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국제노동자협회에서 노동조합의 정립

대중조직으로의 발전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다양한 정파들이 공존하도록 노력하였다. 각국의 노동자단체들은 국제노동자협회의 규약에 반하지 않는 한 자신들의 강령을 유지한 채 협회에 가입할 수 있었다.

1864년 마르크스는 총평의회를 통해 영국의 노동조합들에게 국제노동자협회에 단체회원으로 가입할 것을 요청하였다. 다만 영국노동조합회의(Trades Council)와 미국의 전국노동조합(National Labor Union)은 조직적 가입을 유보하고 연대만 결정하였다. 독일의 경우 리프크네히트의 독일노동자협회연맹(Vereinstag der Deutschen Arbeitervereine)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하였으나, 라쌀의 전독일노동자협회(Allgemeiner Deutscher Arbeiterverein)는 가입을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라쌀파를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당시 독일의 법률은 자국의 노동자단체가 외국의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에 마르크스는 1865년 초 독일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가입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Institute of Marxism-Leninism of the CC of the CPSU, 1973: 424).
마르크스는 1861년 블랑키의 재판비용을 지원하였고, 1866년 총평의회의 폴 라파르그는 블랑키에게 국제노동자협회와의 연대를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이러한 노력을 통해 블랑키주의자 일부를 가입시켰다.
국제노동자협회의 회원 자격은 지방 혹은 전국조직에게만 부여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바쿠닌의 국제사회민주동맹의 지부들이 국제조직을 해체하고, 자본과 노동의 융화를 의미하는 모든 계급의 평등화라는 강령을 수정한 후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국제사회민주동맹은 마르크스의 제안을 수용하여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비밀조직으로서 국제조직을 유지하였다.
한편 마르크스와 국제노동자협회는 대중적인 정치활동을 강조하였다. 1867년 로잔 제2차 대회는 정치 투쟁을 기권하자는 프루동주의자들의 요구와는 반대로, 정치적 자유에 관한 결의안을 통해 노동자의 사회적 해방은 정치적 해방이 없이 실현될 수 없으며, 정치적 자유의 확립은 사회적 해방의 전제조건이다고 선언하였다(Eichhoff, 1988: 521).
마르크스와 총평의회는 바쿠닌과 블랑키 방식의 경솔한 봉기로 인해 국제노동자협회가 탄압받는 것을 경계하였다. 1868년 파리 지부는 불법단체구성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국제노동자협회가 봉기를 획책하는 음모가 조직이라는 정부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대중적이고 공개적인 노동자조직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총평의회는 과격한 성명을 남발하는 런던의 프랑스 망명자들과의 연계를 부인하였다.
프랑스 보나파르트 제정이 187099일 몰락한 직후, 마르크스는 총평의회 승인을 받아 부르주아공화국에 대한 환상을 경고하는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에 관한 두 번째 연설을 발표하였다. 마르크스는 이 연설에서 파리가 프로이센군에 의해 포위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막 성립한 부르주아공화국을 전복하려는 파리 민중들만의 봉기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오히려 새로운 공화주의적 자유를 활용할 것을 권유하였다(Institute of Marxism-Leninism of the CC of the CPSU, 1973: 471). 마르크스는 1881222일 니웬호이스(F. D. Nieuwenhuis)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파리코뮌을 회상하면서 같은 견해를 표명하였다(Marx, 1989c: 160).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에서 노동자대중의 정치활동으로서 선거참여와 의회활동을 경시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1878영국이나 미국에서 노동계급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한다면 노동계급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발전에 방해가 되는 법률과 제도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평화적인 변혁은 지배권력자 측에서 폭력적인 방해를 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가능할 뿐이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반항할 경우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보았다(Rubel, 1990: 190).
역시 엥겔스에 따르면 인민의 대의기관이 전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고, 인민다수의 지지가 있을 경우 원하는 모든 일을 합헌적으로 행할 수 있는 프랑스, 미국, 영국의 경우, 낡은 사회가 보통선거를 통해 새로운 사회로 평화적으로 이행할 수도 있다(Engels, 1989d: 234).
 
 
자기해방 주체로서 노동조합의 정립
 
마르크스는 노동조합이 자연발생적인 투쟁조직으로서 정당과 별개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며 경제투쟁과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무시한 프루동, 라쌀, 바쿠닌을 비판하였다. 마르크스는 18656월 임시중앙평의회에서 임금, 가격, 이윤에 관한 특별보고를 하였고, 국제노동자협회 총무위원회 존 웨스턴 위원과의 논쟁에서 상품가격이 임금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을 격파하였다(Marx, 1988a: 367).
마르크스의 보고는가치, 가격, 이윤이라는 책자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책자에서 일정한 잉여가치 내에서 임금과 이윤이 반비례관계에 있으므로 노동조합은 임금인상 투쟁으로 상품가격의 인상 없이 고용주로부터 잉여가치의 보다 많은 부분을 얻어낼 수 있음을 논증하였다(Marx, 1969: 23).
마르크스는 18668월에 작성한 임시중앙평의회 대의원들을 위한 개별 문제들에 관한 지침들노동조합 - 그 과거, 현재 미래에서 노동조합은 먼저 자본과 노동사이의 게릴라 전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임노동과 자본 자체의 폐지를 위한 조직된 힘으로서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마르크스의 지침은 18669월 제네바대회에서 노동조합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총평의회보고서로서 승인되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1867년 파리 놋쇠 작업장 폐쇄, 1868년 제네바 파업에 있어 노동조합들에게 투쟁기금을 전달하고 법적인 자문을 해주었으며, 그들이 원할 경우 노동조합을 대신하여 사업주와의 단체협상까지 담당하였다. 국제노동자협회의 도움으로 파업이 성공하자, 해당 노동자단체들은 국제노동자협회에 연이어 가입하였다. 그 결과 프루동주의자들은 노동조합과 파업에 대한 소극적인 노선을 국제노동자협회 내에서 더 이상 관철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의 입장을 반영한 1866년 대회의 총평의회 보고서는 노동자당의 역할로 볼 수 있는 것들까지 노동조합의 역할로 강조하였다. 이는 그 당시 노동자 정치운동이 막 시작한 때라서 독자적인 사회주의자 정당이 없었기 때문에 국제노동자협회가 스스로 노동자의 정치적 대표자라고 자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일국적인 사회주의자 정당이 출현하여 국제노동자협회의 역할을 대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Stekloff, 1928).
실제로 1867년 제2차 로잔대회는로잔대회 의제에 관한 결정을 통해 경제 투쟁과 파업에 관한 제네바 대회의 결의안을 확인하면서 노동자계급이 자본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자 하는 투쟁에 있어 국제노동자협회가 공동의 중심 센터이다고 선언하였다(Marx, 1988d: 203).
 
 
조직민주주의
 
국제노동자협회가 애초에 느슨한 연맹체로서 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를 노동자당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초기의 국제노동자협회는 엄격한 중앙집권적 민주주의에 근거하지 않았다. 국제노동자협회의 대회는 회원인 노동자단체의 대표들과 노동자단체의 신임장을 소지한 대의원들로 구성되었다. 각 지부는 크건 작건 한명의 대표만을 대회에 파견할 수 있었다. 또한 초창기에 대의원은 여러 단체의 신임장을 받아도 한 개의 투표권만 있었다.
18659월 런던 회의에서 프루동주의자들은 협회의 어떤 회원도 대회에 참여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런던 회의는 정식 발족되어 회비를 납부한 지부들의 대표만 대회에 참석할 수 있다는 대표제 원칙을 확인하였다(Eichhoff, 1988: 520).
또한 프랑스에서는 20인 이상의 결사를 금지하는 법률로 인해 합법적인 노동조합이 불가능하였고 이로 인해 프랑스 회원들은 단체의 신임장을 받아오지 못했지만 파리 지부의 대의원으로서 1866년 대회에 참여하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영국 대의원들이 우리는 수천의 회원이 있는 지회의 대표자로 참석했다면서 대표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대회는 신임장이 있는 대의원들에게만 토론과 투표에 참여할 권리를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민주주의를 조직 규율의 전제조건으로 보고 있었으며, 개인적인 권위주의에 반대하였다. 독일의 리프크네히트가 1865년 런던 회의에 마르크스 자신을 과찬하는 보고서를 내고자 하였으나, 마르크스는 리프크네히트에게 서신을 보내 이를 중단시켰다. 또한 국제노동자협회는 제2차 로잔 대회에서 가리발디가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대회는 어떤 개별 인사에게 경의를 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Eichhoff, 1988: 342).
그 당시 전독일노동자협회의 회장인 슈바이처가 라쌀주의자들이 결성한 노동조합의 의장을 겸임했는데, 그는 노동조합은 정치단체의 이데올로기에 제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마르크스·엥겔스, 1988: 54). 마르크스는 186810월 슈바이처에게 쓴 편지에서 권위에 의존적인 독일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내에서 자주적으로 활동하게끔 인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면서 노동조합 내에 중앙집권적인 라쌀주의를 이식하려는 것을 비판하였다(Marx, 1988f: 134).
드레이퍼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자본가인 노예소유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언급했지만 내부 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특징으로 파악하였다. 마르크스는 1873212일 볼테(Bolte)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쿠닌주의자들이 인터내셔널 안에서 공개적인 반대활동을 하는 것은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Marx, 1988e: 476).
다만 마르크스는 러시아혁명 시기의 레닌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노동자 조직 내 자율성과 민주주의는 다양한 조건에서 다른 수준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Draper, 1999).
엥겔스는 노동자운동 자체가 현 사회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 조직 내에서 비판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으며, 특히 1890년에 이르러 대중정당으로 성장하고 있는 독일사회민주당에 대해 당내 민주주의와 토론을 보장할 것을 강조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엘리트에 의한 위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상정하고 있었다. 엥겔스는 블랑키의 혁명적인 독재는 전체 혁명적 계급의 독재가 아니라 소수나 1인의 독재 아래 미리 조직되어 쿠데타에 성공한 소수 그룹의 독재이다라면서 블랑키식 소수 음모가의 봉기와 독재를 비판하였다(Engels, 1989a: 529).
국제노동자협회 총칙이 선언하고 있는 노동계급 자신에 의한 해방이라는 원리는 스탈린주의 정당 등 엘리트정당과는 양립할 수 없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태도는 트로츠키가 지적하였듯이 당이 계급을 대리하고, 중앙위원회가 당을 대리하고, 결국은 최고권력자가 당과 국가, 나아가 계급을 대리하고 지배하는 대리주의와 거리가 멀었다(Cliff, 1982: 192).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전형으로 보았던 파리코뮌 역시 다양한 정치조직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파리코뮌의 92명의 의원들은 블랑키주의자와 프루동주의자 등 다양한 정파에 속해 있었으며, 이중 국제노동자협회 소속 의원은 22명에 불과하였다. 이들 의원들은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역시 언제든지 선거에 의해 해임될 수 있는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Cole, 1970: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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