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의 배경

1. 냉전과 진보정당의 시지프스 운명
 
1958년 조봉암의 진보당 해산과 닮은꼴

대한민국에서 통합진보당이 처음 해산된 것은 아니다. 통합진보당이 해산되기 60여 년 전 진보당이 해산된 바 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연장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자, 야당들이 통합하여 자유당 정권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중도야당과 진보야당이 하나의 당을 만들라는 민심이 있었다. 당시 통합운동의 중심에는 과거 조선공산당 간부였다가 전향하여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한 조봉암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반공정서 속에서 우파뿐만 아니라 일부 좌파들도 조봉암과 함께 창당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결국 우파들은 민주당을 따로 창당하였다. 서상일 등 좌파들은 논란 끝에 조봉암과 함께 하기로 하고 19551222'진보당 창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강령 초안을 공표하였다.

이승만 독재에 맞서 조봉암 야권연대의 중심으로 떠 올라

진보당 강령은 공산당 독재와 자본가의 독재, 부정부패에 반대하였다. 조봉암은 제3의 새로운 이념이 정립될 때까지는 사회주의와 같은 특정 이념을 공식화하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진보당은 창당선언문과 강령 등에 민주적 사회주의를 명시하였다. 조봉암은 창당 개회사에서 민주적인 평화통일, 인민민주주의 정치, 계획경제와 민족자본의 육성, 점진적인 무상교육, 사회보장제도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진보당은 1956년 정·부통령선거 앞두고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을 선출하고, 부통령 후보에 조봉암과 경쟁관계에 있던 서상일을 선출하였다. 하지만 서상일이 고사하여 부통령 후보에 박기출이 지명되었다. 조봉암은 대통령후보가 된 후 이승만의 3선을 막기 위해 신익희와 범야권의 후보단일화 협상을 추진하였다. 양당의 협상 결과 진보당의 조봉암은 후보를 사퇴하고 민주당의 신익희가 단일후보가 되는 대신 민주당은 평화통일 등 진보당의 정책 일부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조봉암과 신익희가 공동으로 합의문을 발표하기로 한 날을 하루 앞두고 55일에 신익희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결국 진보당의 조봉암은 야권의 단일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폭력과 부정선거로 패배한 조봉암, 야권통합 추진

한편 선거운동기간 중에 치러진 신익희의 장례식에 모인 시민들이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경무대 방향으로 행진하자, 경찰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나고 수백 명이 구속되었다. 민심은 갈수록 악화되어 조봉암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자, 이승만 정권은 정치깡패와 경찰을 동원하여 진보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하였다. 신변의 위협까지 느낀 조봉암은 암살을 피하고자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잠적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선거 당일까지 진보당 투표소 참관인이 참관 못하도록 하고, 개표과정에서 조봉암의 표를 이승만의 표로 바꿔치기를 하였다.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가 훗날 재판에서 부정선거임을 인정할 정도로 선거는 이승만에게 편파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승만은 1952년 대선보다 20% 낮은 55.66%에 그치고 조봉암은 엄청난 무효표와 기권표에도 불구하고 23.86%를 획득하였다.
대선에서 패배한 야권은 19568월 시도의회 선거, 1958년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다시 통합을 추진하였고 이범석 계열과 개신교 일부까지 여기에 결합하였다. 다만 용공시비를 우려한 진보당은 남로당 계열과 통합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보수야당, 경쟁자인 조봉암을 용공으로 몰고가 

야권의 정쟁으로 야당 통합은 불가능해지고, 조봉암은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다시 가동하였다. 하지만 서상일 계열은 조봉암 주도의 진보당을 탈당하였다. 진보당은 19561110일 경찰의 포위 속에서 창당대회를 열었으나 정치깡패와 사복경찰들이 대회장에 난입하는 등 창당을 방해하였다. 진보당은 이승만 정권의 공작과 방해를 물리치고 중앙당에 이어 지역조직까지 결성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정치탄압, 사상탄압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조봉암에 대한 사상공세에 민주당 일부도 가세하였다. 진보당과 결별하고 별도로 진보정당을 추진하던 일부 진보인사들도 조봉암의 진보당을 좌경으로 몰아갔다. 진보당은 이러한 혼란 속에 1956년 시도의회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19585월 민의원 선거에 적극 참여하기로 하고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20석 확보를 선거 목표로 삼았다.

극우 협박에 조봉암에게 사형 선고, 진보당 등록취소

그런데 1958112일 검찰은 갑자기 조봉암과 간부들을 구속하고, 중앙당 사무실을 압수수색하여 당원명부 등을 빼앗아갔다. 검찰은 같은 해 216일 조봉암이 양이섭 등 간첩과 국내외에서 접촉하여 북한과 내통하였고 평화통일 등 진보당의 정강 역시 북한 노동당의 정강과 내통하는 내용이라며 기소하였다. 이어 225일 공보실장 오재경은 진보당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고 한다면서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였고 대법원은 진보당이 낸 행정처분 취소소송을 최종적으로 기각하였다.
한편 조봉암 사건을 담당한 1심 재판부는 간첩죄에 대해 무죄라며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인사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러자 반공청년단이 법원에 난입하는 등 이승만 정권과 극우세력들은 사법부를 협박하였다. 결국 대법원은 진보당의 정강에 대해서는 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면서도 조봉암에 대한 간첩죄를 인정해 사형을 선고하였다. 조봉암의 가족은 바로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기각되었고, 1959731일 조봉암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2007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진보당 사건이 날조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권고와 유족의 요청으로 재심이 개시되었으며, 이 재심에서 대법원은 조봉암에 대해 무죄를 확정하였다.

1958년 진보당, 1961년 민족일보, 2014년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킨 수구독재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과 1958년 진보당 해산은 유사한 점이 많았다.
첫째, 진보당이 이승만 정권의 교체를 위해 1956년 정·부통령선거 등에서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를 성사시키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을 탄압 끝에 강제해산하였는데, 통합진보당의 해산 역시 그 출발점은 통합진보당이 주도한 야권연대로 인한 정권 교체의 위기였다.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이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야권은 힘을 합쳐 정권을 교체하라는 민심에 부응하여 진보대통합을 통한 야권연대를 정권교체의 방식으로 정하고 이러한 방침을 2009년 정책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하였다. 2009년 재보궐선거부터 야권후보단일화가 성사되어 야당이 승리하기 시작하였으며,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후보단일화로 대승을 거뒀다. 이에 수구보수세력들은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정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진보대통합을 주창하며 민족일보를 창간한 진보정치인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을 용공 친북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키고 민족일보를 폐간한 것도  진보당과 통합진보당 해산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진보를 공산주의와 북한 추종으로 여론몰이

둘째, 조봉암과 진보당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모두를 비판하고 특별한 이념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과 진보당을 간첩과 엮고 정강이 북한을 추종한다고 탄압했는데, 통합진보당은 자신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닌 제3의 이념을 지향한다고 밝혔음에도 정부가 대남혁명론의 위장이라면서 탄압한 점이 똑같다. 다만 진보당 해산이 간첩사건과 연동된 반면, 통합진보당 해산의 경우 정부는 이0기 의원이 주도한 'RO'를 간첩이나 북한과 연결시키려고 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실패하였다. 정부는 통합진보당을 간첩과 엮으려는 시도에 실패하자, 일심회 사건과 왕재산 사건에서의 북한 지령이 민주노동당에서 실현된 것처럼 주장하였다. 또한 정부는 이0기 의원과 ‘RO' 등을 대한민국을 폭력혁명으로 전복하려는 자발적인 종북세력으로 규정하였다.

진보 내분이 수구보수에게 탄압의 기회를 제공

셋째, 두 당 모두 내부의 노선갈등과 분당으로 인해 정부의 탄압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는데, 내분에 종북논쟁, 용공논쟁이 동원된 것도 유사하였다. 또한 제1야당인 민주당이 레드컴플렉스 때문에 좌경용공으로 공격받는 진보정당과의 거리두기를 하면서 진보정당에 대한 탄압에 소극적으로 임한 것도 유사하다. 이를테면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유일하게 대통령후보를 낸 진보당은 민주당과의 공조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당의 부통령 후보인 박기출 대신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고 부통령선거에만 주력하였다.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과 민주당은 전국적인 선거연합을 하였는데, 바로 이어진 대선에서는 통합진보당의 분당과 종북논쟁으로 인해 민주당이 사실상 선거연합을 거부하였다. 2008년과 2012년 진보진영 일부가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주요세력인 자주계열에 대해 종북이라며 수구보수세력의 이념공세에 편승한 것도 과거 진보당 사건과 유사하다.

수구보수가 낙인찍고 독재정권의 과장과 조작을 눈감고 해산 결정

마지막으로 극우세력들이 진보정당을 해체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부를 부추긴 것도 두 정당의 해산과정에서 닮은 점이다.
뉴데일리(Newdaily)201512일 기사에 의하면 국민행동본부(대표 서정갑 대령연합회 회장)은 극우 언론인 조갑제의 제안에 따라 2004623일 민주노동당에 대한 위헌정당해산 청원 기자회견을 하고 서석구 변호사가 작성한 1차 청원서를 법무부에 제출하였다.
2004년 청원 당시 이들이 문제 삼은 민주노동당 강령의 주요 내용은 1) 대한민국을 비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으로 규정하는 체제부정 강령, 2) 재벌해체, 국유화 등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반자본주의 강령, 3) 국가보안법 폐지,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 폐지 등 친북 강령, 4) 미국에 대한 종속 극복, 주한미군 철수 등 반미 강령 등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 공작기관이 강0운 민주노동당 고문을 통해 민주노동당 창당에 개입하고 당 간부들을 포섭하고 민주노동당 내부 자료를 보고받았다. 또한 이들은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김일성의 저작물을 당원게시판 자료실에 올려놓고 학습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밖에도 이들 주장에 따르면 2004년 총선 이후 열린우리당은 민주노동당과 상시협의체를 구성하여 반미친북 정책, 친노조반기업 정책으로 민주적인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연대활동을 강화하여왔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의 목적과 활동이 강령과 친북 활동에서 보듯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반되고, 열린우리당과의 공조를 통해 이러한 위헌적 활동이 현실화되고 있으니 하루 빨리 정부는 민주노동당의 해산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수구보수세력의 내심에는 종북정당 민주노동당을 해산시켜 열린우리당의 연대를 깬 후 종북정당과 연대한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권에 대해 책임론을 제기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조갑제, 조중동 등이 통합진보당 해산을 수구정권에 지속적으로 요구해와

이처럼 2014년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논리의 밑거름은 이미 2004년 민주노동당 해산을 주장하는 극우보수단체에 의해 제공되었고, 2014년 정부나 헌법재판소의 논리 역시 이와 유사하다. 2004년 이후에도 극우 단체들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해산 청원을 법무부에 제출하면서 꾸준히 자신들의 논리를 확산시켜왔다.
민주노동당이 20116월 정책당대회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도입한 직후 조갑제 닷컴20118월에 국민교재 민주노동당 해산청원서를 발간했으며, 같은 달 26일 국민행동본부는 고영주 변호사가 작성한 민주노동당에 대한 위헌정당해산 청원서를 2차로 법무부에 제출하였다.
이들이 새롭게 주장한 내용을 보면 1) 김일성의 강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 보듯이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이 인민민주주의를 미화하여 사용한 단어이며, 2) 통합진보당의 강령 중 민중주권은 인민민주주의와 같은 의미인 민중민주주의에 근거하여 민중이 아닌 국민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며, 3) 국가보안법 폐지, 한미군사동맹 해체, 주한미군철수,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연방제통일 등은 북한의 대남혁명론이며, 특히 코리아연방제는 북한의 고려연방제이며, 4)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대통령예비후보, 문성현 대표, 0대 정책위원회 의장 등 당 지도부는 연방제를 주장하는 등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고, 당직자들이 소위 386간첩단 사건인 일심회 사건, 왕재산 사건, 밀입북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북한은 이런 간첩들에게 각종 지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민주노동당을 배후조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식민지 대한민국을 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북한의 대남전략전술인 주체사상에 기초한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이론에 근거하고 있으며, 주요 당직자들이 실제로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을 추종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 수구보수의 공격 앞에 부정선거, 폭력사태로 고립돼

201112월 민주노동당이 통합진보당으로 전환된 후 수구보수세력들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해산 논리를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논리로 계속 사용하였다. 그런데 20124월 총선을 앞두고 통합진보당은 당내 부정선거와 야권단일화 여론조사 조작 시비에 휩싸였고, 이어진 당내 물리적 충돌, 512일 중앙위원회 폭력사태 등으로 여론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수구보수세력은 이런 분위기를 통합진보당 해산에 적극 활용하였는데, 국민행동본부는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영주)와 함께 2012530일 통합진보당 해산 청원서를 3차로 제출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1) 통합진보당은 사회주의를 폐기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선언하였지만 이는 위장노선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 위헌정당인 민주노동당을 계승했기 때문에 역시 위헌정당이며, 2)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민주정부란 결국 노동자가 주인이 된다는 공산주의 이념의 선전이론이고, 3) 전향하지 않은 간첩인 강0, 과거 국가보안법 연루자인, 0, 0 등을 비례대표에 배정하고, 일심회 사건 관련자인 최00을 정책기획실장에 임명하는 등 국가안보에 위해가 되는 자를 중용하며, 4) 비례대표 후보 경선에서 총체적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검찰의 압수수색에 물리적으로 저항하는 등 법치주의를 부정하며 5) 북한은 일심회 사건과 왕재산 사건의 지령문을 보듯이 민주노동당이 추진했던 각종 선거와 진보대통합을 배후조종하였다.
국민행동본부의 통합진보당 해산 논리는 그들이 제출한 입증자료에서 보듯이 이미 2012년에 가닥이 잡혀져 있었다. 국민행동본부는 201348일 같은 청원서를 4차로 법무부에 제출하였다.
 
 
2. 정권교체를 부르는 야권연대를 분쇄하라!
 
촛불 민심에 따라 민주노동당이 야권연대 주도, 이명박 정권 위기

민주노동당은 창당 때부터 수구보수세력의 재집권을 막는데 힘을 보태왔고, 특히 2007년 한나라당 집권 이후 정권교체를 위해 야권과 시민사회 진영의 연대를 주장해왔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진보대통합을 통해 진보정치의 독자적인 성장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진보정치의 단결된 힘으로 다른 야당들을 야권연대로 견인하여 정권교체를 이루고자 하였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실제로 진보대통합의 힘으로 야권공조를 주도하여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에서 야권단일후보를 성사시켜왔다. 야권후보단일화로 정권교체의 위기에 직면한 박근혜 정권은 민주노동당 혹은 통합진보당을 야권연대의 약한 고리로 보고 이 고리를 끊고자 하였다.
통합진보당 해산사건은 정부가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해산을 제소하기 전인 2010년 이0기의 'RO' 수사에서 이미 본격화되었고 2012년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수사와 서버 압수수색으로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2012521일 검찰과 경찰은 비례대표 후보 경선 부정선거에 대한 고발사건 수사를 명목으로 대규모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통합진보당 중앙당사를 압수수색하였다. 이들은 동시에 당 밖의 서버관리회사에 보관되어 있던 통합진보당 서버를 압수하였다. 검찰은 당 서버를 확보함으로써 통합진보당 해산을 위한 각종 정보를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

야권연대 깨기 위해 공안기관이 TF를 만들어 해산 명분을 찾아

당시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경선 부정투표 시비로 당권파와 비당권파로 분열되었으며, 이러한 갈등 과정에서 비당권파인 국민참여당 출신은 당권파 출신인 구 경기동부연합에 대해 종북공세를 펼쳤는데, 이는 극우세력의 통합진보당 해산청구 청원에 불을 붙였다. 분당 이후 통합진보당에 구 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부산울산경남연합 등 주로 자주계열들이 남게 되자, 검찰은 구 경기동부연합의 핵심인 이0기 의원이 주모자인 RO사건을 내란음모사건으로 확대하고,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연결시킴으로써 통합진보당 해산의 명분을 얻으려고 하였다.
국민일보2013830일 기사 “[단독] 0전쟁 준비하자선두에서 승리 만들어 가자를 보면 통합진보당 해산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기사에서 공안당국은 인터뷰를 통해 국가정보원은 3년 전부터 경기동부연합 인사들의 내란음모 혐의를 수사해 왔다고 밝혔다. 또한 이 인터뷰에 따르면 20122월부터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기무사 등이 참여한 합동 태스크포스(TF)를 꾸리게 된 계기는 2010년부터 수사해온 미전향 장기수 간첩에 의한 GPS 교란기술 대북 유출사건과 2011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진보대통합 움직임이었다. 국정원은 이 두 사건을 다루면서 진보대통합과 야권연대를 당 지도부와 밀접한 소위 경기동부가 주도하고 있으며 경기동부의 중심에 민족민주혁명당 출신들과 RO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공안기관과 조중동, 통합진보당을 북한과 연계시키려다 실패

국정원은 진보대통합과 야권연대를 무산시키려면 이것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을 대규모 공안사건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국민일보기사에 따르면 국정원은 각종 사이트와 카페 및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종합 분석하여 경기동부연합과 학생운동세력 등 좌익 인사들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조직도를 작성하였는데, 특히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인사들의 옛 운동권 계열과 성향 등에 관한 정보가 없어 합당 관련 움직임 등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민일보기사에서 밝혔듯이 국정원이 경기동부연합 인사들과 연계시킬 의도였던 미전향 장기수 간첩 사건이 무죄판결이 나오면서 국정원의 계획은 장애에 부딪쳤다. 국정원은 계속해서 경기동부연합 인사들이 밀입북하였다는 혐의를 언론에 흘리면서 경기동부가 북한과 연계되었는지를 수사하였지만 이0기 의원 재판과정에서 보듯이 국정원은 북한과의 연계를 밝히지 못하였다. 공안당국이 경기동부연합을 북과 연계시키는 것에 실패하자, 공안당국은 경기동부연합의 비밀회합을 자발적인 내란음모 활동을 몰아갔다. 이 과정에서 공안당국은 이0윤 전 민주노동당 수원시위원장을 프락치로 활용하여 비밀녹음을 하였다.

프락치를 통해 비밀녹음하면서 통합진보당 인사들을 감시

이러한 사정을 살펴보면 공안당국은 2009년 재보궐선거와 2010년 지방선거 때 진보진영 후보단일화와 그에 이은 야권후보단일화에 의해 여당이 선거에서 패배하고 진보정당이 부상하자 이를 우려하고 후보단일화 과정을 감시해온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진보대통합과 야권연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통합진보당 인사들을 추적하고 감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공안당국은 2011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인사 및 국민참여당의 통합, 이에 이은 2012년 총선에서 전국적인 야권후보단일화가 추진되자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우려하여 통합진보당을 고리로 하는 야권연대를 분쇄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공안당국은 통합진보당을 좌경으로 몰고 가기 위해 이0기 의원 사건을 십분 활용하였다. 2013828일 국정원은 내란음모 혐의로 이0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가택과 국회의원실 등을 압수수색하였다. 94일 국회에서 이0기 의원 체포동의안이 가결되었으며, 다음날 수원지법은 이0기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였고 바로 다음날인 96일 법무부는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국민행동본부가 910일 법무부에 통합진보당 해산 서명서 1차분 101996명의 서명자료를 제출하였고, 정부는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을 다룰 실무팀(팀장 정점식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을 구성하였다. 국정원은 913일 이0기 의원을 검찰에 송치하였고, 검찰은 926일 이0기 의원을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하였다. 국민행동본부는 1029일 통합진보당 해산 서명서 2차분 251963명의 명단을 법무부에 제출하였다.

"박근혜를 공격한 이정희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치보복"

통합진보당의 해산은 한편으로는 통합진보당 대통령후보를 지낸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에 대한 정치보복이다. 경향신문20131113일자 기사를 보면 민주당 의원 20여 명은 정부가 통합진보당 해산청구를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에 따르면 통합진보당 해산 추진은 2012년 대선과정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통령후보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날선 대립을 보인 끝에 박근혜 후보의 낙선을 위해 후보를 사퇴하여 결과적으로 문재인 민주당 대통령후보를 야권단일후보로 만든 것에 대한 보복이다. 뉴욕타임즈를 포함한 일부 해외언론 역시 그렇게 보았다. 나아가 진보진영 일부는 통합진보당 해산 추진은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을 동원한 부정선거에 대한 비난을 비켜가기 위한 여론전환용 이벤트라고 보았다.

통합진보당을 빨갱이로 낙인찍어 야권연대 분쇄 성공

극우세력과 정부의 통합진보당에 대한 공세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단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과 후보단일화를 추진하였던 민주당에 대해 극우세력의 공세가 2012년 대선까지 이어졌다. 2012년 대선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는 문재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연대를 꾀하였지만 민주당 측은 종북공세를 우려하여 연대를 회피하였다. 이정희 후보는 문재인, 이정희, 박근혜 등 대선후보 3자 토론회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공격함으로써 문재인 대 박근혜라는 구도가 흐려지고, 보수진영을 자극해 종북공세에 불을 붙이고 보수표를 결집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이 진행 중이던 20146월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는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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