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보적 민주주의와 민주적 기본질서

1) 민주적 기본질서와 자유민주주의
 
독일의 헌법인 독일기본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freiheitlichen demokratischen Grundordnung)는 헌법의 핵심적인 내용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와 무관하다. 왜냐하면 독일에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와 다른 개념이고 이 양자가 모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가 근대 자본주의에 기반한 이데올로기라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특정 이데올로기가 아닌 헌법의 핵심 내용이다.

독일기본법은 헌법의 핵심표지로서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기본질서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여기서 자유는 자본주의 사상에 기반한 것이기보다는 구속이나 제약이 없는즉 전체주의나 독재에 반대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그 자체가 아닌 전체주의 체제 혹은 독재체제이며 독일에서는 나치를 지칭한 것이었다. 우리 헌법 제 84항의 민주적 기본질서와 통일의 원칙을 선언한 헌법 제4조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역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는 특정 이념이 아니라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기본질서(free and democratic basic order), 즉 헌법의 핵심 내용으로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이다.
정당해산의 기준으로서 헌법 제84항의 민주적 기본질서는 민주주의제도의 핵심인 정당보호를 위해 좁게 해석해야 한다. 즉 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이든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이든 자유와 평등을 상호보완하려는 헌법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핵심적인 공통사항을 말한다.
따라서 민주적 기본질서는 헌법 전문, 우리와 독일의 헌법재판소 결정 등을 고려할 때 국가주권의 불가침성, 국민주권, 기본권 보장, 평화통일, 권력분립, 사법권 독립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소수의 지배를 부정하고 다수의 지배를 보장하는 핵심적인 민주주의제도에는 의회제도, 정당설립의 자유, 복수정당제, 자유선거, 폭력혁명이 아닌 평화적인 정권교체, 사법부의 독립, 권력분립 등이 포함된다. 사유재산의 보장은 기본적으로 인정되나 자유경쟁이나 시장경제는 그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한 상당한 정도의 제한을 헌법 스스로 상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헌법상 자유민주주적 기본질서라는 단어는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4·19의거 및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라는 유신헌법 전문에 처음 도입되었다.
독재와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나치와 별단 다를 것이 없는 박정희 반공 독재체제의 유신헌법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와 혼용되면서 오남용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헌법적 반성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헌법은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에서 보듯이 민주개혁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토대로 추가하고 있는데, 이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형해화했던 과거 권위주의를 극복하려는 헌법적 의지이다.
통합진보당의 강령개정해설서가 비판하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그 문맥상 자본주의에 기반한 이념으로서 자유민주주의이지 헌법에서 말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아니다.
또한 통일방안과 관련해서도 우리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만을 상정하고 있을 뿐 자유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 등 특정 이념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통일방안이 위헌이 되는 것은 특정 이념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상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기본질서를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정부의 통일방안이나 통합진보당의 통일방안이나 남북이 합의한 통일헌법을 국민들의 자유로운 총투표에 의해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통일방안이 헌법의 기본질서에 반한다고 볼 수 없다.
정부는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이 우리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고 이에 도전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부는 통합진보당이 현 정치체제와 일부 법제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체제부정과 법에 대한 도전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통합진보당은 문제되고 있는 정치체제나 법제도가 헌법질서 내에서 개선되기 전에 이것들에 대해 정면으로 부정하거나 무효를 선동한 바 없다. 통합진보당은 궁극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단계적 폐지를 주장하지만 현실에서는 이것을 인정한 전제에서 소파협정의 개선을 촉구하였다. 또한 통합진보당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를 인정하고 조선사회민주당과의 교류에 있어 정부의 지침에 따라 남북교류에 관한 절차를 준수해왔다. 각종 공안사건 관련자들이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한 이후 민주노동당 혹은 통합진보당의 당원이 되거나 당직자가 되었지만 이는 이중처벌이나 이중불이익 금지라는 헌법정신이나 기본권에 비추어 과거 공안사건 관련자를 당직자로 채용한 다른 정당과 마찬가지로 문제될 것이 없다. 또한 박0순 진보정책연구원부원장의 법정증언에서 확인했듯이 당사자들이 과거의 활동이나 이념과 단절하였다고 밝히고 있는 이상 당원 개인들의 과거 행적은 통합진보당의 체제부정이나 법제도에 대한 도전적인 태도와 무관한 것이다.
 
 
2)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
 
(1) 통합진보당 강령과 당헌의 진보적 민주주의
 
(i) 강령과 당헌의 진보적 민주주의 표현들
 
민주노동당 강령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단 한번 언급되었고 이는 통합진보당의 강령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통합진보당 당헌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두 차례 언급하였다.
강령과 당헌에 따르면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는 자본주의 폐해가 극복되고 자주와 평등, 평화와 통일, 민주와 복지, 생태와 성 평등 등 다양한 진보적 가치가 구현되는, 또한 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청년 여성 영세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진보적 요구가 실현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이다. 여기서 표현된 진정한 민주주의는 1954년 통합진보당과 1990년 민중당 강령에서도 사용되었다.
또한 진보적 민주주의에 의하면 민중이 정치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민중의 삶이 억압과 수탈에서 벗어나게 된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제도와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여 자유민주주의가 스스로 완전히 발전하도록 하는 한편,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는 보편적 복지, 대자본의 규제와 영세상공인의 보호, 공공산업의 사회화를 통해 극복된다.
통합진보당은 이러한 강령상 정책이 실현된 사회를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로 선언하고 있는 바 이는 통합진보당이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대안사회의 모델, 즉 국가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부가 자주적 민주정부이므로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은 일단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당면의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내용은 여운형의 진보적 민주주의 통일국가 건설혹은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와 같은 맥락이다(오문환, 2006:118). 민주노동당의 코리아연방공화국의 진보적 민주주의 역시 같은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정부는 김일성의 진보적 민주주의 내용 중 자주, 평등, 반전평화, 민주적 변혁, 연대연합, 부강통일국가건설 등이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유사하다고 하나, 이러한 주장은 다른 진보적 민주주의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나타난 주요 가치와 과제들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다양한 정치세력에 의해 제기되어왔기 때문에 그 자체가 특별히 사회주의적 성향이나 종북적 성향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은 국가비전을 실현하는 대안적인 정책이므로 인민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단계적 혁명이론과 무관하다. 또한 통합진보당은 다른 보수정당과 경쟁하는 다당제를 상정하고 있는데, 이런 다당제에서 통합진보당이 인민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주장하면서 다른 정당과 선거에서 경쟁한다는 정부의 주장은 비현실적인 발상이다. 즉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정당과 정부를 결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인민민주주의나 사회주의로 단계적으로 변질된다는 정부의 논리는 국민의 정서와 우리의 정당 선거제도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억측이다.
 
 
(ii) 진보적 민주주의의 강령상 지위
 
민주노동당의 강령과 강령개정안 해설에 나타난 진보적 민주주의는 일반적인 국가상으로 선언되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강령은 진보적 민주주의와 함께 민중주권, 자주적 민주정부, 연대연합, 대중투쟁과 저항권, 주요 산업에 대한 국유화, 주한미군철수와 평화협정, 연방제 등 다양한 가치와 과제들을 나열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것들이 상호 어떤 관련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통합진보당 역시 강령에서 진보적 민주주의와 함께 민중항쟁과, 민중주권, 자주적 민주정부, 국공유화, 주한미군철수, 평화협정 등을 선언하고 연방제 통일을 공약으로 채택하였다.
그런데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으로서 추론되는 것들은 진보적 민주주의와 상관없이 원래부터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있었던 내용이다. 이를 테면 정부가 문제 삼고 있는 민중주권, 자주적 민주정부,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주한미군철수와 평화협정, 연방제 통일방안 등은 민주노동당 이전부터 1980년대 진보진영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으로서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포함되어 통합진보당의 강령에 계승된 것이다. 이를테면 1990년 민중당의 강령에는 민중 주도 자립적 경제구조, 연방제 통일방안, 주한미군철수, 평화협정체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진보정당추진위원회 강령기초위원회. 1999).
주한미군철수와 평화협정 및 국가보안법 폐지는 헌법 질서 내에서 정당이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 정책 재량의 범위 내에 있으며, 사회 일각과 학계 일부에서도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를테면 약 220개 단체가 19999월 결성된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에 가입돼 있다. 통합진보당이 이러한 정책을 북의 지령에 따라 채택하였다는 주장은 공안사건에 꿰맞춘 정부의 일방적인 추측일 뿐이다.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특정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이념과 제도를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점진적인 민주주의 발전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일 뿐이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완성된 개념으로서 사용한 적이 없다. 민주노동당이 2011년에 강령에 삽입하고 현재 통합진보당에 계승된 진보적 민주주의는 원래 독자적인 내용을 가지지 못한 것이었으나, 통합진보당이 기존의 주장과 정책을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틀 속에서 인위적으로 포장하여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당내 일부 인사들이 집권전략위원회 보고서해설,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 통합진보당 강령해설 자료집등을 통해 진보적 민주주의를 정점에 놓고 다른 가치와 과제들을 그 하위 개념으로서 설명하는 등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을 시도하였지만 당의 공식적인 승인을 얻지 못하였다(02011, 117).
 
 
 
 
(iii)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 차이
 
통합진보당은 진보적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노선을 주장하는 당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다양한 가치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공통점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하였고, 이는 크게 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건설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통합진보당의 강령과 활동이 위헌이라는 주장은 정부가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주의나 진보적 민주주의 이외에도 사회민주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가 위헌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첫째,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진보적 민주주의 사회건설로 수정되었는데, 이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과도하게 이념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표현이다.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건설>은 민주노동당 측 박0순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와 구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노항래, 신언직 정책위원회 공동의장에 의해 제기되었다.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는 민주노동당 강령의 표현이기 때문에 3당 합당의 정신을 살려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의 수정안을 전문에 반영하면서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 건설로 바꾼 것이다.
둘째, 민주노동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그대로 계승된 것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이 강령에서 주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내용이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를 주장한 진보신당 일부와 진보적 자유주의 강령을 채택한 국민참여당의 요구로 수정되었다. 통합한 3주체의 이념적 색채가 다르기 때문에 강령 전문에 다양한 진보적 가치와 진보운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다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이는 진보신당연대회의 강령 전문 제4항에 나온 문구로서 과거 사회주의의 이론과 현실을 비판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0순이 강령 개정안에서 제안한 <변혁운동><진보운동>으로 수정되었고, 정당의 이념에 <자유>가 추가되는 등 국민참여당의 진보적 자유주의가 상당부분 가미되었다. 민주노동당 시절 전문에 자주와 평등만을 나열했지만, 통합진보당은 전문에 자유, 평화, 복지, 생태, 수수자 등 다양한 가치를 병렬적으로 나열하였다.
민주노동당이 강령의 전문에서 노동자 농민만을 명시했던 것과 달리 통합진보당의 강령은 강령 전문과 본문에 있어 중소상공인과 영세자영업자를 삽입하였는데, 이는 국민참여당 강령의 기본정책 경제분야10항이 반영된 것이다.
정치분야에서는 특권과 부패청산 등 정치개혁에 관한 국민참여당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었다. 통합진보당의 강령은 결선투표와 정당명부 등 선거개혁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선거를 통한 집권의 지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당원의 정당민주주의도 추가되었다. 경제분야에서 공정무역을 주장하는 등 통합진보당이 지향하는 경제체제가 사회주의 폐쇄경제가 아니라 개방체제임을 명확히 하였다. 통일분야에서 연방제가 삭제되었고, 대신 2012년 대선공약으로 채택하였다. 육군 위주의 국방정책에서 3군의 균형 있는 발전과 국방개혁 등이 추가되었다.
셋째,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 인사들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과거 김일성도 주장한 것임을 알았지만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보통명사라는 측면에서 당의 강령으로 합의한 것이다. 국민참여당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노무현 대통령, 손학규, 유시민 등의 저서를 보더라도 미국 민주당 좌파의 노선이었던 진보적 민주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국민참여당 정책연구실. 2011). 이는 수정자본주의 혹은 제3의 길을 뜻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로 나타났다. 통합진보당 창당 전의 국민참여당의 강령 논의나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 창당된 정의당의 당명과 강령 논의에서 보듯이 진보적 자유주의 논의는 사회민주주의 논의로 확대되었다. 즉 국민참여당 계열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진보적 자유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를 포괄할 수 있는 다양한 의미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공산계열의 진보적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당의 강령으로 합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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