을 실현하고 소련에 접근한다고 주장하면서 모사데그를 전복시킬 것을 제안하였고 양국의 정보기관은 각각 “Ajax”, “Boot”란 이름으로 비밀공작에 나섰다. CIA의 커밋은 언론과 이란 군대를 매수하였고특히 이란 출신 갱단을 매수하여 친모사데그 시위를 하면서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도록 하였다또한 깡패들이 모사데그를 지지한다고 거리에서 외친 후 폭동을 일으켜 모사데그가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공산주의라고 여론을 조작하였다그밖에도 시위대끼리 충돌하도록 하여 이란인들이 모사데그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도록 하였다.
1953년 미국은 입헌왕정에서 전제왕정으로 돌아가려는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Mohammed Reza Pahlevi) 왕을 회유하여 모사데그 수상과 대립하도록 하여 군인들과 이슬람 성직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하였다팔레비는 전제군주가 되어 Fazlollah Zahedi 장군을 수상으로 임명하였다이 쿠데타 이후 AIOC는 다시 이란으로 돌아왔으며 1954, AIOC는 British Petroleum Company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1979년 회교혁명 때까지 26년 동안 팔레비 왕은 사바크(SAVAK)라는 비밀경찰을 통해 폭정을 실시하였다회교혁명 이후 호메이니는 어떠한 보상도 없이 British Petroleum의 모든 자산을 몰수하였다. 2000년 울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미 국무장관은 1953년 이란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한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야기했다면서 사과를 표했다.
vii) 아프가니스탄
동서양을 잇는 요로에 있던 아프가니스탄은 고대부터 제국들의 침략을 받았고근세에는 영국의 침략을 받았지만 독립을 지켰다. 19세기 인도와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중동을 지배하여 두 지역을 연결하고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진출을 막으려고 하였다아프가니스탄은 2차 대전 당시에는 중립을 지켰고 그 이후 미소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며 원조를 받는 등 실리를 챙겼다.
그런데 1978년에 들어선 친소정권은 세속화정책을 추진하여 이슬람의 반발을 샀다우익과 이슬람그리고 친미세력들은 무장 저항운동을 강화하였다점차 반군세력들이 강해지자 소련 정규군이 최대 10만까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하여 카터 행정부는 대소화해정책인 데탕트 외교를 중단하고 소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카터 대통령은 CIA의 아프가니스탄 공작을 승인하였다아프가니스탄 공작은 니카라과나 앙골라와는 달리 의회의 승인을 얻어서 실행되었다이 공작의 목적은 미국이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졌듯이 반군을 지원하여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발목이 잡혀 유럽과 극동 문제에 힘을 쏟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초기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금을 제공하고 파키스탄 정보기관이 지상 작전을 담당하였다레이건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반군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였는데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CIA는 1979년부터 9년간에 걸쳐 무기 지원에 20억 달러군수품 및 장비지원에 10억 달러를 지원하였다미국은 반군들에게 무기와 월급을 주고 스팅어 미사일 등 중무기의 훈련까지 시켰다이때의 이슬람반군들이 무자헤딘이고 텔레반이며 오사마 빈라덴은 사우디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서 미국과 함께 반소 내전에 참전하였다. CIA는 9/11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에게 스팅어 대공미사일 등 신무기를 제공하고 직접 훈련까지 시켰다소련은 미국이 반군을 지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면전을 우려하여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피하였다.
1989년 소련이 물러난 후 미국과 사우디 등의 지원을 받았던 이슬람 세력들은 내전에 빠졌고 결국 1996년 텔레반이 정권을 잡았다아프가니스탄에서 성전을 벌렸던 오사마빈라덴 등 사우디아라비아의 급진 이슬람세력이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이 끝난 후 사우디아라비아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당시 미군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고 있었다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의 성지이자아직도 세속화를 거부하며 이슬람의 종주국을 자임하고 있었는데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 소련군이 주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결국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무자헤딘은 사우디에서 미군을 상대로 테러를 하기 시작하였고 오사마빈라덴 역시 미군에게 월급과 무기를 받던 전사들을 다시 모아 전 세계에서 미국을 상대로 하는 성전을 전개하였다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난 후 자신들이 반군에게 준 중무기들을 다시 사들였지만 그 일부는 테러집단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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