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인디언은 어떻게 몰살되었는가?


지금의 미국 땅에서 백인과 인디언의 무력충돌은 기본적으로 국가나 민족 간의 전쟁이기 보다는 소규모 전투의 양상을 띠워왔다이는 미국의 인디언 부족들이 일부 연맹을 구성하였으나 중남미 인디언들과 달리 국가 수준의 중앙정부와 군대가 없어 양측 모두 수천 명 이상의 정규군을 동원한 전쟁을 치룬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미 대륙에서 인디언과의 충돌은 정착민과 인디언의 충돌영국이나 미국 정부와 인디언의 충돌로 나눠 볼 수 있다영국은 미국캐나다호주인도 등에서 원주민들과 전쟁을 하기보다는 반란을 진압하면서 원주민을 동화하는 정책을 적용하였는데이는 스페인이 중남미에서 적용한 정책과 같았다스페인이나 프랑스는 식민지에 가족 단위의 정착촌을 세우기보다는 무역 등의 착취에만 관심이 있었다따라서 원주민을 쫓아내거나 죽이기보다는 그 노동력을 활용하고자 하였다따라서 주로 백인 남성이었던 이들은 오히려 원주민들과 결혼하여 많은 혼혈인들을 양산하였다.

반면 청교도 정착민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확대하는 것에 집중하였고원주민들에게 청교도 문화를 전파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었다오히려 더 많은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는데 있어 인디언들은 방해물로 여겨졌다새로운 에덴동산에 인디언들은 허락되지 않은 셈이다정착민이 인디언을 몰아내려는 욕구는 정착민의 나라 즉 미국의 건국되고 나서 국가의 정책으로 나타났다즉 군대가 나서 인디언들을 몰아내거나 몰살시킨 것이다.
1607년 이후 제임스타운에 정착한 백인들은 굶주린 정착민의 식량 확보를 위해 각지의 인디언 마을을 습격하여 인질을 잡고 물품과 식량을 강탈했다이에 1622년 인디언들이 반격에 나서 제임스타운에서 정착민 347명이 사망했다. 1637년 영국 교역상 한 무리가 몰살당하자 매사추세츠와 플리머스 식민지의 백인이 피쿼트 족과 적대하고 있던 모히칸족을 이용하여 피퀴트족을 섬멸하였다.
1637년 피쿼트 전투는 청교도 정착민의 살해사건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시작하였고, 1634년의 네덜란드 정착민과의 충돌 역시 마찬가지였다. 1675년 필립왕 전쟁은 기독교로 개종한 인디언의 살해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었다이들 살해 사건에 대해 백인 정착민들은 재판을 통해 인디언에게 살해 혐의를 적용하고 일종의 사법집행의 방식으로 전투를 시작하였다영국과 정착민들은 인디언들의 사법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이들과 무력충돌을 전쟁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므로 사로잡힌 인디언들을 포로가 아닌 반역죄인처럼 처벌하였다전쟁법을 따르지도 않았다.
1670년대 뉴잉글랜드 남부의 인구는 몇 번의 전염병을 거친 후 백인 35,000명에인디언 15,000으로 크게 역전 당했다. 1675년 왐파노아그족들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인구가 10분의 이하로 줄어들었다평원에 거주하는 인디언들은 4000만 마리가 넘는 버팔로에 식량을 의존하고 있었다하지만 미국 정부가 백인 기업에게 사냥 특허를 준 후 버팔로는 750마리까지 줄어들었다평원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었던 인디언들은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대립구도가 그대로 북미에도 반영되었다스페인네덜란드프랑스영국미국 모두 인디언 부족 간의 분쟁을 이용하여 대리전쟁을 실시하게 되었다. 1689년 윌리엄왕 전쟁’, 1702년 앤여왕 전쟁’, 1744년 조지왕 전쟁’ 및 1756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이어졌다이들을 총칭하여 북미 식민지 전쟁이라고도 부른다프랑스와 영국은 반드시 동맹을 맺은 인디언을 전쟁에 동원하여 싸웠다영국은 미국 식민지에서 프랑스스페인네덜란드와 경쟁하면서 인디언들을 이간시켜 자신들의 전쟁에 끌여들였다인디언들 역시 백인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자신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부족들을 몰살하거나 사로잡아 노예로 파는 등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1763년 파리 조약을 맺고 프랑스가 북미에서 식민지를 포기하자 인디언들은 새로운 지배자 영국과 대립하였다폰티액 전쟁에 이르러 오대호오하이오 영토일리노이 영토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살던 인디언들이 연합하여 백인들을 이주시키려는 영국과 전쟁하였다이 전쟁 이후에도 영국은 서부에 백인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유지하였으며식민지 백인인디언영국 사이의 긴장이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그런 가운데 1773년 던모어 전쟁이후 영국 대 인디언이라는 갈등 구도는 미국을 건설하려는 식민지 백인 대 인디언의 구도로 바뀌었다미국 정부는 저항하는 인디언을 학살하고 강제로 이주하였으며복종적인 인디언들을 미국인으로 동화시켰다.
1774년 제2차 대륙회의에서 대륙군의 총사령관에 선출된 워싱턴은 주로 해안 쪽의 영국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서부 내륙의 인디언을 몰아내거나 사실상 말살하는 정책을 취하였다워싱턴은 자신의 군대에게 이로쿼이 연방과 뉴잉글랜드의 인디언 지역을 초토화시키라고 명령하였다이로쿼이 연맹은 백인으로부터 총을 일찍 도입하여 미국 북동부지역에 넒은 영토를 지배하였으며 이로쿼이어를 쓰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중심으로 하는 6개의 부족의 연맹체였다부족에는 평의회연맹에는 대의회가 있었으며 모두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이로쿼이 연맹은 7년 전쟁에서 영국을 도왔지만 독립전쟁에서는 영국을 지지하는 쪽과 독립을 지지하는 쪽으로 분열하였다. 1783년 영국이 미국과 휴전하면서 자신과 동맹을 맺은 이로쿼이드 연맹의 영토를 미국에 할양하는 파리조약을 체결하였다미국은 독립전쟁 이후에도 원정대를 파견하여 이들 인디언 지역을 토벌하였다특히 1799년의 설리번 원정대는 40개 이상의 이로쿼이족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1776년 미국은 영국군과 인디언에 대항하기 위해 기병대를 창설하였다독립전쟁 이후에 주로 인디언 토벌에 기병대가 나섰으며남북전쟁 당시 대규모로 확충된 기병대는 전쟁 이후 인디언과의 전투를 담당하였다또한 1824년 텍사스의 정착민을 보호하고 인디언을 토벌하려는 텍사스레인저라는 민병대를 창설하였다국가가 나선 미국의 인디언 학살은 미국의 선민의식과 예외주의가 낳은 필연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1787년 북서부 조례에 따라 백인 정착민들이 대거 유입되었다북서부의 인디언들은 이 영토침범에 대항하여 항전을 호소했지만워싱턴 대통령은 군대를 파견해 진압하였다동맹을 맺었던 영국은 독립전쟁 이후 미국과의 관계를 의식하여 인디언의 도움을 거부하였다패퇴한 인디언들은 1795년 그린빌 조약에 서명하고 오하이오 전체와 인디애나의 일부를 미국에 양도하였다그린빌 조약〉 이후 미국에 영토를 빼앗긴 인디언들이 결집하는 한편 영국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개시하였다이 전쟁은 영국과 미국의 1812년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819년에 미국이 인디언을 물리치고 플로리다를 점령하게 되었다.
1829년부터 1837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앤드류 잭슨은 인디언을 없어져야 할 열등민족이라고 불렀으며, 1830년 토머스 제퍼슨이 주창한 인디언이주법(Indian Removal Act)’에 서명하였다잭슨은 영국과 스페인이 인디언을 무장시켜 미국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부의 인디언들을 백인이 없는 서부의 유보지(Reservation)로 강제 이주하고자 하였다잭슨은 이주를 거부하는 인디언 부족은 멸족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이주에 반대하는 1832년 블랙 호크 전쟁과 1836년 크릭 전쟁’, ‘2차 세미놀 전쟁’(1835-1842)이 발생하였다.
남북 전쟁 중이던 1862년 유보지에서 갇혀 굶주림에 시달리던 다코타족이 전쟁을 일으켜 500명 이상의 미군 병사와 이주자가 죽었다다코타족을 진압한 미국은 303명의 다코타족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으며링컨 대통령은 이중 38명을 교수형에 처했다링컨 대통령은 미네소타에 있는 다코타족 유보지를 폐쇄하고 인디언들을 추방하였다.
1886년 아파치족의 지도자 제로니모의 체포와 1890년 인디언보호지역 내의 운디드니 학살’ 이후 인디언과 미국 사이의 전투는 사실상 종료되었다. 19세기 말 미국은 살아남은 인디언들을 형식적으로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20세기 들어 미국 정부는 이 조약을 파기하고 인디언 부족들을 소멸시키기 시작하였다이후에는 인디언들의 비무장 저항이 이어지고 있다미국은 1924년 인디언시민권법(Indian Citizenship Act)’을 제정하여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인디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그 전에는 도스법에 따라 부족민의 지위를 포기하고 백인에 동화되고 정부에게 부여 받은 토지에 정주하는 경우에 시민권을 부여 받았으며, 1차 대전에 참여한 경우에도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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