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 도입과정

1) 강령개정과 집권전략위원회
 
첫째, 집권전략위원회 인적 구성을 보면 대부분 위원들은 소위 통합진보당의 주도세력이 아니므로 북을 추종하는 주도세력이 집권전략위원회와 강령개정위원회를 장악하여 진보적 민주주의 도입을 주도하였다는 정부와 헌법재판소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전까지는 집권전략위원회에 이용길 충남도당위원장, 유덕상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 정종권 서울시당 위원장 정영태 인하대 교수, 홍세화(전 진보신당 대표) 등 평등계열이 다수 포진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회의안건으로 논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008년 분당 이후에는 집권전략위원회 기획위원회가 집권전략위원회를 주도하였는데, 00 위원장(민주당 입당), 0진 위원(정책위원회 부의장 역임, 통합진보당 탈당), 0삼 위원(비정규철폐운동본부장 및 최고위원 역임, 통합진보당 탈당), 0(최고위원 역임, 진보정의당 최고위원), 0(노동담당 최고위원 역임, 민주당 입당) 등 여러 위원들의 발언 내용이 <해설서><토론자료>에 들어간 것이다. 위에 언급한 기획위원들이 2008년 분당 당시에는 민주노동당에 남아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때 전부 탈당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통합진보당의 주도세력이 아니었다.
둘째, 정부는 집권전략위원회가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 도입을 주도하였다고 하나 집권전략위원회는 결정권한이 없는 자문기구에 불과하였고 강령개정은 강령개정위원회가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정부의 주장은 부당하다. 집권전략위원회 보고서에 첨부된 회의결과를 보더라도 집권전략위원회 전체회의는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해 공식적으로 논의한 바가 없다. 200710월 집권전략위원회 토론회에서 박0순 당시 진보운동연구소 소장과 민경우 진보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했으나 이는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였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민주노동당 공식문서에 최초로 언급된 것은 집권전략위원회 보고서가 아니라 2007년 대선공약 중 코리아연방공화국안이다. 여기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혁명이론이 아니라 국가비전, 혹은 대안사회의 기본상이었다.
2기 집권전략위원회가 20068월에 임기를 시작한 이후 기획위원회에서 일부 집권전략위원들이 사회주의 강령의 삭제를 주장하였으나 반대의견이 거세 전체회의에 안건으로 회부하지 못하였다. 20082월 민주노동당의 분열 이후 집권전략위원회는 재가동되었으며, 다수의 집권전략위원들은 사회주의 강령을 삭제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집권전략위원회는 집권전략만을 담당하는 자문기구라서 2009집권전략위원회 보고서에는 강령 개정에 관한 내용을 반영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진보적 민주주의는 집권전략위원회 보고서승인대상인 <집권전략 10대 과제 2017년 집권을 위하여>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부 기획위원의 제안에 따라 2007년 대선공약인 <코리아연방공화국>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관한 내용을 <해설서><토론자료>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해설서><토론자료>는 집권전략위원회의 본 안건이 아니라 참고자료와 연구자료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집권전략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었고 따라서 집권전략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내용심의나 문구조정이 없었다.
셋째, <해설서><토론자료>에 들어간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은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반영된 것이 없다. 자주적 민주정부, 자주와 평등, 평화와 통일, 생태와 성평등 등은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강령에 있던 내용으로서 집권전략위원회의 <해설서><토론자료>의 내용과 무관하다.
넷째, 정부는 집권전략위원회가 강령분과를 운영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정부는 정책당대회집행위원회가 운영한 강령검토소위원회를 강령분과로 오인한 것이다. 정책당대회집행위원회는 강령검토소위원회를 설치하여 강령개정의 필요성 여부를 토론하도록 하였고, 강령검토소위원회는 강령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당적인 토론을 통해 강령을 개정할 것2009년 정책당대회에 안건으로 제출해 승인받았다. 2009년 정책당대회는 이와 별개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민주노동당의 정치노선으로 선언하는 정책당대회선언문을 채택하였다.
 
 
2) 민주노동당의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 개정
 
첫째, 2000130일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 주요 활동가들은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적 사회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등 다양한 이념적 지향을 갖고 있었고 그에 따라 민주노동당 창당강령은 사회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추상적으로 선언하였을 뿐 실제 내용은 구체적인 이념적 지향성이 없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이 창당 때부터 북한을 추종하는 이념을 지니고 활동하였다는 정부의 주장은 극히 주관적인 판단이다.
정부가 제출한 민주노동당 창당 대의원대회 속기록에 의하면 안병욱 강령제정위원장은 강령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총화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창당 당시 창당 주체들은 서로 자신들의 이념을 창당 강령에 넣고자 하였기 때문에 강령 내용에 합의할 수 없었다. 결국 강령이 창당대회에서 통과되려면 각 세력들이 강령의 내용을 짜집기형태로 절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은 당명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노동당 당명 결정 과정을 보면 민주노동당은 다양한 가치를 주장하는 정파들이 모였고, 어느 특정 정파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안별로 합종연횡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위원장을 역임하고 2002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나서 16%를 얻은 김석준 부산대 교수는 2002년 자신의 저서 희망으로 가는 길에서 “1500여명발기인 중 1인으로서 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을 정하기 위해 당명을 공모하고 두 시간 동안 사회당, 녹색사회당, 사회민주당,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통일민주통합진보당 등 다양한 노선을 반영하는 당명을 놓고 4차례나 투표를 하는 민주적인 과정을 체험한 후 진보정당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민주노동당 창당 강령이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의미에서 사회주의를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이탁 대의원이 자본주의 질곡을 극복하고자본주의를 극복하고로 수정하는 안을 냈으나 부결되었는바 이는 민주노동당이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당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민주노동당 창당 강령이 지향하는 사회주의는 소련식이나 북한식의 사회주의가 아니었는데, 이점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창당 강령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 ‘북한 사회주의 경직성이라는 표현을 삽입하였다. 강령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하거나 남한이 식민지반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대의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 민주노동당이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하고 대신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선언한 것은 정부의 주장처럼 북한식 사회주의를 위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강령에 나타난 이념의 산만함을 바로 잡아 편협한 이념정당에서 대중적인 진보정당으로 탈바꿈하려는 의도였다.
창당 강령의 내용이 궁극적인 이념을 담은 것인지, 중장기적인 정책을 담은 것인지 모호하였다. 나아가 강령의 내용이 이념이 되든, 중장기정책이 되든 전문과 본문, 본문의 각 분야 사이에 통일성이 있어야 하는데, 창당강령은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이미 창당 당시부터 당이 안정화되었을 때 강령의 전면적인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창당 강령의 사회주의의 이상과 가치표현은 창당 당시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창당 이후에도 합법적인 대중적 진보정당의 정치노선으로서 너무 과도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지속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합법적인 대중정당이 사회주의를 명시하는 것은 현실에서 실현될 가능성은 없는 반면 불필요한 논란만 유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자주계열과 사회민주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일부 평등계열이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2003년 임시당대회에서 안건토론 중 김0현 대의원(전 사무총장, 전 울산시당위원장)당발전특위보고서의 내용 중 사회주의를 삭제하고 그 대신 진보적 민주주의를 삽입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채택되지 못하였다. 0현 사무총장은 민주노동당 기관지인 이론과 실천200611월호 기사 “87년 체제의 붕괴와 대안으로서의 민주주의 혁명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했으나 당 내에서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이날 대의원대회 회의록을 보면 이해삼 대의원이 지적한 것에서 보듯이 신언직(심상정 의원 수석보좌관과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 역임), 임진수(진보신당과 정의당 당직자 역임)와 같은 평등계열조차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을 삭제할 것을 수정안으로 제시하였다. 신언직은 사회주의대신 강령정신에 입각한 정치활동을 주장하였다. 임진수는 사회주의 노선 대신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한 진보적 강령과 정책을 지닌 이념정당으로서 역할을 더욱 강화한다'를 수정안으로 제안하였다. 따라서 사회주의 삭제를 둘러싼 논란을 NLPD의 대립으로 보는 정부의 관점은 주관적이다. 이 논란은 민주노동당을 이념정당으로 볼 것인지,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대립일 뿐이다.
강령 개정 움직임은 사회주의 강령이 과도하다는 입장에 서 있었던 자주계열에 의해 본격화되었고, 일부 평등계열이 이에 가세하였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한국사회의 현실이나, 민주노동당의 실정을 볼 때,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내용과 실현가능성이 애매모호한 이념 중심의 강령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집권하였을 때 추진할 중장기적 정책, 즉 구체적인 사회비전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기존의 민주노동당 강령은 지나치게 이념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었으며, 특히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은 아무 구체성이 없으면서 이념적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삭제되어야 하였다(강령검토소위원회. 2009). 강령개정을 주장하는 측은 추상적인 이념강령을 구체적인 비전강령으로 대체하고자 했으며, 그 중 일부가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진보적 민주주의로 대체하자고 주장하였다.
셋째, 정부는 자주계열이나 주도세력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위하여 집권전략위원회와 강령개정위원회를 주도적으로 만들고 장악하였다고 하지만, 이들 양 기구의 설치를 주도한 것은 평등계열이나 당 내 소수세력이었고, 단지 평등계열이나 소수세력이 탈당하거나 당무에서 물러남에 따라 자주계열이 결과적으로 양 기구에서 다수를 차지한 것에 불과하다.
평등계열은 2003111일 임시당대회에서 자신들이 대의기구에서 다수를 점한 상태에서 당발전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당 활동 전반에서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강화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당 발전특별위원회 보고서를 통과시켰다. 대의원 416명 중 211명 찬성으로 채택된 이 보고서에는 집권전략위원회 설치와 강령 토론을 위한 정책당대회 신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대로 2005년에 평등계열이 주도하는 집권전략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2008년 분당 이후 자연스럽게 자주계열이 집권전략위원회를 주도하게 되었다.
강령 개정은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평등계열이 주도한 당의 혁신안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선 직후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문성현 지도부가 퇴진 한 후 당권파이던 구 전국연합 계열이 물러나고 심상정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하였다. 심상정 비상대책위원회는 제2창당 추진 방안과 방향을 논의하는 통합진보정당 추진기구를 구성하기로 하고, 이러한 내용을 담은 2창당을 위한 평가혁신안200823일 임시대의원대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대의원대회가 소위 일심회 관련자 제명안건이 부결됨과 동시에 유회됨으로써 이 안건은 처리되지 못하였고, 심상정 지도부는 이 대의원대회 직후 탈당하였다.
대규모 탈당 직후 민주노동당은 219일 중앙위원회를 열어 천영세 원내대표를 위원장으로, 0희 전 기관지위원장을 집행위원장으로 한 '민주노동당 혁신 비상대책위'를 출범시키고, 23일 임시당대회에서 일부 논의되었던 혁신과 재창당을 계속 논의할 혁신재창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위원장으로서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선임되었다. 비대위원회와 혁신재창당준비위원회는 전국연합 계열을 제외한 소수세력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혁신재창당 준비위원회국민평가위원회를 구성하여 민주노동당 발전방안을 제출하도록 하였고, 이에 국민평가위원회는 민주노동당이 진보대통합과 강령개정 등 혁신재창당을 통해 진보적 국민정당으로 탈바꿈할 것을 제안하는 국민평가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국민평가보고서를 반영한 혁신재창당방안2008622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통과되었는데, 이에는 정책당대회 개최, 강령의 재검토 등이 포함되었다.
20092월 제1차 정책당대회를 앞두고 정책당대회준비위원회와 정책당대회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산하기구로서 정책당대회에 제출할 강령개정토론안을 사전에 논의하는 강령검토소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강령검토소위원회강령개정의 필요성은 인정되나 강령상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 문언을 삭제하는 것을 포함하여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므로 강령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2011년 정챙당대회에서 강령개정을 추진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강령검토소위원회보고서20096월 정책당대회에 제출하였다.
2009년 정책당대회는 강령상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 문언을 삭제하는 것을 포함하여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므로 강령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2011년 정챙당대회에서 강령개정을 추진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강령검토소위원회보고서를 승인하고 강령개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20103월 중앙위원회 결정에 따라 이수호 전 혁신재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을 강령개정위원장으로 하고, 0희 전 혁신재창당비상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기획단장으로 하고, 김민웅 성공회교수, 이채언 전남대교수 등을 자문위원으로 하는 강령개정위원회가 출범하였다. 강령개정위원회는 5월까지 5차례 회의를 하며 기존 강령을 검토하고, 김민웅 자문위원, 이채언 자문위원, 다함께 소속의 김0식 기획위원 등이 제출한 강령 기조에 대한 초안을 토론하였다. 이러한 인사들은 정부와 헌법재판소가 말하는 NL이나 주도세력이 아니라는 점에서 강령개정위원회를 NL이나 주도세력이 의도적으로 설치 운영하였다는 정부와 헌법재판소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정부는 과거 공안사건 관련자 중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한 사람들이 강령 개정을 주도하였다고 했으나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는 문성현, 0, 0, 0, 0엽 등은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강령 결정에 직접 관여한 바가 없다.
0순은 201010월 이후 최00 강령개정위원장 시절에 기획단장으로 참가하였다. 하지만 강령개정위원회는 중앙위원회 직속으로 최고위원, 시도당위원장 등이 다수 참여한 공식회의 체계와 전국적인 토론을 거쳐 박0순이 개인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더구나 박0순은 2010년 초 이수호 강령위원장 시절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0순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통합진보당이 인식하고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0순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사회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주장하였으나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위원회는 최고위원회 등 당 내 여론을 반영하여 오히려 사회주의와 병존시키는 수정안을 제출하였고, 이 안이 대의원 과반수이상의 동의를 받았다. 하지만 이 수정안은 다함께 등 사회주의 계열의 대의원들이 수정안의 사회주의는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보다 후퇴하였다며 반대하여 2/330여표가 미달하여 부결되었다. 결국 2011년의 민주노동당 강령에서 사회주의가 완전히 삭제된 것은 자주계열이 아닌 사회주의 계열의 과욕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진보적 민주주의가 자주계열의 사회주의 위장이라는 주장은 부당하다.
넷째, 민주노동당 강령 개정안은 전국적인 토론을 통해 몇 차례 수정된 끝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므로 주도세력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도입하려고 하였다는 정부와 헌법재판소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강령개정위원회는 2010년 상반기에 이수호 위원장의 최고위원 임기만료와 지방선거 준비로 인하여 논의를 중단하다가 강령개정위원회 상임자문위원이었던 최00 새세상연구소 소장이 20109월 중앙위원회 결정에 따라 강령개정위원회 위원장을 승계하였다. 이후 강령개정위원회는 4차례 전체회의를 통해 강령개정 초안을 마련하여 20111월 중앙위원회에 토론용 강령개정안을 제출하였고, 그 논의결과를 반영하여 전국적인 순회토론을 거친 후 당 대회에 강령개정안을 제출하였다.
먼저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에 대해 모든 자주계열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진보정치 기사에 의하면 정0희 당시 소통과 혁신 연구소소장은 2009년 정책당대회가 진보적 민주주의를 채택한 이후 2010년에 구성된 강령개정위원회에 참여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하려는 것을 비판하고 여전히 자주적 민주주의를 주장한 바 있다. 0희 당시 2010년위원회 상임위원은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해 조직사상이나 생활철학을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이념에 불과하고, 정치이념으로서도 민족자주와 평화통일을 포괄하지 못하고, 해방 직후 반제반봉건민주주의변혁단계에서 제기된 낡은 이념이라고 비판하고 자주적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 바 있다.
또한 진보정치 기사에 의하면 정0희 당시 최고위원은 201127일 강령개정위원회가 사회주의적 이상과 가치를 삭제하고 대신 민중주체의 민주주의를 삽입하기로 잠정적으로 논의한 조건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하는 초안에 동의하였는데 이를 보더라도 정부의 주장과 달리 강령개정위원회가 처음부터 진보적 민주주의를 개정안에 넣은 것은 아니었다.
다섯째, 사회주의 삭제와 진보적 민주주의 삽입이 동시에 진행되었지만 정부의 주장과 달리 강령 개정 논쟁은 진보적 민주주의 도입이 아니라 사회주의 삭제에 집중된 것이었다. 강령개정위원회가 당대회에 사회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강령개정안을 제출하자 다함께의 김0식 중앙위원 등 당 내 사회주의자들이 회의장에서 피켓시위를 하는 등 반발하였다. 당 내 사회주의세력들이 우리들을 쫓아내겠다는 것이냐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강령개정위원회는 최고위원회의 의견을 듣고 강령개정위원회 내부 토론을 통해 과거의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사회주의 이상으로 수정하여 진보적 민주주의와 함께 존치하기로 하고 윤0태 강령개정위원이 당대회 현장에서 수정동의안을 제출하였으나 부결되고 원안이 통과되었다. 이 안건이 부결된 이유는 당 내 사회주의자들일부가 민주노동당의 강령에서 사회주의적 색채가 거의 사라지고 사회주의 이상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동 수정동의안을 반대했기 때문이(민주노동당, 2011).
여섯째, 당대회에서 마지막엔 사회주의를 병기하는 안이 간발의 차이로 부결된 것에서 보듯이 주도세력이 처음부터 북한식 단계적 사회주의혁명론을 위장할 목적으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계획적으로 도입하였다는 정부와 헌법재판소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강령개정안이 압도적으로 2/3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는 점을 볼 때 사회주의 삭제와 진보적 민주주의 도입은 대부분의 대의원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런 사정은 많은 대의원들이 사회주의강령이 과도하다고 생각하여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보통명사로서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찬성한 것이라고 봐야지 수백 명의 대의원들이 위장의 의사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도입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상식에 반한다. 또한 정부의 주장대로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사회주의자들이 진보적 민주주의에 반대할 리가 없고, 또한 진보적 민주주의 채택을 이유로 탈당할 리가 없었다.
이점에 대해 정부에 따르면 평등계열은 사회주의를 추구하나 북한식 사회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보았는데, 평등계열은 진보적 민주주의, 반미자주, 연방제 통일이 북한식 사회주의라 반대하였다(법무부, 2014: 147). 그런데 민주노동당 강령 개정 당시에는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해 평등계열은 물론 자주계열의 대부분도 알지 못하였으며, 평등계열이 반대한 이유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사회주의 자체와 무관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반대하였다. 또한 만약 정부와 헌법재판소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2012년 진보신당이나 국민참여당이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인식한 상태에서 북한식 사회주의라고 의심받는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에 찬성한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당내 주요 인사들은 강령 개정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탈당을 막고자 진보적 민주주의를 채택한다고 해서 사회주의 자체를 반대하거나 당 내에서 사회주의 논의를 막겠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득한 것은 사실이나, 정부처럼 이러한 정황만 갖고 이들 인사들이 사회주의를 위장할 목적으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도입하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전체 발언의 취지를 왜곡하는 것이다.
00 강령개정위원장의 발언취지도 당의 강령에 있는 인간해방이 공산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사회주의자인 대의원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일뿐이지 정부의 주장처럼 진보적 민주주의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같다고 단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00 강령개정위원장은 이 날 당대회에서 해방 직후 조선사람 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모르던 사람은 없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특정 이념을 지향하는 게 아니다고 강조하였으며, 또한사민주의 세력들이 진보적 민주주의 하는 과정에서 헤게모니를 잡으면 사민주의로 가는 거고, 사회주의가 힘을 받으면 사회주의로 가는 거다. 진보적 민주주의 이론에 입각해서 사회주의를 전면화하는데서 신중히 하였다라고 밝혀 진보적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3)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 개정
 
첫째, 정부와 헌법재판소는 박0순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이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 도입을 주도하였다고 하나 박0순 부원장이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제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정희, 심상정, 유시민 등 공동대표단이 강령개정의 실질적인 과정을 책임지고 박0순 부원장은 강령개정에 있어 독립적인 결정권한이 없었다.
2011년 들어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의 합당이 가시화됨에 따라 강령의 기조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가 여러 단위에서 논의되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국민참여당은 진보적 자유주의를, 노회찬과 심상정 등 새진보통합연대은 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를 내심 강령의 내용으로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통합정당의 이념과 노선에 대해 합의할 수 없었다. 따라서 통합주체들은 강령의 노선에 대한 합의는 뒤로 미루고 당 운영 방식과 당 정책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2011531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진보통합시민회의,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 등 12개 단체 대표들이 서명한 '진보정치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 최종 합의문'이 발표되었다. 또한 그해 12월에 통합진보당이 창당될 때까지 2011828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대표가 서명한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합의문', 20111120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세력)의 대표가 서명한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 합의문' 등 강령에 대한 합의사항이 수차례 발표되었다.
통합주체의 1120일 최종 합의사항이 2011125일 창당한 통합진보당의 강령이 되었는데, 여기에 구체적인 정책만 포함되고 강령의 노선에 대한 것은 없었다. 이들 합당세력들은 일단 구체적인 정책대안 중심으로 통합진보당 창당강령을 만들었고 그 대신 2012년 총선 직후에 당 노선을 포함하는 강령을 다시 만들 것을 창당 당헌 부칙 제1조에 명시하였다. 이 당헌 부칙 제1조에 따라 2012년 통합진보당의 강령개정위원회는 최고위원회 직속기구였다. 반면 2011년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위원회는 최고위원회와 독립된 중앙위원회 직속기구였기 때문에 강령개정이 최고위원회 안건으로 다루어질 수 없었다.
정부가 제출한 24차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단회의 결과보고에 따르면 20123월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단은 김민웅 성공회대교수를 강령개정위원장으로 추천하고, 구 민주노동당, 구 국민참여당, 구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세력) 측 각각 2, 기타 노동 농민 빈민 학계 인사가 참여하는 강령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총선 직후 강령개정안을 제출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김민웅 전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위원회 자문위원이 위원장을 고사함에 따라 강령개정위원회가 총선 직전에 구성되었지만 위원장이 공석인 채로 실질적인 운영이 되지 못하였다. 전국운영위원회 녹취록을 보면 김민웅 교수가 위원장을 고사함에 따라 강령개정위원회는 위원장도 선임하지 못하지 못한 채 실제 회의는 두 차례밖에 하지 않았다. 결국 강령개정위원회 기획단이 중심이 되어 실무적으로 개정안을 마련하고 공동대표단이 안건으로 논의하여 결정하는 방식으로 강령개정이 진행되었다(헌법재판소, 2014). 31차 대표단회의결과와 32차 대표단회의결과를 보면 강령 초안의 문장까지 대표단에 보고되고 대표단이 토론하여 수정지시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20124월 총선 직후 강령개정위원회는 공동대표단에 강령개정초안을 제출하였고, 공동대표단에서 수차례 개정안을 논의하였다.
둘째, 정부는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다른 세력은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강령 개정에 동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법무부, 2014b: 12). 국민참여당과 통합연대 주요 인사들은 김일성을 포함하여 다양한 인사들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었지만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같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에 동의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2011년 처음 진보적 민주주의를 도입할 때는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당내에서 논의된 바 없었으나, 통합진보당이 20125월 진보적 민주주의를 도입할 때는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이미 당내외에 알려진 상태였다. 먼저 20118월 노항래 당시 국민참여당 정책위원장이 참석한 한국진보정치 이념의 공통점과 차이점토론회에서 김장민이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언급하였다.
201254일 통합진보당의 정책위원회 공동의장인 노항래 전 국민참여당 정책위원장, 신언직 전 진보신당 정책위원장이 강령개정 초안에 대한 진보정책연구원과 정책위원회의 공동토론을 주관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0순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이 강령 개정안의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설명하였다. 또한 김장민 연구위원은 진보적 민주주의 어떻게 볼 것인가?를 발제하면서 미국 민주당 좌파, 김일성, 박헌영,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소개하고 조봉암의 민주적 사회주의나 민중당의 민중민주주의 역시 내용적으로 진보적 민주주의와 같다고 밝혔다. 또한 김장민 연구위원은 진보적 민주주의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라는 강령 초안은 문제가 있다는 점, 극우세력이 민주노동당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같다고 이미 공격한 점에 비추어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도입하면 향후에 이념공세를 받을 수 있다면서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 토론회 마무리에 노항래, 신언직 공동의장이 박0순 부원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 대신에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 건설로 수정하기로 하였고, 노항래 의장이 이와 함께 12개 수정사항을 조준호, 이정희, 심상정, 유시민 공동대표에게 건의하였고, 대표단이 이를 수용하였다(통합진보당. 2013). 그 결과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 건설이 강령초안으로 성립되어 제10차와 제11차 전국운영위원회에서 2차례 토론된 후 중앙위원회에 상정되었다. 하지만 512일 중앙위원회가 폭력사태로 파행으로 치달으면서 실질적으로 논의하지 못한 채 의장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과되었다. 통합진보당은 분열사태 후 2013629일 정책당대회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정치노선으로 선언하고, 당헌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삽입함으로써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재확인하였다.
또한 통합진보당의 강령은 2차례 전국위원회 토론, 5-6 차례 대표단회의를 통해 민주노동당 이외의 세력들도 충분히 그 의의를 알고 있었다. 특히 강령의 마지막 수정인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 건설이 노항래 전 국민참여당 정책위원회 의장이자 당시 통합진보당 정책위원회 상임의장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정부의 주장은 부당하다. 특히 운영위원회 회의 자료에서 보듯이 운영위원회에서 좀 더 토론이 필요하다고 반려하였다는 것은 운영위원들이 강령개정안의 내용을 인식하고 차기 회의에서 토론한 후 통과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 건설에 대해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 출신들이 모르고 통과시킨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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