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리코뮌 이전의 노동계급 자기해방 원리의 형성

노동계급 자기해방의 원리와 공산주의자동맹
 
마르크스는 초기의 공산주의자동맹을 음모가 조직에서 민주적인 노동자정치조직으로 전환시켰으며, 공산주의자동맹은 정당의 맹아로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혁명에 참여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1848년 혁명 당시 프티부르주아와 농민들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와의 정치적 연대를 인정하였으나, 독일 부르주아의 배반으로 혁명이 실패한 후 부르주아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 내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적 상황이 아닌 한 봉기에 반대하며 노동자대중에 대한 선전활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노선은 칼 샤퍼(Karl Schapper), 아우구스트 빌리히(August Willich) 등 봉기주의자들과 대립하였다. 이들과의 내분은 독일 당국의 탄압과 맞물려 공산주의자동맹이 1852년 해산되는 계기가 되었다(김장민, 2014: 66~67).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자동맹과 국제노동자협회 활동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노동계급 자기해방의 과제를 살펴보면, 첫째, 마르크스는 그 당시 단결권을 획득하여 성장하고 있던 노동조합의 위상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공산주의자동맹과 국제노동자협회 시기 사이에 노동조합은 당국의 탄압을 피하고자 공제회, 교육단체, 성가대, 스포츠클럽 등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둘째,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정치투쟁의 주체로서 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정당과 노동조합의 관계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미 1846철학의 빈곤파업과 노동조합(Les grèves et les coalitions des ouvriers)’이라는 항목에서 노동자계급이 공동의 경제조건 아래서 자본의 지배에 의해 즉자적 계급으로 형성되었지만 정치적 투쟁을 통해 자본가에 대항하는 대자적 계급으로 발전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Marx, 1968: 67).
마르크스에게 있어 노동자들의 경제투쟁과 노동조합의 형성이 자본주의에 대한 즉자적 반응이었다면, 정치투쟁과 노동자당의 형성은 대자적 행동이었다. 또한 마르크스에게 있어 이런 대자적 행동을 더욱 추동하는 것은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주의자이었다. 마르크스는 일찍이공산당선언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 투쟁의 가장 단호한 추진자이고, 나머지 프롤레타리아 대중보다 앞서 있다고 밝힌 바 있다(Marx, 1989b: 474).
셋째, 마르크스는 노동자혁명 과정에서 혁명주체들이 국가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의 새로운 문제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미 공산당 선언에서 혁명 직후 생산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집중할 것을 주장하였는바, 이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국가에 대한 최초의 단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marx, 1989c: 481).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 시기에 독일과 프랑스의 혁명을 겪으면서 국가는 계급지배의 수단이므로 종국적으로 소멸되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이러한 고민에서 마르크스는 이미 1852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85235일 바이데마이어(J. Weydemeyer)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언급한 바 있다.
이글은 공산주의자동맹 시기부터 제기되었던 노동계급 자기해방 원리의 이러한 쟁점들을 국제노동자협회의 주체의 측면, 활동의 측면, 방식의 측면을 통해 자세히 검토하고자 한다.
 
 
파리코뮌 이전의 노동계급 자기해방 원리의 형성
 
프티부르주아 강령의 차단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에서 프티부르주아 강령이 채택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원래 오웬주의자 존 웨스턴(J. Weston)이 작성한 선언문 초안과 마찌니의 추종자 루이지 볼프(Luigi Wolff)가 작성한 규약 초안이 임시중앙평의회에 제출되었다. 마찌니는 공화제 민주주의 부르주아의 관점에서 계급투쟁에 반대하였으며, 그의 입장에 따라 입안한 규약초안은 비밀결사적인 중앙집권조직을 국제노동자협회에 제안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강령 초안들을 무산시켰으며, 반면 자신의 초안 두 편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마르크스는 로잔 제2차 대회를 준비하는 1867813일 총평의회(General Council) 회의에서 부르주아적 성격의 평화자유연맹(the League of Peace and Freedom)의 창립 대회에 국제노동자협회가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1868년 브뤼셀 제3차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협동조합과 상호신용은행의 창설 등 프루동주의자의 요구를 대회의 결의에 포함시키며 그들을 달래기는 했지만,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노동조합운동의 우위를 실천과정에서 일관되게 유지하였다(정운영, 1992: 21).
마르크스는 18668월에 작성한 임시중앙평의회 대의원들을 위한 개별 문제들에 관한 지침들협동노동(Co-operative labour)에서 협동조합(co-operative system) 운동은 사회변혁 역량 중의 하나이지만 전반적인 사회적 조건들이 변화될 때만 사회적 생산을 자유로운 협동조합 노동의 대규모적이고 조화로운 제도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마르크스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협동조합운동 자체가 효과적인 사회변혁 수단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라쌀(F. Lassalle)의 협동조합운동을 비판하였다.
1866년 제네바 제1차 대회에서 프루동의 소규모 사적 소유제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경제강령이 처음 제안되었으며, 2차 로잔대회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 브뤼셀 제3차 대회는 토지 광산 철도 전신 등 주요 생산수단이 사회(community)에 속해야 한다는 집산화(collective ownership) 결의를 통과시켰다(Stekloff, 1928).
바쿠닌은 상속권의 폐지가 사회혁명의 출발점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1869년 바젤 제4차 대회에서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마르크스는 대회 직전 7월 총평의회 회의에서 상속해 줄 재산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상속권에 이해관계가 없다고 지적하고 상속권은 혁명 이후에 징발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므로 혁명 전에는 폐지할 수 없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Marx, 1988i: 396).
마르크스는 총평의회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연설문을 바젤 대회에서 직접 낭독하였으며, 그 결과 바젤 대회는 바쿠닌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한편 국제노동자협회는 조직적 독자성을 유지하는 조건에서 농민이나 프티부르주아와 정치적 연대를 거부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 구성원들이 개인의 입장에서 평화자유연맹의 창립 대회에 참석하여 가능한 혁명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결정이 채택되도록 노력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브뤼셀 대회는 마르크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모든 진보적인 반전 세력들과 노동자 계급이 공동행동을 취하는 것을 찬성하였다.
마르크스가 바젤 대회에서 바쿠닌의 상속제 폐지를 반대한 것은 농민과 프티부르주아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1870419일 라파르그(P. Lafargu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상속권의 폐지를 선언하는 것은 어리석은 협박으로 농민들과 소중산계급을 반동의 진영 속으로 내 몰 것이라고 밝혔다(Marx, 1988h: 490).
마르크스가 이런 유연한 입장을 취한 것은, 혁명은 다수자혁명 내지 인민혁명’(Volksrevolution)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 및 소시민층과의 동맹정책을 추진해야 했기 때문이다(김세균, 1989). 마르크스는 이런 관점에서 1871년 파리코뮌이 약속어음에 대하여 3년간의 지불유예를 선언하는 등 도시의 프티부르주아들의 이익을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Marx, 1977: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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